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깊어지는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액체의 교환이 있다(시집 ‘뜻밖의 바닐라’ 수록 시인의 말 참고)는 말을 한 시인이 있다. 시인에 의하면 교환되는 액체는 차(茶), 술 등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같이 흘리는 눈물이다. 우당(友堂)은 두주(斗酒) 불사(不辭)하는 원세개에게 술은 차를 대신할 수 없지만 차는 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또 하나의 액체의 교환을 말할 수 있겠다. 관계가 깊어지는 것과 무관한 교환이고 일방적 전가(轉嫁)라 할 수 있다. 음식을 먹을 때 튀는 김치 국물이 그것이다. 얼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얼룩은 액체 따위가 묻거나 스며들어서 더러워진 자국을 의미한다. 하지만 얼룩소나 얼룩말에 길들여진 탓인지 시뻘건 색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쓸 수 없을 것만 같기도 하다.

 

어떻든 이 흠은 처음에 시뻘건 색을 띠었다. 마음 한켠에 상처가 난 듯 했다. 하지만 한참 지나니 얼룩은 종이색과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이것을 탈색(脫色)이라 해아 할 듯 하다. 바랬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이나 나희덕 시인의 어법을 따르면 이를 육탈(肉脫)이라 할 수도 있겠다. 주의할 것이 있다. 탈색(奪色)이라는 말과의 구별이다.

 

뛰어난 물건이 다른 물건을 압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압권(壓卷)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러 작품 또는 답 가운데 가장 잘 지은 것을 의미하는 압권의 주인공 즉 과거 급제자는 임금을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를 관광(觀光)이라 했다. 지금 관광은 그런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급제(及第)는 하지 못하고 여행이나 하는 (관광이란 말이 속화된 것과 무관하게 여행이란 말을 좋아하는) 나는 내일 서울에 간다. 1년에 170회나 간 적이 있는 곳이지만 변함없이 배워야 할 텍스트 같은 곳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구의 짧은 역사 - 한 권으로 읽는 하버드 자연사 강의
앤드루 H. 놀 지음, 이한음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앤드루 놀의 ‘지구의 짧은 역사’는 여덟 가지 지구를 소개한 책이다. 1) 화학적 지구. 2) 물리적 지구. 3) 생물학적 지구. 4) 산소 지구. 5) 동물 지구. 6) 초록 지구. 7) 격변의 지구. 8) 인간 지구 등이다. 이 책의 주지(主旨)는 셋이다. 1) “지구의 모든 것은 역동적이다.” 2) “대산소화 과정 및 흙은 물리적 과정과 생물학적 과정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3) ‘인간이 멸종으로 치닫는 현 상황의 책임자다.’ 등이다.

 

화학적 지구편에서는 우주와 그 역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가장 덧없이 사라지는 빛이라는 원천에서 나온다는 말이 관심을 끈다. 반면 우주의 건축자는 중력(重力)이다. 별빛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우주는 주로 수소 원자들이 퍼져 있는 차가운 곳이었다. 우리 행성을 이루는 철, 규소, 산소,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 질소, 인 같은 원소들은 후대의 별에서 기원했다. 빛이 우주의 역사를 말해준다면 암석은 우리 행성의 역사를 말해준다.(30 페이지)

 

이런 점에서 보면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는 오규원 시인의 시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알 수 있다. 지구는 한 손으로 자신의 역사를 쓰면서 다른 손으로는 지워버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우는 손이 더 바쁘게 움직였다.(32 페이지) 고요하게만 보이는 달도 시적 영감의 대상이기 이전에 격변의 산물이다.(35 페이지) 지구는 짙은 대기로 감싸여 있었지만 그 공기에는 산소가 없었다. 시간 여행자인 사람이 그 원시 지구로 간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51 페이지)

 

물리적 지구편에서는 지구 환경의 항상성은 융기와 침식의 균형을 통해 역동적으로 유지된다는 말이 핵심이다. 단층과 습곡은 지층이 수직 운동뿐 아니라 수평 운동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60 페이지) 지각의 무덤은 섭입대다. 섭입대는 한 지각판이 다른 지각판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지각의 암석을 원래 기원했던 맨틀로 돌려보내는 곳으로 지각판의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있다.(65 페이지)

 

생물학적 지구편에서는 단백질을 만들려면 DNA 명령문이 있어야 하고 거꾸로 DNA를 복제하려면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글이 눈길을 끈다.(91 페이지) 지구는 기나긴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생명의 행성이었다. 별의 진화 모형은 40억년전 태양의 밝기는 지금의 약 40퍼센트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가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은 것은 온실가스 때문이다.

