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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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인도(印度), 요가, 파괴적 사랑, 식이장애, 깨달음 등의 키워드로 분석할 수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인도 마이소르 아쉬탕가 요가 연구소에서 요가 아사나, 요가 철학, 산스크리트어 등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쓴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요가 수행 자체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은 아니지만 기법보다 중요한 정신에 대해 회의하는 형식으로일망정 많은 사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요가 강사인 정윤희라는 여자로 그녀는 요한이라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윤희는 인도로 건너간다. 그녀가 단행한 것은 수행이기보다 여행이었다. 그녀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카르마의 문제점은 물론 요가 수행자들의 욕심 등을 불편하게 바라본다.

 

윤희는 요가에 대해 이런 의문점을 갖는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제어함으로써 요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욕망이 모두 소진되어 무력해지고 마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61 페이지) 윤희는 사랑하는 사람 요한의 난치병을 보며 그에게 그런 삶을 허락한 신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몸부림친다. 윤희는 급기야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기에 그런 신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윤희는 요가 강사로서의 삶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진짜 행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고통스러운 아쉬탕가 요가를 그만 두지 못하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다. 소설은 윤희가 한국에서 만난 요한과의 일을 한 챕터에 걸쳐 이야기하고 다음 챕터에서는 인도에서의 사건을 전하는 방식으로 흘러가는 작품이다.

 

윤희는 교회에서 요한을 알게 된 이래 그의 작곡가로서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 본문에는 요가에서 가장 큰 죄악은 살인도 절도도 투기도 아닌 무지라는 말이 나온다. 무지의 늪에 빠진 사람은 끊임없이 죄악의 업보만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는 드물게 만나는 것인 만큼 귀하다. 여덟을 의미하는 아쉬토와 나뭇가지 또는 단계를 의미하는 앙가의 결합어인 아쉬탕가는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서 제시된 요가의 여덟 가지 측면을 의미한다.

 

요가는 결합을 의미한다. 요한의 부모는 큰 자산가임에도 아들을 치료하느라 재산을 소진하고 요한은 몸 때문인지 병적인 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윤희는 요한의 그런 모습을 보며 요한도 맑고 환하게 빛나는 신의 아들이 아닌 더럽고 추악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윤희는 식이 장애를 앓는다. 그녀는 새벽에 요가 수련만 마치고 나면 종일 자신의 손과 입에서 음식들을 떼어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나 인도에서 그녀가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 외에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절제가 주요 미덕인 요가 수행자로서는 이례적인 일인 듯 하다. 윤희가 어릴 적부터 앓아온 폭식증이 재발한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면서부터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가 인도로 오며 가장 바랐던 것은 그저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정량의 음식만을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싶어서,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대화 나누고 싶지 않아서 인도 마이소르 땅까지 도망쳐온 것인지도 모른다. 윤희는 요가 수행을 하는 지인 언니들의 위선(?)에 분노감을 표출한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한 줄 모르고 그저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명예를 얻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무언가를 비우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수련을 해나가는 요가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도 무언가 더 가지기 위해 요가까지 하는 사람들...”(232 페이지) 상당히 아픈 이야기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 깊이 돌아보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요가 정신에 대한 반성적 성찰 못지 않게 윤희가 앓는 폭식증에 대해서도 상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은 윤희가 인도 여행에서 도움을 받은 케이와 나누는 이야기로도 눈길을 끈다. 어차피 똑같은 수련법이라면 왜 굳이 이곳 마이소르까지 와서 매일 수련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케이의 말에 윤희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논리를 들려준다.

 

윤희는 아쉬탕가 요가를 접하고 새벽마다 똑같은 순서의 수련을 반복하다보니 차이란 반복되는 것들의 차이고, 반복이란 차이 나는 것들의 반복이라는 ‘차이와 반복‘의 철학이 받아들여지더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삶과 철학과 요가가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 같다고 말하는 윤희는 회의(懷疑)하고 시달리니 어쩐 일인가?

