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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의 역사 : 한국사편 -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정점’을 위한 쟁투의 기록 ㅣ 숙청의 역사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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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바람직한 관계를 알게 해주는 말이 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최경식의 ‘숙청의 역사’를 보며 생각하는 말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진골 세력 및 고구려계 유민들을 냉혹하게 숙청한 군주다. 당나라를 물리친 신문왕이 마주한 현실은 통일 전쟁 과정에서 공신이 된 진골 귀족들과의 갈등이었다. 무열왕(김춘추) - 문무왕 - 신문왕의 왕위는 3대째 세습된 군주였다. 신문왕은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국인 보덕국(報德國)도 표적으로 삼았다.
고려 4대 광종도 수성형 군주에 드는 인물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가 그의 치적이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의 도움으로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정략결혼 및 사성(賜姓) 정책은 왕건의 대표적 대(對) 호족 정책이었다. 고려는 사실상 호족 연맹 국가였다. 왕건 사후 권력 투쟁이 빚어졌다. 개경 호족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광종은 재위 7년간은 별 다른 개혁을 보여주지 못했다.
과거제로 문치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는 호족 정리 정책이라 할 만하다. 광종에게 과거제 실시를 건의한 인물은 중국 오대십국의 하나였던 후주(後周)의 쌍기였다. 쌍기는 거란 소손녕과 담판해 강동 6주를 얻은 서희를 선발하기도 한 지공거(知貢擧)였다. 왕건의 천수(天授)에 이어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 등의 연호를 썼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100년간 집권했다. 고려 계급사회의 하층에 있었던 무신이 상층부의 문벌 귀족을 끌어내리고 집권한 사태는 집권 세력의 연결성이 전혀 없는 교체였다.
건국 초기만 해도 고려는 무신들이 득세 했다. 통일전쟁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태조 왕건 주변에는 건 국의 일조한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른바 공신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4대 광종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 진출 통로인 과거제도 이때 처음 시행되었다. 과거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문신들은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신들의 군 지휘권까지 가져갔다. 문신 출신으로서 무신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인물들은 서희, 강감찬, 윤관 등이다. 문신들이 무신 역할도 겸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제에 있었다. 과거제에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군사 전력에 대한 이해도 요구했다. 자연스레 문신들은 웬만한 무신들보다 탁월한 군사적 지략을 갖출 수 있었다. 무신정변을 촉발한 18대 의종도 집권 초에는 비대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들을 중용했다.
의종을 감금한 무신들은 김돈중, 김돈시(김부식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처형했다. 그들은 김부식을 부관참시하기까지 했다.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 왕호를 등극시켰다. 19대 왕 명종이다. 무신정권은 1170년에 시작되어 100년만인 1270년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지 않고 즉위했다. 이에 개성 왕씨들을 경계한 이성계는 왕씨 숙청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고려가 전 왕조 신라에 대해 보인 태도와 대비된다. 최영은 친원파였다. 그가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항한 것이었다.
최영은 남아서 자신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따라 대열에서 빠졌다. 이는 최영의 뼈아픈 실수가 되었다. 조민수와 일부 장졸들이 회군은 왕에게 정면 대적하는 것이라 하자 이성계는 왕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왕 옆의 악인인 최영에게 대적하는 것이라 답했다. 위화도까지 하루 10km씩 움직인 이성계 군은 회군은 하루 40km씩 했다. 명은 창왕이 원나라 혈통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창왕 즉위의 주역인 조민수, 이색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때부터 이성계 세력은 역성혁명을 기치로 새로운 왕조 창업을 본격적으로 표방했다. 공양왕은 이성계와 사돈 간이었다. 공양왕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결혼한 사이였다. 선위해줄 것이라 기대되었던 공양왕은 정몽주와 긴밀히 연대하며 이성계 세력을 견제했다. 정몽주는 창왕 폐위까지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지만 이성계 세력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돌아섰다. 정몽주는 정도전, 조준 등을 유배 보낸 뒤 공양왕에게 이성계 체포, 사사를 재가해 달라고 했으나 공양왕은 역풍을 우려해 주저했다.
이성계 세력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위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왕대비 안씨(공민왕의 제 4비)를 찾아가 공양왕 폐위의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성계는 감록국사에 봉해졌다. 임시임금이 된 것이다. 선위받지도 않았고 반정을 일으키지도 않은, 신하가 왕을 축출한 어정쩡한 즉위였다. 그는 조선의 왕이 아닌 고려의 왕으로 즉위해 한동안 고려 국호를 썼다. 왕씨여도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려 한 이성계와 달리 신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건은 문하부 참찬 박위로부터 비롯되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를 따랐던 박위는 공양왕 즉위 후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에 맞섰다.
