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서울사 : 고려편 쉽게 읽는 서울사
서울역사편찬원 지음 / 서울책방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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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2년에 거란이 침략하자 서희는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에 반대했다. 그리고 직접 소손녕을 찾아갔다. 거란 진영에 들어간 서희는 소손녕과 마주 서서 읍한 후에 동편과 서편으로 마주 대하고 앉아서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화의가 성립되었다. 고려는 서희의 활약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목종 원년에 57세로 죽었고 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고려는 개경 이외에도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지금의 서울)이 더 있었다. 물론 이 세 개의 경은 수도인 개경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도 아니고 항상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경은 삼경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시되었다. 동경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말한다. 태조 18년 경순왕 김부(金傅)가 투항해 오자 나라를 없애고 경주로 개칭했다가 940년에 대도독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성종 6년에 경주를 동경으로 고침에 따라 동경이 설치되었다. 숙종이, 문종이 설치했다가 폐지한 남경을 다시 설치하고 경영한 것도 풍수도참사상을 이용한 왕권 강화정책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우대받던 서경은 인종 13년 승려 묘청 등이 천도 운동을 벌이다가 원수 김부식 등이 이끄는 군대에 토벌당한 이후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 삼경은 왕 개인 또는 고려라는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여러 형태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는 국왕이 행차하여 머물다 오는 순주(巡住) 정도의 역할을 했지만 고려 말에는 천도 대상지로도 자주 거론되었고 실제로 남경으로의 천도가 단행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종의 아들인 숙종 때 부활한 남경은 동쪽으로 대봉, 남쪽으로 산리, 서쪽으로 기봉, 북쪽으로 면악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남쪽 끝인 사리는 한강의 사평나루가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한남대교 부근이고 면악은 북악산이니 남산을 남쪽 끝으로 하는 조선의 한양도성보다 컸다. 정도전은 북 원사신의 영접을 반대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삼각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봉재에서 학문을 가르치니 배우는 자들이 많이 따랐다. 한양이라는 명칭은 통일신라 때 처음 서울의 공식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남경은 고려시대에 불렸던 서울의 옛 명칭으로 1308년 한양부로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서울의 공식 명칭이었다. 


양주의 중심지는 조선시대의 중심지였던 종로구, 중구 일대가 아니라 현재의 광진구 지역에 위치했다. 조선시대의 양주는 한성부와는 다른 고을이었다. 지금도 양주는 경기도에 속해 있으며 서울과는 별개의 지역이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 전기까지 광진은 서울 지역에서 한강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으며 한반도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간선 교통로의 핵심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백제는 광진 남쪽 풍납토성에 초기 도읍을 건설했고 고구려와 신라는 광진 옆 아차산에 산성과 보루 등의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광진에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면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지역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역과 연결되었다. 광진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현재 의정부시와 양주를 거쳐서 북쪽 방면으로 개성, 평양 등과 이어졌으며 동북쪽 방면으로는 함경도 방면과 연결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수도 개경과 한반도 남부 지역을 왕래할 때 광진의 중요성은 여전히 높았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임진강을 건너 파주시 적성면 지역으로 이어진다. 적성 지역의 임진강 나루(파주 적성과 연천 장남을 연결하는 나루; 이재석 글)를 옛 기록에는 장단도 즉 장단 나루라고 칭했다. 일찍이 660년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고구려 원정 부대가 이 길을 따라 평양까지 이르렀고 고려 전기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 갈 때에도 이 길을 거쳐 내려갔다. 근래 학계에서는 이 길을 장단 나룻길이라고 부른다.


