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진화, 신의 출현 - 초기 인류와 종교의 기원
E. 풀러 토리 지음, 유나영 옮김 / 갈마바람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의학 박사 에드윈 풀러 토리의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은 원제(Evolving Brains, Emerging Gods)와 번역본의 제목이 일치하는 드문 책이다. 저자는 뇌가 진화함에 따라 신들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호모 하빌리스를 더 영리한 자아, 호모 에렉투스를 인식하는 자아, 옛 호모 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를 공감하는 자아, 초기 호모 사피엔스를 성찰하는 자아, 현행 호모 사피엔스를 시간 속의 자아(를 가진 존재)로 분류했다.

 

신들은 약 200만년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났다는 글로 포문을 연 이 책은 뇌 크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커진 뇌의 특정 영역들과 이 영역들을 잇는 연결의 밀도라고 설명한다. 호모 하빌리스의 뇌가 커진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기후와 기타 환경 조건의 변화, 고기 섭취 증가와 같은 식단의 변화, 사회적 변화 등이다.

 

사회적 뇌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장류는 그들의 유별나게 복잡한 사회 체계를 관리하기 위해 뇌를 더 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호모 에렉투스가 자아 인식이 없는 상태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 흔히 추웠던 기후에서 수십만 년 씩 생존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생존 기간을 헤아리면 호모 에렉투스는 지구상에 살았던 호미닌(현생인류의 근연종들) 중 가장 성공한 종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성찰하는 자아를 가졌다는 말은 그들이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식했다는 의미다.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보인 행동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새로운 것은 시신을 의도적으로 매장하면서 부장품을 묻은 것이다. 현생 호모사피엔스가 약 4만 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행동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은 예술의 등장이다.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갖춘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전적 기억이다. 정신적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에 경험했던 개인적 사건들을 다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까닭에 자전적 기억은 자신의 미래 경험을 상상할 토대를 제공해주는 기억이다.(182 페이지) 이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을 미래에 온전히 - 이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투사(投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189 페이지)

 

이 기억은 이점인 동시에 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알고 불안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전적 기억의 발달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시기에 시각예술이 분출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란 말을 한다. 벽화 동굴에 동물이나 그 밖의 영이 존재했다면 이는 미지의 것을 설명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204 페이지) 동굴벽화를 좀더 복잡한 종교적 산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남아공의 인지고고학자인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가 대표적이다. 샤먼이란 원래 황홀경에 들어가서 병을 치료하는 시베리아 퉁구스 부족의 토착 주술사였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는 구석기 시대 동굴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은 샤먼이 황홀경 속에서 본 시각적 환각을 재현한 것이라 설명한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직립, 언어사용, 큰 두뇌, 작은 치아 등을 드는데 저자는 죽음에 대한 지식을 꼽았다. 강력 공감한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자전적 기억에 의해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미래의 사건을 상상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건망증 환자가 과거는 물론 미래에 대한 사고에서 결함을 드러내는 것과 차원이 같다.(214 페이지) 정착 생활을 할 때 고인을 주거지 인근에 매장할 수 있고, 그래서 선대 조상의 시신이 점차 축적되었다.(241 페이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에도 혁명이 일어나 사람들은 조상령을 가정에 들이기에 이르렀다. 농경과 조상숭배는 전자는 생계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후자는 위급할 때의 원조를 위해 함께 발달했다.(254 페이지)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는 혼령과 신들의 연속체가 흔했음을 보여준다. 신의 범위도 인간적 특성을 띠며 특정 집단이나 부족에 국한된 신에서부터, 더 높고 심지어 더 멀리 있는 신, 세상을 창조했지만 세상사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지는 않는 신에까지 이른다.(255 페이지)

 

서유럽에서 신이 출현한 증거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파키스탄, 남동부 유럽에 비해 모호하지만 내세에 대한 강박이 보편적이었음은 분명하다.(299 페이지) 5, 000년 전 4, 000년 전 중국 북부에서 룽산문화가 발달했다. 이 문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조상숭배다. 조상과의 소통은 갑골을 이용한 점술을 통해 행해졌다. 갑골은 황소, 물소, 돼지, 양의 견갑골이다. 죽은 조상에게 특정 질문을 던져 뼈가 갈라질 때까지 열을 가해 갈라진 패턴을 조상이 내려준 답으로 해석했다.(308 페이지)

 

