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투성이 과학 - 지금 이 순간 과학자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진짜 과학 이야기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 지음, 김아림 옮김 / 리얼부커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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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난감한 일이다. 그래도 무언가 얻는 바가 있으리라. 실패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생물학 교수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은 과학 분야에서 실패가 갖는 의미와 가치 등을 논한다. 파이어스타인에 의하면 과학은 실패 그 자체가 목표인 학문이다. 사실상 모든 과학적 노력은 실패 그 자체를 목표로 한다는 것인데 이는 과학적 발견과 그것으로 얻은 사실들은 임시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다. 과학에서 틀렸는데도 쓸모가 있는 경우가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ontogeny recapitulates phytogeny)는 말이다. 오랫동안 사실이라고 알려졌던 이 말은 알(또는 자궁) 속에서 어떤 유기체의 배아가 발생하는 전체 과정이 그 유기체가 진화해 온 모든 단계를 다시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실패와 함께 살았다. 때로는 실패가 성공보다 더 많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실패가 없으면 과학도 없다. 진화 그 자체도 경이로운 실패의 결과물이다. 지금껏 지구상에 얼굴을 비췄던 생물 종의 99% 이상은 현재 멸종했다. 닐스 보어는 전문가란 굉장히 좁은 분야에서 가능한 온갖 실수를 전부 저지른 사람이란 말을 했다.

 

사무엘 베케트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했다. 잘 실패한다는 말은 일부러 성공을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베케트는 이미 성공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잘 실패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무지란 자기 자신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고 남아 있는 장소다. 잘 실패한다는 것은 뻔한 것 너머를 바라보거나 우리가 아는 것 그 너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것을 본다는 의미다.

 

잘 실패하려면 질문을 던지고 결과를 의심하며 불확실성에 푹 젖어 들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실패란 그것이 습관이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좋은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이 깊은 무지를 드러내는 방식은 실패 뿐이다. 실패에서 실패로 엮이며 나아가는 반복적인 과정이야말로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이다.

 

조금씩 개선되며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피드백을 조금 덜 전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바꾸면 실수 교정 작업이다. 세렌디피티란 개념에 대해 저자는 한 마디 한다. 세렌디피티는 예상하지 못한 행운, 우연한 발견이란 의미다. 사실 소위 말하는 행운의 발견은 열심히 일하다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나온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과학적 진보는 단순하고 매혹적인 행운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기보다 멍들고 깨지는 사건과 실패, 길고 힘든 수정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과학은 난처함과 혼란, 회의주의, 실험이라는 환경을 자양분으로 먹고 자란다. 이것과 다른 방식은 과학을 경직시키고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릴 것이다. 성공이 대단하고 흥미로울수록 그것을 얻기는 어렵고 실패로 이어질 확률도 높아진다.

 

훌륭한 과학자라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발견하는 데 능해야 한다. 실패는 더 새롭고 더 훌륭한 문제를 찾아내는 가장 믿음직한 원천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을 때 과학의 지지자들은 열정을 보인다. 우리는 성공적인 과학에 대해서만 배우지 실패한 과학은 배우지 않는다. 이러면 과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학을 이루는 모든 사실들은 사람들이 수많은 실패를 딛고 힘들게 얻은 결과다.

 

과학은 단지 교과서 속에 깔끔하게 박제되어 보존 처리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인류의 모험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모험이 그렇듯 과학에는 실패라는 조그만 구멍들이 송송 뚫려 있다. 실제로 이뤄지는 과학은 잘못된 방향 전환과 막다른 골목, 그리고 한때 사실이었다가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가끔은 그것이 다시 옳았다고 드러나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기후 과학, 세포, 생물학, 물리학, 화학, 수학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속도로 온갖 실수담이 생겨나는 중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과학의 진보다. 과학자들은 여기저기 손대고 꾸물대고 찔러보는 놀이와 비슷한 일을 한다, 이것은 부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라 몹시 진지한 일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보통 같은 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범주를 넘나들며 작업해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 이것은 꽤 흥미로운 사후 관찰이기는 해도 창의성을 실제로 발휘하기 위한 처방이라 볼 수는 없다. 결국은 어떤 아이디어를 지녀야 하고, 그것을 서로 떨어진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이미 아는 지식이 새로운 질문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러분이 확실한 해법을 찾는 중이지만 잘 되지 않는다면 실패야말로 대안적인 답을 찾도록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163 페이지) 무능력한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겸손을 가져다주고 자아를 초심에 들게 하며, 근면함을 되찾게 하고, 결국에는 자신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실패에 투자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19세기에는 오직 자산가들만이 과학자 직업으로도 먹고살 수 있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 자체도 이런 사람들을 기술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1833년 케임브리지 출신의 박식가 윌리엄 휴얼이 만든 말이다.)

 

저자는 창의적인 사고를 허용할 정도로 실패에 대한 여유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뭔가를 답하면 거기서 의문이 다시 생겨난다. 그렇기에 언제나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다. 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도 숱하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서는 끝을 내야 한다, 그래야 일이 진척된다. 파이어스타인의 이그노런스’(부제: ‘무지는 어떻게 과학을 이끄는가’)를 읽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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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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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왕조 시대의 산물인 궁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은 궁녀란 지극히 내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록에 궁녀들이 등장하는 일 자체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기에 왕이 먼저 말하기 전에는 등장할 까닭이 없었고 왕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궁녀 문제를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왕이 만부득이 궁녀 문제를 언급해야 할 때는 궁녀들이 모반, 저주, 간통 등의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다. 이런 가운데 계축일기’, ‘한중록’, ‘인현왕후전등 조선 시대 궁중 여성들이 남긴 기록과 모반 대역죄인들을 조사한 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등을 참고로 궁녀들에 대해 쓴 책이 신명호 교수의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궁녀.