고려 중기 남경을 설치한 이후부터 장단 나룻길의 비중은 약해지고 대신 새로운 교통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임진강 하류와 임진 나루를 건너 현재의 파주와 고양 등을 거쳐 서울 중심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였다. 오늘날 이 길을 임진 나룻길이라고 부른다. 임진 나룻길을 택하면 한강을 건널 때에도 광진보다 그 하류인 사평도 즉 사평 나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임진 나룻길은 장단 나룻길보다 임진강과 한강의 하류 지역을 건너게 된다. 하천의 하류 지역이 상대적으로 횡단이 불편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임진 나룻길은 장단 나룻길보다 활용도가 미진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임진 나룻길을 이용하는 여행객은 이전보다 크게 증가했다. 임진 나룻길의 이용자 증가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사건 중 하나가 혜음사 설치다. 혜음사는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하며 파주와 고양의 경계에 해당하는 혜음령과 인접해 있다. 남경의 설치는 11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임진 나룻길의 이용을 증가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장단 나룻길 이용이 많았던 고려 전기에는 광진 인근에 양주의 중심지가 위치해 있었다. 당시 광진은 교통면에서나 지방 행정면에서 현재 서울 지역의 중심 입지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개경과 한반도 남방을 오갈 때에는 광진으로 직접 연결되는 장단 나룻길 이용을 선호했다. 


종로구 지역은 장단 나룻길보다 임진 나룻길을 통해 개경과 왕래하는 것이 더욱 가깝고 편리했다. 남경의 설치는 기존의 간선 교통로였던 장단 나룻길의 비중을 떨어뜨리고 임진 나룻길을 국가적인 간선 교통로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진 후에도 남경의 중심지에 새 도읍인 한성부가 건설되면서 임진 나룻길의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임진 나룻길은 제1의 국가도로인 의주대로 구간에 편성되어 한양에서 개성, 평양 등을 거쳐 의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핵심 교통로의 기능은 변함없이 가지고 있었다. 


숙종은 조카(헌종)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도덕적 약점을 강력한 국가적 사업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 창설은 숙종이 추구했던 대표적인 국가 사업이었다. 숙종은 자신이야말로 37년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를 번성시켰던 부왕 문종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 했다. 남경 건설 역시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숙종의 할아버지인 제8대 국왕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삼각산 신혈사라는 사찰에서 승려로 기거하며 암살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제7대 임금 목종의 어머니인 천주태후가 잠재적 왕위 계승 후보자였던 조카 현종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국가의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는 등 고려의 기틀을 다친 국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현종의 자손들은 현종이 어렵게 목숨을 부지했던 삼각산을 현종계 왕실의 성스러운 장소로 여겼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삼각산을 행차하면서 현종계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숙종은 현종의 손자로 삼각산 아래에 남경을 설치하여 자신의 새로운 거점을 건설했다. 자신이 진정한 현종과 문종의 후계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집권 과정에서 드러났던 취약한 정당성을 만회하고자 했던 것이다. 숙종과 그 측근들은 경복궁 일대가 한반도의 손꼽히는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선전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하고 남경의 새 중심지가 종로구, 중구 일대에 건설된 배경에는 그 같은 정치사의 흐름이 있었다. 숙종의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남경 건설은 삼국시대 이래 천여년간 한강변 광진구 지역에 위치했던 서울의 중심지가 종로구, 중구 지역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남경의 중심지는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새로운 수도를 한양으로 결정했으며 종로구, 중구 일대의 서울 중심 지역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핵심부로 기능하고 있다. 양천허씨세보와 미수 허목의‘기언‘에 의하면 허선문은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과 허왕옥의 후손으로 공암에서 농사에 힘써 많은 곡식을 비축했다. 허선문과 왕건의 인연은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를 공격했을 때 이루어졌다. 후백제를 공격하던 고려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병사와 말들이 매우 피곤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삼국사기에는 897년에 송악을 도읍으로 정한 궁예가 지금의 김포, 강화에 해당하는 검포와 혈구, 그리고 공암 지역을 공격해 격파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이때 공암 지역이 궁예의 세력권으로 들어갔기에 허선문 집안도 궁예에 협조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은 20년간 궁예의 장군 생활을 했다.) 이때 허선문이 곡식을 공급하였고 그 덕분에 기운을 차린 고려의 병사와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고 고려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선문이 왕건에게 항복한 시기는 태조 10년인 927년 9월 공산에서 고려군이 후백제에게 패한 이후로 추정된다. 12세기 숙종부터 의종까지 고려의 국왕들은 화려하게 남경에 행차하고 머물렀으나 무신정변 이후에는 국왕들의 행동반경이 개경 인근으로 제한되면서 남경 순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더욱더 국왕이 남경에 행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국왕이 직접 가는 대신 어의를 남경의 궁궐에 모시는 것으로 국왕의 순주를 대신했다. 원 간섭기에 충선왕은 고려 전기 이래의 경(京)들을 일괄적으로 부(府)로 개편했다. 이는 원(元)의 제도를 기본으로 삼아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하려 한 결과다. 풍수에 따르면 사람과 땅은 동기(同氣) 즉 같은 기를 매개로 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다. 풍수는 크게 죽은 자의 공간 즉 무덤을 다루는 음택(陰宅) 풍수와 산 자의 터전을 다루는 양기(陽基) 풍수로 구분한다. 도읍에 대한 풍수론을 국도풍수(國都風水)라 한다. 국도 풍수는 고려시대에 많이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였던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할 때도 있고 왕성해질 때도 있으므로 국왕이 여러 경(京)이나 궁궐을 건설하여 돌아가며 머물러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고려에서는 서경과 남경을 건설하고 여러 차례 국왕이 그곳에 행차하고 머물렀다. 이는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기에 대업이 만대 동안 이어질 곳으로 정의하며 국왕이 그곳에 가서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안녕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서경이 중시된 것은 그곳이 역사적으로 고구려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실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개경과 서경의 양경 체제에 변화가 생긴 것은 12세기에 남경을 건설하면서부터다. 


