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적인 내용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

 

정조 7년(1783년)의 기록을 통해 정조가 승지에게 무모릉(無模稜)이라는 말을 꺼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경영의 책임 당사자들이 자신의 안녕만 염두에 두고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을 지칭해 한 표현이다. 정조는 서로 공손히 하며 정사(政事)를 위해 바람직하게 협력 한다는 의미의 동인협공(同寅協恭)이란 말도 했다.

 

이어 잘 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졸렬한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했다. 종합하면 무모릉을 지양하고 동인협공을 지향하되 욕교반졸의 잘못을 하지 않도록 과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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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 전곡선사박물관장이 알려주는 인류 진화의 34가지 흥미로운 비밀
이한용 지음 / 채륜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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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는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가 선정한 2020년의 과학도서 10권 가운데 한 권이다. 저자인 이한용은 전곡 선사박물관 관장이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1부 인류의 도구, 2부 인류의 기원, 3부 인류의 예술 등이다.

 

책은 자연석과 석기를 구분하는 데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부분부터 시작해 구석기 시대 백남준이란 내용에 이르기까지 “인류 진화의 34 가지 흥미로운 비밀”을 망라했다. 자연석과 석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돌에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 가공한 흔적이 있는가 여부다.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 만든 석기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다.(규칙성과 정형성이 중요하다.)

 

구석기 시대 인류 진화와 석기제작 기술을 한 마디로 하면 머리는 점점 커지고 석기는 점점 작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기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채택한 기술이 간접타격이다. 돌망치로 돌을 직접 떼어내는 대신 사슴뿔로 만든 일종의 정(punch)을 사용해 길고 얄팍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사박물관, 하면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주먹도끼는 대략 16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되기 시작해 약 10만년전까지 구석기 시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먹도끼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석기를 만드는 기술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원재료인 석재의 차이 때문이다.

 

한탄강에서 주은 규암계 자갈돌로는 아무리 뛰어난 석기 제작자라고 해도 유럽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얄팍한 모양의 주먹도끼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계획성과 예측능력, 기억력과 창의성 등이다. 그래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인류 최초의 예술품이라 하는 것이다.(주먹도끼는 양면 가공 ‘석기; bifaces‘다.)

 

최초의 석기는 약 250만년전 호모 하빌리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자료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어 시기가 더 올라갈 여지는 충분히 있다. 주먹도끼 만드는 사람의 뇌를 최신 의료장비로 조사해 보니 돌을 솜씨 좋게 두드려 깰 때 작동하는 뇌의 특정 부위와 말을 할 때 작동하는 뇌 부위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0 페이지)

 

아름다운 좌우대칭의 주먹도끼가 예술본능 발현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적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인류가 진화함에 따라 석기도 진화했다. 그리고 석기가 진화할 때마다 인류도 진화했다. 인류가 두 발로 일어섰을 때, 본격적인 사냥꾼이 되어 아프리카를 벗어났을 때,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이 심해지던 때, 인지혁명이라는 지적 능력이 대폭발 했을 때 등이 인류 진화의 획기적 시기들이다.

 

인류가 석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지 100만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다. 현미경으로 석기 날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 석기가 가죽을 벗기는 데 쓴 것인지 나무를 자르는 데 쓴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석기를 만들어서 사용해 보면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써는 용도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렇게 정교한 대칭의 석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 중요하게 드러난다.(44 페이지)

 

2005년 포브스지가 선정, 발표한 인류 역사의 20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낚시 바늘이 있다. 인류 역사는 바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53 페이지) 귀가 있는 바늘로 꼼꼼하게 꿰맨 옷이 빙하기의 추위를 넘어서는 데 유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까지의 고고학 증거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바늘이 있었지만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55 페이지) 이 차이는 작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를 낳았다. 작은 것이지만 바늘 구멍을 뚫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냥을 통해 할 수 있게 된 육식과 석기는 불가분의 조합이다.

