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 전문가인 강호숙 박사님의 '여성이 만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공감한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기존의 권위적이고 편협한 남성의 성경해석으로는 바람직한 대안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실존적인 부분과 관련해 내게 지침이 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지금껏 살아 오면서 때로는 남이 인정해주지 않아 서럽고 섭섭한 적도 많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사모하여 마음을 접고 또 접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그것이다. 나야말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에 민감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냥 나 홀로 묻고 모색하며 만족하는 삶을 상수로 둔 채 비상시적으로 얻는 피드백과 격려에 기뻐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사모했다고 하나 나는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신이 없으면 동무가 있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수용하면 내게 필요한 존재는 무엇보다 동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단 나에게도 동무들이 몇 있다. 감사하고 미안하게도 그들은 격려와 지지, 진솔한 조언으로 나를 붙잡아 주고 있다. 하지만 신에게 하듯 때를 가리지 않고 고백하고 질문할 수는 없다. 그것이 문제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말하고 물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실존적 소통을 소망할 때는 언제일까? 문제가 풀리지 않아 힘든 때이다. 내 처지가 어떻든 책으로부터 영감과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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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 -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하나님을 말하다
강호숙 지음 / 넥서스CROSS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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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여성주의는 내 관심권 안의 이슈들이다. 물론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기독교와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 현실에 불편감을 강하게 느끼는 상식인일뿐이다. 그렇기에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만난 강호숙의 ‘여성이 만난 하나님’은 여성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주는 참신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제목을 뒷받침할 구절로 들 수 있는 것은 남성이 보는 하나님과 여성이 보는 하나님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남성의 하나님을 여성의 하나님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말(57 페이지)이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맹종과 추종의 신앙보다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며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신앙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21 페이지)이라 말하는 저자는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을 여성의 하나님을 알리라는 것이라 말한다.(17 페이지)

 

저자는 교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지려면 여성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96 페이지) 책의 주요 특징은 참신(斬新)하고 무게감 있는 해석 또는 지식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본래 의도에 대한 고찰(19 페이지), 믿음의 근거는 지식이라는 칼빈의 메시지(25 페이지), 자기애가 인간의 본성이지만 자기 자신만으로는 인간됨의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다는 주장(29 페이지), 주님의 복음은 우선 나를 위한 것이란 말(31 페이지), 여성의 직관과 감정을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는 점(34 페이지) 등이다.

 

여성의 직관과 감정을 강조한 차원에서 저자는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조직이 아니라 인간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 말한다. 소명과 은사가 직분보다 중요하다는 주장(41 페이지)도 그렇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다음의 부분이다. 신약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모임으로 그 후 성령께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복음전파 사명을 위해 방언과 예언 등의 은사를 나누어주셨다는 내용(42 페이지)이다.

 

다음의 글을 보자. “여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은사를 교회가 환영하고 여성의 고유한 정신세계와 전문성과 공감능력과 돌봄의 리더십을 활용할 때 교회와 사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게 될 것이라 믿는다.”(46 페이지) 이 부분이 전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여성은 제도적인 차원의 지원 없이는 권력구조의 가장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는 문제제기(85 페이지)도 중요하다.

 

당연히 저자는 남녀 모두 평등한 친교적 공동체를 기대한다.(51 페이지) 전체 7부 중 2부인 ‘신학의 렌즈로 성(性)을 보다‘를 통해서도 숙고할 것들은 상당하다. 앞 부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본래 의도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했거니와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남성성을 강조한 것이 아님을 언급한다.(5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고를 묘사한 친근한 표현이다.

 

저자는 총신대학교에서 현대사회와 여성이란 제목의 여성학을 가르친 분이다. 그럼 여성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한 여성됨을 여성 스스로 규정하려는 학문이다.(59 페이지) 나는 이 규정이 마음에 든다. 저자는 여성의 법적 지위가 크게 신장(伸長)되었지만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통념이 여전히 사회나 교회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고 말한다.(8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와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을 문제삼는다.(92, 93 페이지)

 

페미니즘이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하는 데 비해 페미니즘 신학은 여성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을 한다.(93 페이지) 성의 기능을 출산에 한정한 중세 신학자들과 달리 현대 신학자는 출산, 쾌락, 낭만, 대화로 본다는 점도 기억할 부분이다. 저자는 서로 갈망하고 친밀해지고 싶어하는 에로스적 사랑이야말로 부모의 사랑, 친구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방편이 아닌가 말한다.(60, 61 페이지)

 

저자는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한 탓에 여성이 죄의 근원으로 여겨졌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구원과 연관지어 보아야 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전환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와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성들로 인한 것이다. 전도사 시절 목사가 칼을 들이대는 사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구박과 차별, 딸만 낳았다는 이유로 시부모의 눈총을 받아 겪은 심한 우울증 등 개인사도 책의 중요한 부문을 차지한다.

