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의 영화 감독겸 소설가 닐 조던(Neil Jordan; 1950 - )의 ‘The Crying Game‘은 생각거리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강을 건너야 했지만 헤엄을 치지 못하는 전갈이 수영 명수인 개구리에게 자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가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개구리가 전갈이 자신을 쏠 것을 우려하자 전갈은 그러면 둘 다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
개구리는 숙고 끝에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사건이 일어난다. 전갈이 약속을 어기고 개구리의 옆구리를 쏜 것이다. 개구리는 분노에 차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왜 나를 찔러 둘 다 죽게 했느냐?“ 이에 전갈은 ”어쩔 수 없었어. 내 본능이야”란 말을 했다.
이 말은 결국 전갈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이를 철학은 실로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로 설명하는 철학자가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은 철학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 다르게 생각한다기보다 다른 면을 생각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닐 조던의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로부터 특이점이란 말을 떠올렸다. 자연과학 용어인 특이점은 인문학에 원용(援用)되곤 한다.
“무언가를 다른 것과 달리 특이하게 포착하게 해주는 것,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하게 해주는 것, 어떤 표정을 평소의 얼굴과 확연히 구별하게 해주는 것”을 특이하다고 한다.(이진경 지음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 220 페이지)
닐 조던의 이야기에 나오는 특이점은 둘이다. 개구리와 전갈이다. 그런데 개구리 자체만으로나 전갈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어떤 이웃을 만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는 칸트적 어법의 윤리학적 명제처럼 “좋은 특이성을 형성하는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는 말을 한다.(249 페이지)
전갈이 독침을 쏜 것은 철학함에 비유된다. 철학함은 곧 비판정신과 전복적 사유가 아닐지? 최진석은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꾸었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하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은 좋은 인문학일까?”란 물음을 던지며 인문학이 지금껏 불온하기는커녕 통념의 지지대 역할에나 겨우 안주해온 점을 비판한다.(’불온한 인문학‘ 83, 84 페이지)
여기서의 불온하다는 말의 의미는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이 인문학의 본령을 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다만 관건은 좋은 특이점이란 말이 있으니 나쁜 특이점이란 말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진리가 아닌가.
그럼 비판과 저항을 주제로 말할 경우 좋은 특이점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나쁜 특이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비판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선 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만큼 잘하고 있으며, 내가 가하는 비판이 나에게 적용될 여지는 없는가, 란 의문이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는 인성적으로 문제를 가진 사람이 강의를 제의했기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친구에게 ’그런 사람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나에게 전해지는 이런 말이 칭찬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나 홀로 이룬 성과가 아니라고 믿는다.
다시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에 의하면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고 “나는 언제나 원인인 동시에 결과”다.(250 페이지) 공감하는 바이다. 덧붙일 것은 그럼에도 나의 주체적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참된 인식은 자기 부정의 연속”으로 “인식이란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표상을 더 참된 표상으로 끊임없이 변환하는 과정”(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09 페이지)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표상을 더 참된 표상으로 끊임없이 변환하는 과정을 베케트 식으로 말하면 다시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번에 참된 인식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실패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낫게 하라는 의미로 들린다. ’인간의 얼굴‘의 저자는 자기 부정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역시 공감한다.
’인간의 얼굴‘의 저자는 대중은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더 이상 정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을 7대3으로 해서 50대가 될 때까지 3천권 정도를 집요하게 읽음으로써 정보가 서로 링크되게 해 양이 질로 바뀌는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글(박문호 지음 ’뇌, 생각의 출현‘ 481 페이지)과 비교하고 싶다.
’일정한 나이’라는 말과 ‘50대가 될 때까지’란 말을 비교하고 싶은 것이다.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더 이상 정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음으로써 질문 거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나쁜 순환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는 “물음의 특이성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답들을 방향짓”는다는 말을 한다.(244 페이지) 물음의 특이성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말은 책쓰기에도 해당한다. 마르크스와 스라파 등의 경제학자와 함께 이윤율 등의 개념을 언급하며 복잡한 경제 수학 풀이를 시연하는 국문학자 김인환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어디까지나 책의 안내를 받으며 기본 개념을 습득하고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여 사태를 실험하고 측정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지식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읽고 새 책을 쓰는 것이다.”(‘글쓰기의 방법’ 117 페이지)
답(答)은 아무리 잘해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데 그치게 된다. 질문 하고 나 스스로 설정한 의문을 따라 궁리해야 내 이야기의 길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수불석권(手不釋卷)하는 것은 앎의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돌아보는 것이 일상적일 만큼 왠만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利)보다 의(義)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를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대의명분을 주장하기보다 불의한 일을 마주치면 내 몫을 포기한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내가 모임의 일원 가운데 이기적인 사람을 두고 비판하자 전기한 친구는 자신도 그 사람이 이기주의적임을 종종 느끼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타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인간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이보다 의를 생각하되 물러서는 내 습성은 어쩌면 겨울의 살얼음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조심하며(여; 與), 신중하게 사방을 경계해 경거망동하지 말라(유; 猶)는 의미의 여유당을 당호로 삼은 다산 선생처럼 조심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이 많다.
이런 글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위선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기에 인간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위선됨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한다. 위선적이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왜 자신은 위선적인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물고 늘어진다.”(오길영 지음 ‘아름다운 단단함’ 28 페이지)
내게는 그렇게 무엇인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공부다. 그것은 나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내 주위의 세계를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기했듯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고 “나는 언제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기 때문이다.
글을 성의 없이 쓰는 주위 사람을 보고 쓴 글로 인해 알라딘에서 2만원의 적립금을 받았다.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현실을 증거하는 ‘사건’일 수 있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분께 어쩔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글을 읽고 “글의 무게 앞에서 다시금 할 말이 저절로 줄어”든다는 피드백을 해준 전기한 친구에게도 그렇다. 무게감 있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를 두고 쓴 글은 완성형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전기한 ‘아름다운 단단함’의 글을 응용해 말하자면 글과 글을 쓴 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좋은 특이점이 되어준 친구는 물론 의도는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결국 좋은 특이점이 되어준 분에게도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