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쓰는 조경학개론
이규목 외 지음, 김연금 엮음 / 한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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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造景)을 영어로 landscape architecture라 한다. 건축, 산업, 도시 분야는 협력이 긴요한 분야임에도 제도적으로나 공공사업 시행에 있어서 영역간 침범이 자주 일어난다. 조경의 기본 성격이 포괄적이고 범위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조경은 자연을 다루고 건축은 인공물 즉 건물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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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은 외부 공간을 다루고 건축은 내부 공간과,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부분을 다룬다. 조경은 수평적이고 건축은 수직적이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대개 환경을 개발하고 이용하고 고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조경가들은 친환경적이다. 조경은 나무의 생리적 특징 등을 공부하는 유일한 분야다. 조경의 주요 설계 대상이 정원이라면 건축의 주요 설계 대상은 주택이다.

 

조경가들이 하는 일은 광범위하다. 이런 점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외부 공간에 어느 정도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까? 2. 실용적 도면을 그리는 데 흥미와 숙련도는 어느 정도 갖추었는가? 3. 미술과 조각 등에 대한 흥미도는 어느 정도인가? 4. 식물, 수학, 지리, 역사, 사회학 등에 대한 흥미는 어느 정도인가?

 

5. 쓰기와 말하기의 숙련도는 어느 정도인가? 6. 타인으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는가? 7. 문제해결의 논리성을 갖추었는가? 8. 대중의 욕구에 얼마나 민감한가? 9. 예술적 욕망에 대한 민감도는 어느 정도인가? 10. 독립심을 갖추었는가? 11.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는 어느 만큼인가? 12.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조경도 예술적 측면이 있어서 양식(樣式: 예술적 풍조)이 있다. 조경 분야에서 양식이 성립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다. 르네상스 양식이 전 유럽으로 퍼질 무렵 프랑스는 대담한 바로크 스타일을 취했다. 앙드레 르노트르란 조경가가 유명하다. 보르비콩트 성()의 정원을 만든 사람이다. 이 정원을 보고 루이 14세가 의뢰해 설계한 궁전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정원 양식은 풍경식이다. 프레데릭 옴스테드와 캘버트 보가 영국 리버풀 버큰헤드 공원을 참고해 설계한 공원이 센트럴 파크다. 중정(中庭)을 스페인 말로 파티오라 한다. 중정은 건축물로 싸인 정원을 말한다. 서양이 인본주의적이었다면 동양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했다. 서양에서는 풍경화라 하고 동양에서는 산수화라 한다.

 

서양화에는 감상자가 그림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동양에서는 그려져 있다. 외국에서는 정원 설계가가 정원을 설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사대부들이 담당했다. 사대부들은 정치에도 관여했고 시서화에도 능했고 성리학에도 정통했고 정원도 만들었다. 중국 정원은 대비 효과가 상당히 크다. 음양 대비가 그것이다.

 

일본 정원의 대표적 특징은 가레산스이(고산수양식). 마른 산수란 의미다. 돌을 세워 폭포를 만든 뒤 모래로 물 흐름을 표현했다. 건축 분야에서 모더니즘이 나타난 것은 기술 발달의 결과다. 철근 콘크리트를 만든 사람이 조제프 모네다. 도축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든 것이 프랑스의 라빌레트 공원이다.

 

고분벽화를 통해 알려진 이집트의 정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로 가지고 갈 정원이다. 테베 시장을 역임한 센네페르가 무덤에 그린 정원은 포도밭 정원이다. 중앙에 포도밭이 있는 유일한 예이다. 기독교 정원 양식은 없다. 종교와 관련한 정원 양식은 이슬람 정원이 유일하다. 중세 정원인 수도원의 약초원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성경의 에덴동산을 재현한 것은 오히려 이슬람 정원이다.

 

비스타는 보이는 시점이 강조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양쪽을 폐쇄하는 공간 구성 기법이다. 미적 구성 원리에서 가장 지배적인 것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다.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 무언가를 하면 환경이 된다. 반면 경관은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서 보는 한 덩어리의 대상이다. 경관을 영어로 landscape라 한다. 지리학에서는 사람이 손댄 경관을 문화경관이라 부른다.

