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소형(陸紹珩)이란 인물은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란 책을 쓴 '명(明)나라 말(만명; 晩明)의 지식인이다. 이름의 첫 글자인 소(紹)는 소개하다 외에 끈의 의미도 있고 두 번째 글자인 형(珩)은 노리개, 패옥, 갓끈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문 기사는 제목에서는 珩을 연이라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형이라 했다. 생소한 글자이기 때문이었으리라. 珩을 연이라 한 것은 아마도 衍과 혼동한 탓이었으리라. 취고당이란 당호도 인상적이다.

 

검소(劍掃)는 칼로 없앤다는 뜻이겠는데 삿된 욕망이나 망상을 없애겠다는 의도의 산물인 듯 하다. 형(珩) 즉 패옥(佩玉)에서 패는 옆에 찬다는 의미다. 패검(佩劍)은 칼을 차는 것을 의미한다. 육소형이 실제로 칼을 찼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칼을 찬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이 생각난다. 조식은 이런 시를 썼다. "40년 동안 더럽혀져온 몸/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버린다/ 만약 티끌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어떻든 검소(劍掃)라는 말은 흥미롭다. 덕분에 남명 조식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남명의 무인적(武人的) 기질과 법가적(法家的) 요소는 그 단처를 교정하고 보완하여 건전한 균형을 잡아줄 수 있었던 귀한 자산이었다."(한형조 지음 '조선유학의 거장들' 150 페이지) 문숭(文崇)의 나라에서 무인적이었던 조식은 곽재우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의병을 이끌고 왜적(倭敵)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더욱 빛났다. 20세의 나이로 조광조의 급진 개혁이 좌절된 답답한 시대를 살게 되었던 남명 조식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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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척사(彛阮尺辭)는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친구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낸 짧은 편지 13편을 필사한 책이다. 척사(尺辭)와 척독(尺牘)은 짧은 편지를 이르는 말이다. 조용미 시인의 ‘봄의 묵서’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連篇累牘)만 더합니다...” 연편누독은 쓸데 없이 길게 늘여쓴 문장을 이른다. 늘 궁금한 것은 이재의 세한도와 완당의 세한도 가운데 어떤 작품이 먼저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가 먼저 그려졌는지, 권돈인이 먼저 그렸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인저리 타임 수록 시인 조해운의 글)고 하는 기사도 있다. 안동 권씨 화천군파 사이트에 가니 이재 권돈인 할아버지의 세한도가 완당의 세한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글이 있다. 물론 갈필(渴筆) 대 윤필(潤筆)의 차이, 소나무, 측백나무 대 소나무, 대나무의 차이, 유배 대 유배의 차이가 더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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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 서연문답
김도환 지음 / 책세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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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홍대용 사상의 연구’로 박사가 된 김도환이 영조 50년 이후 9개월간(1774 - 1775)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종 8품직인 시직(侍直)을 맡았던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의 서연(書筵) 대화집인 ‘계방일기(桂坊日記)’에 근거를 두고 관련 사료들을 참고해 지은 책이다.

 

서연은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시스템이고 계방(桂坊)은 세자를 호위하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홍대용은 세자익위사가 호위직에서 서연에 드나드는 직으로 바뀜에 따라 (후에 정조가 되는) 세손인 이산(李蒜)과 만나게 되었다.

 

정조와 홍대용이 서연을 통해 만난 1774년은 정조의 즉위 2년전으로 이때 정조는 23세였고 홍대용은 44세였다.(홍대용은 세손에게는 아버지 사도세자보다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홍대용; 1731년 생, 사도세자; 1735년생) 홍대용은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의미의 유춘오(留春塢)라는 별장의 주인공이었다.

 

이 별장에는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현판이 달렸다. 사실 홍대용은 수학자였고 지구 자전설을 신봉한 과학자였으며 거문고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예인이었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홍대용은 실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과거 공부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북학파의 인사였다.

