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滿月)의 반대어는 휴월(虧月)이다. 이지러진 달이란 뜻이다. 절의염퇴(節義廉退) 전패비휴(顚沛匪虧)란 말을 떠올린다. 곤경에 처했을 때에라도 절개와 의리, 염치와 바른 물러남의 덕목을 어그러뜨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요즘 이 말 만큼 의미심장하게 여겨지는 말은 없다. 휴월은 때가 되면 만월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어긋난 관계는 돌이키기 어렵다. 아름다운 인연을 지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만남을 이어가는 분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를 먼저 보는 욕심을 경계하고 우리를 우선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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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경기도 연천이 초토화되었지요. 이런 곳은 직선 도로가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없어져 1차원(직선)의 새 도로를 만들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초토화(焦土化)의 초(焦)는 불에 타는 것, 그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수해를 당한 곳도 초토화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장의 묘(妙)를 샘물의 따뜻함, 불의 차가움, 돌의 결록, 쇠의 지남철과 같다고 본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1693 - 1737) 이상의 수사법인가 할 수 있겠지만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어를 쓰는 것이라 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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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사의 사유 - 장자와 철학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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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소요유(逍遙遊)가 말해진 시대는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삶의 기본 틀이었던 전국(戰國)시대였다. 법가적 세계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세계였다. 춘추시대의 그 많던 나라들이 하나둘 사라져 일곱 나라만이 남은 전국시대는 학파들의 시대였고 다양한 학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구축에 있어 특히 글쓰기의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했다.

 

소요유는 낭만적인 느낌보다 처절한 느낌 또는 저항적인 분위기로 다가온다. 장자의 사유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고투를 담고 있는 철학이다. 저자에 의하면 플라톤이 einai(~이다)와 dokei(~처럼 보인다)를 명확히 구분했거니와 철학의 역사는 einai를 찾아 헤맨 역사다. 장자의 사유는 화(化)의 사유로서 왜소화된 삶에서 탈주해 대붕이 되는 철학인 동시에 왜곡된 작위(作爲)에서 탈주해 자연(自然)으로 회귀하는 철학이다.

 

장자의 상대로 혜시(惠施) 또는 혜자(惠子)가 있다. 명가철학자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을 철학적으로 가장 멀리 밀고 나간 학파가 명가(名家)다. 명가철학자들은 처음으로 눈뜬 이 언어라는 것의 매력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때로 궤변이라 불리기까지 할 정도의 언어철학적 사변을 펼쳤다. 아쉬운 것은 이들이 언어에 대한 흥미로운 사변으로 나아가기만 했을뿐 현실로 다시 돌아와 뚜렷한 실천철학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철학은 아나바시스(상승)와 카타바시스(하강)의 오르내림을 통해 완성되거니와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카타바시스가 없었다. 저자는 지상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꿈속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시를 쓰고 궁극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형이상학을 한다며 우리에게 고향이 세 곳이나 있으니(갈 곳이 많아) 좋지 않은가, 말한다.

 

장자의 사유는 주체가 세계를 구성해내는 주체중심적인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주체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놓아버리는 사유다. 장자가 추구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앎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앎의 한계가 드러나고 그것이 비워질 때 돌연 나타난다.

 

장자가 추구하는 앎은 사물들의 세세한 이치를 알려고 하는 째째한 앎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의미 전체를 통관(通觀)하려는 너그러운/ 넉넉한 앎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세세한 이치들을 늘어놓는 수다스러운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 전체를 전하는 담박한 언어다. 장자의 파라 독사의 사유는 이율배반이 아니라 역설에 더 가깝다. 장자의 도추(道樞) 개념을 보자. 도추는 도가 이지러져 존재론적 분절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지도리는 문의 여닫음을 가능하게 한다. 문의 이쪽과 저쪽에 상반된 것들이 존재한다. 지도리에 서는 것은 문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도추는 유(有)와 유(有)의 가운데에 있는 무(無)이다. 이 무는 없음이기보다 아무것도 아님이다. 이 지도리에 섰을 때 무엇임들의 상대성이 보이고 그것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다. 어떤 능선도 아닌 산의 정상(문제)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산의 여러 능선들(’해; 解‘들)을 함께 볼 수 있다.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도추(道樞)란 사물의 상대적인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대립을 넘어선 절대적인 도(道)의 경지를 말한다. 도추는 양행(兩行)과 통한다. 성인은 시비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하늘의 가지런함에서 편히 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드러나는 것도 숨는 것도 아닌 은은한 빛남 즉 골의지요(滑疑之燿)이고, 도를 집요하게 사유할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도의 오묘함이다.

