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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감성 여행 2 경제성장기 - 미래유산에 담긴 서울을 만나다 ㅣ 서울 감성 여행 2
민현석 지음 / 서울연구원 / 2018년 11월
평점 :
민현석의 ‘서울 감성 여행 2’는 경제성장기를 주제로 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미래유산에 담긴 서울을 만나다‘이다. 미래유산은 2012년 도입된 제도다. 지난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잘 유지하고 지켜 다음 세대에 넘겨주자는 의도로 만든 제도다. 책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여섯 번째 이야기까지로 구성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박완서(朴婉緖; 1931 - 2011) 작가의 ’나목‘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고, 네 번째 이야기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귀로‘를 소재로 한 이야기이고, 다섯 번째 이야기는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고, 여섯 번째 이야기는 손창섭 작가의 ’길‘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박수근(朴壽根; 1914 - 1965) 화백의 삶을 모티프로 한 ’나목‘에는 명동성당이 주된 무대로 나온다. ’나목(裸木)‘에는 동화백화점도 나온다. 여주인공 이경(李炅)이 근무하던 공간이다. 중구 소공로 63에 신세계백화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자리는 원래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의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던 곳이다.
이 백화점은 해방 이후 동화백화점으로 개칭되었었고 한국전쟁 이후 1955년까지 미군 PX로 사용되었고 1963년 삼성이 동화백화점을 사들이면서 신세계백화점이 되었다. ’나목‘의 주요 무대 중 명동 화교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명동에 중국인이 정착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다.
명동성당은 명동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주요 건축물이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곳은 종현(鍾峴)이라 불렸던 언덕으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예배장소(명례방 공동체)로 사용된 김범우(金範禹; 1751 - 1787)의 집이 있던 장악원(掌樂院) 바로 옆이었다.(현재 장악원은 표지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위치는 외환은행 옆이다.)
김범우는 역관(譯官) 가문 출신이었다. ’나목‘에서 명동성당은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과 증오, 분노와 광기 속에서 방황하는 이경에게 삶의 위로를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64 페이지) 영락교회는 평북 정주(定州) 출신의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한 건물이다. 박동진은 조선총독부 건축기수로 취업하여 보성전문학교 본관, 조선일보 사옥, 아서원, 중앙중학교 등을 설계했다.
옛 수도극장터도 ’나목‘에 등장하는 주요 지점이다. 박완서는 이경과 태수(PX에서 일하는 전기공)의 데이트 공간으로 수도극장을 설정했다. 본문에 의하면 이만희(李晩熙; 1931~1975) 감독의 ’귀향‘은 억압된 욕망으로 갈등하는 한 여성의 일탈 여행을 그린 영화다. 중구 세종대로 110에 위치한 서울도서관은 옛 경성부청으로 1926년 10월 완공된 르네상스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이다.
설계는 이와이 쵸사부로(岩井長三郞)와 사사 케이이치(笹慶一)가 담당했다.(103 페이지)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던 건물이 서울도서관이 된 것은 2012년 10월 26일이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정문은 인화문(仁和門)이었으나 궁의 남쪽에 자리하고 주변 길도 협소하고 물길도 있어 대한문이 정문이 되었다.
원래 이름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대안문(大安門)으로 했으나 1904년 경운궁(경운궁이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순종 즉위 이후다.) 대화재 이후 수리를 거쳐 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14 페이지) 대한문은 세종대로 확장 공사로 도로 위에 섬처럼 고립되었었다. 대한문이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된 것은 1971년 1월이다.
중구 서소문로 89 - 11에 평안교회가 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평안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부산 보수산 중턱에 교회를 설립했고 1953년 상경해 중구 충무로 3가에 평양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1956년 서문교회와 통합하면서 교회 이름을 평안교회로 바꾸었다. 1964년 중구 순화동 6 - 9번지를 매입하고 1967년 9월 지상 6층, 지하 1층, 연면적 2,950 제곱미터의 예배당을 지었다.
중구 순화동과 중림동을 잇는 서소문 고가차도는 경의선 철도 통과로 생긴 교통 혼잡을 완화할 목적으로 1966년 6월 25일 준공된 도로시설물이다. 서소문 고가차도가 놓인 서소문로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한반도의 서북 지역으로 가는 길목으로 1921년 경의선 노선이 개편되면서 경의선 철도와 교차하게 되었다.(124 페이지)
이만희 감독의 ’귀로‘에서 서소문 고가차도는 소설가의 아내 지연이 걷던 길이다. 서소문 공원은 조선시대 서소문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공원이다. 공원 일대는 중죄인을 다스리는 참수형의 형장이 되었던 곳이다. 서소문은 원래 이름이 소덕문(昭德門)이었고 영조 20년인 1744년 홍예문 위에 문루를 지으며 소의문(昭義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희문과 함께 시구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광희문과 소의문은 도성 안의 시체가 반출돼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경향신문 기사 ‘서소문의 성스러운 공간’ 참고) 서소문은 서울에서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의 시발점인 동시에 한강 포구에 모인 삼남 지방의 물류가 만초천(蔓草川)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일대에는 문외미전(門外米廛), 문외상전(門外商廛), 생선난전(生鮮亂廛), 외어물전(外魚物廛) 등의 난전이 들어섰다.(139 페이지) 조선시대 서소문 일대는 중죄인의 참형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최초로 가톨릭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대표적이다.(1801년..김범우 처형; 1787년)
그러던 조선에 가톨릭 포교가 사실상 허용된 것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다. 약현성당(藥峴聖堂)은 서소문 일대에서 처형된 가톨릭 신자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조선 후기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였던 서소문 일대는 새로운 교통 수단이 도입되면서 완전히 다르게 변모했다. 유유히 흐르던 만초천 대신 철로가 놓였고 그 위로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145 페이지)