 

홍대용이 관직에 오른 것은 시직이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 덕으로 오르는 관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홍대용 혼자 서연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서열에 따라 홍대용은 한정유, 신재선 다음에 자리했다. 서연 시간은 둘로 나뉘었다. 경전 순서대로 읽는 법강(法講)과 간략하게 읽는 소대(召對)였다. “홍대용은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을 보면 큰 줄기를 보고 그것의 실천을 중시했다.“(35 페이지) 홍대용은 세손이 오히려 질문을 하자 난감해 한다. 홍대용은 배우는 자의 병통 중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세손은 비록 그렇다 해도 초학(初學)도 명백하게 자신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옳지 않다고 말한들 무슨 해가 있겠는가?라 말한다.

 

서연은 중국의 고전들을 가지고 논하는 자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정치 사례들이 논의되었다. 물론 각자 처한 입장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기 마련이었다. 홍대용은 세손에게 적대적인 외증조부 홍인한(세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 작은 아버지)이 우의정이 되자 긴장한다.

 

정조와 홍대용은 맹자의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 상대방이 잘못이 있을 경우 그를 거절하고 만나주지 아니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 부분에 공감한다.(屑; 달갑게 여기다.) 홍대용은 한 글자 한 글자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그에 걸맞게 홍대용은 진심으로 세손의 학문을 걱정했다.

 

세손이 ‘중용’이 말한 한 글 자 한 글자의 뜻에 너무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분류하는 폐단에 빠질까 봐 걱정했다.(65 페이지) 홍대용은 자신의 견해를 밝히되 다른 이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다른 이가 스스로 부끄러워서 견해를 고친다면 그것이 곧 불설지교가 되는 것이고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각자 제 소견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66 페이지)

 

홍대용은 확실히 박식한 사람이지만 정치가보다 학자의 풍모가 더 강한 사람이었다.(83 페이지) 홍대용도 주자 성리학자였다. 그는 격물치지가 없다는 이유에서 양명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홍대용은 격물치지 이후에 성의, 정심을 말했고 곧 등극할 처지의 세손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치국, 평천하를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다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손은 주자(朱子)주의자 송시열 이야기를 꺼냈다. 이호(李淏)가 죽은 뒤 남송의 효종과 같은 묘호를 갖게 한 사람이고, 주자의 탄생지 우계(尤溪)를 모방해 우암(尤庵)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송시열이다. 세손은 궁궐(창경궁)에서 태어나고 궁궐에서 자라 바깥 세상 이야기가 재미 있었던 것 같다.

 

송시열은 주자 계승의 명분을 장악한 한편 임진전쟁 당시 우리를 도운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게 해 명나라에 대한 의리, 북벌과 복수설치라는 명분도 수중에 넣었다. 이에 숙종도 대보단을 설치했다.

 

세손은 십년 동안 행해보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을 닫고 약속도 끊어버림이 가할 것이라는 송시열의 말을 빈말이라 했고 홍대용은 빈말이 아니라 답했다.(106, 107 페이지) 저자는 세손의 ‘빈말’ 운운을 외척 세력 제거의 명분을 얻기 위한 포석으로 보았다. 그리고 홍대용이 그것은 빈말이 아니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면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말한다.(118 페이지)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정조 시대를 다룬 책이기에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홍국영과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등 풍산 홍씨 가문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이 전하는 세간에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조가 세손에게 어떤 책을 읽냐고 물었다. 세손이 ‘통감강목’ 4권이라고 답하자 영조가 안색이 변해 보던 책을 당장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세손이 읽고 있다고 답한 ‘통감강목’ 4권에는 측실(側室) 소생인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이야기가 나온다. 영조가 안색이 변해 호통을 친 것은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을 받아 세손의 처소로 간 사람이 해당 책을 내놓으라고 하자 영민한 홍국영이 어떻게 알았는지 문제의 부분을 종이로 가리고 건넸다. 이에 영조는 과연 내 손자라고 하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세손은 홍국영에게 감사해 그대가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세손이 소대(召對)에서 통감강목을 다 읽은 것은 계사년(1773년) 8월 27일이고 홍국영이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들어간 것은 그해 12월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종이로 가리고 있었다면 무슨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니 그것을 보고 임금이 기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손이 홍국영에게 범궐(犯闕)의 죄가 아닌 이상 용서하겠다고 한 것도 의아하다는 것이다. 나는 홍국영이 아무리 영민해도 어떤 연유로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아차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처리했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한다. 홍대용은 논어 한 구절을 상고할 일이 있는데 어느 부분인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정조에게 책을 읽으면서 먼저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생각이 이미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이라 하며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니라 말한다.