남경 건설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11세기 중반 문종 때부터였다. 이 무렵은 고려가 건국한 지 1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수덕을 표방했던 고려사회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6의 배수가 국가의 운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했다. 숙종이 지은 남경의 궁궐은 연흥전(延興殿)이다. 12세기 남경의 건설은 여려모로 그 일대의 지역개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기존의 장단 - 광진 - 송파의 도로망에 더하여 임진 - 파주 - 남경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성장했다. 또 삼남지역의 경제력이 중시되면서 그 연결망이자 개경과 인접한 도시로서 남경이 향후 더욱 더 성장해갔다. 


이는 고려 말 천도 논의가 일었을 때 남경 한양이 주요한 천도지로 부각하는 바탕이 되었다. 몽골과 항쟁했던 시기 강도(江都)로 도읍을 옮긴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 왕실과 고려 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고 원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있는 동안 고려에서는 천도를 시도할 수 없었다. 원에서 천도를 자신들에 대한 적대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원 간섭기 동안 수면 아래에 잠복했던 천도 논의는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 이후 비로소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이에 대한 교서를 반포한 지 이틀 후에 남경의 땅을 살펴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때에 실제로 국왕이 순주할 별경으로 새롭게 건설된 곳은 장단(長湍) 백악 신경(新京)이었다. 고려 말 순주가 이루어지던 무렵부터 한양은 서경을 넘어서서 지맥의 근본이자 단군과 관련된 장소로 수식되었다. 한양의 주산인 백악은 원래 숙종 때 기록에서는 면악(面岳)으로 불리다가 우왕 무렵부터 백악으로 지칭되었다. 백악은 단군의 사적지였던 아사달의 한자어로 해석된다. 이미 고려인들에 의해 개경을 보완할 배경으로 건설된 만큼 한양은 기본적으로 개경과 비슷한 지세를 지니고 있었다. 개경과 한양은 풍수적으로 사신사가 모두 갖춰진 지형이었다. 