현생 호모 사피엔스에게 지고신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문자 기록 이후에야 확인 가능하다. 6, 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증거는 물의 신 엔키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원의 형태로 존재했다.(314 페이지) 4, 300년 전 유신론적 호미닌으로서의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정의하는 특성 중 하나가 되었다.(315 페이지)

 

죽음의 딜레마는 사람의 뇌 진화의 필연적 결과다. 인간은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위풍당당하게 우뚝 치솟은 자기 자신의 찬란한 독특성을 인식하지만 결국 땅속 몇 피트 밑으로 돌아가 앞 못 보고 말 못하는 채로 썩어서 영영 사라진다.(327 페이지) 뇌 진화 이론은 신들, 그리고 신들과 공식 결부되는 공식 종교가 인간 뇌 발달의 산물이라고 상정한다.(331 페이지)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357 페이지)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우리 생물종의 절대 다수는 인간의 허영심을 이토록 만족시키고 인간의 슬픔에 이토록 위안을 주는 믿음을 계속해서 묵종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358 페이지) 새로운 신과 종교가 계속해서 태어나듯 기존의 종교들은 계속해서 죽어갈 것이다.(359 페이지)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은 뇌의 진화에 따라 신이 출현한 사태(?)를 서술한 인상적인 책이자 투사란 말이 인상적인 책이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가 말한 샤먼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개의 집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하나는 執拗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輯要이다. 집요(執拗)하다는 말은 고집스럽게 끈질긴 것을 말한다. 집요(輯要)는 요점만을 모았다는 의미다. 두 단어는 반의어(反意語)는 아니지만 나는 반의어라 생각한다. 가령 박문호 박사가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을 73의 비율로 50대가 될 때까지 양질의 책 3천권 정도를 집요하게 읽다 보면 정보가 서로 링크되면서 양()이 질()로 바뀌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을 때 집요하다는 말은 책 전체를 집중해 통독하고 또 통독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리라.(그는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다는 말을 했다.)

 

박문호 박사는 하버드 대학 교육의 최종 목표는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그저 그런 책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라는 총장의 말을 인용했다. 박문호 박사는 어렵지만 피해 갈 수 없는 기본 학습량을 습득하는 학습 독서만이 우리의 학습 근육을 강화시켜준다는 말을 했다. 요점만을 모은 책은 도출 과정이 생략된 것이어서 어렵지 않고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게 하지도 못한다.

 

박문호 박사는 대칭의 붕괴를 이야기한다. 빅뱅 당시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힘이 우주 팽창과 더불어 순식간에 네 가지 힘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동일한 성격을 띤 채 완벽한 대칭을 이루다가 우주가 팽창하고 서서히 식어가면서 다른 특성의 힘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중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이 네 가지 힘이다.(우주가 식는다는 말은 화산 폭발로 분출한 용암이 식는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대칭이 깨져야 무언가 생기는 것이다. 가령 우주 초기의 대칭이 깨짐으로써 생긴 것이 의식이다. 소립자 물리학 박사인 무라야마 히토시는 오른쪽과 왼쪽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은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이 완전히 좌우가 바뀌어도 대부분의 물리법칙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라야마 히토시는 물질과 반물질을 말한다.

 

물리학자 프랭크 클로우스는 전자가 양전하를 띠고 양성자가 음전하를 띠어도 겉보기에는 다를 게 없다는 말을 하며 물질에서 이런 바꿔치기가 일어난 것이 반물질이라 설명한다. 다시 무라야마 히토시에 의하면 현재의 소립자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반드시 자신과 짝을 이루는 반물질과 함께 태어난다.(이를 쌍생성이라 한다.)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쌍소멸이 일어난다. 물질과 반물질이 정확히 같았다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무라야마 히토시는 물질이 반물질보다 10억 분의 2 정도 많았기에 물질이, 우주가, 의식이, 우리가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이의 비밀을 쥐고 있는 중성미자 이야기는 생략..)

 

집요한 공부가 필요하리라.

 

* 글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02-18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8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큰 소리로 텍스트 읽기, 걸으며 읽기 등 몸을 움직이며 하는 독서치료 실천에 제격인 봄의 문턱이다. 독서치료는 몸이 아픈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 않게 하려고 개입하는 것, 책이 지닌 모든 효과를 성실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실천 행위다.