 

새로운 깊이, 몸으로 부딪치는 현실의 접면이란 말을 차이와 반복의 문제의식으로 읊조린다. 요가라고 불리는 원초적 선정(禪定) 수행(일지 스님 지음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참고)이란 말도 아울러.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 소설이 재미를 찾아가게 하는 것 만큼 수행과 철학을 생각하게 하는 경험을 드물게 느끼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차문디 언덕이란 남인도의 옛 도시 마이소르에 자리한 언덕이다. 이곳에 1001개의 돌계단과 함께 그 위에 차문디 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있다. 차문디 언덕 계단을 오르며 동행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그것은 맨발로 산을 올라가는 고행이나 단식 또는 시바 신의 이름을 거듭 염송하는 것과 맞먹는 영적인 공덕을 가진다.(에리얼 글룩리크 지음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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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묵 교수의 과학 논문 쓰는 법
원병묵 지음 / 세로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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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묵 교수의 과학 논문 쓰는 법‘은 몇해 전 읽은 김기란의 ‘논문의 힘’에 이어 읽는 두 번째 논문 책이다. 나에게 논문 쓰기는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이기에 참고용으로 읽은 책이다. “논문 쓰기는 delicate tension 과정의 연속”이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delicate tension은 칸딘스키의 작품 이름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연구가 완결되어 데이터 정리가 가능한 상태에서 일주일만에 논문을 완성하여 투고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연구자는 논문 쓰기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논문 작성에는 일정한 글쓰기 훈련이 필요하며 이것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과학 논문은 과학적 주제를 다룬 '논리를 갖춘' 글이다. 논리적 사고의 구조화가 논문 쓰기를 통해 우리가 진짜로 배워야 할 기초 역량이다.

 

논문 쓰기는 아주 능동적인 작업이다. 저자는 과학이라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탐험가라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언제든 길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는 과정이라면 논문은 연구에서 얻은 해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글이다.

 

연구가 우수해야 훌륭한 논문을 쓸 수 있지만 연구를 잘 한다고 논문을 잘 쓰는 것은 아니며 논문을 잘 쓴다고 연구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논문을 왜 쓰는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언제까지 써야 하는가이다. 사안이 정확하고 명확하면 굳이 힘주어 주장할 필요가 없다.

 

과학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글이고 매끄러운 글은 그 다음이다. 논문 쓰기는 주장할 내용이나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차근차근 글로 풀어 쓰는 과정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자신의 연구를 초등학생에게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논문을 쓰려면 무엇보다 연구 주제(글감)가 좋아야 한다.(43 페이지) 그 이후 주제가 잘 드러나도록 구성(틀잡기)을 잘 해야 한다.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 결론을 예상하고(초기의 예상이 결국 틀리는 경우도 많지만) 연구의 핵심 내용과 연구 방향을 포함하여 전체 틀을 잡아 보는 훈련을 하면 연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힘을 집중할 수 있다.

 

연구 노트에 적은 연구 내용을 참고하여 핵심 주제나 결론을 하나의 짧은 문구로 표현하는 훈련은 추후 논문 제목을 정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 의외의 결론에 도달하면서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마무리되는 연구와 논문은 얼마든지 존재한다.(45 페이지) 수많은 원인으로 논문 작성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을 왓슨 증후군이라 한다.

 

일주일만에 논문을 쓰는 순서는 이렇다. 1일; 제목과 초록(抄錄) 작성. 2일; 그림과 표 완성. 3일; 문헌 탐색과 정리. 4일; 서론 작성. 5일; 본론 작성. 6일; 결론 작성. 7일; 전체 조율 및 논문 초고 완성 등이다.(제목, 저자, 초록, 서론, 본론, 결론, 참고)

 

학술지 논문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며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래서 학술지 논문은 길이가 짧은 편이다. 박사 논문은 통상 다수의 주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며 여러 학술지 논문을 종합한 내용으로 구성되기에 짧게 쓰기가 어렵다.(48, 49 페이지) 논문 쓰기의 본질은 끊임없는 연습(혼자 하는 글쓰기)과 훈련(논문 지도 받는 것)이다.

 

저자는 학술지 논문과 학회 초록 작성을 지도하면서 또는 시험 답안을 채점하면서 학생들의 글쓰기 수준에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 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문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시에 재미있고 유익하게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논문의 제목은 상품의 브랜드와 같다. 초록(抄錄)은 1) 연구 주제의 일반적 배경과 이슈. 2) 논문에서 다루는 문제의 핵심. 3) 연구의 핵심 방법과 결과. 4) 주요 결과의 상세 요약. 5) 연구의 기여와 전망 등을 쓴다.(77 페이지) 서론(序論)은 초록의 확장이다. 선행 연구를 설명하는 문구 바로 뒤에 해당 문헌 번호를 인용하는 것이 좋다.

