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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하늘 - 세계 최고 과학 국가를 만든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
정성희 지음 / 사우 / 2020년 9월
평점 :
“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의 말이다.(니덤은 미국의 천문학자 ‘루퍼스; Will Carl Rufus‘; 1876-1946’가 세계 학계에 소개한 석각 천문도; 태조가 명해 제작한 석각 천문도‘를 바탕으로 연구 논문을 썼다.) 이 말은 찬사지만 아쉬움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조선, 그리고 한국은 천문학 분야에서 정체되거나 15세기의 성과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은 세계 최고의 지리적 안목도 가졌었다. 이 사실은 사라진 원본 대신 모사본이 일본 류코쿠 대학(龍谷大学)에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증명하는 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후 조선은 16세기 초 훨씬 퇴보한 혼일역대강리지도라는 지도를 만들었다.
정성희의 ‘세종의 하늘’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15세기 조선의 천문학을 다룬 책이다. 조선은 자신들이 천명(天命)을 받은 왕조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구려 천문도를 이용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바로 그렇게 이성계가 4세기 무렵 고구려 평양에서 각석(刻石)한 천문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천문관서인 서운관 관원에게 명해 탄생한 천문도다.(지도가 땅의 모습을 ‘구현; 具顯‘한 것이라면 천문도는 하늘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태조본 석각 천문도에는 ‘입성; 立星’이란 별자리가 있고 태조본을 토대로 만든 숙종본 석각 천문도에는 ‘건성; 建星’이란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같은 별자리이지만 고려 시대에는 왕건(王建)의 건 즉 세울 ‘건; 建‘을 피휘해 뜻이 같은 설 ’립; 立’자를 써서 별자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면 조선 건국세력은 고려 천문도를 고구려 천문도라 주장한 것이 된다.)
하늘의 형상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그린 그림이란 뜻의 이 천문도는 1241년 중국 남송시대에 제작된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 다음으로 오래된 유산이다.(차는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적도 부근을 서에서 동으로 나눈 12구역을 말하고, 분야는 하늘의 별자리를 12구역으로 나누어 땅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킨 것을 말한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군주는 하늘의 천문 현상을 단서로 삼아 올바른 정치를 펼쳐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늘의 현상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제왕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하늘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45 페이지) 세종도 임금이 덕을 닦으면 일어날 일, 월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경(詩經)’의 말을 믿었다.(54 페이지)
전통시대 사람들은 신하가 군주의 권능을 침해할 때 일식(日蝕/ 日食)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는 일식을 용이 태양을 삼키려는 것으로 이해해 용을 쫓아 태양을 구하는 구식례(救食禮)를 치렀다. 우리 조상들은 일식을 신하를 상징하는 달이 임금을 상징하는 해를 잠식하는 현상 또는 강한 음기가 쇠약한 양기를 압도해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았다. 구식례는 퍼포먼스였다. 북을 치고 활을 쏘는 등 달을 향해 공격을 하고 제단에는 희생(犧牲; 종묘제사 등에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바쳤다.
반면 가뭄에 대해서는 일식과 달리 존귀한 양(陽)이 비천한 음(陰)을 소멸시킨 현상으로 생각하고 조용히 기우제를 올리며 비가 내리기를 수동적으로 요청하는 등 난리를 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종을 만들어 쳤다. 시간을 알려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을 알리려는 데에 더 큰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면 28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 가운데 인정은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파루는 우리 고유의 것이다.(64 페이지) 조선시대에 시보(時報)는 민간에 대한 통치 수단이자 지배층의 시간 관리를 위한 방편이었다.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88 페이지)
고종 21년인 1884년부터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에 대포를 설치하여 종 대신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렸다. 1895년부터는 인정과 파루에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대신 오정과 자정에만 시간을 알려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조선과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지상 세계를 지배하는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온다는 믿음 때문에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해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관상수시(觀象授時)라 한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 사돈인 심온을 제거하는 등 손에 많은 피를 묻힌 태종은 그래서인지 하늘의 재이(災異)에 민감했다. 재이란 천재(天災)와 지이(地異)를 이르는 말로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을 지칭한다. 태종은 누구보다도 하늘이 재이를 내려 인간을 꾸짖는다는 천견(天譴) 사상을 굳게 믿은 왕이었다. 조선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킨 세종도 천견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세조는 왕이 근신한다고 해서 혜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천인감응론에 바탕을 둔 재이론이 점차 극복되어간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과학의 수용 등으로 자연관이 변화한 결과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하늘의 일은 천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고 천자만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제후국인 조선의 관상수시는 사대의 예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제후국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갖는 것은 종주국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천문을 정사(政事)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 1년의 시간을 들여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설치했다.(103 페이지) 그런데 세종은 비용을 많이 들여 백성들이 힘들게 지은 간의대를 헐고자 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라고 했다가 반대가 극심하자 결국 중국 사신이 볼 수밖에 없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했다는 말을 했다.(103, 106, 108 페이지) 간의대는 세종의 의지대로 경복궁 북서쪽으로 이전되었다.(109 페이지)
