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 1682)의 집을 방문해 정원 그림을 그렸다는 소치(小痴) 허련(1809 1892)이 당나라 시대 사람 왕유(699 759) 1000년 이상 차이 나는 사람을 본받아 이름을 허유로 바꾸고, () 역시 왕유의 자를 따라 마힐이라 이름한 것은 그의 스승 김정희(1786 1856)가 청나라 시대 사람 옹방강(1733 1818)을 사모해 그의 호 담계(覃谿)를 따라 보담재(寶覃齋.. ‘에는 귀중하게 여기다란 의미가 있지요.)라 이름 한 것을 연상하게 하지만 김정희가 허유에게 너의 그림이 내 그림보다 낫다고 한 것처럼 허유는 본받음 면에서 스승이 50년 정도 선인(先人)인 옹방강을 본받은 것과 달리 무려 1100년 선인(先人)인 왕유를 본받아 스승을 일거에 뛰어넘었지요.. 허유는 소치 외에 노치(老痴)란 호도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꾸준히 어리석었다는 뜻인가요?

 

이런 겸양은 조선인의 취향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그에게서는 너무나도 상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는 스승 김정희와는 극적으로 다른 바이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소치는 김정희가 대치(大痴) 즉 원나라 화가 황공망의 호를 따라 지어준 것이니 명명(命名)의 독자성은 없지만 인품이 원만, 자애로웠다니 제대로 된 동정(同定)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렇게 쓰고 나니 문제가 있습니다. 허련의 허유로의 전환에 김정희의 영향력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허련이 허유로 이름을 바꾼 것을 허련이었다가 후에 허유로 바꾸었다고만 기록하고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하지 않아 답답합니다. 정확한 시점, 김정희의 영향 등과 관련해 정보주실 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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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과 몽촌토성 : 침묵에서 깨어난 한성 시기 백제의 도읍지 신나는 교과연계 체험학습 16
김기섭 지음, 서은경 그림, 이이화 감수 / 주니어김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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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시기 백제의 도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북성(北城)인 풍납토성은 39만 제곱 미터, 남성(南城)인 몽촌토성은 48만 제곱 미터의 면적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부여 백성들 일부가 남하해 한강 유역에 세운 나라다. 한성 시기는 기원전 18년에서 기원후 475년까지 약 500년간 지속되었다.

 

()이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은 담장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곳을 말한다. 칠지도로 유명한 근초고왕(13) 때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혀 가며 한반도의 서쪽과 남쪽 지역에서 위엄을 떨쳤다. 근초고왕 때 고구려와 벌인 전쟁(평양성 전투)에서 백제는 고국원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일로 광개토왕대왕비에는 백제가 아닌 백잔(百殘)이라 기록되어 있다. 잔은 잔인하다는 의미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에게 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21)은 목숨을 잃었다. 다음 왕인 문주왕은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웅진 백제는 475년에서 538년까지 지속되었다. 무령왕(25) 때 안정을 찾았고 다음 왕인 성왕(26) 때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겼다. 국호는 남부여로 고쳤다. 사비 백제는 538년에서 660년까지 지속되었다.

 

백제는 한성에 도읍을 세운 첫 나라다. 시기를 보아서도 백제의 최전성기는 한성 백제 시기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고 가장 먼저 망한 나라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 주몽은 부여 사람이었다. 주몽은 부여 왕자들이 시기해 죽이려 하자 졸본 부여로 도망쳐 왔다.

 

당시 졸본 부여의 왕은 주몽을 눈여겨 보았다가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시켰다. 졸본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은 왕이 되었고 소서노 사이에서 비류, 온조를 낳았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 사이에서 낳은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주몽이 죽고 유리가 왕이 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미추홀에 자리 잡았고 온조는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온조는 54개 부족 국가인 마한 땅을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갔지만 비류는 그러지 못했다. 비류가 도읍으로 삼은 미추홀이 농사가 잘 안 되어 백성들의 삶이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비류가 이끌던 세력도 온조가 흡수해 백제가 되었다.