약현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벽돌로 지은 서양식 성당 건축물이다.(147 페이지) 약현은 과거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염천교 구두거리는 1925년 서울역 건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제는 만초천을 정비하고 기존의 남대문 정거장 남쪽에 스위스의 루체른역을 닮은 서울역을 신축했다. 이후 서울역 주변에 물류 창고가 건설되면서 칠패시장의 길목이었던 염천교를 중심으로 구두거리가 형성되었다.(155, 158 페이지)
서울역과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 사이를 연결하는 서울역 앞 지하보도는 중구 봉래동 2가 한강대로에 위치한 도로시설물이다. 서울 중구 퇴계로 6에 위치한 남대문교회는 1955년 기공하여 1969년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인 제중원에 부설된 제중원교회가 전신이다.(169 페이지)
서울역사(驛舍) 맞은편 중구 통일로 10에는 24층 높이의 연세재단의 세브란스빌딩이 있다. 1904년 문을 연 세브란스병원이 있던 자리다. 세브란스는 미국 클리블랜드에 정착한 초기 이민자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생인 록펠러가 설립한 정유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의 재무회계 담당자로 활약한 사업가였다.(194 페이지)
세브란스빌딩 앞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구 세종대로 40에 위치한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이다. 을지로는 서울시청에서 한양공고 앞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약 3킬로미터 길이의 6차선 도로이다. 조선시대에는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었다. 땅이 몹시 질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구리개 혹은 동현(銅峴)이라 하였다.(211 페이지)
을지로에는 조선시대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인 혜민서(惠民署)를 중심으로 약종상(藥種商)상이 모여 있었다. 서울에 처음으로 전기가 도입된 것은 1887년으로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던 경복궁 궐내 건청궁과 장안당과 곤녕합 주변을 밝혔다.(221 페이지) 1930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서울시 마포구 당인동에 건설되었다.(224 페이지)
샬롱 드 마샬은 중구 명동 10길 15에 본점을 두고 있으며 국내에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용실 가운데 하나다.(228 페이지) 동대문종합시장이 자리한 종로구 종로 266 일대는 과거 동대문 전차 차고지가 있던 곳이다.(235 페이지) 서울의 대표적 대중교통수단으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던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238, 239 페이지)
전차가 사라지고 서울시는 동대문 일대를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교통 허브로 개발하기 위하여 1969년 동대문 전차 차고지에 동대문 시외 버스 터미널을 건설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동야 최대 규모의 단일 시장인 동대문종합시장을 개장했다.(241 페이지)
여섯 번째 이야기는 손창섭의 ‘길’을 소재로 한 이야기로 성공을 찾아 떠난 성칠의 서울살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회현동(會賢洞)은 퇴계로(退溪路) 남쪽에서 남산3호터널에 이르는 면적 0.84제곱킬로미터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남부 호현방에 속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아사히마치(旭町)로 불리다가 해방 이후 다시 회현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회현이라는 이름은 어진 사람이 많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가문 대대로 열두 명의 정승을 배출한 정광필(鄭光弼)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270, 271 페이지)
조선시대에는 회현동의 맞은편 남산동 일대의 넓은 지역을 남산골이라 불렀다. 이곳에 청렴한 관원들이나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아 남산골샌님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274 페이지) 1969년 발표된 손창섭의 ‘길’에서 출세와 성공의 꿈을 안고 상경한 열여섯 살 소년 성칠이 처음 일자리를 얻어 정착한 곳도 서울역에서 가까운 회현동의 값싼 여관이었다.(275 페이지)
회현동은 도심 재개발 열풍이 불었던 1980년- 1990년대 내내 명동과 남대문, 서울역 사이에서 특유의 불안정한 입지를 유지했다. 1962년 5월 12일 개통된 남산 케이블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객용 가공삭도(架空索道)다. 가공삭도는 공중에 설치한 강철선에 운반차를 매달아 사람을 나르는 장치다.
남산 팔각정은 남산 꼭대기에 있는 정자다. 팔각정 자리에는 본래 조선시대 태조에 의해 지어진 국사당이란 신당이 있었다. 기우제나 기청제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중요한 신당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은 1925년 일제에 의해 인왕산으로 이전되었다.
남산도서관은 용산구 소월로 109에 자리한 서울시 교육청 관할의 공공도서관이다. 남산도서관의 전신은 중구 명동 2가 25번지에 있었던 옛 한성병원을 개수하여 개관한 근대식 공립도서관인 경성부립도서관이다. 중구 소파로 46에 위치한 지상 18층, 지하 1층 규모의 교육청 과학전시관 남산분관은 어린이회관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297 페이지)
어린이회관은 1923년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제정한 이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복지시설이다. 1974년 12월 어린이회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 되었다. 중구와 용산구의 11개 동에 걸쳐 있는 높이 262미터의 남산은 목멱산(木覓山), 종남산(終南山),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 미뫼 등으로 불렸다.
1968년 9월 2일 새롭게 자연공원으로 개원한 남산의 모습은 소설 ‘길’에도 잘 드러나 있다.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민족정기를 되살리려는 취지에 따라 백범 동상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들어섰다.(318 페이지) 도쿄역을 모방해 지었다는 가설과는 달리 서울역사박물관은 2016년 7월, 서울 시민이 기증한 경성역 준공도면을 공개하면서 경성역이 1856년에 완공된 스위스 루체른역을 모방해 건설한 건물이라고 밝혔다.(324 페이지)
코스 구상을 위해 읽게 된 ‘서울감성여행 2’는 문학작품 또는 영화와 연계된 부분을 매끄럽게 연결지어 설명한 책이다. 책에서 소개된 코스를 직접 걸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소스를 취해 설명도 다르게 할 부분도 있다. 문학 작품도 직접 읽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