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읽는 조선 - 공간을 통해 본 우리 역사 규장각 교양총서 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도시는 내 주요 관심사다. 서울 및 연천 해설의 연장선상에서 생긴 결과다. 서울은 한성백제와 조선, 일제하의 경성 등의 키워드로, 연천은 고구려와 고려 등의 키워드로 풀어나가고 있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서 펴낸 도시로 읽는 조선은 한양, 개성, 전주, 변산, 제주, 평양, 인천, 원산, 경성 등의 아홉 도시를 해명함으로써 조선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공간과 장소는 의미가 다르다. 공간은 낯설고 유동적이어서 쉽게 잡히지 않는 개념이고 장소는 공간에 주관적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책에서 다룬 아홉 도시 가운데 내게 주관적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 곳은 한양, 개성, 원산, 경성 등이다. 물론 한양, 경성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고 개성, 원산은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곳이다. 다만 한양, 경성은 서울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만나는 곳이고 개성은 고려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원산은 내가 사는 연천을 통과하던 경원선의 종착점이다. 한양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 문종대부터다. 고려는 건국 이후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신라의 수도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삼아 개경(開京)과 함께 3경 체제를 구축한 데 이어 문종대에 양주를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키고 궁궐을 조성했다.

 

58세에 고려 수도 개경의 수창궁에서 즉위한 조선 태조는 천도(遷都)를 단행했다. 태조는 즉위 2년까지 고려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계룡산을 새 수도로 추천한 사람이 권중화였다. 하륜은 무악(현재의 신촌, 연희동 일대)을 추천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성(漢城) 설계를 담당했던 정도전도 처음에는 천도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태조대에 전조후시(前朝後市) 원칙에 따라 신무문 밖에 시장을 조성했으나 지역이 좁고 바로 뒤가 막혀 있어 태종이 종로로 옮김으로써 유통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개성은 20136월 개성역사유적지구란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조실록에서 처음으로 두문동(杜門洞) 일화가 나온다. 두문동(杜門洞)은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시대 송도(개경, 개성) 성거산 서쪽에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72명은 공자의 제자 72현을 모델로 만든 수()로 보인다.

 

전주는 감영(監營)으로 호명되었다. 감영은 감사(監司)의 본영(本營) 즉 조선시대 8도에 파견된 관찰사(2)의 업무 공간이었다. 전주는 나주, 광주에 비해 서울에서 가까운 고을이다.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관찰사는 일상적으로 지방관의 근무를 평가하고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감찰(監察) 업무를 치르는 등 상당히 힘든 일정을 치렀다. 조선 후기 전주는 감영을 바탕으로 대도시로 성장했다.

 

사람 살기에 적합하면서도 호젓하고 풍광이 빼어난 변산은 한 면은 넓게 바다로 열려 있고 나머지 세 면은 산으로 둘러쳐져 있는 호리병 같은 곳이다. 변산반도와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있다. 교산 허균과 반계 유형원이다. 변산은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형원은 서른 두살 때 변산에 들어와 죽을 때까지 살았다. 변산에서 유형원이 집중적으로 저술한 책이 반계수록이다. 이 책은 토지제도를 비롯, 정치, 교육, 군사 제도 및 사회신분제 등 국가 전 분야에 걸쳐 조선의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법제를 모색한 국가 기획서다. 이 책을 관통하는 기조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에 둔 변혁이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에게로 이어졌다.

 

제주는 풍부한 신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브리콜뢰르(손재주꾼)의 브리콜라주(손재주 작업 결과물)로 파악한 신화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 제주다. 치밀한 계획이 아닌 무엇이든 손쉽게 사용 가능한 재료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다.

 

평양은 평안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다. 평양 감사가 아니라 평안 감사라 해야 맞다. 감사 즉 관찰사는 도 단위의 관직이다. 평안감사가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된 것은 평양이 사행로의 주요 경유지였기 때문이다. 경유지 도처에서 사신들을 접대하는 자리가 마련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일본에 의헤 설치된 조계(租界) 지역이었다. 인천은 1876(고종 13)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1876), 원산(1880)과 함께 개항된 세 항구 중 하나다. 인천이 개항된 시기는 1883년이다.