 

온실가스는 21세기인 지금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취급받지만 더 정기적으로는 지구의 서식 가능한 기후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대기의 이산화탄소는 지금보다 농도가 100배 이상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지구의 표면에 액체 물이 유지될 만큼 지구를 따뜻하게 유지했을 것이다.(107 페이지) 무수한 실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생명의 기원으로 이어질 화학반응은 산소가 존재했을 때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지구임을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환경에서 출현했다. 물로 뒤덮여 있었고 육지는 거의 없었으며 대기에 이산화탄소가 많은 데 비해 산소는 거의 없었고 수소를 비롯한 기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펴져 있는, 온천처럼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세계였다. 시작은 이렇게 초라했지만 생명은 불어나고 다양해지면서 지구를 세균, 돌말, 세쿼이아, 우리로 가득 채웠다.(108 페이지)

 

산소 지구편에서는 남극의 얼음에 갇힌 물방울 가운데 200만년 이상 된 것이 없어 암석 기록에 새겨진 화학적 흔적을 토대로 원시 대기에 대해 추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암석과 광물의 조성은 형성될 때 공기와 물에 어떤 식으로 접촉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구 역사의 거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지구의 대기와 대양에는 본질적으로 산소 기체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인간은 생존할 수 없었다. 물론 무산소 지구에서도 생명(미생물)은 있었다.

 

오래 유지되던 지표면의 상태가 바뀐 것은 24억년전이다.(122 페이지) 햇빛이 들지만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 탄소 순환이 일어났다. 지구의 유년기는 철기시대였다.(125 페이지) 지구 대기에 산소를 불어넣을 수 있는 과정은 오로지 산소를 생성하는 광합성뿐이다.(127 페이지) 지구 대산소화 사건은 대변혁이었고 이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은 남세균(藍細菌; 시아노박테리아)이었다. 남세균은 산소성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세균이다.

 

인은 암석이 자연력에 풍화될 때 흘러나와 강물에 실려 바다로 유입된다. 광합성 생물은 이 인을 흡수하여 생명 분자를 만드는 데 쓴다. (130 페이지) 지구가 성숙함에 따라 크고 안정적인 대륙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침식되어서 바다로 유입되는 인의 양도 늘어났다. 이 결과 남세균이 생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라섰다. 남세균이 진화함에 따라 대산소화사건이 일어났다. 대산소화 사건은 단순히 지구의 물리적 발달의 산물이 아니라 지구와 생명의 상호작용의 결과다.(131 페이지)

 

동물지구편에서는 에디아카라 화석군이 나온다. 선캄브리아기 시대 말에 형성된 세계 각지의 해성층에서 발견되는 화석군이다. 에디아카라는 그 화석군이 최초로 발견된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지명이다. 에디아카라기는 2004년에야 국제 지질연대표에 추가된 시대다.(149 페이지) 저자는 “에디아카라 화석과 캄브리아기 화석은 종류가 놀라울 만큼 다르지만 관찰된 생물학적 차이가 진화가 아니라 보존 양상과 환경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159 페이지)

 

캄브리아기의 기후가 지금보다 따뜻했다는 증거는 몇 가지 방면에서 나온다. 눈덩이 지구의 꽁꽁 언 기후에서 벗어난 뒤 진정한 온실이 된 셈이었다.(164 페이지)

 

