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의 노래 - 한강하구의 역사문화 이야기
최시한.강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강(祖江)이란 말을 들은 지 1년이 지나지 않았다. 조강은 한강의 끝줄기, 김포를 감싸고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일정 구간의 강을 의미한다.(김포 신문 참고) 저자들은 조강은 한강 하구의 다른 이름이라 말한다. 조강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역사와 지리 공부를 하다가 강(江) 공부를 자세히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는 차원이다.

 

‘한강 하구의 역사문화 이야기’란 부제를 가진 ‘조강의 노래’가 첫 교재가 되었다. 이야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책은 스토리텔링 책이다. 공저자인 최시한 선생은 소설가이자 대학 교수고 강미 선생은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다.

 

머리말을 통해 우리는 이런 글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창작이라고 하면 문예 창작을 먼저 떠올리고. 이야기라고 하면 허구성이 강한 소설이나 설화 위주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다.” 두 저자는 이 책은 창작, 허구 등과 관련이 없으나 그렇다고 책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는 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한다.

 

본문에 의하면 조강은 어른 강, 여러 강이 모여 이룩한 큰 강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15 페이지) 여기서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우리는 강의 시작점을 발원지라 한다, 가령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 검룡소고 한탄강의 발원지는 북한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이다.’란 식으로.

 

여기서 말하는 원은 당연히 언덕 원, 근원 원(原)이다. 이 단어는 조(祖)라는 단어와 상응한다. 인터넷에서 무작위로 검색해본 바를 소개한다. “오늘날의 나와 내 가족이 있고 자손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도 모두 ‘조상이라는 근원’이 있고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경북 매일 수록 시조시인/ 서예가 강성태 글 ‘풀을 내리며’ 중에서)

 

원(原)과 조(祖)가 상응한다고 했거니와 원이든 조든 시간적으로 앞서 있어야 마땅한데 조상 강이라는 조강의 경우 발원지보다 시간적으로 나중에 이루어진 것이니 이상하다.

 

각설(却說)하고 오늘날 조강은 잊힌 강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수운(水運)이 쇠퇴한 탓도 있지만 지도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강과 연안의 삶을 한국인의 기억에서 지운 것은 한국전쟁이다.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르면 대부분 조강 유역에 해당되는 한강하구의 약 70킬로미터는 휴전선(군사분계선)이 없는 중립 수역으로 쌍방의 민간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하면서 자기 측 지역에 정박할 수 있는 민간 선박 공동이용 수역이다.

 

그런 휴전선 양쪽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DMZ)가 오히려 중무장지대가 되었듯이 조강 연안은 출입 통제구역이 되었다. 조강은 철책에 갇혀 그 자체가 휴전선이나 비무장지대와 다름없게 되어 민물과 갯물이 뒤섞인 곳에 사는 다양하고 희귀한 어족들과 재두루미, 개리, 저어새 같은 대륙의 하늘을 오가는 철새들만의 터전이 되고 만 것이다.(17 페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강 권역은 외세 침략의 현장이자 그에 맞서 흘린 피와 눈물로 더께가 앉은 곳이기도 하다. 조강은 애초부터 공동이용 수역이므로 남북이 양해만 하면 언제든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17 페이지) 책에는 포천 현감직을 사임한 토정 이지함과 그의 제자인 통진 현감 중봉(重峯) 趙憲)이 나온다.(통진 출생의 조헌은 왜란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700명의 의사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한양 삼개(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통진 현감으로 있는 제자 조헌(趙憲)을 보러 가는 길에 <조강에서 폭풍을 만나 겪은 일을 쓴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를 떠올리는가 하면 스승 서경덕을 뵙고 오던 때를 회상하기도 한 토정은 물의 흐름과 달의 위치를 보아 바닷물이 밀려오고 나가는 시간을 대강 짐작하면서 임진강 쪽 물살이 내리쏟는 힘을 이용하여 포구가 많은 남쪽으로 배를 몰도록 도와 사람들을 풍랑에서 구한다. 이지함은 이규보 선생이 지었다는 물참(밀물 때)에 관한 시를 통진 백성들에게 자세히 가르쳤다.

