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학자, 조식
허권수 지음 / 뜻있는도서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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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 - 1572)을 안 것은 2009년 나온 한형조의 ‘조선 유학의 거장들’을 통해서였다. 칼을 찬 유학자라는 점이 이례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조용미 시인의 ‘탐매행’이란 시에서 남명매(南冥梅)란 말을 들었다. 남명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로 유명한 분이다. 대비 문정왕후를 과부, 그의 아들인 임금 명종(明宗)을 일개 고아로 표현한 부분이 있는 글이다.

 

때는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일으키는 분탕(焚蕩) 패악질이 극에 달한 때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황, 2년 연상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직언을 하지 못한 가운데 단성현감에 제수(除授)된 조식은 죽음을 무릅쓴 사직 상소를 올렸다.(단성은 조식이 태어난 경남 합천에서 가까운 곳이다. 조정에서 조식이 벼슬을 사양하지 못하도록 삼가현과 가까운 단성현 현감 자리를 내린 것이다.) 사직이 죽음을 무릅쓸 일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의 폐단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으로 인해서였다는 말이다.

 

조식은 임금dl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집 짓는 목수가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은 바 인재를 등용하려는 전하의 큰 은혜를 감히 독차지 할 수 없다고 아뢰었다. 조식은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느냐, 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냐, 문장을 잘 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조식은 문장을 잘 쓴다고 꼭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고 도를 지닌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다고 말했다.

 

전하는 물론 정승들 또한 신의 능력이나 사람됨을 잘 알지 못하는바 그 사람됨을 모르면서 등용한다면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될 것으로 그 죄가 어찌 보잘 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나는 을묘사직소에서 가장 준엄한 부분은 과부, 고아 운운한 부분이 아니라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덜려 있습니다란 말이라 생각한다.

 

조식은 명종에게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판단하는 일이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안(代案)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은 신하들이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여 조식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끝내 바른 말을 한 조식을 공손하다고 여기지도, 옳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부분은 경연의 시강관으로 있던 정종영의 말과 사간원정언 이헌국의 말이다. 정종영은 조식은 세상에 숨어 사는 인물인지라 성격이 소탈하여 예를 차릴 줄 몰라 그런 것이니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태도를 책망하기보다 물러나려는 욕심 없는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조식 같은 사람은 세련되지 못했고 옛 사람들의 책만 읽었으므로 말을 바르고 곧으나 문채(文彩)가 없으나 어려서부터 책을 읽은 사람인데 어찌 군신간의 의리를 모르기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헌국은 구양수가 황태후를 아낙네라고 했으나 벌을 받지 않은 송나라의 사례를 아울러 언급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는바 조식은 질(質)이 문(文)을 압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인 한편 성성자(惺惺子)라는 쇠 방울을 차고 다닌 분이기도 하다. 조식은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1519년 19세의 조식은 기묘사화를 목도한다. 조광조를 비롯 현사(賢士)들의 부고를 들은 조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벼슬살이가 험난할 것이라 느꼈다.

 

조식이 평생 벼슬하지 않는 데에는 가장 절친한 벗인 성운(成運)의 형 성우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영향이 컸다. 조식은 원나라 유학자 허영의 글을 읽고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의 학문을 모본으로 삼아 벼슬에 나아가서는 경륜을 펴서 업적을 이루고 초야에 있을 때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 아무 하는 일도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란 글이다.

 

조식은 강직(剛直)했던 유학자다. 그는 아버지의 묘갈명을 쓰며 나의 아버지에게 일컬을 만한 덕이 없는데도 장황하게 미화한다면 그 글은 아첨하는 글이니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했다. 조식은 낮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길지 않은 시간 깊이 자는 것으로 정신을 맑게 유지했다. 조식은 제자들에게 한 구절 구절 자세히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한 문장, 한 문장 뜯어가며 읽지 않고 마음으로 글 전체의 큰 뜻을 터득하고자 읽었다.

 

