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환의 책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44세의 홍대용이 즉위 2년전인 23세의 세손 이산(李蒜)과 서연(書筵)에서 주고 받은 대화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홍대용은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뜻의 유춘오(留春塢)란 이름의 별장에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현판을 내걸었던 사람으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고 지구 자전설을 믿은 사람이었다.

 

건곤이란 말은 주역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김도환의 책에 주역에서 유래한 납약자유(納約自牖)란 말이 나온다. (다른 책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스스로 창을 내는 것으로 읽었으나 홍대용은 서연에서 군신간에 대화하는 것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납약자유는 부드럽고 순함을 뜻하는 손여(巽與)와 같다고 답했다.

 

또한 납약(納約)은 임금과 사귀는 도리를 말하고 자유(自牖)란 밝고 툭 트인 것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김도환의 책은 이 차이를 해명하기 위해 잡은 책이다. 어떻든 거문고를 잘 다루었던 사람으로 실학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과거에 별 뜻을 두지 않았던 홍대용은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홍대용이 맡은 직책은 세자를 호위하는 세자익위사의 한 파트였으나 이 일이 서연을 행하는 직으로 바뀜에 따라 세손과 공부로 만나게 된 것이다.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에서 재미 있는 글자를 만났다. 맹자가 말한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란 말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설()이란 글자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된 사람에게는 가르침을 펴지 않고 그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은 가루라는 뜻과 달갑게 여기다란 뜻을 가진 단어다. 화산쇄설암(火山碎屑巖)의 설이 바로 가루를 뜻하는 설자다. 부스러진 암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열과 압력을 받아 만들어지는 바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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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뿌리 고조선과 고분벽화에 담긴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
김경상 지음, 이기우 엮음 / 새로운사람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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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름(단성화산체라 하는)에 대한 글에서 오름은 천문대로 사용되지 읺았을까, 란 글을 읽었다. 이에 나는 연천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3대성 가운데 하나인 호로고루에 올라 고구려의 천문 활동을 상상했었던 지난 해 일을 떠올렸다. 이런 사연을 기억하며 사놓은 지 1년 정도 된 책을 찾아 들었다. 김경상이 사진으로 참여하고 이기우가 엮은 ‘한민족의 뿌리 고조선과 고분벽화에 담긴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란 책이다.

 

고구려는 대륙을 호령하던 나라여서인지 신비와 동경, 아쉬움의 눈으로 보게 된다. 더구나 수(隨)나라의 100만 대군을 무찌른 나라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본문 가운데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글이 있다. 북방을 농경 국가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 잘못된 무의식 때문에 눈에 띈 글이 아닐 수 없다.

 

홍산 문화는 요서 지역에서 생성된 신석기시대 위주의 문화집합체로서 신석기시대 문화 외에도 청동기 시대나 동석(銅石) 병용시대 문화도 포함되었다. 홍산문화는 초기 농경문화, 유목문화, 정주(定住)농경문화 등이 섞여 있으며 주체는 황하족이 아닌 동이족(東夷族)이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龍井市)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석축 성곽인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도 나온다. 성자산 산성의 석성 축조법은 고구려, 백제와 닮았고 수원화성의 축성술과도 일맥상통한다. 백두산이라는 말은 ’고려사‘ 성종 10년(981년)에 처음으로 나온다. 13세기 말 문헌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는 태백산으로 나온다. 백두산은 장백산과 혼용되었다.(장백산이란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다섯 신녀(神女)가 살았다고 해서 이름이 결정된 오녀산성은 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성왕; 東明聖王‘, ’추모왕; 鄒牟王‘)이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쌓은 두 개의 도성 가운데 하나다. 추모왕은 하백의 딸을 어머니로 하여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모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가 무리 짓게 하여라.”

