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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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대란 청나라 장군 타타라 잉굴다이를 말한다. 병자호란 한 해 전인 163512월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달라진 후금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참월(僭越: 주제 넘음)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화급하게 도망치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인조가 보낸 유시문(諭示文)이 용골대 일행에게 입수되었다. 1636411일 여명,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帝位: 황제 또는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식장에 사신 나덕헌, 이확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형제국이지 청에 신속(臣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인들,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청의 관원들에게 심하게 맞았다. 홍타이지는 두 사람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며 신하들을 다독였다. 조선에 먼저 절교할 수 있는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결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 신료들을 가리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만 일삼는 소인배들로 규정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후금을 원수로 규정한 이상 자신은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들을 죽이는 쩨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연암(燕巖)은 나덕헌, 이확의 행동을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나는 허세(虛勢)로 본다. 힘을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명분만 내세운 허세로 보일 뿐이다.

 

절하지 않을 거라면 즉위식에는 왜 갔을까? 절을 하도록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는가?(절을 하지 않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면 청은 조선 사신이 즉위식에 가지 않았어도 어떤 식으로든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맞고 홍타이지가 준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협박과 조선을 조롱하는 내용의) 국서(國書)는 왜 받았는가?

 

나덕헌, 이확은 홍타이지가 준 국서를 만주 통원보의 숙소에 몰래 던져놓고 내용을 등사(謄寫)하여 조정에 올렸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나덕헌, 이확의 목을 베어 홍타이지에게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나덕헌, 이확은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인조는 오랑캐와의 결별과 대결을 선언했지만 조선의 군사력은 미약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의 군사력은 국가 안보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정권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부제학 정온(鄭蘊)은 인조에게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정예병들을 원수(元帥)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안이한 자세로 일관했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오랑캐를 타오르는 불길처럼 여겨 겁먹고 두려워하면서도 청과의 화친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조선은 군신 상하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전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원수 김자점은 겨울에는 청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봉화 두 개(청군 침략시 올리도록 한)가 오른 것을 무시했다.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자점은 뒤늦게 장계(狀啓: 서면 보고)를 올렸다. 인조는 광해군 시절부터 유사시의 피난처로 점찍어 준비했던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강화도행을 촉구한 신하가 있었지만 인조는 청군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인조는 결국 상당한 양의 군량과 화약이 비축되어 있었던 강화도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맥이 빠졌던 청은 이번에는 아예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나섰다. 인조에게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가 담판을 벌일 테니 그 틈을 타 남한삼성으로 들어가라고 건의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당도한 것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김류(金瑬)가 강화도로 가자고 고집했다. 그러나 김류는 청군이 1633년 공유덕 등의 귀순을 통해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인조는 김류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길이 얼어 붙은 탓에 돌아와야 했다. 강화도 대신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병자호란은 1만여 조선군과 그 열 배에 이르는 청군의 싸움이었다. 남한산성 농성(籠城: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 초기 조정에는 청군은 화약만 맺으면 곧 철수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퍼지고 있었다.

 

청군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木柵)을 설치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 차단해 성안 사람들을 고사(枯死)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청이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렀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는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청군은 예상과 달리 대오도 정제되어 있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았다.

 

인조는 화친(和親), 주전(主戰) 등으로 엇갈린 신하들의 주장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선군은 청이 산성으로 접근하고 있음에도 화의 시도를 망칠까봐 발포하지도 못했다. 전전긍긍이었고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물자들은 동이 나기 직전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면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할 판이었다.

 

당시 추위는 혹독했다. 갑자기 소집되어 들어온 병사들이 방한 장구를 갖추었을 리 없었다. 공석(空石: 빈 가마니) 하나를 방한복 삼아 어깨에 두른 채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 싸우던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일이 속출했다.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결전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상헌은 물론 최명길도 비숫한 주장을 했다.

 

당시 청군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져가는 데 결사적이었다. 동료의 시신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불문율이었다. 청의 주력군이 도착함으로서 그나마 있었던 작은 전과들이 무위가 될 상황이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근왕병(勤王兵)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사이 어느덧 병자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조선은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도 명나라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거르지 않았다.

 

충성스런 조선이었다.”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한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뛴 것도 명나라 때문이었다. 대다수 신료들은 명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려다가 조선이 이렇게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의 일편단심을 명나라는 과연 알고나 있을까?” 산성 안의 마초(馬草)가 고갈되자 조선군 장졸들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청군은 남한산성과 외부와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근왕병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개 격파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사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청군 선봉대가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로 주변 산성에 머물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와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오는 청군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았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처럼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140 페이지)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小邦)이 곧 망할 뻔하였을 때 명의 신종황제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란 국서를 보냈다. 광해군 시절인 1619년 명의 강요로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을 때에도 조선은 참전 명분으로 재조지은을 내세웠었다.

 

당시 후금의 누르하치는 그 명분을 인정해주는 자세를 보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하는 크고 나라는 많다. 너희를 구해준 것은 오직 명나라 하나뿐인데 너희는 어찌해서 천하를 운운하는가? 명나라와 너희의 허탄(虛誕)하고 망령됨이 끝이 없구나.“ 청은 이미 명나라를 주조(朱朝) 즉 주원장이 세운 나라로 폄하하고 있었으니 조선의 명 = 천하 인식이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보낸 국서에 대해 작심한 듯 반박과 비아냥, 협박하는 내용의 언사들을 쏟아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6363월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서 도주한 직후 평안감사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을 문제삼았다. 장차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으려 하니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는 내용은 정묘호란 당시 맺은 맹약을 조선이 먼저 어겼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란 주장에 대해서는 전쟁을 모르는 나라가 왜 과거에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느냐고 힐문했다. 조선이 자신들을 가리켜 노적(奴賊)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는 도둑이란 몸을 숨겨 몰래 훔치는 자를 가리키는데 우리가 과연 도둑이라면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체포하지 않고 내버려두느냐고 따졌다. 조선은 이 반박 논리들을 다시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자신의 판도 안으로 들어오면 적자(赤子: 갓난 아이, 비유적으로 임금에 대해 백성)와 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항복 요구였다.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란 글을 보냈다.

