정원에서의 질문 -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
김풍기 지음 / 그린비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원에서의 질문은 무엇일까? 아니 정원에서 옛 선비들은 어떤 질문을 했을까? 저자 김풍기는 옛 사람들이 지냈던 뜰, 자신이 살았던 뜰은 몹시 작고 소박할지는 몰라도 거기서 만난 우주 삼라만상과 드넓은 사유의 지평은 장엄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제가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정원에서의 질문은 이곡(李穀), 서거정(徐居正), 안평대군, 이수광, 미수 허목(許穆), 문무자 이옥(李鈺), 천수경(千壽慶), 장혼(張混), 박죽서(朴竹西) 등의 정원 관련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일상 언어 생활에서 가장 친숙한 단어는 정원(庭園)이라 말한다. 저자는 이황의 제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 - 1587)의 용례를 제외하고 대체로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사람들이 사용한 용어가 정원이라 설명한다. 원림(園林)은 집 안의 공간 및 집 주변의 숲을 두루 의미한다. 고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원보다 원림이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포함한다.(39 페이지)


저자는 뜰이라는 단어를 전문용어로 쓸 것을 제안한다. 박은영의 말대로 마당은 평소에는 비워 두지만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곳이기에 뜰이란 단어가 적당하다.(41 페이지) 집 울타리의 경계를 넘어서 주변의 숲까지 연결되는 개념으로 뜰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울타리 경계 안을 지칭할 때는 유용하다. 부제인 뜰은 좁지만 질문하는 인간은 위대하다는 허균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누추하고 초라한 집에 산다고 해도그곳에 군자가 살고 있다면 문제가 있겠는가?”가 그것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저자는 문신호령 가금불상(門神戶靈 呵禁不祥)이란 입춘방을 써 붙인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대문을 지키는 신령이여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꾸짖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란 의미다. 이곡이 살았던 고려 후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시기이며 국정 문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의종 때 일어난 무신란을 시작으로 고려는 제국으로서의 풍모를 잃고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들은 원나라가 국가의 학문으로 생각한 성리학을 한층 깊이 공부하는 한편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해 급제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곡은 어려운 사정 때문에 관직 생활을 저버릴 수 없었다. 가난한 이곡에게 귀거래(歸去來)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곡은 환해(宦海) 또는 환해풍파를 떠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곡이 마당 한켠에 작은 텃밭을 마련한 것은 원나라의 수도 북경에 머물던 1342년이다. 이곡은 원나라 과거인 제과(制科)는 물론 고려의 과거에도 급제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곡이 원나라에 간 것은 지원(至元)에서 지정(至正)으로 연호를 바꾼 원나라 순제를 축하하는 충혜왕의 축하 표문인 하개원표(賀改元表)를 받들고서였다.(본문에는 '하기원표賀改元表'라 나오는데 이는 오류인 듯 하다. 는 고칠 개란 글자로 이는 원나라가 원표를 바꾼 것을 반영하는 바른 단어이다.) 저자는 정원에 대해 상세히 잘 아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경험이 많은 듯 하다. 저자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관심과 손길을 준다 해도 작물 성장과 결실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자연이 주는 거대한 혜택이나 재해라 말한다.(57 페이지)


이곡은 자신이 돌보는 채마밭에서 소출이 적게 나오자 천하의 작황을 근심했다. 이는 노자가 말한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불출호정지천하; 不出戶庭知天下)'는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61 페이지) 서거정편에는 대마망북(代馬望北)이란 말이 나온다. 변방에서 태어난 말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같은 의미로 호마망북(胡馬望北)이란 말도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팽택령(彭澤令)으로 근무하던 중 지역을 감찰하러 온 관리를 접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봉록으로 받는 쌀 다섯 말 때문에 이런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쓴 글이다.


서거정 만큼 귀거래를 시문으로 노래했던 사람도 드물다.(67 페이지) 서거정은 세종 대에 벼슬을 처음 시작한 이래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45년간 외직을 거치지 않고 오직 서울에서만 지낸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서거정은 한양 주변의 여러 시골에서 별서(別墅)를 운영했다. 그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은 불암산 부근이라는 양주 토산 별서와 한강 옆 광진 부근의 몽촌 별서다. 서거정에게 뜰은 권력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아름다운 자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서거정은 소나무, 대나무, 연꽃, 매화(松竹蓮梅)를 원중사영(園中四詠)으로 읊었다. 서거정은 집 뜰 안의 정자를 사가정(四佳亭), 뜰을 사가원(四佳園)으로 지칭했다. 저자에 의하면 은거(隱居)는 대체로 속세에서 바쁜 사람들의 미래 모습으로 제시된다.(77 페이지) 서거정은 자신의 집을 유거(幽居)라 표현했다. 원래 산속 깊은 곳에 있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귀거래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서거정은 은거지와 같은 공간을 자신의 별서에 마련했다. 사람들은 별서에서 경영하는 뜰이 아무리 아름답고 고요하다 한들 귀거래를 할 수 없기에 벼슬 속으로 은거하는 이은(吏隱)을 감행했다.('시은; 市隱'은 저잣거리에 은거하는 것으로 가장 위대한 은거라고 칭해진다.)


덕이 높고 어진 사람이 낮은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과 상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저자는 가장 화려한 시절에 가꾼 안평대군의 뜰을 조명한다. 저자는 고려 말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오는 청학동(靑鶴洞)이 무신의 난이 가져온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고 싶은 지식인들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라면 안평대군을 비롯한 그 주변의 문인들에게 무릉도원은 무슨 의미였을까? 묻는다. 안평대군에게 비해당(匪懈堂)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의 대체물로 보인다. 비해당은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내린 당호다. 비해(匪懈)는 시경과 장재의 서명에 나오는 이름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뜰에 꽃과 나무를 심고 귀한 식물도 사이사이에 넣어 비해당 뜰이 저절로 차별화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96 페이지) 안평대군이 가장 친애했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끝내 지켜내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를 보자.“손수 심은 오동나무/ 봄이 되자 푸른 잎 가지런하다/ 언제나 완전히 자라서/ 가지 위에 봉황새 와서 깃들려나,“...


특별히 정치적 의미를 담지는 않았지만 안평대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를 바라거나 안평대군이 자신의 능력을 활짝 펴는 날을 기대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98 페이지) 안평대군이 비해당 뜰에 구현한 무릉도원 혹은 이상향은 동시대의 가장 빛나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석가산(石假山) 이야기를 하자. 조선 전기 문인들의 글에 석가산 관련 기록에 제법 있다.(109 페이지) 조선 전기 문인들 중 제법 이름이 난 사람들 중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자신의 뜰에 석가산과 같은 것을 조성해 놓고 즐기는 풍조가 있었다.


시은(市隱), 귀거래(歸去來)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석가산으로 뜰을 꾸미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가산(假山)을 꾸민 기록이 있다. 명산을 오르고 바다를 보며 유서 깊은 고적을 두루 돌아봄으로써 호연지기를 기르고자 하는 기행(紀行) 열풍이 일어난 것은 15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그 중심에 성임, 성현, 채수, 서거정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행은 천하의 대관(大觀)을 돌아보는 '수양과 풍류가 공존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석가산 조성은 집 안으로 자연을 가지고 와 자연의 정취를 그대로 즐기는 방편이었다.