조식은 학문을 하는 목적은 낱낱의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식견을 높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견을 높이면 태산에 올라섰을 때 사방의 높고 낮은 산이 다 눈에 들어와 지형을 정확하게 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자가례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조식은 바다와 관련이 큰 사람이었다. 산해(山海) 선생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산해정(山海亭)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남명(南冥)은 장자(莊子)에서 취한 호로 남쪽의 아득한 바다를, 나아가 남녘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대붕을 뜻한다. 그가 거처하던 방은 계명실(繼明室)이란 이름을 가졌다. 옛 현인들의 밝은 덕을 계승하여 사방에 펼친다는 의미를 가진 방이다. 그의 시기는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 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 - 45세), 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산 시기(48 - 61세), 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 - 72세)로 나눌 수 있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 본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뇌룡사(雷龍舍)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의미로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림을 뜻했다. 산천재는 주역의 산천대축(山天大畜)에서 기인한 이름이다. 조식은 산천이라는 말을 통해 강건하고 독실하게 공부해 크게 덕을 쌓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해도 힘껏 제자를 길러 훗날에 큰 덕이 쌓이기를 기대했다. 조식과 이황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편지를 주고받았을뿐 일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은 기질이나 학문적 경향이 달랐다. 조식은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조식이 다른 사람은 권세를 자랑한다면 자신은 학문과 지조로써 긍지를 갖겠노라고 한 것을 언급하며 형식만을 위한 형식은 있을 수 없지만 내용을 담은 형식은 필요한 것이라 덧붙인다.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이기를 장차 사람을 해칠 사람으로 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학문에 대해 물어오자 병이 많아 한가하게 지내면서 요양이나 하고 있을 뿐으로 의리의 학문에 대해서는 공부한 것이 없다고 답한 것을 일러 조식이 아무리 학문을 좋아해도 사람 같지도 않은 자와 무슨 학문을 이야기하겠는가?란 말로 설명했다.

 

본문에는 조식의 절친 청송(靑松)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 이야기도 나온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백악산 자락에 청송당을 짓고 숨어들었다가 파주로 간 사람이다.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성수침, 성수종, 백인걸, 성혼의 위패가 모셔졌다.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이 많이 나왔다. 가장 먼저 기의(起義)한 사람이 조식의 외손녀 사위였던 곽재우다. 1558년 58세의 조식은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진주 목사로 있었던 김홍, 자형 이공량(李公亮), 고령현감을 지낸 벗 이희안,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李楨) 등과 함께. 고려 인종(재위; 1122 - 1146) 때의 은자(隱者) 한유한(韓惟漢)이 살던 삽암이란 곳이 나온다.

 

삽암은 꽂힌 바위라는 의미다. 섬진강가의 이곳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석각(石刻)이 있다.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곳이라는 대(臺)다. 조식의 실천 위주의 삶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식은 자신이 사는 삼가현은 산세가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하고 거처를 옮기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10여 차례 찾았다. 조식은 장중한 사람 즉 어진 사람으로 정적인 산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민첩한 사람이기에 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

 

조식은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으면 천 년 만 년 썩지 않고 자기 이름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놓은 것이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다면 사관이 역사책에 기록할 것이고 넓은 땅 위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할 것이다. 그런데 쩨쩨하게 날다람쥐나 살쾡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고는 없어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새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다.”

 

조식은 “산에 들어온 사람 중에 누가 그 마음을 깨끗이 씻지 않겠는가? 또 누가 스스로 소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잠시 마음을 씻는다고 해서 소인이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란 생각도 했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일뿐 단기간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조식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유 있게 유람이나 하는 자신을 겸연쩍게 여겼다. 물론 선비들에게 유람은 단지 먹고 노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좋은 경치를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다. 그리고 스승, 제자, 벗들의 학문적 태도와 삶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조식은 산천재의 왼쪽 벽에 경(敬)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벽에 의(義)자를 써 붙였다. 경은 내면의 수양 방법이고 의는 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 원칙이다. 조식은 하늘에 닿아 있는 지리산 천왕봉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봉을 스승으로 여겨 배우고자 했다. 조식은 덕천강도 스승으로 삼았다. 조식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폐백(幣帛)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 가운데 정탁(鄭琢)이 있다. 윤원형의 악행을 서슴없이 탄핵한 사람이고 원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의 무죄를 밝혀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만 몰두한 문약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선비로서 병법을 모르면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주장한 그는 병법에도 정통했다. 문무를 함께 갖추어 밖으로 나아가서는 무장이 되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세상을 구할 사람이었다. 조식은 황진이도 만났다. 조식은 임꺽정이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위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홀로 가만히 앉아 눈물을 흘렸다. 선량한 백성들을 도적떼로 내모는 현실을 탄식하는 한편 근본 원인을 찾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벼슬아치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조식은 젊은 문인들이 공허한 말장난을 하는 쪽으로 공부 방향을 정해가는 것에 이황의 책임이 크다고 느꼈다. 조식은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쇄소응대의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책에는 동서 분당(分黨) 이야기도 나온다. 동인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한 것이다. 서인은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한 것이다.