 

문장이 다 끝난 후에 인용하면 어디까지가 선행 연구인지가 모호해진다. 표절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행 논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문장을 완전히 새로 쓰는 편이 좋다.(89 페이지) 표절 검사 프로그램으로 조사했을 때 중복성이 보통 15퍼센트 이내이면 괜찮다. 논문의 본론은 결과와 논의를 포함한 부분이다.

 

결과를 설명하는 문단은 두괄식 전개가 좋다. 본론에는 결과와 함께 내 연구의 결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학문의 계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101 페이지) 결과와 논의를 적을 때는 사실 그대로 적는 것이 좋으며 지나친 형용사나 부사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102 페이지) 논문은 주장하는 글이지만 결과가 명확하면 주장하지 않아도 결과가 스스로 빛난다.

 

논문은 결과를 사실 그대로 적고 논의하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차분히 서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의 논문은 하나의 결론을 강조한다. 결과는 연구에서 얻은 주요 데이터를 말한다. 결론은 연구의 최종 종착점이다. 대부분 짧은 논문의 결론은 하나다. 초록에서는 결론이 뒤에 나오지만 결론 부분에서는 곧바로 결론부터 쓴다.

 

초록은 결론을 얻기까지의 목적과 과정을 먼저 서술하고 결론을 요약한다. 결론 부분에서는 결론 내용을 먼저 서술하고 그 결론을 얻게 된 주요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면 된다.(106 페이지) 결론에서는 이전 연구의 한계를 명시하며 현재 연구의 최종 성과를 확정한다. 결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앞으로의 연구 전망을 서술한다.

 

연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면 좋을지, 어떤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지, 향후 연구에서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적어 주면 후속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학 논문은 연구 내용이 압축되어 있고 용어와 내용이 전문적이라 관련 분야 연구자라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논문은 재빨리 읽고 핵심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인 말하기는 논문을 쓰는 순서와 맥락이 같다.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하면 논문 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 무슨 이야기든 핵심을 먼저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배경지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청중을 천재라 가정하지 말라. 어떤 이야기든 마무리가 중요하다.

 

이야기의 핵심 결론을 한 번 더 요약 강조하고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추가될 수 있을지 전망과 예측을 곁들이면 좋다. 박사 주제는 되도록 빨리 잡는 것이 좋다. 초반에 박사 주제의 방향을 잘 잡으면 길이 스스로 열린다. 좋은 주제를 찾으려면 선행 문헌 조사가 거의 완벽해야 하고 학문의 흐름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 박사 주제와 연관 지으라.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종착점에 도달할 수도 있기에 모든 경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연구 노트를 성실하게 적으면서 아이디어의 흐름을 잘 이어가라. 연구실 밖에서도 훌륭한 연구 활동이 가능하다. 가끔은 온전히 쉬는 것이 연구에 더 큰 도움에 되기도 한다. 다른 분야의 학문에도 관심을 기울이라.

 

다른 인접 학문에 대한 관심은 더 넓은 기회를 열어 줄 것이다. 모든 일에 자신을 믿으라.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 온 것으로도 충분히 잘한 것이다. 젊은 동료들과 소통하라. 도움받는 것에 주저하지 말라. 언젠가는 젊은 동료들에게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 적절한 휴식을 취하라. 확신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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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박 팀장님과 함께 광진구 향토사학자 김민수(金玟秀) 선생님을 만나 대화 시간을 가졌다. 광진구 인물을 소재로 한 동화 기획에 필요한 절차였다. 나는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가 ’문화사의 과제‘란 책에서 한 말을 전했다. "아마추어 향토사가 중에도 역사에 대한 현자가 있는가 하면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 중에도 둔감한 지식의 소매상들도 있는 법이다"란 말이다.

 

우리는 김 선생님에게서 광진구 화양정 느티마당의 안내판에 모윤숙 시인의 시가 게재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느티나무는 모윤숙 시인의 옛집터에 자리한 나무다. 모윤숙 시인은 ‘렌의 애가(哀歌)‘라는 제목의 산문 작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렌은 wren인데 무심코 지나칠 법하지만 굴뚝새를 이르는 말이다.

