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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로 산다는 것 -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긴장 속 조선을 이끌어간 신하들의 이야기, 개정판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6월
평점 :
참모(參謀)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가 없다. 책사(策士)와의 차이도 그렇다. 신병주의 ‘참모로 산다는 것’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정도전, 조광조, 조식, 정인홍, 이원익, 조경(趙絅), 김육, 허목 등에 관심이 있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책을 7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새 왕조를 설계하다, 국가의 기틀을 다지다, 당쟁의 시대와 철학 등. 책에 의하면 17세기 소신과 원칙, 직언의 정치인 조경은 6장 명분과 실리 사이, 인조 반정에 넣었고 남인의 영수 허목, 고학에 심취하다는 7장 당쟁의 시대와 실학에 넣었다.
익숙한 인물만 계속 공부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신병주의 책을 산 것은 미수 허목 때문이다. 내가 미수 허목에 대해 잘 아는 걸은 아니지만 모르던 것을 알았다. 미수 허목이 그가 중시한 육경 가운데 춘추에서 존군비신(尊君卑臣)의 이념을 골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 사실은 복재(復齋)/ 화담(花潭) 서경덕이 미수 허목 학문의 연원이라는 점이다. 이는 허목 부친 허교(許喬)가 서경덕의 제자 박지화에게서 배웠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용주(龍洲) 조경과 허목의 우정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9세로 조경이 연상이다.
두 사람의 인연의 중심에 거창(居昌)이 자리한다. 조경은 광해군의 정치가 싫어 거창으로 가 은거했고 허목은 부친 허교의 부임지인 거창에 함께 내려갔다. 조경이 남인으로 인식되는 데 중요 근거가 된 것은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된 허목과의 친분이다.(375 페이지) 허목은 스스로 박학불무택(博學不無擇; 여러 학문을 하여 선택에 힘쓰지 않음)을 인정했다. 이는 거창에 갔다가 성주에 들러 만나 스승으로 모신 정구에게서 비롯된 바다. 정구는 영남학파의 영수인 조식과 이황의 학문을 함께 계승한 학자다. 정구의 박학풍이 허목에게도 이어진 것이다.(413 페이지)
허목의 학문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들 또 한 사람은 오리 이원익이다.(오리 이원익의 손녀 사위가 미수 허목이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각 두 번씩 모두 여섯 차례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이원익은 원균을 변호하는 이산해와 윤두수에 맞서 이순신의 공을 높이 샀다. 이순신은 자신이 군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은 이원익 대감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이원익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세제 개혁인 대동법 실시의 주역이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 흔적 지우기로 일관했지만 영의정만은 예외였다. 광해군 때 두 번이나 영의정에 오른 이원익이 인조 정권의 첫 번째 영의정에 오른 것이다. 광명시 소하동의 관감당은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이다.(334 페이지) 이런 사례는 숙종과 미수 사이에서도 있었다. 숙종이 허목에게 연천에 7칸의 집을 하사하자 허목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당호를 은거당(恩居堂)이라 했다. 미수는 은거당 뒤의 바위를 일월석, 용문석호라 이름했다.(418 페이지)
황희 역시 정승을 오래 역임한 인물이다. 미수 허목의 기언에 의하면 임금이 정승 출신의 신하에게 집을 하사한 경우가 셋(이원익, 허목, 황희)이다. 이 책(‘참모로 산다는 것‘)에는 이원익의 사례, 미수 허목의 사례가 언급되어 있지만 황희의 사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원익의 수(壽)는 88세였다. 미수 허목과 같은 연수다. 이원익이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면 장만(張晩)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활약한 장군이자 문신이다.(장만의 사위가 최명길이다.) 광해군 대의 요직을 두루 지낸 장만은 광해군이 만년에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추진하자 이를 적극 비판해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자 미련 없이 관직을 그만두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장만은 정묘호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연안으로 유배를 갔다. 장만은 계보 중심, 당쟁사 중심의 역사 연구로 인해 큰 활약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는 장만, 최명길, 김신국, 이산해, 이항복 등 조선이라는 나라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바란다는 말을 한다. 2022년 11월 백사 이항복을 모신 포천 화산서원 해설을 했다. 