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에 닥치고 계산하라는 말이 있다. 물질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이 당혹스럽지만 실재가 그러니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이 말을 지질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과 기독교 신앙'에 지질학은 물리학에 비해 비약이 많다는 내용이 있다. 내가 지질학을 배우며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자주 만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정이야 어떻든 어려운 부분 앞에서 그냥 그렇겠지, 하고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최근 연천 지질공원의 대표 명소인 재인폭포에 관한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흥미롭고도 당혹스러운 사실이다.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가지 않고 헤아리고 궁리한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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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너머의 역사 - 빅히스토리, 문명의 길을 묻다
김기봉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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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 전공자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제안한 빅히스토리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우주, 지구, 생명에 대해서까지 논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빅히스토리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시간과 공간을 우주로까지 확장해 인문학의 3문(問;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답을 제시하려는 학문이다.(263 페이지)

 

빅히스토리는 아직 기존 역사학으로부터 아마추어 역사로 취급받는다.(218 페이지) 그것은 빅히스토리가 고유한 역사학적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과학사 지식을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스토리텔링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빅히스토리는 나름의 서사 공식을 가지고 있다. 구성 요소, 골디락스 조건, 복잡성의 증가다.

 

빅히스토리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인류가 생존하고 문명을 지속하기 위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거시와 미시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역사 서술 모델이 필요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213 페이지) 최근 인류세란 말이 널리 언급되고 있다. 이 개념은 현생 인류가 지질학적 행위자로 등장해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지구 생태계의 다른 존재와의 연관하에서 발생했음을 깨닫고 파괴적인 문명을 리셋할 수 있는 기본 값을 설정하는 것이다.(247 페이지) 그런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다방면에 걸쳐 여러 종류의 일을 다재다능하게 할 줄 아는 만능의 전문가(generalist specialist)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종(種) 단위의 인간이다.

 

언어를 매개로 허구 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적응이다. 그 과정에서 만든 것이 이야기다. 이야기는 슬기로운 생각을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상호 주관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호모나렌스로 전환시켰다. 인간은 잡담과 수다를 떠는 종이다. 잡담과 수다는 이성적인 호모 사피엔스를 감성적인 호모 나렌스로 변환시켰다.

 

인간은 자신이 짠 의미의 거미줄에 매달려 사는 동물이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과거 - 현재 -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삶을 이해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유를 얻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는 남아서 미래 후손들에게 문화유전자를 전달한다.

 

픽션의 문법에 따르면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 아니라 상상이다. 신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유에서 무(아직은 없는 것)를 떠올리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체의 변이에 관해 설명하는 일반 이론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진화란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진화는 생식세포의 유전자에 생긴 우연한 돌연변이가 세대에서 세대로 계승되는 가운데 생존에 유리한 것이 자연선택되는 것이라고 말한 후쿠오카 신이치의 견해와 함께 새길 말이다.) 다윈이 진보와 구별하고자 한 진화란 생명체가 생식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돌연변이가 자연선택으로 살아남아 다양한 동식물 종이 생성되는 전개(unfolding)를 지칭한다.

 

자연선택이란 자연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법칙이 아니라 편견과 감정에 휘둘려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실재로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한 정보나 지식을 토대로 뇌 속에서 우리 나름의 매트릭스를 구축해 그것을 토대로 주변환경을 우리에게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12 페이지)

 

이야기로 주조된 매트릭스에 사는 호모 나렌스라는 특성이 인간을 계산 불가능한, 시스템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존재로 만든다.(85 페이지) 이야기 자아는 모든 경험을 말하지 않으며 가장 강렬했던 순간과 최종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스토리를 구성하고 사태를 재생한다. 인간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감각 세계 외에 이야기로 창조된 상호주관적 의미 세계에 산다.(89 페이지)

 

저자는 현재의 대학 체제에서 국부론이나 도덕감정론이 경제학과 또는 철학과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통과될 수 있을까? 묻는다. 칼레츠키는 아마 조롱이나 당하고 퇴짜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종류의 저서를 쓴 학자는 대학교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여러 분과 학문으로 나뉜 대학의 학문적 현실이다.

 

오늘날 대학에 인문학자는 없고 국문학자, 영문학자, 사학자, 철학자 등 개별 학문 분야 전공자들만 있다. 하지만 그런 개별 인문학 분과학문조차 대학내에서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근대사회 형성과 존립의 토대로 상정한 사회와 정의라는 두 규칙은 사람들이 당위로서 공정한 관찰자에 대해 믿는 상황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탈주술화된 근대인에게 그런 형이상학적 가정은 허구일 뿐이다.