 

나는 상고할 구절이 있다는 말에 저술 운운하며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 홍대용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경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에서 세손은 황제인 유비의 입장을, 홍국영은 신하인 제갈량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그런데 유비가 제갈량에게 ”만약 내 아들이 도와줄 만하면 도와주되 재주가 아닌 것 같으면 그대가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말한 것을 보면 사정은 남다르다. 저자의 말대로 ”유비 같은 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고 제갈량 같은 충신이 아니면 들을 수도 없고 효과도 없는 말“(131 페이지)이 아닐 수 없다.

 

세손이 상고하려 한 책은 ‘논어’ 자한편이다. 세손이 손여(巽與)가 무슨 의미냐고 묻자 홍대용은 부드럽고 순하다는 의미로 군신(君臣)간의 대화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납약자유(納約自)가 손여와 같은 것이라 답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알기 쉬운 것(임금이 밝게 알고 있는 것)’부터 설명하여 차츰 깨닫도록 하는 것이 손여라고 답한 것이다.

 

세손이 그러면 손우여지(遜于汝志)의 손(遜)과 뜻이 다른가? 묻자 홍대용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것이라 말한다. 납약자유는 29번째 괘인 중수감(重水坎)괘에 나오는 구절이다. 앞서 세손이 책을 상고할 일이 있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강연(講筵)에서 오고 간 좋은 이야기를 초기(抄記; 초록; 抄錄; 가려 뽑아 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세손이 척리(戚里)를 배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고 하며 청풍 김씨 김석주(金錫胄; 1634 - 1684)를 거론했다. ”숙종 때의 여러 환국(換局)에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지만 남인을 끌어들여 서인을 칠 때에도, 서인을 끌어들여 남인을 칠 때에도 막후에서 움직인 것은 숙종의 외가인 청풍 김씨 김석주였다.

 

그는 이미 80세가 넘어 그냥 두어도 얼마 못 살 송시열에게 굳이 사약을 내리게 하여 그 자신이 서인이면서도 남인 정권을 세우게 하였고, 별로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역모를 꾸며 남인을 일망타진하고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우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로부터 서인과 남인은 서로 살부지수(殺父之讐)가 되어 화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또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데에도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157 페이지)

 

저자는 홍계희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을 논한다. 나경언이 내시가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한다는 말을 해 임금의 친국을 받았을 때의 일은 석연치 않기가 그지 없다. 나경언이 내시 이야기가 아닌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내용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몸수색 한번 하지 않은 잘못이 지적된 것이다.(162 페이지)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공공연하게 처리해 자존심 강한 임금이 적당히 넘어가지 않게 한 것이다.

 

세손은 한고조 유방(劉邦)을 중국 역대 임금 중 최고로 여겼다. 학문과 사대부의 풍모만 더한다면 이상적 군주인 요순에 필적하리라 생각했다. 한고조는 단점도 많았지만 너그러웠고 신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줄 알았다.(174 페이지) 한고조가 보인 이런 면모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세손은 머리가 좋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어서 모든 일에 간섭하려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사실 세손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했다. 수많은 백성을 골고루 비춰주는 밝은 달을 자처한 것이다. 또한 군사(君師)를 지향했다.

 

홍대용이 이와 기가 있다면 함께 있는 것이요, 본디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자 세손은 그 말이 매우 좋다고, 그렇게 보아야 폐단이 없다고 말한다. 이에 홍대용은 그것은 자신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라 주자의 것이라 답한다.(181, 182 페이지) 군사(君師)란 다스리는 자이면서 스승이라는 의미로 당위적 차원의 말이다.