 

추안급국안에는 궁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가 살아 있었고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 세종과 왕비는 새 궁녀들로 하여금 모시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신빈 김씨는 사이가 참 좋았다. 공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는 세종에게서 아들 여섯(딸 둘은 일찍 사망)을 낳았다.

 

연산군의 궁녀로 후대 왕을 낳지 못한 장녹수(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가비였던)와 광해군의 궁녀로 역시 후대 왕을 낳지 못한 김개시(노비의 딸)는 나쁜 궁녀의 대명사다. 연산군은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로 연상이기까지 한 장녹수를 딱 한 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 김개시는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김개시는 어릴 적 입궁하여 상궁이 되었으나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광해군의 궁녀로 있다가 선조의 궁녀가 된 뒤 다시 광해군에게로 간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실세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걸림돌이었던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스스로 알아서 했다. 갑신정변 5년 전인 1879년 김옥균의 동조자로 입궁한 이우석은 체격도 크고 힘도 세 양산박의 수호지의 여장부 이름인 고대수로 불렸다.

 

37세의 그녀는 기운이 세고 용모는 단정하지 못하였기에 무수리를 맡았다. 무수리는 출퇴근이 가능했다. 궁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첩자로서는 무수리가 제격이다. 조선시대에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추존 왕 덕종 비 소혜왕후, 예종 비 장순왕후, 안순왕후, 성종 비 공혜왕후, 인조 비 인열왕후 등을 배출한 청주 한씨 가문이다.

 

세조 비 정희왕후, 폐비된 성종 비 제헌왕후, 성종 비 정현왕후, 중종 비 장경왕후, 중종 비 문정왕후를 배출한 파평 윤씨 가문도 다섯 명이지만 폐비된 제헌왕후를 제외해서 그런지 2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태종 비 원경왕후, 숙종 비 인현왕후, 고종 비 명성왕후, 순종 비 순명효왕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 가문이 3등이다.

 

소혜왕후의 고모(한확의 여동생) 청주 한씨가 명나라 영락제의 궁녀 생활을 하다가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공녀는 사대부 가문에서 골랐고 청나라에 보내는 공녀는 공노비 가운데서 골랐다. 청주 한씨가 영락제의 사랑을 받았던 까닭에 오빠 한확은 승승장구했다.

 

오따 줄리에는 임진왜란 중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간 여성이다. 오따 줄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추종하는 파를 이기고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총애를 받았다. 히데요리를 추종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배한 사무라이들이 할복하는 관행을 깨고 항복하지 않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공개처형된 후 효수되었다.

 

오따 줄리에가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니시 부인을 시중들 때였을 것이다. 도쿠가와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줄리에는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발각되어 체포된 뒤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다. 줄리에를 사랑한 도쿠가와도 그녀의 신앙을 버리게 하지 못했다. 오따 줄리에와 반대의 경우가 굴씨(屈氏).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명나라가 멸망한 후 귀국할 수 있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명나라 궁녀와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의 황녀였던 굴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자 굴씨도 따라 죽으려 했고 이에 주황후가 말려 자살하지 않고 민가에 숨었다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주황후는 자살했다. 굴씨는 인렬왕후 조씨(자의대비)의 궁녀가 되었다.

 

70의 나이에 굴씨는 조선에서 숨을 거두었다. 굴씨는 자신을 서쪽 근교의 길에 묻어달라고 했다. 굴씨는 그곳에 자신을 묻어주면 왕의 군대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최회저도 소현세자를 따라와 궁녀가 되었다. 80 넘어서까지 살았다. 조선의 숭명반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숙종 25년에 정식 상궁 교지를 받았다. 왕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소속된 궁녀들만 관할했을 뿐 관할 밖의 궁녀에 대해서는 선발권조차 없었다. 긍녀의 충원도 각 처소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의 대전, 왕비전, 대비전, 세자전 궁녀들이 각각 독립적이었다는 의미다. 궁녀들이 충성을 바치는 1차 대상도 왕이 아니라 자신들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들은 운명공동체의 관계를 맺었다.

 

세자가 왕이 되면 세자궁의 궁녀들이 대전 궁녀가 되고 왕이 죽으면 궁녀들은 왕의 장레를 치른 후에 여승이 되거나 대궐 밖으로 나가 여생을 보냈다. 각 처소별로 궁녀 수를 명시한 것은 성종 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궁녀 수가 늘어났다. 이는 왕실 구성원이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각 처소의 궁녀 조직이 점차 비대해지고 업무량도 늘어난 까닭이다.

 

즉 왕족들이 각 처소별로 독립 생활을 하며 음식, 바느질, 자수, 빨래, 청소, 양육 등 궁중의 실생활에서 요구하는 각종 여성 노동이 증가했다는 의미다. 궁녀는 왕의 개인 종이기도 하고 동시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공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궁녀는 왕의 개인 노비인 내수사(內需司: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잡화·노비 등을 관리했다.)의 여자 중에서 충당할 수도 있었고 공노비나 일반 국민 중에서 충당할 수도 있었다.(112 페이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헸던 10년 동안 광해군 측의 궁녀들은 인목대비를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모함했다. 인조 반정 직후 인목대비를 괴롭힌 원흉으로 지목된 상궁 김개시는 목이 잘렸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다소의 예외를 제외하면 궁녀는 기본적으로 공노비와 사노비 등 노비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지밀 상궁의 경우 네 살에 입궁했다. 침방 상궁은 여섯 살에 입궁했다.