 

교섭을 잘하면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조선은 난감했다. 조선은 인조가 성에서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홍타이지가 조선이 이미 칭신(稱臣)했음에도 인조의 출성(出城)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홍타이지를 분노하게 한 것은 대국 명조차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나덕헌, 이확 등이 끝까지 배레하지 않은 것을 통해 보듯 소국 조선이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덕헌, 이확의 불배(不拜)를 허세라고 말했거니와 그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악수가 되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 등의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藩國)인 조선조차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켰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홍타이지에게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인조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존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출성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는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그런데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인조는 청군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 며느리 강빈(姜嬪)과 봉림대군 등 왕실 피붙이들, 조정 대신들 중 늙고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도록 조처했다.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아버지의 추천을 받고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멸공봉사(滅公奉私), 선사후공(先私後公)했다.

 

김경징 집안의 가술과 50개나 되는 재물 궤짝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도의 마부들이 거의 모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금성탕지(金城湯池; 철옹성)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내팽개쳤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였다. 봉림대군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홍타이지는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묘수를 찾느라 고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화도 함락이었다.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 본 것이다. 청군은 육로로 동거(童車)라는 작은 수레를 이용해 병선을 운반했다. 에상하지 못한 작전이었다. 청군 가운데 만주병들은 어느 정도 군율이 잡혀 있어서 탐욕과 음란함이 덜했지만 몽골병이나 한병(漢兵)들은 달랐다. 특히 공유덕과 경중명 휘하의 병사들이 저지르는 겁략(劫掠)이 심각했다.

 

16371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23일 청군은 양동작전을 폈다. 조선이 척화신(斥和臣)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강화도에서 급히 데려온 종실 진원군과 내관 나업을 보여주었다. 강화도 함락을 알린 것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듣고 인조는 출성을 결정했다. 출성을 면하게 해달라던 인조는 대신 안전 귀순을 간청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 연호를 반납할 것,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칠 때 조선도 군사를 보내고 무기 협조를 할 것,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성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용골대 등은 조선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제 1등 절목 즉 함벽여츤(銜璧輿櫬)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함벽여츤이란 손이 뒤로 묶인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메고 나아가 항복하는 의식이다. 용골대는 삼전도에 이미 수항단(受降檀)을 만들어놓았다는 사실과 130일을 항복 의식을 행하는 날로 정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그리고 인조가 용포를 입어서는 안 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는 나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례를 행했다. 강화도에서 끌어온 강빈과 왕실 신료들도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신료들이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면서까지 배에 먼저 타려고 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포로들은 인조에게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며 절규했다. 인조 생애에서 가장 길고 처참했던 하루가 갔다.

 

척화신이 여럿이었지만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가 끌려가 처형당한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홍타이지의 참월을 비난하고 주화신들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홍익한을 회유(懷柔)하려고 했다. 인조는 홍타이지를 배웅할 때도 삼배구고두의 례를 행했다. 인조는 소현세자 일행이 떠나는 날 창릉(昌陵) 근처까지 거둥하여 배웅했다.

 

심양으로 들어간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청인들은 소현세자를 지렛대로 삼아 인조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려 했다. 여차하면 인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대신 즉위시키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 와중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경쟁자가 되고 정적이 되었다. 1622년 모문룡이 처음 들어가 동강진을 설치한 이후 가도는 청의 서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청은 수군이 없고 해전에 익숙하지 못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이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뒤 청은 조선 수군을 징발해 가도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조청 연합 수군은 가도 동강진을 정복했다. 1637년의 일이었다.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결사항전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문신들 특히 척화신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척화신들은 항복이 시간 문제인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들은 명분과 관념으로 전쟁을 하자고 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보며 조선 왕실의 의료 시스템을 생각하게 된다. 조선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내의원 등의 어의들만이 아니었다. 대신들도 내의원 제조, 약방 도제조 등의 직함을 가지고 일종의 자문으로서 왕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에 참여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어의를 비롯한 의관들이 맡았지만 진료와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유학자(儒學者) 출신의 삼제조가 맡는 구조였다.

 

삼제조는 정1품 이상의 정승이 맡는 도제조, 2품 이상이 맡는 제조, 3품 이상이 맡는 부제조를 이르는 말로 삼제조가 감시하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의관들은 자신 있게 진찰하지 못했고 이것이 조선 왕들의 진료와 치료를 실패로 이끈 가장 큰 문제이자 원인이었다.(이상곤 지음 왕의 한의학참고)

 

