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 한국사편 -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정점’을 위한 쟁투의 기록 숙청의 역사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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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바람직한 관계를 알게 해주는 말이 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최경식의 ‘숙청의 역사’를 보며 생각하는 말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진골 세력 및 고구려계 유민들을 냉혹하게 숙청한 군주다. 당나라를 물리친 신문왕이 마주한 현실은 통일 전쟁 과정에서 공신이 된 진골 귀족들과의 갈등이었다. 무열왕(김춘추) - 문무왕 - 신문왕의 왕위는 3대째 세습된 군주였다. 신문왕은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국인 보덕국(報德國)도 표적으로 삼았다. 


고려 4대 광종도 수성형 군주에 드는 인물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가 그의 치적이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의 도움으로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정략결혼 및 사성(賜姓) 정책은 왕건의 대표적 대(對) 호족 정책이었다. 고려는 사실상 호족 연맹 국가였다. 왕건 사후 권력 투쟁이 빚어졌다. 개경 호족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광종은 재위 7년간은 별 다른 개혁을 보여주지 못했다. 


과거제로 문치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는 호족 정리 정책이라 할 만하다. 광종에게 과거제 실시를 건의한 인물은 중국 오대십국의 하나였던 후주(後周)의 쌍기였다. 쌍기는 거란 소손녕과 담판해 강동 6주를 얻은 서희를 선발하기도 한 지공거(知貢擧)였다. 왕건의 천수(天授)에 이어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 등의 연호를 썼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100년간 집권했다. 고려 계급사회의 하층에 있었던 무신이 상층부의 문벌 귀족을 끌어내리고 집권한 사태는 집권 세력의 연결성이 전혀 없는 교체였다. 


건국 초기만 해도 고려는 무신들이 득세 했다. 통일전쟁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태조 왕건 주변에는 건 국의 일조한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른바 공신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4대 광종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 진출 통로인 과거제도 이때 처음 시행되었다. 과거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문신들은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신들의 군 지휘권까지 가져갔다. 문신 출신으로서 무신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인물들은 서희, 강감찬, 윤관 등이다. 문신들이 무신 역할도 겸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제에 있었다. 과거제에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군사 전력에 대한 이해도 요구했다. 자연스레 문신들은 웬만한 무신들보다 탁월한 군사적 지략을 갖출 수 있었다. 무신정변을 촉발한 18대 의종도 집권 초에는 비대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들을 중용했다. 


의종을 감금한 무신들은 김돈중, 김돈시(김부식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처형했다. 그들은 김부식을 부관참시하기까지 했다.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 왕호를 등극시켰다. 19대 왕 명종이다. 무신정권은 1170년에 시작되어 100년만인 1270년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지 않고 즉위했다. 이에 개성 왕씨들을 경계한 이성계는 왕씨 숙청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고려가 전 왕조 신라에 대해 보인 태도와 대비된다. 최영은 친원파였다. 그가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항한 것이었다. 


최영은 남아서 자신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따라 대열에서 빠졌다. 이는 최영의 뼈아픈 실수가 되었다. 조민수와 일부 장졸들이 회군은 왕에게 정면 대적하는 것이라 하자 이성계는 왕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왕 옆의 악인인 최영에게 대적하는 것이라 답했다. 위화도까지 하루 10km씩 움직인 이성계 군은 회군은 하루 40km씩 했다. 명은 창왕이 원나라 혈통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창왕 즉위의 주역인 조민수, 이색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때부터 이성계 세력은 역성혁명을 기치로 새로운 왕조 창업을 본격적으로 표방했다. 공양왕은 이성계와 사돈 간이었다. 공양왕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결혼한 사이였다. 선위해줄 것이라 기대되었던 공양왕은 정몽주와 긴밀히 연대하며 이성계 세력을 견제했다. 정몽주는 창왕 폐위까지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지만 이성계 세력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돌아섰다. 정몽주는 정도전, 조준 등을 유배 보낸 뒤 공양왕에게 이성계 체포, 사사를 재가해 달라고 했으나 공양왕은 역풍을 우려해 주저했다. 