 

네 살 입궁 사례는 자식 없는 대비의 어린 수양딸을 하기 위해 입궁한 것이었다. 물론 조선 시대 17세기 궁녀들의 입궁 나이와 고종, 순종 대의 궁녀들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미혼 궁녀들은 각 처소 주인들의 시중과 의식주 관련 노동을 위해 입궁했고 기혼 궁녀는 유모나 보모 등 아이의 양육과 관련된 일로 입궁했다. 예비 궁녀로 입궁하는 아이들은 적어도 일곱 살 이상이었고 아이 양육을 위한 기혼 궁녀들의 입궁은 나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132 페이지)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이라 불렸다. 1품이었다. 봉보부인은 매년 쌀과 콩 60석을 받았다. 영의정이 받는 양보다 많은 것이었다. 유모는 궁녀들처럼 내수사나 각사의 여자 종에서 선발되었으므로 공노비 신분인데 봉보 부인이 되면 자연 면천(免賤)되었다. 심지어 예종은 봉보부인의 친족 27명을 면천해주었다. 연산군은 이것을 빌미로 봉보부인의 친족을 전부 다 면천시켜 주려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139 페이지) 정식 유모 외에 어쩌다가 왕에게 한번 젖을 먹인 여성들도 면천되었다.

 

원자(元子) 이외의 왕실 아이들 즉 왕자와 공주, 옹주 등이 혼인으로 궁궐을 나가면 보모 상궁은 으레 따라서 출궁하곤 했다. 출궁한다고 해서 궁녀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왕자와 공주의 궁방(宮房)에 소속된 궁녀로 바뀔 뿐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이 틀어진 시초가 바로 보모 상궁들이 잘못 가르친 데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궁녀는 5품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4품 이상은 후궁이다.

 

조선 시대 양반 관료 조직이 크게 9품에서 5품까지의 사()4품에서 1품까지의 대부(大夫)로 구성되었듯 내명부의 조직도 9품에서 5품에 이르는 궁녀와 4품에서 1품에 이르는 후궁으로 양분되었다.(155 페이지) 5품에서 6품은 상궁, 상의 등 상()이라는 말 다음에 구체적 업무 내용이 들어갔다. 7품에서 8품까지는 전빈, 전의 등 전()이라는 말과 함께 담당 업무가 들어갔다. 9품은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미의 주() 다음에 긍상각치우의 5음이 들어갔다.

 

상궁은 마마님이라 불렸고 나인들은 항아(姮娥)라 불렸다. 왕의 승은(承恩)을 입고도 후궁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특별 상궁, 승은 상궁 등으로 뷸렸다. 각 처소에는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 제조(提調) 상궁이 있었다. 제조 상궁과 부제조 상궁은 각 처소의 지밀(至密)에 소속되었다. 대전(大殿) 궁녀 대부분은 전문직 여성이었다. 대전의 긍녀 중에서 왕의 잠자리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은 궁녀는 사실상 지밀의 젊은 궁녀들로 한정되었다.

 

반면 대전 궁녀들 중의 대다수는 평생 자기 업무 분야에 종사한 철저한 전문가로 존재했다.(169 페이지) 궁중 생활 문화의 진수를 담담, 전승한 주역이었던 것이다. 상궁과 나인 이외의 여성들이 있었다.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 등이다. 방자는 방에 딸린 사람이다. 밥하는 취반인을 취반비라 했다. 궁중에서 물 긷는 사람은 무수리라 불렀다. 세숫물을 담당하는 사람을 수모(水母)라 했다. 파지(巴只)는 청소를 맡은 사람이다.

 

상궁이나 나인은 평생 주인을 위해 수절했다. 방자, 취반비, 무수리, 파지 등은 그런 억압에서 자유로웠다. 내의원에 속한 의녀들은 출퇴근을 했고 혼인도 할 수 있었다. 궁중에 일이 없을 때는 여성 범죄자를 조사하는 수사관 역할을 하기도 했고 궁중 연회에서 가무를 보여주는 기생 역할도 담당했다.(188 페이지)

 

낮은 물론 은밀한 왕의 잠자리까지 함께 한 지밀 나인들은 최고의 측근이 되었다. 침방, 수방, 소주방, 생과방, 세수간, 세답방 등의 나인들은 굳이 밤까지 일할 필요가 없었다. 왕과 왕비의 침실에 관심을 가지면 대역죄로 내몰렸다. 왕이나 왕비가 어느 방에서 잠을 자는지, 누가 침실을 지키는지, 몇 명이나 지키는지 등은 국가 최고의 기밀이었다. 긍궐의 특성상 수완이 좋은 궁녀는 각종 이권에 개입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궁녀들은 재산 증식에 열심이었다. 궁녀는 긍정적으로 보면 혼인을 포기한 전문직 여성들이라 할 수 있다. 궁녀들이 꽃놀이나 뱃놀이를 갈 때 기생은 물론 액정서(掖庭署)의 별감이나 궁의 남자 종들도 여보란 듯이 거느리고 다녔다.(214 페이지)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상궁으로 있었던 박씨는 대궐 밖에 자기 소유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해 국가의 공증을 받기도 했다. 액정(掖庭)은 궁궐 영역을 뜻한다.

 

박씨는 당연히 소작인이나 노비에게 토지를 경작시켰다. 많은 소작료를 거두었다. 박씨는 양손자에게 재산을 전부 물려주었는데 양손자는 이를 곧바로 팔아버렸다. 비녀를 꽂고 어른 복장인 배자를 입고 하는 계례(筓禮)가 있다. 긍녀들도 계례를 치렀다. 성인식과 혼례식을 결합한 의례다. 궁녀들은 혼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실제는 신랑 없이 혼례식을 치렀다.

 

어려서 입궁한 궁녀가 자신의 상전과 맺는 관계는 주인과 여종의 관계였지만 그들은 형식적인 주종관계를 넘어 심정적 의리 관계를 맺곤 했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열세 살에 궁녀가 된 계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궁녀가 된 지 7년만에 인조 반정을 만나 유배를 갔다가 다시 소현세자의 나인이 되어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궁까지 되었다. 더욱 원손의 보모 상궁이 되어 인조 이후 2대까지의 영화를 보장받았다.