 

조식은 친구 이준경이 영의정에 오르자 출사할 생각을 가졌다. 조식은 경의(敬義)를 주로 하여 지식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성리학 외에도 천문, 지리, 산술, 병법 등을 깊이 연구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조식은 스스로 벼슬길에 나서려고 설레발을 치며 부산을 떠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학자에게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올바르게 수양한 후 백성을 교화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이양소(李陽昭)가 고려,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할 수 없어 친구 이방원의 부름을 거절한 것과 달리 강회백(姜淮伯)은 두 왕조에서 벼슬했다. 이에 조식은 강회백이 심은 매화(정당매; 政堂梅)를 보고 어제 꽃을 피우더니 오늘도 또 꽃을 피웠다고 했다. 변절을 풍자한 것이다. 조식은 학문의 근본이 선 다음 여러 가지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부터 이것저것에 관심을 쏟다 보면 올바른 학문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조식과 이황에게서 배운 정구(鄭逑)의 학문은 제자 허목에게로 이어졌다. 허목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와는 달리 원시유학의 육경을 중시했다. 이런 학풍은 이익, 정약용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을묘사직소(1555년) 이후 11년만에 조식은 다시 명종의 부름을 받고 임금을 만나 명종이 능동적으로 정치를 펼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지리산 덕산동으로 돌아왔다. 조식은 한 인사가 그릇된 이기론을 펼치자 지인에게 자신은 평생 다른 기술은 없고 다만 책 읽는 일만 했으니 입으로 성리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보다 못할까만은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라고 말했다.

 

조식은 분신처럼 아낀 정인홍에게 평소 차던 경의검(敬義劍)을 물려주었다. 조식은 ”정인홍이 있으면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5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식의 문인들은 물론 자신의 제자들을 의병에 참여하도록 해 충의를 실천했다. 조식은 은거하면서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을 잠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조식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이 사화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그들과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간 것은 간신들의 탓이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시대의 기미를 보고 출처(出處; 나아감과 물러남)를 바로 하지 못한 데에도 그 원인이 없지 않다고 보았다.

 

조식은 곽재우에게 유학자로서 읽어야 할 경서와 함께 병법에 관한 책도 두루 읽게 했다. 조식은 ”학문을 통해 세상을 구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자신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했다. 조식은 인재 등용은 임금이 직접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이 자신을 닦는 수양이 부족하면 자신만의 저울도 거울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식은 임금의 덕을 밝히지 않은 채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배도 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조식은 전하(선조)께서 만약 신의 말을 버리지 않고 관대하게 받아들인다면 신은 전하의 용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바 어찌 신의 늙고 추한 모습을 만나 본 후에라야 신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 또한 전하께서 만약 신이 한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신을 만나려고 한다면 헛일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조식은 출처의 절조를 중요시하여 임금이 아무리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식은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처사(處士)를 자처한 조식에게 정3품 대사간을 추증했다. 평소 조식에게 맡기고 싶어했던 관직이다. 조식은 저술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대상이 되었다. 대원군은 문묘에 배향되었거나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인물을 모신 서원이나 사당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을 모두 없앴다, 조식의 문묘 종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제자 정인홍이 처형당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회퇴변척(晦退辨斥)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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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强硬)해야만 제대로 공부한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논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자신이 옳다는 무근거의 믿음에 기반해 "실천하지 않으면 공부가 헛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저격(狙擊)에 동참할 것을 강권(强勸)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책임하다고 몰아붙이며 나서지 않는 이들의 공부를 무익한 열정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이론과 실천이 대립하는 항목이 아님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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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견 -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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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전쟁에 대한 흥미를 돋우웠다. ‘전쟁의 발견’은 그 연장선상에서 접하게 된 책이다. 물론 고구려 이야기에 관심을 모을 이유는 없다. ‘한국 고대사의 재구성을 위하여’란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책은 신라, 왜, 백제, 고구려의 전쟁 이야기와 전쟁 일반에 대한 논의를 담았다. 저자 이희진은 한국사를 전공한 분이다.

 

저자에 의하면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치의 연장이다. 저자는 전쟁의 역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역사가들 때문에 조상들이 바보로 몰린다고 말한다. 고대사의 전쟁과 현대사의 전쟁은 다르다. 고대 전쟁에서는 전 국토를 방어한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城)을 위주로 한 전략 거점을 집중 방어하고 나머지 지역은 유사시 방어하는 형태의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전은 성벽 대신 지하 요새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는 전략차원의 재고를 쌓아놓을 수는 있지만 자원의 소모 속도가 근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기에 전투에서 그 많은 탄약, 연료, 장비 등의 수요를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전은 수송망과 통신망을 지키기 위해 영토 전체를 지킨다는 발상이 일상적이다. 적이 영토 안으로 진입해 자국 수송망이나 통신망을 마음대로 휘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한국 고대 국가의 전투에서 동원 병력 규모는 대개 수천 명이다. 기록상 최대 규모는 백제가 4만, 신라가 5만, 고구려가 10만이다. 당시에는 동원 병력 자체가 현대전과는 달랐다. 고대에는 방어는 고사하고 모든 전선에 병력을 배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전투는 전선이 아닌 전략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공성(攻城)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농성(籠城)은 성을 지키는 것이다. 시위(示威)대들이 한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을 비유하는 점거 농성이란 말이 기억난다. 고대 전쟁의 주력은 보병과 기병으로 나눌 수 있다. 보병은 대열 유지가 생명이다. 기병은 정찰과 돌파가 주요 임무다. 한국 전쟁사에서 기병의 비중은 적다. 개활지(開豁地; 탁 트인 공간)가 드물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라와 왜의 전략적 차이를 이야기한다. 신라에게 왜는 큰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이 아니었다.