 

물론 이 부분은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어서 비교적 쉽게 읽히지만 감정이입하지 않을 수 없어 우울하게 읽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핍박을 견디며 예수를 믿었다는 사람이 무슨 우울증이냐?“, ”하나님이 기뻐하라고 했는데 왜 우울하냐?“ 등의 말이다.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는 것이기에 문제다. 그것도 성경 구절을 근거로.

 

여성안수 반대에 부딪혀 공황장애까지 앓은 저자는 실천신학을 공부하는 남성 틈에 낀 유일한 여성으로서 꿋꿋하게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가 하는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보수교단의 집단적 해석이라고 해서 다 성경적인 것은 아니고 남성 다수의 생각이라고 진리는 아닐 것이다.“(72 페이지) 전문적인 부분이기에 상술할 수 없지만 성경 구절의 한 부분만을 취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해석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저자는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법적, 문예적, 신학적, 정경적인 접근도 중요하지만 기록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십자가를 진 분 예수의 '나를 따르라'란 말을 강조한다. 섬김의 리더십인 것이다. 저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성경의 원래 뜻을 배우면서 많이 황당했다고 말한다. 그간 알고 있던 의미와 달랐기 때문이다.(25 페이지)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타나는 남녀 파트너십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남성과 여성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구속사(救贖史)적 관점으로만 성경을 읽는 보수교단의 문자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여성의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 죄인과 여성의 친구인 하나님 즉 예수그리스도다.

 

저자의 성경 읽기는 참신하고 흥미롭다. 상술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 사라, 이삭, 하갈 등이 나오는 부분에 대해 내린 해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정(情) 때문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기를 주저했던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했던 아내 사라의 편에도 계시는 분이고 억울하게 쫓겨난 여종 하갈에게 직접 나타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116 페이지)이 그렇다.

 

저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뿐 아니라 사라, 리브가, 라헬과 레아, 하갈이 만난 하나님도 고루 잘 살펴야 구속사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갈등과 삶의 애환 가운데 찾아오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더 넓고 깊이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제사장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 여제사장을 두어 매춘행위를 한 고대 근동아시아의 종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으며 생리와 출산을 부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 해석을 소개한다.(128 페이지)

 

저자는 시대가 아무리 여성에게 닫혀 있다 해도 하나님은 영적으로 신실하게 준비하고 도전하는 여성을 통해서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는다고 말한다.(134 페이지) ”성경의 여성을 해석할 때 왜 하나님과 관련하여 보려고 하지 않을까?“(137 페이지) 저자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취한 남성성이 구원에 효력을 미치는 것과 무관함을 강조한다.(142 페이지) 저자는 남성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만나 그 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 최초의 전달자인 여성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145 페이지)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성은 증인이 될 수 없었다.(162 페이지)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남성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에 매몰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좋은 책은 기록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아 제(除)하고 기록하는 결단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를 방어하기 위해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궁지에서 건져내기 위해 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모르는 아전인수 해석이라는 말은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다.

 

저 말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약자와 피해자를 가해자와 가해자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다.(153 페이지) 유대 전통에서는 여성을 사악하다고 여겨 순진한 남성이 그 꼬임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여성을 만날 기회를 제한했고 집 밖에서는 아예 대화하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유대인이 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자 남편을 다섯 번 이상 바꿀 정도로 기구한 여인과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음은 놀랄 만한 일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당시 통념과 고정관념을 깬 하나님의 현현(顯現) 사건이다.(153 페이지) 예수는 여성에 대한 시대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초월하여 여성을 자유롭고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157 페이지) 저자는 부활의 첫 증인이 여성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남성 제자만이 증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판단에 근거해 여자 목사 안수 반대는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166 페이지)

 