초록 지구편에서는 육상식물에 대해 알 수 있다. 오늘날 약 40만종의 육상식물은 지구 광합성의 절반과 지구 총 생물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지구를 초록으로 뒤덮은 식물은 우주에서도 보이는 우리 행성의 주된 특징 중 하나다.(171 페이지) 저자는 많은 세포학적 특징들과 분자생물학적 특징을 볼 때 육상식물은 민물에 사는 녹조로부터 진화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물론 강과 연못에서 마른 땅으로 진화 여행을 하려면 건조 방지, 기계적 지지, 자원 획득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물에 에워싸여 있을 때 광합성 생물은 마를 위험이 없지만 육지에 있을 때는 세포에서 계속 수증기가 증발한다. 그래서 민물을 계속 빨아들이지 않는다면 금방 시들어 죽을 것이다. 수생 조류에게 물은 몸을 받쳐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지만 육상식물에게 공기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육지의 광합성이 필연적으로 물 손실을 수반하므로 식물은 주변에서 물을 흡수하여 몸 전체로 수송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175 페이지)

 

대다수 식물에서는 영양소 흡수의 상당 부분을 뿌리와 긴밀한 협력을 맺고 살아가는 균류가 맡는다. 식물은 물과 영양소를 위쪽으로 운반하고 광합성을 통해 생산한 먹이를 온몸으로 보내야 한다. 이 일을 관다발이 수행한다.(177 페이지) 관다발에서 물을 운반하는 세포는 벽이 두껍다. 이 두꺼운 벽은 식물이 서 있도록 지탱하는 기계적 강도를 제공한다.

 

저자는 책 허파(book lung)를 말한다. 절지동물문 거미류의 호흡 기관을 책 허파라고 한다. 배의 아래쪽 앞에 몸 표면이 푹 패어서 생긴 주머니 속에 많은 얇은 주름이 책장이 겹쳐진 것처럼 쌓여 있다고 해서 책 허파라고 한다. 다른 말로 서폐(書肺), 폐서(肺書)라고도 한다. 책 허파 안에는 공기와 접촉하는 표면적을 최대로 늘리기 위해 책장이 접혀 있는 것처럼 복잡하게 접혀 있는 조직이 있다. 책 허파는 수생 조상의 아가미에서 진화한 듯 하다.

 

저자는 실러캔스와 틱타알릭을 언급한다. 흙은 생물의 육지 정복의 산물이다. 우리는 흙이 지구 표면이 물리적으로 변형된 형태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과정과 생물학적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육상 생태계가 발달할 때 기름진 토양도 함께 발달한다.(185 페이지) 저자는 공룡은 멸종한 것이 아니라 참새, 지빠귀, 비둘기 등 살아 있는 조류들로 이어졌다고 말한다.(195 페이지) 조류가 공룡의 후손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헉슬리에게서 유래한다.

 

격변의 지구편에서는 충격 석영이 관심을 끈다. 충격 석영은 일시적으로 온도와 압력이 높아질 때 만들어진다. 거대한 운석이 충돌할 때 생긴다는 의미다. 지름 200미터의 거대한 운석 크레이터가 퇴적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다.(207 페이지) 현재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생물 다양성은 모든 면에서 집단유전학 못지않게 대멸종과 환경 변화의 산물이다.(209 페이지)

 

지질학계에서 트랩은 현무암이나 다른 검은 화산암이 대규모로 쌓여 있는 용암대지를 가리킨다. 대개 마치 계단처럼 층층히 겹쳐 올라가면서 쌓여 있다. 계단(trappa)이라는 스웨덴어에서 유래했다.(214, 215 페이지) 철원 한탄강을 옛날에 체천이라 부른 것이 생각난다. 체는 계단을 의미한다. 시베리아 트랩 화산 활동은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로 방출해 온실효과를 일으켰다. 그 결과 지구 온난화가 일어났다.(217 페이지)

 

대멸종은 고생대를 끝장내고 중생대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백악기 말 격변은 중생대라는 책을 덮고서 우리의 신생대 책을 펼쳤다.(219 페이지) 2억 2천 5백만년전에 생성된 시베리아 트랩(페름기 말 대멸종을 낳은 화산 폭발의 결과물)은 종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질학적으로 볼 때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저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반복되는 대멸종 사건들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환경 교란이 빠르게 일어났다는 점은 공통점이라고 말한다.(225 페이지) 대멸종은 지구 내에서 또는 태양계의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통해 추진되는 일시적이지만 심각한 환경 교란을 반영한다. 대멸종은 진화 역사를 빚어내는 데 분명히 주된 역할을 했다. 현대 세계가 포유류로 가득한 것은 어느 정도는 공룡이 멸종했기 때문이다. 어류는 백악기 말 대멸종으로 암모나이트가 사라진 뒤에야 다양해졌다.