 

박 팀장님께 유명 건축물도, 인물도, 역사적 사건도 종로, 중구, 성북 등에 편중된 현실이 안타깝다는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여지는 크지 않아도 새 인물을 찾아보겠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다음 만날 날을 9월 17일로 잡고 헤어졌다. 상황을 보아서 광진구의 나무를 대상으로 동화를 만드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건의할 생각이다. 요즘 나무나 꽃을 세밀화로 그리는 것이 인기를 얻고 있으니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경우 동화화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역사적 인물은 이미 충분한 이야기가 축적되어 있으니 다듬고 각색하면 되는 데 비해 나무는 단순히 세밀화로 구성하지 않는 한 작품화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대망(待望)의 9월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대망이라 했지만 이것 저것 하느라 더 바빠지는 것일 수도 있다. 글도 쓰고 답사도 갈 것이라 계획한 달이다.

 

앞에서 말한 부분과 관련해 “모든 정상적인 사람은 나이가 들면 향토사학자가 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말은 한 건축가가 스쳐 지나가듯 들은 출처와 기억이 불분명한 말이지만 그 건축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설득력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말을 했다. 모두라고 할 수 없지만 젊어서 역사, 문화, 유적 등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따로 시간을 내어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 심지어 해설을 하는 사람들도 젊어서 관심이 거의 없던 경우가 많다.

 

박 팀장님께 고향이 어디냐고 여쭈어 궁궐해설사 동기 이 선생님과 동향(同鄕)이라는 답을 들었다. 어제는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해 6월 혜화 해설 전에 대학로 학림(學林) 다방에서 박 팀장님을 만나 업무 이야기를 하고 인근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 만남 후 나는 7월(어린이 대공원)과 11월(광나루) 해설을 했다.

 

박 팀장님께서 내 해설에 참여하신 것은 2020년 4월(청계천), 5월(올림픽공원), 6월(혜화)이었다. 그러니 내가 박 팀장님 앞에서 행한 세 차례의 해설은 테스트를 받은 시간이었다 할 수 있다. 어떻든 내가 기억하기로 학림은 원래 학림(鶴林)이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자 사라쌍수 숲이 학처럼 하얗게 변해 학림(鶴林)으로 불렸었다.

 

어제 김 선생님을 뵙기 전에 박 팀장님과 점심 식사를 한 곳은 가온(家溫)이었고 일 이야기를 나눈 곳은 카페 피아트(Cafe Fiat)였다. 만남 후 교보에 들러 김혜나 작가의 장편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을 샀다. 요가 수련을 위해 인도에 간 주인공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본문에 나오는 아쉬탕가 요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것이 있다.

 

여덟을 의미하는 아쉬토(astau)와 나뭇가지를 의미하는 앙가(anga)를 합한 말이다. 요가 수행의 여덟 가지 측면을 나뭇가지에 비유한 말이다. 아쉬탕가라는 말만을 아는 사람이 그 개념의 근원인 아쉬토 플러스 앙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틀렸다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도 요가 수행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읽는 것은 혹시 만날 수도 있는 분과의 대화를 위해 준비하는 차원이다.

 

이 준비(책 사기, 읽기, 기억하기)는 무용(無用)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한 지인분께서는 내게 그 사람을 만나 말하기보다 듣고, 답하기보다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유도하라고 조언했다. 유도하더라도 알고 해야 하리라. 우선 읽자. 소설을, 광진구 자료를, 연천 자료를, 기타 필요한 과학과 인문 책들을. 내일부터 3일 정도는 나도 몸 쓰는 보조 일을 해야 하니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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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황진이’를 듣는다. 스물 여섯 살 최향이란 분이 부른 곡이다. 가수는 매서운 눈매와 약간 거칠어 묘한 매력을 띠는 목소리로 매우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술이 아닌 것에도 취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곡은 묘하게 슬픈 한편 마음을 설레게도 한다.

