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11월 이래 인터넷 서점 블로그에 글을 써서 모두 100 차례 이상 적립금을 탔다.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란 작품이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적립금 수상자가 되게 한 책이었다.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금도 플래닛 워커란 개념이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행성을 걷는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개념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존 프란시스는 의도에 따른 전면적 걷기를 수행한 사람이고 나는 필요 차원에서 아주 제한적인 걷기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플래닛이란 말의 어원이다. 지오가 지각, 지질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구를 의미하는 반면 플래닛은 방랑자를 의미하는 천문학적 개념인 행성이기 때문이다. 지구를 공전도 하고 자전도 하는 방랑하는 구체(球體)로 본 것이 플래닛이란 개념이다. 다만 지오는 지구(Geo)를 그림으로 표현(graph: write)하는 학문인 지리학과 지구에 대한 학문인 지질학으로 나뉜다. 지리학이 지질학보다 매력적인 어원을 가진 학문임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상기한 책의 저자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灣의 대형 원유 유출 사건에 자신도 무관할 수 없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침묵하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 평화와 환경 캠페인을 호소하는 지구 순례에 나서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긴 서두로 글을 시작한 것은 그제(5월 19일) 재인폭포로 가는 길에 느낀 감회를 말하기 위해서다. 고문리에 한탄강댐이 생기기 전까지 재인폭포까지 운행하던 버스를 이제는 마을이 있는 곳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차가 없는 나는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을에서 재인폭포까지 빠른 걸음으로 22분 정도가 걸린다.
엉겅퀴와 메타세콰이어를 볼 수 있고 새 소리나 맹꽁이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길이다. 그제는 어둡게 내려 앉은 하늘을 보며 걷다가 목적지를 반쯤 남겨두었을 무렵 결국 비를 만났다. 책을 빌리기 위해서나 답사를 위해서나 걷곤 하지만 해설 지점에 가기 위해 걷는 것은 처음이어서 아직 감회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묘한 기분이 든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다. 지난 5월 6일 이후 몇 번 걸은 결과 꽤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몇 차례 더 걸으면 걷기 명상을 수행하는 것 같을 수 있고 지질해설에 필요한 영감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근무 시작 시각인 10시 안에 도착하려면 전곡 버스 터미널에서 8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한다. 전곡에서 같은 군내의 지점에 가기 위해 두 시간 전에 버스를 타는가, 란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겠지만 사정이 있다. 이 버스를 타고 가야 근무 시작 시각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나는 더 천천히 걸어도 되는 이 시간대의 길을 빨리 걷고 있다. 굳이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8시 다음 버스는 9시 25분에 출발하는 버스인데 이 차를 타면 마을이 있는 곳에 9시 50분쯤에 도착하고 근무지에는 시작 시각인 10시를 넘긴 10시 15분 쯤에 도착하게 된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의 차를 타고 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그 정도일 뿐 아니라 나는 여유가 되면 백의리층과 신답리 키푸카, 아우라지 베개용암, 좌상바위 등을 볼 수 있는 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걷고 싶다.
베개용암이나 좌상바위에 지질 해설 포스트가 생기면 전곡에서 청산이나 포천 가는 버스를 타고 우체국 앞에서 내려 지금 재인폭포를 가기 위해 마을에서 25분 정도 걸어야 하듯 가야 한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에게 베개용암이나 좌상바위는 지난 해 말까지도 연천의 다른 자연 풍광들과 차이가 없었던 곳들이다.
내게는 “뚜벅이는 멋진 개성이고 가장 환경에 보탬이 되는 길, 지속가능하고 자랑스러운 삶의 방식이잖아요?”란 말을 해준 동기(同期)도 있다. 나는 앞에서 말한 존 프란시스는 물론 교통 개혁 운동을 벌이며 남편과 함께 차 이용을 줄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 케이티 앨버드와도 다른 걷기 동기(動機)를 가졌다. 예컨대 존 프란시스와 케이티 앨버드는 나와 다른 동기(動機)를 가진 걷기 동지(同志)인 셈이다. 마종기 시인이 의대 본과 3학년 시절 수업을 받은 산과(産科) 강의실 옆의 인체해부실습장의 사체들을 “내 미래의 친구들”이라 표현한 것이 생각난다.