 

광개토대왕은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무게 37톤의 화강암에 문장들이 새겨진 비다. 이 비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일본이 어떤 식으로든 한반도의 정세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의하면 왜(倭)는 고구려가 백제를 영원히 자국의 속국으로 묶어두려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로 등장할 뿐 고구려와 맞대결하는 대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84 페이지)

 

광개토대왕비에서 200여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의 능이 있다. 집안의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추정된다. 장수왕은 왜 평양으로 천도했을까? 고구려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무덤 공간에 벽화를 그렸다.(고분벽화) 집안의 우산하 오회분(五盔墳)은 다섯 개의 투구<회; 盔>를 엎어 놓은 모양의 무덤이다.

 

책에는 무용총, 수산리 고분벽화(고구려와 일본의 교류를 보여주는), 진파리 1호 무덤, 덕화리 2호분, 강서대묘(평안남도 대안시에 위치한 고구려 후기 사신도 벽화 고분), 백암성 등 생소한 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구려는 기원전 75년경 한(漢)나라의 현토군을 서북쪽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종족을 결합하고 압록강 유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고구려족과 연맹을 결성하였다. 당시 지역연맹의 주도세력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보이는 주몽보다 선진세력이었던 송양왕의 비류국인 소노부였다.

 

주몽은 비류국 주도의 연맹체가 형성되어 있는 가운데 남하하여 그 구성 소국 가운데 하나였던 졸본부여에 정착한 후 송양왕과 주도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고구려의 건국시조가 되었다.(170 페이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이어 장수왕이 천도를 함으로써 한반도 내에서 적극적으로 남진 정책을 펼친 결과 한반도 내에도 상당한 양의 고구려 유적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 시대 보루성과 유적지가 많다. 연천 당포성은 임진강의 당개 나루터 부근에서 합류하는 지천과 임진강으로 인하여 형성된 약 13미터 높이의 긴 삼각형 단애(斷崖) 위에 축성되어 있으며 입지조건과 평면형태 및 축성방법은 호로고루나 은대리성과 아주 유사하다.(180 페이지)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지다. 호로고루 아래의 임진강은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이 지역은 육로를 통해 개성 지역에서 서울 지역으로 가는 최단거리에 해당한다. 연천 은대리성은 한탄강 장진천의 합류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 위에 축조된 성으로 한탄강과 합류하는 곳이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점차 넓어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189 페이지)

 

연천 신답리 고분군은 고구려 고분으로 확인되었다.(194 페이지) 단양 온달산성의 주인공 온달은 고구려의 장군이다. 이 외에 충주 중원 고구려비, 충주 장미산성, 음성 망이산성, 세종시 남성골산성 등을 거쳐 만날 수 있는 것이 해동성국 발해에 대한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후고구려까지 책은 얇은 분량에 꽤 많은 컨텐츠를 담았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의 이야기를 조선사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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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1월 28일 동아일보 구사옥, 열상진원(洌上眞源) 표지석, 고종 어극 40주년 칭경기념비, 염상섭 동상, 이순신 동상,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고궁박물관, 종교교회 등을 해설할 때 혜정교(惠政橋)터 표지석은 포함시키지 않았지요. 오늘 성북구립 최만린 미술관을 검색하다가 ‘전쟁상흔에서 생명의지 끌어낸 조각가 최만린 별세’(서울경제)란 기사를 만났습니다.(2020년 11월 17일, 향년 85세).

 

이 미술관은 조각가 최만린 님이 30년간 거주한 정릉 자택을 성북구에서 매입해 조성한 성북구립미술관의 분관이라네요. 그런데 서울경제의 관련 기사에서 ‘병원보다 갤러리를 더 사랑한 의사’라는 기사를 만났습니다. 박호길이란 의사인데 “그의 첫 번째 일터는 하필 갤러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혜정병원.”이란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머릿 속에 혜정교란 이름이 남아 있어서인지 인사동의 병원이 혜정병원이었는가, 란 생각을 했네요. 미심쩍어 구글에 가서 혜정병원이라고 치니 ‘이것을 찾으셨나요? 해정병원’이란 멘트가 떴어요. 맞아요. 제가 위장 때문에 한 1년 정도 드나들던 병원은 해정병원이지요.(혜정병원은 없는 병원입니다.) 벌써 30년전의 일입니다. 종로는 이런 곳이네요. 추억한다고도 할 수 없고 향수를 느낀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네요.