당시 알게 된 바는 백사 이항복은 서원, 묘지 모두 포천에 있고 친구인 한음 이덕형은 서원은 포천에, 묘지는 양평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용주 조경(趙絅)의 포천 묘지도 함께 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경은 미수 허목처럼 원종(인조 아버지) 추존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에 조경은 외직인 지례(知禮; 경북 성주) 현감으로 밀려났고 1632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창 등지에서 보냈다. 성주는 미수 허목이 아버지의 부임지인 거창에 갔다가 들른 곳으로 미수가 스승 정구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조경은 1차 예송인 기해예송 때 윤선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조경은 남인이긴 했지만 당파적 입장이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소신에 의해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려 확실한 남인 정치인으로 인식되었다.(384, 385 페이지)
조경이 원종 추존을 반대해 외직인 지례 현감으로 밀려났다면 미수 허목은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다. 1628년의 일이다. 당시 용주는 43세, 미수는 34세였다. 미수는 벌이 풀린 뒤에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광주(廣州) 자봉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독서 및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미수가 존군비신을 생각했다면 정도전은 재상 즉 신하의 역할을 특히 강조한 정치를 시스템화하려 했다. 정도전의 이런 구상에 강력하게 반발한 사람이 이방원이었다. 미수가 조선 초의 인물이었다면 정도전 vs 이방원의 대립에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궁금하다. 이방원에게 제거된 후 역적의 대명사로 인식되던 정도전은 정조대에 삼봉집이 간행되면서 어느 정도 멍에를 벗었고 1865년 대원군에 의해 문헌공이란 시호를 받았다.(24 페이지)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 하륜(河崙)이 있었다.(25 페이지) 하륜은 1388년 최영의 요동정벌에 반대해 양주로 유배를 갔다. 하륜은 태조의 계룡산 정도(定都)를 반대해 한양 정도를 주장한 인물이다. 하륜이 주장한 곳은 지금의 신촌 일대인 무악(毋岳)이었으나 정도전, 무학대사 등에 밀렸다. 세종의 참모 장영실은 과학자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흥미로운 점은 장영실을 발탁한 사람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강무(講武)할 때에 장영실을 자신의 곁에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고 썼다. 장영실은 광물 채취 및 제련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은 아름다운 인연의 대표 사례다. 신분보다 능력만을 보고 확실히 지원해준 것만으로도 세종의 이름은 길이 빛날 것이다.
세종 대에 집현전 학사로 뽑힌 성삼문은 계유정난(1453년) 2년 후인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상징하는 옥새를 전해주는 비서의 자리가 예방승지(우승지)다. 성삼문이 예방승지가 된 것은 기구한 운명을 증거하는 바다. 단종 즉위 후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무너졌다.(62 페이지) 김종서, 황보인 등은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던 성삼문과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세조 제거를 위한 거사 당일 성삼문은 신숙주는 나의 평생 친구이지만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성삼문은 세조를 제거하려는 계획이 연기된 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윤영손이 신숙주를 죽이려 하자 이를 막아주는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었다. 세조 제거 계획이 발각되어 성삼문 일행이 체포되자 세조는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였는가?”라고 추궁했다. 성삼문은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천하에 그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거늘 어찌 배반이라 하십니까? 나리는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끌어 댔는데 주공에게 또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이렇게 한 것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주공은 어린 조카 성왕을 잘 보필했다. 서거정은 신숙주처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서거정(徐居正)의 거정은 춘추의 공양전에 나오는 군자대거정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항시 정도를 지키며 살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서거정은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6명의 왕 아래에서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다. 문병을 장악했다는 말은 과거의 시관(試官)을 맡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서거정은 법전, 역사, 지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책을 썼다.