 

사냥으로 획득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함으로써 신체를 튼튼하게 할 수 있었고 두뇌도 커졌다. 석기 제작은 뇌를 자극해 뇌 발달을 촉진했다. 석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냥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전략 수립 및 역할분담을 통한 사회적 조직력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대부분 오른손 잡이인 이유는 석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교한 손동작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좌뇌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좌뇌의 운동조절기능의 영향을 받는 것은 오른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만물의 영장이며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식만이 있었던 시대에 인류가 사냥감에 불과한 미천한 생물이었다는 인식을 하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 말한다.(9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애석하지만 초기 고인류는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에 가까웠다.(98 페이지)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체질적 특징은 직립보행이다.(107 페이지) 직립보행의 가장 유력한 동기는 나무 위에 살던 인류의 조상이 열대우림이 사바나로 변하는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매일 일상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잘 걸어 다니고 있지만 걷는 과정은 간단한 기술이 아니다. 걷기는 매우 정교한 해부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과정이다.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두 발로 걷는 과정이지만 두 발에만 집중해서 보더라도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묘기를 부리는 복잡한 기계다.(111 페이지)

 

인류는 머리가 먼저 좋아지고 두 다리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 두 다리로 일어서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머리도 커지고 좋아진 것이다.(113 페이지) 사람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3가지는 두발 걷기, 도구 제작 능력, 커다란 뇌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두발 걷기다.(146 페이지)

 

저자는 구석기시대의 여러 사건들은 마치 드라마 줄거리를 연상하듯 상상하며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116 페이지) 평균적인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만일 날 음식을 먹는다면 매일 5kg의 양을 여섯 시간에 걸쳐 씹어야 한다고 한다.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만큼 중요하다. 구워 먹는다는 것은 인류 최초의 요리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119 페이지)

 

초기 고인류들은 하이에나, 독수리 등과 같이 맹수가 먹다 남긴 고기 찌꺼기나 부서진 뼈 속에 남아있던 골수를 빨아먹는 야생의 사체 청소부 역할을 하면서 서서히 동물성 단백질에 적응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126 페이지) 인류 진화과정을 아주 짧은 말로 요약하여 표현하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그리고 이 적응력을 무기로 지구의 구석구석에 퍼져 살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135 페이지)

 

호모 에르가스터는 아프리카를 벗어난 첫 인류다. 인간 가운데 가장 빠른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주파한 9초 58의 기록은 시속으로는 37.5km 정도다. 이 스피드는 치타는 물론 곰보다도 느린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공포의 사냥꾼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목표물을 정해 끈질기게 뒤쫓아가서 잡는 추격사냥의 비법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 사냥을 해야 하는 사자나 치타와 같은 맹수들이 급격한 체온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그늘에 앉아 혀를 뽑아 물고 핵핵거리는 것으로 강제 쿨링을 시도할 때 인간은 털이 없는 온몸을 냉각판 삼아 상대적으로 유리한 체온관리가 가능했다. 경쟁자들이 쉬고 있을 때도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는 데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을 것이다.(138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 못지 않은 문화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51 페이지) 그들의 뇌 용량은 현생 인류보다 100cc 정도 더 컸다. 지난 2010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정도 섞여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주범인지 여부도 논란 거리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네안데르탈인이 약 3만년 전에 홀연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153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들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지구가족의 일원으로서 오랜 기간 함께 살았었다.(174 페이지) 데니소바인도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었다.(165 페이지) 즉 우리,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이 함께 했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직립보행 덕이다. 직립보행을 하게 됨에 따라 똑바로 세워진 척추는 뇌는 물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강 내부의 해부학적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187, 188 페이지)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자료만으로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기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지만 약 50만년전을 전후로 후두의 위치가 다른 영장류에 비해서 훨씬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188 페이지)

 

인간이 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구강구조의 변화뿐 아니라 두뇌와 청각기관이 함께 발달했기 때문이다.(189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남은 것은 본격적인 예술활동의 차이에서 비롯된 창의력과 적응력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 말해지지만 최근 네안데르탈인이 남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벽화가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216 페이지)

 

동굴벽화에서 원근법은 물론 반 고흐 그림에서 보이는 점묘화 기법도 관찰된다는 사실이 놀랍다.(220 페이지) 오래된 동굴벽화는 서양에서만 발견되어야 하는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는 발견들이 최근 들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220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우리 인간은 계속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라 말한다.(255, 25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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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 용어 호니토(hornito)란 용암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떨어져 굳은 바위덩어리를 지칭하는 단어로 수형암맥(樹形巖脈)이라고도 하고 용암기종(溶巖氣腫)이라고도 하고 애기 업은 돌(부아석; 負兒石)이라고도 한다. 제주 비양도에서 볼 수 있다. 피자를 굽는 스페인의 작은 화덕을 닮아 호니토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업은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 72 페이지)

