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국가지질공원 해설대회가 열린다. 올해의 개최지는 청송이다. 청송은 제주도, 무등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기도 하다. 지질공원 해설대회 소식을 듣고 해설사가 된 지 8일 밖에 되지 않았기에 참가 자격이 되는지 모르지만 '나도 한 번?'이란 생각을 했다.

 

참가가 가능해도 과제가 만만하지 않다. 지난 지질공원 해설사 교육 때 몇 해 전 최우수상을 받은 부산 분의 강의에서 느낀 점이 있다. 교부재(敎副材)를 돋보이게 활용하신다는 점이었다. 나는 과연 그 분처럼 듣는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쉽게 교육효과를 낼 수 있는 교부재를 생각하고 만들 수 있을까?

 

회의적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후 알게 된 점은 해설대회가 교부재 사용 부문과 순수(?) 해설 부문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질 지식을 익혀 상상력과 창의성이 빛나는 과학적 시나리오에 역사문화적 스토리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할 일이 많다. 마음이 앞서 가지 않도록 조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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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내부에 대한 충격적(?) 소식을 들은 것은 오래 전이다. 반지름이 70km인 태양 중심에서 생성된 광자(光子)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을 경우 표면으로 직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700,000km/진공상태에서 빛의 초속 300,000km)이지만 태양 내부의 광자는 평균 1cm를 진행할 때마다 전자 또는 원자와 충돌하는 까닭에 중심에서 표면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100만년이다.('타이슨이 연주하는 우주교향곡 1' 84, 85 페이지)

 

이는 아마도 천문학에서 어떤 항성 또는 행성의 내부에 대해 언급된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간 교양 천문학의 경우이지만 지구에 대해서든 태양에 대해서든 문제 삼은 것은 외부였다는 의미이다.

 

바른 적용 또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든 운동은 질적 변화, 양적 증감, 위치 이동으로 설명된다. 반면 뉴턴에게 모든 운동은 위치 이동으로 환원되기에 운동하는 사물이 무엇인지가 문제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위치와 질량이 문제된다.(이정우 지음 '접힘과 펼쳐짐' 2장 참고)

 

지질학을 배우면 지구의 내부를 논하게 된다. 지구 내부는 핵과 맨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에는 자기장이 있는데 이는 철질(鐵質)로 되어 있는 지구 내부 외핵의 열대류 운동에 의해 유도 전류가 생겨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신규진 지음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지구의 과학' 21 페이지)

 

태양도 다량의 하전입자를 바깥으로 뿜어낸다.('타이슨이 연주하는 우주교향곡 2' 97 페이지) 하전입자는 자기적 상호작용도 한다. 전기는 자기다. 제임스 맥스웰이 전통적으로 완전히 별도의 현상으로 여겨졌던 전기와 자기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규정했다.(로빈 애리앤로드 지음 '물리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30 페이지)

 

태양이 매초 수백만톤씩 뿜어내는 전자, 양성자, 헬륨원자핵 등이 태양풍이다. 혜성의 꼬리가 항상 태양의 반대쪽을 향하는 것도 플라즈마 상태로 불어오는 태양풍 때문이다. 지구의 남극이나 북극지방으로 날아온 태양풍이 대기 속 분자와 충돌하면 하늘에 오로라가 나타나는데 이는 지구 뿐 아니라 강한 자기장과 대기를 갖고 있는 모든 행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타이슨이 연주하는 우주교향곡 1' 213, 214 페이지)

 

철새의 이동과 관련하여 새들이 지구 자기장을 읽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실험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성과는 비둘기의 두개골과 뇌 사이에서 자성을 띤 미세한 결정체가 발견된 것이다.(존 말론 지음 '21세기에 풀어야 할 과학의 의문' 91 페이지)

 

지질학은 돌에 관한 학문이지만 내게는 지구 내부의 맨틀과 핵, 마그마 등이 더 흥미롭게 여겨진다. 철질로 되어 있는 지구 내부 외핵의 열대류에 의해 생기는 자기장 때문이라 해도 좋다.(외핵은 섭씨 약 4000도의 액체, 내핵은 압력이 큰 5000도가 넘는 고체다.; 프랑소와 미셸 지음 '초등학생이 읽는 지질학의 첫 걸음' 9 페이지) 암석의 근원인 마그마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새와 자기장의 연관성을 이야기했으니 인간과 자기장의 연관성을 이야기할 법하다. 멀리 갈 것 없이 자기(磁氣) 부족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글에 관심을 갖는 내 이야기다. 흥미보다 현기증이라는 당면한 관심사 때문이다. 무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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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묘 해설을 하기 위해 입장하며 검표(무료관람이었지만 근무는 하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자 오랜만에 오셨네요, 란 말을 했다. 종묘는 궁궐 가운데 내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많이 드나든 곳이다.