 

당시 다니던 해정병원의 정확한 위치가 기억나지 않아 검색을 해보니 안국역 6번 출구라고 나오네요.(아마 가까이 이전한 듯 해요.) 인사동 쌈지길 가는 길이란 설명이 있네요. 전형필 선생이 운영했던 한남서림이 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겠네요. 곧 시간을 내 서울에 올라가 그 앞길을 한 번 지나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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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伽倻山)에 자리한, 영화 ‘명당’의 주제로 다루어졌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는 풍수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어떤 기운인지 가보지 못해 궁금하다.

 

어떻든 사람들은 이하응이 묘자리를 잘 써 아들과 손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남연군의 묘가 파헤쳐졌다는 사실이다. 남연군 묘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묘가 독일인 오페르트 일행에게 파헤쳐졌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거나 논의하지 않는다.

 

결과만 좋으면 그만일까? 명당이라는 곳이 어째서 파헤쳐진 것인지? 비약인지 모르지만 나는 대통령 후보들을 잠룡(潛龍)이라 말하며 지극히 전근대적인 의미를 가진 대권(大權)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경스럽게도 묘가 파헤쳐졌을망정 (명당이어서) 임금을 배출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대권이라는 말은 책임은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점만 생각할 경우 쓸 수 있는 말이 아닌지?

 

야산은 광해군 아들 이지(李祬)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아들 이지는 강화도의 부속섬인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이지는 폐위된 빈과 함께 땅굴을 파 탈출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죽음을 당했다.

 

실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폐세자가) 마니산(摩尼山)으로 가려다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5월 22일 신해 첫 번째 기사 1623년 명 ‘천계; 天啓‘ 3년)

 

흥미로운 점은 남연군 이구의 묘가 원래 연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니라 두 군데였다. 즉 처음에 연천군 미산면에 남연군의 묘가 있었고 그 후 연천군 군남면으로 이장(移葬)된 것이다.(이렇게 두 번이나 이장된 묘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의 대가인 정만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두 곳의 묫자리 가운데 가야산을 골랐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사찰과 석탑이 있어서 그대로는 이장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이하응은 가야산 주지승에게 가보인 단계 벼루를 선물로 건네고 충청감사를 회유해 가야사의 스님들을 다른 사찰로 보낸 뒤 급기야 가야사는 불태우고 석탑은 부수는 등 무리수를 감행하면서까지 묘지를 만들어 남연군을 이장했다.

 

남연군의 첫 번째 묘는 마전면 백자동(栢子洞; 현 연천군 미산면)에 있었고 두 번째 묘는 고려 말 도원수를 지낸 현문혁(玄文奕)이 관직에 나가기 전 공부했던 남송정(楠松亭)이 있던 곳에 있었다. 군남면 홈페이지에 의하면 남송정은 피우개 언덕에 있었다. 피우개란 질고 척박해 피만 무성히 자라던 땅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천 군남에 두 곳의 피우개가 있었다. 큰피우개와 가피우개다. 큰피우개는 대직(大稷)이라 썼고 가피우개는 소직(小稷)이라 썼다. 직(稷)은 종묘 사직이란 말에 나오는 사직의 직 즉 곡식 신이지만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시인 하종오의 시)란 표현에 나오는 그 피이기도 하다.