 

이 분은 물에 반쯤 잠긴 호니토를 보니 해녀 엄마가 물 밖으로 나와 우는 아기를 업은 것 같았다고 하며 "비양도 역시 해녀의 섬이라 그 모습을 닮은 것일까"라는 말로 자신의 감성을 설명했다. 이 설명을 접하기 전에 나는 생강을 떠올렸다. 요즘 내가 생강의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뿌리 채소 가운데 울퉁불퉁하기로 치면 생강을 뛰어넘는 것이 있을까? 뿌리 채소라고 다 그렇지는 않은 것은 당근은 울퉁불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니토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용암 내의 가스 분출에 의해 화산쇄설물이 화도 주변에 급경사로 쌓인 소규모 화산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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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주변 고구려성을 찾아서
진종구 지음 / 어문학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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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북한 함경남도 덕원군 풍상면 두류산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이 강을 장악하는 것은 한강 진출의 교두보(橋頭堡) 및 북진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요새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에 백제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임진강 유역을 차지해야 했다. 고려가 통일을 이룩한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충돌이 없었기에 임진강은 군사안보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으나 교통로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는 송도의 해상 세력들이 철원의 궁예의 태봉국에 합류할 때 배를 이용하여 예성강을 출발해 서해로 나왔다가 다시 한강 하구를 통해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12, 13 페이지)

 

저자는 피난 길에 오른 조선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의주까지 갔다가 환도(還都)하기 위해 다시 임진강에 도달했기에 신지강(神智江)으로 불렸던 강이 다시 나루터에 돌아왔다는 의미에서 임진강(臨津江)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말한다.(15, 16 페이지) 임진강 북안(北岸)의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은 고구려의 배후 거점성으로 중요도가 높았다.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인 한강 북안 아차산 주변에는 전초기지 보루들이 축성되어 한강 남안의 백제를 감시하거나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 물론 아차산성도 백제의 성이었으나 고구려가 빼앗아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단기간 넓은 영토를 점령했지만 주민들을 남쪽 변방까지 이주시키지 못해 노동력을 대거 확보할 수 없어 천혜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둘레가 기껏 300 ? 400미터 남짓한 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34 페이지)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支流)이고 임진강은 한강의 지류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중앙의 돌출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만 장악한다면 서해에서 배를 이용하여 한강이나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력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두산성을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은 관미성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41 페이지)

 

오두산성은 원천적으로 백제가 축성한 주력 거점성이었으나 후에 고구려와 신라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하였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의 성을 어느 특정 국가의 성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오두산성은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범할 당시 유용하게 사용되었기에 고구려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43 페이지)

 

덕진산성 앞에는 초평도라는 섬이 있다. 동쪽 임진강 상류 쪽에는 임진나루가 있으며 서쪽 하류 쪽에는 수내나루를 두고 있어 서울 방면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 방면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는 형국을 이루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주요 거점성이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임진강 주변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없었던 까닭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군이 쉽게 임진강을 건너 북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광해군이 보수, 개축하도록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국군 주력부대의 남하 루트였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 동남쪽의 돌출된 곳에 위치한 백제의 육계토성(六溪土城)까지의 직선 거리는 4km 정도였다. 호로고루는 대략 4세기 말경 토루(土壘)나 목책(木柵) 같은 초보적 형태의 방어시설로 구축되었다가 국경이 남쪽으로 확장되어 임진강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지배가 이뤄지게 된 5세기경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호로고루를 지배한 것은 4세기 말부터 나라가 망한 7세기 후반까지 250년 정도다.(60 페이지) 호로고루는 임진강 하류 가운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고구려의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은 현무암 수직단애에 구축한 천혜의 요새다.(64, 65 페이지)

 