 

이양선(異樣船)들은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조강(조수 간만의 차가 커 접근이 쉽지 않았고 갯벌이나 모래가 많아 좌초하기 쉬웠던) 대신 대신 염하(강화해협)를 이용하다가 조강 수로를 막아 조선 조정을 압박하는 방법을 택했다. 흔히 병인박해(1866년)를 병인양요(1866년)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프랑스가 조선을 택한 것은 러시아와 영국을 모두 견제할 수 있는 곳이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의 어두운 그림자는 조강 연안의 여러 포구들(조강포, 마근포, 강령포 등)에 유독 짙게 드리웠다. 1899년 초가을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경인 철도가 개봉되니 그 철마를 구경하러 가자는 말이 전국에 돌던 때였다.(123 페이지) 밀물 때 한번에 수백 척이 부산하게 출항을 준비했던 조강포의 모습은 이제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한양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대는 시선(柴船; 조강 연안의 황해도 땅과 강화도, 통진 같은 데서 장작, 숯, 생선,젓갈 따위를 모아 싣고 한양을 오가던 배)들도 육로가 발달함에 따라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세금을 곡식으로 거두어 배로 나르던 조운제도가 점차 사라지다가 갑오개혁(1894년)을 계기로 아주 없어져버리고 화폐로 대신하게 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124 페이지)

 

조강은 경인선과도 관련이 있다. 경인선은 한국 최초의 철도이자 일본이 해외에 개통한 최초의 철도였다.(조선에 철도 도입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주미대리공사 이하영이었다. 물론 조선의 철도 부설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이 철도로 대한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병력과 물자 수송의 길목을 틀어쥐게 되었다. 조강이 오랜 동안 맡았던 역할을 차지한 것이다.(140 페이지) 근대 문명의 상징인 철도는 대한제국 백성에게 고통과 굴욕을 안겨주었다. 철도 건설 부지를 헐값에 넘겨야 했고 턱없이 낮은 품삯을 받으며 노역에 동원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를 둘로 나눈 삼팔선(북위 38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데다 서해와 인접하였기에 조강 연안의 마을들은 곧바로 전쟁터가 되었다. 전쟁 중에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포탄이 떨어져도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농사일을 하다가 대포나 총 소리가 들리면 몸을 피하고 그치면 나가서 일을 했다. 소리가 잠잠해질 때를 택하다 보니 나중에는 밤에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휴전 협정에 따르면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임진강 하구부터 강화도 말도까지로 정해진 한강하구의 수역은 중립 지역이다. 대부분 조강 지역에 해당하는 그곳은 교전 쌍방의 민간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공통이용 수역이다. 정전협정 당시부터 휴전선도 없고 DMZ도 없는 지역인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는 휴전 상황에서 조강은 그 자체가 휴전선이자 DMZ가 되고 말았다.(146 페이지)

 

조강은 남북 분단의 상처 그 자체가 되어 죽음과도 같은 정적에 빠져버렸다.(148 페이지) 강물의 휴전선, 강물의 비무장지대가 된 조강 유역을 평화지대로 만들고 공통으로 이용하기 위한 노력이 없지 않았다.

 

조강이 만남의 장이자 평화의 강, 나아가 공동 번영의 강이 될 날을 모두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150 페이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창작, 허구 등과 관련이 없으나 그렇다고 책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는 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사실과 상상력의 관계에 유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토리 개발의 필요성도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광조(趙光祖)평전’(이종수 지음)을 통해 ‘소학(小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소학‘은 주희가 편집한 책이고 김굉필의 스승인 김종직이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이 ’소학‘을 좋아해 소학 동자를 자처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주희의 ‘근사록(近思錄)’으로 학문의 중심을 잡고 ‘소학(小學)’을 널리 장려하라고 아뢰었다. 역대 임금들 중 성종이 ’소학‘을 즐겨 읽었다. 성종은 승정원에서 경연(經筵)에서 읽을 책으로 ’대학연의‘를 추천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굳이 소학을 고집했다. 그것은 ’대학연의‘에 따르자면 부부 불화는 수신 및 제가에 실패한 성종 자신 탓이 되고 ’소학‘에 따르면 중궁 탓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윤희진 지음 ’제왕의 책‘ 참고)

