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비어 수준의 역사가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 영조가 정성왕후 서씨를 미워하게 된 경위를 말하는 기사도, 책도 일화가 있다고만 이야기하니 말이다.(문서 자료가 없이 민간에서 구전되던 이야기인가?) 첫날밤에 영조가 정성왕후에게 손이 곱다고 말하자 정성왕후가 고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영조는 다시 정성왕후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책은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져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어떻든 영조와 정성왕후 이야기는 지난 해 칠궁(七宮)에서 담당 해설사로부터도 들은 이야기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일화가 사실일 경우 영조의 성격이 참 기이하다는 것이다. 물론 영조는 이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까다롭고 별났다.

 

어떻든 기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영조가 첫날밤 사건으로 다시 찾지 않은 정성왕후가 죽자 홍릉(弘陵)을 조성한 뒤 그 옆자리를 신후지지로 삼았기 때문이다.(첫날밤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영조가 정성왕후를 박대하고 무시한 것은 사실이라 해야 하겠다.) ‘한중록에 수록된 영조의 성격은 편집증적이거니와 자격지심과 열등감(특히 아들에 대한)을 전매특허처럼 지니기도 했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복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정조가 103년간 비어 있던 묘자리(효종이 묻혔던 곳)에 영조를 묻은 것을 복수라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대하고 자신을 친손자처럼 대해준 정성왕후를 영조와 함께 묻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갚은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가 자신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했으나 근본을 둘로 하지 않을 것이라 결론지었음에도 앞 부분만 언급하며 그것을 복수를 천명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할만큼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계했던 자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수라기보다 최소의 불가피한 개입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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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5월 13일) 재인폭포 해설지에서 국립문화재 연구소 직원들의 방문을 받았다. 연구차 대전에서 먼 이곳까지 찾아온 분들이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역사 파트에 대한 임팩트 있는 소스좀 주세요.'라는 말을 했다. 물론 내 말은 전달 방식도 분류도 잘못된 것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고(考古) 연구, 미술문화재 연구, 건축문화재 연구, 보존과학 연구, 복원기술 연구, 자연문화재 연구, 안전방재 연구, 교류협력 등의 분류 체계를 취했다. 사실 이런 것을 검색하지 않는 이상 국외인으로서 상세히 알 수는 없으리라.

 

그러면 나는 어떤가? 해설하는 나는 관람객들께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까? 현무암 vs 화강암, 지진, 화산 등으로 지구가 크고 드라마틱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식 vs 침식, 풍화 등 지구가 끊임없는 속삭임 같은 제스처로 자신을 알리는 방식, 심성암(深成巖) vs 화산암(火山巖) 등을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알리지만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분류보다 폭포 자체일 것이다.

 

나는 아직, 그리고 여전히 서울이 익숙하지만 한양도성은 내가 거의 유일하게 불편해 하는 해설지이다. 이번 주말 나는 그 마() 같은 장소인 낙타산 일대를 해설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화산(花山)에 자리한 융건릉(隆健陵)과 용주사를 해설해야 한다.

 

한양도성의 네 산을 높이(백악, 인왕산; 340미터 내외/ 목멱산; 260미터/ 낙타산; 125미터)를 기준으로 볼 수 있듯 화산(華山)도 높이로 볼 수 있다. 화산의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은 가운데 동쪽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어 화산의 양 날개 품에 능이 하나씩 안겨 있는 형상이다.(차윤정 지음 다시 걷고 싶은 우리 숲’ 33 페이지)

 

화산의 가장 높은 곳은 108미터에 이른다. 한양도성에서 풍수상 자손을 상징하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타산은 다른 산들에 비해 높이가 낮아 우려와 그에 따른 대책을 불렀지만 그보다 낮은 화산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아늑하고 친숙한 산으로 이름이 높다.

 

시민들에게 낙타산의 지세가 갖는 풍수적 의미보다 실재적인 것은 산책하며 쉬기 좋은 산이라는 점이리라. 정조에 의하면 화()는 화(). 화성(華城)은 화봉삼축(華封三祝) 고사에서 유래했다.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 사람이 요임금에게 수(), (), 다남자(多男子) 등 세 가지 축원을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런데 요임금은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번거로운 일들이 많아지고, 아들이 많으면 근심거리가 많아진다는 이유로 모두 사양했다. 화성(華城)이란 이름에서 정조는 요임금처럼 덕을 펴는 도시를 의도했고 백성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장수, 부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를 의도했다. 문제는 화봉삼축은 좋은 내용이었지만 당사자로부터 거절당했다는 점이다. 이 경우 분류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흘 전 재인폭포에서 일행 몇이서 GEO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궁리하는 모습이 보여 설명했다. geogeology(지질학)에서 유래했다는 말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는 geography(지리학)도 있다는 점이다.