예수는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자를 부활의 증인으로 세울 수 없었다. 저자가 말했듯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그 소식을 여성에게서 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공익 제보를 두고 내용의 진위를 헤아려 인정할 것은 인정하지 않고 메신저를 문제삼는 것은 오늘 우리 정치판에서 목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후 여성 제자, 여성 집사, 여성 선지자 등 여성 동역자들을 세웠다. 저자는 바울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당시 예배드릴 때 여성이 예언도 하고 방언도 했음을 입증한다고 말한다.(169 페이지) 중요한 점은 바울이 그 말을 한 당시는 목사 직분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말을 근거로 목사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대의 해석이다. 바울은 여성에게 설교하지 말라, 목사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바울이 한 말의 의도가 떠들지 말라는 의미인지, 예언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 문맥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170 페이지)

 

저자는 여성의 생리가 없다면 인류는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여성이 동역자임을 말한다.(190, 191 페이지) 공감한다.

 

요즘 의미 있게 쓰이는 말 가운데 틈새라는 말이 있다. niche의 번역어로 생태적 지위, 벽감(壁龕) 등의 의미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틈새 목회다. 여성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이혼녀가 겪는 정신적, 신체적,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치유목회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에서 이혼을 금하고 있다는 피상적이고 율법적인 논리로 이혼녀를 정죄하거나 외면하는 무정하고 상투적인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면 남성들이 참 못나고 고집 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저자에게는 사역을 잘하면 대놓고 묵살하고 윽박질렀다는 신학대학원 후배 남성 사역자가 있었다고 한다. 참 못난 사람이다. 잘 하는 여성을 소신껏 축하해주고 그로부터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여성이 잘 하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여성 사역자에 대한 편견과 무시와 차별을 성경이 승인하는 것인 양 확신하는 교회가 문제다.

 

모두(冒頭)에서 말했듯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과거 기독교인으로 살았고 교회를 떠난 후에도 꾸준히 기독교 책들을 읽었다. 자연히 관련 지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나를 보며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영접하지 않아 문제라는 말을 한다. 문제는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여성차별적이고 개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성령으로 영접하는 분들이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의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들의 획일적 사유와 언어다.

 

올해 나는 부일(附日) 반역자들의 행동을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라 말하는 남성 목회자(1), 강호숙 박사의 본문에도 나오는 아무개 목사의 여성 폄하 및 희롱 발언은 모른 체 하고 그런 목사 하에서라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강변하는 여성 신자(2)를 보고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 (1)이든 (2)이든 성경과 기독교 외에 문화 및 철학, 과학, 역사 등 다양한 인접 학문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다 보니 상투적 신앙에 매몰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본문에 소개된 당시 유대 여성들의 행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의 행위였다. ”로마군병에 둘러싸인 무시무시한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을 따라간 일,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은 마리아.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이방여인, 제자들이 꾸짖는 상황에서도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의 발에 부은 마리아, 오순절 성령강림 자리에 남성 제자와 동참한 일 등은 유대사회의 가부장적 편견과 통념을 깬 도전적이며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235 페이지)

 

예수께서는 그런 여성들을 내치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수의 그런 모습을 얼마나 본받으려 하는가? 힘센 목회와 부(富), 그리고 성공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약자들을 소홀히 여기거나 고려하지 않는 구조적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저자가 보는 교회란 어떤 것일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18 페이지)라는 말을 한 저자에 의하면 교회는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순결과 기다림의 영성‘을 가진 신부 공동체로서 독특하고 고유한 여성 이미지가 반영되어야 하기에 남성 리더십만으로는 불가능하다.(242 페이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모임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어떤 정체성과 지향점을 가지고 모여야(또는 목회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조금 방향이 다른 말이기는 하지만 향후 한국 교회는 일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목회와 사역으로 급선회해 수많은 예배와 구역예배의 틀에서 벗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방식의 섬김 목회 또는 틈새 목회로 전환해야 한다(261, 262 페이지)는 말과도 공명하는 말이다. 저자는 남성성으로 취급되는 독립성, 합리성, 용기 그리고 여성성으로 취급되는 공감능력, 부드러움, 보살핌 등은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한 덕목이라고 말한다.(245 페이지) 


가장 인상적인 말은 목회란 영혼을 돌보는 일로서 여성의 모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247 페이지)는 말이다. 짧고 핵심적인 말이다. ”여성이 건강해야 가정이 건강하며, 여성이 존중받을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여성이 행동할 때 교회와 사회가 밝아지리라 믿는다.“(248 페이지)

 

’여성이 만난 하나님‘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저자의 실존과 이론적 지향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역작이다. 그렇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이기고 오늘에 이른 저자가 제시하는 조언은 울림이 남다르다. 가령 ”여성이 남성에게 진심이 우러나서 고개를 숙일 수는 있어도 무엇을 부탁하려고 남성한테 함부로 머리 숙이지 않았으면 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소신 있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274 페이지) 같은 말은 깊이 새길 말이다.