 

소설가이자 독서치료사인 레진 드탕벨의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을 읽는다. 저자는 문학, 예술 분야에서 많은 상을 받은 저명한 분으로 음독(音讀)은 목소리의 진동에 어울리는 문체적 특성을 지닌 문학 텍스트를 매개로 신체기관의 가장 깊은 부위와 접촉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시가 가진 신비한 힘은 리듬, 울림, 생각이라는 세 가지 힘이 합쳐져 생긴다는 프랑스의 심리 치료사 루시 기예의 말과도 상응한다. 여기서 잠시 신체기관과의 접촉이라는 주제와도 어울리며 현대의 우리에게 무엇보다 시사적인 기억 부조화에 대해 분석한 저자의 의견을 들어보자.

 

이를 위해 언급할 것은 스크립토륨에 대한 서술이다. 스크립토륨은 서양 중세 수도원의 책 사본 제작소였다. 그곳에서 필경사들은 동물 가죽의 표면에 글을 새겼다. 동물 가죽을 자르고 불순물이 다 없어질 때까지 다듬어 그 위에 매우 뾰족한 도구로 생채기를 입히는 방식으로 글을 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책 내용이 깊게 각인되었다. 반면 오늘날의 글쓰기는 더 이상 동물 가죽을 괴롭히며 글자를 새기는 행위가 아닌 바 글자는 그 만큼 잘 기억되지 않는다. 바야흐로 봄의 문턱인 지금 필요한 것은 근육의 향연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니치(niche)란 말은 생태적 지위, 틈새 시장, 벽감(壁龕)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상생과 공존에 바탕한 생명체들의 자기만의 고유 자리라고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나무라도 줄기의 수직적 위치에 따라 주로 서식하는 새의 종류와 그 먹이가 약간씩 다르다면 즉 니치가 분화되어 있다면 다른 종의 새들이 한 나무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글(박지형 지음 스피노자의 거미’ 47, 48 페이지)이 어떤 영감을 준다. 잠 못 이루는 자가 돌아눕고 또 돌아누우며 진정한 자리를 찾는 것처럼 자리를 찾는 삶....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0-02-14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4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당 묘()라는 글자에 얼굴의 의미(: )가 있고, 얼굴 모()에 사당(祠堂)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우여곡절 끝에 알았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초상화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외국의 경우 얼굴의 흠을 못 본 듯 그렸지만 우리나라는 우직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그렸다고 전제한 뒤 조선 선비들의 정직함을 선비정신의 발현으로 설명했다.

 

선비정신이 무엇일까? 선비정신이란 의리 정신이자 불의에 항거하는 비판적 저항정신이다.(계승범 지음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43 페이지) 문제는 누구를 위한 선비정신이며 무엇을 위한 선비정신인가, . 적어도 조선사에서 선비들은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무대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고미숙 선생의 고산 윤선도 평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윤유기는 본래 간사하고 독한 사람으로 그 성질이 독사와 같고 행실은 개, 돼지와 같습니다. 집안에서 처신하는 것으로 말하면 어머니가 죽었는데 장사 지내지 않았고, 아버지의 첩을 팔아먹었으며 재산 다툼으로 형을 죽였습니다... 간사한 인간의 비위를 맞추고 자기 아들 선도를 달래어 글을 올림으로써 조정을 모함하고 선비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였으며 이이첨을 공격한다는 핑계 아래 전하를 모함하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이 연합하여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다. 고미숙 선생은 요즘으로 치면 인신공격에 해당하는 사항까지도 시시콜콜하게 들추어내면서 반대편의 부도덕함과 허위를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이런 언술에서 조선조 선비들의 도학적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종종 아수라장을 연출하는 요즘의 국회의사당을 방불케 하는바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투쟁이란 이렇듯 진흙탕의 개싸움 같은 형상을 연출하기는 매일반인 셈이라고 결론지었다. 정치 무대에서 저러했으니 그들은 개인적 심성이 뛰어났을수록 더욱 위선적이고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면모를 연출할 수 밖에 없었다.

 

앞서 초상화 이야기에 언급된 조선 선비들의 놀라운 우직함은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하게 들추어내면서 반대편의 부도덕함과 허위를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가학적인 언행과 사고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 가닥의 털,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되는”(‘승정원 일기의 표현) 초상화 제작 지침은 조선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생각하게 한다. 한 가닥의 털,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되었기에 얼굴의 온갖 못나고 부끄럽고 추한 모습까지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조선에서 주자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다는 말에서 하나님을 주희(주자)로 치환하면 조선의 주자학 유일주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