 

이하응은 후에 아들이 왕(고종)이 됨에 따라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그에게 따라붙는 별칭이 파락호(破落戶; 난봉꾼), 상갓집 개 등의 표현이다. 상갓집 개라는 표현은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아버지의 음택(陰宅)을 위해 온갖 만행급의 행동을 저지른 이하응은 난봉꾼이란 말을 들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철종실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 흥인군, 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부교리 김영수(金永秀)의 상소다. 흥선대원군이 정말 난봉꾼이었다면 저런 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하응에게 어느 정도 난봉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철종의 아들들이 죽자 철종 사후 누가 후계자가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었을 때의 일을 보자. 당시 두 사람이 물망에 올랐었다. 왕족인 이하전(李夏銓;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정통 후계자)과 이하응이었다. 이하전은 강인하고 직설적인 사람으로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안동 김씨들에게도 당당히 맞섰다.

 

철종 바로 전 왕인 헌종이 승하했을 당시에도 권돈인(추사 김정희의 친구로 추사처럼 '세한도'를 그린 사람)이 강추하는 등 다음 왕의 후보로 꼽혔으나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가 강화도령(후에 철종이 되는)을 택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이하전은 결국 안동 김씨들에게 억울한 역모죄를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하응은 그런 권력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몸을 사리며 자신은 권력에 관심 없는 난봉꾼 같은 사람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 보였을 것이다. 부교리 김영수가 이하응이 사찰을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다. 알았다면 흥선대원군이 문제의 행동 이후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 소설적 과장이 넘쳤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흥선대원군은 네 명의 대원군(선조 부친 덕흥대원군, 인조 부친 정원대원군, 철종 부친 전계대원군, 고종 부친 흥선대원군)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서 대원군이 된 경우라는 점이다.(나머지는 모두 죽은 후 아들이 왕이 되어 추존된 경우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이른 나이에 왕이 된 아들 고종 대신 권력을 행세했었기에 온갖 풍문과 가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관건은 팩트와 상상력 사이의 관계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을 학술 논문 읽듯 엄밀하게 읽을 수는 없겠지만 그에 준하는 노력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실록이라 해도 행간의 의미를 바로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자주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때로 실록도 왜곡되기 마련이다.(광해군이 왕기가 서린다는 이유로 능양군(후에 인조가 되는)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대표적 왜곡 사례지만 주제가 아니기에 후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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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 - 탐험가가 발견한 일곱 가지 제주의 모습
문경수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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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의 저자 문경수는 과학 탐험가이다. 저자는 일본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 1923 - 1996)의 ‘탐라기행’이란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제주를 찾았다.(‘탐라; 耽羅‘는 깊고 먼 바다의 섬나라라는 의미로 제주에 있던 옛 나라 이름이다.: 30 페이지)

 

시바 료타로 역시 ‘일본서기’를 통해 제주를 신비한 아름다움과 동경의 눈으로 보게 되어 ‘탐라기행’을 썼다. 본명이 후쿠다 데이이치(福田 定一)인 시바 료타로는 사마천을 존경해(사마천의 ‘사마; 司馬‘를 일본어로 읽으면 ’시바; しば‘가 된다.) 필명을 시바 료타로로 지었다.(시바는 사마천의 ’사마; 司馬’이고 ’료; 遼‘는 멀다는 뜻이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이 존경하는 사마천에 이르기에는 멀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과학 전문가가 아닌 시바 료타로가 제주의 형성 과정과 화산을 기술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은 일곱 파트로 이루어졌다. 1. 제주 탐험의 문을 찾아서, 2. 화산탄의 비밀을 찾아서, 3. 탐라도 우주 극장, 4. 오름과 오름 사이 비밀의 숲; 습지, 5. 마법의 정원, 곶자왈, 6. 육각형 용암 기둥의 비밀, 7. 거문 오름 화산체의 비밀 등이다.

 

내가 제주 책을 읽게 된 것은 내가 사는 한탄강 지질공원(연천)과 관련해서다. 본문에 나오듯 제주는 동방의 하와이(제주가 동방의 하와이라 불리는 것은 제주도도 하와이처럼 화산이 폭발해 만들어진 순상화산이기 때문이다.)로 불리고 연천은 내륙의 제주도라 불린다.(연천이 내륙의 제주도라 불리는 이유는 연천이 내륙 유일의 현무암 용암대지이기 때문이다.)