강희맹은 서거정과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문장가다. 강희맹은 서거정과 절친한 사이였다. 사마천, 한유, 유종원, 구양수에 비유되었다. 역시 문장이 뛰어났던 강희안은 강희맹의 형이다. 강회백이 할아버지다. 세종 비 소헌왕후 심씨가 큰 이모다. 강희맹과 서거정은 관중과 포숙의 사이였다. 칠삭둥이 한명회는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해졌다. 한명회는 1456년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벌였을 때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이를 좌절시키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이라 칭했다. 압구정(狎鷗亭)은 송나라 재상이었던 한기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머물던 서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평생 재야에서 은거의 삶을 선택했을 것 같지만 세조, 성종 시대에 관료 생활을 한 관료학자였다. 소학동자 김종직이 사림파의 영수로 확실하게 각인된 것은 그의 사후인 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로 인해서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은 표면적으로는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인 초나라 희왕(의제)의 죽음을 조문(弔問)하는 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다.
’참모로 산다는 것‘에 한(限)하는 일은 아니지만 역사 책을 읽으면 어떤 이의 정체성과 길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오사화로 희생당한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방함과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개혁적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김일손은 호매(狐邁; 호탕하고 영민함)하고 강직했다. 본문에는 추폐(追廢)라는 말이 나온다. 김일손이 세조 집권 후 추폐된 소릉(昭陵)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복위하여 문종에 배향할 것을 주장했다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다. 추존의 반대어라 할 수 있다. 추탈(追奪)이란 말도 있다.(163 페이지)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 흘렀다고 하여 붉은 시냇물이란 의미의 자계(紫溪)라는 이름이 붙었다.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은 김일손을 배향한 서원이다. 김일손을 추존하는 데 가장 많은 힘을 기울인 김대유(김일손의 조카)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이다.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졌다. 악학궤범의 편찬을 주도한 성현은 성종을 음악과 학술 분야에서 보좌한 대표적 참모였다. 성종과 성현의 관계는 세종의 명을 받아 궁중음악을 정리한 박연의 관계와 유사하다.
악학궤범 서문에 이런 글이 나온다. 모든 고르지 못한 소리를 융합하여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임금이 그를 어떻게 지도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이를 보면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사용한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정도전이 쓴 구절은 도견(陶甄)을 잡는다는 말이다. 도견이란 도공이 질그릇을 잘 만들어내는 것처럼 임금이 선정(善政)을 펼쳐 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참모로 나온다. 운평(運平)이란 말이 있다. 연산군(延山郡) 시절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 둔 가무(歌舞) 기생(妓生)을 말한다. 이들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흥청 중 왕을 가까이서 모신 사람은 지과흥청(地科興淸), 잠자리를 같이 한 사람은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은 연산군의 방탕, 난잡함을 조롱한 말이었다. 장녹수는 흥청 중 최고였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오히려 연산군의 음탕과 악행을 더욱 부추겼다.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폭정에 기름을 부은 대표 인물이 희대의 간신 임사홍이다. 그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를 2100년이 지난 뒤까지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遺命)을 어긴 사람이다. 임사홍 류의 간신으로 중종의 참모였던 사람이 남곤이다.(조광조는 중종의 핵심 참모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부왕 성종이 신하들과 경연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왕권이 신권에 휘둘리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남곤의 순탄한 행보에 조광조는 걸림돌로 작용한 셈이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가 아닌 남곤을 택했다. 조광조는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사림파였고 남곤은 사장(詞章)을 중시한 훈구파였다.
조광조는 짧은 삶을 살았음에도 조선왕조실록에 910건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불꽃 같은 삶을 산 인물이다. 조광조가 만난 주요 인물은 김굉필이다. 17세의 조광조가 평안도 어천 찰방(察訪)에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만난 인물은 무오사화의 여파로 회천에 유배되어 있던 김굉필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과의 만남은 조광조가 성리학의 이념과 실천에 빠져든 확실한 계기가 되었고 훗날 사림파 학맥의 중심에 서게 된 중요 배경이 되었다.