 

윤희진은 이 내용을 전하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성종에게 소학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즉 성종이 ’소학‘을 택한 것은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광조 평전 - 조선을 흔든 개혁의 바람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꽤 이른 나이부터 행동의 기준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배움과 판단에 의거한 도(道)에 둔 사람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 내의 청송당 터에서, 운현궁에서 익선동으로 넘어갈 때 볼 수 있는 집터 표지석에서 잠시 이야기했을 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조광조는 출생지인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묻혔고 인근 심곡서원에 신주가 모셔졌다. 조광조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목숨을 잃었다. 실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중종 14년인 1519년 11월 15일 조광조가 옥에 갇힌 후 사관이 참여하지 않았다.

 

조광조 세력은 붕비(朋比; 붕당을 세워 자기편을 두둔함)의 죄를 받았다. 대명률에 따르면 참형에 해당하는 중죄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다가 하룻만에 붕비의 죄명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조광조는 중종으로부터 친히 국문받기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광조의 스승은 김굉필(金宏弼; 1454 - 1504)이다. 조광조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에 처한 김굉필을 직접 찾아가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소학(小學)을 좋아해 스스로 소학(小學) 동자라 칭했던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소학은 성리학의 대가 주희가 지시해 편찬한 책이다. 역대 경전 가운데 좋은 말씀을 가려 뽑아 수록한 선집 형태의 책이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인 사관 김일손이 스승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를 애도하는 글)을 사초(史草)에 싣자 연산군이 조카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등을 죽인 사건이다. 김굉필도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 하나다.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의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지만 세조의 등극을 문제시한 선비들을 벌하지도 않았고 문제제기를 수용하지도 않았다. 조광조가 생각하는 학문은 사장(詞章; 시문 짓기)이 아닌 경학(經學; 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 그가 사장(詞章) 시험에 불쑥 응시해 장원을 차지했다. 조광조에게 문장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조광조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교를 따르자는 기치를 내건 개혁을 주장했다.(58 페이지) 신하들에 힘입어 왕이 된 중종은 공신들에게 질릴 만큼 질린 임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모두 죽었다. 중종이 조광조를 만난 것은 이 이후다.

 

재위 10년차의 중종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유생들로서 대책을 논하라는 알성시 책문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는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며 선한 것을 선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는 이치가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답했다.

 

또한 임금은 대신에게 정치를 위임해야 한다고 답했다.(이는 정도전의 논리와 통하는 바다.) 알성시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된 지 석달만에 사간원 정언(正言)을 제수받았다. 조광조는 사간원 정언에 제수받은 지 이틀만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파직해달라는 청을 올렸다.

 

고작 6품의 초임 간원이 자신이 속한 부처의 장관을 포함한 언관 모두를 탄핵한 것이다.(84 페이지) 중종 시대에는 재해(災害)가 많았다. 이에 반정이 잘못 되었으니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중종은 답하지 않았다.

 

“구언(求言; 임금이 신하의 직언을 구함)한 뒤 아뢴 바가 비록 광패(狂悖; 행동이 도의에 벗어나서 미친 사람처럼 사납고 막됨)하더라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니 상소 내용이 비록 그르다 하더라도 죄를 줄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중종은 두 사람(박상, 김정)을 유배에 처했다.

 

중종은 죄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모를 것이기에 죄를 준다고 답했다. 조광조는 두 사람의 말이 지나치면 쓰지 않으면 될 것을 죄는 왜 주는 것인가, 물으며 대간이 오히려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파직할 것을 청했다. 중종과 조광조는 의견이 어긋났다.

