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섭 작가의 '제3도시'를 읽고 있다. 개성공단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 개성은 신해방지구(新解放地區)라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해방지구란 한국전쟁 이전 대한민국 영토였다가 종전과 더불어 북한 영토가 된 곳들을 말한다. 개성은 개풍군, 황해도 연백, 옹진 등과 함께 38도선 이남 지역이었기에 북한 영토가 아니었다. 반면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양양처럼 38도선 이북 지역이어서 북한에 속했다가 대한민국 영토에 속하게 된 곳은 수복지구라 한다.
개성은 연천보다 위도가 낮다. 분명한 사실인데도 생소하게 느껴진다.(개성; 북위 37° 58′ 00″, 동경 126° 33′ 00″/ 연천; 북위 38° 5' 39", 동경 127° 4' 33") 개경이 시계의 중앙이라면 철원은 2라는 글자고 연천은 중앙과 2라는 숫자의 중간 정도에 자리한다. 어떻든 왕건이 개경(=개성=송악=송도)에서 물길로든 육로로든 궁예가 있는 철원을 향해 갈 때 연천은 중간 지점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개성이 북한 지역이니 당연히 연천보다 위도가 높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도에서 보듯 연천이 개성보다 위도가 높고 그렇기에 개경에서 철원을 가려면 일부러 먼 길을 우회하지 않는 한 연천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왼쪽에 지도, 오른쪽에 역사책을 놓고 공부해야 함을 일깨우는 좌도우사(左圖右史)의 의미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성, 홍제원, 고양, 파주, 장단, 개성, 평산, 서흥, 봉산, 황주, 평양, 안주, 가산, 정주, 철산, 의주에 이르는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 불렸던 의주대로에 개성도 포함되어 있다. 지난 10월 파주 오두산(鰲頭山) 전망대에서 개성시를 보았다. 거리 때문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도시를 통해 어떤 감회를 가질 계제(階梯)는 아니었다. 다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장면을 비교적 길게 보며 마음에 담아두려 했었다.
개성에는 무엇이 있을까? 만월대가 있고 을밀대가 있고 송악산이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 2013년 개성이 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리라.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南大門), 만월대(滿月臺), 개성 첨성대(瞻星臺), 고려 성균관(成均館),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칠릉군(七陵群), 명릉(明陵), 공민왕릉(恭愍王陵) 등이 개성 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장경희 문화재전문위원의 ‘고려왕릉’에는 칠릉군이 아닌 칠릉떼라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떻든 만일 개성 여행이 허락된다면 왕릉들은 가장 나중에 보겠다.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南大門), 만월대(滿月臺), 개성 첨성대(瞻星臺), 고려 성균관(成均館),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선죽교, 표충비 등이 먼저다.
지금껏 내가 가본 능은 대부분 조선 왕릉이다. 경주의 신라 왕릉군, 연천의 신라 경순왕릉 등이 예외라면 예외다. 내가 가본 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왕릉은 “고려 왕릉의 전통을 계승한” 능이고 “전통적인 풍수사상을 배경으로 웅장한 석물과 건축물 그리고 울창한 숲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장경희 지음 ‘고려왕릉’ 174 페이지)된 것들이기에 고려왕릉들은 그 연관점에 초점을 맞춰 보아야 하리라.
고려왕릉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개풍 및 장단 지역, 강화도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다. 강화 석릉(碩陵), 강화 곤릉(坤陵), 강화 홍릉(洪陵), 강화 가릉(嘉陵) 등이 강화도에 있는 고려왕릉이다.(주역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곤; 坤‘이란 이름을 사용한 곤릉은 역시 고려 강종의 비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고려 왕릉들이 풍수사상에 의거해 들어섰거니와 나머지 것들은 어떤가? “주산 아래 좌청룡과 우백호로 둘러싸인 만월대의 터는 개경의 혈자리로서 부소 명당(扶蘇 明堂) 혹은 송악 명당이라 일컬어지는 곳”(한국역사연구회 지음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 36 페이지)이란 글을 보면 풍수는 기본임을 알 수 있다.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거론한다. 이 지도는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 만든 세계지도다. 책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백두산 자체가 우리 국토의 종산(宗山)으로 여길 만큼 신성하고 대단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백두산 아래에서 산맥이 단절되어 사실상 백두산의 맥이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내용이다. 백두산부터 뻗어오는 산맥은 한양까지 미치지 못하고 가평에서 끝이 난다는 설명도 있다.(41 페이지) 풍수도 나름으로 차이가 있다는 의미의 지적이다.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다른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중국, 일본, 아라비아, 아프리카, 지중해, 유럽까지 그려넣은 이 지도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지도다.(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17 페이지) 그런데 16세기 초 조선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를 만들었다. 조선과 중국 중심의 이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천양지차(天壤之差)의 지도다. 이 지도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반영된 지도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관념을 통해 재구성하는 퇴행“(김용만 지음 ‘조선이 가지 않은 길’ 27 페이지)의 결과라는 말을 듣는다. 그럼 풍수는 어떤가? 다시 말하면 ‘성리학적 세계관이 조선을 관념의 세계로 밀어넣은 것처럼 풍수 역시 그랬을까?’란 말이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가 만들어진 16세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세기는 명당 논리가 마을로 확산한 시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마을은 물론 주택까지 풍수를 따지지 않는 공간이 없게 됐다. 문제는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으로 이뤄진 명당이 흔치 않았기에 인위적으로 지형을 명당에 가깝게 만드는 비보풍수(裨補風水)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나 산을 쌓고 물길을 내는 대역사를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실제 모습이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사람의 소망에 맞추기 위해 지형을 명당으로 변형해 그리는 그림식 지도가 유행했다는 사실이다.(2018년 9월 22일 연합 뉴스 수록 "산줄기 강조한 조선 고을 지도는 명당 논리 산물")
성리학 신봉자든 풍수 신봉자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은 같다. 왕건이 우리나라 풍수의 원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7 - 898)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논자도 있다. 시기나 지역으로 보아 도선이 왕건이 아닌 견훤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도선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오늘날의 전라도로 견훤의 후백제 지역이었고 도선이 죽기 5년 전에 견훤은 이미 왕이 되었지만 왕건은 소년이었다는 점을 든 것이다.(왕건이 도선에게 비기를 전수받은 것은 893년으로 이때 왕건은 17세였다.)
중요한 사실은 왕건에게든 견훤에게든 풍수가 전해졌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과 풍수지리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쌍두마차였다면 통일신라와 그 이후에는 선종(禪宗)과 풍수지리가 쌍두마차였다. 겉으로는 주자학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했음을 의미하는 외주내양(外朱內陽)이란 말이 있다.
물론 선종과 풍수, 성리학과 풍수라면 토대는 풍수지리, 상부구조는 선종이란 의미의 토풍상선(土風上禪), 토대는 풍수지리, 상부구조는 주자학이란 의미의 토풍상주(土風上朱)라 해도 좋을 것이다.
과학을 내세우는 현대에도 풍수는 면면히 영향을 미친다. 지금 내 책상에는 경순왕릉이 1순위로 다루어진 이규원의 ‘대한민국 명당’이란 책이 놓여 있다. 경순왕릉 해설을 위해 빌린 책이다. 자세한 설명이 무색하게 내게 풍수는 낯설고 어렵다. 기회가 되면 개경에서 연천을 거쳐 철원까지의 길을 걸으며 하나의 풍수 지식이라도 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