조광조가 중종을 만난 것은 성균관 유생 시절이었다. 1515년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알성시에서 중종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의 이상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란 책문(策問)을 던졌다. 조광조는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해야 한다, 왕이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를 삼을 것을 결론으로 하는 답안(答案)/ 대책(對策)을 제출했다. 책문은 정치에 관한 계책(計策)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 과목을 의미하고 대책은 책문에 대한 답이다.
조광조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정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기존의 과거 시험 대신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추진하였다. 조광조는 위훈(僞勳)삭제(削除)를 추진했다. 훈구파의 반격을 맞은 조광조의 중요 죄목은 붕당을 맺어 자신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중종과 성리학의 이상론에 입각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이 충돌한 것이다. 반정공신들과 훈구대신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기용했던 중종은 어느 정도 정치적 기반을 잡자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인종(仁宗)의 스승 하서(河西) 김인후는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이다. 김인후는 호남 지역에 성리학을 전파한 학자다. 김인후는 인종이 내린 묵죽도에 대한 답례로 인종을 대나무에 비유하고 대나무 주변의 돌은 자신과 같이 충성스런 신하로 비유한 답례의 시를 올렸다. 인종은 성리학을 숭상하는 한편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파들의 명예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인종이 희구했던 성리학 중심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사림파 학자로서 김인후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끌어 올린 인물은 정조다. 정조는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했다. 김인후는 정조가 호남 끌어안기의 상징으로 지목한 인물이었다.
이황이 살아간 시대는 크게 사림파의 성장기로 볼 수 있다. 이황은 사림파의 학문적 기반인 서원이 자리를 잡는데 역할을 했다. 주자 성리학이 발상지인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사회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도 이황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남쪽의 아득한 바다라는 의미인 남명(南冥)이라는 호는 장자의 소요유에서 인용된 것으로 남명이 성리학 이외에 노장 사상에도 깊이 빠졌음을 보여준다. 정확하게 말하면 북명(北冥)이란 말을 남명으로 바꾼 것이다.
남명에게 부유한 처가의 경제적 힘이 크게 작용했음도 주목할 만하다. 남명은 잘못된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여겼다. 이황이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켜 당시의 지적 수준을 높여갔던 유학자라면 조식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성리학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조식이 사단칠정 논쟁에 대해 이것이 백성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한 것도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황과 달리 조식은 자신이 살아갔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했다.
이황이 일본과의 강화 요청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주로 교린정책을 견지했다면 조식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토벌 정책을 주장했다. 이황의 성리학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 조식의 문하에서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성향과 연결고리를 갖는 부분이다. 이이는 어린 시절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성수침의 가르침을 받았고 성수침의 아들 성혼과 친분을 유지했다. 훗날 두 사람은 서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이가 공물과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제안한 수미법은 훗날 대동법의 발판이 되었다.
선조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이라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급급했던 왕, 전쟁 영웅 성웅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고 이순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비겁한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라는 완전히 상반된 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조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뉜다고 해야 하는가? 과(過)가 훨씬 크고 결정적이었고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란 것도 민생이나 평화 또는 전쟁 승리와 무관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철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표현도 문제적이다. 정철은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이며 최고의 작품을 썼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기축옥사 사건 수사를 맡아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등 가혹하고 무자비한 면모를 보였다.(희생자 가운데 조식의 수제자 최경영, 서경덕의 수제자 이발도 있었다.) 정철은 기축옥사의 원래 수사 담당이었던 정언신을 정여립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모함해 정언신을 유배 가게 했다. 정철은 정치적 잔혹함이라는 허물이 문학적 재능을 퇴색하게 한 사례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고 정철과 함께 서인 강경파에 속했다. 조헌은 이지함을 평생토록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셨다. 조헌의 개혁론이 유형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후대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의 선봉이 되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일본 공격에 앞장 선 인물이다. 김충선의 일본 명은 사야가(さやか)다.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복한 왜군이라 하여 항왜(降倭)라 한다. 사야가는 처음부터 조선을 동경해 투항을 결심했다. 사야기는 오랑캐의 문화를 가진 일본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던 중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선봉장에 임명 되었다.