인조는 척화파들이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용골대 참수를 운운하며 오버한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 궁극에는 자신과 백성들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인조는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말끔한 전후 처리를 하지 않았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인조는 청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온 피로인<被擄人: 주회인: 走回人>들을 색출해 청으로 다시 보내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최명길은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회생하고 비()가 극에 달하면 태()가 오는 법이라며 인조를 위로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입조(入朝: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 청 황제를 알현시키는 것)시키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조청(朝淸) 관계가 격동하면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흔들렸다. 1643년 소현세자의 귀국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우호 차원에서라면 봉림대군까지 모두 보내야 하는데 소현세자만 보내려는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소현을 즉위시키려 한다고 믿었다. 소현과 강빈은 청 조정의 고위 인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등 심양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소현은 동아시아 판도가 바뀌는 현장을 직접 목도했다. 1644년 명을 대신해 중원의 주인이 된 청은 소현세자를 영구 귀국시키기로 했다. 명이 망한 이상 인질까지 잡아두며 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이후 친청파로 변신한 인조는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저자는 인조실록을 비롯 당시 기록 어디에도 환향녀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기에 속환을 통해 돌아온 여성은 속환녀, 불분명한 방식으로 돌아온 여성은 귀환여성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말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일 위기감은 커졌다. 청군의 침략으로 한양과 경기도 이북 지역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일본까지 움직일 경우 조선의 안보가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의 압박과 요구에 순응하는 행보를 계속했다. 유백종은 인조의 친청 행위를 보며 그렇다면 반정은 왜 했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몽골족의 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지배한 시기는 1279년부터 1368년까지의 90년에 지나지 않았다. 1673년 명에서 청으로 투항했던 한인 출신 번벌(藩閥)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청은 더욱 강해졌다. 이에 조선의 청에 대한 저항은 관념적인 차원으로 흘러갔다. 조선은 명이 망한 지 60년이 지난 1704(숙종 30)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었다.

 

황단이라고 불렸던 이 제단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의 만력제(신종)를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한 장소였다. 당시 청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묵인했다. 그 과정 자체를 조선이 청에 길들여지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대다수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이자 원수로 여겼으나 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또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조반정에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정권 안보에만 급급해 온갖 난맥상을 연출했다. 인조반정을 통해 영달했던 사람들 가운데 최명길,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인조는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했던 것을 맹 비난했지만 자신은 생부 원종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인조는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했으나 구체적 정책 실현에는 무관심했다.

 

인조 재위 기간은 사과(謝過)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기간 자주 울음을 보인 군주였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지시를 어긴 지휘관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인조는 사정(私情)에 눈이 어두워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했다.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던 심기원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들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인조는 1619년 광해군 재세시 명의 압력에 못이겨 강홍립이 1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한 사르후 전투의 패배를 오직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팩트에 눈감고 주관적으로 해석한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 등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했음에도 변화를 꾀하지도 않은 채 유사시 강화도로 피난하려는 계획에만 집착했다.

 

맹자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말이 있다. 절박한 처지의 환자 입장에서는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나가서 쑥을 뜯어야 그것이 한 달 묵은 쑥, 1년 묵은 쑥, 그리고 3년 묵은 쑥이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 세대는 그것을 먹지 못하고 죽더라도 후손들을 위해 쑥을 뜯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최근 국회방송을 통해 인간 책방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된 것을 보았다. ‘남한산성 1, 2’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의 최명길 평전이 소개되었다. 환향녀라는 말을 초청 인사가 쓰는 것이 들렸다. 중요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인지 그것을 시정해주지 않아 아쉬웠다. 과문(寡聞) 탓이겠지만 유연한 주화(主和) 정책으로 조선을 곤경에서 구해낸 최명길이 인조반정 가담자였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가졌었는데 인조반정을 통해 영달했던 사람들 가운데 최명길,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적지 않았다는 글을 통해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인조반정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는 지적에 일방 비난을 가했던 나를 반성했다. 남한산성 농성 중 추위에 비까지 계속 내려 말할 수 없이 스산하고 참담했던 상황에서 인조가 기청제를 드리며 엎드려 울부짖었다는 대목에서는 울컥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인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고통과 수난에 내몰린 군병들과 백성들을 생각하며 가지게 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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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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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청()과 명()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를 펼치지 못했던 인조 정권의 실정(失政)을 거울 삼아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시기다. 최근 최명길 평전을 쓴 한명기 교수의 책은 그런 지혜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조선사 그 가운데 17세기는 지난 216일 남한산성 해설 후 급격히 친근해진 느낌이 든다.

 

병자호란 이전의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광해군과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된 그의 조카 능양군(인조)의 악연 등 배경 설명이 충분한 책이다. 물론 전황(戰況)도 상세하다. 인조는 반정 후 광해군대의 조선을 금수(禽獸)의 땅으로 규정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요동 수복을 기치로 내세우며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진을 친 장수다.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여서 후금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후금을 자극해 역공을 초래하는 모문룡 부대에 대한 근심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기에 의거(義擧)했다는 반정 세력들의 주장은 후금과의 대결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명은 인조 책봉 카드로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정당성 없는 정권에 책봉이라는 은혜를 베풀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생긴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봉전지은(封典之恩)이 추가된 것이다.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를 의미한다.

 

명이 인조를 책봉하기 전까지 인조는 서조선국사(署朝鮮國事)로 불렸다. 임시로 조선의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으로서는 모문룡을 도와 후금과 싸워야 했다. 기울어가는 명의 궤도 속으로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반정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난은 몇 가지 점에서 기록을 세웠다. 조선에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인조의 숙부 흥안군(선조의 열 번째 아들)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공주까지 피신했던 인조는 반란이 진압된 후 서울로 돌아와 백성들이 불지른 창경궁 대신 광해군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신축한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불린)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이후 역모 사건이 터졌다. 북관대첩의 주인공 정문부(鄭文孚)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이귀는 인조에 대하 호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어영군을 새로 창설했다. 이서(李曙)는 총융군(경기지역 병력)을 만들었다. 이서 등은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유사시의 국왕 피신처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정비하려고 시도했다. 즉 적군이 침입하면 국왕은 훈련도감과 어영군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세자는 총융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증원군을 받아들여 항전한다는 계획이었다.