 

인간 지구편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오래 씹는 데 알맞은 커다란 어금니가 있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서 번성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오래된 화석은 모로코의 30만년 된 지층에서 나왔다.(239 페이지) 빙하기 지구에서 우리의 직계 조상이 살고 있을 때 사람속은 적어도 세 종이 더 있었다. 네안데르탈인, 호모 플로렌시엔시스, 데니소바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신들이 동물을 창조했을 때 각 동물에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맡겼다. 에피메테우스가 치타에게는 빨리 달리는 능력을, 개에게는 갑옷을, 코끼리에게는 커다란 몸집을 부여했다. 사람은 불행히도 가장 나중에 서 있었기에 가질 만한 것이 없었다. 이에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언어, 불, 기술의 능력을 훔쳐서 사람에게 부여했다.(243 페이지) 언어, 불 제어 능력, 도구 제작 능력을 갖춤으로써 인류는 동물계의 다른 종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인류는 식량이나 거래를 위해 동식물을 선택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종을 본래의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김으로써 생물 다양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다.(250 페이지) 무엇보다 남획(濫獲)이 심각하다. 광합성과 호흡은 서로 거의 균형을 이룬다. 완전히는 아니다. 호흡 및 관련 과정을 피해서 퇴적물이 되는 유기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 유기물 중 일부는 변형되어 석유, 석탄, 천연가스를 형성한다.(252, 253 페이지)

 

이런 화석 연료들은 수백만년에 걸쳐서 아주 천천히 지표면의 탄소 순환 과정으로 복귀할 것이다. 이산화탄소는 화산 분출을 통해 대기로 추가되고 화학적 풍화를 통해 제거된다. 제거된 탄소는 석회암으로 쌓인다. 기후 변화는 많은 종의 분포 양상을 바꿀 것이다. 예전에 서로 만날 일이 없었던 종들이 한곳에 모이게 될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종간 경쟁과 생태계 복원력에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261 페이지) 해수면 상승이 큰 문제다. 대기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바다도 따뜻해진다.

 

바닷물은 따뜻해질수록 물에 덜 녹게 된다. 바다에서 산소가 사라질 것이다. 산성화가 진행될 것이다. 인류가 일으킨 세계적 변화와 연관된 모든 현상 중에서 아마 가장 놀라운 점은 인류의 반응일 것이다. 현재까지 인류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264 페이지) 저자는 전 세계가 힘을 모은다면 우리는 안전하고 온전한 세계를 물려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물려받은 세계는 우리의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268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도널드 위니콧이 말한 정신세계와 외부 세계가 만나 변화가 일어나는 과도(過渡) 공간이다.(레진 드탕벨 지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 80 페이지) 책 한 권을 읽고 다음 책을 손에 들기까지 많지는 않지만 책들로 들어찬 내 방에서 시간을 보내면 완전히 책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몰입해 읽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에 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상태 역시 일종의 과도(過渡) 또는 이행(移行) 상태라 할 수 있다.

 

인류학자/ 영장류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의 신간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읽어야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어떻게 인류로 진화했는지에 대한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논의를 펼쳤다고 한다. 어떤 분야 이상으로 새로운 주장을 담은 내용들로 북적(book積)이는 분야가 인류학/ 고고학 분야인 듯 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게는 아직 지질보다 인류학/ 고고학 분야가 더 재미 있다.

 

올해 1.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발레리 트루에), 2.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리사 펠드먼 배럿), 3. ‘인류, 이주, 생존’(소니아 샤), 4. ‘역사에 질문하는 뼈 한 조각’(마들렌 뵈메) 등 네 여성 저자가 쓴 책을 흥미 있게 읽었는데 이제 세라 블래퍼 허디의 책을 올해의 대미를 장식하듯 읽어야겠다. 이런 읽기도 어떤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의 '던바의 수'에 소수에게만 허락된 우유라는 챕터가 있다.(던바의 수는 150명으로 그 수를 넘으면 진정한 인맥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상희 교수는 '인류의 기원'에서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유당분해효소 지속증이 문제라고 말했다. 