 

영흥만에 위치한 원산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인 목조(穆祖)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다. 조선은 일본이 개항지로 영흥만을 요구하자 왕릉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었다. 일본이 원산을 개항지로 고집한 것은 가상의 적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경성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의 500년 도읍지인 한양(한성)을 대체해 불린 이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인 서울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가 20세기 초 즉 경성 시절이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독립운동과 저항, 상존하는 위험이 그 사대의 전부가 아니듯 모던함도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근대 또는 현대라는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변화와 속도를 당대인들은 모던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경성과 밀접했던 시인, 작가가 이상(李箱), 박태원 등이다. 이상은 제비 다방, 쓰루(つる; ) 다방 등을 운영했다. 상자 속에 갇힌 듯 전공이나 제한된 관심사에 매몰된 근대인을 희화화한 이상은 암울하고 무력한 식민지 시대에 비상 충동을 느꼈으리라.

 

책의 앞 부분에 이상의 오감도 이야기가 나온다. 1인의 아해부터 13인의 아해까지 등장하는 이 시에서 13이란 숫자는 조선 13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 8도가 13도가 된 것은 1896년 갑오개혁 이후다. 이상의 오감도는 막다른 골목이자 뚫린 골목인 식민지 시기 한반도의 공간성과 역사성을 결함시킨 작품이다.(9 페이지) 이상의 날개가 관념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좌우된 개인의 실존을 드러낸 작품이듯 오감도 역시 시대상황과 무관할 수 없는 작품이다. 도시 이야기를 다룬 여타의 다양한 책들을 읽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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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상징하는 감괘가 겹친 중수감(重水坎)은 내가 좋아하는 괘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어려움을 의미하지만 소성괘의 가운데에 양효가 자리하고 위아래에 음효가 자리한 것이 대칭이어서 좋아보이는데다가 그런 소성괘 두 개가 위아래로 배치된 정연한 질서의 괘이기 때문이다.

 

이 괘의 육사(六四; 네 번째 음효)는 납약자유(納約自牖). 어두움(어려움)에 처해 스스로 창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주역(周易)이란 인간사의 변화상을 64개의 괘(384)로 코드화한 텍스트다. 다른 책들도 인간사의 여러 국면을 말하지만 집중적으로 변화에 초점을 맞춘 책은 주역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역의 경고에 귀를 닫았다.”는 말은 그는 인생의 경고에 귀를 닫았다.”는 문장으로 고쳐도 좋으리라.(어기서 말하는 그는 연산군이다.) 어떻든 납약자유(納約自牖)란 구절을 읽다가 스스로 창문을 만든다는 의미의 자유(自牖)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의미의 자유(自由)가 아닌가, 란 생각을 했다.

 

요즘 내 심정이기도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지금까지 참 자유롭게 지냈으면서도 실로 그 소중함을 몰랐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모두 깨달음은 이미 넘치게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소중함을 가슴으로 느끼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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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주공(周公) ()을 꿈에서조차 뵙지 못하게 되었다며 탄식했다. 주공 단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이다. 공자는 주나라를 이상국가로 여겼다. 반면 진시황은 주나라의 봉건제를 철저하게 혐오했다. 봉건제도는 제후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그 영역(‘; ‘)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제도다. 진시황은 바로 이 봉건제도를 혐오해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순수(巡狩)를 감행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순수란 천자가 제후에게 가는 것을 말한다. 만일 진시황이 봉건제를 수용했다면 광활한 중국 대륙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순수(巡狩)하다가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진흥왕 순수비의 그 순수다. 반면 제후가 천자에게 가는 뵙는 것을 술직(述職)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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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전공하지 않아서이거나 못해서이겠지만 세종은 내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왕이다. 하기야 전공자가 아니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면 정조도, 성종도, 중종도 관심 밖에 두어야 옳으리라. 정조에 대해 집중하느라 그랬다고 볼 수도 없다. 정조에 대해 정통하지도 못했으니 면목이 없거니와 공부는 두루 하는 것이 옳으니 말이 되지 않는다 하겠다.