 

그녀는 30여년 궁녀 생활의 마지막을 자신의 주인인 강빈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지킴으로써 마감했다. 상궁과 나인 등 정식 궁녀는 기본적으로 왕이나 세자 등 주인의 여자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간통은 무거운 처벌로 처리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사형수들을 가을에 처형했다. 그 기간에 국가에 경사라도 생기면 사면되었다.

 

반면 모반대역(謀反大逆) 죄인은 부대시형(不待時刑)을 받았다. 곧바로 처형된 것이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벌한 것이다. 상궁이나 나인의 간통은 부대시형으로 처리되었다. 절대 살려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궁녀는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성을 단념해야 했다. 상대 남자도 목을 베었으니 남자도 궁녀와 사랑을 나누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간통하여 임신한 경우에는 출산 후 바로 죽였다.

 

그럼에도 궁녀들의 간통은 근절되지 않았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곤장 100대에 처했다. 출궁한 궁녀들의 성을 금지한 결정적 이유는 비밀 유지 차원이었다. 남자들의 온전한 혈통을 지키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출궁 전에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출궁 이후에는 여승이 되어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사도세자의 지밀 상궁인 수칙 이씨도 궁에서 나갔다.

 

그 전에 궁에서 나온 이모를 찾아가 몸을 의탁했다. 궁에서 나온 수칙 이씨는 스스로 죽을 작정을 한 듯 보였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했다. 수칙 이씨는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정조가 궁녀를 보내 조사를 명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수절하며 어렵게 사는 궁녀 소식에 얼마나 감동했겠는가.

 

정조는 수칙 이씨에게 종 2품을 내렸다. 궁녀들은 한 방에서 2, 3명씩 생활했다. 궁궐이라는 한정된 공간 때문이었다. 상호 감시를 위해서였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이유로 동성애가 생겼다. 세종의 큰 며느리 순빈 봉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밀 상궁인 소쌍이 파트너였다. 세종은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이 정이 깊어져 미래를 언약하며 청옥관자를 주고 받은 사건을 참형으로 다스렸다.

 

세조는 나에게는 문()에는 귀성군(龜城君)이 있고 무()에는 홍윤성이 있으니 족히 근심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귀성군은 세종의 손자이자 세조의 조카였다. 귀성군 이준은 18세에 병조판서, 28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귀성군에게 덕중이라는 궁녀가 편지를 보냈다. 사모하는 감정을 절절히 쓴 편지였다. 죽음을 무릅쓴 편지였다. 수양대군의 아이를 낳은 덕중은 후에 소용(昭容)이 되었다.

 

세조의 부름을 받지 못해 외로워진 덕중은 내시 송중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이에 경악한 송중은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세조는 덕중을 살려주었다. 다만 덕중을 특별 상궁으로 강등시켰고 내시 송중도 그대로 궁중에서 일하게 했다. 그런 덕중이 귀성군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갈피를 잡지 못한 귀성군은 아버지(임영대군)에게 고백했고 아버지는 다시 형 세조에게 고했다.

 

이번에도 세조는 대범하게 처신했다. 덮어두었으나 다만 덕중을 방자로 강등시켰다. 덕중은 그 이후에도 귀성군에게 편지를 보내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귀성군에게 죄는 저들(편지를 전해준 내시 포함)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내시 후보자를 화자(火者)라 한다. 효자동은 내시들이 모여살던 화자동이 바뀐 것이다. 은평구 갈현동의 궁말이란 마을은 출궁한 궁녀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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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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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17세기 지식인들의 계보를 훑은 책이다.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 김육(金堉), 장유(張維), 송시열(宋時烈), 윤휴(尹鑴), 유형원(柳馨遠), 이현일(李玄逸), 남구만(南九萬),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형제 등을 조명했다. 김장생은 송익필, 이이, 성혼 등 서인(西人) 학문의 기초를 세운 세 사람에게서 고루 학문을 배웠다. 김장생은 자신을 노둔(魯鈍: 굼뜨고 미련함)하다고 평했다.

 

그런 그에게 지적 원천으로 작용한 것은 꾸준한 독서였다. 김장생이 생전에 거둔 문인은 아들 김집을 비롯 송시열, 송준길, 장유, 최명길, 김류 등이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비롯 이황, 이이, 박세채, 송시열, 이언적 등이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여섯 사람이다. 김장생, 김집은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부자다.

 

19세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덕치는 조광조, 도학은 이황, 학문은 이이, 의리는 송시열, 예학에서는 김장생을 동국제일로 꼽았다. 김장생, 김집 부자는 이이의 학맥을 공고히 하고 예학의 태두로 한 시대와 산림정치를 열었다. 그들 대에 체질이 바뀐 서인의 일부는 17세기 후반 노론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에도 사대부층의 주류를 이어갔다.

 

산림(山林)이란 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 또는 산림독서지인(山林讀書之人)의 줄임말이다. 재야의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의 의미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천거에 의해 등용된 재야의 학자다. 산림의 전형이 정인홍(鄭仁弘)이다. 유학(儒學)의 숙제는 성인과 군주 사이의 피할 수 없는 틈을 메우는 것이었다.

 

1) 재주와 학덕을 겸비한 군주가 성왕을 표방하는 것, 2) 재상권을 중시하는 것, 3) 산림을 통해 세도(世道: 세상의 도)를 구현하는 것 등이 대안으로 꼽혔다. 1) 즉 군주성왕론을 이론까지 정연하게 아울러 국왕이 유학의 도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한 사례가 영조와 정조의 경우다. 2)의 대표가 정도전이다. 3)의 방식은 야인에 가까웠던 공자의 스타일이었고 사대부 중심 유학인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전형적 모델이었다.