 

심리학자 앤드루 슈툴먼은 ‘사이언스 블라인드’에서 우유는 19세기에 소크라테스의 헴록(hemlock; 독미나리)이었다고 말한다. 루이 파스퇴르(1822 - 1895)에 의해 저온살균처리법이 발명되기 전까지 우유를 마신 아기들이 모유를 먹은 아기들에 비해 사망률이 몇 배 높았다.

 

프랑수아 자콥(1920 - 2013)은 파스퇴르에게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건너뛰게 만든, 기병대의 기습과도 같은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화학에서 결정학으로, 이어서 생물계에서 가장 덜 알려진 분야의 연구로의 전환이다. 자콥은 파스퇴르가 없었다 해도 전염병에서 세균의 역할을 틀림없이 알아냈겠지만 아마도 크게 다른 조건에서였을 것이라 말한다.

 

자콥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이 없었다면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진 그 무엇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다윈이 없었다면 진화론과 유사한 무엇이 생겨났을망정 같은 이론은 아니었을 것이라 말한다. 자콥은 조지 오웰의 경구를 인용해 예술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작품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더 독특한 것이라 말한다.(‘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 196, 198 페이지)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의 번역서가 나온 것이 1999년이니 적어도 20년 이상이 되었다. 그 사이 과학론에 분명 변화가 있었겠지만 자콥의 저 말은 그대로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독특함, 그것이 핵심이리라. 산업조직심리학자 케이트 머피가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 당신의 관점을 두고 '독창적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당신이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단점이라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당신의 고유한 관점을 칭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말을 괴짜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취약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 말의 의미를 더 낣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고 상대의 진의를 섣불리 단정지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171 페이지) 

 

나는 어떤가? 나는 독창적이라는 말이 설령 괴짜라는 의미로 전해진 것이라 해도 좋게 들을 것이다. 김상환 교수는 창의적인 상상력은 천부적인 재능이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창의성은 학습을 통해 획득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말을 했다.('이야기의 끈' 235 페이지) 김상환 교수는 새로운 것을 기괴하거나 일탈하는 것과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새로운 것은 이전의 것과 다르되 모범이 될 만한 것이면 된다.('이야기의 끈' 237 페이지) 

 

나는 새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일본의 이론 물리학자 무라야마 히토시의 말이 생각난다. 우주 생성 초기에 물질과 반물질의 비율은 1;1이었으나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의 경우에만 10억개 중 하나의 비율로 차이가 남으로써 (다른 물질과 반물질은 소멸했지만) 그렇게 차이나는 하나가 악간의 물질로 남아 별과 은하를 만들고 우리를 만든 것이라 한다.('왜,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가' 104, 105 페이지) 

 

새로움은 이런 미세한 다름에서 비롯되는 결과가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새로움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환원해 말한다고 하겠지만 차이는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 아닌지? 문제는 이런 자연과학적인 의미가 아닌 내가 얼마나 일상에서 새로움과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 듣기의 기술이 바꾸는 모든 것에 대하여
케이트 머피 지음, 김성환.최설민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기술이라 정의했다. 기술이란 지식과 노력이 요구되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사랑은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또는 감정이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듣기는 어떤가?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못 견디고 조급해 하고 자기 세계에 빠져 타자에 귀기울이지 않는 시대에 듣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산업조직심리학 박사 출신의 인터뷰 전문 기자인 케이트 머피의 ‘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를 통해 그 점에 대해 알아보자. 저자는 듣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저자는 누군가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 정의한다.(3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모든 것이 듣기와 연관되며(23 페이지) 듣기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미덕이다.(40 페이지)

 

듣기는 창의성의 원동력이다.(126 페이지) 듣기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기술이다. 온갖 유형의 사람들과 미리 짜인 각본 없이 제삼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상호작용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습득되는 매우 특별한 기술이 듣기인 것이다.(43 페이지)

 

말을 건네는 사람은 물론 말하는 ‘당신‘ 자신까지도 잘 이해하게 해주는 미덕이 듣기다. 듣기는 상대가 말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과정이기도 하다.(61 페이지) 듣기는 더 나아가 생존에 필수적이기까지 하다.(57 페이지) 청각이 물리적 측면이자 수동적 측면이라면 듣기는 마음가짐의 측면이자 능동적 측면이다.