두 지역은 지세가 서북쪽과 남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여서 물길이 동쪽으로 흘러나가 수구가 동남쪽에 조성되었다는 점 등이 동일하다. 주산이 서북쪽에 치우쳐 있고 주산에 근거하여 궁궐의 터를 마련함으로써 개경과 한양의 궁궐도 서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같다. 다만 개경이 산 구릉에 궁궐을 조성했다면 한양은 평지에 건설했다는 차이가 있다. 개경과 한양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초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쉽게 실천 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풍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매우 강력한 반대론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때 지적된 한양의 풍수적 문제는 건방(乾方)이 낮고 돌산이 험하여 명당에 물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물이 부족하다는 점은 도읍지가 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천도를 반대하는 쪽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신혈사라 불렸던 은평구 진관사는 8대 현종이 왕이 되기 전 유폐되어 있던 사찰이다. 천추태후가 현종을 해치려고 보낸 자객을 피하게 도와준 스님이 진관 스님이어서 진관사라 부르게 되었다. 현종은 천추태후의 핍박을 받아 개성의 숭교사(崇敎寺)로 출가했다가 15살이 된 1006년에 신혈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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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의 역사 : 한국사편 -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정점’을 위한 쟁투의 기록 숙청의 역사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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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바람직한 관계를 알게 해주는 말이 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최경식의 ‘숙청의 역사’를 보며 생각하는 말이다. 신라 31대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범(典範)이라 할 만하다. 그는 진골 세력 및 고구려계 유민들을 냉혹하게 숙청한 군주다. 당나라를 물리친 신문왕이 마주한 현실은 통일 전쟁 과정에서 공신이 된 진골 귀족들과의 갈등이었다. 무열왕(김춘추) - 문무왕 - 신문왕의 왕위는 3대째 세습된 군주였다. 신문왕은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국인 보덕국(報德國)도 표적으로 삼았다. 


고려 4대 광종도 수성형 군주에 드는 인물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가 그의 치적이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의 도움으로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정략결혼 및 사성(賜姓) 정책은 왕건의 대표적 대(對) 호족 정책이었다. 고려는 사실상 호족 연맹 국가였다. 왕건 사후 권력 투쟁이 빚어졌다. 개경 호족들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광종은 재위 7년간은 별 다른 개혁을 보여주지 못했다. 


과거제로 문치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는 호족 정리 정책이라 할 만하다. 광종에게 과거제 실시를 건의한 인물은 중국 오대십국의 하나였던 후주(後周)의 쌍기였다. 쌍기는 거란 소손녕과 담판해 강동 6주를 얻은 서희를 선발하기도 한 지공거(知貢擧)였다. 왕건의 천수(天授)에 이어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 등의 연호를 썼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100년간 집권했다. 고려 계급사회의 하층에 있었던 무신이 상층부의 문벌 귀족을 끌어내리고 집권한 사태는 집권 세력의 연결성이 전혀 없는 교체였다. 


건국 초기만 해도 고려는 무신들이 득세 했다. 통일전쟁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태조 왕건 주변에는 건 국의 일조한 수많은 신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른바 공신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4대 광종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 진출 통로인 과거제도 이때 처음 시행되었다. 과거제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문신들은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무신들의 군 지휘권까지 가져갔다. 문신 출신으로서 무신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인물들은 서희, 강감찬, 윤관 등이다. 문신들이 무신 역할도 겸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거제에 있었다. 과거제에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군사 전력에 대한 이해도 요구했다. 자연스레 문신들은 웬만한 무신들보다 탁월한 군사적 지략을 갖출 수 있었다. 무신정변을 촉발한 18대 의종도 집권 초에는 비대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들을 중용했다. 


의종을 감금한 무신들은 김돈중, 김돈시(김부식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처형했다. 그들은 김부식을 부관참시하기까지 했다.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 왕호를 등극시켰다. 19대 왕 명종이다. 무신정권은 1170년에 시작되어 100년만인 1270년 막을 내렸다.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지 않고 즉위했다. 이에 개성 왕씨들을 경계한 이성계는 왕씨 숙청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고려가 전 왕조 신라에 대해 보인 태도와 대비된다. 최영은 친원파였다. 그가 요동 정벌을 계획한 것은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항한 것이었다. 