남안(南岸)의 호로고루라 불린 이잔미성은 호로고루와 대적하기 위해 구축한, 육계토성과 더불어 백제의 성으로 추정된다. 칠중성은 호로고루와 육계토성을 잇는 평야지대와 임진강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감악산 서북쪽 줄기인 해발 149미터의 중성산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군은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등 임진강 북안의 성들을 거점으로 임진강을 건너 이잔미성과 육계토성을 거쳐 칠중성을 공격했을 것으로 보인다.(79 페이지) 당포성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위치한 강안평지성이다. 당포성 뒤편 마전리 지역은 개성으로 가는 요로(要路)였다.(83 페이지) 당포성은 당개나루를 통제하는 교통 요지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중요성이 높았으나 삼국통일 이후 국경선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잊혀졌던 성이다.

 

저자는 왕이 머무는 곳을 상(上)/ 북(北) 평양(平壤)이라 했고 왕이 순회하여 머물 수 있는 두 번째 도읍 정도를 하(下)/ 남(南) 평양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89 페이지)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주장은 고구려의 통치영역을 한반도로 축소하는 잘못된 논리라는 것이다.(91, 92 페이지)

 

한탄강은 논과 밭이 펼쳐진 평원지대에 갑자기 밑으로 푹 꺼져 생긴 수직절벽의 아래를 흐르는 강이다.(107 페이지) 직탕폭포는 원래 직탄(直灘)폭포였으나 발음 편의상 직탕폭포로 불리고 있다.(117 페이지) 연천군의 재인폭포는 주상절리 폭포로 원래는 한탄강에 바짝 붙어 있었으나 두부침식(頭部浸蝕)으로 수십만년 동안 약 400여 미터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용암 분출시 온도는 1,000-1,200도씨이며 온도가 600-700도씨에서는 용암이 굳어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다. 산성 용암일수록 온도가 낮고 점성이 높아 멀리 가지 못한다. 알칼리성일수록 온도가 높고 점성이 적어 멀리 흘러간다.(121 페이지) 좌상바위는 응회암이다.(응회암은 연한 녹색이라 한다.)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생긴 주상절리 절벽에 은대리성이 자리한다.(144 페이지) 대전리산성은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대격전을 치른 매초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한탄강과 신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강안절벽에 구축된 성이다.

 

반월산성은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산 5-1 청성산 일대 7-9부 능선에 반달 모양의 타원으로 축조된 테뫼식(’산정식; 山頂式‘) 산성이다.(157 페이지) 일반적으로 고구려성들은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에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구려군은 임진강 및 한탄강 북안에 위치한 거점성을 출발하여 주요 하천을 타고 천보산맥 일대의 중간기지 보루에 도착, 다시 중랑천을 타고 한강 북쪽 전초기지 보루에 이르렀다.(1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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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사서 쌓아두고만 있는 책이 많은데 읽을 것이 없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가 명리학과 주역을 공부해 관련 논문을 쓴 정신과 의사 양창순 님의 '명리심리학'을 골랐다. 지리멸렬한 내 독서 상황을 반영하는 선택일 수도 있다.

 

물론 작년 가을 책을 샀을 때는 분명 생각이 있었다. 단지 무료해서 책을 산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명리학과 주역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고 썼다. 맞다. 흐지부지 상태인 내 주역 공부에 활로를 만들어내려는 뜻에서 책을 산 것이었다.

 

책 내용 중 이런 구절이 있어 옮긴다. 우울해서 병원을 찾아와 놓고 우울증 진단이 내려지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힘들어 하는 내담자들이 있다는 내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마음과 세상사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오늘 2021년의 첫 서평 책으로 선택해 게시한 '글쓰기의 모험'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모든 글에는 그 글의 외부가 있으며 쓰기 역시 행위 그 이상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글 바깥의 요소 즉 글 쓰는 이를 둘러싼 삶과 사회적 맥락을 포괄한다. 글쓰기가 단지 글 내부만을 향할 때 더 이상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 어렵고 글은 블랙홀처럼 죽음을 향한다."(148, 149 페이지)

 

요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이진경 교수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새해의 두번 째 날로 벌써 빠른 시간에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곧 본격 스타트를 할 생각이다. 요즘 내가 잘 하는 것은 오래 오래 밥을 씹어 먹는 것이니 이런 호조(好調)도 분명 본격 스타트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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