 

도는 지식으로써 끝내 소진할 수 없는 하늘곳간(천부; 天府)이고 보광(?光; 가려진 빛)이다. 장자는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면서 도/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환원론적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도를 품고 있는 사람은 빛을 함부로 직접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그 빛을 감춘다.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을 보라.

 

도의 경지에 설 때 어느 주관성이나 상대성에 머물지 않고 그 주관성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나이기 때문에 지도리에 서지 못하고 이미 나에게로 기울어진 입장을 갖는다. 도의 세계는 이 차이가 무화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로 향하려면 결국 나와 타인 사이의 도추에 서서 해들이 아니라 문제를 보아야 한다. 장자의 사유는 파라 독사의 사유다.

 

그것은 특정한 독사에 고착된 사유들을 해체하고자 하며 그러면서도 상대성에 만족하기보다 그것들을 보듬는 파라 독사의 차원을 응시한다. 때문에 그의 사유는 독사들이 갈라지는 지도리 나아가 현실성과 가능성이 갈라지는 지도리에 서서 사유하는 도추, 양행의 사유다. 장자는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고 공자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하려고 했다.

 

장자가 볼 때 공자는 안타깝고도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유가 철학이 중시하는 것이 인정(人情)이고 도가 철학이 극복하려는 것이 인정이다. 유교는 위타(爲他)의 철학, 장자의 사유는 위기(爲己)의 철학이다. 배움을 폄하해서도 안 되고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장자의 원래 생각이지만 그런 자연이 이미 왜곡되어 왜소화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날아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도는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다. 삶속에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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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 나르시시즘과 외로움
우즈훙 지음, 박나영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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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나와 터놓고 대화하기’라는 부제를 가진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은 나르시시즘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낸 책이다. 나르시시즘이란 1899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 폴 네케가 만들어낸 말이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을 4 단계로 나누었다. 1. 자신감의 단계. 2. 오만함의 단계. 3. 의심병 단계. 4. 망상 단계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기본적 나르시시즘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내면의 메시지가 자아를 산산조각낼 수 있기에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다. 저자는 세상이 아와 비아가 아닌 나와 나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상대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 상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능감은 환상이 아닌 활력의 원시적 표현이라고 말하며 전능한 나르시시즘과 이성이 조화롭게 결합된 자신의 인간성을 디자인하라고 조언한다.(전능감은 성장하면서 공격성, 성, 애착 등 다양한 활력 표현으로 진화한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에서 배려가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 심리상담사를 찾아간 내담자 중 상담사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상담사의 이야기와 그들의 원래 이해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에서 관계의 차원으로 나아가라. 내가 옳다는 나르시시즘은 관계를 깨트린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과도한 나르시시즘 및 편집증과 연결된다.

 

내면의 나르시시즘을 인식하고 마음속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다면 아름다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저자는 몰입하는 데 두려움을 갖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몰입의 최대 가치는 득실에 있지 않다는 말을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불태우되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관계는 껍데기일뿐이다. 그러므로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드러낼 용기와 마주 설 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자기 성장은 완벽함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을 갖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자신감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나르시시즘은 천성이고 진정한 자신감은 어떤 조건과 상관 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거만함과 자신감은 다르다. 자신감은 진실한 관계에서 나타난다. 인생은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한다. 이후에는 끊임없이 나르시시즘을 깨는 과정이 필요하다. 네가 존재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설정이 관계의 본질이다.