최영은 남아서 자신을 지켜달라는 우왕의 간청에 따라 대열에서 빠졌다. 이는 최영의 뼈아픈 실수가 되었다. 조민수와 일부 장졸들이 회군은 왕에게 정면 대적하는 것이라 하자 이성계는 왕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왕 옆의 악인인 최영에게 대적하는 것이라 답했다. 위화도까지 하루 10km씩 움직인 이성계 군은 회군은 하루 40km씩 했다. 명은 창왕이 원나라 혈통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성계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창왕 즉위의 주역인 조민수, 이색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때부터 이성계 세력은 역성혁명을 기치로 새로운 왕조 창업을 본격적으로 표방했다. 공양왕은 이성계와 사돈 간이었다. 공양왕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결혼한 사이였다. 선위해줄 것이라 기대되었던 공양왕은 정몽주와 긴밀히 연대하며 이성계 세력을 견제했다. 정몽주는 창왕 폐위까지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지만 이성계 세력이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돌아섰다. 정몽주는 정도전, 조준 등을 유배 보낸 뒤 공양왕에게 이성계 체포, 사사를 재가해 달라고 했으나 공양왕은 역풍을 우려해 주저했다. 


이성계 세력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위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왕대비 안씨(공민왕의 제 4비)를 찾아가 공양왕 폐위의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성계는 감록국사에 봉해졌다. 임시임금이 된 것이다. 선위받지도 않았고 반정을 일으키지도 않은, 신하가 왕을 축출한 어정쩡한 즉위였다. 그는 조선의 왕이 아닌 고려의 왕으로 즉위해 한동안 고려 국호를 썼다. 왕씨여도 적대적이지만 않으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려 한 이성계와 달리 신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건은 문하부 참찬 박위로부터 비롯되었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를 따랐던 박위는 공양왕 즉위 후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에 맞섰다. 


정몽주가 피살될 당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으나 살아남은 그는 친지에게 맹인 점쟁이 이흥무를 찾아가 태조 이성계와 공양왕 가운데 누가 더 명운이 좋은지, 왕씨들 중 누가 가장 명운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역모로 비칠 수 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는 왕씨 일가 숙청에 반대했으나 대신들의 집요한 주청에 어쩔 수 없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처가(여흥 민씨)와 며느리 집안(청송 심씨)을 철저하게 도륙했다. 태종은 강상인이 군 관련 업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강상인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조직적 음모라고 주장하며 병조에 속한 심정이 형 심온(세종의 장인)의 지시를 받아 강상인과 모의했다고 몰아갔다. 심온은 강상인과의 대질을 요구했지만 강상인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 세종은 심온을 복권할 경우 부왕 태종이 잘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음을 경계했다. 문종을 본 명나라 사신은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했다. 문종은 자신을 제갈공명에 비유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후자는 오로지 군주 개인의 감정 차원의 폭거였다. 저자는 후자를 희대의 폭군의 무차별적인 학살극으로 규정한다. 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을 통해 집권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 조정의 주류 세력을 형성한 것은 훈구파였다. 조카의 옥좌를 빼앗은 세조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한 탓에 훈구파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 편중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할아버지인 태종이 공신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했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세조 이후에도 훈구파의 권세는 커져만 갔다.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는 사림이라는 반대 세력의 출현을 이끌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았고 향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중소 지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정착시키며 살아가고 있던 사림에게 훈구파의 권세가 미쳤다.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 훈구파 사람들이 낙향한 후 유향소, 경재소 등을 통해 사익을 추구하며 사림을 억눌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서 사림은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훈구파의 지나친 권세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성종이 사림을 신진 세력으로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세종대왕처럼 학문을 좋아했고 경연(經筵)에도 9000회 이상 참여했다. 패도(覇道)적 성향을 보였던 세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노선을 표방했던 만큼 훈구파를 배제하고 사림을 정치 동반자로 키우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사림이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다면 훈구는 사장(詞章)에 기반을 두었다. 사림에게 불행이 빚어졌다. 성종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성종은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에 대해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성종에 대해 원망을 늘어놓고 있다고 거짓 보고했다. 사약을 받고 죽은 폐비 윤씨는 묘비도 없이 동대문 밖에 묻혔다. 7년 후 세자인 연산군의 앞날을 걱정한 성종은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쓰게 했고 장단도호부사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성종은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림이 중심이 된 삼사는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언을 근거로 격하게 반대했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인 실록청 총책임자인 훈구파 이극돈이 사초를 검수하던 중 김일손이 쓴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글을 발견하고 삭제를 요청했다. 김일손이 거부하자 원한을 품은 이극돈은 복수를 계획했다. 이극돈은 유자광과 함께 김일손은 물론 사림세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실록 기사를 찾아냈다. 두 사람의 고변을 들은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역모 혐의를 씌웠다. 연산군은 삼사 및 신하들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다가 무오사화를 계기로 독단적 왕권행사의 길로 나아갔다. 갑자사화는 유자광과 함께 간신의 대명사인 임사홍의 폐비 윤씨 사건 고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갑자사화는 규모면에서 무오사화를 압도했다. 훈구파 대신들도 희생 당했음에도 사화라 부르는 것은 삼사의 피해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반정을 접한 연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선조를 암군(暗君)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저자는 기축옥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거 죽임을 당해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선조는 중종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를 해결하며 사림의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조광조 추증 및 남곤의 관직 삭탈이다. 