 

지질공원이라고 지질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능력을 논하기 이전에 그래서 안 된다. 지질공원이지만 지리 이야기도 하는 것이 순리이고 바람직하다. 지질학과 지리학이 같은 영역을 다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리학은 인문지리학, 자연지리학 등으로 나뉘고 지질학은 자연과학 자체라 할 수 있기에 인문지질학, 자연지질학 등의 분류 자체가 없다.

 

내가 말하는 지리학은 인문지리학이다. 지리학을 공간과 장소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이현군 지음 서울, 성 밖을 나서다’ 20 페이지) 어떤 의미에서 지리(地理)가 지질(地質)보다 더 중요하다. 옥석의 무늬, 틈 등을 의미하는 절리(節理)라는 말이 있지만 지리(地理)는 무엇일까? 땅의 무늬라 할 수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잉여존재(être de trop)라는 말을 지구의 혹(식물의 줄기, 뿌리 따위에 툭 불거져 나온 것)이란 말로 바꿔 불러도 좋다. 사람은 결국 지()에 얹혀 사는 무늬 즉 혹 같은 존재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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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 비오는 가운데 J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 프런트 직원으로부터 두 권이 반납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의아했지만 여덟 권만 빌려 집에 왔다. 오늘 이리 저리 아무리 찾아보았지만 한 권이 보이지 않았다. 한 권은 더 읽을 필요가 있어 놓아둔 상태였고.

 

지난 57(목요일) 서울 도서관 반납함에 책을 넣을 때 혹시 J 도서관 책도 넣은 것인가 생각해보았으나 그렇다면 내게 전화가 왔을 텐데 오지 않았으니 그 경우는 아닌 것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가능성으로 Y 도서관에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Y 도서관의 대출 현황을 조회하니 410, 420, 428일 등 세 차례 두 권 이상씩의 책을 반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만일 J 도서관 책을 Y 도서관 반납함에 넣었다면 연락이 왔을 것인데 역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J 도서관과 Y 도서관은 같은 군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다.) Y 도서관이 5월부터 리모델링 공사중인데 내가 그 5월 이후 책 한 권을 그것도 J 도서관 것을 가지고 Y 도서관에 가서 반납했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울 지하철 유실물 센터를 뒤질 생각으로 정보를 수집해놓기까지 했다.

 

J 도서관에 전화를 해 상황을 말하기도 했다. 간부급의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J 도서관 책을 Y 도서관 반납함에 넣었다 해도 도서관 리모델링 공사로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통보 자체가 아예 유예되거나 출근한다 해도 전화할 여유가 없을 테니 한번 알아보아달라는 의미였다. 그는 반납일(20)까지 시간이 많으니 다시 잘 찾아보라는 말을 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찾아보았으나 책은 나오지 않았다. 10분쯤 후 그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아보라는 지시를 하자 프런트 직원이 금방 찾아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아까운 돈을 들여 새 책을 사 내야 하는 것인가 싶어 마음을 끓이며 찾았던 탓에 너무 힘들었으나 해피엔딩이어서 어떻게 된 것일까요?라는 말 외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직원은 저도 모르죠, 라 말했다. 나는 제가 실수한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라 답했다. 오랜 세월 책 빌리느라 친해진 직원들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책 더미에서 지난 7일 반납한 서울 도서관의 부록 자료 하나가 누락된 채 있는 것이 보여 너나 없이 실수란 일상적이구나, 란 생각을 했다. 서울도서관 직원은 코로나로 인해 드라이브 스루 대출을 하느라 도서관 정문 앞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부록 자료가 있는지 여부를 체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명백한 내 잘못이다. 덧붙인다면 J 도서관에 9권의 책을 반납하며 어떤 책들을 반납했는지 기억하지 못한 것 역시 내 잘못이다.