 

본질이라 하기 어려운 '여진족인 태조의 후손'이라는 이슈, 과학기술이란 이슈 정도에 집중 했을 뿐 세종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은 문화해설을 하는 입장으로 변명의 여지 없이 부끄러운 일이자 위험한 일이다. 물론 세종을 천문학, 음악 등의 키워드로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씩이라도 읽어야 후에 고생하지 않을 것이다. '후에 제대로'란 말은 불성실한 공부를 의식한 수사(修辭)인지도 모른다.

 

최근 내가 사는 연천에 뒤늦게 관심을 기울이는 나는 오늘 (중고를 파는 오프라인 매장인) 알라딘에 나온 박현모 교수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를 구입했다. 종로 알라딘으로 건너오기 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이석제 저자의 '세종이 꿈꾼 나라'를 읽다가 가사평, 송절원, 불로지산(佛老只山), 거여평, 부로지산(夫老只山) 등의 연천의 주요 지명들이 강무(講武)와 관련해 언급된 것을 확인했다.

 

연천이 세종의 강무가 펼쳐진 곳이라는 말은 얼마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단 그저 기본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러던 중 오늘 종로 알라딘에서 박현모 교수의 책에서 세종이 강무를 지나치게 거행했다는 내용을 접했다.(강무는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이다.)

 

비판도 지지도 아닌 있는 그대로 읽되 연천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단서를 얻는다면 좋겠다. 박현모 교수의 책을 산 것은 이런 점 외에도 세종의 아버지 태종을 비롯 황희, 박연, 정인지, 김종서 등의 신하와 세종과 비교되는 군사(君師) 정조 등 아홉 사람이 본 세종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이 흥미를 끌어서였다. 기획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요즘 나는 이렇게 충동 구매의 대책 없음을 자탄(自嘆)하는 마음으로 책을 살 이유를 스스로 몇 가지는 제시할 수 있어야 중고일망정 구입하자고 다짐하고 있다. 빨리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송파(松坡)에 이어 광진(廣津)을 해설하게 되었는데 그간의 조선사 위주의 공부를 지양하고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를 익힐 기회라 생각한다.

 

고구려는 내가 사는 연천의 호로고루와 임진강을 통해서도 익히고 있다. 그간 조선사에 다소 소홀해 세종을 읽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종은 정통성 없이 (반정으로) 왕이 된 까닭에 타개책으로 성리학과 사림을 택했다는 임자헌 님의 설명을 듣고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경우다. 요즘 지치고 힘들어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하지만 한국사는 그런대로 쉽게 읽고 있다.

 