 

중종이 다른 정언(正言)들은 용납하였는데 어찌 조광조만이 용납하지 않느냐 말하자 조광조는 사람들의 의견이야 저마다 다를 수 있는 법, 그들이 용납했다고 자신 또한 그래야 할 까닭이 있느냐 말했다.(103 페이지) 결국 조광조의 뜻대로 사건은 정리되었다. 하지만 의견이 둘로 나뉜 것은 여전했다. 조광조는 경계심의 대상이자 기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조광조는 이듬해 3월 홍문관 부수찬(종 6품), 후에 수찬(정 6품)의 자리에 올랐다.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임금의 경연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근사록(近思錄)’으로 학문의 중심을 잡고 ‘소학(小學)’을 널리 장려하라고 말했다. 당시 하급관원이라도 실력이 남다르면 핵심적인 경연관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연산군은 성군포기선언을 했고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한 경연 스승 정여창을 미워하다가 유배 끝에 부관참시까지 했다.(116, 117 페이지) 세자 시절이 없었고 정국이 혼란스러워 마음 편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던 중종은 조광조가 경연관으로 참여한 몇 년간 열심히 공부했다.

 

조광조는 홍문관 부수찬(종 6품)이 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당상관인 정3품 부제학에 올랐다. 부제학은 홍문관의 실질적 책임자다. 정몽주, 성삼문, 박팽년 등에 대한 처우 문제가 불거졌다. 성균관 유생들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김굉필 등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자, 김정, 기준, 정응, 김구, 윤자임, 박훈, 박세희, 김식 등이 조광조 세력이었다. 문묘(文廟) 종사(從祀)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모셔진 신하에게 왕도 무릎을 꿇어야 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 오르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군신의 도가 사제의 도로 바뀌는 것이다.

 

저자는 정광필이 사육신 추장(追葬)과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은 혹시 조광조 무리의 정치세력화를 염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란 말을 한다.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에 대한 문묘 종사 반대 논리를, 스승은 자구(字句)나 파헤치는 학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말로 물리쳤다.

 

김굉필은 제대로 된 학술서 하나 남기지 못한 인물이다.(김굉필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광해군 시기에 이르러서다.) 조광조의 생각들을 따르다 보면 조선을 처음 만들어가던 정도전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무엇에 정치의 기본을 둘 것인가, 군신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자세가 그렇고, 그 물음에 대한 답 또한 그렇다.

 

두 사람 모두 큰 그림을 그리는 설계자였으니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첫 기초를 세웠다면 조광조는 100년이 지난 조선을 다시 증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168 페이지) 당연히 이해가 얽혀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는 소격서(昭格署) 혁파 상소에서 ”대저 시비를 가리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사정(邪正)을 살피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미혹(迷惑)하지 않는 것을 강(剛)이라 하고, 확실하게 의심없는 것을 단(斷)이라 합니다. 무릇 이 네 가지는 모두 임금의 일상 생활에 한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보존하여 변함이 없으면 사물(事物)을 접응(接應)함에 있어 갈피를 못잡고 주저하는 병통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런 것이 있으시겠습니까?“라 말했다.

 

중종은 ”조종조(祖宗朝)에서 혁파하지 못한 일을 내 어찌 스스로 잘난 체하여 고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중종 시대에 재해가 많았거니와 심한 지진이 있었다. 조광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소인이 인사(人事)를 잘못한 탓이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누가 보아도 조광조를 지칭한 상소였다.

 

조광조는 아직도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못하느냐고 상소했다. 중종은 조광조가 사직하더라도 소격서 혁파는 윤허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소격서는 고려에서 시작된 것이니 없앤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말했으나 중종은 그 퇴로(退路; 출구전략?)를 걷어찼다.