 

우리는 듣기라는 매우 특별한 기술을 통해 이해에 이른다. 듣기의 목표인 이해 역시 노력을 필요로 한다.(45 페이지) 그렇다면 소통이 잘 되는 대화 당사자들은 감정 차원의 만족에만 머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뇌파 공명(共鳴)으로 드러난다.(45 페이지) 어린 시절 양육자와 아이의 애착에도 적용되는 공명은 내부로 침투하여 감정뿐 아니라 몸까지 뒤흔들어놓는 목소리를 통해 실현된다.(57 페이지)

 

잘 먹어야 한다(Il faut bien manger)는 말이 있지만 잘 들어야 한다. 잘 듣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상대를 향한 배려와 관심을 표출하는 행위다.(54 페이지) 사람은 자기 말을 들어줄 상대가 없을 때(26 페이지), 그리고 의미 있는 교감의 기회를 놓칠 때(55 페이지) 외로움을 느낀다.(55 페이지)

 

듣기란 호기심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이다. 누군가에게 호기심이 부족하다면 이는 제대로 된 질문을 받지 못한 탓이다.(64 페이지) 호기심이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나 질문에 의해 자극된다. 듣기 능력은 끊임없이 정제되고 증대되면서 예술적 경지에 가까운 수준에 이를 수 있다.(83 페이지)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마저 말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다. 타자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지만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중 누구도 항상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없다(40 페이지)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의 낡은 신경 연결망을 강화(50 페이지)해서는 안 되듯 상대에 주의를 기울여 그의 새로운 변화상을 반영해 바라보아야 한다(79 페이지)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신의 말을 다른 식으로 되풀이할 때보다 설명이나 평가가 담긴 말을 건넬 때 더 이해받았다고 느낀다는 점이다.(93 페이지) 단 주의할 사실은 사람은 냉철한 이성보다 정서에 더 이끌린다는 점이다.(97 페이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잘 듣는 기술은 주의력과 집중력,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경험 등을 모두 필요로 한다. 이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102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주의가 산만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다음에 할 점잖거나 인상적인 말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4 페이지)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똑똑한 사람일수록 옆길로 새는 경우가 많고 상대의 말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성이 높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점잖거나 인상적인 말들을 생각하려 하지 말거나 평소 대단한 내공을 쌓아 상대에 온전히 귀 기울여도 그런 말들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리라. 공부하지 않고 생각하기만 잘 하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역설적인 사실은 올바른 표현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상대의 말을 더 놓치게 되고 그 결과 잘못된 말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108 페이지)

 

저자는 생각이나 주의력이 분산되면 그 상태를 알아차리고 초점을 회복하라는, 명상을 응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106 페이지) 또한 상대의 말이 끝나고 잠시 멈춰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볼 것도 주문한다.(108 페이지) 투쟁 - 도피 반응이 있다. 투쟁(fight)할지 도피(flight)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가 말하는 사람의 신념에 적대적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경우 뇌는 곰에게 쫓길 때와 같은 활동 패턴을 보인다고 한다.(115 페이지)

 

해결책은 무엇일까? 저자는 반대 의견을 품은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마다 숨을 고르면서 상대의 논리적 결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닌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을 던질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119 페이지) 자신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에 짜증을 내지도 않고 논박하느라 온라인상에서 악담을 퍼붓지도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반대되는 관점에 귀 기울여 자신의 생각을 재조직하는 과정을 배움이라 표현했다.(123 페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우선 누구나 자신의 한계와 상황, 관점을 바로 보고 생각하는 훈련을 부단히 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무책임하거나 사리에 어긋난 편협한 생각과 말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

 