이성계 세력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위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왕대비 안씨(공민왕의 제 4비)를 찾아가 공양왕 폐위의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성계는 감록국사에 봉해졌다. 임시임금이 된 것이다. 선위받지도 않았고 반정을 일으키지도 않은, 신하가 왕을 축출한 어정쩡한 즉위였다. 그는 조선의 왕이 아닌 고려의 왕으로 즉위해 한동안 고려 국호를 썼다. 왕씨여도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려 한 이성계와 달리 신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건은 문하부 참찬 박위로부터 비롯되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를 따랐던 박위는 공양왕 즉위 후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에 맞섰다. 


정몽주가 피살될 당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으나 살아남은 그는 친지에게 맹인 점쟁이 이흥무를 찾아가 태조 이성계와 공양왕 가운데 누가 더 명운이 좋은지, 왕씨들 중 누가 가장 명운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역모로 비칠 수 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는 왕씨 일가 숙청에 반대했으나 대신들의 집요한 주청에 어쩔 수 없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처가(여흥 민씨)와 며느리 집안(청송 심씨)을 철저하게 도륙했다. 태종은 강상인이 군 관련 업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강상인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조직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병조에 속한 심정이 형 심온(세종의 장인)의 지시를 받아 강상인과 모의했다고 몰아갔다. 심온은 강상인과의 대질을 요구했지만 강상인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 세종은 심온을 복권할 경우 부왕 태종이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경계했다. 문종을 본 명나라 사신은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했다. 문종은 자신을 제갈공명에 비유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후자는 오로지 군주 개인의 감정 차원의 폭거였다. 저자는 후자를 희대의 폭군의 무차별적인 학살극으로 규정한다. 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을 통해 집권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 조정의 주류 세력을 형성한 것은 훈구파였다. 조카의 옥좌를 빼앗은 세조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한 탓에 훈구파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 편중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할아버지인 태종이 공신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세조 이후에도 훈구파의 권세는 커져만 갔다.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는 사림이라는 반대 세력의 출현을 이끌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았고 향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중소 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정착시키며 살아가고 있던 사림에게 훈구파의 권세가 미쳤다.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 훈구파 사람들이 낙향한 후 유향소, 경재소 등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며 사림을 억눌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사림은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성종이 사림을 신진 세력으로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세종대왕처럼 학문을 좋아했고 경연(經筵)에도 9000회 이상 참여했다. 패도(覇道)적 성향을 보였던 세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노선을 표방했던 만큼 훈구파를 배제하고 사림을 정치 동반자로 키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사림이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다면 훈구는 사장(詞章)에 기반을 두었다. 사림에게 불행이 빚어졌다. 성종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에 대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해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고 거짓 보고했다.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씨는 묘비도 없이 동대문 밖에 묻혔다.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림이 중심이 된 삼사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언을 근거로 격하게 반대했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인 실록청 총책임자인 훈구파 이극돈이 사초를 검수하던 중 김일손이 쓴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글을 발견하고 삭제를 요청했다. 김일손이 거부하자 원한을 품은 이극돈은 복수를 계획했다. 이극돈은 유자광과 함께 김일손은 물론 사림세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실록 기사를 찾아냈다. 두 사람의 고변을 들은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 연산군은 삼사 및 신하들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다가 무오사화를 계기로 독단적 왕권행사의 길로 나아갔다. 갑자사화는 유자광과 함께 간신의 대명사인 임사홍의 폐비 윤씨 사건 고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갑자사화는 규모면에서 무오사화를 압도했다. 훈구파 대신들도 희생 당했음에도 사화라 부르는 것은 삼사의 피해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선조를 암군(暗君)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저자는 기축옥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죽임을 당해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선조는 중종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를 해결하며 사림의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조광조 추증 및 남곤의 관직 삭탈이다. 


남곤은 사림 탄압에 앞장 섰던 사람이다. 사림은 중앙무대에서 밀려났지만 근간이 되는 향촌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도 큰 몫을 했다. 훈구를 비호했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떴다. 선조는 사림 중용 의지를 드러냈다. 선조는 세자 시절 훈구 권신들의 국정농단에 염증과 위협을 느꼈다. 사림의 세상이 되면서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가 늘어났다. 관직이 한정된 탓에 사림 내의 경쟁과 대립이 촉발되었다. 붕당이 형성되었다. 


김효원의 집은 한양의 동쪽에 있어서 동인, 심의겸의 집은 한양의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 불렸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에서 우세한 세력은 동인이었다.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맥을 이은 동인은 주리론에 기반했다. 경험적 세계의 현실원리보다 도덕적 원리에 기반한 인식과 실천에 비중을 두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재앙을 맞았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 선비들의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호남에선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호남 선비들이 확연히 줄었고 풍류를 즐기고 음식을 찾아다니는 풍조가 생겼다. 