 

백제는 왜()와 가까이 지냈다. 왜에 한자와 유교를 전해준 것이 백제고 갖가지 기술을 가르쳐준 것도 백제다. 칠지도(七枝刀)는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다. 백제는 개로왕 때 장수왕의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는 위기를 맞는다. 개로왕이 죽은 곳이 아차산성이다. 아차란 말이 붙은 것은 조선 명종이 홍계관이란 점쟁이를 실수로 사형시킨 곳이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5(을축년) 대홍수 때다. 1990년대 강남에 아파트 단지를 짓는 중에 성벽 안쪽을 파헤쳤다. 1997년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의 초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몽촌토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8년 올림픽 개최로 인해 공원이 조성되는 과정에서였다.

 

풍납토성은 하늘에서 보면 성벽이 일직선이다. 흙을 층층이 다져 가며 성을 쌓는 방식을 판축법이라 한다. 몽촌토성 안팎에는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 김구의 신도비가 있다. 몽촌역사관, 집자리 전시관도 있다. 몽촌토성은 위에서 보면 성 모양이 찌그러진 마름모꼴임을 알 수 있다.

 

성과 성 밖을 물로 가로막은 것을 해자라 한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작은 성을 보루라 한다. 성곽의 기초적 형태로 적군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도록 나무를 땅에 박아 가로, 세로로 엮어 만든 담을 목책이라 한다. 성벽 중 다른 곳보다 3에서 5미터 정도 높게 쌓은 곳을 토단이라 한다.

 

몽촌토성은 산에 쌓은 성, 풍납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다. 산에 쌓았기에 구불구불하고 불규칙하다.(몽촌토성) 평지에 쌓은 성이기에 일직선이다.(풍납토성) 백제 왕들은 제사를 자주 올렸다, 시조인 동명왕과 하늘에 드렸다. 남쪽에 제단이 있었다.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토기는 구은 강도나 흙의 질에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 한성을 함락시키고 평지성인 풍납토성 대신 산성인 몽촌토성에 주로 머물렀다. 몽촌토성은 방어용으로 지은 성이다. 풍납토성은 백성들이 사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몽촌토성은 낮은 곳은 판축법으로 쌓아올리고, 높은 곳은 삭토법으로 깎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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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함, 리듬감, 체계 등 세 가지가 결여된 3()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글쓰기도 숱한 노력이 담보되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법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의가 없는 사람이 글을 그렇게 쓰리라 생각한다. 좋은 옷을 차려 입고 패션 감각을 발휘해 멋을 내려고 하듯 글쓰기에서도 멋이라도 내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못 쓰지는 않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다.

 

그런 사람들은 글은 의미만 통하면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게 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그럼 글을 잘 쓰는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똑똑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은 저절로 되는 듯 싶은 주술(主述) 및 시제(時制) 일치를 퍼즐 맞추듯 하려 애쓰고, 주의를 기울이고, 기법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해 좋은 내용을 담으려고 열심히 읽은 인문, 자연과학, 문학, 철학 등의 내용을 반영하고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적절히 교차시키려 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힘들게 쓴 글이 오해 거리를 남기면 안 되기에 불명료한 부분이 없도록 보고 또 본다.

 

다른 분야에서는 미적거리기 일쑤이지만 글은 그나마 생각나면 바로 바로 쓰는 편이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성적인 언표까지 담아내려고 했었던 바 한때 나는 이런 나의 습성을 무한소(無限小) 미분(微分)을 통한 운동의 함수화가 매순간의 운동체의 위치 파악을 가능하게 한 사건에 비유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명한 비유도 아니고 겸손의 예법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피노자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자신의 전생은 물론 내생까지도 환하게 꿰뚫게 되었노라 한 내 사숙(私淑)의 스승이 이런 말을 했다.