 

국운을 걸고 장악해야 할 만큼 노력과 희생을 치를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의미다. 왜군은 주로 변경을 약탈하는 전략을 썼다, 신라는 고대 전쟁의 일반적 양상인 전면전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왜가 오랜 세월 주도권을 잡았던 것처럼 보인 것이다. 왜는 신라 성을 함락시킨 경우가 드물었고 함락시켰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빼앗겼다.

 

성의 소재지인 산 자체가 천연 요새이기 때문에 공격측에서는 평지 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공성전에서는 대체로 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포위만 해놓고 성안 물자가 떨어져서 방어측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게 바로 지리적 특성의 영향이다. 물론 농성은 방어에 유리한 대신 활동 범위에 제약을 받는다.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물자가 떨어져 아예 생존 자체에 위협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웠던 것이다. 청야 전술(淸野 戰術)이 있다.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전쟁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헌 자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4~5세기 야마토 왜는 수수께끼의 대상이다.) 그들이 4세기 이후 급성장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왜를 몰아내기 위해 5만 대군을 투입했다는 광개토왕릉비문(기록)이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왜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일본서기’에도 수백 년 넘게 이어져왔어야 하는 고구려와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식 시각에서 보면 당시 고구려가 가장 많은 분쟁을 빚은 나라는 백제였다. 4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분쟁은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자주 나타난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부를 만큼 증오심이 강하게 나타났다. 저자는 전쟁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이상하게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손자병법’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 있다. 싸우지 않고 상대가 가진 자원을 고스란히 차지할 수 있는데 굳이 상대를 박살내야 직성이 풀린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전략가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격언이 강조되는 이유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격변기에 활약했으면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을 찾아 실행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 점이 마한과 가야를 동시에 정복하면서 고구려와도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이유다. 백제의 고유 역사서가 사라진 지금 남은 기록만으로 근초고왕의 업적과 의도를 총체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4세기의 역사는 왜곡되었다. 강력한 고구려 세력에 맞서 남방에 반(反) 고구려 세력권을 형성한 중심이 마치 야마토 왜였던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신라와 왜의 전쟁 부분만 따로 떼어내 보면 퍼즐의 일부분만 보고 전체 그림을 제멋대로 그려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광개토왕이 즉위할 무렵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백제와 고구려가 양축을 형성했다. 백제는 혼자가 아니라 유사시 가야와 왜까지 조정 가능했다.

 

광개토왕 즉위 이전 시기는 백제는 근초고왕에서 근구수왕대에 해당한다. 고국원왕(광개토왕의 할아버지)대의 고구려는 남과 북의 적에게 줄곧 당하기만 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도 잠재력이 있는 나라였다. 나름의 반성과 재정비 시기를 거쳐 재기했다. 광개토왕대에 그럴 수 있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팽창을 막기 위해 반 백제 세력을 규합했다. 고구려와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신라가 고구려에 접근해 얻은 결실 중 하나는 내물왕 22년 신라 사신이 고구려의 소개로 전진(前秦)에 간 사건이다. 신라는 고구려 덕분에 국제무대에 데뷔한 셈이다. 당시 국제관계에서 중국과 교류한다는 것은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광개토왕이 왜를 의식해 5만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121 페이지) 남방의 백제는 물론 북방의 연(燕)나라도 염두에 두어야 했던 고구려가 이해관계가 맞은 신라를 침공하는 왜를 물리치기 위해 5만 병력을 동원한 것은 왜가 강해서가 아니라 속전속결을 염두에 둔 결과다. 저항 못할 대군을 동원한 것이다.

 

‘백제 멸망의 비화’라는 부제를 가진 ‘편견으로 얼룩진 전쟁‘에서 저자는 의자왕 이야기를 한다. 의자왕은 한때 중국측에 의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렸던 왕이다.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잘 섬기고 형제들 우애도 보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공자 만년의 제자로 이름이 삼(參)이었던 증자는 중국의 사상가이다.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仁)이란 말을 한 사람이다. 저자는 백제군이 최소한 백강(白江) 지역에는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언급한다.