서희는 세자 책봉 문제에서 선조의 미움을 샀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선호했다. 저자는 숙종을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군왕으로 꼽는다. 불리한 정치 환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내내 자기 마음대로 정국과 신하들을 주물렀기 때문이다. 붕당은 왕보다 신하들에게 유리한 구도로 볼 수 있다. 숙종은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인조반정 이후 조정은 집권 세력인 서인과 제2의 세력인 남인이 함께 가는 모양새였다. 논쟁과 대립은 있었지만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붕당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건전한 상호 견제와 비판이 백년 가까이 지속됐다. 이 시기에 서인과 남인의 대표적인 논쟁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예송 논쟁이다. 자의대비의 상례 문제에 따른 논쟁이었다. 1659년 일어난 기해예송은 종법과 왕가의례 중 어디에 초점을 두어 효종을 볼 것인지에 관한 예송이었다. 효종은 종법 측면에서는 자의대비의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 계승면에서는 적자였다. 당시 상례를 치를 때 왕가에선 국조 오례의를, 일반 사대부들은 주자가례를 따랐다. 그런데 국조 오례의에 위와 같은 사례가 존재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졌다.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을 따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예송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둔 성리학의 핵심 사상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전방위적 예송 논쟁으로 성리학적 이념 논쟁이 활성화된 측면도 있지만 예송의 본질이 훼손되고 붕당정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적지 않게 드리워진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상술했듯 이때까지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의 붕당정치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은 효종의 외아들인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 적장자(정실이 낳은 맏아들)는 일곱명이었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단종도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숙종은 온순했던 아버지 현종을 닮지 않고 괄괄했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를 닮았다. 최경식의‘숙청의 한국사’는 여러 시대의 숙청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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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8-31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매니아인지라 이 리뷰가 눈에 제일 먼저 띄네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4-08-31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명 깊게 또는 유의미하게 읽은 두 책의 저자가 신간을 냈다. 오리진의 저자 루이스 다트넬은 인간이 되다를 냈고 미토콘드리아의 저자 닉 레인은 트랜스포머를 냈다. 인간이 되다에 대해 천체 물리학자 마틴 리스, 고생물학자 헨리 지 등이 찬사를 보냈고 트랜스포머에 대해 이론 물리학자 리 스몰린, 이론 물리학자 Sean Carroll,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 등이 찬사를 보냈다


역시 내가 읽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의 저자 진화생물학자 제리 코인의 신간은 언제 나올까? 언급한 두 책(인간이 되다, 트랜스포머) 외에 헬렌 체르스키의 블루 머신, 마법의 용광로의 저자 천체물리학자 마커스 초운의 지금 과학, 우주 물리학자 스토 야스시의 우주의 수학 등을 읽어야 하리라. 과학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니 영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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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의 개성 여행
채수 외 지음, 전관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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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의 개성 여행은 채수(蔡壽), 유호인, 남효온(南孝溫), 조찬한(趙纘韓), 김육(金堉), 김창협(金昌協), 오원(吳瑗) 등의 글을 묶은 책이다. 사가독서를 얻어 개성에서 멀지 않은 파주에서 여행을 하기로 한 결과물이다. 채수는 신우(辛禑)가 망령되게 요동 정벌을 획책하자 태조가 회군했다고 말한다. 신우는 우왕을 말하는 것으로 공민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조에서는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신우라고 불렀다.

 

채수는 태조의 옛집인 목청전(穆淸殿)에 가서 어진을 뵈었다고 말한다. 박연(朴淵)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다. 박연은 박연폭포를 이르는 말이다. 채수는 웅덩이 물이 넘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데 마치 은하수가 거꾸로 걸린 듯 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백의 요간폭포괘장천(遙看瀑布掛長川; 저 멀리 폭포는 긴 강을 걸어 놓은 듯)이란 말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채수는 박연폭포를 와 보지 못했다면 항아리 속 초파리 꼴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박연폭포는 재인폭포처럼 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은 전설을 가진 폭포다. 관음사는 이성계의 잠저 시절 원찰이다. 본문에 화담(花潭) 이야기가 나온다. 서경덕이 태어나 살던 개성부(開城府) 화정리(禾井里) 계곡의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 못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진달래가 비치는 것을 보고 못의 이름을 화담(花潭)이라 하였다. 서경덕이 그곳의 이름을 따 화담이란 호()를 지었다. 경천사(敬天寺)는 기황후의 원찰이다.(승상 탈탈의 원찰이란 말도 있다.) 경천사는 10층 석탑으로 유명한 사찰이다.(78 페이지) 채수에 의하면 벽란강(碧瀾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예성강(禮成江)이고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져 바다로 흘러드는 곳은 조강(祖江)이다.