 

저자는 한 방울의 은혜도 용솟음치는 샘물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는 지나친 예의를 경계한다. 주의할 것은 창의력을 측정하는 기준 중 하나는 모호함을 용인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하나의 가설이다. 자신의 연역함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처럼 상대방의 연약함도 배려해 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관계의 시스템에 윤활유가 된다.(감정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끈질기게 상대의 사과에 집착한다는 말을 기억하자.)

 

사랑을 얻으려면 자아는 때로 죽을 수 있어야 한다. 희생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다.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기보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양보한다는 의미다. 관계에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열을 둘러싸고 다투고 높은 자리에서 통제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르시시즘과 권력 추구는 근본적으로 지배하려는 데서 오는 초조함을 반영한다.

 

저자는 모든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묘한 심리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상대가 너무 훌륭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우월감이 손상되지 않고 상대를 쉽게 통제할 수 있기 위해서다. 상대가 부족해야 나를 쉽게 떠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잘 보살펴야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진실한 자아가 형성된다. 저자는 그리스가 최초로 민주주의 과정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로 쉽게 떠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이 있었기 때문임을 말하며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라는 말을 던진다.

 

저자는 그리스 주변에 에개해와 많은 섬, 지중해 건너의 넓은 지역이 있었다고 말한다. 산악 지형인 그리스에서 자기 의지가 실현되지 않으면 삶의 터전을 옮길 수 있었고 그런 이유로 마련된 탈출 공간이 존재함으로 인해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민주주의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206 페이지) 반면 이런 주장도 있다. 농업 기반이 제한된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모든 사회 활동을 집중시킬 수 있는 권력과 부를 축적할 수 없었기에 작고 독립적인 도시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이곳에서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이 양성되었고 수준 높은 토론 문화가 생겨났다는 주장(정인경 지음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 46, 47 페이지)도 있다.

 

저자는 사랑을 내세워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 것을 주장한다. 사랑하기는 쉽지만 함께 지내기는 어렵다. 첫눈에 반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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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낭(䧻囊)폭포라고 하면 어리둥절 하겠다. ()은 비둘기를 의미하는 한자다. 비둘기를 뜻하는 한자로 구()가 있다. 전서구(傳書鳩)란 말에 쓰인다. ()은 낯설지만 비둘기를 뜻하는 쉬운 글자다. 유득공의 '발합경(鵓䧻經)'이란 책이 있다. 은 집 비둘기 발이고, 은 비둘기 합이다.

 

흥미로운 점은 비둘기에 관한 책에 경()이란 글을 붙인 것이다. '장자(莊子)'에서 소잡는 일 즉 해우(解牛)하는 포정(庖丁)이란 사람의 행위가 기()가 아닌 도()에 견주어진 것을 연상하게 한다.

 

비둘기낭 폭포를 두고 이러니 저러니 하고 말았다. 비둘기 주머니 폭포라 하면 길고 합낭 폭포라 하면 뜻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합()이란 말보다 훨씬 익숙한 재인이란 말도 한자로 표기(才人)하지 않으니 묻는 사람이 있다.

 

才人으로 표기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재인(才人)이라 해도 물을 사람은 있을 테다. 주머니를 뜻하는 글자로 포()가 있다. 주머니뿐 아니라 꾸러미, 보따리, 봉지 등도 뜻한다.


그러니 합포폭포가 어떨까? *~포란 형태로 인해 비둘기낭 폭포보다 훨씬 리듬감이 있다. 설명이 필요한가? 비둘기낭 폭포라 해도 연원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름이든 누군가 지은 것이다.

 

나라면 합포폭포라 이름지었을 것이다. 아니면 발음 편하게 발포폭포(鵓包瀑布)라 했든지재인(才人)폭포도 재인이 백정(白丁)과 통하는 말이니 백정과 하나의 뜻을 공유하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포정(庖丁)을 써서 포정 폭포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포* ~포 형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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