 

세종과 정조 정도가 그에 맞는 역할을 했다. 다른 임금들은 능력면에서 모자라기도 했지만 중기 이후 양반 사대부 계층이 성리학 연구를 주도한 때문이기도 하다. 홍대용은 절문근사(切問近思)를 강조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가까운 곳부터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손은 홍대용이 청나라 사정에 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세손의 질문(북경에 가보았는가? 무슨 일로 갔는가?)에 홍대용은 승지를 지낸 숙부 홍억이 십 년 전인 을유년(영조 41년; 1765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이 되었기에 자제비장으로 동행했다고 답했다. 홍대용은 유리창(琉璃廠) 이야기도 한다.

 

원, 명 시대에 자금성을 지을 때 소용된 유리기와 공장이었다가 자금성이 다 지어진 후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골동품과 책방 거리로 변신한 곳이다. 세손은 북경에 대해 일일이 물을 수 없어 일기를 썼는가, 물었고 홍대용은 기록하지 못했다고 거짓을 아뢰었다. 사실 홍대용이 쓴 연행록은 3대 연행록의 하나였다. 홍대용은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표방했다.

 

세계에 안과 밖이 없으니 내가 서 있는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홍대용을 지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홍대용을 지탄했다. 양반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홍대용은 그래서 연행 일기를 드러내놓을 수 없었다.

 

세손의 질문이 두서 없어 홍대용은 토막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안에서나마 개혁적인 마인드를 드러냈다. 세손은 자신은 잘못이 있을 때마다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다만 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생각이 부단히 일어나 고민스럽다고 말했다.(216 페이지)

 

홍대용은 허물을 이미 고친 다음에는 자연 마음이 후련해지는 법인데 어찌하여 가슴 속에 남겨두고 뉘우칠 것이 있습니까?란 말을 한다. 세손은 도무지 무엇 하나 대충 알고 마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이야 모르겠지만 아는 것은 누구나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세손의 물음이 홍대용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222 페이지)

 

세손은 청나라에 빗대어 인사 문제며 궁방전 문제를 이야기했으나 실은 외척 세력을 줄일 계획을 털어놓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225 페이지) 세손은 식체(食滯) 때문에 다주(茶珠)를 먹으며 서연을 행했다. 결국 그 때문에 차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세손은 북경에서는 어떤 차를 최고로 여기는가 물었다. 그러자 홍대용은 보이차를 최고로 친다고 답했다.(226 페이지) 세손은 자기는 원래 체증(滯症)이 없었는데 어릴 때 체증 있는 사람을 보고 마음속으로 몰래 부럽게 여겨 트림하면서 따라 했더니 최근에 실지로 체증이 생겨 아주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홍대용은 체증은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겪는 증세이며 독서에 가장 방해가 되니 몸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226, 227 페이지)

 

홍대용이 격물치지, 실심, 실학 등의 말을 아뢰었으나 세손은 그보다는 그의 학문적 배경이나 박학다식함에만 주목했다.(229, 230 페이지) 세손은 이단의 학문이라도 반드시 그 까닭을 밝힌 연후에 배척하여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홍대용은 세손의 논리는 옳은 듯 하지만 그것이 더욱 강한 압력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홍대용은 생각이 다르면 그저 내버려둘 뿐이었다.(234 페이지) 세손이 홍대용에게 과거를 그만 두었냐 물으니 홍대용은 그만 둔 지 4, 5년 되었다며 재주와 지식이 부족하고 더욱이 정문(程文; 과거 시험에 쓰이는 문장 형식)은 익히지도 못하였으니 기꺼이 스스로 그만둔 것이지 달리 고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 답한다.(239 페이지)

 

세손은 "세손은 노론, 소론, 남인, 병판, 이판 등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한 홍인한을 제거할 생각을 한다. 홍인한은 삭탈관직된다. 사도세자가 죽자 임금은 세손을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켰다. 세손의 대리청정이 있은 지 3개월만에 임금이 승하했다.