 

‘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은 과학(지질, 생태) 이야기와, 과학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생태, 문호 등의 관련 지식 및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제주도는 약 180만년전부터 수천년에 걸쳐 반복된 큰 폭발에 의해 생성된 용암과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섬이다.(50 페이지) 현대적인 의미의 제주학은 나비 박사 석주명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38 페이지)

 

제주는 오름(지질 용어로는 ‘분석구; 噴石丘‘)으로 유명하다. 제주의 오름은 370여개다. 오름은 (한라산의) 기생화산으로 불렸으나 순상화산과 무관하게 단일 마그마의 화산활동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단성화산체라 불린다.(순상화산은 방패 모양의 화산이라는 의미다. 끈적거리지 않는 현무암질 용암에 의해 만들어진 완만한 화산이다. 끈적거리지 않기에 널리 퍼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름은 제주도가 세계자연유산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248 페이지) 해설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주 오름의 90퍼센트는 거문오름처럼 말발굽 형태다.(251 페이지) 제주도의 화산활동도 처음에는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반복된 화산활동을 통해 화산재가 쌓이고 쌓여 바다 위로 섬이 드러났다.(57 페이지)

 

용암은 묽기 정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용암류인 파호이오이(phoehoe; smooth. 지질 용어로는 빌레. 너럭바위) 용암과 딱딱하고 거친 아아(a??) 용암이다. 맨발로 걸을 때 걷기 부드럽고 편하면 파호이오이 용암이고 발이 아파서 아아 소리가 나면 아아 용암이라고 한다.(60 페이지)

 

화산이 폭발할 때 가장 먼저 화산 가스와 화산분출물이 나오고 용암이 마지막으로 나온다. 수월봉 이야기도 흥미롭다. 화산학 백과사전에 실린 국내 유일의 지형인 수월봉 탐방로는 제주어로 높은 절벽 아래의 바닷가라는 뜻을 가진 엉알길로 불린다.(78 페이지)

 

수월봉은 약 18,000년전 마그마가 물을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만든 고리 모양 화산체의 일부다. 본문에는 지질공원해설사 이야기도 나온다. 50년간 해녀로 살다가 한 지질학 박사의 권유로 해설사가 된 장순덕이란 분으로 땅 위의 지질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과학자들도 본 적 없는 해저지형에는 익숙했다고 한다. 물질하면서 본 해저지형에 대한 이야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당당하게 지질공원해설사 교육을 통과했다고 한다.(81 페이지)

 

본문에는 수성화산이란 용어가 나온다. 수중폭발화산이라는 의미다. 제주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유네스코 3관왕)이다.(97 페이지) 제주에는 천문대도 있다. 탐라전파천문대, 서귀포천문과학문화관이다. 천문대, 하면 천체 관측을 연상하게 된다. 별빛이 반짝이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대기는 위치에 따라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움직인다.(찬 공기는 가라앉고 더운 공기는 올라간다.) 이 움직임 때문에 별빛도 흔들린다. 저자는 제주에 있는 오름들은 천문대가 아니었을까, 상상한다.(103 페이지)

 

최근 일본 우주항공개발기구 연구팀이 달의 지하에 50킬로미터의 용암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127 페이지) 제주는 물이 잘 빠지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땅이어서 습지가 생기기 어려운 곳이고 같은 이유로 강(江)도 없다. 그런데 한라산 1100미터 고지에 습지가 있다고 한다. 어승생(御乘生) 저수지가 수원(水源)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한라산(漢拏山)의 어원은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큼 높다는 것이다.(139 페이지.. ‘한; 漢‘은 은하수를 의미하고 ‘라; 拏’는 잡아당긴다는 의미다.) 저자는 화산암괴에 균류와 조류(藻類; 광합성 미생물)가 공생하는 모습을 보며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떠올린다.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생물 가운데 하나인 단세포 원시 미생물 위에 작은 퇴적물 알갱이가 겹겹이 쌓여 형성된 퇴적구조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희귀한 지질자료다.