남곤은 사림 탄압에 앞장 섰던 사람이다. 사림은 중앙무대에서 밀려났지만 근간이 되는 향촌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도 큰 몫을 했다. 훈구를 비호했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떴다. 선조는 사림 중용 의지를 드러냈다. 선조는 세자 시절 훈구 권신들의 국정농단에 염증과 위협을 느꼈다. 사림의 세상이 되면서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가 늘어났다. 관직이 한정된 탓에 사림 내의 경쟁과 대립이 촉발되었다. 붕당이 형성되었다. 


김효원의 집은 한양의 동쪽에 있어서 동인, 심의겸의 집은 한양의 서쪽에 있어서 서인이라 불렸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에서 우세한 세력은 동인이었다.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맥을 이은 동인은 주리론에 기반했다. 경험적 세계의 현실원리보다 도덕적 원리에 기반한 인식과 실천에 비중을 두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재앙을 맞았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선 선비들의 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호남에선 글 읽는 소리가 끊겼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호남 선비들이 확연히 줄었고 풍류를 즐기고 음식을 찾아다니는 풍조가 생겼다. 


서희는 세자 책봉 문제에서 선조의 미움을 샀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선호했다. 저자는 숙종을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군왕으로 꼽는다. 불리한 정치 환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내내 자기 마음대로 정국과 신하들을 주물렀기 때문이다. 붕당은 왕보다 신하들에게 유리한 구도로 볼 수 있다. 숙종은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인조반정 이후 조정은 집권 세력인 서인과 제2의 세력인 남인이 함께 가는 모양새였다. 논쟁과 대립은 있었지만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붕당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건전한 상호 견제와 비판이 백년 가까이 지속됐다. 이 시기에 서인과 남인의 대표적인 논쟁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예송 논쟁이다. 자의대비의 상례 문제에 따른 논쟁이었다. 1659년 일어난 기해예송은 종법과 왕가의례 중 어디에 초점을 두어 효종을 볼 것인지에 관한 예송이었다. 효종은 종법 측면에서는 자의대비의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 계승면에서는 적자였다. 당시 상례를 치를 때 왕가에선 국조 오례의를, 일반 사대부들은 주자가례를 따랐다. 그런데 국조 오례의에 위와 같은 사례가 존재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졌다.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을 따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예송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둔 성리학의 핵심 사상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전방위적 예송 논쟁으로 성리학적 이념 논쟁이 활성화된 측면도 있지만 예송의 본질이 훼손되고 붕당정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적지 않게 드리워진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상술했듯 이때까지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의 붕당정치가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숙종은 효종의 외아들인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 적장자(정실이 낳은 맏아들)는 일곱명이었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단종도 적장자의 적장자였다. 숙종은 온순했던 아버지 현종을 닮지 않고 괄괄했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를 닮았다. 최경식의‘숙청의 한국사’는 여러 시대의 숙청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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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8-31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매니아인지라 이 리뷰가 눈에 제일 먼저 띄네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4-08-31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명 깊게 또는 유의미하게 읽은 두 책의 저자가 신간을 냈다. 오리진의 저자 루이스 다트넬은 인간이 되다를 냈고 미토콘드리아의 저자 닉 레인은 트랜스포머를 냈다. 인간이 되다에 대해 천체 물리학자 마틴 리스, 고생물학자 헨리 지 등이 찬사를 보냈고 트랜스포머에 대해 이론 물리학자 리 스몰린, 이론 물리학자 Sean Carroll,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 등이 찬사를 보냈다