 

오늘날 인문학이 처한 난점은 인간이 더이상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는 시대에 인문학의 역할과 가치를 어떻게 재규정할 수 있느냐다. 막스 베버는 전통시대의 모든 숭고하고 궁극적인 가치들이 공공 영역에서 추방된 근대의 지적 상황을 세계의 탈주술화라고 불렀다. 세계의 탈주술화로 일어난 합리화는 인문학을 학문의 최전선에서 후방으로 밀어내고 빈자리를 과학이 대신 채우는 것으로 인식의 나무를 재구축했다.

 

이런 패러다임 전환의 기폭제가 된 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이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천동설을 배척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지지하다가 이단 재판을 받아 화형 당했다. 브루노와 갈릴레오의 결정적 차이는 브루노는 연금술의 신인 헤르메스와 이집트의 신 토르의 영향을 받아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반면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한 관측결과를 근거로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했다는 점이었다.

 

갈릴레오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을 종교와 과학 사이의 모순이나 불일치가 아니라 학문의 두 방법론 즉 사변적 논리로 이야기하는 것과 관찰 결과를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로 푸는 것의 차이로 이해했다. 갈릴레오는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오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갈릴레오를 교회의 탄압으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과학의 순교자로 추앙하는 것은 후세인들이 만든 신화다. 갈릴레오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의 연구에는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학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새로운 과학적 사실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문제 제기로부터 세상을 보는 방식이 중세 기독교 믿음에서 과학적 사고로 바뀌었다는데 있다.

 

파울 파이어아벤트에 의하면 갈릴레오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 용인했지만 갈릴레오는 지동설만 진리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해 갈등을 야기하고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갈릴레오가 일으킨 바람은 종교보다는 학문을 바꾸었기에 과학 혁명이라고 불린다.

 

후설은 진자의 동시성과 낙하법칙 등의 객관적 세계는 발견했지만 생활세계를 수학이라는 이념의 옷으로 은폐하여 과학의 영역에서 추방한 갈릴레오를 발견의 천재인 동시에 은폐의 천재라고 말했다. 새로운 지식이 성립하고 세계관이 바뀌는 과정에서 혼돈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 주장했듯 이성의 빛은 광기의 그림자를 동반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과 지식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이성의 빈번한 추방 없이 진보는 일어나지 않는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상황에서 타당한 유일한 규칙 또는 오직 그것을 준거로 해서만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는 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괜찮다고 주장했다.

 

자유로운 학문 세계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오로지 과학지식에 근거해 세상에 질서를 세우고 인간을 이해하려는 과학주의의 결핍이 아니라 어느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을 이단으로 처벌하고 금지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고 배제하는 지식의 독재다.

 

과학사도 문화사에 포함된다. 문화의 다양성은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이 그러하듯 다른 문화와 관계를 맺고 접합하는 것으로 발현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교류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확정성은 그들 각각의 세계에 반영되며 그것이 상호 문화적인 이해와 과학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진리란 인간과 관계 없이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생활세계의 토대 위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만들어진다. 오늘날 인류의 실존 문제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지구와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지에 대해 재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빅히스토리의 선험적 조건은 인간 없는 역사는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275 페이지)

 

인간만을 주체로 설정하지 않은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관건은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지키고 실존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가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문제는 역사가 과학이 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인간 삶에 쓸모 있는 이야기가 되는가 아닌가다.

 

클로드 새넌의 말이 흥미를 돋운다.“우리는 과거를 알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미래를 통제할 수 있지만 알 수는 없다.” 역사가는 인간, 시간, 공간의 3간(間)을 조합해 일관된 이야기로 역사를 쓴다.(251 페이지)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으로 구성된다. 그 둘을 연결해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는 구조가 플롯이다.

 

역사라는 용어는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서 성립한 것이 아니라 기록자가 탐구, 서술한 것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257 페이지) 이는 동서양 모두 그렇다. 역사가에 의한 기록으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역사의 시작을 인류 탄생이 아닌 문자의 탄생으로 보는 관념을 낳았다. 이런 문자 중심 역사학은 과거 인류가 살았던 대부분의 시간을 역사 영역 밖으로 추방했고 우리는 무엇인가란 물음에 나오는 우리를 문자 기록을 남긴 자들로 한정하는 경향을 낳았다.