걷지 못해 부득이 산수화를 모아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아 한 것이 석가산 조성이다. 기묘한 돌과 항아리, 주변을 흐르는 물을 활용하여 자기만의 완벽한 자연을 구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화초와 나무들을 심어 석가산이 자연의 축소판일 뿐 아니라 완벽한 원림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하였다.(116 페이지) 가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돌로 만드는 석가산, 옥을 이용하여 만드는 옥가산, 나무뿌리를 이용하여 만드는 목가산 등이다.(박경자의 조선 시대 석가산 연구라는 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석가산 조성은 대체로 도선(道仙)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보였다. 무릉도원은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가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동굴을 지나야 만날 수있거니와 괴석문화와 관련을 가진 석가산은 이상향의 축소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127 페이지) 지봉 이수광도 뜰을 만들었다. 그의 당호는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비우당(庇雨堂)이다. 겨우 바람과 비를 가린다는 의미의 근비풍우(僅庇風雨)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외가쪽 선조(先祖) 유관(柳寬)의 청백리로서의 면모를 함축한다.


이수광은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다. 지방관을 끝내고 잠시 한양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이수광이 계축옥사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면서 택한 은거지가 비우당이다. 이수광은 비우당 앞뜰을 동원이라 칭했다. 작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각이 작은 공간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서책이 있었고 문자를 통해 내가 여행한 옛 성현들의 정신세계를 정리하거나 새롭게 펼쳐낼 수 있었다. 들뢰즈는 이를 앉아서 유목하기로 규정했다. 이수광의 동서는 허균이다. 엄청난 장서가였던 허균의 책이 역모로 죽은 뒤 이수광에게 전해졌다.


이수광은 허균의 동서였기에 허균이 이이첨 권력에 협력하면서 승승장구할 때 협력할 만도 했지만 은거를 택했다. 지봉(芝峯)은 비우당 부근의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다.


저자는 꼬장꼬장하고 근엄하기 그지없었던 미수의 삶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기록한 글을 발견한 것을 뜻밖이라고 설명한다. 미수가 살았던 시대는 격변기였다. 미수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절에 태어나 중년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미수가 경기도 연천에 자리를 잡은 시기는 부친 복상(服喪)에 참여한 시기로 보인다. 미수는 16332월 장례를 치른 후 3년상을 충실히 바쳤다. 복상이 끝난 이듬해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12월 강원도 영동을 기착지로 해 피난했다. 이 때로부터 약 10여년을 떠돌며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우거(寓居)하다가 52세 때인 164612월 연천으로 돌아왔다.


미수가 삼척부사를 사직하고 연천으로 돌아온 것은 68세 때인 1662년이다. 미수는 이듬해인 1663년 십청원기라는 글을 썼다. 십청원은 미수의 뜰 이름이다. 전나무, 측백나무, 박달나무, 비자, 노송, 만송, 황죽, 두충 등은 그가 십청원에 심은 가지가 길고 잎이 푸른 것들이다. 예송논쟁에서 미수는 윤휴와 함께 3년상을 주장했다. 십청원기를 쓴 것은 예송논쟁 당시 미수가 지니고 있던 마음속 풍경을 보여주는 단서이자 그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은 데 따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미수는 산수유람을 좋아하지만 늙어 그것을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봉우리와 고개를 만들고 사이사이에 풀과 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미수는 천하의 산수를 모아 놓은 석가산이 있는 뜰에서 꽃의 영고(榮枯)를 보며 차라리 늘 푸른 나무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미수의 뜰에는 나무, 풀 외에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다. 운은행(雲銀行), 녹나무, 풍향, 오동나무, 매화, 정향, 모란, 작약, 사간(射干), 파초, 석창포, 국화... 미수는 강회백의 정당매를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미수는 용주 조경에게서 대년누자를, 한산옹 송석호에게서 대년매화를 받아 뜰에 심었다. 밑둥이 오래 묵은 매화를 대년매화라 하고 노란 꽃술에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대년누자라 한다.


미수는 푸른 꽃받침으로 피는 청악매(靑萼梅)를 좋아했다.(은 꽃받침 악이다.) 미수가 살았던 연천은 미수 외에 사대부라고는 누구도 살지 않았던 곳이다. 미수는 연천에서 20년을 살며 느낀 숲속 생활의 흥취를 열 가지로 정리했다


1) 3월에 산꽃이 만발하면 바위 모퉁이에서 산새들이 서로 지저귀는 것. 2) 숲이 깊어 해가 늦게 떠서 그늘진 벼랑으로 간밤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것. 3) 새벽녘 해가 뜰 때 첩첩한 산 쪽으로 맑은 노을이 드리운 것. 4) 비 그친 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 5) 비가 개고 앞 개울에 물이 불어나면 낚시터로 걸어나가 낚시줄을 손질하는 것. 6) 시내 바람이 비를 불러오거나 떨어지는 저녁 햇살이 산을 감싸는 것. 7) 저물녘 산 기운이 더욱 아름답고 숲 너머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만들어내는 어슴푸레한 빛. 8) 달밤에 움직이는 뭇 것들이 모두 고요해지면 홀로 앉아 숲 그림자가 춤추는 것을 감상하는 것. 9) 가을날 해 저문 골짜기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단풍 든 붉은 나무는 천 겹으로 서 있는 것. 10) 쌓인 눈이 온 산에 가득한데 시냇가 울창한 소나무는 푸른빛으로 사랑스러운 것.


문무자(文無子) 이옥은 소품문을 쓰지 말라는 정조(正祖)의 어명을 어겨 처벌받은 인물이다. 이옥이 만년에 터를 잡고 여생을 마치려 했던 곳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와룡산 기슭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어 느긋하게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구절을 좋아했다. 이옥도 도연명의 시문을 읽고 자신의 뜰에 도연명의 문학적 풍경을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당시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를 택하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표현하는 시대였다.


이옥의 글에는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등장한다. 이옥은 자칫 정치적인 문제를 건드려서 죄인이 될 수 있을 천문, 지리, 인간, 성리학이 아닌 집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한 자연 속 삼라만상에 눈을 돌렸다. 이는 그가 평생 관심을 기지고 써 왔던 소품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천수경(千壽慶; ? - 1818)은 조선 후기 여항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여항(閭巷)은 도시의 좁고 굽은 골목을 의미하기도 하고 일반 백성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수경은 시사(詩社)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모임이 그것이다. 여항문학의 주요 구성원들은 중인(中人)과 서얼(庶孼)들이다. 18세기 전반 여항문학인들은 주로 한양 인왕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곳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의 서쪽에 해당하기에 서촌(西村)이라 했지만 옥류동(玉流洞), 필운대(弼雲臺) 등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중심으로 다르게 칭하기도 한다.


중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굳이 여항인이라고 하는 것은 중인들과 서얼들이 함께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40 페이지) 우리 문학사에서 여항인이 부상(浮上)한 것은 17세기 최기남을 중심으로 하는 삼청시사(三淸詩社)부터다. 최기남은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 집안의 궁노 출신으로 시를 짓는 능력 때문에 당대 양반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뿐 아니라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 천수경은 송석원 시사를 이끌었다. 옥류동 계곡이 처음부터 중인들의 터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임병(壬丙) 양란 이후 장동김문(壯洞金門)으로 알려진 김상헌 집안이 터를 잡고 살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상헌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친의 눈병 치료를 위해 샘물이 좋은 옥류동 골짜기로 들어왔다. 천수경의 뜰은 많은 벗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멋진 글을 낭송하면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살롱인 셈이었다. 송석원 시사의 범례에 글로 모이고 신의로 맺는다(회이문사 결이신의; 會以文詞 結以信義)란 구절이 있다. 이이엄(而已广) 또는 공공자(空空子) 장혼(張混)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반드시 자신만의 뜰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평생 버리지 않았던 문인이다. 그는 마침내 작은 뜰 하나를 만들었다. 천수경이 송석원 시사의 맹주(盟主)였다면 장혼은 송석원시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막후 실세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장혼은 누리고 싶은 청복(淸福) 여덟 가지를 꼽았다. 그중 하나가 계곡 한 구역을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꽃과 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즐기는 것이다. 이이엄은 장혼의 호이기도 하고 그의 당호이기도 하다. 이이(而已)는 뿐이다, 그만이다라는 의미이고 엄(广)은 집을 의미한다.