 

채수는 다만 구경하느라 지켜야 하는 바를 잃어버린다면 이는 옛사람이 경계하는 바이니 우리의 유람이 혹시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니었던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고려 수창궁은 성종과 목종 연간에 지은 궁이다. 김종직의 문인 뇌계(㵢溪) 유호인은 박연폭포의 물살이 흩어지면 만 필의 베가 되면서 봉우리를 흠뻑 적시고 땅덩이를 뒤흔들면 마치 은하수가 꺾이어 땅에 꽂히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유호인은 10여년이 넘는 동안 공민왕은 한 여자 때문에 백성들만 힘들게 했으니 참으로 미혹된 자들이 거울삼을 만하다고 썼다. 임진강은 사가독서를 얻은 조선 성종대의 선비들이 개성에 가기 위해 건넌 강이기도 하다. 김육(金堉)의 천성일록(天星日錄)은 선조대에 기록된 글이다. 태종대(太宗臺)가 나온다. 천마산은 하나의 산이었는데 박연폭포를 기준으로 동쪽은 성거산, 서쪽은 천마산이라 부른다.(141 페이지) 김육은 자신을 잘못 안내한 사람 때문에 화담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젠가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고 붉은 단풍이 들면 약속한 대로 박연폭포와 차일봉 사이를 다시 찾아가 보고 화담 위에서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서화담 선생의 영전에서 지난번에 찾아뵙지 못한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고 말한다. 농암 김창협은 숭양서원을 이야기한다. 김창협은 후조(後凋)의 기상을 엿보는 듯 하다는 말로 정몽주를 언급한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개경은 유학적 성지(聖地)가 되었다. 개경 여행은 박연폭포 찾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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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중 지역 강안학을 열다, 성주 한강 정구 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시리즈 9
김학수 지음 / 예문서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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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 - 1620)의 본관은 청주다. 청주의 옛 이름은 서원(西原)이었다. 한강은 성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지만 본디 그의 집안은 서울에 터전을 둔 전형적인 경화사대부였다. 한강은 성주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몇 십 리에 지나지 않는 칠곡의 사양정사 지경재(持敬齋)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동선은 퍽 광범위했다. 한강정사는 한강이 건립한 최초의 건축물이다. 한강을 눈여겨 본 인물들 중 율곡 이이(1536 - 1584), 우계 성혼(1535 - 1598)을 빼놓을 수 없다. 한강이 초당을 짓고 생활하던 회연(檜淵)에 한강 사후 회연서원이 건립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공부에 몰두하기 위해 회연으로 온 한강은 회연초당의 뜰에 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했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의 무(武)는 주희의 은거지였던 중국 복건성의 무이구곡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들 중 주자를 본받아 구곡을 경영한 대표 사례는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등이다. 물론 한강이 무흘구곡이라 이름하지는 않았다.(屹은 산 우뚝 솟을 흘이다.) 성주 회연서원의 옥설헌(玉雪軒), 망운암(望雲庵), 불괴침(不愧寢) 등의 액자를 쓴 사람이 미수 허목이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한강의 수제자다. 여헌(旅軒)은 그를 한강의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했고 최향경은 가장 가까이서 스승의 미언(微言; 넌지시 하는 말, 뜻 깊은 말)을 들은 인물로 칭송했다. 


한강 신도비명은 상촌 신흠이 지었다. 한강언행록에 완폭정(翫瀑亭)이 나온다.(翫은 구경할 완이다.) 무흘은 워낙 험한 벽지(僻地)여서 손님들의 방문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수는 한강의 고제(高弟)였다.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를 이르는 말이다. 예로부터 영남은 낙동강 동쪽을 강좌(江左), 서쪽을 강우(江右)로 표현했다. 경북 지역이 강좌, 경남 지역이 강우에 해당한다. 한강은 1563년 퇴계를 찾아가 배웠고 1566년 남명을 찾아가 배웠다. 