 

못 이룬 사랑을 아쉬워하는 노랫말 가운데 ”서 화담 그리운 님 저승 간들 잊을쏘냐 섬섬옥수 고운 님아...“란 구절이 있다. 화담은 황진이와의 이야기로 유명한 서경덕의 호 화담(花潭)을 말한다. 서경덕은 복재(復齋)라는 호도 썼었다. 주역에서 유래한 호다. ”서 복재 그리운 님 저승 간들 잊을쏘냐”라고 했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지난 8월 25일 미얀마 민주화 운동 후원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인사동 나무화랑)에 다녀왔다. 신영복 사상 연구 단체인 더불어숲과 성공회대 교수회가 공동 주최한 ‘미얀마 민중과 함께 여는 새날’이란 제목의 이 전시회 출품작들은 신영복 선생님에게서 서화를 배운 제자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나는 안내 직원에게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작품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며 석과불식과 관련 있는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괘를 간단히 설명하기까지 했다. 아래로부터 다섯 음효가 자리한 뒤 오는 하나의 양효가 씨 과일로 쓸 석과의 의미를 갖는다. 이 산지박 괘 다음에 지뢰복 괘가 자리한다. 산지박에서 지뢰복으로의 변화는 박탈(剝奪)당했다가 회복(回復)되는 것을 뜻한다. 서경덕의 복재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내 처지(處地)가 석과를 떠올리는 불우(不遇)한 처지라 생각하다가 곧 다른 생각을 찾는다. 석과를 떠올린다는 말은 모든 과일이 떨어진 뒤 하나 남은 씨로 쓸 과일을 떠올린다는 뜻이다. 불우하다는 말은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불행하다는 의미이니 무엇인가 만들지 못한 나와 연관지을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한다.

 

서경덕은 어땠을까? 죽음을 앞에 두고도 초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서경덕이 아닌가? 그는 젊은 시절에 어진 스승을 만나지 못해 공부에 헛심을 많이 썼다고 말하며 공부하는 이들은 이런 나를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 덧붙였다. 그리고 몽매함을 깨우쳐 줄 스승을 만나지 못해 잡된 공부에 얽매였다는 말을 했다.

 

관건은 무엇일까? 좋은 시절을 나의 덕이 만든 결과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리치 칼가아드의 ‘레이트 블루머’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늦게 피는 사람들인 레이트 블루머들은 일찍 피어난 어얼리 블루머들에 비해 호기심이 많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연민 능력을 갖추었고, 회복력을 갖추었고, 통찰력과 지혜 등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것은 성공을 나의 덕으로 돌리지 않는 것과 공명한다. 어얼리 블루머든 레이트 블루머든 꽃이 피었다고 하지 말고 꽃을 피웠다고 해야 하리라. 오규원의 시는 어떤가?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

 

이 경우 별이 죽음을 맞이하며 우주 공간에 흩뿌린 원소들이 우리 몸을 이루고 바위를 이루고 꽃을 이루는 것이니 그렇게 엄청난 차원으로 담긴 우주의 진리 앞에서는 꽃이 피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무거운 원자핵들은 뜨거운 별의 중심핵에서 가공되어 별이 폭발할 때 방출된다.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들은(우리를 구성하는 성분들도) 사실상 격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자이안트 날리카 지음 ‘별의 일생’ 153, 154 페이지)

 

”꽃은 한꺼번에 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이 많다. 꽃이 거의 동시에 피기 때문에 꽃들의 수분(受粉) 매개체에 대한 선택압력이 크다. 따라서 꽃들은 수분매개체를 유인하기 위해서 적응하다 보니 저마다 크고 화려한 색깔들을 띠고 있다.“(이상태 지음 ‘식물의 역사’ 214 페이지)

 

생태 전문가 차윤정은 이런 말을 했다. ”한 번이라도 꽃을 피워본 사람이라면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꽃이 피기까지의 그 긴장감과 피어 있을 동안의 고단함을 이해한다면 차라리 햇빛에 녹아버리며 시들어가는 꽃잎에서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꽃으로 피어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일이다.“(‘꽃과 이야기하는 여자’ 41 페이지)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들은(우리를 구성하는 성분들도) 사실상 격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고 ”스타일이 없으면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11 페이지)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늦게 꽃 피우는 일 역시 의미있고 그래서 기꺼이 감내해야 과제이자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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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세창프레너미 9
서정욱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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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는 세창 프레너미 시리즈의 한 권이다. 프레너미란 프렌드(friend; 친구)와 적(enemy)을 합성한 말이다. 아니 적이라기보다 라이벌이라고 해야겠다. 결론을 말하면 프레너미란 적이면서 친구인 사람을 가리킨다.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등으로 이주하여 살아남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세파르디 유대인이라 한다.