혼자 지낼 때에는 헌 거문고를 만지고 고서를 뒤적이면서 그 사이에서 생활할 뿐이고, 생각이 나면 나가서 산속을 거닐 뿐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을 차리라 하고 시를 읊을 뿐이고, 흥이 나면 휘파람 불고 노래 부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을 뿐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물을 마실 뿐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을 뿐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쉴 뿐이다. 비 내리는 아침과 눈 오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등 그윽한 거처의 신비한 정취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 주기 어렵거니와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날마다 혼자 즐기다가 자손들에게 남겨 주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 이룰 뿐이다. 운수나 목숨의 차이는 나의 천명에 맡길 뿐이다. 그래서 나의 집을이이(而已)’라고 명명한다...“란 글을 보면 이이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박죽서(朴竹西)19세기를 살았던 여성 시인이다. 그는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이끌었다. 저자는 박죽서의 뜰을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뜰이라 표현했다. 유박(柳璞, 1730~1787)은 꽃에 미친 선비로 불리는 사람이다.


책의 마지막 순서는 여암 신경준편이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은 전라도 순창을 근거지로 삼아 한양과 경기의 여러 지역에서 지내며 관직 생활 및 저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신경준의 뜰은 순원(淳園)이라 불렸다. 내게 신경준은 지리학자로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산경표는 신경준이 편찬한산수고문헌비고<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지리서다.


신경준은 사람이 사물을 대함에 그 이름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은 이름 너머에 있다....내게 꽃이 있는데 좋아할 만한 것을 구하였다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하여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란 말을 했다.


'정원에서의 질문은 저자 자신의 정원 및 꽃, 나무 등에 관한 경험이 바탕을 이루는 좋은 책이다. 정원에서의 질문을 통해 새롭게 만난 인물이 안평대군이다. 그를 비해당(匪懈堂)과 연결지어 이야기했을뿐 정원 관련 부분을 반영해 해설하지 못해 아쉽다. 이런 점은 송석도인 천수경(千壽慶)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바이다. 안평대군, 천수경 공히 서촌에서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이엄 장혼 역시 그렇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반영해 해설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김갑동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갑동의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는 36개의 파트로 이루어진 책이다. 각 파트당 두 인물을 대비시킨 책이다. 1부 고대 속으로, 2부 고려 속으로, 3부 조선 속으로, 4부 근.현대 속으로로 이루어졌다. 각 매치업에는 제목이 붙었다. 가령 왕건과 견훤에 대해서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은 무엇인가’가 붙었다. 첫 편에서는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이 만났다. 장수왕의 증조부 고국원왕과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근초고왕이 붙은 것이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만난 챕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는 언제부터 앙숙이었을까란 제목이 붙었다. 


백제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실시하자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성왕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겼다. 백제의 뿌리를 찾아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과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는 오랫 동안 이어온 양국의 동맹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구려의 히틀러 연개소문이란 명명이 눈에 띈다. 보장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할뿐 고구려의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기란 이름으로 만났다.


원효는 진덕여왕 4년(650년)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나 요동에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히는 고초를 겪고 겨우 돌아왔다. 이후 문무왕 원년(661년)에 백제가 멸망하여 서해안 통로가 열리자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다. 당항성으로 가던 도중 오늘날의 충남 직산 부근을 지나다가 심한 폭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우연히 찾은 토굴에서 하룻밤을 편히 쉬었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토굴이 아니라 무덤이었다. 계속된 폭우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는데 귀신이 나오는 듯 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같은 장소인데도 어제는 편안하였고 오늘은 이렇게 불안하고 무서운가? 


이로부터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의상은 무열왕 8년(661년) 원효와 헤어져 중국으로 건너가 화엄종의 대종사인 지엄에게 화엄교학을 전수받았다. 의상은 완고한 골품제 사회 속에서 평등을 강조하였으며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하였다. 원효는 617년생, 의상은 625년생이다. 원효는 6두품 출신이었고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다. 원효는 세속적인 사랑을 하기도 했으나 의상은 단아한 수행자의 자세를 지켰다. 원효는 불교뿐 아니라 노장사상이나 의술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나 의상은 화엄학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같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면서 배움을 같이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했다. 


견훤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甄)씨라 하였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경주에서 비장(裨將; 부지휘관)이 되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전주)에 순행하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했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태어났으나 20세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왕건은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아버지와 함께 귀순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충성을 다해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왕건의 남진정책과 후백제 견훤의 북진정책은 나주 일대에서 충돌했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왕건은 신라를 도우려다가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는 것에 힘입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왕건이 승기를 잡은 것은 고창(古昌; 현 안동) 전투다. 왕건은 고창전투에서 견훤을 대파한 후 신라를 무력으로 접수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순해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심지어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견훤도 받아들였다. 왕건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언제나 공명정대했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인정하여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교류를 끊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만난 최승우 vs 최언위 편이 재미 있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 최가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다. 최승우는 견훤의 휘하에 들어갔고 최언위는 왕건 휘하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실력 대결은 태조 10년(927년) 공산전투가 끝나고 왕건과 견훤 사이에 오고간 국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공산전투에서 크게 이긴 견훤은 그 해 12월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면서 왕건을 은근히 위협하였다. 이 국서는 최승우가 중국에서 배운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쓴 글이다. 


왕건은 태조 11년(928년) 정월 후백제에 답신을 보내어 자신의 건재함과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여러 고사를 예로 든 것이나 문장의 구성력 등을 보면 최언위 외에는 쓸 수 없는 것이다.(118 페이지) 국서를 주고받은 뒤 치른 고창전투에서 왕건은 대승을 거두었다. 최언위의 글이 신라인들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그들이 왕건을 도운 덕택이었다. 최언위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지도자에게 전달했다. 


의를 따르는 길, 이익을 따르는 길에서 만난 사람은 박술희와 왕규다. 박술희는 충남 당진 면천(沔川) 출신이다. 면천은 복지겸의 고향이자 해상 무역의 요지였다. 그러므로 같은 해상 출신인 개성의 왕건이나 태조의 왕비 나주 오씨와 친밀해질 수 있었다. 박술희는 태조 왕건의 장남인 무(武)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무의 어머니의 집안은 측미(側微)했다. 신분적으로 미천하고 권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왕규는 무(武; 혜종)의 장인이자 외조부였다. 태조는 정치적으로 우세한 왕규의 딸을 무와 맺어줌으로써 무의 측미함을 보완해주려 했다. 