 

문자 기록을 남긴 자들은 대부분 지배자들이다. 그들에게 역사가 인류 전체가 아니라 왕조와 국가와 같은 특정 정치 공동체의 서사를 의미함에 따라 역사 이야기의 공간적 프레임이 생겼다.(258 페이지) 국가 간의 역사 분쟁도 역사 3간(間; 인간, 시간, 공간)을 조합해 자국사를 구성하는 문법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사는 민족을 상수로 하여 시간과 공간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반면 한(漢)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민족이 아닌 영토를 준거로 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규정했다. 중국은 고조선, 고구려 등을 중국사가 아니라 중국과 적대적이었던 오랑캐의 역사로 인식한 전통을 무시하고 주변국의 역사를 침탈하는 역사 공정을 벌이고 있다.(254 페이지)

 

진화의 플롯으로 빅히스토리 스토리텔링을 구성할 때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는 진화가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성으로 진행되는 일반적 과정인가다. 물론 진화의 시계에서 늦게 등장한 생물일수록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는 과정에서 더 큰 복잡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주 차원의 일반적 경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류는 1억 5천만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었다. 단적으로 이 사실을 감안하면 진화는 반복 불가능하고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임을 알게 된다.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신비는 유독물질이던 산소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원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균 덕분이다.

 

세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균은 수십억 년간 지구를 지배했다. 이들은 네 가지 혁신(광합성, 호흡, 진핵세포, 유성생식)을 통해 복잡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지구환경을 바꾸었다.(281 페이지) 우리 몸의 30조 개 세포는 7년이 지나면 모두 바뀐다. 그럼에도 같은 나로 인식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정체성을 만드는 기억 덕이다.

 

양자역학에 닥치고 계산하라는 말이 있다. 물질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이 합리적으로 이해 불가능하지만 실재로 그러하니 이유를 따지지 말고 그냥 수용하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식으로는 살 수 없다.(295 페이지)

 

우주가 아무리 크고 영원하다고 해도 그것은 지구라는 창백한 푸른 점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가 내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에 관한 정보를 생산하고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298, 299 페이지) 인간은 과학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인간은 과학만으로 살 수 없다. 인문학이 충분조건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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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론 껍질 깨기 한강문화유산연구원(한강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12
에이드리언 프랫첼리스 지음, 유용욱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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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프랫첼리스의 책이다. 원어 제목은 ‘Archaeological theory in nutshell’이다. 우리 말로는 고고학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지만 통과절차적 의미를 담아 고고학 이론 껍질깨기라 했다. 번역자는 이론은 강의실에서 주입식으로 배우고 도서관에서 암기식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경험적으로 터득하거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험하던 것이 어느 시점에 구체화되어 개념어들이 언명 체계화하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책 서두에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면 뭔가를 덧붙이는 사람은 신성모독자다.(토사포스 메길라; 토사포스; 탈무드 주석, 메길라; 에스더서가 수록된 유대교의 두루마리.)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에 가할 수 있는 비판점 하나는 발굴을 시작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고고학자는 이미 그 유적에서 발생한 모든 일의 배후에 계급투쟁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서 보듯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보다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더 관심을 가졌던 데 비해 알튀세르는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렴하는 제도들에 관심을 가졌다.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인공물의 위력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는 마크 레오네가 해석한 18세기 미국 메릴랜드의 귀족 윌리엄 파카의 정원이다. 파카는 자신의 지역 내 영향력이 쇠락하자 원근법과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복잡한 형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테라스를 연속적으로 만들고 정원의 화단을 대칭으로 배치해서 경관에 질서를 부여했다.

 

레오네의 해석에 따르면 파카가 정원을 꾸민 목적은 방문객들에게 정원 주인이 심오하고 박식하며 자연 법칙에도 통달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과시를 통해 파카의 훌륭한 지위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상한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저자는 정치적이지 않은 페미니즘은 언어도단이라 말한다. 페미니즘 고고학의 핵심적 특징은 젠더화된다는 것이다. 젠더 관계가 인간 사회에서 항상 주요한 구성 요소였다는 의미다. 페미니즘 고고학의 목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창조하는 데 고유한 작주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뿐 아니라 남성 위주의 성적 편향을 폭로하고 그것을 타파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작주성; agency’에는 개인이 자기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어떤 힘에 종속된다기보다 개인 스스로가 삶을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라고 보는 개념이 들어 있다.)

 

자연선택설이나 빅뱅이론은 세상에 대해 설명하는 생각들이지만 퀴어이론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 후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정신은 단지 주어진 정보를 걸러내고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던 모종의 구조들에 따라 자료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가지고 모든 의미가 통하도록 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방식의 기저에 구조가 깔려 있고 궁극적으로 구조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어떤 면에서 구조주의적이다. 레비스트로스도 구조주의적이지만 그는 마르크스와 달리 물질보다 정신의 구조를 우선시한다.