 

백강은 부여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백제가 백강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아 나당 연합군이 이 지역을 쉽게 통과했다는 말은 허구인 것이다. 삼국사기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의해 쓰인 삼국사기는 왜곡도 불사했다. 도덕성으로만 세상을 판단하면 기본적으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신라의 시각으로 쓰인 역사서다.

 

고구려의 역사를 잇는다고 자처했던 고려 시대에 쓰인 역사서이지만 고구려를 비난하는 내용이 은근히 많다. 훈요십조에서부터 역적의 땅이라고 비난했던 백제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당연합군의 기본 전략은 당나라 군대는 서해안을 따라 해로로 진격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진격하였다가 백제 수도인 사비에서 합류해 공격하는 것이었다.

 

당과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나라 군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고구려를 통과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나라가 백제에 군대를 투입하기 위해서는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보급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라군이 그 역할을 했다. 이런 전략은 백제 멸망 이후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1900척의 배로 13만 병력을 수송했다. 당나라는 후에 고구려 정벌 시에 신라가 보급에 적극적이지 않자 시비를 걸었다. 단순 비교는 무리이지만 현대전에서는 통상적으로 전투부대보다 지원 병력의 비중이 크다.

 

나당연합군이 같이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해로를 이용하는 것과는 격이 다르다. 배로는 며칠 버티기에도 곤란한 수준의 보급품 밖에 수송할 수 없어서 나머지 물량은 육로를 이용해 운반해야 했다. 백제는 결국 나당연합군의 백강 상륙을 막아내지 못했고 김유신 부대가 육로로 진입하여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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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만나는 고구려 답사 길잡이 - 2012 아침독서 추천도서
윤명철 지음 / 대원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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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농경문화만을 영위한 것이 아니다. 길림 이북의 초원에서는 농사와 함께 유목을 했고 삼림 지대에서는 수렵을 했다. 바다에서는 어업과 교역을 했다. 고구려는 대륙과 초원 반도와 해양을 포함하는 지중해적 성격의 대국가였다. 고구려는 다종족적, 다문화적 국가 즉 제국 지향적 국가였다. 고구려는 성(城)을 뜻하는 구루라는 말 앞에 고(高)를 붙여 고구려라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수왕 대에는 높고 아름답다, 한가운데 등의 의미를 갖는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1972년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에 구려태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초원의 유목민이었고 숲속의 사냥꾼이었으며 들판의 농사꾼이면서 바다를 항해하는 해양민이며 상인이었다. 주몽은 건국하자마자 송양이 다스리는 비류국을 정복하고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했다.

 

고구려가 무려 700년 동안 강국으로 존속한 것은 정신력, 국가 시스템, 기술력 등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지만 직접 영향을 끼친 것은 군사력이다. 활과 긴 창을 든 채 말 위에 올라앉은 중장기병들, 고구려의 맥궁과 장창을 든 경기병들, 갑옷과 투구를 쓴 보병들이 있었다. 수나라 100만 대군을 막아낸 성은 평야에 자리한 성이었고 당 태종의 10만 친정군을 격파한 안시성은 둘레 4km에 해당하는 야산의 토성이었다.

 

고구려 성들은 일본, 유럽 등의 성들과 달랐다. 지배 계급만을 위해 좁은 면적을 강하고 화려하게 쌓은 거성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성주와 군인들, 일부 백성들이 거주하면서 행정공간, 문화공간의 기능 즉 거대 도시 역할을 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주위 모든 사람들이 성 안으로 대피하여 전면전을 벌였다. 모든 고구려 성은 방어 기지이자 전진의 거점이었다. 치(雉)는 평평한 성벽의 곳곳에 적을 공격하는 면적을 넓히기 위하여 성의 일부를 네모나게 돌출시켜 만든 시설물이다.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100미터 정도의 화살의 유효 사거리를 감안해 만들었다. 성가퀴는 여장(女墻), 치첩(雉堞)이라고도 한다. 고구려는 중국과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중국 문화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농경문화를 수혈 받는 지역이 서역의 일부와 남쪽이었다. 고구려는 서역 및 북방 초원 그리고 대삼림 지대의 문화를 수용했으므로 경제 형태도 다양하고 이동성이 강했다.

 

고구려가 망하자 만주 지역의 비중 있는 문화적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는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매우 개방적이었고 세계 보편적이었다. 이미 주몽 시대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개마(鎧馬) 무사들이 있었다. 중무장한 철기병들이다.(鎧; 갑옷 개) 온돌은 고구려인들의 발명품으로 본다. 만주 일대에서 유적을 발굴하다가 온돌이 나오면 고구려 또는 발해 유적으로 판단한다.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환인이다.