성종 대에 거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러 간 사람은 합문사 장영이었다. 소손녕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를 자신에게 보냈다며 화를 냈다. 이에 서희가 낙점되었다. 소손녕은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 그대 나라가 우리 땅을 점령하였고 우리의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그런 고로 우리가 친히 출병한 것이다. 만일 땅을 베어서 바치고 조공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희는 “아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수도를 세운 것이다. 땅의 경계로 본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우리 경내에 있는데 어찌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는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의 경내인데 여진이 그 사이를 막아 조공을 바치지 못했다. 여진을 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요새를 쌓고 도로를 이으면 왜 수교하지 못하겠는가. 장군께서는 나의 말을 당신 나라 임금에게 전하시오”라고 말했다. 고려가 평양에 수도를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서희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았다는 의미거나 소손녕이 고려의 사정을 잘 모르리라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과의 외교를 끊기로 하였다. 대신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를 얻는 실리를 챙겼다. 요나라 장군 소손녕과 비교했을 때 약소국의 대신 서희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80만 대군 속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승리한 것은 서희였다. 그는 풍부한 지식과 조리 있는 말로 대군을 물리치고 피 한 방을 흘리지 않고 압록강 동쪽 땅을 얻었다. 


고려 대량원군(현종)은 태조의 손자인 경종이 죽은 후 태조의 아들 안종 욱(郁)과 경종의 네 번째 비(妃)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안종은 경종의 숙부다. 성종의 아버지는 ‘대종; 戴宗’ ' 욱; 旭’이다.) 한편 경종의 세 번째 비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 7대 임금 목종 다음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걸림돌이 된 대량원군은 헌애왕후에 의해 개성 숭교사로 유폐되었다가 삼각산 신불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헌애왕후가 천추태후라 불리는 것은 아들 목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기 때문이다. 


헌애왕후가 사람을 시켜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으나 대량원군은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태조의 손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대량원군은 “백운봉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만경창파 먼 바다로 향하는구나/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마라/ 용궁에 도달할 날 그리 멀지 않았으니“ 같은 시를 썼다. 1백년 가까이 지켜온 왕실을 어머니와 외척 김치양 사이에서 나온 아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한 목종은 강조(康兆)를 불렀다. 목종에게 미움을 사 외직으로 쫓겨나 있던 위종정, 최창 등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강조를 죽이기 위해 거짓 왕명으로 부른 것이라 속였다. 죽은 줄 알았던 목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조는 뒤늦게 온 것에 대해 문책을 면할 길이 없자 정변을 단행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 목종은 충주로 가는 중 파주 적성현에 이르러 강조가 보낸 자에게 시해당했다.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맞게 되었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묘청과 김부식은 개혁과 보수의 갈림길에서란 제목으로 만났다. 인종 대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임금이 황제를 칭하여 추락한 왕권을 회복해야 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성을 높이고 불손한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 인물이 묘청이다. 서경 사람 정지상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 묘청은 서경 천도가 어려워지자 무장 봉기를 감행했다. 그들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군대 이름은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김부식이 우두머리로 한 토벌군이 편성되었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묘청의 당으로 지목하여 죽인 것은 정지상의 문장과 재주에 대하여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의 외척인 이자겸을 내내 견제해왔던 김부식은 마침내 이자겸이 사라지자 새롭게 인종의 외척이 된 임원애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마당에 인종이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간다면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묘청 등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마침내 토벌군의 대장이 되었다. 


서경으로 출동한 김부식의 토벌군은 1년여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고 묘청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는 ‘고려사’에 근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저자는 묘청이 금의 압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서경을 중심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주장을 한 것으로 본다. 저자에 의하면 묘청은 일종의 현실개혁운동가다. 묘청이 개혁의 중심지로 서경을 택한 것은 그가 서경 출신이기 때문이었겠지만 서경이 옛 고구려의 수도로 고려 초기 이래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과 사신 왕래가 빈번하여 서경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피해가 컸고 과중한 역과 별공의 상납에 시달렸던 탓도 있었으리라.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이다. 그는 이 사건을 낭(郞), 불(佛) 대 유가,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보고 조선 1천년 이래 제일 큰 사건이라 평하였다. 묘청은 전자의 대표,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라 하였다. 


공민왕은 왕비(노국대장공주)의 신뢰에 힘을 얻어 반원개혁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불법적인 인사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와 인민의 탈점을 시정토록 하였다. 변발과 호복을 풀고 고려식 복장을 하여 고려의 부흥을 도모했다. 공민왕 재세시는 원이 쇠망해가는 시대였다. 공민왕은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기철 등의 권문세족을 일망타진하였다. 고려의 내정간섭기관이었던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원나라의 연호도 폐지하고 관제도 문종대의 것으로 복구하였다. 원과 권문세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에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했다. 환궁하던 공민왕은 흥왕사에 머무르다 원과 결탁한 김용 일당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공민왕은 왕비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에 정사에 뜻을 잃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 신돈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폐단을 고치려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서경 천도를 건의하기도 했다. 


신돈은 자신이 5도의 사심관이 되어보고자 삼사의 관원을 시켜 그 제도를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게 했다. 공민왕은 ”충숙왕이 심한 가뭄을 당했을 때 각 도의 사심관을 폐지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내가 선왕의 뜻을 잊겠는가?“ 하고는 상소문을 불태웠다. 그 뒤에도 계속 건의가 올라오자 공민왕은 ”무슨 도적 무슨 도적 해도 제일 큰 도적은 각 고을의 사심관이다.”라며 일축하였다. 공민왕은 사심관의 폐해가 컸음을 알고 있었다. 신돈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하였다. 발각되어 신돈은 결국 처형당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7년만에 끝났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에 자제위 소속의 홍륜과 내시 최만생에게 살해당하였다. 신돈의 이야기는 ‘고려사’반역전에 실려 있다. 


최영의 본관은 철원이다.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에 고려는 안우를 상원수로 삼고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삼아 이를 방어하였으나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 최영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이성계 등과 더불어 20여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되찾았다. 김용은 공민왕이 세자 시절 원에 있을 때 모셨던 공으로 대호군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원의 기황후 세력과 손잡고 공민왕의 임시행궁인 흥왕사를 습격하였다. 이때 최영은 자신의 직속 군대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가 난을 진압하였다.


신돈이 막강한 권세를 부리던 시절에 최영은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돈이 집권하던 초기에 계림부윤으로 좌천된 것을 비롯 신돈의 모함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 되었다.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회수하고 철령위를 설치했다. 고려는 박의중을 사신으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요동 정벌에 나섰다. 최영은 이성계의 반대를 일축하고 우왕을 움직여 정벌을 단행하였다. 최영은 늙었고 왕의 장인이었기에 평양에 머물렀고 이성계와 조민수만 출정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렀다.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으로 고봉에 유배되었다가 창왕 즉위년에 참수되었다. 최영이 대체로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했다면 이성계는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했다. 최영은 성공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명나라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정벌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확고한 자주성과 용맹성을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하고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지 못했다. 