 

반정 세력들은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고 상대적으로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방어는 몹시 소홀히 했다. 정권 안보에만 집중하고 국가 안보는 등한시 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운영하던 해방(海防)을 중단하면서까지 명의 책봉사 접대에 매달렸다.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세 가지 난정을 바로잡겠다며 등장했다. 난정이란 폐모살제,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한 것 등이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은 엄청난 은() 징색(徵索)을 했고 가도의 모문룡 진영은 항상적인 양곡 수탈을 했다. 인조 정권은 친명은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책을 시행했다. 이 상황에서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문룡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모문룡 부대를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한명군(駐韓明軍)이라 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막강한 후금과 싸워 요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명은 가도를 조선과 후금을 견제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보았다. 모문룡 부대 즉 모병(毛兵)은 조선이 명을 배반하거나 후금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수단이었다.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표방했지만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문룡은 명 조정의 실력자 환관 위충현의 비호를 받고 명 황제를 속이고 조선에 온갖 민폐를 끼쳤다. 문제는 명 조정으로부터 모문룡을 감사(監司)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짓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 큰 민폐를 끼쳤고 후금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그런 모문룡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천계 연간 극심한 당쟁과 환관들의 발호 때문에 명은 무너져갔다. 16193월 명군은 후금을 공격했지만 역습에 휘말려 참패했다.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이 전투를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이 가운데 명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 휘하의 병력이 패한 전투를 심하(深河) 전투라고 한다.

 

15천 명에 이르는 강홍립 부대는 전투의 대세와 무관한 병력이었다. 영원성 원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누루하치가 죽었다. 161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금(후금)으로 칭하고 칸이 되었다. 훗날 태종이 되어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 치욕적 항복을 받아낸 인물이다.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제 문제 해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명 본토를 치기 위해 서진(西進)하려는 데 방해가 되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추대 형식으로 칸의 위치에 오른 홍타이지는 지위에 걸맞은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정묘호란을, 투항한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일으킨 전쟁으로 본 송시열의 견해는 잘못이다.

 

후금이 투항자의 사주(使嗾)에 따라 동병(動兵) 여부를 결정할 만큼 간단한 나라인가? 서인은 정묘호란의 근원적 책임을 광해군과 강홍립에게 돌리고 광해군 정권을 후금과 같은 부류로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처한 명분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홍은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이 함락되기 직전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장렬히 순국했다.

 

그는 죽기 직전 지휘관이 되어 습진(習陣: 진 치는 훈련)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는 말을 했다. 정권안보를 위해 기찰(譏察)에 혈안이 되었던 반정 세력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인조는 백성들에게 사과성명을 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터져 항복하고 나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잃어버린 10년인 셈이다.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괄의 난이 터지자 공주로 피신했던 것처럼. 후금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고 한 척화파들의 의견이 있었다.

 

실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비분강개만 하는 모습이라니...어떻든 두 나라는 화의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 등 내정의 난제들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배후의 원숭환(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타격한)의 위협을 고려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얻어내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후금은 형의 나라, 조선은 동생의 나라가 되었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섬으로 피해 목숨을 보전했다. 모문룡에게 후금군의 머리를 베어 바친 사람들(평안도 지역의 의병, 백성들)이 있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수급(首級;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속여 바친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이를 자신의 군공(軍功)이라며 명 조정에 천연덕스럽게 보고했다. 반정 세력들이 오랑캐와 화약을 맺음으로써 반정 명분을 스스로 크게 훼손했다고 찜찜해 하던 차에 명은 후금과의 화의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화의 이후 곳곳에서 역모가 일어났다. 삼레의 유생 이기안은 능양군을 믿을 수 없다. 그가 오래 갈 수 있을까?”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라는 총체적으로 난국(難局)이었다.

 

인조는 오랑캐 토벌 의지는 대단했지만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630년 가평군수 유백증은 신은 광해(1575 - 1641)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란 직격탄을 날렸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참수(斬首)당한 것이다. 원숭환은 어제 그대를 죽인 것은 조정의 대법을 밝힌 것이고 오늘 그대를 제사함은 동료의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뿌렸다.

 

황경원은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한 은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이여송에 못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원숭환은 홍타이지의 계략에 말려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마방태감 양춘과 왕성덕을 포로로 잡았다. 이 둘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과 포승선이 밀담을 나누었다.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탈취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의도적 연출이었다. 고홍중과 포승선은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고 양춘과 왕성덕을 풀어주었다. 양춘과 왕성덕 두 환관은 부리나케 자금성으로 달려가 숭정제에게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옆방에서 들은 사실을 고했다. 원숭환이 오랑캐를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고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 통주에 이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살의 숭정제는 대국을 보는 눈이 없어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원숭환은 책형(磔刑)을 당했다. 이는 동림당과 엄당의 격렬한 상쟁과 복수가 배경에 깔린 사건이다. 원숭환이 처형당한 뒤 명은 자멸의 길로 확실히 들어섰다. 원숭환을 제거하는 반간계를 구상하고 실행한 주체들은 이신(貳身)들이었다.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출신 신료들이다.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우대하고 중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이신들은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신들까지 포용한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사람과 대국을 볼 줄 몰랐던 숭정제는 어리석었다. 지도자의 국량(局量)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원숭환은 모문령을 제거한 뒤 조선에 편지를 보내 모문룡 처단의 전말을 설명하고 모문룡과 부하들이 조선에 끼친 커다란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병력을 동원해 같이 후금과 싸우자고 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역이었다. 명이 자신들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아우국 조선과의 교역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후금이 조선에 요구한 물자 가운데 서적들도 있었다. 조선은 후금에 사서를 비롯 춘추, 주역, 예기, 통감, 사략 등을 넘겨주었다. 당시 후금은 홍타이지가 한인 신료들을 적극적으로 임용하고 문치에 입각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국력을 갉아먹은 사건이었다. 1633년 모문룡 휘하에 있던 공경(孔耿: 공유덕, 경중명)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하자 조선은 그들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했다. 163612월 홍타이지는 조선이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고 후금과 적대한 것을 병자호란 도발의 주요 명분으로 제시했다.