저자는 현상의 이면에 자리하는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려 애쓸 것을, 말끔한 해명이나 즉각적 해답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런 열린 태도가 편협함의 반대이자 창의성의 뿌리다.(124, 125 페이지) 이런 인지 복잡성은 너그러움은 물론 바람직한 것을 생산하는 능력과 관계된다.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의 관점도 타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상대방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수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126 페이지)

 

책에는 거부감 없는 질문으로 사람들의 사생활을 깊이 있게 드러내는 나오미라는 전문 모더레이터도 등장한다. 나오미의 비결은 듣는 데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엄청난 양의 말을 듣는다는 뜻이다. 이는 전공 관련 서적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책을 읽고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을 닮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관건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하려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143 페이지) 잘 들어야 적절한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 웃음은 정직성과 친밀성, 친근감의 부산물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머는 듣기에서 비롯되는 유대감의 한 형태다.(158 페이지) 이야기를 통제하려는 사람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듣기 능력이 탁월하고 대화의 함의를 탐지해내는 능력을 대화 민감성이라 한다. 이는 공감의 전제 조건이다. 공감이란 예전 경험에서 느끼거나 배운 감정들을 소환하여 나중의 경험에 적용하는 능력이다.(162 페이지) 대화 민감성은 다양한 경험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며 모순되는 관점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인 인지 복잡성과도 관계한다.(126, 162 페이지)

 

귀 기울일 말은 여섯 번째 감각인 직관이 축적된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162 페이지) 거짓과 속임수는 겨짓말을 하는 사람과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말도 흥미롭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잘 듣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애매한 점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한 요인이다. 번거롭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기도 하고 물으면 둔한 사람으로 여겨질까봐 질문하지 않기도 한다.(던지지 않은 질문이야말로 최악의 질문이라는 말이 있다.; 193 페이지)

 

우리가 혼잣말을 할 때 사용하는 두뇌 영역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두뇌 영역이 완전히 일치한다(180 페이지)는 사실도 흥미롭다.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은 이로 인해서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내적 독백의 어조와 질을 결정한다. 내적 독백은 인지 복잡성을 증진시키고 강화한다. 자신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기비판적인 내면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과 남을 비방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지닌 사람은 질적으로 다르다.(181 페이지) 독서가 내적 독백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읽는 동안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들을 나름대로 소리내기 때문이다.(183 페이지) 여성이 남성보다 듣기 능력이 뛰어나지만 형편 없는 여성들도 있고 비범한 남성들도 있다.

 

저자는 사람들이 잘 듣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내적 혼돈과 마주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서라고 말한다.(196 페이지) 상대의 고민을 들어준다 해도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할뿐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말하는 순간 신뢰를 잃는다고 덧붙인다.(197 페이지)

 

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자신의 말을 다른 식으로 되풀이할 때보다 설명이나 평가가 담긴 말을 건넬 때 더 이해받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93 페이지) 상대의 말을 평하는 것과 상대에게 무엇을 하고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다른가? 평가 정도는 하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안 된다는 의미인가 싶다.

 

저자는 상대가 당신의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 당신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해결책을 제시해주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의 경험담이나 충고 등은 진정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203 페이지) 어떤 경우든 가르치려 하고 교정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들어야 말할 수 있듯 들으려면 질문해야 한다. 단 의미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상대의 내면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대방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기만 해도 당신은 그들 스스로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도록 도울 수 있다.“(202 페이지)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바탕으로 한 개방적이고 호기심 어린 질문은 없고 현실적인 질문들로만 채워지면 문제다.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상대의 이야기의 일부가 되길 원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이겠는가?”(207 페이지) 이 부분에서 다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한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은 어머니다운 양심, 아버지다운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머니다운 양심이란 어떤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했다면 너는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어야 하고 나의 마음에 들고 싶으면 너는 네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 듣는 것은 이해하고 배려하고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제이기에 성숙한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이 아닐지?