 

산림은 사대부의 공론이 아닌 자기 정파의 여론만을 대변하는 난맥상을 보였다. 서양의 에티켓이나 매너가 자율적 개인 사이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것 즉 공존을 위한 수단이나 기능의 의미가 강한 반면 유교의 예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덕성이 외면적 질서로 드러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도덕 수양의 외화물이고 국가 차원에서는 덕치의 상징이었다.

 

왜란과 호란 후 사상계 전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당위가 생겼다. 예의 실천, 그 실천의 기준이 국가 전통이어야 하는가, 고례(古禮)여야 하는가, 성리학에 두어야 하는가를 두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예송(禮訟) 논쟁이 대표적이다. 대동법을 주장한 김육은 도학의 시대에 드물게 존재했던 제도개혁파였다.

 

북인인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에서 출향(黜享)할 것을 주장하자 김육은 정인홍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한 뒤 동맹 휴학인 공관(空館)을 감행했다.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남인, 김육은 서인이었다. 김육은 소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때 부친을 잃었고 임난 후에는 모친을 잃었다. 김육은 30대 후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 가평 청평)에서 10년간 농사를 지었다.

 

그곳에서 김육은 회정당(晦靜堂)이란 작은 집을 지었다. “군자는 험난한 상황에서도 천하를 경륜할 준비를 축적하면서 지극히 곤궁한 생활도 달게 여긴다. 소리를 거두고 빛을 갈무리하여 텅 비고 자취가 없는 상태로 있으니 그가 있는 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가 급기야 기운이 무르익어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 순식간에 번쩍이면서 산악을 뒤흔들고 하늘을 온통 환히 밝히니 이 기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회정의 작용이다.”

 

후배 장유(張維)의 해석이다. 기운은 순환하게 마련이니 어둠<> 다음에 밝음이 오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게 마련이다. 회정에는 세상을 경륜할 때를 기다리며 곤궁을 달게 여기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저자는 잠곡(潛谷)의 김육은 잠룡(潛龍)을 꿈꾸고 있었던가라 말한다.(57 페이지) 중년에 접어든 김육이 안목을 크게 넓힌 계기는 병자호란 발발 직전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였다.

 

당시 나이 57, 조선이 명에 보낸 마지막 사신이 김육이었다. 명에 다녀온 이후 그는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대동법 확대 시행을 강력 건의했다. 대동법은 현물로 받던 공물을 쌀이나 포()로 받은 제도다. 이 제도는 토지를 단위로 부과하는 것이어서 대토지 소유자들의 반발을 샀다. 방납 등으로 부당 이득을 취했던 서리(胥吏)와 그들과 이익을 공유했던 관리들도 문제였다.

 

김집은 대동법 시행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시행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덕성으로 인한 교화라는 이상적 원칙을 강조하다 보니 제도 개선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대동법 시행에서 이이의 뜻을 따른 사람이 김육이었으니 김집은 사조(師祖)의 뜻을 놓친 것이리라.

 

김집의 뒤를 이어 서인 산림을 대표한 송시열은 대동법을 옹호하며 스승 김집의 오류를 인정했다. 김육은 나는 어리석고 생각이 얕아 학문이 어떠한 것이지 잘 모른다. 다만 바라는 바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일처리를 실질적으로 하는 것이니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고 부역과 세금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공허하고 멀리 있는 것을 추구하여 뜬 구름과 같은 글은 숭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인조반정에 주역으로 참여한 장유는 병자호란 중에 최명길과 함께 강화(講和)를 주장했고 전란이 끝나고 모친의 상중임에도 삼전도비문을 작성했다.(최종 채택된 것은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장유의 딸이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다. 장유는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에 반발하고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둘었던 자유 사상가이자 양명학의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장유는 불가해한 세상사를 끝없이 물었다. 주자학은 주희 생존시에는 거짓된 학문<위학: 僞學>으로 비판받았지만 원나라에서 주자가 집주한 사서를 과거 시험의 기본 교재로 사용하면서 관학의 지위에 올랐다, 장유가 살았던 시대는 정파와 학파의 연계가 미약했던 시대다. 허균이 타고난 감성을 그대로 표현하자고 주장해 일대 파란을 낳았다면 장유는 허균처럼 인간의 진솔한 감정 표현을 강조하면서도 도덕적 정서와 수양을 강조했다.(88 페이지)

 

저자는 사대주의를 추구했던 조선인들과 현재의 우리 중 누가 과연 주체적인가를 묻는다. 사대(事大)란 맹자에게서 나온 개념이다. 물론 이는 사소(事小)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예에 기반한 쌍무적 책임을 동등하게 가지는 질서였다. 송시열은 실록에 3000번 정도 기록된 인물이다. 살아서 2000, 사후에 1000회에 육박했다. 그가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은 83세의 나이, 압도하는 풍모,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친 정치적 이력, 율곡학파를 주류에 올려놓은 학문적 업적 등으로 인해서다.

 

그는 평생을 두고 싸웠다. 학문을 두고 싸웠고 예법을 두고 싸웠고 국가 운영을 두고 싸웠다. 그는 일방 편향과 독점으로 특징지어진 인물이다. 2차 예송 논쟁 때 송시열은 예를 그르쳤다는 공격을 받아 장기로 유배되어 약 5년을 보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에 반대하다가 유배당하고 사사되었다. 송시열에 대한 재평가가 절정을 이룬 것은 정조대였다.