 

요령성 환인현 혼강 가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서 천지(天池)라는 연못이 발견되었다. 식수원이자 신앙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는 집안(集安)이다. 고구려 최대의 고분이 있는 무던 도시인 집안 지역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나 접근이 어렵고 대피가 가능한 천혜의 요새로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던 곳이다.(만주는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내몽골 자치주 동쪽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불편한 점이 있지만 그런대로 교통의 요지였다. 압록강 수로를 이용해 황해로 진출하면서 해양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던 곳이다. 집안의 국내성은 천연의 배산임수의 천연 요새였다. 국내성은 몇 번 파괴되기는 했지만 427년 장수왕에 의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400년간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만든 산실이자 성장의 둥지였다. 압록강은 국내성의 국경이 아니라 궁성을 방비하던 큰 해자이며 한강처럼 수도 앞을 흐르는 강이었다.

 

집안 분지(盆地) 전체가 큰 나라의 심장 구실을 하면서 곳곳에 생명의 피를 공급해주고 머리가 되어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고 나라의 온갖 근심을 안아주던 품이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고로봉식 산성이란 포곡형으로 정상과 절벽, 능선과 골짜기의 선을 그대로 활용하여 허약하고 부실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돋워 올려 토성화한 형태다. 국내성 동쪽 들판 한 가운데에 커다란 돌덩이가 의연히 서 있다. 장수왕이 부왕 광개토왕이 붕어(崩御)하고 2년째 되던 414년에 세운 광개토왕릉비다.

 

동양에서 가장 큰 금석문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업적뿐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발전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 내지 좌표인 셈이다. 첫 머리에 주몽이 역사에 등장하는 과정이 신화 형태로 기록되었고 그 외 비를 세운 경위,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 점령지 묘사, 영토(領土), 순수(巡狩) 사실, 수묘인(守墓人)들에 대한 기록 등을 나열했다. 1877년 비가 발견되었다. 청(淸)이 만주에 대한 봉쇄 조치를 푼 이후의 일이다. 집안은 만주족인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거주금지지역으로 정한 곳에 포함된다.

 

당시에는 비석만이 있었으나 1928년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 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1982년 중국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장수왕이 비를 세운 데에는 옛 영토를 회복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다. 비는 장수왕의 국정 지표를 밝히는 선언문이기도 하다. 비에서 북서쪽으로 300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왕릉이 있다.

 

천손(天孫) 민족을 표방한 고구려인에게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나 지하 공간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늘<천; 天>을 재현한 것이다. 성숙도를 비롯한 천계도가 그려져 있고 천조(天鳥), 새를 탄 천왕랑, 기린마(麒麟馬), 천마(天馬), 비어(飛魚) 등 하늘과 관련된 성수(聖獸)들이 집요할 정도로 다양하고 많이 표현되어 있다. 고분은 또한 고구려인들의 우주관, 역사관을 표현하고 있다. 고분 안을 하나의 우주로 설정하고 축조 양식을 활용한 공간 분할을 시도했다.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를 구분했고 각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를 설정하였다.

 

그들은 주체와 대상체를 하나로 인식하는 태도를 가졌다. 인면조(人面鳥), 일각수(一角獸) 등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존재가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신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한 그림이 나타나기도 한다. 벽화는 완벽함과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상상의 세계를 표현했고 현실 세계도 지극히 상징적이고 추상적으로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주제가 많고 사람들을 소재로 했을 경우에는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활이나 창 등의 무구(武具), 무사들의 마사희(馬事戱), 수박희(手拍戱), 행렬도(行列圖), 외유도(外遊圖) 등을 그렸다. 표현 소재들의 공통 특징은 정지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수렵도, 씨름도, 역사 등 현실적 주제를 화려한 색상과 거침 없는 붓으로 역동성 있게 표현했다. 인물, 꽃, 신수(神獸) 등은 대부분 움직이고 있다.

 

이는 사물과 사건은 운동한다는 인식을 반영한 결과다. 운동의 표현들은 직선이 아닌 원, 곡선, 유선형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역사(力士)마저도 곡선을 주조로 처리하여 역동성을 표현했다. 이는 고구려 문화의 역동성이 단순한 운동량의 증가나 힘의 과시가 아니라 정제된 목적 지향의 성숙한 질적인 역동성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니라 문화국가였다. 무덤<총; 塚> 형태 중 위로 올라갈수록 층을 이루면서 좁아지는 구조를 궁륭식이라 한다. 집안시 외의 동쪽 외곽인 하해방촌의 모두루 무덤의 묘지명은 광개토왕비문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당시 고구려인들의 공통 인식을 알게 한다. 신의주와 맞닿은 곳이 단동(丹東)이다.