세종이 만든 간의대는 중국 원나라 천문가인 곽수경이 1279년에 건립한 사천대(司天臺)를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109 페이지) 곽수경의 업적 중 가장 찬란한 것은 수시력(授時曆)이란 역법을 만든 것이다.(114 페이지) 수시(授時)란 ‘서경(書經)’에 나오는 경수민시(敬授民時)에서 유래했다. 공경히 백성이 때를 잘 맞추도록 한다는 의미다.(115 페이지) 수시력의 완전정복은 조선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조선 세종 대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내편’으로 인해서다.(칠정산은 움직이는 7개의 별을 계산한다는 의미로 일곱 개의 별이란 해와 달 + 목화토금수성이란 다섯 행성을 의미한다.) 이는 곽수경의 수시력 계산법을 정확히 파악하고 조선 실정에 맞게 교정한 역법이다.(116 페이지) 건국 이후 조선은 명나라의 시간을 사용했다. 조선시대 동지사행(冬至使行)은 명 황제가 반포해주는 달력을 받기 위해 연경(북경)에 가는 일이었다. 문제는 명나라 수도 연경과 조선 한양은 위도가 달라 시간이 달랐다는 점이다.(광화문; 37도 34분 8초, 북경; 39도 56분)
세종은 백성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 임금이었다. 세종은 일식 시작 시각을 15분 어긋나게 예측한 이천봉(李天封)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물론 15분 오차는 이천봉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중국과 시간이 다른 탓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조선은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현실에 맞는 천문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91, 92 페이지)
세종은 즉위 2년 후인 1420년에 경복궁에 내관상감을 설치하고 첨성대란 이름의 관측대를 세웠다. 우리 역사에서 천문 관측대는 고구려,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도 설치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시간, 인력, 경제적 부담 등 때문에 왕립 천문대 건립 염원을 이루지 못했지만 세종은 달랐다. 세종은 이미 장영실 등의 천문가들을 중국에 보내는 등 천문대 건립 준비를 했다.(일행이 본 천문기기는 명나라 것이 아니었다. 1279년 원나라 곽수경이 만든 천문기기였다.; 133 페이지)
세종의 천문 사업은 1432년(세종 14년) 간의대 건설을 시작으로 총 7년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1433년에 간의대(簡儀臺)가 축조되었고 1434년에 자격루(自擊漏)와 앙부일구(仰釜日晷), 1437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낮과 밤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주야 겸용 해시계), 1438년 흠경각(欽敬閣) 옥루(屋漏) 등이 완성되었다. 1420년 천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지 18년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105 페이지)
세종이 이룩하고자 한 천문학은 바로 원나라 곽수경이 이룩해놓은 첨단 천문학이었다. 찬란했던 곽수경의 사천대는 명나라가 들어서자 운행을 멈추었다. 명나라는 천문이나 과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천문학은 원나라의 천문학을 그대로 답습했다. 과학에서 답습은 퇴보를 의미한다.(116 페이지)
“15세기 조선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니덤의 말을 인용했거니와 이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천문학에서 퇴보했기 때문이다. 물론 명의 퇴보만이 아니라 세종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니덤은 한국은 15세기 초와 17세기 초에 천문학이 큰 도약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15세기 초는 세종의 프로젝트 덕이고 17세기 초는 인조와 효종이 통치하던 시기로 서양 천문학 전래가 계기가 되었다.
전통 시대의 달력은 역서, 월력, 책력 등으로 불렸다. 이는 오늘날의 달력 이상의 농경 및 길흉화복 등의 정보가 담긴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앞 부분에서 장영실 일행이 명나라에서 보고 온 것이 원나라의 천문기기였다고 했거니와 이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명나라 천문대였다면 경비가 삼엄해 제대로 조사해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133 페이지)
장영실의 임무는 곽수경이 만든 보루각과 흠경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대로 모방하여 제작하는 것이었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천문의기 제작을 총감독한 이천(李蕆), 이론적 뒷받침으로 역법을 교정한 이순지(李純之),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개발한 장영실(蔣英實)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범 7년만에 완성된 천문 프로젝트도 놀라운 성과였다.(166 페이지)
구루(晷漏)란 말이 있다.(167 페이지) 구(晷)는 앙부일구(仰釜日晷)란 말에서 보듯 해시계를 의미하고 루(漏)는 자격루(自擊漏)란 말에서 보듯 물시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구루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이르는 말이다.(일구라는 원문 그대로 풀이하면 해 그림자다.) 가마솥 시계라는 의미의 앙부일구는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지고 17세기 후반인 현종-숙종 대에 다시 제작되었다.(204 페이지) 경복궁 사정전 앞,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앞, 창경궁 풍기대 앞의 앙부일구는 17세기 후반에 만든 앙부일구 복제품이다.
일성정시의는 ‘주례(周禮)’나 ‘원사(元史)’ 등의 경전과 역사서에 소개된 별을 이용한 시간 측정 방법을 참조하여 세종 대에 독창적으로 제작한 시계다. 낮에는 태양의 운동을 통해,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이용해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장치다.(220 페이지)
세종의 하늘’은 조선 역사와 과학을 조화롭게 다룬 책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 천문학은 첨단 과학이었다. 전기했듯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은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이다. 15세기 우리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 이후 정체되었다. 이는 궁정 천문학 또는 왕립 천문학의 한계 때문이라 짐작된다. 세종이 우리의 역법이 중국의 역법과 다르다는 사실을 안 것이 우리의 글이 중국의 글과 달라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우리 글을 만들려고 결심하게 된 데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