 

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한 것(심하전투 참전)이 후금에 정묘호란을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조선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조선은 후금이 보유한 수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후금은 1631년 보낸 국서에서 우리가 쳐들어가면 너희는 보나마나 섬으로 도망칠 것이라 조롱했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계기로 전함과 수군까지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는 원종의 부묘(祔廟)를 밀어붙이느라 오버했다. 강학년은 인조에게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다. 이괄의 난 때 백성들 가운데 서울을 떠나는 인조의 가마를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로 민심 이반을 통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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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20-03-0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꽤 재미있는 책이죠. 2권을 기다리게 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0-03-03 20:25   좋아요 0 | URL
아. 네.. 알겠습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9
심재우 외 지음 / 돌베개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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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世子)의 세는 대를 잇는다는 의미다. 세자의 원어는 계세지자(繼世之子). 아버지의 대를 잇는 아들이라는 의미다. 고려시대에 태자로 불리다가 원 간섭기부터 세자 또는 왕세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자(元子)는 왕의 적장자로 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일곱 건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 순조의 장자 효명세자 등은 요절한 세자들이다. 원자는 특별히 책봉할 필요가 없었으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원자에 책봉했다. 세자의 자질이 의심스러워 지식과 인격수양을 위한 예비 기간을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은 원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문종은 세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 사람들이다. 연산군은 부왕 재위시 태어난 첫 원자다. 성종 7년의 일이다. 의안대군은 1382년에 태어났고 부왕 태조는 1392년에 즉위했다. 양녕은 1394년에 출생했고 부왕 태종은 1400년에 즉위했다. 문종은 1414년에 출생했고 부왕 세종은 1418년에 즉위했다.

 

대리청정을 한 세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문종(710개월), 예종(111개월), 광해군(610개월), 경종(210개월), 사도세자(135개월), 정조(3개월), 효명세자(33개월) 등이다. 대비의 수렴청정도 일곱 차례였다.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대에 이루어졌다.

 

세자시강원은 서연(書筵) 즉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고 세자익위사는 세자 호위를 담당했다. 세자익위사는 태종 때 설치되었다. 성종 재위 중 원자의 양육과 교육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원자로 하여금 민간의 고통과 물정을 알게 하기 위해 사가로 내보내 교육시킬 것인가, 임금이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세자 책봉은 대체로 6, 7세에 이루어졌다. 세자 책봉 방법은 임헌책명(臨軒冊命)으로 규정했다. 임헌책령이란 원자가 정전의 뜰에 나아가 절차에 따라 책봉 받는 방식을 말한다. 세자 책봉례는 왕통의 차기 계승권자를 천하에 포고하는 것이다. 백성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세자는 국본(國本)으로 인식되었다. 세자 책봉일은 길일을 택했다. 그 이전에 책봉 사실을 종묘에 고했는데 이때 세자의 이름이 정해졌다.

 

책봉례를 할 때 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추었다. 일곱 가지 무늬가 새겨진 칠장복(七章服)을 입은 것이다. 칠장복은 곤복(袞服)이라고도 한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점을 쳐 길을 택해 거행했다. 습의(習儀) 즉 예행연습을 행했지만 실수가 빚어지기도 했다. 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렀다고 해서 성균관에서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양반 자제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은 유학의 스승인 공자에게 술잔을 올리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의식을 통하여 세자 역시 유학을 학습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만천하게 알린다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대성전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한 후 유생복인 청금복(靑衿服)을 입고 명륜당에서 속수례(束修禮)와 입학례를 거행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

 

세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완결점에 세자빈이 있다. 왕실이나 일반민의 경우 집안의 주인은 여성이고, 그 주인 역할을 할 며느리의 존재는 중요하다. 세자빈이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잘해주어야 세자가 후계자 수업을 잘 받을 수 있고 그 위치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왕들은 스스로 왕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세자는 현왕을 이어 왕이 될 사람으로서 정치적 역량을 키워야 하는 한편 왕 자리를 절대 넘보아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세자 교육은 이 점을 늘 인식하게 하는 양면성을 띠었다. 법적으로 인정된 섭정으로 대비의 수렴청정과 세자의 대리청정이 있었다. 전자는 왕과 대비의 공치(共治) 차원이었고 후자는 왕의 통치를 보조하는 차원이었다.