 

교육 과정을 마치지 않은 상태로 첫 해설을 한 곳이고, 동기들에게 해설을 한 곳이고, 공부하는 사람이라며 부탁해 외국인에게 하는 영어 해설을 들은 곳이고, 묘현례(廟見禮)를 보기 위해 갔던 곳이고, 울적할 때 해설을 듣기 위해 갔던 곳이고, 올 봄 해설 준비를 위해 몇 차례 갔던 곳이고, 어제 해설을 위해 갔던 곳이다. 물론 내가 그분에게 각인(?)된 것은 몇 가지의 전문적인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17년 이 즈음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내 종묘 내공이 풍성해졌다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말로 하면 과거는 미약했다는 의미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며 부탁해 외국인에게 하는 영어 해설을 들은 곳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프랭크 게리가 생각난다.

 

지난 2012년 리움 미술관의 초청을 받고 특강을 위해 한국에 온 게리는 자신이 한국에 온 것은 종묘 정전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반인들이 없는 이른 시각에 자신의 일행들만 종묘를 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 결국 문화재청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는 동선에 맞게 안내하려는 종묘 직원을 마다하고 바로 정전으로 가 합장, 배례했다. 그는 어떤 명분을 제시했었을까? 종묘 제사에서 술을 드리는 의례를 빼놓을 수 없다. 임금이 단술(감주)을 바치는 것을 초헌(初獻), 세자가 탁주를 바치는 것을 아헌(亞獻), 영의정이 청주를 바치는 것을 종헌(終獻)이라 한다.

 

경북 예천(醴泉)의 예()가 단술 예자다. 예천군의 옛 지명이 달 감과 샘 천을 쓰는 감천(甘泉)이었다. 현주(玄酒)는 특이하다. 술 주자가 들어 있지만 맑은 물을 의미한다. 조선의 경우 비가 오지 않거나 농사 상황이 좋지 않으면 금주령을 내린 까닭에 제사에 술을 쓸 수 없었던 관계로 맑은 물이라는 의미의 현주, 달콤한 술이라는 의미의 감주를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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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興士團) 앞에 몇 개의 시비(詩碑)가 있다. 타고르의 동방의 불꽃‘, 함석헌 선생님의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우두(雨杜) 김광균 시인의 설야. 잠언(箴言) 같은 말도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지난 해에는 어떤 친일 역사가가 공개된 자리에서 정신병자라고 규정한 분이 안창호 선생님인 줄 알고 흥분하는 투로 전했는데 알고 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었다.

 

어제는 한 청자(聽者)가 왜 저 시비들이 이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지 물어 흥사단 앞이니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과 민족주의적 작품성을 보였던 타고르와 함석헌 선생님의 시비가 있는 것은 어울리는 바이고 김광균 시인의 설야(雪夜)‘ 시비는 서정적인 작품이지만 친구 황금찬 시인께서 이 자리에 세우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답은 황금찬 시인이 아니라 구상 시인이다. 김광균 시인은 1914 1993, 황금찬 시인은 1918 2017, 구상 시인은 1919 2004의 이력을 가지고 계시다. 한 살 차이시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해야 하나? 지난 해는 연속적으로 만나는 분들께 실수한 것이어서 다음에 만나 사죄했지만 어제는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분에게 실수한 것이어서 어디에 사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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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은 지적 열등감을 주기도 하지만 희열감을 주기도 한다. 두 경우 모두 내가 모르던 분야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솔직히 어느 경우가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어느 경우가 희열감을 느끼게 하는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모르는 분야라 해도 나에게 글을 쓸 동기를 제공하거나 공감하게 하는 바가 있을 경우에는 희열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소설을 낸 한 영화평론가의 글을 읽었다. 촘촘한 사유가 돋보이는 긴 글이지만 요약하면 직업으로 다룰 분야를 학문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시된 것이 몇 가지였는데 글은 그냥 많이 써보면 되는 것으로 굳이 대학에서까지 가르칠 필요가 있겠냐는 그의 논리가 내 관심을 자극했다. 물론 나는 내가 팔로우 하는 필자의 논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해보니 글은 많이 써보면 는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찮지만 나는 내가 들었던 글 잘 쓴다는 평에 이렇게 반응한다. 선생심도 저처럼 쓰고 쓰면 잘 쓸 수 있습니다라고. 잘 쓰는 것에도 수준 차가 큰데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것이 글쓰기로 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쓴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다른 것들은 거의 젬병 수준인데 글에서만 낙제점을 면했다는 의미다.

 

아울러 말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를 기법에만 치중해 가르치는 것에는 불편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논리를 가르치면 잘 쓸 것이고 독창적이고 일관성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사유하는 법을 가르치면 더욱 잘 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펼칠 수 있게 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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