 

직원이 미처 반납 처리하지 못했어도 내가 기억했다면 바로 알아 차렸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너무 지나친가? 서울도서관처럼 책 반납 영수증을 발행해준다면 이런 소동은 빚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바로 반납 처리 권수를 확인하고 틀릴 경우 대조해보는 최소의 노고를 치러야 유효한 말이다.

 

지난 55일에는 답사 마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내 책을 들고 다니며 책들을 읽다가 오래 고대하던 '그 책'을 발견하고 한참을 읽었다. 그 감동에 취해서인지 내 책을 옆 책 위에 두었던 것을 잊고 서점을 나서려다가 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다녔던 길을 되짚어 10분 이상 헤맨 끝에 책을 발견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를 정도로 ''를 잊고 몇십 분을 몰입 독서했다는 점에서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책으로 인해 행복하고 책으로 인해 헛웃음 짓는 것도 추억 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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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아시모프의 우주의 비밀은 재미 있다. 책 자체가 재미 있을뿐 아니라 내가 아시모프의 책처럼 지질 이야기를 재미있게 써야지, 라고 생각하며 참고 서적으로 아시모프의 책을 우주의 비빌이라 기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지질의 영향으로 비밀을 비빌이라 기록한 나!)

 

이 책에서 나는 맨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5백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논의 역설(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지 못한다.), 아킬레스는 111/9m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거북이를 따라잡는다는 말로 논파한 제임스 그레고리란 수학자에 대해 알았다.

 

맨 눈으로 확인 가능한 별 이야기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니라란 창세기(155)에 대한 논파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아시모프는 맨 눈으로 확인 가능한 별의 수는 6000개 정도가 나오지만 한 순간에 지평선 위에 떠 있는 별의 수는 그 반이며, 또한 지평선 근처에 있는 별들은 아주 맑은 밤이라도 대기의 영향으로 빛이 퇴색하기 때문에 아브람이 셀 수 있었던 별의 총수는 기껏해야 2500개를 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제임스 그레고리는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앞서 있는 거리들의 합을 111/9m라 계산했다.(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리기에 100m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가 10m 앞서서 출발하게 했다.)

 

물론 나는 아킬레스가 111/9m를 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거북이를 따라 잡는다는 말보다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추었다가 다시 시동을 걸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탄력을 유지해) 달리기 때문에 거북이를 따라잡는다는 말이 더 실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낸 것은 오늘 동료 지질 해설사에게 방문객 한 사람이 화성(火星)이 언제 생겼는지 물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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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영화 감독겸 소설가 닐 조던(Neil Jordan; 1950 - )‘The Crying Game‘은 생각거리를 전해주는 작품이다. 강을 건너야 했지만 헤엄을 치지 못하는 전갈이 수영 명수인 개구리에게 자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가 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개구리가 전갈이 자신을 쏠 것을 우려하자 전갈은 그러면 둘 다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

 

개구리는 숙고 끝에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강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사건이 일어난다. 전갈이 약속을 어기고 개구리의 옆구리를 쏜 것이다. 개구리는 분노에 차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왜 나를 찔러 둘 다 죽게 했느냐?“ 이에 전갈은 어쩔 수 없었어. 내 본능이야란 말을 했다.

 

이 말은 결국 전갈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이를 철학은 실로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로 설명하는 철학자가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은 철학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사실 다르게 생각한다기보다 다른 면을 생각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철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든 나는 닐 조던의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로부터 특이점이란 말을 떠올렸다. 자연과학 용어인 특이점은 인문학에 원용(援用)되곤 한다.

 

무언가를 다른 것과 달리 특이하게 포착하게 해주는 것,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하게 해주는 것, 어떤 표정을 평소의 얼굴과 확연히 구별하게 해주는 것을 특이하다고 한다.(이진경 지음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 220 페이지)

 

닐 조던의 이야기에 나오는 특이점은 둘이다. 개구리와 전갈이다. 그런데 개구리 자체만으로나 전갈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은 어떤 이웃을 만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는 칸트적 어법의 윤리학적 명제처럼 좋은 특이성을 형성하는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는 말을 한다.(249 페이지)

 

전갈이 독침을 쏜 것은 철학함에 비유된다. 철학함은 곧 비판정신과 전복적 사유가 아닐지? 최진석은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꾸었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하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은 좋은 인문학일까?”란 물음을 던지며 인문학이 지금껏 불온하기는커녕 통념의 지지대 역할에나 겨우 안주해온 점을 비판한다.(’불온한 인문학‘ 83, 84 페이지)

 

여기서의 불온하다는 말의 의미는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이 인문학의 본령을 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다만 관건은 좋은 특이점이란 말이 있으니 나쁜 특이점이란 말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진리가 아닌가.