귀신을 잔뜩 싣고 다닌다는 의미의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란 말로 죽은 사람들을 잔뜩 나열하는 시()를 조롱했던 이규보의 비판의식을 역사서 읽기에 비추어 보아야 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쉽게 읽히지만 역사서 읽기는 어렵다. 우리 역사서를 읽으면 조선이나 고려, 삼국 등의 인물들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고 현대서를 읽으면 서양 사람들 인용 빈도가 높은 것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책을 잘 안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어휘력이 초라해짐이 느껴지고 문제의식이 사라지거나 엉성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러니 인용 빈도가 높은 것을 우려하지 말고 열심히 읽되 내가 공들여 생각한 것 다시 말해 덜 의존적인 이슈들을 다듬는 것이 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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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키워드로 읽는 시민을 위한 조선사
임자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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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에 집중하다 보니 근현대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사에 정통하지도 못하다. 그럼 나는 왜 조선사에 집중해온 것일까? 단순히 이야기 거리를 얻으려는 것일 수는 없다.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교훈을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쉽게 말하지만 제대로 되었는지 자신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10가지 키워드로 조선과 대한민국을 비교하는 책을 만났다. 열 가지 키워드란 주권의지, 법치국가, 페미니즘, 국제외교, 기본소득, 정치개혁, 정당정치, 개인과 국가, 세대갈등, 적폐청산과 정권교체 등이다. 저자는 조선과 대한민국을 쿠데타란 개념으로 비교한다. 잘 알려졌듯 조선은 이성계, 이방원, 수양대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대한민국은 박정희, 전두환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저자는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어도 무수한 문제점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을 과연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묻는다. 그리고 이성계, 이방원,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왕조시대의 쿠데타이고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는 민주공화정체제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절대 같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가령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체제를 전복하지 않았기에 백성을 해칠 필요가 없고 왕위를 노리는 대신과 혈육을 경계하면 되었을 뿐이지만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는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격한 것이기에 즉 민이 주인인 체제를 전복했기에 국민을 해쳐야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아직 조선 백성의 사고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들여다볼 말이 있다. “사회의 분화와 변모로 붕당에 여러 요소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원론적으로 말해 붕당(朋黨)의 힘은 공부에서 나온다.. 정조가 탕평을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책을 검토하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할 만한 식견이 있었고, 그 식견을 신하들에게도 인정받았다.. 정조는 정치가들이 또는 대통령이 존경해야 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닮아야 하는 인물이다."(7정당정치중에서)

 

핵심은 정조는 정치가들이 또는 대통령이 존경해야 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닮아야 하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2장 법치국가편에서 저자는 법은 지켜야 하지만 그전에 물어야 할 것이 법은 무엇인가, 란 물음이라 말한다. 새길 말은 왕조국가인 조선에 입헌주의에 입각한 법치주의 개념이 전혀 없었는가, 란 물음이다. 조선은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나라로 입헌주의란 개념을 가지지 못했을 뿐 유사한 개념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철저히 기획된 나라였다.(51 페이지) 이 말은 조선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상과 방향성을 바탕으로 설계되고 건국되었다는 말(12 페이지)과 상응한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만들어 왕에게 올린 것을 들 수 있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이전까지의 모든 개별 법령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대대로 통치의 기초로 삼게 할 최고 법전을 만들고자 했다.(완성된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다.)

 

조선보다 나아야 할 우리나라는 법이 세력을 가진 자, 부유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운영되고 있어서 우리에게 큰 과제를 준다. 그래서 법학자, 판검사, 변호사가 아니라 해도, 국회의원이 아니라 해도 법을 질문하고 법 정신을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편에서 문정왕후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보인다. 문정왕후는 유일하게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한 인물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물게 수렴청정과 외척정치를 주도적으로 활용해 정치 전면에 나섰다.

 

문정왕후는 죽을 때까지 실질적 권력자였다. 그의 치세 기간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물론 사화라고 하지만 사림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윤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기에 사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정왕후에게 쏟아지는 것은 비난 일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정왕후 치세가 난세인 것은 유교 국가에서 불교를 되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불교를 억누른 것은 유학의 나라를 세우려 한 목적도 있었지만 재산을 국유화하려는 목적도 있다.

 

물론 그 과정이 너무 강압적이었다.(86 페이지) 명종 시대는 임꺽정이 활약한 시대다. 그 시대는 사실 임꺽정이 유독 유명했을 뿐 크고 작은 도적이 넘쳐나던 시대였다.(87 페이지) 저자는 저들 도적이 생긴 것은 도적질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에 절박하게 시달려서라는 명종실록의 말을 인용하며 유교 국가에서 불교를 되살린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왜 농민이 도첩(度牒)도 없는 중이 되려고 절에 들어가는지를 먼저 묻는 것이 정치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라 말한다.(88 페이지)

 

저자는 문정왕후에게 아쉬운 점은 시대를 읽는 눈이 부족했던 것이라 말하며 좋은 머리와 정치적 식견으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은 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한계 때문이라 설명한다.(90 페이지) 저자는 문정왕후의 패착 중 하나로 외척의 정치농간을 꼽는 것에 대해 외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조선의 구조적 모순이라 말한다.(92 페이지) 외척은 왕에게 가장 중요한 뒷배였다.(80 페이지) 단종의 비극도 단지 단종이 어리고 세조의 야망이 커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단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단종은 수렴청정 없이 곧장 친정(親政)을 행했다.