 

그가 후대에 더욱 인정받은 것은 의리 정신을 계승한 삶 자체 때문이었다. 정조는 송시열을 대뜸 주자의 후인(後人)이자 현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송시열은 금()에 대해 북벌을 주장한 남송(南宋)의 효종과 같은 묘호(廟號)를 사용하자고 제안해 관철시켰다. 윤선도가 송시열 등의 차자(次子) 강조 논리를 효정의 적통(嫡統) 부정 노리로 비약시켰다.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음으로써 빚어진 2차 예송 논쟁에서 현종은 경국대전의 맏며느리에 해당하는 복제를 결정하고 지난 날 기해예송까지 거슬러 판결해 송시열 등이 효종에게 잘못된 예를 시행했다고 비판했다.(115 페이지) 남인 집권기에 송시열은 주자의 저술을 보완하는 일에 매달렸다. 윤휴 등을 의식한 나머지 남인의 득세를 세도의 무너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막역한 친구였던 윤선거의 아들이자 제자였던 윤증과도 대립했다. 이를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한다. 송시열이 회덕(懷德), 윤증이 니성(尼城)에 살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김익훈 사건과 회니시비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섰다.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다. 송시열과 효종이 북벌 논의를 했거니와 박지원은 명분으로만 굳어진 북벌론을 배격한 반성적 북벌, 그리고 대안으로서의 북학을 추구했다.

 

학계에서는 윤휴를 탈주자주의자에서 주자상대주의자까지 다양하게 규정한다.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윤휴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백이(伯夷)에 비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학문 태도는 달랐다. 효종이 죽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1차 예송 논쟁 때 윤휴는 자의대비도 효종의 신하였으므로 마땅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시열은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는 주자의 견해를 들어 윤휴를 비판했다.(138 페이지)

 

윤휴는 주자의 학문적 공적을 인정했지만 그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해석했으니 조선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문(斯文: 유교의 도의나 문화) 시비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17세기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남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다. 유형원의 아버지 유흠은 21세에 과거에 급제한 재사(才士)였다.

 

유형원이 태어난 이듬 해 인조반정(1623)이 일어났고 부친 유흠이 유몽인(柳夢寅)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28세에 옥사(獄死)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 하나만으로도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겼다. 이 책은 거시 국가 개조론이라 할 수 있다.(165 페이지) 토지에서 노비제까지 당시 조선에서 이처럼 웅대한 구상으로 제도 개혁을 논한 책은 없었다. 물론 그 구상이 유형원 개인의 온전한 창조물일 수는 없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유형원의 구상에 주례(周禮)가 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166 페이지) ‘주례의 작자는 주나라의 기초를 놓은 주공(周公)이라 생각되었고, 따라서 그 방책을 실현한 주나라는 이상 국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저술 시기를 전국시대에서 전한(前漢) 사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례는 전국시대에서 전한에 이르는 시기의 이상적 국가관을 반영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례의 방식대로 공유를 실현한다면 그것은 사유에 기반해 지주로 존재했던 사대부들의 존립 근거를 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주례의 이상을 구현하려한 사람들은 대개 실패했다. 북송의 왕안석이 그랬고 조선 초 정도전이 그랬다. ‘주례의 핵심이라 할 정전제(井田制)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정당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실현 가능성에는 회의적이었다. 주자도 그랬다.

 

유형원의 학문을 이익이 계승했고 그것은 정약용에게로 이어졌다. 정조도 유형원의 애독자였다. ‘반계수록에 대한 평가의 절정은 화성(華城) 건설에서 나왔다. 유형원은 반계수록보유(補遺)편에서 수원부를 북쪽으로 옮기고 성곽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는데 화성은 그의 예언대로 옛 수원부의 북쪽 즉 팔달산 동쪽에 건설되었다. 정조는 화성 건설의 대강뿐 아니라 구획 정리나 건설비용 마련 등의 구체적 방책까지도 100년 전에 쓰인 반계수록과 일치하는 것을 보고는 그를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듯 하다고 감탄했다.(173 페이지)

 

현재 실학과 실학자의 정체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의문은 실학자로 규정된 개개인의 삶, 지향, 저술의 정확한 의미 등을 정밀하게 연구할수록 커지고 있다. 그들은 대개 성리학을 보완하는 이론, 성리학적 질서를 보완하는 사회 개혁을 주장했음이 실증되고 있다.(179 페이지)

 

갈암 이현일(李玄逸)은 기사환국으로 인해 두 번째로 세워진 남인정권을 대표하는 산림이었다. 이현일은 경기, 충청 지역에서 주류가 된 율곡학파는 비판하면서 영남에서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남명학파까지 외연을 확대하려 했다.(193 페이지) 남인은 탁남, 청남으로 나뉘었었다. 탁남(濁南)은 허적을 영수로 한 관료적 성격이 짙은 일파였고 청남은 허목, 윤휴를 영수로 한 산림적 성격이 짙은 일파였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란 시조로 유명한 사람이다. 저자는 남구만을 보면 정철과 윤선도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그들은 가사와 시조 문학의 최고봉으로, 관동의 신선과 보길도의 고고한 선비로서 다가온다. 그런데 정치 행적을 대입하면 그들의 이미지는 야누스처럼 바뀐다.(213 페이지)

 

정철은 기축옥사를 험하게 처리했고 윤선도는 예송논쟁을 종통 문제로 비화시켰다. 남구만은 정치적 이미지가 문학적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은 드문 경우다. 죽음을 부르는 상황까지 격화된 정쟁에서 그는 끝까지 온건론을 펼쳤다.(214 페이지) 저자는 안동 김씨가 아무런 노력 없이 왕실과의 혼인이라는 행운만으로 세도가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 말한다.(243 페이지)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형제는 안동 김씨였다. 김창협의 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1689년 기사환국이었다. 영의정인 부친 김수항은 사사되었고 영의정을 역임했던 둘째 아버지 김수홍은 유배지에서 죽었다.(249 페이지) 부친의 죽음을 절절히 자책하며 영원히 농부가 되겠다고 다짐한 상소대로 김창협은 경기도 영평에서 농암(農巖)으로 자호(自號)하며 은거했다.(249 페이지)