 

"문자로써는 벨 수 없는 법이다. 말은 슬프게도 칼보다 쉽게 나오는 것, 그리고 이 쉬움이 허영의 첩경이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175, 176 페이지) 글쓰기에서 멋이라도 내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못 쓰지는 않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다고 했거니와 이 말은 아예 칼보다 쉽게 나오는 글 자체가 허영의 산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물론 허영이 꼭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최근 황산의 글쓰기의 모험 - 철학자들과 함께 떠나는을 주문했다. 이 책을 낸 출판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인문학 공부를 하는 것과 인문학 기반이 단단한 글을 쓰는 건 같지 않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공부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만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애써 공부한 것을 써먹으려다 글이 쓸데없이 현학적이 되거나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를 생각했다. 현학적이라 해도 내용이 탄탄하고 시의적절하다면 굳이 문제는 아니리라. 최근 읽고 있는 책이 오디세이아. 트로이 전쟁에 나선 오딧세이의 미인 아내 페넬로페는 남편이 살아 있음에도 구혼 대시를 한 남자들을, 영웅 라에르테스를 위해 수의를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놓고 밤에는 횃불을 곁에 두고 그것을 푸는 방식으로 속였다.(라에르테스는 페넬로페의 시아버지다.) 처음 읽었을 때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다시 읽으며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단순한 속임수가 어떻게 3년씩이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란 점이다.

 

스타벅스의 사이렌 이야기를 하며 가끔 페넬로페 이야기까지 하곤 했는데 그것이 민담 모티프가 그대로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무엇이라고 답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탄탄한 설득력을 갖춘 글이 결국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유명 영화감독이 쓰레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으니 써지긴 써졌다는 말을 했다는 기사를 최근 읽었다.

 

물론 이 사람은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다. 쓰레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으니 써지긴 써졌다는 말은 완벽주의 때문에 글을 시작하기 전까지 과하게 구상하고 궁리하는 등 자신을 참 많이도 괴롭히다가 결국 완벽과는 거리가 먼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전한 말이다. 나도 잡스런 글은 쉽게 쓰지만 부탁 받는 글이나 중요하게 응모하는 글은 시작점을 잡으려고 많이 고생하는 편이다. 이렇듯 참 많이도 힘들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것이 글쓰기다. 밝은 눈으로 작은 실마리를 날카롭게 잡아내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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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쿠다이 구니아스의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은 내가 완독한 첫 지구과학 책이다. 지구과학의 여러 아이템들 중 지층에 초점을 맞춘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지구의 역사는 생물이 탄생하기까지가 약 40억년, 탄생한 후 약 5억년으로 생물이 거의 없는 시대가 압도적으로 길었습니다.“(79 페이지)

 

빙하기가 끝난 후 맞은 현재의 이 따뜻한 시기를 홀로세라 부른다. 홀로(holo)는 전체를 의미하고, cenenew를 의미한다. 인간이 대지의 형태를 바꾼 것은 홀로세부터다.(82 페이지) 지금을 인류세(Anthropocene)로 부르기도 한다. 인간이 지질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어 부르는 표현이다.

 

모쿠다이 구니아스는 인간의 미래를 걱정한다. ”인류는 그 축적을 수백년 동안 모조리 써버릴 기세로 사용해왔습니다. 이대로라면 현대 문명은 오래가지 못해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지하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110 페이지), ”인류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만 합니다.“(120 페이지)

 

코로나 19 때문에 인간의 바깥 활동이 줄자 자동차와 발전소 등에서 나오는 오염가스인 이산화질소가 감소했고 지구 진동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차량에서 나오는 오염가스가 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지진이 줄었다는 소식은 놀랍기까지 하다.