 

스피노자 아버지 미카엘은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프랑스 낭트에서 아버지와 함께 무역상을 하다가 1623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인은 네덜란드법에 의해 관직에 나갈 수가 없고 랍비가 되기 위한 교육만 허락되었다. 스피노자의 할머니는 거짓 개종 혐의로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스피노자는 형의 죽음으로 교육을 계속 받아나갈 수 없었다. 가려져 있던 스피노자의 학구열을 끌어낸 사람이 최고의 스승 판 덴 엔덴이다. 스피노자보다 30년 연상인 분이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에서 금지한 신비철학을 연구하는 등 반교회적 행동을 함으로써 유대 공동체(교회)로부터 추방당했다. 하지만 그는 대신 철학 연구에 매진할 자유를 얻었다.

 

스피노자는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바루흐에서 베네딕투스로 바꾸었다. 바루흐, 베네딕투스 모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파문건으로 스피노자는 두 가지 사건을 겪는다. 하나는 한 광신도가 그런 악마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어두운 밤에 스피노자를 칼로 습격한 사건이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한편 스피노자는 파문당한 사람은 재산 상속권이 없다는 이유로 여동생이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겪는다. 스피노자는 소송에서 이겼지만 아버지의 가업에 관심이 없어서 상속권을 포기하고 모든 재산을 여동생에게 넘겼다. 유대사회는 율법학자가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반드시 한 가지 기술을 익히도록 의무화했다.

 

스피노자는 광학 기술과 현미경과 망원경 등에 들어갈 렌즈 만드는 기술을 습득했다. 피습 및 소송 사건 이후 스피노자는 본격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연구로 유명해져 진정으로 데카르트를 추종하고 전공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불편해지자 레인스뷔르흐를 떠나 레인스뷔르흐보다 큰 도시인 포르뷔르흐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스피노자의 교제 범위는 하루가 다르게 넓어져갔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의 성공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부터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자신이 누리는 지위보다 더 높은 지위를 원하지 않으며 공직이 자신이 사랑하는 조용함과 자유를 빼앗는 것이 싫다며 정중히 거절한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알려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이어갔다.

 

후원자가 렌즈 깎기를 그만두고 철학 연구에만 몰두할 것을 제의했지만 스피노자는 어쩔 수 없이 받은 후원금은 동생 가브리엘에게 주고 생활에 꼭 필요한 후원금 정도만 받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자유다. 남의 돈을 받는 순간 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쪼개야 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을 위해 썼다. 후원인이 없었기에 ’윤리학‘을 쓸 수 있었고 ’신학정치론‘이 금서목록에 올라갔음에도 후원인에게 갈 피해가 없었기에 걱정할 일이 없었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자유이고 조용함이다. 폐 질환은 스피노자 어머니 집안의 병력이었다. 가족력과 그의 생활은 그의 삶을 더 악화시켰다. 스피노자가 죽자 그의 지혜를 사랑하고 존경한 많은 사람이 종교를 떠나 그의 순수하고 순박한 삶을 애도했다.

 

라이프니츠의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성은 라이프니츠가 아니라 라이프뉘츠였다. 라이프니츠는 뉘른베르크 대학의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뉘른베르크 연금술사 협회에 가입해 미래를 개척하는 길을 택했다. 라이프니츠로서는 뉘른베르크에서 나름의 전환점에 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적분을 두고 다투었던 뉴턴처럼 라이프니츠도 연금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라이프니츠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인물은 토마지우스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따르는 대부분의 종교와 달리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자연의 분리를 주장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라이프니츠의 천재성 뒤에는 아버지의 노력도 없지 않았다.