1946년생의 존과 2000년(원서 출간 년도) 현재 15년 넘게 교통 개혁 운동을 수행한 케이티는 어쩌면 내가 걷기에 별 관심이 없었던 시절에 이미 걷기를 마친, 나와 동시대에 같이 걸은 적이 없는 내 과거의 친구들인지도 모른다.
앨버드는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Divorce Your Car!)'란 책에서 보너르펀(Woonerven) 이야기를 했다. 보너르펀은 보행자에게 통행 우선권이 있고 자동차는 낮은 속도로만 다녀야 하는 거리를 말한다. 앨버드는 자동차가 거리를 점령하고 보행자를 겁주어 쫓아버리는 과정이 악순환되는 현실을 우려한다.
차가 너무 많아 의욕을 상실한 보행자들이 차를 몰기 시작하면 불어난 차에 더욱 많은 보행자들이 겁을 먹고 달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불어난 차들을 수용하기 위해 나무들을 베고 보도를 없애고 가로를 확장한다면 길은 더욱 위험하고 걷기 어려운 곳이 될 것이다.(209, 210 페이지) 그럼 바로 그렇게 위험하고 힘든 보행 환경을 만드는 차들은 어떤 패턴으로 도로를 움직일까? 당연히 질주와 정체(停滯)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구체화해서 말하면 차의 속도는 상황마다 다르다. 이진경 교수의 ‘수학의 몽상’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메피스토가 “마차가 고개를 오를 때와 내릴 때, 넓은 길을 갈 때와 붐비는 좁은 길을 갈 때 모두 그 속도로 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라고 말하자 캘큘러스는 “그래. 사실 속도는 매순간 달라지겠지. 문제는 평균속도가 아니라 바로 순간순간의 속도를 구하는 거란 말야.”라고 답하는 대화다.(90 페이지)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도 이야기할 부분이기도 하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관성(慣性)계에 적용되는데, 관성계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비현실적 개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일단 물질이 있어야 성립되는 개념이며, 물질이 존재하는 한 중력(重力)이 필연적으로 생성되고, 중력이 생성되면 어떤 불질이나 크건 작건 그에 의한 가속(加速)을 받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등속(等速)운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일반상대성 이론은 애초부터 가속계와 중력장을 적용 대상으로 출발한 이론이므로 현실적인 계에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만일 중력의 영향이 극히 작아 무시할 수 있다거나 하는 특수한 경우에는 특수상대성 이론을 적용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은 그 적용범위가 특수한 경우로 한정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고중숙 지음 ‘내 머리로 이해하는 E = mc²’ 235, 236 페이지)
무리한 연결인지 모르지만 나는 차들이 움직이는 패턴을 보며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단속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을 생각한다. 이는 굴드가 지구가 탄생한 45억년 전부터 꾸준하게 같은 방식과 같은 속도로 작용한 지질학적 과정이 지구의 일반적인 특징을 만들었다는 동일과정설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단속평형이론은 변화란 충분한 동안 급속히 진행된 후 오랜 기간에 걸쳐 잠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는 화석 기록에서 중간 형태가 부족한 것을 설명해준다.
‘천재들의 과학노트 지구과학편’의 저자인 분자생물학 박사 캐서린 쿨렌은 지구과학, 고생물학, 생물학 및 진화에 대한 현대적 교과서들이 모두 단속평형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굴드가 ‘풀하우스’에서 인용한 고생물학자 닐 슈빈은 “세계는 늘 변화로 가득하다. 몸은 자라 죽고, 종은 출현하고 사라지고, 우리의 고향인 지구의 모든 특징들은 서서히 변하거나 격변을 통해 한순간에 바뀌곤 한다.”는 말을 했다.(‘DNA에서 우주를 만나다’ 28 페이지) 닐 슈빈에 의하면 인류는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패턴을 찾도록 진화한 시각적 동물이다.(같은 책 228 페이지) 생명체의 본질을, 차이들을 수용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설명한 이정우 교수의 논의(‘탐독’ 253 페이지)에 기대어 공부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란 기존 지식들을 재배치해 자기 이론을 만드는 것이고 타자(他者)들의 논의를 수용해 이전보다 더 복잡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