 

미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는 상충할 수 있다. adscape란 광고 간판만 보이는 경관을 말한다. wallscape는 방음벽 사이를 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답답한 경관을 말한다. flatscape는 무미건조한 경관을 말한다. 현재의 경관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에 오늘이라는 켜를 덧대는 일이다. 경관이란 과거부터 수많은 변화를 거치며 쌓아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계획은 글로 하는 것이고 설계는 도면으로 하는 것이다. 여러 필자 중 한 사람인 최정민은 논리와 직관은 이분(二分)의 대립적 사고 체계가 아니라 호혜적 사고 체계라고 말한다. 조경에도 생태학적 접근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생태학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에른스트 헤켈이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집, 생활의 장을 의미하는 eco라는 공통의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장혜정은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 이론을 다른 각도로 본다. 즉 안정화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기표현 욕구, 미적 욕구, 자기실현 욕구를 위계 서열로 볼 것이 아니라 자아를 겹겹이 둘러싼 피부층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란 사람이 쓴 장서(葬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이는 생기에 의지해야 한다. 땅속에 묻힌 사람은 정기를 받아야 하고 그 정기는 자손에게로 이어진다.” 이규목은 풍수란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땅을 이해하고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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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스케이프(flatscape)란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지역을 말한다. 이 단어는 조경(造景)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 도시에서 눈에 띄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는 랜드스케이프(landscape)란 단어와 대비되는 단어다. 지역에도 당연히 차별은 존재한다.

 

해설하는 사람은 그 무미건조한 곳도 흥미와 의미가 있는 공간으로 인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 하리라. 어떻든 그런 목표하에 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치는 것으로 보일까?

 

아름다움은 풍경(대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선(감상자)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둘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거리도 별로 없고 특별히 볼거리도 없는 곳을 새롭고 흥미로운 곳으로 인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럼에도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료를 찾는 데 전력을 다하고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맛깔스러운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어제 숲해설 수업 첫날 이야기를 하자 지인이 나에게 나무 잘 아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 배울 생각입니다.“란 말로 운을 뗀 뒤 개별 나무나 꽃들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알 필요는 없고 제한적이지만 주제에 부합하는 몇몇 나무와 꽃 이야기를 엮어 일관된 스토리로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무나 꽃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해설의 주목적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주목적이라면 인공 지능에게 해설을 맡기는 것이 훨씬 효울적이다.

 

숲해설 강사들이 만일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너무 자신 만만하고 편향된 생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신경 쓰지 않는다. 설령 이론과 실기를 통과하지 못(해 망신을 당)하더라도 나는 내 생각을 고수할 계획이다.

 

어제 수업을 시작으로 212시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많이 고민하고 많이 찾아다닐 생각이다. 장담도 하지 않고 막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나무와 꽃을 잘 아는 것도 노력이 반영된 결과니 나도 노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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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독일로 가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후에 박사가 된 국문학과 출신의 시인 허수경 님이 타계한 지 2년이 되었다. 내일(69)은 시인의 생일이다. 그에 맞춰 유고 산문집 오늘의 착각이 나왔다.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집을 풍천소축(風天小畜)과 산뢰이(山雷頤) 괘로 분석한 서평을 쓴 적이 있는 나는 이화원(頤和園) 이야기를 생각하며 연결점을 느낀다.

 

이화원은 청나라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가 지은 여름 별장이다. 땅을 파내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는 산을 쌓았다. 분명 산과 무덤은 다르지만 나는 가산(假山)이란 말로부터 무덤을 떠올린다.

 

왕릉을 발굴하는 불운 혹은 행운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말을 한 시인은 마을이 있는 곳에는 무덤도 있다. 꽃이나 음식이나 술을 들고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죽은 자와 인연이 있던 산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덤을 방문하는 이는 도굴꾼 아니면 고고학자들”(‘모래 도시를 찾아서‘ 106 페이지)이란 말을 더했다. 좋은 시로 큰 울림을 전해준 시인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신의 고고학자라도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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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부 공간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 정도는?

2. 실용적 도면 그림에 대한 흥미와 숙련도는?

3. 미술, 조각 등에 대한 흥미도는?