 

곶자왈은 지구에서 제주도에만 있는 숲으로 그 만큼 독특한 생태계다.(173 페이지) 곶은 숲이 우거진 곳이란 의미고 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 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이라는 의미다. 숲이 많은 곳은 곶이라 했고 자갈이나 돌무더기가 많은 것은 자왈이라 했다. 저자는 지질, 생태, 문화에 대해 두루 이해해야 곶자왈의 원형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한다.(175 페이지)

 

곶자왈 지대는 제주도의 지하수를 저장하는 창고다.(179 페이지) 2007년 제주특별자치도가 만든 곶자왈 보전 조례안에 따르면 곶자왈은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지형으로 만들어진 지대에 형성된 숲이다. 2011년 개정된 조례안에 따르면 용암의 암괴들이 불규칙하게 얽혀 있고 다양한 동식물이 공존하며 독특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보전가치가 높은 지역이다.(189 페이지)

 

본문에는 도틀굴 이야기도 나온다. 1948년 4.3 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은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당시 그들은 불을 피워도 연기가 나지 않는 붓순나무로 동굴 안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지냈다. 하지만 주민 한 사람이 반못에 물을 길러 나갔다가 수색대에 발각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위치를 실토했다. 이 때문에 주민 스물 다섯명이 죽거나 모진 고문을 당했다. 도틀굴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용암 동굴이기 이전에 슬픈 역사를 가진 현장이다.

 

곶자왈은 용암 동굴이 함몰되면서 생긴 바위와 바위 사이의 틈인 공극(空隙)으로 인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숲이다.(192 페이지) 안타까운 점은 곶자왈도 훼손이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제주도가 논농사를 짓기 어려운 지역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화산암이 풍화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215 페이지)

 

벼농사가 가능한 진흙 등의 토양은 모래보다 더 풍화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질학적으로 화산활동이 미비해 대부분의 온천이 비화산성이다. 제주도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내 온천은 마그마가 깊이 있어 지하수가 마그마에 도달하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나라 지하수들이 온천수가 아닌 것은 아니다. 마그마가 아닌 지열로 데워진 온천수인 것이다. 지하로 100미터를 내려갈 때마다 1도가 상승한다.(216 페이지)

 

본문에는 주상절리가 용암이 물을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기를 만나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만약 용암이 물과 만났다면 엄청난 촉발을 일으키며 베개용암을 만들었을 것이다.(218 페이지) 지금의 주상절리는 길게 늘어진 수직 구조이지만 처음에는 부채꼴 모양이었다. 오랜 풍화작용을 거치며 휘어진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거대한 수직 기둥만 남은 것이다.(220 페이지)

 

용암층이 공기를 접하며 빨리 식은 윗부분은 거친 표면의 클링커 구조가 발달하고 천천히 식은 하부에는 주상절리 구조가 발달한다.(222 페이지) 클링커는 직경 3- 26 mm 정도의 잔자갈 모양을 한 암록색 덩어리를 말한다. 조수 웅덩이는 물이 빠진 조간대(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는 곳)의 움푹한 곳에 물이 고인 것을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해양 생물과 육상 생물이 서식하는 경계지점인 조수 웅덩이는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곳이지만 해마다 생물종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229 페이지)

 

저자는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핵심과 맥락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과학을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과 연결시킬 것인가가 화두라고 말한다.(236 페이지)

 

동굴은 용암동굴과 석회 동굴로 나뉜다. 용암동굴은 현무암질 용암이 흐르고 지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동굴이다. 석회동굴은 석회암 지대에서 지하수가 석회암을 녹여서 생긴 동굴이다.(268 페이지) 저자는 탐험에 동참했던 조류학자를 거론하며 그 분이 자신으로 하여금 지질학이 제주도 과학의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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