 

서양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0.5초 이상 지속되는 침묵을 반감이나 거부, 외면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서둘러 말을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 침묵이 단 4초 동안만 지속되어도 사람들은 그 침묵을 자신의 견해에 대한 경계로 간주하고 기존 견해를 수정하거나 누그러뜨리곤 한다.(252 페이지) 하지만 훌륭한 듣기 능력을 갖추려면 침묵의 순간들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253 페이지)

 

상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대화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254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효용성 있는 청취 대상에는 뒷담화도 포함된다.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딋담화를 들은 사람들은 그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 받고 부정적인 뒷담화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좋은 느낌을 품게 된다고 한다.(260 페이지)

 

이 부분에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은 뒷담화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뒷담화라 할 수는 없지만 유용하다는 점에서 뒷담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 학문이나 이론에 대한 후일담은 비교적 죄책감이나 부담감 적게 늘어놓을 수 있다. 어떻든 뒷담화는 적응에 필수적인 지적 활동이다.(262 페이지)

 

영국의 진화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로빈 던바는 진정으로 악의적인 뒷담화는 전체의 3~4%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뒷담화는 사회 공동체 내에서의 지위(변화)에 대한 것이다. 뒷담화에 귀 기울여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뒷담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은 원숭이의 털 고르기 행위다. 원시 인류는 원숭이들처럼 서로 털 고르기를 해주는 행위를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유지했다. 하지만 점차 지성이 발달하고 활동의 복잡성과 공동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언어가 털 고르기를 대신하게 되었다.(263 페이지)

 

털 고르기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대일로 할 수밖에 없지만 뒷담화는 시간도 더 적게 들고 몇 명이서 함께 할 수 있다; 우리는 채집과 사냥을 하는 동안 동료들과 협력함으로써 종으로서 생존할 수 있었다. 말하기 만큼 듣기도 중요하다. 복잡해지고, 간접적인 면이 강해지고, 고립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은 그 만큼 듣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들어야 한다. 듣기는 우리를 인간적으로 연결시켜주는 핵심 요인이다.(269 페이지) 우리 중 누구도 항상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줄 수 없다(40 페이지)는 말을 하는 저자는 모든 사람의 말에 다 귀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인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구에게 우리의 시간을 내주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273 페이지)

 

영국의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는 우리가 대화 상황에서 1) 진실, 2)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정보들‘, 3) 일관성 있고 논리적인 진행, 4) 간략하고 질서 있고 모호하지 않은 내용 등을 기대한다고 정리했다. 문득 나는 자유분방하지 못한 채 뒷담화도 논리를 갖추고 두서 있게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저자는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대화는 어떤 형태로든 각인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내가 전한 지식 및 뒷담화 형태의 정보가 대화 상대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뒷담화조차 논리적으로 한 것은 사람들의 비판에 직면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니면 나도 상대도 시간이 제한적이기에 가능한 한 의미 있는 말을 하려 한 결과일 수도 있다.

 

저자는 사람들이 관심을 거두는 가장 흔한 이유는 바로 상대방의 비판 때문이라고 말한다.(289 페이지) 저자는 이에 대해 대안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하면 양약(良藥)은 입에 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단 저자는 비판이 부당하다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오해를 풀어 자신의 진의를 전달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점이 중요하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지만 지식 전달이 주(主)이기에 무방하다고 생각해왔다. 지식 전달이라고 했지만 자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관종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진단이다. 관종이라는 말을 한 사람에게 묻고 싶다. 정녕 그대는 말할 거리, 자랑할 지식이 많음에도 자제하는가?

 

전에 썼지만 나는 자랑을 많이 하기에 공손한 어조로, 가르친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말한다. 나는 가르치려 하지 않고 공유하려 한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지인이 생각을 물은 뒤 자기 답변에 귀 기울여주었을 때 그때까지 받은 것 중 가장 큰 찬사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는 말을 했다.(296 페이지) 백번 공감하고도 남는 말이다.

 

이 책은 귀한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책이다. 나를 잘 아는 친구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받았다. 감사하다. 모두(冒頭)애서 에리히 프롬을 인용했기에 하는 말이지만 프롬은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 사람, 사상, 자연과 관련된 주제에 거리를 두기 위하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말을 했다.(범우사 출판 ’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225 페이지)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위해 또는 관심의 출발점으로 삼아 나를 이야기 해왔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기와 수용하기다. 내게 중요한 책을 선물해준 친구의 말에 더 아니 제대로 귀 기울이도록 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