 

라이프니츠의 아버지는 루터파 개신교도의 경건주의자답게 라이프니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신의 계시라고 믿었다. 종교는 인간에게 모든 곳에 신이 있고, 모든 것을 움직인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과학의 발달로 신, 인간. 자연을 함께 생각하지 않고 따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기계론적 자연관이고 기계론적 철학이다. 성리학이 우주, 인간, 사회, 자연을 관통하는 학문체계를 구축한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후견인의 도움을 뿌리칠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후견인의 도움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랍비가 되기 위해 경전을 공부한 스피노자는 라틴어를 깨우치면서 철학자가 되었다. 아버지 서재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한 라이프니츠는 철학자보다 더 깊은 뜻을 품고 대학보다 사회로 나섰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을 구별하면서 신, 자연, 실체에 관해 설명했다. ’윤리학‘이 자유가 인간 지성 또는 이성의 자유를 논한 책이라면 ’신학정치론‘은 인간 신체와 욕망이라는 정치적 자유를 논한 책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공포가 미신을 낳고 그 미신이 집단에 의해 조직화된 것이 종교라고 보았다.

 

스피노자는 신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모순이지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피노자는 모세의 율법 어디에도 신이 육체가 없다거나 심지어 형태나 형상을 갖지 않는다는 믿음을 적은 바 없다. 다만 유대인들에게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하고 오직 그만이 경배되어야 하는 신이라는 것을 믿으라고만 요구한 것이라고 썼다.

 

저자는 이성적 사유 활동도 지적 능력이 지나치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상상력을 강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상상력이 지성의 자리에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라 말한다. 예언이란 상상력이 풍부한 예언자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율법서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지식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미신에 불과하다.(68 페이지)

 

철학자마다 다른 방법으로 신 존재 증명을 한 것처럼 율법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도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증표를 보았고 예언이나 계시를 자신의 견해에 따라 도덕적으로 해석했다.(69 페이지) 스피노자는 예언을 도덕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같은 도덕성을 가진 공동체가 가지는 신의 본성 역시 같은 것이 된다. 스피노자는 율법서를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도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철학적으로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해석하기를 원했다.(72 페이지)

 

라이프니츠는 신은 선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결코 악을 만들지 않았다는 변신론을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세상은 필연적으로 선하고 완전하게 움직이도록 정해져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일어날 것이 일어난다는 필연성을 생각하고 쾌락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에 빠진다. 라이프니츠는 완전한 지성을 발휘하지 않을 때를 가리켜 초기 스토아학파에서 나타난 게으른 이성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사람들은 일어날 것은 일어난다는 생각 때문에 숙명론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부정적이다. 필연성이란 생각으로 숙명론에 빠지거나 쾌락주의에 빠지는 것 모두 문제다. 두 경우 모두 게으른 이성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다. 라이프니츠는 신은 전지전능하며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지만 악은 결코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숙명이나 운명의 필연성으로 악을 저지르거나 나태해지는 것은 신의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필연성이라 강조했다.(84 페이지)

 

라이프니츠는 피조물이 악을 저지를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도 그것을 허락한 것은 피조물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할 기회를 준 것이라 보았다. 스피노자가 유대교를 비판하고 율법서를 부정하면서 파문에 이르게 되도록 영향을 받은 첫 번째 인물은 세파르디 유대인이었던 야코스타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사람이다. 스피노자가 파문 당한 이유와 야코스타가 파문 당한 이유는 많이 닮았다.

 

스피노자가 만나지 말아야 했던 위험한 또 한 사람은 마사니엘로다. 그는 1647년 지나치게 많은 세금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나폴리 시민이 참다못해 일으킨 시민봉기의 지도자다. 스피노자가 만난 또 하나의 인물들은 아드리안 쿠르바흐, 요하네스 쿠르바흐 형제다.

 

스피노자가 만난 위험한 인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스승 판 덴 엔덴이다. 철학사에서는 스피노자가 판 덴 엔덴이 가르친 라틴어를 바탕으로 철학을 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모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판 덴 엔덴은 안트베르펜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예수회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고 1619년 예수회 수도원에 신부가 되기 위해 입회한다.

 

이후 그는 루벤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예수회 수도원에서는 라틴어, 수사학, 그리스어, 수학 등의 교육을 받고 1624년 이후 네덜란드 각지의 예수회 수도원을 다니며 교수로 활동했다. 판 덴 엔덴은 스피노자에게 라틴어를 가르친 스승이라고 하기에는 역할이나 영향력이 너무나 컸다. 그는 히브리어로 ’탈무드‘만 읽으면서 학구열을 불태우던 스피노자의 숨겨진 학구열을 끌어낸 스승이다.