정도전 일파는 폐가입진의 논리를 세웠다. 우왕과 그 아들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에 근거한 지침이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고, 이성계가 있었기에 정도전도 그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돈독한 관계는 세자 책봉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도전은 이방원 편에 선 하륜을 외직으로 쫓아내고 이방원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정도전은 신하들이 주체로서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 일인이 좌지우지하는 전제적인 체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206 페이지) 


하륜은 허약한 군주보다 강한 추진력을 가진 군주가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만 신하도 그를 도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210 페이지) 정도전과 하륜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갈라선 것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중종과 조광조는 섣부른 개혁은 화를 부른다는 제목으로 만났다. 조광조는 17세 때 함경남도 영변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한훤당 김굉필을 만났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죄를 받고 귀양 와 있던 김굉필을 통해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길재와 정몽주의 학풍을 이어받은 도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후일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한 것은 그의 학풍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광조는 인물이 수려하였지만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하루는 외방에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집 여주인이 그를 사모하여 둘만 있는 틈을 타 비녀를 뽑아 그에게 주었다. 당시 비녀를 뽑아주는 것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비녀를 받아 말없이 벽 틈에 꽂아두고는 그 길로 그 집을 나와버렸다.(224 페이지)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를 개혁하고 부패한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참신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226 페이지) 종래의 타락한 과거제도로는 참다운 인재를 뽑을 수 없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에서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면 왕이 이를 시험하여 인재를 뽑는 것이다. 과거는 하루의 재주로 시취하는 것이고 문장에 치중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나 천거제는 덕행이 단정한 자를 뽑아 다시 시험하는 것이니 만큼 재행을 겸비해야 한다. 어떤 이는 불공평하게 잘못 천거할까 우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천거하므로 하나 둘 불공평한 이가 섞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천거제를 막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난날 김굉필 같은 유학자는 부패한 과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현량과 실시로 홍경주, 심정, 남곤 등 기성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갈등과 대립, 위기의식은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중종은 유교적인 개혁을 실시하려 했다. 좋은 신하를 얻어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정치를 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조광조를 발탁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지나치게 급하고 과격한 개혁을 추구했다. 원칙과 이상에만 치우쳐 기성세력을 무시하면서 모든 것을 다 바꾸려 하였다. 


시에 인생을 담다라는 제목으로 만난 황진이와 허난설헌의 매치업은 재미 있다. 중종 19년(1524년)이 황진이의 출생년이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서경덕을 사숙(私淑)했다. 황진이는 소세양과 헤어진 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읊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도려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허난설헌은 명종 18년(1563년) 태생이다. 황진이가 자연을 읊고 명사들과의 사랑에 빠진 것에 비해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학자로서의 참된 자세는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만났다. 주자(朱子)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나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황은 주자의 설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보는 데에 중점을 두어 이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기의 활동의 근거로서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이다. 그러므로 결국 주리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이황 이후 주리파는 유성룡, 김성일 등의 제자가 영남학파로서 계통을 이었다. 


주기설의 선구적 존재는 서경덕이었다. 주기설을 대성시킨 이가 이이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이체이물(二體二物)로 규정하는 주자 및 이황의 순수이원론에 반대하였다. 이와 기는 일체양면적인 것이어서 이를 분석하면 둘이되 양자의 관계에서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일물(一物)일뿐이라는 것이다. 이(理)는 일반적인 것, 무활동적인 것, 추상적인 것이어서 이를 외부로 표출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활동적인 기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황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학자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이는 마음 공부를 중시하면서도 정계에 나아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경세제민을 실천하려 하였다. 


송시열과 윤증은 독단적인 학문 추구의 종착지는 어디인가란 제목으로 만났다.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나 1년만에 스승을 여의고 스승의 아들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송시열은 동기로서 친밀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다. 백호 윤휴의 경전 해석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다. 송시열은 여러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윤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휴는 이이의 학설을 비판했다. 윤선거는 경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만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시열과 윤선거의 입장 차이는 후일 윤선거의 아들 윤증에게 이어져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는 한 요소가 되었다.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은 회니시비로 불린다. 회니는 송시열이 살았던 회덕(懷德)의 회와 윤증이 살았던 니성(泥城)의 니를 딴 이름이다. 윤선거는 학문과 사상에 있어 비판의 자유를 주장하여 윤휴를 두둔했고 예송논쟁에서도 송시열에게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옹호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가서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墓銘)을 지어달라고 했다. 송시열은 성실하지 못한 비문을 지어보냈다. 송시열은 개찬(改撰) 요청에도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다. 


윤증은 비명을 요청할 때 기유의서(己酉疑書)를 가지고 갔다. 윤선거가 죽기 4년전(1665년)에 쓴 것으로 윤휴, 허목 등에게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같은 사류이므로 이들을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등용하여 쓰는 것이 옳다고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이었다. 신유의서(辛酉疑書; 1684년)는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것으로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 하나 그 기질이 편벽해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였고 송시열에 내세우는 존명벌청(存明伐靑)은 방법을 말로만 내세우고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였다. 박세채는 이를 보내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박세채의 사위이면서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이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송시열과 윤증이 절의(絶義)하고 노소분당을 굳힌 것으로 본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한 소론은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송시열은 학문적으로 주자절대주의자였으며 정치적으로 숭명반청을 고집하였다.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현실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쇄국과 개방의 줄다리기란 제목으로 만났다. 민비와 대원군은 나름대로 정치철학을 가지고 개혁을 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의 정책은 음모와 방해로 번번이 좌절되었고 서로 발목을 잡는 꼴이 되어 뜻대로 이를 수 없었다. 조선은 결국 준비 없는 개방을 하여 마침내 한일병합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식민사학의 내용은 1) 타율성론, 2) 반도적 성격론, 3) 정체성론으로 이루어졌다. 1)에 의하면 단군 조선의 존재는 부정되고 기자동래설은 인정된다. 타율성론의 또 다른 갈래는 만선사관이다. 만주사를 중국사와 분리해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넣어야 한다는 만선사관은 침략적 목적에 의한 것이다. 2)는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多隣性)으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찾은 이론이다. 3)은 한국이 왕조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여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 역시 정치적 목적이 있다. 한국이 전근대적인 상황에 멈춰 있기 때문에 한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인 일본이 간섭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사학에 대해 당시 양심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것의 허구성을 타파하고 극복하려 하였다. 그 한 일파가 민족의 혼과 정신을 일깨우려 한 민족주의 사학이고 다른 일파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성을 강조하려 한 사회경제사학이었다. 전자의 대표자가 신채호이고 후자의 대표자가 백남운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초래한 비극이란 제목으로 만났다. 박헌영과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면서도 좌나 우를 가리지 않고 통일된 조국을 만들려 한 이가 여운형이다. 여운형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만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때로는 우파와의 연합도 서슴지 않았다. 박헌영은 달랐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박헌영이 벌인 활동도 오로지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여운형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박헌영은 가난한 서자로 태어났다. 여운형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방패막이로 일본의 몇몇 요인들과 친교를 맺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일본이 패망하자 그들은 여운형에게 제일 먼저 찾아와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여운형은 이를 수락하고 건국동맹을 모태로 하여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남한에 남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947년 7월 19일, 괴한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었다. 위치가 너무 컸기에 그는 좌익과 우익 양측에서 모두 꺼리고 두려워 하는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철저히 공산당으로서 활동을 벌였으나 여운형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친미에서 반미로 변신하면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려 했으나 항상 여운형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가 북으로 간 것은 신변의 위협과 더불어 그의 한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김갑동의 '옛사람 72인에게서 지혜를 구하다'는 고대, 고려, 조선, 근현대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나의 경우 고려, 조선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왔고 고대, 근현대에는 상대적으로 등한했음이 드러난다. 마지막 챕터인 김구와 이승만편은 읽지 않았다. 문제적 인물에게서도 교훈 거리를 얻어야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과거의 문제적 인물을 모리(謀利)적 의도로 거듭 불러내는 세태가 싫다. 물론 저자의 이승만 논의는 김구와 비교해 나름의 교훈을 얻으려는 의도임을 모르지 않는다. 식민지근대화론과 부일(附日)로 어수선한 이 때에 오래 전에 나온 저자의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뿐이다. 좋은 경험이었다. 발전을 위해 근현대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패 예찬 - 위대한 사상가들의 실패에 대한 통찰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채효정 옮김 / 시옷책방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코스티카 브라다탄의 ‘실패 예찬‘은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의 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주는 원초적 실패의 산물이다. 그 실패의 우주를 만든 존재는 데미우르고스다. 마르키온과 대조를 이루는 신이다. 그노시스파 인류학에서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구조적 결함, 불완전, 결핍을 공유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좀 더 어려운 질문은 왜 세상만사는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이다. 이를 실존주의자의 언어로 바꾸면 나는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가?이다. 