역시 내가 읽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의 저자 진화생물학자 제리 코인의 신간은 언제 나올까? 언급한 두 책(인간이 되다, 트랜스포머) 외에 헬렌 체르스키의 블루 머신, 마법의 용광로의 저자 천체물리학자 마커스 초운의 지금 과학, 우주 물리학자 스토 야스시의 우주의 수학 등을 읽어야 하리라. 과학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니 영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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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의 개성 여행
채수 외 지음, 전관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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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의 개성 여행은 채수(蔡壽), 유호인, 남효온(南孝溫), 조찬한(趙纘韓), 김육(金堉), 김창협(金昌協), 오원(吳瑗) 등의 글을 묶은 책이다. 사가독서를 얻어 개성에서 멀지 않은 파주에서 여행을 하기로 한 결과물이다. 채수는 신우(辛禑)가 망령되게 요동 정벌을 획책하자 태조가 회군했다고 말한다. 신우는 우왕을 말하는 것으로 공민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조에서는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신우라고 불렀다.

 

채수는 태조의 옛집인 목청전(穆淸殿)에 가서 어진을 뵈었다고 말한다. 박연(朴淵)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다. 박연은 박연폭포를 이르는 말이다. 채수는 웅덩이 물이 넘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데 마치 은하수가 거꾸로 걸린 듯 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백의 요간폭포괘장천(遙看瀑布掛長川; 저 멀리 폭포는 긴 강을 걸어 놓은 듯)이란 말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채수는 박연폭포를 와 보지 못했다면 항아리 속 초파리 꼴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박연폭포는 재인폭포처럼 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은 전설을 가진 폭포다. 관음사는 이성계의 잠저 시절 원찰이다. 본문에 화담(花潭) 이야기가 나온다. 서경덕이 태어나 살던 개성부(開城府) 화정리(禾井里) 계곡의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 못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진달래가 비치는 것을 보고 못의 이름을 화담(花潭)이라 하였다. 서경덕이 그곳의 이름을 따 화담이란 호()를 지었다. 경천사(敬天寺)는 기황후의 원찰이다.(승상 탈탈의 원찰이란 말도 있다.) 경천사는 10층 석탑으로 유명한 사찰이다.(78 페이지) 채수에 의하면 벽란강(碧瀾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예성강(禮成江)이고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져 바다로 흘러드는 곳은 조강(祖江)이다.

 