 

판 덴 엔덴은 급진적 진보주의자였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스피노자에게 다방면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판 덴 엔덴은 스피노자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충분한 스승이었다. 판 덴 엔덴은 무신론자이자 범신론자였다. 스피노자가 혁명적 철학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좋은 스승 판 덴 엔덴과의 혁명적이고 위험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정의, 공리, 증명 등의 수학 용어를 써서 기하학적으로 서술했다. ’윤리학‘의 주제는 신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실체이자 자연이다. 나머지 피조물은 모두 양태(樣態)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지만 다른 피조물에 비해서는 자유롭다. 스피노자는 신은 유일하고 무한한 자기원인으로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우주의 실체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주 안에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 곧 신이다. 실체로부터 나온 모든 양태는 신 안에 있다. 스피노자는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 정의했다. 실체의 속성은 변해도 실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다른 속성으로 구별되는 개개 실재를 양태라 한다. 실체란 다른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자기원인이다.

 

양태는 다른 것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양태는 한정적이고 다른 사고에 제약을 받는다. 내적 양태도 있고 외적 양태도 있다. 스피노자는 신 또는 자연이라는 말을 했다.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결정론적 세계관도 그렇다. 능산적 자연이란 실체의 속성인 영원성, 무한성, 자기원인성을 갖는 신과 같다.

 

소산적 자연이란 신의 본성이나 신의 각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자연 속의 모든 개개 실체를 의미한다. 소산적 자연은 신 안에만 존재하고 신이 없다면 존재하지도 않고 생각되지도 않는 모든 양태다. 능산적 자연인 신의 운동에 따라 개개 실재의 소산적 자연이 생겨난다. 신은 능산적 자연이다. 자연 속에는 유일한 실체만이 있기에 신 또는 자연을 신 즉 자연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스피노자가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기에 신 존재 증명을 했을 것이라 말한다.(174 페이지) 스피노자는 신 존재 증명이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이기 때문이다. 신 존재 증명이라는 말은 그의 연구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개개 실재 상호간에 어떤 공통점도 없다면 이들은 서로 상대방에 의해 인식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중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없다.(175 페이지)

 

스피노자는 최초의 원인이 필연적인 신이라고 말했다. 다른 실체에서 산출될 수 없는 실체야말로 자기원인이다. 신 또는 영원하고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물질적 자연의 보편적 질서에 신의 문제를 적용시켰다. 신의 존재 유무는 실체의 본성에 따른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는 원인에 방해가 없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177 페이지)

 

신 존재 유무의 원인을 신의 본성 외 다른 실체의 본성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을 실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신, 자연, 실체의 동일성을 강조했다. 스피노자의 세계관은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에게 지성은 신의 속성과 변용을 파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지성은 능산적 자연이 아니라 소산적 자연이다.

 

지성은 사유의 양태이기 때문에 절대적 사유로 이해할 수 없는 소산적 자연이다. 스피노자에게 능산적 자연은 신, 자연, 그리고 실체와 동일하다. 자유 원인이 아닌 필연적 원인에는 인과율이 적용된다. 의지는 무한하지만 신의 존재와 작용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신과 같이 절대적인 무한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단지 의지는 신의 영원성과 무한성의 본질에서 나오는 무한한 속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한한 속성을 가진 의지는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다고 할 수 있다.(189 페이지)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과 같은 사상이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이다. 스피노자가 신을 자연과 동일시함으로써 얻은 결과는 무신론자라는 논란거리의 비판이다. 스피노자는 자연을 초월한 인격적인 신을 부정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헤이그에서 만났을 때 젊은 스피노자는 이미 자신의 철학을 모두 정리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211 페이지) 스피노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철학을 후대까지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철학에는 경험의 세계도 중요하지만 사유의 세계도 만만치 않다. 스피노자는 근대에 중요 주제로 떠오른 바로 이 사유의 세계를 특별한 지위까지 올린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살아서 고통을 받았고 죽어서 행복을 얻었다. 라이프니츠는 살아서는 행복했지만 죽어서는 고통을 받았다. 라이프니츠가 죽음으로써 그의 철학도 묻혔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 부활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데카르트는 대륙의 합리론자로 불린다. 분명한 것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함께 상대가 있어 상승한 사이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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