저자는 실패는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없음에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자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잠복 상태의 끝없는 위협이라 말한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자 조악함의 성화, 잠깐의 깜빡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실패는 무서울 정도의 솔직함으로 모든 자아실현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하는 각성을 수행한다. 저자는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실패의 부재라 말한다. 실패는 우리를 찌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를 현실과 접촉시킨다. 


저자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던 시몬 베유를 주된 논의 대상에 올린다. 태어난 이듬해 중병으로 11개월을 투병한 끝에 얻게 된 평생의 허약 체질을 가진 그녀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깊이 공감해 주변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처럼 느꼈다. 25세인 1934년 직접 몸으로 괴로운 현실과 접촉하기 위해 공장 일을 했다. 베유는 현대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것을 결단한 학자로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인 신비주의자가 되어서 나왔다.(7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가톨릭 개념에 지적으로 공감하고 공장에서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음에도 베유는 자기 생이 끝날 때까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심각할 정도로 꺼림칙하게 여겼다. 베유는 성육신의 고유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일축하는 한편 예수는 이 세상 범죄와 고통이 있는 곳 어디에나 현존한다고 제안했다. 베유는 죽기 얼마 전 “나는 항상 믿었다. 죽는 순간이 삶의 핵심이자 목적이라고..... 그것 말고는 나 자신을 위한 좋은 일을 나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고 썼다.


저자는 말한다. 실패의 경험에 대한 겸손은 치유의 약속이며 겸손은 우리가 치유에 신경쓴다면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저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함께 사는 문제에 관한 한 당신이 당신 옆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똑똑할 것도 없다는 걸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를 죽였을 때 아테네인들은 기존 기준을 따랐고 재판도 흠이 없었으므로 완벽히 민주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테네인들 내부에 중대한 변혁을 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화는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125 페이지) 


간디는 자신의 실수는 볼록렌즈로 보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그 반대로 보아야만 두 사람을 정당하게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썼다. 간디는 자신의 내면에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람들이 뭔가를 억지로 하게 만드는, 심지어 불가능한 일마저 시도하게 만드는 잔인성이 있다고 썼다. 저자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오만한 태도, 자기의 싸움터에 다른 사람들을 배치하고 늘상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은 명분을 위해 순교자로 만들 때의 무사태평함을 간디의 가장 특징적인 실패라 정의한다. 


저자는 공포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탄생했고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된 이유는 그들이 열정적인 자선가였기 때문이라 말한다.(155 페이지) 이를 감안하면 저자가 말하는 실패란 한계(限界), 오류(誤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혁명의 폭력성에 관해서라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상징적인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미라보는 그에 대해 이 자는 자기가 하는 말을 죄다 믿기 때문에 큰일을 낼 것이라 말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순수하다고 간주하며 직접 혁명 프랑스의 도덕적 순수함을 책임지는 직무를 맡았다. 


로베스피에르가 애호한 해결책은 공포였다. 조지 오웰은 술, 담배 등을 성자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성자되는 것 또한 인간이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철도가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철도가 기근을 더 자주 발생시켰다고 말했다. 앞의 말은 이해 할 만하지만 뒤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인도 농부들이 곡물을 팔지 않고 그대로 둘 수 있다면 기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동 수단 시설이 있어서 곡물을 팔아 기근을 겪게 되었다는 의미다. 간디는 1869년생이다. 영국(1825년)에 이어 영국 식민지 인도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1853년으로 간디 나이 16세 때이다. 


저자는 유토피아의 문제점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실패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며,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더 가깝다는 중요하고 단순한 교훈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 말한다. “완벽하고 모든 것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실제로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저자는 실패자라는 것은 당신이 누구냐의 문제이지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 말하느냐,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말한다.(209 페이지) 마치 당신이 그렇게 될 운명인 것처럼 실패는 떨쳐버릴 수 없는 아우라다. 


에밀 시오랑은 실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칼뱅은 어떤가. 그는 예정설이 포함된 TULIP 교리의 창시자이다. 칼뱅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신에 있었다. 시오랑은 인간혐오자였던 만큼 루저에 대해 끝없는 이해심을 가졌다. 저자에 의하면 시오랑의 반우주적 사고에는 뚜렷한 그노시스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시오랑은 이 세상의 신은 무능하다고 썼다. 새로운 신들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 원제는 사악한 데미우르다. 


저자에 의하면 자살은 종종 실패와 연관되어 있고 자살자는 루저로 간주된다.(307 페이지) 시오랑은 평생 우주를 꾸짖고 자기 소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때가 되었을 때는 자살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실험을 설정하고 그것을 거친 사람이 있다. 장 아메리다. 그는 자살이 아니라 자유 죽음이라 말했다. 저자는 실패는 다른 어떤 경험보다 눈이 떠지는 경험이라 말한다.(377 페이지)


물리적 세상에서 삶이 발생한 덕분에 우리는 존재의 구조와 우리 자신의 내면에 생긴 균열을 보기 시작한다. 실패는 인간 역사가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제거하려는 지속적인 분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저자는 이야기가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 답은 무엇일까? 그렇다, 가능하다이다. 실패는 우리가 누구인지의 중심에 놓여 있기에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읽는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실패의 이야기다.(388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이 본 고려 - 승자의 역사를 뒤집는 조선 역사가들의 고려 열전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 허실이 밝혀질 때가 있다. 30년 넘게 고려사 연구에 천착해온 역사학자 박종기의 책 ‘조선이 본 고려’는 그런 사례들을 모은 책이다. 조선이 본 고려라는 말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이 고려 역사를 편찬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저자는 고려와 조선, 현대를 오가며 인물 비평을 시도했다. 책은 태조 왕건, 광종, 인종 등을 다룬 1부 고려 전기 인물론, 의종, 이공승, 명종, 조위총 등을 다룬 2부 무신정권기 인물론, 정세운·안우·이방실, 최영, 이숭인, 권근 등을 다룬 3부 고려 후기 인물론, 이색, 정도전, 우왕, 창왕 등을 다룬 4부 폐가입진론에 연루된 인물론, 최치원, 김득배, 길재, 원천석 등을 다룬 5부 조선에서 부활한 고려 인물론 및 조선 역사가들의 ‘고려 열전’, 그 특징과 의미라는 맺음말로 구성되었다.


우선 이 책은 고려의 4 임금(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 공신(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배현경, 홍유/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조충, 김취려/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모신 숭의전이 있는 연천에 사는 사람으로서 관련된 새 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유용하게 읽힌 책이다. 새 지식이란 김득배가 성호 이익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 폐가입진론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다는 점 등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폐가입진론은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데에 근거해 가짜 왕인 그들을 폐하고 진짜 왕인 공양왕을 세운다는 논리다. 공양왕은 신종(神宗)의 7대손이다. 폐가입진론은 조선 건국의 명분이 되었다.