 

우리가 페미니즘 논쟁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남자 대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부디 우리사회가 조금씩 페미니즘에 익숙해지면 좋겠다고 말한다. 조선은 신분 차이와 가부장적 질서를 옳다고 본 나라였다면 대한민국은 모두가 평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전제로 시작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이 중요하다.

 

4장 국제외교편에서 저자는 조선의 명나라 의존과 대한민국의 미국 의존을 한자리에서 논한다. 광해군이 정치를 못한다는 이유로 나라를 바로잡고자 반정을 일으켰다는 명분이 무색하게 인조 정권은 나라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120 페이지) 성종 때 들어서 모든 시스템이 완성되었지만 건국 이래 최초로 가장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원자에서 세자로, 그리고 왕으로 즉위해 금수저 코스를 밟은 연산군이 전무후무한 문제적 통치를 펼치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은 세자수업도 받지 못했고 정치 경험도 없어서 정통성과 민심을 확보해줄 지지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명나라에 의존했고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때부터 조선과 명은 군신관계를 넘어 한 집안이자 부자관계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고 사림이 정치의 핵으로 등장했다.(122 페이지) 5장 기본소득편에서 저자는 대동법과 새로운 상상력을 논한다. 현종 대에 예송논쟁이 있었고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그 시대는 소빙기의 영향으로 사상 최악의 대기근이 찾아든 시기였다.

 

조선은 놀랍게도 세 차례 전쟁(임진, 정묘, 병자년 전쟁)과 소빙기의 대기근이라는 참사의 시기를 조세개혁으로 돌파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붙들고 예송논쟁을 일삼기도 했지만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유학의 기본이념도 상기할 줄 알았고 이를 실현할 집요한 경세가도 있었다.(145 페이지) 세금이 누구를 위해 얼마나 합리적으로 운영되는지 투명하게 공개되면 백성들은 세금이 증가하는 것을 덮어놓고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150 페이지)

 

저자는 항산이 있으면 항심이 있다는 맹자의 말로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기본소득은 돈이 지배하던 세상보다 훨씬 다채롭게 개개인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줄 것이다.(158 페이지) 6장 정치개혁편에서 저자는 정치는 사람 사이의 대화라 정의한다.(179 페이지) 정치는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기에 매일의 일상에 있다. 7장 정당정치편에서 저자는 주자학이 본고장인 중국보다 조선에서 그 꽃을 활짝 일찍 피워낸 셈이기에 민주주의는 낯설어하면서도 대의민주의의 중요 요소인 정당정치에는 친숙함을 느끼는 묘한 현상이 생겼다고 말한다.(192 페이지)

 

저자는 예송논쟁이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소모적인 면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전란으로 혼란해진 나라의 질서를 상당히 조선다운 방식으로 바로잡아가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한다.(197 페이지)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참여가 우리의 전통이었다.(212 페이지) 8장 개인과 국가편에서 저자는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별을 바라보며 다음 시대의 문을 연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정도전을 선택할 것이라 말한다.(221 페이지)

 

정도전은 현재의 불의와 구체제의 부패보다 그 다음에 펼쳐질 세상에 무게중심을 둔 특별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건국부터 하고 방향을 설정한 나라가 아니라 방향이 먼저 설정되고 그에 따라 세워진 독특한 나라가 된 것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이들이 모델로 삼은 나라는 성리학의 나라인 송나라였다. 송나라가 불교와 도교에 빼앗긴 인재를 다시 유학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의거(依據)한 것이 신유학 즉 성리학이다.(232 페이지)