의롭지 못한 전쟁임을 알았지만 예의지국 조선을 구경하고자 선봉장이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사야가가 김씨 성을 갖게 된 것은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는 선조의 생각에 따른 결과다. 충선은 忠善으로 충성되고 착하다는 의미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에 충성하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선조 시대는 당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대였던 만큼 선조대에 활약한 참모들은 대부분 당파의 영수였다. 유성룡이 남인, 정철이 서인의 영수였다면 이에 맞서는 북인의 영수로 활약한 대표적 인물은 이산해였다. 한산 이씨인 이산해는 목은 이색의 후손이자 토정 이지함의 조카였다.(한음 이덕형이 이산해의 둘째 사위다.)
이산해는 기축옥사 때 정여립과 같은 동인이었던 까닭에 곤욕을 겪었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총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유성룡, 정철 등과 한 광해군 책봉 건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유성룡은 정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가 선조가 분노하는 것을 보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성질 급한 정철이 화를 당했다. 정철은 강계로 유배를 갔고 서인의 영수 정철의 자리를 북인 이산해와 남인 유성룡이 채웠다. 이산해는 숙부 이지함, 이지함의 스승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실용 중심 사상을 갖추었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고 영의정으로서 전쟁의 현장에서 중요 사항들을 결정했던 인물이다. 유성룡의 호 서애(西厓)는 안동 하회마을의 서쪽 절벽을 의미한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고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다. 두 건 모두 신의 한수로 불릴만하다. 유성룡은 이발, 정인홍, 이산해의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유성룡은 조선이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 원인을 진관체제를 버리고 제승방략 체제를 고수한 것에서 찾았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피난을 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1598년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와 지휘관 양호 사이의 내분이 일어났다. 유성룡은 선조가 자신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고 이항복과 윤두수를 추천해 결국 탄핵을 당했다. 1598년 11월 19일의 일이다. 이 날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기도 하다. 파직당한 유성룡은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징비록 집필에 착수했다. 1607년 5월 유성룡이 사망했다. 이 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덕형은 당색이 뚜렷하지 않고 관료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이덕형의 장인이 북인의 영수 이산해다. 그럼에도 이덕형은 뚜렷한 당론을 형성하지 않고 서인 및 남인의 관료, 학자들과 두루 교분을 형성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책무를 해결해 나갔다. 이덕형은 자신보다 3년 앞서 진사 시험에 합격한 이항복과 1580년 알성문과에 함께 급제하여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인연을 맺었다.(이항복이 이덕형보다 5년 연상이다.)
이덕형은 관직생활 초기 유성룡, 김성일, 이산해, 이원익 등과 친분을 맺으며 동인과 가깝게 지냈고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 이후에도 남인과 북인의 중도파였지만 시종일관 당인의 입장보다 관료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1610년 북인의 핵심 정인홍은 스승 남명 조식을 문묘에 추존하고자 했다. 정인홍의 제자들은 영남에서 집단 상경하여 조식의 문묘종사에 반대하는 이덕형 등의 대신들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고 농성했다.