이 내용이 반영된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이 승자의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는 성호 이익 및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 등에게서 나온 목소리를 말한다. 조선의 역사가들은 사대교린이라는 대외관계가 타당하다는 전제하에 고려사를 평가했다. 이익은 다소 복합적이다. 폐가입진론을 문제시한 이익은 거란과 단교를 한 태조 왕건에 대해서는 잘못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성종,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초래했다고 평가했고 금나라와 선린관계를 유지한 인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제현은 인재(人才)를 등용할 때 친소(親疏)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입현무방(立賢無方)을 내세운 광종의 인재등용이 현실에서 취지가 많이 상실되었고 광종이 실시한 과거제도가 겉치레의 문장을 숭상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지적했다.(이제현은 고려 말의 역사학자이다. 이제현을 포함시킨 것은 조선이 본 고려라는 제목과 맞지 않지만 참고 삼을 만하다.)


이익은 인종은 사대(事大)에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으니 마땅히 숭의전에 모셔 제사해야 했다고 결론지었다. 이익은 고려가 475년간 유지된 원동력을 사대교린 정책에서 찾았다. 묘청의 난,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 당대의 임금인 인종은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스스로 신하라 자처하는 칭신(稱臣)의 사대관계를 맺었다. 무신정변을 초래한 의종은 자신의 덕과 총명함이 요순 임금과 같으며 유사 이래 자기 대(代) 만큼 평화로운 시대가 없었다고 자평했다. 조선 역사가들은 의종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의종은 유교가 아닌 풍수지리, 불교, 도교 등 고려의 전통사상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의종은 자기 유모의 남편이자 환관인 정함을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의종은 신료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이공승은 처음 서명했다가 후에 번복하고 임명에 반대했다. 이익은 이공승이 처음의 잘못을 뉘우쳐 입장을 번복한 사실에 주목했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을 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나 사건을 오로지 선과 악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포폄(褒貶)론과 공과 과를 두루 고려하는 공과(功過)론이다. 이익은 공과론을 채택했다.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조선 전기 역사가들은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명종을 철류(綴旒) 같은 존재로 평했다. 철류란 깃대나 면류관에 매달린 끈을 말하는 것으로 철류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의미다. 현대 역사가들은 무신정권 초기 명종 때 왕권이 이전에 비해 무력했지만 명종이 대외교섭, 인사권, 과거제 운영의 주체로서 어느 정도 왕권을 보장받았다고 평가한다.(84 페이지)


이익은 명종이 무력한 군주였지만 의종이 시해되었을 때 바로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은 명종 재위시 무신 정권에 불만을 가진 서북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업고 봉기(蜂起)를 일으켰다. 벌 봉(蜂), 일어날 기(起)를 쓰는 봉기는 벌떼처럼 무리지어 세차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당시 조위총의 위(位)에서 사람인 변을 뺀 입(立)과 총(寵)에서 갓머리 변을 뺀 룡(龍)을 합치면 입룡(立龍)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왕을 세운다는 의미다. 이에 사람과 머리가 없어진 용은 죽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흥미롭지만 실제하는 것이 아닌 글자에서 부수를 빼서 어떤 메시지를 반들어 전하는 것은 관념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정세운과 김용, 안우, 이방실, 김득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정세운과 김용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부터 공민왕의 측근으로서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다. 그런데 김용이 정세운을 살해했다. 홍건적 침입으로 인한 위상 변화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김용은 총병관으로 개경 방어에 실패했고, 정세운은 개경을 수복한 공신이었다. 김용이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꾀어(조서를 꾸며) 정세운을 살해했다. 김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제거했고 개경 수복 후 왕이 임시로 머물던 흥왕사에 침입해 왕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익은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획해 이성계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해 제거하려고 했다고 썼다. 이른바 촤영 음모론으로서 이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잠식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우왕과 최영이 주도하여 요동 정벌을 단행한 것이라는 학계의 연구성과와 아주 다른 견해다. 도은(陶隱) 이숭인의 행보를 놓고 간관(諫官)과 양촌 권근(權近)이 벌인 설전은 흥미롭다. 모친 상중에 이숭인이 과거 시험관을 맡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간관은 부모상으로 3년이 지나지 않으면 고시관을 맡을 수 없다고 했고 권근은 생전에 자신이 고시관이 되는 것을 보려한 늙은 아버지를 위해 고시관을 맡았다고 했다.


당시 문반의 최고위직 판문하부사로 있던 목은 이색은 이숭인과 권근이 처벌을 받자 사직하고 장단(長湍)으로 낙향했다. 반개혁파를 제거하려는 이성계 세력의 정치적 음모를 간파한 결과였다. 이색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창왕의 위상을 높여 이성계와 개혁파를 견제하려 했지만 명나라 황제가 거부해 도리어 개혁파의 의심과 불신을 받았다. 개혁파에 의해 왕이 된 공양왕은 개혁파를 제거하기 위해 장단에 물러가 있던 이색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는 이색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앞당겨진 계기가 되었다. 이색은 이인임이 신씨(우왕)를 옹립할 때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단에 유배되었다. 이긍익은 이색이 창왕 즉위 시 전왕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은 당시까지 우왕이 신씨라는 주장이 없었고, 우왕이 신씨라는 이유로 폐위된 것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정도전은 스승인 이색의 처형을 주장했다. 신씨를 왕으로 옹립해 왕씨의 혈통을 끊은 것은 임금을 시해한 반역과 같다는 논리였다. 정도전은 주희(朱熹)가 선배인 소식(蘇軾)을 꾸짖은 사실에 빗대어 자신의 입장을 변명했다. 즉 정도전 자신은 주희에, 이색은 소식에 비유한 것이다. 우왕, 창왕 신씨설은 조선 건국에 정당성을 제공해주었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180 페이지) 상촌 신흠은 개혁파의 주장과 다르게 이색이 창왕을 옹립한 것은 올바른 일이라 주장했다. 이익은 우왕은 신씨가 아니며 우왕이 폐위된 것은 그가 최영과 함께 단행한 요동정벌 때문이라 주장했다. 우왕과 창왕은 왕의 역사를 다루는 세가(世家)가 아닌 열전(列傳) 그것도 반역열전에 수록되었다. 두 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장은 처음이 아닌 공양왕을 추대할 무렵에 나타났다. “뒤늦게 제기된 혈통문제”라 할 수 있다.