 

여성이 행복해야 남성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서로 교제하면서 함께 손을 잡고 기쁘게 나아가고 서로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고 말한다.(275 페이지)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함께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총체성은 다(多)를 하나로 통일하는 총체성이 아니라 여러 부분들을 비교하고 그들 사이에서 소통의 다리를 놓고 이들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는 작업, 그런 바탕 위에서 부분들이 어떻게 하나의 총체로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총체성“(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331 페이지)이라는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정교하게 해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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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매일 잠언(箴言)을 보내주는 동료 해설사가 이틀째 새 내용을 보내지 않아 톡을 보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나는 ”저는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을 좋아합니다."란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입니다.’란 구절이다.

 

덧붙여 나는 이 구절은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란 구절 바로 앞에 자리한 구절입니다란 말을 했다. 내가 이 구절을 만난 것은 서동욱 교수의 ‘일상의 모험’에서다.(당연히 성경 구절은 성경에서 만나는 것이지만 어떤 책에서, 어떤 맥락에서 인용된 구절을 읽느냐도 중요하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서동욱은 얼굴이란 신성(神性)이 직접 현전하는 장소라는 말을 했다. 옛사람들은 얼굴을 얼골로 불렀다. 이 말은 얼 즉 정신이 모인 골짜기란 의미다. 얼은 정신의 줏대를 의미하는 말로 당연히 정신이란 말보다 예스럽고 깊이가 있다.

 

오늘 ‘여성이 만난 하나님’에서 또 하나의 고린도 전서 구절을 만났다. ‘여성이 기독교 신앙을 말하다’란 장에서 저자(강호숙 박사)는 교회 내 어른아이들이 배워야 할 구절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구절을 제시했다. 이 구절은 얼굴을 이야기한 구절 바로 앞의 구절이다.

 

정리하면 오래전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는 구절(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의식하며 지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 앞 구절(13장 12절)을 만났고 오늘 다시 그 구절의 앞 구절(13장 11절)을 만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에서 과거(어릴 때)와 현재(장성한 때)를 대비했고 12절에서는 현재와 미래를 대비했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온전히 알 것이라니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부분적인 앎에 지치고 무력할 때 나는 언젠가 온전히 아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고 어려움을 이기려 애쓴다. 물론 종교적 의미와 일상의 의미는 다르지만 상통하는 바가 있다. 내가 말하는 온전한 앎이란 인식의 한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명료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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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모두의 미래를 짓다 - 건축 너머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질문과 성찰 서가명강 시리즈 17
김광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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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박사 김광현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건축을 “공동체에 질서를 주기 위해 짓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태생적으로 배제하는 것(이기적인 것)이다. 건축은 우월함을 자랑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산물이라던 건축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 되고, 건축주는 권력자가 되어 자칫 그릇된 생각과 욕망의 산물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욕망은 실재적 대상의 결여, 결여한 뭔가를 메우려는 충동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실재를 생산하는 것이라 말한다.(50 페이지) 건축은 정주(定住) 사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소나 양이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하며 살 듯 여러 장소를 옮겨가며 살게 되었다. 한정된 커뮤니티에 귀속되던 정체성, 지역성에 근거한 공동체의 감각은 크게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앞서가는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의 필요를 낳는다고 말한다. 건축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강한 욕망을 형상화한다, 닫힌 구조로 내향적이 되는 것은 건축의 숙명이다.(65, 66 페이지) 도시는 교통하는 정주이자 불완전한 정주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한 말을 들려준다. “사람들이 살 집이 되는 인간의 공작물이 없다면 인간사는 유목민의 방랑과 똑같이 부초와 같은 공허하고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유목민에게 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머물 집이 없는 이동은 방랑이 된다는 의미다. 정주 사회는 땅을 기반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곳이다. 이웃 관계도 땅에 귀속된다.(73 페이지)

 

도시는 땅 위에 정주하는 동시에 특정 지역에 귀속하지 않고 사람들과 재화가 횡단, 교차하는 곳이다. 도시는 탈공동체적인 정주 사회다, 물질, 정보도 특정 장(場)에 집약될 때 다수의 신체, 재화, 정보가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꾸준히 이동할 수 있다. 신체, 재화, 정보 교환은 일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건축물이다.