한강은 바다처럼 넓고(海闊) 산처럼 우뚝한(山高) 기상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용화범주(龍華泛舟)는 친교 뱃놀이 모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불천위(不遷位)에도 등급이 있다는 점이다. 나라에서 지정하는 국불천위, 사림에서 지정하는 사림불천위, 한 고을에서만 통하는 향불천위, 도에서 통하는 도불천위 등으로 나뉘는 것이다. 종묘의 경우 정전이 사대부 가문의 불천위 조상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다.


한강은 국불천위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술을 올리는 절차가 헌례(獻禮)다. 초헌, 아헌, 종헌으로 나뉜다. 헌작(獻爵; 술잔을 높이 드는 것) 후 구운 고기인 적(炙; 구운 고기)을 바친다. 술을 드렸으니 안주를 드시라는 의미다. 초헌 시에는 육적(肉炙; 돼지 고기)을 쓴다. 삽시정저(?匙正箸)는 첨작 후 주부가 메 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메 그릇의 중앙에 꽂는 절차를 말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이르는 말이다. 갱(羹)은 제사에 쓰는 국을 말한다. 아헌 때에는 계적(鷄炙)을, 종헌 때에는 어적(魚炙)을 쓴다. 한강의 학문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지만 이론과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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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김신조 / 동아출판사(두산)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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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재현은 19681, 21 사태의 유일 생존자 김신조의 새 이름이다. 북한에서 27년을 살았고 남한에서 57년째 살고 있다.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하다는 그가 쓴 자서전격의 책이다. 반공도 아니고 무슨 사상의 선언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쓴 책이다. 남한에서의 17년째 생의 해인 1994년 그는 가슴 치게, 북의 가족들이 그립다는 말을 했다.(책이 나온 해가 1994년이다.)


공작원 수는 76명이었으나 31명으로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1조 청와대, 2조 미 대사관, 3조 육군 본부, 4조 서울 교도소, 5조 서빙고 간첩수용소를 습격하려던 계획도 축소되어 청와대만을 노리게 되었다. 김신조는 자신들 중 누군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자신은 살아올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그는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자신의 신체를 믿었다. 42년생이니 그가 124 부대의 일원이 되어 남으로 침투한 것은 27세의 일이었다. 물론당과 혁명을 생각한다 해도 죽음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청춘"이었다. 한겨울이었으니 영하 25도의 매서운 찬 바람이 불었다. 황해북도 연산군 124 부대에서 출발한 버스는 개성 시내의 남동쪽에 외따로 떨어진 남파 공작원 초대소로 향했다.


개성은 한국 전쟁 당시 38선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도시가 초토화되지 않았다. 그들은 북방한계선 북한군 민경초소에서 국군 복장으로 갈아 입고 수령 동지의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는 혈서를 썼다. 그들은 성공하고 돌아올 경우 민경 초소와의 문답 암호로 611을 부여받았다. 김신조는 2조 조장이었다.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 2조는 청와대 본청사 1,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 5조는 정문 초소를 공격 목표로 정했다.


그들이 택한 코스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의 경계선 지역이었다. 경계선 지역은 서로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미루기 때문에 늘 소홀하고 취약한 지역이다. 그들은 전투지경선을 밟되 절대로 한국 25사단으로 가지 말고 미 2사단 쪽으로 들어서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들은 눈이 많이 온 지역이어서 멀리서도 움직이는 물체가 눈에 잘 띄지만 이 때문에 우리 군이 경계를 느슨하게 할 것이라 계산했다.


당시는 남방한계선이 모두 철책으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미군 주둔 지역은 철책이, 한국군 주둔지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른 철조망을 쇠기둥 뒤쪽에서 매어 원상태로 만들어 놓아 우리측에서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후에 체포된 김신조는 현장 검증에서 철조망을 발로 툭 차 철조망이 벌어지게 했다. 미군은 그때까지 철조망이 잘린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목책이었던 한국 부대의 남방 한계선은 124 부대가 넘어온 지 1년이 지나서야 철조망으로 교체되었다. 그들은 군견이 자신들의 발자국 냄새를 맡고 따라오지 못하게 군화 바닥에 횟가루를 뿌리고 그 위에 가랑잎이나 흙을 덮었다. 그들은 철책을 넘어오는 데 체력과 시간을 많이 썼고 아침이 가까워서 서둘러 숙영지를 잡았다. 낮에는 절대 이동하지 않고 밤에만 이동했다.