채수는 다만 구경하느라 지켜야 하는 바를 잃어버린다면 이는 옛사람이 경계하는 바이니 우리의 유람이 혹시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니었던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고려 수창궁은 성종과 목종 연간에 지은 궁이다. 김종직의 문인 뇌계(㵢溪) 유호인은 박연폭포의 물살이 흩어지면 만 필의 베가 되면서 봉우리를 흠뻑 적시고 땅덩이를 뒤흔들면 마치 은하수가 꺾이어 땅에 꽂히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유호인은 10여년이 넘는 동안 공민왕은 한 여자 때문에 백성들만 힘들게 했으니 참으로 미혹된 자들이 거울삼을 만하다고 썼다. 임진강은 사가독서를 얻은 조선 성종대의 선비들이 개성에 가기 위해 건넌 강이기도 하다. 김육(金堉)의 천성일록(天星日錄)은 선조대에 기록된 글이다. 태종대(太宗臺)가 나온다. 천마산은 하나의 산이었는데 박연폭포를 기준으로 동쪽은 성거산, 서쪽은 천마산이라 부른다.(141 페이지) 김육은 자신을 잘못 안내한 사람 때문에 화담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젠가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고 붉은 단풍이 들면 약속한 대로 박연폭포와 차일봉 사이를 다시 찾아가 보고 화담 위에서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서화담 선생의 영전에서 지난번에 찾아뵙지 못한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고 말한다. 농암 김창협은 숭양서원을 이야기한다. 김창협은 후조(後凋)의 기상을 엿보는 듯 하다는 말로 정몽주를 언급한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개경은 유학적 성지(聖地)가 되었다. 개경 여행은 박연폭포 찾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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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중 지역 강안학을 열다, 성주 한강 정구 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시리즈 9
김학수 지음 / 예문서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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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 - 1620)의 본관은 청주다. 청주의 옛 이름은 서원(西原)이었다. 한강은 성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지만 본디 그의 집안은 서울에 터전을 둔 전형적인 경화사대부였다. 한강은 성주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몇 십 리에 지나지 않는 칠곡의 사양정사 지경재(持敬齋)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동선은 퍽 광범위했다. 한강정사는 한강이 건립한 최초의 건축물이다. 한강을 눈여겨 본 인물들 중 율곡 이이(1536 - 1584), 우계 성혼(1535 - 1598)을 빼놓을 수 없다. 한강이 초당을 짓고 생활하던 회연(檜淵)에 한강 사후 회연서원이 건립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공부에 몰두하기 위해 회연으로 온 한강은 회연초당의 뜰에 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했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의 무(武)는 주희의 은거지였던 중국 복건성의 무이구곡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들 중 주자를 본받아 구곡을 경영한 대표 사례는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등이다. 물론 한강이 무흘구곡이라 이름하지는 않았다.(屹은 산 우뚝 솟을 흘이다.) 성주 회연서원의 옥설헌(玉雪軒), 망운암(望雲庵), 불괴침(不愧寢) 등의 액자를 쓴 사람이 미수 허목이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는 한강의 수제자다. 여헌(旅軒)은 그를 한강의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했고 최향경은 가장 가까이서 스승의 미언(微言; 넌지시 하는 말, 뜻 깊은 말)을 들은 인물로 칭송했다. 


한강 신도비명은 상촌 신흠이 지었다. 한강언행록에 완폭정(翫瀑亭)이 나온다.(翫은 구경할 완이다.) 무흘은 워낙 험한 벽지(僻地)여서 손님들의 방문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수는 한강의 고제(高弟)였다.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를 이르는 말이다. 예로부터 영남은 낙동강 동쪽을 강좌(江左), 서쪽을 강우(江右)로 표현했다. 경북 지역이 강좌, 경남 지역이 강우에 해당한다. 한강은 1563년 퇴계를 찾아가 배웠고 1566년 남명을 찾아가 배웠다. 


한강은 바다처럼 넓고(海闊) 산처럼 우뚝한(山高) 기상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용화범주(龍華泛舟)는 친교 뱃놀이 모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불천위(不遷位)에도 등급이 있다는 점이다. 나라에서 지정하는 국불천위, 사림에서 지정하는 사림불천위, 한 고을에서만 통하는 향불천위, 도에서 통하는 도불천위 등으로 나뉘는 것이다. 종묘의 경우 정전이 사대부 가문의 불천위 조상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다.


한강은 국불천위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술을 올리는 절차가 헌례(獻禮)다. 초헌, 아헌, 종헌으로 나뉜다. 헌작(獻爵; 술잔을 높이 드는 것) 후 구운 고기인 적(炙; 구운 고기)을 바친다. 술을 드렸으니 안주를 드시라는 의미다. 초헌 시에는 육적(肉炙; 돼지 고기)을 쓴다. 삽시정저(?匙正箸)는 첨작 후 주부가 메 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메 그릇의 중앙에 꽂는 절차를 말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밥을 이르는 말이다. 갱(羹)은 제사에 쓰는 국을 말한다. 아헌 때에는 계적(鷄炙)을, 종헌 때에는 어적(魚炙)을 쓴다. 한강의 학문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지만 이론과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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