 

세손은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여동생을 임금(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낸 뒤 원빈(元嬪)이라 하게 한 홍국영은 원빈이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 이준의 이름을 이담으로, 작호를 완풍군(完?君)으로 고치게 하고는 죽은 원빈의 아들로 삼으려 했다. 완이라는 글자는 완산(完山)이니 임금의 고향인 전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금에게 자식이 없자 완풍군으로 하여금 임금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의도였다. 임금이 28세 밖에 되지 않았으니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렇게 했으니 역적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행위였다.(268 페이지) 홍국영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임금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관료들은 홍국영을 구원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이 후에 복귀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홍국영이 복귀할 경우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269 페이지) 홍대용은 아까운 나이인 53세에 중풍으로 쓰러졌다.(273 페이지) 정조의 급선무는 행검(行檢; 점잖고 바른 몸가짐)을 닦는 일이었다. 붕당간의 다툼은 붕당간의 의리가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다툼을 없애려면 보편타당한 의리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280 페이지)

 

홍대용의 진가는 공평하게 보고 아울러 받아들임(‘공관병수; 公觀倂受’)와 큰 도로 함께 돌아감(‘동귀대도; 同歸大道’)에 있었다. 홍대용은 전인적 인격 수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준 높은 논쟁에 몰입하거나 과거 시험 공부에 매달리는 시대상과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 후기를 통틀어 유학 본연의 전인적 학문, 실천적 학문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단연 홍대용이었다.(2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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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썩 좋은 제목은 아니다. 약간의 자기 고집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서연(書筵)에서 정조와 홍대용은 아주 사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 정조가 식체(食滯) 때문에 다주(茶珠)라는 씹는 차를 먹으며 서연에 임하다가 무안했던지 북경에서는 어떤 차를 최고로 여기는가, 란 질문을 던졌다.

 

이에 홍대용이 보이차라 답하며 체증은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겪는 증세이며 독서에 가장 방해가 되니 몸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세손은 어릴 적 체증 있는 사람이 부러워 트림을 하며 따라했더니 최근에 실지로 체증이 생겨 아주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기록을 보니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는 2018년 9월 이후 2년 4개월만에 다시 읽는 책이다. 두번씩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주역을 모르지 않았지만 납약자유란 말을 별 생각 없이 넘겼었기에 재독하는 것이다. 삼독할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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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환의 책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44세의 홍대용이 즉위 2년전인 23세의 세손 이산(李蒜)과 서연(書筵)에서 주고 받은 대화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다. 노론 명문가 출신의 홍대용은 봄이 머무는 언덕이란 뜻의 유춘오(留春塢)란 이름의 별장에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란 현판을 내걸었던 사람으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고 지구 자전설을 믿은 사람이었다.

 

건곤이란 말은 주역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김도환의 책에 주역에서 유래한 납약자유(納約自牖)란 말이 나온다. (다른 책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스스로 창을 내는 것으로 읽었으나 홍대용은 서연에서 군신간에 대화하는 것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납약자유는 부드럽고 순함을 뜻하는 손여(巽與)와 같다고 답했다.

 

또한 납약(納約)은 임금과 사귀는 도리를 말하고 자유(自牖)란 밝고 툭 트인 것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김도환의 책은 이 차이를 해명하기 위해 잡은 책이다. 어떻든 거문고를 잘 다루었던 사람으로 실학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과거에 별 뜻을 두지 않았던 홍대용은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홍대용이 맡은 직책은 세자를 호위하는 세자익위사의 한 파트였으나 이 일이 서연을 행하는 직으로 바뀜에 따라 세손과 공부로 만나게 된 것이다.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에서 재미 있는 글자를 만났다. 맹자가 말한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란 말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설()이란 글자다.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된 사람에게는 가르침을 펴지 않고 그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은 가루라는 뜻과 달갑게 여기다란 뜻을 가진 단어다. 화산쇄설암(火山碎屑巖)의 설이 바로 가루를 뜻하는 설자다. 부스러진 암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열과 압력을 받아 만들어지는 바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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