 

조광조는 소격서 혁파건으로 계속 상소했다. 결과론인지 모르지만 소격서(혁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란 의문이 든다. 결국 중종은 소격서 혁파를 윤허했다. 두 달 후 조광조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치적 부담이 큰 자리였다. 사실 소격서는 재해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었다.

 

이제 위훈삭제(僞勳削除)건이 남았다. 중종 당시 책봉된 정국(靖國) 공신들에 대한 책봉을 거두어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것이었다. 중종 반정은 가장 많은 공신이 책봉된 사건이었다. 중종과도 밀접히 관련된 문제였다. 더구나 주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준 선물을 거두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광조는 자신들의 세력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된 김우증(金友曾)에게 참형을 선고하지 않음으로써 대간들에게 탄핵당하기까지 했다.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 제도 시행을 추천했다. 천거로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다. 현량과는 조광조가 출사 이전부터 구상했던 정책 중 하나다. 조광조의 개혁 구상 가운데 유일하게 사심 어린 정책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다.

 

조광조는 중종이 정국공신 개정을 불편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종을 위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이 된 자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이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었다.

 

조광조도 공신 책봉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4등 공신만 개정하자는 타협책도 제시되었다. 공이 없이 공신이 되었다며 스스로 공신 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종은 반정 당시 경황이 없어 공신 책봉에 문제가 있었음을 뼈아프게 시인하며 개정을 명했다. 117명 중 76명이 개정 대상자로 정해졌다.

 

기묘년(1519년) 11월 15일 조광조는 전격 체포되었다. 조광조에게 중죄를 적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를 지지해온 사람들이 함께 죄를 받겠다고 청하고 나섰다. 조광조는 감사(減死)되었다. 사건의 발단이 남곤 등의 참소가 아니라 임금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임금이 몰래 일을 꾸며 자신의 신하를 제거하려 했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비겁한 처사였다.

 

조광조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조광조를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중종은 조광조 사사(賜死)를 명했다. 사사의 명이 전해지자 조광조는 오히려 태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광조는 함께 사사에 처해지게 된 동료들과 달리 우리 임금을 만나고 싶을 뿐이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에 취했다.

 

공초(供招;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에 의하면 조광조(趙光祖; 1482 - 1520), 김정(金淨; 1486 - 1521), 김식(金湜; 1482 - 1520), 김구(金絿; 1488 - 1534) 등은 붕당의 죄를 지었고 기준(奇遵; 1492 - 1521), 윤자임(尹自任; 1488 - 1519), 박세희(朴世熹; 1491 - ?), 박훈(朴薰; 1484 - 1540) 등은 그들을 추종한 죄를 지었다.(265 페이지)

 

어떻든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지도, 이 기막힌 처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조광조의 논의가 궤격(詭激; 언행이 온당하지 않고 과격함)하다는 말에도 수긍할 수 없으며 우리의 근심은 오직 나라를 위한 것이었을 뿐 사사로이 부화(附和; 줏대 없이 남의 의견을 따름)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뿐, 그것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임금께서도 자신에게 그 믿음을 허락하신 것이었는데, 지금 다른 참소로 인해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리시는 것이 아니냐 호소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했고 함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유인숙(柳仁淑; 1485 - 1545), 공서린(孔瑞麟; 1483 - 1541) 등은 조광조와 같은 벌을 받겠다며 옥에 가둬달라 청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사사건건 조광조의 정책을 막아서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1462 - 1538)마저도 조광조를 위한 탄원을 멈추지 않았다. 탄원 물결은 정광필이 영의정 자리에서 체직(遞職)당한 뒤에 멈추었다. 조광조는 경기도 평택 농성(農城) 땅에 유배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자신이 죽거든 먼 길 가기 어렵지 않게 관을 얇게 만들라고 명했다.

 

의아한 것은 중종의 태도다. 조광조의 정책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왜 제때 말하지 않은 것일까?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그렇게 돌변하다니..조광조의 죽음은 이상하다. 아무도 청하지 않은 죽음을 임금이 홀로 결정한 것이다. 사관은 중종을 마치 두 임금 같았다고 기록했다.