 

조선은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옥새를 줌으로써 무혈 개국을 한 나라가 되었다. 당대 명문거족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었고 외가 쪽이 노비의 피가 섞여 있는 정도전(229 페이지)은 그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었지만 그렇기에 종법제도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었다.(239 페이지) 정도전에게 중요한 것은 관이 아닌 민이었지만 그가 백성을 주체로 인식한 것은 아니다. 그는 민을 나라의 근간으로 여겼다.(241 페이지) 저자는 정도전이 사대부로서 나라에 대한 책임을 자임하고 이를 감당하려고 자기 삶을 걸었음을 강조하며 민주주의라는 명칭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한다.

 

저자는 9장 세대갈등편에서 조선은 당하관인 젊은 대간(臺諫)들로 하여금 왕과 대신들을 모두 견제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균형을 이루게 했다고 말한다. 사간원(司諫院)은 왕의 언행과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서 바로잡는 간쟁(諫爭)을 맡았고 사헌부는 관료들의 잘못과 위법을 규찰해서 탄핵하는 일을 맡았다.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태종은 사간원의 인원은 줄이고 사헌부 인원은 그대로 두었다. 물론 사헌부는 경우에 따라서 왕도 탄핵했다.(252 페이지)

 

대간 임명권은 문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분리해 정5품인 이조 전랑에게 주었다.(이조 전랑 인사권을 두고 동인과 서인이 갈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태종이 정승은 청렴한 것보다 왕과 정책을 토론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뜻에 무조건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소신껏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진짜 충성이라고 본 것이다.(259 페이지) 토론과 비판은 단순히 잘못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로써 빚어진 현재의 문제들을 수습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이 젊은 관료를 대간으로 선별해서 그들의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의 치기어린 열정과 의욕이 나라를 오래오래 젊게 유지해줄 원동력이 될 것이란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267, 268 페이지) 저자는 젊은 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젊다고 모두 시선이 새롭다거나 새 질서로 세워진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니란 점이라는 말을 한다. 자신의 욕망으로 정도전이 내세운 궁극의 개혁 시도를 막은 태종도 새로운 내일을 열지 않으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음을 잘 알고 구세력의 힘을 최대한 억제해 조선이 고려와는 다른 나라가 될 수 있게 했다.(269 페이지)

 

10장 적폐청산과 정권교체편에서 저자는 조선의 복잡다단한 정치투쟁의 장을 논한다. 그리고 지난 일을 덮어놓고 무조건 용서하자는 말은 진짜 용서가 아니라 덧붙인다. 이규상은 ‘18세기 조선인물지에서 역학이나 의학에 학이란 글자를 붙이는 것은 글을 알아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사림은 조정을 장악한 이후 민생 현안을 살피기보다 도리를 가르치면 세상은 저절로 바루어진다는 막연한 생각에 의지했다.(305 페이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서로의 일에는 공식성이 있다. 열심히 배워서 남주는 것은 자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여느 직업의 결과처럼 당연히 수반되는 부분이다. 출구와 상상력을 제시할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18세기에 위기와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내일을 준비하지 못하고 망국으로 치달은 조선의 역사가 안타깝다면 지금은 오늘에 대한 안목을 갖추기 위해 우리 각자 노력해야 한다.(306 페이지)

 

음미해야 할 인상적인 말은 예()란 예의와 예절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개인의 위치를 결정하고 개인이 개인과, 그리고 공동체와 맺는 관계의 적절한 형태를 정의하며 개인의 분수(分數)를 결정한다(55 페이지)는 말, 예로써 다스린다는 말은 어떤 자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되는 것을 말하고 시스템에 법의 주안점을 두는 것을 말한다는 말(58 페이지)이다. 조선사를 통해 어떤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를 알려면 시민을 위한 조선사를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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