 

첫 대리청정 주인공은 문종이었다. 세자의 대리청정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적장자로 대통을 이은 왕이 많지 않았고 장성한 세자가 있고 현왕이 노년기에 접어든 상황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은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인조는 장성한 아들 봉림대군이 있었음에도 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의 평균 나이는 20.8세였다. 나이는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서른 살에 이르렀다. 청정 기간은 1년에서 13년까지이다. 평균 기간은 5.2년 정도로 수렴청정 평균 기간과 비슷하다. 왕이 나이가 많거나 질병 등으로 국정 운영 능력이 떨어졌을 때 대리청정을 했고, 정국 전환의 의도를 가진 임금의 의도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고, 전란 중 대리청정을 했고(광해군, 소현세자), 불안한 세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왕이 대리청정을 명한 경우에 대리청정을 했다.(경종, 정조)

 

정조의 대리청정은 3개월에 불과해 그의 통치가 대리청정 효과에 힘입은 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리청정은 세자가 정치적 희생양이 될 여지가 다분했다. 문종은 20년이나 세자로 있다가 28세의 장성한 나이에 청정을 시작했다. 경종은 29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영조가 사도세자(1735 1762)에게 부과한 대리청정은 양위 소동이 일어난 가운데 결정되었다. 영조 51년인 1775년 세손(이산)에게 내려진 대리청정 결정은 최초의 세손 대리청정 사례다. 당시 영조는 83세의 고령이었다. 1442년 대리청정기에 세종은 세자가 남면해 조회를 받고 신하들은 칭신(稱臣)해야 한다고 주장해 반발을 샀다. 결국 동쪽에 앉아 의식을 진행하도록(서향하도록) 했고 칭신은 포기했다.

 

세종(재위 1418 1450)144792일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신하들의 세자에 대한 칭신, 세자의 남면, 신하들의 사배(四拜) 등을 관철시켰다. 사도세자는 13년 넘게 대리청정 했지만 부왕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3년여만에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세종은 대리청정을 수행하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감수했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정치적 권위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킨 세종은 양위 선언 한 달 전에 연희궁(延禧宮)을 수리하도록 조처했고 수리가 끝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종은 144512일 경복궁에서 연희궁으로 갔다가 313일 희우정으로 옮겼고 412일 다시 연희궁으로 옮겨 107일까지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 108일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 가서 다음 해 126일까지 거처했다가 다시 연희궁으로 행차했다. 연희궁, 희우정, 수양대군가, 효령대군가, 양녕대군가 등이 세종이 머문 곳들이다. 23개월이 넘는 기간에 세종이 시어소(時御所) 생활을 한 것은 무려 690일이었다. 세종의 시어소 생활은 건강을 되찾기 위한 피병(避病) 목적도 있었지만 세자가 정궁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국사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로 하여금 정치적 장악력을 확실히 갖추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양위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영조는 세자를 믿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주려했던 세종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영조는 처음부터 전위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대리청정을 통해 양위 소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보다 소론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영조는 세자를 정치일선에 내세웠지만 뒤에서 소론을 중용하여 노론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당연히 노론이 소론에 대해 공세를 강화하게 되었고 이에 사도세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하게 책망했고 부자 사이는 갈등으로 치달았다. 17521129일 소론의 이종성이 영의정이 되자 노론계의 사간원 정언 홍준해가 상소를 올려 그를 극단적으로 탄핵했다. 당시 세자는 상소문을 돌려주며 타이르는 조처를 취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영조는 격노하여 홍준해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한편 세자를 크게 책망했다.

 

이때 세자는 궁중을 휩쓴 홍역을 앓고 난 직후임에도 엄동설한에 눈 위에서 대죄(待罪: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는 것)하였고 그 때문에 몸이 몹시 상했다. 다음 달 소의(昭儀) 문씨 문제로 영조의 선위 파동이 일어났다. 영조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궁 소속의 나인이었던 소의 문씨를 총애했다. 소의 문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선희궁)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다가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계비)에게 질책을 당하고 종아리를 맞는 일이 있었다.

 

화가 난 영조가 항의의 뜻으로 선위하겠다고 하자 인원왕후는 그러라고 맞받아쳤고 이에 세자는 또다시 대죄하다가 머리가 돌에 부딪혀 망건이 부서지고 피가 나는 지경을 당했다.(인원왕후는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1755년 을해옥사(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가 일어나 소론이 대대적 타격을 받고 노론은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잡았다. 이에 영조는 친정체제를 강화했고 세자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17572월과 3월에 세자를 후원하던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세자는 더욱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세자는 폐위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약원 도제조 김상로는 세자를 폐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김상로는 세자를 진찰한 후 세자의 몸 상태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고했다. 다음 해 8월 명릉(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으로 능행길에 나섰던 세자가 비를 맞아 몸이 몹시 좋지 않자 돌아오는 길에 잠시 겅기감영에 들렀는데 김상로가 이를 세자가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참소했다.

 

영조가 세자의 폐위 전교를 승정원에 내리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계가 반대했다. 이에 영조는 이를 철회했지만 세자의 울화증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 이후 왕과 세자는 화합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1760년 왕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겨가며 두 사람의 소통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며칠 후 습종(濕腫) 치료를 위해 세자가 온양 온궁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거병(擧兵: 쿠데타) 의심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세자가 관서 지역으로 미행을 떠나자 노론은 이 사건을 정치공세로 밀어붙였다. 1762년 액정별감 나상인의 형 나경언이 세자가 불궤(不軌: 모반)를 모의한다고 고변했다. 나경언은 동궁을 무고한 혐의로 참형당했지만 여파는 세자에게 떨어졌다. 사건 발생 20일이 지나자 영조는 휘령전 뜰에 세자를 불러 자진하도록 강요했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은 뒤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어린 세자에게 노회한 정치가 이상의 능력을 요구했다. 세자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이런 부왕의 태도에 세자는 더욱 위축되어 가는 등 마음의 병을 키워갔다. 붕당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참사로 이어진 이 사건은 부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대리청정은 교육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효명세자는 자신의 정치적 모델을 할아버지 정조에게서 찾았다.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능행 정치도 효명세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효명세자는 정치 운영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정조를 흠모해 그를 닮고자 했다. 효명세자의 죽음도 의문스럽다. 스무 살 전후의 똑똑하고 패기있던 효명세자는 비록 무능했지만 지지를 보내준 아버지 순조의 후원 아래 할아버지 정조를 자신의 모델로 삼아 안동 김씨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했다.