 

압록강은 국내성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동강이 평양성을, 한강이 한성을 방어하는 해자 역할을 한 것처럼. 압록강변의 군사시설은 방어와 진출이라는 2중의 목적을 실헌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성(城)에서 시작해 성에서 운명을 다한 나라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성을 뜻하는 구루에서 왔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고구려에게 성은 정치공간이자 생활공간, 경제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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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의 나라 - 7백 년의 동업과 경쟁
서영교 지음 / 글항아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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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수렵민족이었다. 유목민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수렵민족은 사냥을 해 먹고 살았고 때로 약탈을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유목민이 인류사에서 위대한 발명을 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유목민 기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양이나 소는 길들이기만 하면 되었지만 말, 개, 낙타는 길들여야 할 뿐 아니라 훈련도 시켜야 한다. 태생적으로 수렵민은 유목민보다 더 거칠고 싸움을 잘했다.

 

유목민들은 목축(牧畜)으로 즉 가축을 길러 먹는 것으로 살았지만 고구려인들은 움직이는 짐승들을 사냥해야 했기에 더 힘들었다. 유목민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다. 유목민들은 유목과 수렵을 겸한 경우가 많아 유목수렵인이라 말해도 좋다. 유목민의 수장이 중국인에게 대우를 받은 것은 그들이 보유한 기병 때문이었다. 고구려인들은 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전투능력을 길렀다.

 

고구려인들은 정기적으로 초원으로 나아가 유목민의 가축을 몰아오거나 중국인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흉년이 들거나 사냥이 잘 되지 않을 때 그랬다.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도 유목민이 아니라 수렵민 출신이었다. 고구려는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할수록 힘이 강해졌다. 전쟁과 정복으로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강제 입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 낙랑인, 북중국인, 동예인, 옥저인 등을 병력으로 동원한 다문화 국가였다. 고구려는 유목민들과의 동업과 전쟁을 통해 배우고 성숙해져갔다. 고구려와 유목민들은 일방적인 지배 - 피지배 관계 또는 착취 - 피착취 관계가 아니었다. 고구려는 유목과 농경의 점이지대에 위치해 두 측면을 배울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는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는 글로 시작한다. 주몽이 길을 떠났다는 것은 부여의 왕자들의 추격을 받고 도망친 것을 말한다.

 

추모왕(주몽)은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의 지류인 비류수(沸流水)가에 자리 잡았다. 22세의 일이다. 고구려의 모체가 된 사건이다. 고구려 군대는 사냥을 위한 조직이나 다름 없었다. 고구려군은 야전에서 사냥을 통해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냥은 가장 자연스러운 군사 훈련이었다. 고구려인들은 호전적인 한편 웃음을 즐긴 사람들이었다.

 

낙랑의 문화는 고구려의 묘제에도 큰 변화를 줬다. 낙랑이 병합된 이후 고구려에 거대한 봉토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무덤의 방을 벽화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가 여기서 탄생했다. 낙랑인들은 단검이 아니라 장검을 사용했다. 고구려와 삼한인들은 처음에 청동단검을 알고 있었지만 철제장검은 몰랐다. 단검은 가까이 다가가 찔러야 하지만 장검은 더 먼 거리에서도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전투 양상이 바뀐 것이다.

 

고구려 15대왕은 미천왕(美川王)이다. 소금 장수 출신이다. 생전 이름이 을블(乙弗) 혹은 우불(優彿)이었던 그가 미천왕이라 불리는 것은 유해가 미천원(美川原)이란 언덕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인 고구려 광개토왕, 신라 진흥왕 못지 않은 영광스런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묘가 도굴되는 비운을 겪었다.

 

선비족이 건국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 군사에 의해 도굴된 것이다. 미천왕의 아들이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다. 고국원왕은 평양을 침입한 백제 근초고왕 군대에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전사했다. 장지가 고국원이란 들판이기에 고국원왕이라 불리는 것이다.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이 죽음으로써 고국양왕이 왕이 되었고 후에 아들 담덕이 광개토왕이 되었다.

 

광개토왕은 즉위 두 달만에 임진강 남쪽의 백제 성인 석현성을 공격했다. 광개토왕의 백부(소수림왕)와 아버지(고국양왕)은 황해도 지역의 백제의 요새를 하나 하나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백제를 잠식하려고 했다. 하지만 광개토왕은 바로 임진강 선을 돌파해 백제의 수도권으로 진격했다. 391년의 일이다.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해 39세에 죽을 때까지 전쟁을 해야 했다.