4. 식물, 수학, 지리, 역사, 사회학 등에 대한 흥미는?

5. 쓰기와 말하기의 숙련도는?

6. 독서량은?

7. 타인이 자신을 어느 정도 믿는지?

8. 문제해결의 논리성은?

9. 대중의 욕구에 얼마나 민감한지?

10. 예술적 욕망에 대한 민감도는?

 

이상은 이규목 교수가 선정한 16개의 조경가 자질 테스트 항목들 가운데 10개를 고른 것이다. 자연과학, 인문과학, 예술 등에 두루 관계되는 종합적 재능과 소양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서양에서는 정원설계가가 정원을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대개 사대부들이 정원을 만들었다.

 

사대부는 정치에도 관여했고 시서화(詩書畵)를 할 줄 알았고 풍수에 능했고 정원도 만들었다. 조경을 영어로 landscape architecture라 한다. 문화해설에 도움이 될까 싶어 조경 기능사 과정에 등록했는데 자꾸 escape하고 싶어진다. 조경의 기능적인 면만 가르치는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든다.

 

(원성을 살 것이 분명하고 효율적이지도 못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나는 조경 논문으로 이론 시험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워오든 책을 보고 쓰든 고사장에서 완성하도록 말이다.) 나는 조경의 배경, 정신(마음가짐), 역사 등을 배우고 싶다. 그런데 인공위성이 지구 중력을 뿌리치고 비행하려면 초속 8km에 가까운 속도를 내야 하듯 인간이 관성을 뿌리치려면 결단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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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 소진사회의 인간과 종교
김화영 지음 / 나다북스(nada)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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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집을 읽고 난 느낌은 좋은 소설이나 시를 읽고 느끼는 기쁨 이상일 수 있다. ‘이론과 이론 기계‘, ’힘의 포획등을 쓴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과 나다 공동체 대표인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가 그런 책들이다. 오길영 님은 에세이의 뿌리는 감상적 체험의 글이 아닌 지성과 개념이며 에세이의 문체는 현란한 글재주가 아니라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라 말한다.

 

김화영 님은 자신의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통찰과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려 장치들에 포획당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비극적 자본 논리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웃음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에세이는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글과 공명한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린다는 김화영 님의 말과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김화영 님은 주체(subject)라는 라틴어가 주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툼과 종속된 것 또는 하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투스라는 두 개의 어원을 갖는다는 말을 한다. 자발적 복종 주체가 되기도 하는 주체의 역설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오길영 님도 주체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체제의 신하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두 저자의 주체론은 배경이 다르다. 김화영 님은 장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는 차원이고 오길영 님은 유아론(唯我論)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차원이다. 장치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인간 주체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것이다.

 

김화영 님은 장치를 설명하는 장에서 그것은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말하며 내부는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외부도 내부에 의해 규정된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내부와 외부는 상대방 없이 정해지지 않으며 둘을 나누는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길영 님은 사람이 배우는 것은 오직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나하고 생각이 다른 책을 읽을 때, 익숙치 않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사유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는 오길영 님이 말한 지성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마음 공부라는 장을 통해 나는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어떤 사유 관계로 만나고 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김화영 님의 마음론은 색다르다. 김화영 님은 마음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이 제시하는 대안은 지성에만 의존해오던 공부를 지양하고 지성과 마음이 하나가 된 온전한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칸트는 물() 자체(自體)는 보이지 않기에 알 수 없고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나오는 입력된 코드 그대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 자체다; 진은영 지음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70 페이지)

 

후설은 장미를 보면 감각기관에 수용된 그대로 장미가 인식된다는 칸트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만일 그렇게 기계적으로 인식이 이루어진다면 장미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렇게 제각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후설의 말을 풀어보면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에 따라 세계를 본다는 말이 된다. 후설이 강조하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이다. 의식이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갈망을 가지고 있어서 이끌림에 반응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에 대해 논하며 일상의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일상에서 습관적으로(별다른 지향 없이) 행동하고 사유하는 우리에게 지향성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의 순서를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너무 친숙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습관화된 세계가 깨지는 것은 세계를 지탱하던 방식이 무용해지는 순간이다.(기존 세계가 존속되도록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상이다.)