 

그럼 비판과 저항을 주제로 말할 경우 좋은 특이점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나쁜 특이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비판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선 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만큼 잘하고 있으며, 내가 가하는 비판이 나에게 적용될 여지는 없는가, 란 의문이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는 인성적으로 문제를 가진 사람이 강의를 제의했기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친구에게 그런 사람의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나에게 전해지는 이런 말이 칭찬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나 홀로 이룬 성과가 아니라고 믿는다.

 

다시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에 의하면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고 나는 언제나 원인인 동시에 결과.(250 페이지) 공감하는 바이다. 덧붙일 것은 그럼에도 나의 주체적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참된 인식은 자기 부정의 연속으로 인식이란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표상을 더 참된 표상으로 끊임없이 변환하는 과정”(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09 페이지)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자신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표상을 더 참된 표상으로 끊임없이 변환하는 과정을 베케트 식으로 말하면 다시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번에 참된 인식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실패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낫게 하라는 의미로 들린다. ’인간의 얼굴의 저자는 자기 부정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역시 공감한다.

 

인간의 얼굴의 저자는 대중은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더 이상 정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자연과학 대 인문과학을 73으로 해서 50대가 될 때까지 3천권 정도를 집요하게 읽음으로써 정보가 서로 링크되게 해 양이 질로 바뀌는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글(박문호 지음 , 생각의 출현‘ 481 페이지)과 비교하고 싶다.

 

일정한 나이라는 말과 ‘50대가 될 때까지란 말을 비교하고 싶은 것이다.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더 이상 정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음으로써 질문 거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나쁜 순환의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의 저자는 물음의 특이성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답들을 방향짓는다는 말을 한다.(244 페이지) 물음의 특이성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말은 책쓰기에도 해당한다. 마르크스와 스라파 등의 경제학자와 함께 이윤율 등의 개념을 언급하며 복잡한 경제 수학 풀이를 시연하는 국문학자 김인환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어디까지나 책의 안내를 받으며 기본 개념을 습득하고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여 사태를 실험하고 측정함으로써 새로운 지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지식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일은 책을 읽고 새 책을 쓰는 것이다.”(‘글쓰기의 방법’ 117 페이지)

 

()은 아무리 잘해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데 그치게 된다. 질문 하고 나 스스로 설정한 의문을 따라 궁리해야 내 이야기의 길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이 늦은 나이에 수불석권(手不釋卷)하는 것은 앎의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돌아보는 것이 일상적일 만큼 왠만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보다 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를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대의명분을 주장하기보다 불의한 일을 마주치면 내 몫을 포기한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내가 모임의 일원 가운데 이기적인 사람을 두고 비판하자 전기한 친구는 자신도 그 사람이 이기주의적임을 종종 느끼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타적이거나 공동체적인 인간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이보다 의를 생각하되 물러서는 내 습성은 어쩌면 겨울의 살얼음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조심하며(; ), 신중하게 사방을 경계해 경거망동하지 말라(; )는 의미의 여유당을 당호로 삼은 다산 선생처럼 조심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이 많다.

 

이런 글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위선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기에 인간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위선됨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한다. 위선적이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왜 자신은 위선적인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물고 늘어진다.”(오길영 지음 아름다운 단단함’ 28 페이지)

 

내게는 그렇게 무엇인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공부다. 그것은 나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내 주위의 세계를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기했듯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고 나는 언제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기 때문이다.

 

글을 성의 없이 쓰는 주위 사람을 보고 쓴 글로 인해 알라딘에서 2만원의 적립금을 받았다. 어떤 결과도 언제나 나와 나 아닌 다른 특이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현실을 증거하는 사건일 수 있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분께 어쩔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글을 읽고 글의 무게 앞에서 다시금 할 말이 저절로 줄어든다는 피드백을 해준 전기한 친구에게도 그렇다. 무게감 있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를 두고 쓴 글은 완성형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전기한 아름다운 단단함의 글을 응용해 말하자면 글과 글을 쓴 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좋은 특이점이 되어준 친구는 물론 의도는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결국 좋은 특이점이 되어준 분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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