 

이후 그는 경기도 양주 지금의 미사리 북쪽변에 있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애서 아우 김창흡과 함께 많은 제자를 양성하다가 근처의 삼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농연(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성리학의 원칙을 지키며 문예 방면에서 새로운 조류를 만드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들 주변에서 성장한 이병연과 정선 같은 이들은 조선의 정서가 담긴 미학에 천착했고 각기 시문과 미술에서 이른바 진경문화의 전성(全盛)을 실현했다.(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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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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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세포가 후천적으로 변하는 것을 뇌 가소성 또는 신경 가소성이라고 한다. 신경 가소성(可塑性) 분야에서 말하는 뇌 재배선(配線)이란 말은 설레는 말이다.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는 바로 그 뇌 재배선을 화두로 삼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책이다. 책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뇌를 다시 배선시키는 수단은 읽기다. 우리 뇌는 새로 학습할 것이 나타나면 시각과 청각 등의 핵심 기능을 담당하는 구조와 뉴런 같은 본래 있던 부분들을 다시 정렬할 뿐 아니라 같은 영역에 있는 일부 뉴런 집단을 재정비해 새로운 기능을 맡게 한다.

 

읽기는 한때 우리의 고향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읽기 능력을 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책으로는 한때 읽기라는 고향집에 거하던 사람들에게 다시 책을 읽자며 보내는 인지신경학자 저자의 초대장이다. 이 책은 아홉 개의 편지로 이루어졌다. 어린 시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편지 형식의 책을 쓴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편지를 읽으며 마르셀 프루스트가 소통의 비옥한 기적(fertile miracle of communication)이라 부른 특별한 만남을 경험할 수도 있다.

 

저자는 고향집이라는 메타포에 이어 골방이란 메타포를 사용하기도 한다. 정보 과잉의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소화되고 밀도도 낮으며 지적인 부담도 적은 정보들로 둘러싸인 익숙한 골방으로 뒷걸음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는 것이다. 양손잡이 읽기 뇌(biliterate brain)를 중요하게 여기는 울프는 저자들의 지혜를 넘어 자신의 것을 발견해내는 것을 좋은 독자의 핵심이라 설명한다.

 

저자는 읽는 뇌를 우리 정신의 카나리아(유독 가스 누출 여부를 감지하기 위해 탄광에 들여보내던 새인 카나리아는 그 이후 어떤 징조를 미리 알아보는 수단을 의미하게 되었다.)라 부른다. 저자는 우리가 뇌의 아주 작은 부분만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케케묵은 유언비어라 설명한다. 읽기 회로는 뇌의 좌우 반구 안에 있는 네 개의 엽(전두엽, 측두엽, 두정엽, 후두엽)과 뇌의 다섯 개 층(가장 위의 종뇌, 그 아래 양옆에 붙어 있는 간뇌, 중간층의 중뇌, 그 아래쪽의 후뇌와 수뇌)을 통해 들어오는 입력값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읽는 뇌의 회로 안에는 은하수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연결이 일어난다. 읽기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공감 능력이다. 저자는 공감은 타인을 동정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타인을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관계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느낌 - 사고의 신경망 전체가 공감에 관여하는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보이는 사람들 다수는 이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고 감정표현불능증 환자는 아예 능력 자체가 없다.

 

거울 뉴런이 공감과 관계 있는 뉴런이다. 소설을 집중해서 읽을 때와 재미로 읽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이 다르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읽는 뇌 안에서 느낌과 생각이 연결되는 것이 생리적으로나 인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유추의 과정, 추론의 과정, 공감의 과정, 배경 지식의 처리 과정 사이의 연결을 꾸준히 강화하면 읽기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차원에서 유리해진다.

 

읽기를 통해 이런 과정들을 연결하는 법을 계속 배운다면 이는 삶에도 적용되어 자신의 동기와 의도를 구분할 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도 더욱 명민하고 지혜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공감을 통한 연민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전략적 사고에도 도움이 된다.(103 페이지) 깊이 읽기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인간 능력에 시간을 할애하려면 주의의 질이 높아야 한다.(116 페이지)

 

고독 속의 소통이 일어나려면 독자의 고요한 눈은 저자와의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은 정적(靜寂)을 유지해야 한다.(122 페이지) 우리가 인간적인 삶의 본질적인 복잡성에서 후퇴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협소한 지식에만 의지하게 된다. 기존 지식의 기반을 뒤집거나 시험해보지도 않고 기존 사고의 경계선 밖은 내다보지도 않게 된다.(124 페이지)

 

급증하는 정보에서부터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죽처럼 묽은 아이 바이트(eye byte: 한눈에 쉽게 일별할 수 있는 콘텐츠)로 이어지는 현재의 디지털 연쇄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의 경계가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의 주의와 기억의 질은 물론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 그리고 복합적인 의사결정 능력이 위축되지 않는다.(136 페이지) 우리가 읽는 것은 디지털 연쇄의 다음 연결고리인 쓰는 방식마저 바꿔놓는다.(141 페이지)

 

저자는 이 세상을 사랑할 새로운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는다. 그리고 이 세상을 뒤로한 채 자신의 상상 너머, 자신의 지식과 인생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읽는다.(160 페이지) 이 책에 흥미로운 단어들이 꽤 있다. tl: dr이란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too long: didn’t read의 약자로 너무 길어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헤밍웨이가 여섯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보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고 쓴 다음의 문장은 시린 감동을 준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사용한 적 없는 아기 신발 팝니다.’란 문장이다.