광해군은 기존 궁궐을 중건한 창덕궁, 창경궁보다 새 궁궐 건설에 집착한 가운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교하 천도를 할 것이라 결정했다. 이덕형 등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교하 천도가 실현되지 않자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덕궁 건설에 총력을기울였다. 광해군의 무리한 궁궐 조성 사업은 결과적으로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왕통상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악행을 자행하게 했고 이는 결국 정권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허균은 무수히 탄핵을 받은 인물이다. 허균에 대한 탄핵은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끊임없이 가해졌다. 허균은 선조 시대에서 광해군 시대를 살다 간 문장가이자 사상가였고 개혁가였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호가 초당으로 서경덕의 문인이었으며 동인과 서인이 분당되었을 때 동인의 영수로 지목될 만큼 명망이 높았다. 허균의 스승 손곡(孫谷) 이달(허균의 중형 허봉의 벗)은 시를 짓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은 스승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허균은 스승의 전기에서 글재주가 뛰어나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허균의 학문과 사상에서 주목할 것은 허균이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 등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허균은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누었다.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 원민은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지만 원망만 하고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백성(나약한 지식인),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이다.
허균은 칠서사건의 당사자들인 서얼의 실질적인 후원자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대북정권의 최고 실세이자 글방 동문이었던 이이첨에서 도움을 청했다. 이이첨의 후원 속에 허균은 집권 대북 세력에 적극 협력하면서 광해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허균은 폐모론과 같은 정국의 최대 이슈에 직면하여 인목대비의 처벌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폐모론으로 대북 중심의 강성 정국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허균은 뜻밖에 내면으로는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위험한 발상까지 했다.
허균은 동료였다가 인목대비 폐출을 계기로 반대의 정치 노선을 걸었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자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문을 올리는 바람에 궁지에 몰렸다. 1618년 허균의 역모를 확증하는 격문이 남대문에 붙었다. 광해군을 비방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내용의 이 격문이 허균의 심복이 한 짓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허균은 빠져나갈 곳이 없게 되었다. 허균은 죽는 순간까지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변호하는 세력은 없었다. 1618년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파란만장한 50세 의 생애를 마친 것이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흐름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에는 점차 그의 진보적인 사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허균의 비극적 생애는 무엇보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불여세합(不與勢合;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것)하는 기질과 혁신적인 사상, 자유로운 행동가적인 면모에서 기인하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허균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려 했으나 생각만 앞선 무리한 시도로 역적이란 부메랑을 맞았다. 한때 광해군의 큰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왕을 배신함으로써 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광해군 시대 정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남명 조식의 수제자, 광해군의 남자, 의병장 등으로 기억되는 북인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다. 당시 정국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출산해 북인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뉜 상황이었다. 소북의 핵심은 유영경이었고 대북의 핵심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 사상의 중심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보민(保民)이었다. 정인홍은 구양수의 붕당론을 인용하여 군자, 소인의 구별을 엄격히 하였다. 이는 자신이 속한 대북이 군자당이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내쫓는 대신 스승인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력 주장하여 사류들의 반발을 샀다. 이를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 한다. 정인홍은 서인 정철과 성혼의 기축옥사 때의 행적에 대해 “간악한 정철을 부추겨 고명한 선비를 죽이게 한 성혼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부추겨 조선을 침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할 만하다.”고 말할 만큼 극단적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은 89세였지만 반정의 주축이었던 서인 세력은 정인홍을 살려두지 않았다. 처형된 정인홍은 국가에 대한 의리(의병장), 왕에 대한 의리(광해군에 대한 충성), 스승에 대한 의리(스승 조식을 극진히 받음)를 일관되게 지킨 인물이었다.