 

그는 한시도 쉴새 없이 남쪽의 한강과 북쪽의 요하(遼河) 사이를 오가며 사력을 다했고 젊은 나이에 과로로 죽었다. 414년에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왕릉비를 세웠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위치한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미터 지점에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이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는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말을 했다.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를 초래하는 나라는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 결과로 획득한 영토 확장으로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다.“ 문제는 확장한 영토를 어떻게 활용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남진을 추구했다. 고구려에게 말은 아주 중요한 전쟁 병기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달의 아내 평강공주는 좋은 말을 선택하고 사육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쟁이 지속될 때 자국에서 생산된 말이 많아도 소모를 따라잡지 못했다. 고구려 내에서 유목민들이 말을 생산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 말을 지속적으로 유입해야 했다.

 

고구려는 말들이 자라난 원주지(原住地)와 가까운 북쪽에 목장을 만들어 현지 적응 훈련을 시켰다. 서식 환경이 다르더라도 점차 적응시키면 사망률을 줄일 수 있었다. 고구려가 유목민에게서 항상 평화적으로 말을 공급받은 것은 아니다.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고구려가 유목민으로부터 말을 가져오든 자체적으로 양육하든 관리하고 양육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초원과 인접한 고구려 북부지역에 대규모 국영목장들이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유목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애썼고 이탈할 경우 습격해서라도 되돌려 놓았다. 유목민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거란의 출복부는 돌궐이 심하게 착취하자 그보다 세금이 가벼운 고구려로 들어갔고 수(隋)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자 미련 없이 고구려에서 이탈했다.

 

수(隋)가 그러했던 것처럼 당(唐)도 고구려 휘하의 거란이나 말갈인들을 회유해 끌어들이려는 공작을 펼쳤다. 고구려는 이에 보복조치를 단행했다. 수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도 거란과 말갈 등을 회유해 포섭했고 고구려는 여기에 무력으로 대응한 바 있다. 이 사건은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우려한 대로 645년 당의 고구려 침공시 돌궐 유목기병이 동원되었다. 책에는 재미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안시성 이야기다. 쿠데타로 집권해 허수아비 왕 보장왕을 세운 연개소문이 지방 성주들을 자기 사람들로 교체하는 상황에서 안시성주 양만춘은 응하지 않았다. 연개소문이 직접 안시성으로 쳐들어왔다. 성은 고구려 중앙군의 공격을 받고도 건재했다.

 

당시 고구려에는 국가보다 직속상관과 주인에게 충성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국왕에 대한 도리보다 권력을 숭배하는 풍습이 앞섰음을 말해준다. 안시성에는 출동 직전 항상 고기 음식을 배불리 먹는 특공대가 있었다. 유목 사회는 내분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그것은 유목제국을 파멸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야망에 찬 유능한 새 지도자가 배태되는 산고(産苦)이기도 했다. 새로운 영웅적 지도자의 출현은 그를 구심점으로 한 강고한 단합을 가져와 더 강력한 유목국가를 만들었다.

 

유목민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최소의 손상을 주며 재빠르게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무리 속에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날 동요를 최대화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빠르고 명쾌하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살인을 하는 기술의 보유자들이었다. 그들은 냉혈하고 능수능란했다. 고구려 초기에는 사냥꾼들이 유목민들을 약탈 대상이자 사냥감으로 여겼지만 장수왕대 이후 국가 영역이 커지면서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갈수록 고구려는 사냥꾼보다 농민의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당나라에서 유목기병을 잘 지휘한 사람 중 설인귀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최대 전성기는 668년 고구려 멸망 시기다. 그는 숱한 전설의 주인공이다. 고향이 적성 주월리고 율포리에서 그의 용마(龍馬)가 났다는 것 등이다. 설마치(薛馬馳)는 그가 말 달리는 훈련을 했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다.(’치; 馳‘는 달릴 치이다.) 설마리(雪馬里)는 그가 겨울에 눈밭을 누비며 무예를 쌓았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다.

 

청천 신유한은 ’감악산기‘에서 설인귀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으로 아버지를 감악산에 장사지냈고 안동도호부에 머물 적에 수차례 성묘를 했다고 썼다. 저자는 수(隋), 당(唐)이 고구려를 무너뜨리려고 집착한 이유가 고구려가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끊임없이 반란을 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구려는 휘하의 거란, 말갈인들에게 안전하게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었고 겨울이 되면 꼭 필요한 곡물을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고구려는 거란인과 말갈인 없이 기병 동원과 전마(戰馬)의 원활한 공급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들은 방치하면 고구려를 떠났고 항상 적의 편에 가담해 고구려를 괴롭혔다.

 

고구려의 군주들이 다른 유목민들을 약탈하거나 제압할 때도 그들의 도움은 필요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북방 몽골 초원에는 당에 대항할 수 있는 유목제국이 사라졌다. 즉 고구려의 동업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665년 고구려 집정자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무능한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터지자 고구려 휘하에 그나마 남아 있던 거란과 말갈인들이 대부분 당으로 붙었다. 고구려에게는 결정적 패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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