 

연산군 시대의 두 사화(士禍)는 어쨌거나 폭군이라 비난받던 임금이 남긴 결과였다. 하지만 기묘사화는 요순시대를 따르겠다던 임금의 결정이었다. 중종은 스스로 발탁하여 믿고 의지했던 신하들을 일방적으로 배반한 신의(信義) 없는 임금이 아닐 수 없다.

 

중종은 아무래도 조광조에게 질투를 느낀 것 같다.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고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조광조에 비해 군주임에도 자신은 참 보잘 것 없다고 느낀 것 같다. 저자는 중종의 다스림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고 말한다.(290 페이지)

 

“중종이 알았다면 섭섭했겠지만” 조광조는 중종 승하 다음 해인 인종 1년(1545년)에 복권되었다. 조광조는 선조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광조는 단지 더 나은 정책과 제도만이 아닌, 조선의 정신과 그 방향을 고민했던 인물이다.“(298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기 불편한 책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내용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 이야기다. 최근 읽은 두 권의 역사책이 모두 중요한 부분을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닌 푸른색이나 짙은 녹색 바탕에 흰 글씨로 처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읽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읽기 불편하니 아쉽다. 그런가 하면 어떤 책은 판형은 작은데 무리하게 볼륨감을 키우려고 뻣뻣한 종이를 써 손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미끄러워서 잡기 불편한 책도 있다.

 

책읽기도 노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눈, 손, 머리 등등에 무리가 가는 노동. 논란의 여지도 있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요즘 벽돌책이 많이 나온다. 필요해서 두꺼운 책이 있는가 하면 핵심을 선별하지 못하는 요령부득의 장황함 때문에 책이 두꺼워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
일지 지음 / 어의운하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의 저자인 일지(一指) 스님의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 읽기’는 저자 사후 나온 책이다. 2000년부터 2년간 월간 ‘불광’에 연재한 글을 묶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출간(2019년 1월) 직후에 샀으나 2년이 지나도록 완독하지 못한 책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궁극의 화두인 붓다’라는 글에서 스님은 “불교도들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增長)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證得)하는 기본 전제.“라는 중요한 말씀을 전했다.

 

스님은 ‘대지도론’의 가르침을 전하며 불교는 신앙이라기보다 신심, ‘신해; 信解‘라는 표현을 더욱 자주 쓴다고 말한다.(51 페이지) 절대화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보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중생 구원력에 대한 믿음, 인간은 바른 행위에 의해서만이 고통에서 해탈한다는 믿음, 윤회와 업에 관한 윤리적 행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수신(修身)을 강조한다. ”수신이 전제되지 않은 문화란 거품이다.”...수신이라 하니 유흥(遊興)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전제는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배워야 하는 존재“(‘티벳 사자의 서’의 메시지)라는 말과 상응한다. 스님은 무명(無明)이 탐욕과 증오를 야기시킨다고 말한다.

 

무명이란 환상과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교는 인간을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로 긍정한다. 물론 불교는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 깊이 가르치는 종교이기도 하다. 인간 찬미의 극점에 선(禪)과 화엄(華嚴)이 자리한다.

 

불교 수행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할까? 건강한 몸과 마음이다. 이에 대해 스님은 그것은 육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을 닦고 깨닫고 실천해 나가기 위한 최초의 전제라고 가르친다.(63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수행자는 사려 깊고 건강하며 자비로워야 한다.(67 페이지)

 

스님은 경전을 읽지 않는 행태를 비판한다. ”마음만 깨달으면 되지 경전에는 별것이 없다는 오만은 그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비극”이다.(69 페이지) 스님은 경전을 읽지 않고 불교도로 지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행위라 말한다.