 

조선시대 세자는 왕실의 대를 잇고 왕조의 영속(永續)을 위해 보위를 이어가는 존재로 비창(匕鬯)이라 불렸다. 비창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의 명칭으로 대를 이어 종사를 받든다는 의미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아 국초부터 세자 교육에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중요시했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혈연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태조와 태종,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왕 외에도 왕비, 대왕대비, 친인척, 고위 관료 등 왕실을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들이 세자의 정적이 될 수 있었다. 생모조차도 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사도세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복형 방원에게 살해당한 이방석, 세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동생에게 보위를 물려준 양녕대군 이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이조, 할아버지 인조에게 버림받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 아버지에게 죽임당한 사도세자 이선,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떠돌던 영친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연과 질곡은 다양하다.

 

이들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다. 병사한 세자들이 아닌 쫓겨나고 죽임 당하고 떠돌아야 했던 세자들이다.(의경세자, 효장세자, 문효세자 등은 병사했다. 효명세자는 죽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34세에 숨을 거두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았음은 물론 이형익을 처벌하라는 관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청나라에서도 소현세자의 죽음에 놀라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시대 세자의 문학을 살필 수 있는 대표 인물이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다. 사도세자를 양육한 상궁 나인들은 대부분 경종과 경종비 선의왕후를 모시던 사람들로 영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못했다. 효명세자는 조선 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른 두 명의 세자가 있었고 이들에게는 서른 다섯 명의 적자 형제와 여든 아홉 명의 서자 형제가 있었다. 왕에게 세자가 없었던 사례는 단종, 덕종(추존왕), 예종(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인성대군. 인성대군은 세 살에 요절, 장순왕후는 인성대군 낳은 후 산후병으로 타계), 원종(추존왕), 헌종(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왕자 얻지 못하고 옹주 하나 얻고 사망), 철종(원자 이융준 생후 6개월만에 사망) 등이었다.

 

두 명이었던 사례는 태조에게 방석과 정종, 태종에게 양녕과 세종, 세조에게 덕종(추존왕, 의경세자)과 예종, 인조에게 소현세자와 효종, 영조에게 진종(효장세자)과 장조(사도세자), 정조에게 문효세자와 순조 등이다. 선조의 세자 광해군과 동복형 임해군, 이복동생 영창대군 사이의 갈등은 주목할 만하다.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점점 나빠졌다. 선조의 위기의식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전쟁 상황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인심을 안정시켜 신망을 얻었다. 전쟁 후 광해군의 입지는 좁아졌다. 광해군은 선조가 죽고 바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선왕 사후 5일 후에 입관을 하고 즉위식을 치르는 왕실 관행을 어긴 것이었다. 불안감의 반영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의식한 결과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였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자신의 세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광해군의 세자는 영창대군에게는 조카였고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자신의 세자의 관계를 생각한 것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염두에 둔 결과다.

 

조선 시대의 서른 두 명의 세자에게 114명의 여자 형제(38명의 적자 형제, 76명의 서녀 형제)가 있었다.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고 궁으로 돌아왔을 때 영조와 사도세자는 악화일로의 관계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편애를 받는 화완옹주를 질투하기도 했다. 화완옹주는 그런 사도세자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부추겨 영조를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게 했다. 영조는 신료들과 논의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왕비(정순왕후 김씨)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했다. 영조의 이어가 결정되자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불러 칼을 어루만지며 이후에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칼로 너를 벨 것이라 말했다. 화완옹주는 울면서 앞으로 잘할 터이니 목숨만 살려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믿고 평양에 행차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여동생 화완 옹주를 통해 부왕 영조와의 갈등을 해소하기도 했지만 화완옹주로 말미암아 임오화변의 비극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다. 세자 인종이 부왕 중종에게 폐서인된 이복 형제인 복성군, 혜순옹주, 헤정옹주(이상 경빈 박씨 소생) 등을 복권 요청한 것은 화려한 아가위 꽃송이처럼 우애 가득한 형제간의 사랑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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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산으로 도서관들이 휴관에 들어갔다. 211일 친구와 함께 도봉숲속마을 강의를 듣고 시내에 진입해 빌린 책들이 다섯 권 있다.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이덕일), ‘경기도 산성 여행’(최진연),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한국학중앙연구원), ‘병자호란 1, 2’(한명기) 등으로 모두 서울도서관에서 216일 남한산성 해설을 위해 빌린 책들이다.

 

한 차례 반납 연장을 했으니 정상 반납일은 33일인데 도서관측이 225일부로 휴관을 하며 모든 이용자들에게 선물을 주듯 일주일씩 자동 연장 처리를 해놓았다는 사실을 오늘 확인하고 3일 도서관을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못 읽은 책을 마저 다 읽고 10일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3월은 왕릉 프로그램 하나, 숲 프로그램 두 개, 마을 해설 프로그램 하나 등을 준비해야 하는데 도서관을 갈 수 없어 참 난감하다. 현재 나는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없고 해설들도 잠정 중단되었고 숲해설 수업(受業) 개강은 3주 연기되었으니 사실상 자가 격리 중인 셈이다. 대구의 한 상인께서 코로나로 인해 매출이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에 우는 모습을 티브이로 보았다. 마음이 아프다.