 

읽기 연구가인 저자는 아들 벤 이야기를 한다. 창의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지능이 높은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쉬운 읽기 스킬에서 문제를 지닌 아이 즉 난독증 아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좋은 사회의 세 가지 삶에 대해 말한다. 세 가지 삶의 첫 번째는 지식과 생산의 삶이고 두 번째는 즐기는 삶, 세 번째는 관조의 삶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관조의 삶이다. 독서에도 적용되는 미덕이다.

 

좋은 독자의 세 번째 삶은 읽기의 절정이자 두 삶의 종착지인 관조적 독서의 삶이다. 우리 안의 관조적 차원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의와 시간을 들여 유지해야 한다. 저자는 읽기의 기쁨이 삶을 바꿀 만큼 중요함을 보여준 예로 히틀러를 타도하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투옥되어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를 든다. 본회퍼가 나치 수용소에서 쓴 옥중서신에는 곤경에 처해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이 그려져 있다. 본회퍼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순수한 행복을 얻은 사람이다.

 

아이들의 지적 발달은 두 원칙(전통적인 유형의 지식과 디지털 문화) 사이에서 계속 진화해나가면서 사려 깊은 균형을 찾는 것에 달려 있다. 저자는 아이들이 사용자와 늘 조금은 떨어져 있고 약간은 대용품 같은 스크린을 접하기 전에 책의 물리적, 시간적 존재감을 먼저 체험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너무 빠르게 인지적으로 전자 기기에 내맡겨진 채로 끊임없이 화면에 빠지게 되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에 앉아 그 사람이 자신에게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는 체험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203 페이지)

 

부모들이 아이(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빈도가 줄어드는 것은 이해도 못하는 아기에게 읽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란 착각 때문이기도 하고 디지털 기기의 발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다.(207 페이지) 금지된 열매에 집착하고 때로 그것을 신비화해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강박의 동물이기도 하다.(215 페이지) 자신의 주의를 사로잡는 것에 집착하는. 아이들이 그러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저자는 국가 보고서 카드를 참고하며 미국의 초등학교 4학년생 가운데 3분의 2가 읽기 능력이 능숙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초등학교 4학년은 미래의 학습력이 달린 시기다. 저자는 국민 개개인이 능숙한 수준의 읽기 능력을 갖춰야만 비로소 각자가 계속 정교한 읽기 기술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나라의 지적, 사회적, 육체적, 경제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미래 미국 시민의 3분의 2 이상이 그 근처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임을 걱정한다.

 

언어와 학습 능력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엄청난 격차가 수백만 아이들의 삶에 영구히 고착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제대로 훈련된 전문가들을 갖춘, 더욱 종합적인 유년기 프로그램에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미국 아동은 공식적인 학교교육이 시작된 첫날 이미 인지적, 언어적 차이가 심대한 상태라고 한다. 나이와는 상관 없이 읽기 회로 전체를 도덕적 상상력으로 연결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의해 바뀔 수 있다.(246 페이지)

 

여덟 번째 편지는 양손잡이 읽기 뇌 만들기란 제목의 글이다. 양손잡이 읽기 뇌란 두 가지 읽기 능력을 모두 갖춘 뇌를 의미한다. 두 가지란 인쇄 기반 읽기 회로와 디지털 기반 읽기 회로를 말한다. 깊이 읽기 기술은 주의분산이나 공감력 약화 같은 디지털 문화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결정적인 해독제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디지털의 긍정적인 영향까지 강화한다.(266 페이지)

 

저자는 자신은 현실주의자이자 낙관론자라고 말한다.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한 세 가지 삶(지식과 생산의 삶, 즐기는 삶, 관조의 삶)을 언급했던 저자는 이 가운데 관조의 삶은 타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와 시간을 들여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285 페이지)

 

저자는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란 라틴어 즉 천천히 서두르기란 개념을 선보인다. 거시적으로는 미래를 만나기 위해 서두르되 우리 편에서 최선을 단한 생각으로 천천히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미시적으로 페스티나 렌테는 좋은 독자의 읽기 회로가 보여주는 전체 궤적을 상징한다. 먼저 지각한 것은 자동적으로 해독을 거쳐 개념으로 변형된다. 이때 시간은 의식적으로 느려지고 우리의 자아 전체는 생각과 느낌이 합쳐지는 정신적 폭포수로 젖어든다. 우리는 서둘러 그 안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독자의 내적 자아가 거주하는 이 보이지 않는 집을 잘 묘사한 것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에 나오는 램지 부인에 대한 묘사만한 것도 드물다.

 

저자는 읽기의 기쁨이 삶을 바꿀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박한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분명히 보여준 역사적 인물로 디트리히 본회퍼를 든다. 매리언 울프가 만일 우리 역사를 알았다면 안중근 의사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두 인물 모두 옥중에서 남다른(평온한, 곤경에 꺾이지 않는) 정신을 보여주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책을 포함해 인생과 자연의 가장 깊은 선함에 대한 불굴의 희망을 상징했던 책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본회퍼를 지켜주었다저자가 전하는 핵심은 우리가 디지털 연쇄 작용의 잠재적 위험을 모르고 있다가는 우리의 가장 반성적인 능력이 위협받을 수 있으며 결국 민주 사회의 미래에도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295 페이지) 저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다양한 견해들의 표출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지적 능력을 발휘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도록 교육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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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언 울프가 다시, 책으로에서 우려하는 것은 디지털 기기에 빠진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 보이는 산만함과 주의력 결핍. 낮은 몰입도 등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자와 디지털 기기의 집합적 주체성을 다나 해러웨이는 하나는 부족하고 둘은 너무 많다는 말로 표현했다.(‘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참고) 그들의 관계는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둘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관계를 표현하기에 하나라는 말은 부족하고 둘이라는 말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다나 해러웨이의 말을 보내고 복잡성에 대해 생각한다. 복잡성은 둘이면 좋아도 셋은 너무 많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복잡하지만 단순하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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