 

스님은 깨달음 또는 선(禪)보다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강조한다. 스님은 경전 연구든 마음의 깨달음이든 자신의 실존이 없이 모방으로 그친다면 그 웅장한 대장경도 번뇌의 백과사전일 뿐이라 말한다. 스님은 난해한 가르침을 고집하기보다 불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연기(緣起)부터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님은 연기를 상의상관성의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실재론적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95 페이지) 그래서 스님은 ‘중론(中論)’을 인용해 존재의 법칙은 연기이며 연기의 본질은 공(空)이며 중도(中道)라고 가르친다. 스님은 해탈이란 신비한 것도 아니고 집중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 상태와 욕구에 대해 사색하고 탐진치로 오염되어 있는 불순한 에너지와 거품을 걷어내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가르친다.

 

임제선사는 해탈이란 물혹(物惑)과 인혹(人惑)의 속임수를 넘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라 말했다.(103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탐욕에서의 해탈인 마음의 해탈과 무지에서의 해탈인 지혜(로)의 해탈이라는 두 가지 해탈이 필요하다.(105 페이지) 스님은 해탈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서재나 강의실에서 고담준론으로 해탈을 논할 것이 아니라 남의 눈물을 닦아 주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해탈의 사회화를 실천하는 것이다.(107 페이지)

 

스님은 무아의 길이야말로 해탈의 길이라 말한다. 스님은 무아와 자아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말한다. 불교가 부정하는 자아는 소유형의 자아, 아집, 아만, 아견, 아상에 뿌리를 둔 오염된 자아다. 확립해야 할 자아는 안목과 지혜를 열어주고 해탈과 자비로 인도하는 자아다.(113 페이지)

 

우리는 나, 나의 영혼, 마음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거나 사용할 때마다 그 단어에 합당한 인간 존재의 본질, 영속적인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아뢰야식 차원의 환상에 빠지기 쉽다.(115 페이지) 스님은 무량수경이 전하는 다섯 가지 대악(大惡)을 말한다.

 

1대악은 살생의 악업이다. 2대악은 도심(盜心)을 품은 사악한 마음이다. 3대악은 항상 사악한 마음에 따라 애욕으로 교란하는 마음이다. 4대악은 탐진치 3독(毒)으로 짓는 구업(口業)이다. 5대악은 술에 탐닉하고 미식(美食)을 좇으며 가족과 스승,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스님에 의하면 우리는 업과 번뇌, 무명에 현혹되어 불건강한 탐욕과 분노의 노예가 된 채 막대한 규모의 심리적, 물질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투쟁이 가속된다.(129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유심(唯心)은 마음의 자기생성력과 자기회복력을 강조하는 불교사상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은폐하고 싶어하는 삶의 허상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허상과 위선에 오염된 자아를 초극하려는 치열한 세계관을 보여준다.(137 페이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극하려는’이란 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거니와 이는 마음이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다. 마음으로 초극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극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 즉 발심(發心)하는 것이다. 스님은 발심한 사람을 보살이라 정의한다.(스님은 여성 불자들을 보살이라 하지만 이 명칭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간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던 자기 존재를 마음의 깨달음, 불도의 실천으로 돌리는 것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143 페이지) ‘대방광불보은경(大方廣佛報恩經)에 의하면 부처님도 한때 지옥 중생이었으나 보리심을 발함으로써 지옥에서 벗어났다.(144, 145 페이지)

 

스님은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욕(忍辱) 즉 참고 용서하는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151 페이지) 스님은 인욕의 원어인 크샨티는 참는 것이지만 더 깊게는 용서하는 것이라 말한다.(사실 참는 것보다 용서하는 것이 더 적극적인 만큼 중요하다.)

 

스님은 우리는 지금 이 엄청난 속도의 해체,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의 재구축을 위해 불교가 설하는 제법실상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61 페이지)

 

스님은 “나날이 마음 쓰기를 풍요롭게 하면/ 도를 이루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보리는 다만 마음으로 찾아야 하거니/ 어찌하여 밖에서 찾아 헤매는가”란 ’육조단경‘의 구절을 소개하며 이 구절을 이른 봄의 황사를 뚫고 달리는 남원행 버스 속에서 읽었다고 말한다.