두 왕의 정통성을 인정한 최초의 역사서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다. 안정복은 최치원이 신라의 네 임금을 섬겼으면서도 ‘신라에 반기를 든 도적 무리인 왕건’에게 몰래 글을 올린 것은 잘못이라 썼다. 김득배는 정몽주의 스승이다. 이익은 김득배가 정세운을 살해한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김득배는 권신 기철 일당을 제거한 후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정몽주는 제문을 통해 스승 김득배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정당한 절차 없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익은 사람들이 정몽주만 알고 있을뿐 그의 스승인 김득배의 존재를 모른다고 하면서 김득배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뚜렷한 존재감을 남기지 못한 야은 길재는 조선에서 절의의 인물로서 모습을 드러내며 조선의 학인들에게 오랜 세월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천석은 우왕 신씨설을 최초로 부정한 인물이다. 저자는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밝혀서 기록하는 일이라 말한다.(267 페이지) ‘조선이 본 고려’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역사가의 가치와 참된 역할을 새삼 일깨우는 책이 아닐 수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4-09-26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역시 재미있어요. 배울 내용이 많기에.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24-09-27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다행입니다
 
과학의 기쁨 - 세상을 구할 과학자의 8가지 생각법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움이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이 과학에도 적용된다(14 페이지)고 주장하는 짐 알칼릴리의 책 ‘과학의 기쁨’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시각을 정교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책이다. 양자물리학자이자 BBC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저자는 자신의 이전 책인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비전문가를 위해 쓴 책으로 설명한다. 책은 모두 8부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꼭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할 필요는 없고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한다.(15 페이지) 서문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는 과학은 우리가 세상을 더욱 깊게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우리는 과학에 대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들어가며‘에서도 과학에 대한 정의가 등장한다. 예컨대 과학은 생각하는 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27 페이지) 저자는 과학적 방법론을 다른 이데올로기와 구분해주는 몇 가지 특성에 대해 논한다. 1) 반증가능성, 2) 반복성, 3) 불확실성의 중요성, 4) 실수를 인정하는 것의 가치 등이 그것들이다. 과학적 방법론의 또 다른 특성은 자기수정적(self  - correcting)이라는 점이다.(34 페이지) 종합하면 과학의 작동 방식은 자기수정적이고, 이미 사실로 확인된 확고한 토대 위에서 구축되고, 정밀조사와 반증 과정을 거치고, 재현성이 담보되어야 한다.(39 페이지) 


’들어가며‘에서 우리는 중성미자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2011년 한 실험에서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우주의 그 무엇도 빛보다 빠르지 못하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어긋나는 예이다. 그런데 중성미자 실험을 수행했던 연구진이 광학케이블 하나가 시간 측정 장치에 부적절하게 부착된 결과임을 알아내고 그 부분을 고쳤더니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32 페이지) 저자는 현실세계의 과학이 전적으로 가치중립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건강한 과학적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42 페이지) 


1부 진실이거나 진실이 아니거나에서 저자는 탈진실 시대에 대해 말한다. 앞 부분에서 과학에 대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와 관련지어 말할 수 있는 바가 저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는 저자의 이런 말에서 연유한다. 즉 많은 사람이 과학의 성공에 눈이 멀어 과학이라는 포장지만 쓰고 나오면 그 출처나 위조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기사나 광고를 다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출처도 따져야 하고 충분한 생각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중하게 증거를 기반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4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과학은 정치와 달리 이데올로기나 신념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46 페이지)이다. 과학적 방법론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관찰하고 실험하고 추론하려는 의지의 결합체(47 페이지)이다. 저자도 말했지만 지금은 탈진실 시대다. 특정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동기를 둔 노골적인 거짓 주장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신뢰할 만한 증거가 뒷받침하는 지식을 압도하는 세상을 말한다. 부정(否定)의 몇 가지 유형이 눈에 띈다. 1)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믿기를 거부하는 말 그대로의 부정(literal denial), 2) 사실 자체는 받아들이지만 개인의 이데올로기나 문화, 정치적 신념, 종교에 맞추어 다르게 해석하는 해석적 부정(interpretive denial), 3) 기후 변화를 막는 행동에 나서려면 생활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기에 기후 변화 주장을 부정하는 것 같은 함축적 부정(implications denial) 등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 진술이 신념, 감정, 행동, 사회적 상호작용, 의사결정, 우리가 접하고 논란을 벌이는 온갖 주제와 복잡하게 얽히면 단순한 흑백논리로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진술이 참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진술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상황에서 전적으로 타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61, 62 페이지)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진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우리의 지각도 주관적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너무 깊이 끌고 들어가면 결국 사회 전체가 동의하기로 결정하면 무엇이든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빠져들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기로 결정하는가와 상관없이 참인 우주에 관한 사실은 존재한다.(65 페이지) 과학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주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다. 각각의 주제를 구성 요소로 분해해서 각도를 달리하면서 보기도 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다.(69 페이지) 


2부 오컴의 면도날이 무뎌질 때에서 우리는 가장 단순한 설명이 반드시 올바른 설명은 아니며 올바른 설명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설명이 아닌 경우도 많다(76, 77 페이지)는 저자의 설명을 접하게 된다. 단순성은 우리가 항상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너무 단순해져도 안 된다. 연구실 실험과 세상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까?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는 인위적이고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특별하게 통제된 조건 아래에서 실험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실제 세상은 어지럽게 뒤엉켜 있고 너무 복잡해서 단순화하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80 페이지) 


과학자들은 오컴의 면도날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설명이 복잡한 설명보다 올바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저자는 조금만 더 깊이 파고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만큼 보상을 받게 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풍부해지면서 인생관도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 말한다.(86 페이지) 


3부 미스터리는 인정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에서 저자는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보다 항상 낫다고 말한다.(95 페이지) 4부 이해가 안 된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에서 저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헌신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그것을 얻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한다.(105 페이지) 5부 의견이 아닌 증거에 집중하라에서 저자는 건강한 증거는 객관적이고, 편향이 없고,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토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적 믿음과 일상의 믿음은 의미가 다르다. 과학적 믿음은 이데올로기, 희망사항, 맹목적 믿음을 기반으로 삼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129 페이지) 


다른 전문가가 그렇듯 과학자도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이라 믿을 수 있다.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여러 해를 투자해서 공부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130, 131 페이지) 새로운 아이디어나 타인의 관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합리성을 잃을 정도로 그래서는 안 된다.(132 페이지) 6부 타인의 관점을 평가하기 전에 해야 할 일에서 저자는 자연과학은 확증편향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자체가 확증편향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수와 범죄 건수 사이에는 강한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둘은 인과관계는 아니다. 둘 다 인구라는 매개변수와 관련되어 있다. 인구가 많아서 교회도 많고 범죄 건수도 많은 것이다. 7부 생각 바꾸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에서 저자는 과학에서는 의심과 불확실성도 중요하지만 확실성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없다면 결코 진보가 이루어질 수 없다.(159 페이지) 진보는 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수준을 점차 줄여나가는 신중하고 정당한 단계를 거쳐 결론을 확립함으로써 이루어진다.(160 페이지) 


하지만 불확실성은 모든 이론, 관찰, 측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과학에서 불확실성은 아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과학에서 불확실성은 무지가 아니라 확실성의 결여를 뜻한다. 불확실성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고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161 페이지) 과학에서는 항상 새로운 증거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일관성은 상상력이 없는 자들을 위한 마지막 도피처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한다. 일관성과 확실성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8부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에서 저자는 이 세상은 모든 가능한 결과가 다중우주 안에서 현실화될 수 있는 양자물리학의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현실은 아원자입자의 세계와 다른 바 우리에게는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171 페이지) 


저자는 우리 모두는 좀더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현실세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을 더욱 잘 이해하고 견뎌내는 방법이며 인생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180 페이지) 마무리하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과학을 응용햐는 것 역시 과학이라는 말이다.(183 페이지) 과학은 지식의 창조이고 기술은 그런 지식의 응용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새 정의인 셈이다. 


저자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 과학 지식이 인류에게 악행(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의 잠재력을 부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지식 자체가 사악하다거나 그 지식을 몰라야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184 페이지) 과학이 없었다면 나날이 늘어나는 전 세계 인구를 먹여살릴 수도 없고, 더 행복하게 장수할 수도 없고, 집 안에 조명과 난방을 들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서로 소통하고 세계 여행을 하고 우주로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학은 제한된 감각을 넘어,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무지와 약점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