광해군의 참모 김개시는 상궁 출신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다. 광해군은 자신이 하고 싶은 정치적 행위를 대리해서 처리해주는 김개시에게 인사권, 청탁권, 경제권까지 무한 권력을 부여했다. 광해군 집권 내내 국정을 농단했으나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의 편이 되지 못하였다. 장녹수가 연산군과 최후를 함께 한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김개시는 반정군 측에 포섭되어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고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인조반정의 성공에 일정 부분 기여했던 김개시는 반정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은 지지 세력인 대북 중에서도 이이첨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고 정인홍을 정권 홍보의 중심으로 삼았다. 상궁 김개시의 국정 농단은 광해군을 더욱 파국으로 몰고 갔다. 술사(術士)에게 의존하면서 무리하게 천도를 계획하고 궁궐을 조성하면서 광해군은 더욱 벼랑으로 나아갔다. 1612년 9월 술사 이의신이 한양의 기운이 쇠했으므로 명당인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자 광해군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신료들의 강한 반대로 천도가 추진되지 않자 궁궐 조성 사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끝이 보이지 않던 공사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중지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된 후 교동도로 유배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623년 3월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 핵심이 제거되고 빈자리에 이귀, 김류, 최명길 등 서인 공신들이 들어섰다. 선조 때부터 서인 강경파로 활동하던 이귀는 광해군 정권 때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반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귀는 아들 시백, 시방, 양아들 시담까지 모두 반정에 참여시킬 정도로 광해군 폐위에 모든 것을 걸었다.
후추(後?) 김신국은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국방 및 경제 전문가였다. 최명길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장유와 함께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최명길의 실리론적 견해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양명학이었다. 최명길은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42년 최명길은 명나라와 연락을 도모한 일이 청나라에 발각되어 임경업과 함께 봉성으로 압송되어 심양의 북관에 억류되었다. 1643년 4월에는 남관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이 김상헌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주화와 척화를 놓고 대립했지만 두 사람은 시까지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했다고 한다.
1644년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청나라는 조선과 명의 연결고리가 확실히 사라지자 1645년 2월 청에 인질로 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인조실록을 편찬한 주체 세력들이 대부분 척화론과 명분론을 중시한 사람들이었기에 같은 서인인 최명길을 크게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육(金堉)은 실물 경제 감각으로 성과를 보인 학자 관료다. 김육의 호는 잠곡(潛谷) 또는 회정당(晦靜堂)이다. 김육이 낸 큰 성과는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김석주는 숙종 시대 정치 공작의 달인이다.(김석주는 김육의 손자다.) 송시열은 실록에 삼천 번 넘게 등장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북벌 구상에 힘을 실어줄 인물로 선택한 인물이다. 1649년 송시열은 북벌론이 담긴 기축봉사를 올렸다. 다음 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이 속한 산당 세력 다수가 조정에서 물러났다. 송시열은 북벌 추진에는 무모함 때문에 소극적이었지만 청나라를 오랑캐라 인식하면서 언젠가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이적이라는 의식을 확고하게 해나가는 데는 핵심적이었다.
효종 시대 이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대명의리론이나 소중화 사상이 자리 잡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인이 소론, 노론으로 나뉜 것은 송시열이 제자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에 고인을 조롱하는 표현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층은 송시열에 맞서 소론으로 결집했다. 장희빈의 아들의 원자 정호(定號)로 인해 송시열은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노론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의 출산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원자 정호를 반대한 송시열은 제주로 유배를 간 상황에서 계속 숙종을 자극하는 상소문을 올린 끝에 한양 압송 명령을 받았다.
남인들이 거듭 송시열 처형을 요청했고 숙종은 정읍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다. 송시열은 올바른 길을 가려다가 죽는 것이니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파(自派)를 위한 길이 옳은 것이라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최석정은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소론 정치가다. 최석정은 수학, 천문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다. 이건창은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정리한 인물이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이 그것이다. 이건창은 1852년 조부 이시원이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개성 관아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의 생애는 강화에서 보냈다. 당의통략은 강화도에서 탄생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참모로 관료와 실학자라는 두 길을 걸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1762년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해다. 1767년 부친의 임지인 연천에서 살면서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94년 정약용은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등지를 암행하면서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경기 암행어사 시절 정약용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부정과 비리 사실을 직언하였다. 이는 정치적 고비마다 서용보가 정치적 고비마다 정약용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은 물과 인연이 깊은 학자다. 고향인 마현(현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물길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이고 유배지 강진도 바닷가가 바라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