 

후설의 제자인 메를로 퐁티는 마음의 지향이 이미 몸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했다. 하이데거가 세계 - - 존재인 우리가 늘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퐁티는 우리의 마음의 지향 작용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김화영 님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경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어쩌면 신체 경험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길영 님은 물 자체를 새롭게 해석한 진은영 님의 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거론한다. 진은영 님은 선험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매개성이라 말한다. “우리는 물자체와 직접 만날 수 없고 단지 감성과 오성(悟性)이라는 형식의 매개를 통해서만 사물과 관계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은 항상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유는 선험적 도식론에서도 계속된다.”(’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211 페이지)

 

네그리와 하트를 인용해 진은영 님은 매개 없이 우리는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아이디어는 철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철학적으로 칸트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된 매개 메커니즘은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는 의회나 합의기구라는 대표제를 작동시킨다.”는 말을 한다.

 

오길영 님은 진은영 님이 주로 기대는(의거하는) 니체, 들뢰즈, 네그리 등의 탈근대적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답을 시도하고 그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하며 자신에 찬 모든 직접적 형식의 가능성을 내세우는 이들보다는 우리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탐색하는 칸트의 겸손함에 마음이 쏠린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오길영 님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런가 하면 김화영 님이 언급한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칸트, 후설, 하이데거, 퐁티 가운데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하이데거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약천 남구만 등 조선의 문인 - 정치인 가운데 누가 가장 두 영역에서의 괴리가 적은지를 논할 때 우리는 남구만을 들지만 위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단연 하이데거를 들 수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하이데거는 부정적인 경우라는 점이다.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에 하이데거 이야기가 나온다. 박찬국 님이 쓴 하이데거와 나치즘을 읽고 쓴 서평 형식의 글인 사상과 정치라는 글에서다. 박찬국 님은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를 그의 정치적 견해와 행위는 악성의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견해와 철학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는 없고 양자 사이에 우연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데거는 현실 정치로서의 나치즘이 아니라 근대 기술 문명과 그것의 이념적 표현인 니힐리즘, 그리고 니힐리즘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극복할 대안으로 나치즘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를 말한다. 그것은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번쩍 혹은 아하 하는 초월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경험이다.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규칙적인 종교생활과 다르다고 말한다. 전환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치 유희와 같아서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놀이이기도 하고 삶에 자리한 고통들을 유유히 견뎌내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희망이기도 하다. 다시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우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분의 존재도 아니고 세계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삶은 그저 나의 길을 함께 가며 웃는 것, 비극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운명과 자유의 놀이터다.“, ”모든 것이 있게 하라! 다만 모든 장치를 무효화시키는 새로운 창조적인 일이 벌어지게 하면서.“ 김화영 님에 의하면 마음은 우리의 지향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창조적 근원지이고 기도는 마음의 통로로 걸어내려가 그 안에 깃든 신성을 만나는 문이다.

 

김화영 님의 결론은 영성(靈性) 신학자의 해답답다. ”비극을 침묵으로 견디고 마침내 눈을 뜬 이들이 모든 존재 안에서 신을 보는 날, 비로소 삶의 수수께끼들이 풀리며 빛을 보게 되는 그 날이 바로 우리의 시간, 영원한 지금이 될 테니까.”란 결론은 신비한 만큼 희망적이다.

 

노력하는 건 우리의 자유이다. 그게 인간답다. 그러나 가 하는 노력의 중요한 전제는 그런 노력을 한다고 욕망이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로 유몰론자의 윤리를 설명한 오길영 님의 결론도 좋고 영성 신학자 김화영 님의 결론도 좋다.

 

칸트의 겸손에 마음이 쏠린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생각해본다. 맥락이 일치하지 않지만 나는 적어도 나보다 공부가 깊고 영성에 접()한 김화영 님의 인도를 따라 내 인식 밖의 영역에 열린 유보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이 김화영 님의 책을 읽고 얻은 결실이라면 결실이다. 묵직한 중수필, 지성과 사유의 깊이를 느낀 책을 읽게 해준 두 분께, 특히 내게는 영성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뜨게 해준 김화영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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