 

최악의 경우 인구의 40%가 감염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모든 상황이 심히 걱정스럽다. 행복하게 출발하고 22일까지 좋았던 2월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악몽으로 막을 내리기 직전이다. 2월은 친구로 인해 시종 감사하고 행복한 달이었다. 그와 함께 3월 받을 수업 일정에 차질이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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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 - 자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박지형 지음 / 이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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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란 거미를 관찰하던 스피노자의 만년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저자는 제한된 자원이 소수의 생물에 의해 독점되기보다 비교적 고르게 배분되어 다양한 생물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태계의 원리를 자연의 민주주의라 부른다. 저자는 환경생태학자다. 생물학이 세포나 분자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다룬다면 생태학은 보다 긴 호흡으로 생명의 신비를 노래한다.

 

홉스는 나의 어머니는 쌍둥이를 출산했다. 나와 공포를이란 말을 했다. 공포는 홉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략하는 것에 놀란 것을 두고 이르는 말로 이로 인해 홉스는 조산아로 태어났다. 홉스는 왕과 국교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당파와 의회를 통해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의회파 사이의 극심한 대립과 전쟁을 경험하며 공포의 시대를 벗어날 이성적 묘책을 궁리한 홉스의 화두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자신의 책의 핵심 질문과 홉스의 이야기가 연결된다고 말한다.

 

홉스 같은 근대의 기획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은 실제로 항구적인 전쟁 상태인가?”(44, 45 페이지) 홉스는 인간 본성상 항구적인 전쟁 상태는 불가피하므로 사회적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를 위임받은 강력한 주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87 페이지) 제한적인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개체들 중에 주어진 환경 조건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개체가 살아남는 것을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약자가 항상 경쟁에 져서 완전히 도태된다면 지구상에는 소수의 강자만이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구한 진화 과정에서 생물다양성은 감소하지 않고 증가하였다.“(47 페이지)

 

네덜란드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유대인 사회에서도 추방당한 스피노자는 유럽이 주도한 근대적 질서의 모순과 혼동을 자신의 개인사 속에 구현했다.(54 페이지) 스피노자가 태어난 해는 1632년이다. 이 해에 서양 근대사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이 여럿 태어났다.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현미경을 개발한 레이우엔훅,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르, 존 로크 등이 그들이다. 17세기는 어떤 시대였는가? 중세적 현상으로 생각하기 쉬운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한 때가 바로 17세기다. 독일의 30년 전쟁이 일어난 때도 17세기다. 네덜란드의 17세기는 공화주의자 더빗을 살해하고 왕당파를 추종했던 네덜란드 대중의 광기와 노예적 이성의 시대였다.

 

경제 버블의 원조격인 네덜란드의 툴립 피버(tulip fever)17세기에 일어났다.(한국사 이야기여서 그렇지만 17세기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기해예송, 갑인예송,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이 일어났다.) 1675년 페르메르가 숨을 거두었다.

 

2017년 세상을 떠난 존 버거는 발렌티너의 렘브란트와 스피노자를 인용하며 같은 시기에 암스테르담에 살았던 두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며 싸웠다고 말했다. 렘브란트가 파산 선고를 받은 해에 스피노자는 유대교회에서 추방당했다. 1656년에 일어난 일이다. 스피노자가 거미를 관찰하며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를 보며 죽음이라는 환원불가능한 외재성에 대해 사색했을 것이라 말했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을 먹이로 삼지만 사는 동안에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에 억압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리라. 스피노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거미뿐 아니라 자연의 다양한 질서를 관찰하여 체계적인 생태 이론을 정립한 위대한 생태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85 페이지)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다윈의 이론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복잡한 이론이 쉽게 이해되는 장점은 있지만 적자생존으로 단순화된 진화론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사회를 항구적인 전쟁터로 오인하게 할 위험이 있다.(91 페이지) 다윈과 게오르기 가우스가 생물 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어 한 것은 경쟁배제 자체보다는 경쟁을 넘어선 공존의 비밀이었을지도 모른다.(102 페이지)

 

간디는 자신이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받는 것도 도둑질이라 말했다. 그의 이 말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을 생각하게 한다.(177 페이지) 그 자체의 필연성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에는 넘치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어둠을 직시하고 어둠 너머 어렴풋이 비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진정한 인간해방과 절대민주주의를 상상하지 못했기에 스피노자의 사상은 네그리의 말처럼 너무 이질적인 야성적 파격이라 할 수 있다.(179 페이지)

 

홉스가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대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다면 로크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도 개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 사회를 인정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187 페이지) 오직 계약을 통해서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끝내거나 타고난 권한을 신장시킬 수 있다고 믿은 사회계약론자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묘사한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은 하나로 결합할 때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권리를 집단적으로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192 페이지) 기득권 세력이 보이지 않는 발로 뛰어다니며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인간 사회보다는 자연생태계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더 잘 작동한다.(219 페이지) 홉스가 자연상태에서의 혼란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권을 옹호한 것과 달리 스피노자는 개인을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다중의 지배를 꿈꾸었다.(224 페이지)

 

다중에 의한 자율적 사회 구성은 전통적인 계급론의 관점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다중은 실체를 드러냈다. 저자는 사회의 올바른 구성 원리를 고민하던 스피노자에게 거미 관찰이 영감을 준 것처럼 자연에서 얻은 생태적 상상력이 한계에 봉착한 근대적 민주주의의 대안을 찾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은 길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243 페이지) 이제 프레데리크 로르동의 정치적 정서를 읽어야 할 순서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이란 전통적 이원론을 전복하고 변용과 정서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스피노자에 대해 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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