 

막스 베버는 농촌사회에서는 땅이 중요하지만 도시에서는 집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이동하고 교환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 중계점에 건축물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74 페이지) 근대 건축이 근대 도시를 만든 것도 아니며 근대 도시 때문에 근대 사회가 성립된 것도 아니다. 사회가 변화하고 이에 따라 도시가 변화했다. 근대 사회가 시작되고 한 세기가 지난 20세기 초 도시의 악화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근대 건축이 나타났다.(102 페이지)

 

건축하는 사람은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에 관심을 기울인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재현, 재현의 공간, 공간의 실천이라는 삼중 개념을 제시했다. 세 가지라 하지 않고 삼중이라고 한 것은 그 셋이 서로 변증법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110 페이지) 공간의 재현은 도시 계획가, 기술 관료 등 계획자가 주체가 되어 도면이나 모형으로 공간을 편성해 파악하고 계획한 공간을 말한다.

 

재현의 공간은 주민이나 사용자가 실제로 살고 사용하면서 시간이 흘러 숙성되는 공간이다. 상황 구축이나 축제 또는 혁명처럼 규범화된 공간 재현과 충돌하는 공간의 실천이 이뤄진다. 공간의 실천이란 어떤 공간이 나타나 유지되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는 사람 수명보다 오래 견디는 무수한 건축물에 둘러싸여 산다. 건축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다.(135 페이지)

 

노예는 노동만 한다. 그러나 공작인은 작업을 한다.(140 페이지) 산업 혁명 이후 기계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평등은 균일을 만들고 균일은 모방을, 모방은 대중을 만들었다. 대중 사회는 결국 소비 사회와 같은 말이다.(150 페이지) 현대 사회는 정보 조작으로 수요를 무한히 창출하는 소비화, 정보화 사회다.(152, 153 페이지) 권력은 건축으로 애국 이미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공간 구조물로 사회적 관계를 분류하기도 한다.

 

지금도 구조물은 차별적인 사회를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서던 스테이트 파크웨이의 다리들을 2.6미터 높이로 낮춰 지으라고 명령했다. 그가 설계한 존스 비치 공원에 소수 인종이나 저소득층이 들어갈 수 없도록, 가난한 이들이 탄 버스가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155 페이지)

 

권력은 저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다. 고대에는 한 사람이 지배했으나 오늘날에는 크고 작은 사회가 많은 사람을 지배한다. 플라톤은 알고 있으나 활동하지 않는 사람과 활동은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처음으로 구별했다. 플라톤식의 지식과 행위 분리는 모든 지배 이론의 뿌리가 되었다.(158 페이지) 기술이 계속 진보하고 이에 따라 기능도 계속 달라지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고안한 것이 균질 공간이다.(179 페이지)

 

균질 공간에서는 사용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균질 공간은 화폐 같은 공간이며 모든 기능과 용도에 대응하려는 자본주의의 공간 원리였다. 르페브르는 기능과 형태가 다른 공간을 이역(異域) 즉 헤테로토피아라 불렀다.(185 페이지) 정신병원, 감옥 등의 격리 시설, 홍등가, 묘지, 박물관, 도서관, 영화관, 전원 입사체 기숙사, 양로원, 병사(兵舍), 피난소, 유대인 거주 지구나 흑인 거주 지구 등이 근대의 헤테로토피아다.

 

양로원의 경우 노동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지내는 공간이기에 헤테로토피아다. 근대 사회는 노동력이 발휘되어야 기능하는 사회다. 저자는 아파트가 획일적인 이유를 분양받을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생산하기 때문이라 말한다.(234 페이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용(用), 강(强), 미(美)라고 표현했다. 유용해야 하고, 내구력이 있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다.(285 페이지)

 