정몽주가 피살될 당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으나 살아남은 그는 친지에게 맹인 점쟁이 이흥무를 찾아가 태조 이성계와 공양왕 가운데 누가 더 명운이 좋은지, 왕씨들 중 누가 가장 명운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역모로 비칠 수 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는 왕씨 일가 숙청에 반대했으나 대신들의 집요한 주청에 어쩔 수 없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처가(여흥 민씨)와 며느리 집안(청송 심씨)을 철저하게 도륙했다. 태종은 강상인이 군 관련 업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강상인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조직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병조에 속한 심정이 형 심온(세종의 장인)의 지시를 받아 강상인과 모의했다고 몰아갔다. 심온은 강상인과의 대질을 요구했지만 강상인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 세종은 심온을 복권할 경우 부왕 태종이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경계했다. 문종을 본 명나라 사신은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했다. 문종은 자신을 제갈공명에 비유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후자는 오로지 군주 개인의 감정 차원의 폭거였다. 저자는 후자를 희대의 폭군의 무차별적인 학살극으로 규정한다. 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을 통해 집권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 조정의 주류 세력을 형성한 것은 훈구파였다. 조카의 옥좌를 빼앗은 세조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한 탓에 훈구파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 편중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할아버지인 태종이 공신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세조 이후에도 훈구파의 권세는 커져만 갔다.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는 사림이라는 반대 세력의 출현을 이끌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았고 향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중소 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정착시키며 살아가고 있던 사림에게 훈구파의 권세가 미쳤다.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 훈구파 사람들이 낙향한 후 유향소, 경재소 등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며 사림을 억눌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사림은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성종이 사림을 신진 세력으로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세종대왕처럼 학문을 좋아했고 경연(經筵)에도 9000회 이상 참여했다. 패도(覇道)적 성향을 보였던 세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노선을 표방했던 만큼 훈구파를 배제하고 사림을 정치 동반자로 키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사림이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다면 훈구는 사장(詞章)에 기반을 두었다. 사림에게 불행이 빚어졌다. 성종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에 대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해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고 거짓 보고했다.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씨는 묘비도 없이 동대문 밖에 묻혔다.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림이 중심이 된 삼사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언을 근거로 격하게 반대했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인 실록청 총책임자인 훈구파 이극돈이 사초를 검수하던 중 김일손이 쓴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글을 발견하고 삭제를 요청했다. 김일손이 거부하자 원한을 품은 이극돈은 복수를 계획했다. 이극돈은 유자광과 함께 김일손은 물론 사림세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실록 기사를 찾아냈다. 두 사람의 고변을 들은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 연산군은 삼사 및 신하들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다가 무오사화를 계기로 독단적 왕권행사의 길로 나아갔다. 갑자사화는 유자광과 함께 간신의 대명사인 임사홍의 폐비 윤씨 사건 고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갑자사화는 규모면에서 무오사화를 압도했다. 훈구파 대신들도 희생 당했음에도 사화라 부르는 것은 삼사의 피해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선조를 암군(暗君)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저자는 기축옥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죽임을 당해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선조는 중종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를 해결하며 사림의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조광조 추증 및 남곤의 관직 삭탈이다.
남곤은 사림 탄압에 앞장 섰던 사람이다. 사림은 중앙무대에서 밀려났지만 근간이 되는 향촌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도 큰 몫을 했다. 훈구를 비호했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떴다. 선조는 사림 중용 의지를 드러냈다. 선조는 세자 시절 훈구 권신들의 국정농단에 염증과 위협을 느꼈다. 사림의 세상이 되면서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가 늘어났다. 관직이 한정된 탓에 사림 내의 경쟁과 대립이 촉발되었다. 붕당이 형성되었다.
김효원의 집은 한양의 동쪽에 있어서 동인, 심의겸의 집은 한양의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 불렸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에서 우세한 세력은 동인이었다.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맥을 이은 동인은 주리론에 기반했다. 경험적 세계의 현실원리보다 도덕적 원리에 기반한 인식과 실천에 비중을 두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재앙을 맞았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 선비들의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호남에선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호남 선비들이 확연히 줄었고 풍류를 즐기고 음식을 찾아다니는 풍조가 생겼다.
서희는 세자 책봉 문제에서 선조의 미움을 샀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선호했다. 저자는 숙종을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군왕으로 꼽는다. 불리한 정치 환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내내 자기 마음대로 정국과 신하들을 주물렀기 때문이다. 붕당은 왕보다 신하들에게 유리한 구도로 볼 수 있다. 숙종은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인조반정 이후 조정은 집권 세력인 서인과 제2의 세력인 남인이 함께 가는 모양새였다. 논쟁과 대립은 있었지만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붕당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건전한 상호 견제와 비판이 백년 가까이 지속됐다. 이 시기에 서인과 남인의 대표적인 논쟁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예송 논쟁이다. 자의대비의 상례 문제에 따른 논쟁이었다. 1659년 일어난 기해예송은 종법과 왕가의례 중 어디에 초점을 두어 효종을 볼 것인지에 관한 예송이었다. 효종은 종법 측면에서는 자의대비의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 계승면에서는 적자였다. 당시 상례를 치를 때 왕가에선 국조 오례의를, 일반 사대부들은 주자가례를 따랐다. 그런데 국조 오례의에 위와 같은 사례가 존재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졌다.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을 따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예송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둔 성리학의 핵심 사상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전방위적 예송 논쟁으로 성리학적 이념 논쟁이 활성화된 측면도 있지만 예송의 본질이 훼손되고 붕당정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적지 않게 드리워진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상술했듯 이때까지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의 붕당정치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은 효종의 외아들인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 적장자(정실이 낳은 맏아들)는 일곱명이었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단종도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숙종은 온순했던 아버지 현종을 닮지 않고 괄괄했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를 닮았다. 최경식의‘숙청의 한국사’는 여러 시대의 숙청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읽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