 

선진국들은 이 교훈으로부터 무언가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사실 추상적인 인류세란 명칭보다 선진국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자본세란 개념이 옳다. 인류세든 자본세든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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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16
윤원근 글, 이남고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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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가운데 한 권인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만화로 소개한 책이다. ‘창조적 진화를 읽으려면 먼저 기계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계론은 자연 현상과 사회현상을 기계처럼 돌아가는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생각이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세계를 변하지 않는 기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 뒤 모든 현상을 이 기본 요소들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기계론은 모든 현상에서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기계론에서 시간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시간에 관계 없이 법칙은 적용되기 때문이다. 법칙이란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시간은 생명의 지속(持續)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생명과 과학은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생명은 창조하는 힘이고 과학은 단순한 모방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창조적 진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스펜서의 진화론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스펜서는 다윈보다 먼저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의 개념을 사용한 학자다. 다윈은 생물 진화론자, 스펜서는 사회 진화론자다. 베르그송은 스펜서의 진화론이 갖는 문제를 이미 진화가 이루어진 것을 사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보았다. 베르그송은 진정한 진화는 직접 그림을 그릴 때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베르그송 철학을 이해하려면 생명과 생명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구체적 형태를 갖기 위해 물질 속에 들어간 것이 생명체다. 생명체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지만 생명의 참된 성질은 물질적 욕구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베르그송을 윌리엄 제임스와의 관련하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끊임 없는 적응 과정으로 파악한 제임스는 인간 의식도 하나의 과정이나 흐름으로 보았는데 이는 생명을 창조적 과정 속의 흐름으로 본 베르그송 사상과 흡사하다. 지속(持續)하는 것은 항상 전체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흘러가는 물처럼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물은 고정과 정주(定住)를 거부한다.

 

지속하는 시간은 생명의 시간이고 지속하지 않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을 말한다. 진주 목걸이를 이어주는 줄이 지속하는 전체 시간에 비유될 수 있다. 과학은 시계의 시간으로 모든 계산을 한다. 지속과 변화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를 의미한다.

 

과학에서는 설탕물을 농도, 밀도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지만 설탕물이라는 전체 속에서 설탕과 물은 서로 뒤섞여 있다. 물질적 대상들도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는 그런 점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생명은 지속의 특징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의 진화는 지속의 과정을 통한 창조적 진화라 할 수 있다. 과학은 반복 가능한 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반복 가능한 것을 객관성이라 한다. 기계론과 같은 것이 목적론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이 현재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론의 과거가 목적론의 목적으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적론도 기계론처럼 생명의 자유로운 창조능력을 부정한다. 기계론이나 목적론은 미래를 예측하려는 눈물 겨운 노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신은 그 자신 안에, 그 자신의 본성 속에 그를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기에 생산할 필요가 전혀 없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참고)

 

진화를 적응 과정으로 보는 견해는 두 가지다. 정향 진화론과 다윈 진화론이다. 전자는 진화가 생존에 불리해도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계속 그 방향으로 나간다고 본다. 너무 긴 공작의 꼬리나 아일랜드 큰사슴의 큰 뿔이 대표적이다. 정향진화론은 외부 조건이 생명체의 변화를 직접 일으킨다는 직접적 적응을 주장한다. 후자는 외부 조건이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을 선택하고 불리한 변화는 도태시킨다는 간접적 의미의 적응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가리비조개 등의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을 설명한다. 두 동물은 전혀 다른 종인데 눈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이런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을 생물 종들이 동일한 근원을 가지며 이 근원이 하나의 폭발적 힘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고전의 유혹 3‘ 177, 178 페이지) 눈과 같은 기관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다. 구조의 복잡성과 기능의 단순함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엘랑 비탈이 진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철학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화약이 폭발하는 힘에, 그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을 화약의 폭발에 저항하는 탄피의 힘에 비유했다. 생명의 진화는 자기 안에 지닌 생명의 약동하는 힘과 그것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베르그송은 동물과 식물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기준은 없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체들은 초보적인 형태든 잠재적인 형태든 본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식물, 동물, 이성의 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물질성을 지배하는 질서라면 올라가는 것은 생명의 질서다. 여기서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사선(斜線)을 거슬러 오르는 노력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나는 엘랑 비탈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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