새벽 다섯 시면 모든 행동을 중단했다. 그들은 사방에 2명씩 보초를 세우고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잠들면 얼어 죽기에 서로 흔들어 깊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장파리와 미군 부대를 잇는 리비교쪽의 임진강을 건넜다. 강물은 다리 아래를 지날 때 유속이 느려져 다른 쪽보다 얼음이 두껍게 언다. 맞은편 강 언덕은 석포라는 곳이었다. 수직의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이다.


저자에 의하면 그들의 침투로는 개성에서 출발하여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능이 있는 고랑포를 지나 미 2사단과 25사단의 경계지역을 통과, 석포를 건너고 파평산에 이르는 길이었다. 파평산을 넘어서는 양주 노고산을 거쳐 파주 앵무봉을 지나 서울 구기 터널 위쪽인 북한산 비봉을 넘어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들은 파주 삼봉산에서 나무꾼 사촌 4형제를 만났다. 30, 22, 21, 18살의 나이였다. 막내인 우성제는 문산 파출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들은 총조장 말고는 아무도 말을 걸어서는 안 되었는데 여럿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들은 북에 상황을 알렸다. 그들은 암호를 풀지 못했다. 김신조는 후일 북에서 온 암호가 원대 복귀하라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4형제를 죽이자는 쪽은 남파 경험이 있는 대원들이었다. 4형제를 불쌍히 여긴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혁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등 마음이 흔들린 끝에 투표를 했다. 살리자는 의견이 반이 넘었다. 그들은 4형제에게 경찰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을 지킨다는 내용의 서약서와 입당원서를 쓰게 했다. 그들은 4형제에게 이북에 가면 무상으로 대학 교육까지 받게 해주겠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첫째는 경기도 도지사, 둘째는 파주 군수로 임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말았다. 그들은 4형제가 신고를 해서 작전이 전개될 것을 대비해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났다. 그들은 필요한 것을 모두 빼고 땅에 묻기로 했다. 김신조는 납득할 수 없었던 점은 실탄, 수류탄 등을 묻은 대원들이 있었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송추 골짜기에 이르러서야 비상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신조에 의하면 무장한 채 124 대원을 등지고 선 우리 군은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모여서 불을 쬐고 있었다. 모닥불 안으로 수류탄 한 발만 던지면 다 죽을 상황이었으나 임무가 그게 아니었으므로 코웃음을 치며 은평구 진관사로 오르는 계곡길로 접어들었다. 서울의 방어선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그곳을 통과하고 나서 자하문 고개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허기가 져 입조차 뗄 수조차 없었던 그들은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백악산에 가 있어야 했지만 북한산 비봉에서 맴돌았다. 계획을 바꿔 비봉 북방에 숙영지를 마련했다. 중대한 오류였다. 121일은 일요일이었다. 평일에는 대통령이 사찰을 나가 어디서 잠을 잘지 알 수 없기에 일요일 밤에 청와대를 기습하기로 했었으나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살을 에는 듯한 저녁 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속에서 그들은 세검정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청와대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원래 계획은 밤 1030분까지 청와대를 습격하고 청와대 차량을 이용해 북으로 전속력 질주해 자유의 다리를 통과하거나 남파 루트를 따라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총조장 김종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계획 대로 대열을 편성하여 길을 따라 청와대 정문까지 가자고 말했다. 상명여대 입구의 세검정 사거리 검문소를 아무런 검문도 받지 않고 통과한 그들은 자하문 고개에서 경찰들과 마주쳤다.


김신조는 우리측이 30명 이상의 대부대가 청와대로 향한다는 연락을 받았음에도 순경들은 다 어디 가고 경찰서장 혼자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124 부대는 24kg의 장비에 피피 기관단총을 메고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추위에 시달린 상태로 교전을 벌였다. 대원들은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정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몇 차례 겸재 정선의 집터를 찾아 경복고등학교에 들어선 기억이 난다. 그곳은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이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장을 풀고 수류탄 하나를 들었다. 무기를 휴대하면 노출되기 때문에 민간인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수류탄은 만약의 경우 자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 경비와 외곽 경비는 수경사 예하 30대대가 맡고 있었다, 대대장은 전두환 중령이었다. 대원들이 자폭하기 시작했다. 김신조는 포위 되었다. 자수를 권고하는 소리에 김신조는 투항했다. 국군은 김신조를 생포했다고 말했고 김신조는 투항했다고 말한다.