인류는 수렵 시대에 지모신을 섬겼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지모신에게는 공물을 바쳤으나 태양에게는 의미가 없어 하늘을 향해 기둥을 세웠다. 높고 질 좋은 나무를 고르고, 아주 멀리서 큰 돌을 가져왔다. 기둥을 여러 개 세움으로써 가을에는 낮이 짧아져 어둠으로 들어가고 봄이 되면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태양의 움직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기둥을 세우기는 힘들었지만 함께 세운 기둥에는 공동체의 염원과 기쁨이 차고 넘쳤다.(288 페이지)

 

땅을 딛고 빛을 받아 빛나는 수직 기둥은 땅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모두의 바람을 담아 땅에 누운 돌을 일으켜 세우니 돌은 그야말로 존재감을 뽐내는 큰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놓인 땅과 하늘과 자연이 이미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은 눈에만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공동체 사회 모두의 기쁨이었다. 그들은 뭔가를 구축함으로써 모두의 큰 기쁨과 진정한 아름다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건축은 나무처럼 자란다고 말한다. 건축은 우리 몸처럼 키우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295 페이지)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쳐다보고 마는 물체가 아니다.(296 페이지)

 

건축주는 건축가든 사용자든 건축물이 잘 자라 미래로 잘 전해지도록 공감과 공유의 기억이 풍성한 공간을 만들 책임이 있다. 저자는 건축이 존재하는 원천은 모든 이의 기쁨에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말대로 모든 이의 기쁨은 자기 의지로 공적인 장소, 모두가 경험하는 집에 나타나는 것이지 아름답고 화려한 공간에 매료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3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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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 - 고전에서 찾은 나만의 행복 정원
장재형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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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의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은 저자가 읽은 고전에서 길어올린 사색의 편린들을 다듬어 교훈의 형식으로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한 달에 50권 이상의 책을 읽는 분이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2장 우리는 사랑으로 산다. 3장 단 한 번뿐인 삶, 욕망하라. 4장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5장 내 삶의 의미를 묻다. 6장 행복해지고 싶을 땐 등이다.

 

각 장에는 세부 주제가 있다. 1장에는 자아, 여행, 독서 등이 있고 2장에는 사랑, 타자, 슬픔 등이 있는 방식이다. 자아에 해당하는 작품은 헤세의 ‘데미안’이고 여행에 해당하는 작품은 라이언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다. 모두 28편의 고전이 망라되었다.

 

첫 작품으로 호명된 헤세의 ‘데미안’에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초인(超人)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장의 제목인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은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는 ’데미안‘의 구절에서 유래했다. 이런 방식의 유기적인 구성이 이 책의 특징이다.

 

책에는 은유가 풍성하다. 은유 없이 사유는 가능하지 않다.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라는 말, 고전은 혼란스럽고 답답한 정신을 위한 영양제라는 말,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는 말, 인생은 누군가가 헝클어놓은 실타래(페르난도 페소아)라는 말 등이 모두 훌륭한 은유다.

 

물론 이런 말은 계속 쓰면 진부해진다. 새로운 은유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책에 나오는 작품 중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는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늘이 운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에 시인은 우편배달부에게 그것이 메타포(은유)라고 말한다.

 

저자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다룬 슬픔이라는 장의 제목을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로 설정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말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한 말이다. 사랑이라 했거니와 스피노자는 사랑은 외부 원인의 관념에 동반하는 기쁨’이라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는 사랑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바뀌는데 그것은 증오가 선행되지 않은 사랑보다 한층 더 크다는 말도 했다.

 

사랑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 증오는 용서일까? 어떻든 스피노자는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한 철학자다. 그가 말한 욕망이란 갖지 못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나타난 장애, 덫, 기회 등을 가로지르며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그것은 그가 역량 자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가난과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려 노력했다. 인간은 어느 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것처럼 평생 지속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하루 아침에 봄이 오지 않듯 사람도 하루 아침이나 단기간에 행복해지지 않으니 평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력은 기다림이기도 하다.

 

앙드레 지드는 기다림이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말했다. 괴테는 노력하는 사람만이 방황한다는 말을 했다. 인간의 생애는 희망에 의해 끊임없이 기만당하면서 죽음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도 있음을 기억하자.

 

저자는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를 다룬 장에서 한 말이다. 안네는 글을 쓰는 순간에는 어떤 슬픔도 잊을 수 있었고 새롭게 용기가 솟아났다고 말했다.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은신처에 숨어 살기 시작한 열세 살 때부터 2년 뒤 나치에 발각되어 끌려가기까지 써내려간 일기다.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고전 문학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관건은 입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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