 

“실상사로 걸음을 옮기던 그날, 실상사는 운봉분지(雲峰盆地)의 낯선 풍경과 정적을 흔들고 지나가는 거센 바람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지리산의 웅장한 산자락이 연꽃잎이 되어 둘러싸고 있는 운봉분지의 바람 속에 서 있는 이 옛 선문은 이제 더 원할 것도, 회한도 없이 모든 허장성세를 떨어내어 버린 늙은 비구의 모습처럼 그렇게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국도를 버리고 실상사로 이어진 운봉분지의 옛 길을 찾아 걸으며 이 선문에 은둔해 버린 옛 선승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한여름의 뜨거운 볕에 그을리면서, 겨울의 찬 눈보라 속을 헤치며, 가을의 깊은 우수에 젖어서 이 길을 묵묵히 걸었으리라.

 

그리고 한밤의 실상사 뜨락을 거닐면서 검푸른 별의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의 붓다를 응시하던 그들에게 그 밖의 다른 인생은 아예 없었으리라. 실상사가 서 있는 풍경은 그렇게 고독했다.

 

누구든 좋다. 실상사의 깊은 고독만큼이나 삶의 허망한 가지를 다 쳐 내버린 뒤 선(禪)의 길, 그 밖의 다른 인생은 아예 없는 선승의 자유를 누리고 싶거든 실상사를 향해서 홀로 떠나가기 바란다. 그는 곧 운봉분지의 거센 바람 속에 속기(俗氣)에 찌든 자신을 바라보며 한없이 망설이고 슬퍼하게 될 것이다.”(169 페이지)

 

보살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무엇이라 말했는가?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하면 곧 보살이 아니라 말했다. 육조 혜능으로 하여금 선문에 발을 내딛게 한 경전이 금강경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사용하라)는 의미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그 구절이다.

 

스님은 현대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전문성, 도덕성, 자기 관리 등에 있어서 철저하다는 의미에서 초기불교의 아라한과 같은 존재이지만 자신의 이익 문제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순점이 있기에 그 점을 극복하려면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이른다. 스님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도불교의 정신사적인 활력이 정점에 도착했을 때부터 불교 승려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 사막을 건너왔다.

 

나는 그 사막의 푸른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 아래 일부러 노숙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 무모하고 엄청난 도전을 하게 만든 불교의 큰 힘은 무엇일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사막의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말했다고 한다.

 

“어리석은 나그네여, 불교의 큰 물결이 동쪽으로 흐른 힘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이며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네.”(197 페이지) 스님은 고급스러운 깨달음이나 현학적인 교학보다 더욱 간절하게 요청되는 것은 현대인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며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풀어갈 소박하고도 명료한 행동의 가르침일 것이라 말한다.(201 페이지)

 

스님은 현대 불교를 깊이를 잃은 불교라 진단한다.(203 페이지) 스님은 깊이를 잃은 불교는 현대인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답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207 페이지) 스님은 이 몸 즐겁자고 하염없이 쌓아가는 악업의 도미노는 명백히 거부하지만 이 몸이야말로 부처가 되는 그날까지 잘 이끌어야 할 수행의 밑천이기도 하다고 가르친다.(211 페이지)

 

스님은 몸의 수행이 없는 깨달음이란 추단(推斷)일 뿐이며 화려하지만 곧 지워질 가면 위의 화장과도 같은 것이라 말한다.(213 페이지) 불교도들은 몸의 즐거움을 위해서 몸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수행을 이루기 위해 몸을 유지해야 한다.(215 페이지)

 

잡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쾌락에 빠지는 것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다.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대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책의 편집자는 일지 스님이 불교인문주의자를 자처하며 비승비속의 삶으로 수많은 경전을 탐구해나갔다고 말한다.

 

나는 스님에게서 인문적 천재, 불교에 철저한 스승의 면모를 느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1-09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