김신조는 자신들 개개인은 모두 탁월했지만 똘똘 뭉치지 못했다고 말한다.지휘 체계가 흩어져 너도 장교, 나도 장교인 셈이었다고 말한다. 삶을 선택하는 순간 그저 자신의 나이, 아직 꽃을 피워 보지 못한 자신의 청춘을 생각했다는 김신조는 투항을 하고 기자 회견을 하고 동료 대원들의 주검을 확인하며 비로소 동료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자신이 비겁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가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임진강까지 이르러 강 위를 흐르는 얼음을 타고 북으로 가다가 사살당한 대원도 있었다. 노고산에서 가장 많은 11명의 대원이 사살되었다. 한 국군 중사는 쓰러져 있는 대원들을 수색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시신을 뒤집는 중 수류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안전핀을 문 채 엎드려 죽은 대원의 시신이었다. 29명의 시신을 판문점으로 가져가 북에 인도하려고 했으니 북은 그런 사람들을 남파시킨 적이 없다며 끝내 시신을 받지 않았다.


아무도 애도해주지 않는 스물 아홉 구의 주검이 경기도 문산 가는 국도변에 묻혔다. 김신조는 공학도를 꿈꾸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새 목표를 찾았다. 북에서는 군대를 가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 평생 허드렛 일을 하게 된다. 군대를 갔다 와야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우러러보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김신조의 아버지는 김신조가 청진 집에 돌아와 인사를 드리자 네가 우리 당의 고급 당원이 되려면 앞으로 군 복무 기간에도 잘 싸워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신조는 특수 부대에 잘 적응해나갔다. 당원이 된 김신조는 정찰 업무 대신 민족보위성 업무를 맡게 되었다. 김신조는 특수부대에 걸맞은 체질을 타고 났다. 하체가 길고 굴곡이 깊은 발바닥을 가지고 있어서 뛰기에도 적합했다. 게다가 통뼈였다. 김신조는 지형학도 잘 했다. 방향 감각이 좋고 기억력도 좋았다.


31명은 124 부대 창설 이후 처음으로 남파 공작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이다. 김신조는 도면에 청와대 내부 구조와 인원 및 화력의 배치 등을 그려 가며 설명할 정도로 우리 사정을 잘 알았다. 김신조는 124 부대를 남조선 적화를 위한 게릴라 부대라 설명했다. 1968123일 미군 장병 83명이 납치된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졌다. 미국이 선원들을 보내 달라고 하자 북한은 못 보낸다고 했다. 이에 미국은 김신조와 바꾸자고 했다. 그대로 북으로 가면 김신조는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김신조는 미국의 처사를 듣고 무척 분개했다. 북한은 자신들은 김신조라는 인물을 모른다고 했다. 김신조는 자신을 이어 특수 훈련을 받은 124군 부대가 대량으로 남파될 것이라고 했으나 미군은 믿지 않았다. 그해 11124 부대에서 훈련받은 특수부대 요원 120명이 내려왔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이었다. 124군 부대가 창설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던 미군은 1, 21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남한에 1억 달러의 원조를 했다. 우리는그것으로 전방의 목책을 철거하고 155마일의 철책선을 만들었다. 탱크 저지선도 만들었다. 당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군 복무도 6개월이 늘었다.


미군을 원수로 여기던 김신조는 미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분노가 폭발해 미군 경비병의 코를 주먹으로 강타해 지하 독방에 갇혔다. 울진 삼척 공비 침투 사건이 김신조의 말을 입증해주었다. 김신조는 헬리콥터를 타고 공비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했다. 김신조는 낮에는 기자회견도 하고 밤에는 수사도 받고 서류 재판을 받은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70410일의 일이다.


김신조는 자신이 워낙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었기에 어느 땐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다가 주민등록증을 받고서야 산 목숨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신조(金新朝)는 주민등록상의 이름을 김재현(金在現)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김신조는 말한다. 사건 당시 자신은 총 한 방 쏘지 않았다고. 살아 남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죄로 사건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김신조는 세 번의 탄생을 말한다. 하나는 생물학적 탄생이고 둘은 1.21 사태 때 투항해서 얻은 두 번째 생명이고 셋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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