 

구조주의는 특정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에 맥락적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조주의 고고학자들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비판을 받는다. 만일 그대가 날것/ 익힌 것, 공공/ 사유 등의 이항대립이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상징 자체의 의미를 다루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해석학적 이해는 물렁물렁하고 모호하지만 과학적 이해는 딱딱하고 익히 알려진 측정 방식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구조주의적 방법을 단지 본질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다. 고고학은 종종 하위계층(subaltern)의 경험을 재구성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롤랑 바르트는 예측가능성과 완결성의 느낌으로 얻는 감정을 즐거움/ 기쁨이라 부른다. 즐거움/ 기쁨의 사악한 쌍둥이가 주이상스(jouissance)다. 통념을 파탄내는 것, 기존의 고정된 범주를 무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의 고고학 유적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표현해보라고 말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자신을 인류학자로 인식한다. 인류학자들은 개인의 삶과 경험보다 집단의 그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푸코는 보편적 진리는 없고 그것을 찾는 것은 환상이며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은 국지적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풍요롭다는 말은 유적을 해석함으로써 고고학자들이 상상하는 지평을 확대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현상학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겪는 경험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고학에서는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이지만 과거인들이 살던 유적을 그들의 감각을 통해 어떻게 느꼈는지 밝히기 위해 현상학을 채용한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정신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날것 그대로의 정보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것과 달리 사람들은 사물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자신들에 대한 자각,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한 다발의 필터를 거치면서 경험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문화적 필터와 경험이 만들어내는 한 다발의 필터와 경험의 복합체를 아비투스라 불렀다. 사람들은 감각기관으로 입력된 정보를 아비투스의 영향을 받는 렌즈를 통해 처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주변을 경험한다. 계량화할 수 있는 자료는 딱딱하지만 감각적인 정보는 물렁물렁하다.

 

에틱(etic)한 접근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외부자의 시각을 취한다. 이런 접근은 과학적 방법의 기본적 요건이며 실증 가능한 관찰 결과인 사실을 가지고 통제 가능한 비교를 하려 한다. 이에 현상학자들은 이즈음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이런 석조 기념물을 이용하고 체험한 과거인들에게 경관 내에서 크기가 색깔이나 입지보다 더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어디에 써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이런 에믹(emic)스럽거나 내부자적 접근은 현상학적 방법의 핵심이다. 각각의 유물들은 크기, 색상, 형태, 위치, 다른 유물들과의 관계 등 여러 가치 특성을 갖는다. 현상학적 접근은 전체를 하나로 이해한다. 실제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고고학은 일부 연역적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귀납적이다. 저자는 과거에는 어느 시점이나 상관없이 모든 집단이 어두움에 대해 무섭고 위험하다고 여겼을까? 묻는다.

 

그 반대로 어두운 동굴은 뭔가를 편안하게 숨기거나 안락하게 숨어 있을 장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물렁물렁한 주관적 데이터를 주로 다루는 현상학적 입장만 취하면 뚜렷한 해답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경험주의자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관념론은 사고와 생각이 행동보다 선행하고 더 중요하다고 믿는 신조다. 기능주의는 문화적 관습 및 제도는 유기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신체 각 부위를 함께 작동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거나 변화한다는 생각이다.

 

담론은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나 특정 학문 분야 내에서 생각이 소통이 이루어지지만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 모종의 규칙들이다. 모더니즘은 종교나 선천적 지혜 대신 과학과 논리적 의사결정을 통한 인간의 진보를 강조한다. 목적론은 어떤 산물이나 결과를 미리 상정하는 모델이다.

 

아날학파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으로 거대하고 장기적인 과정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전통적 서사를 통해 역사로 구현되는 자잘한 사건들의 밑에 보이지 않게 내재해 있다.(기후나 지리적 여건들이 역사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아비투스는 개개인이 특정 장소와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터득하는 모든 태도, 범주, 무의식적 관습 등을 일컫는 말이다.

 

작주성은 개인이란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힘에 갇힌 무력한 볼모가 아닌 그들 삶의 능동적 창조자라는 견해다. 주이상스는 불협화음 같지만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감흥으로서 우리 머릿 속의 기본 가정을 배반하는 비익숙한 것들로부터 나온다. 해석학은 사물의 의미가 고유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해석이란 사람이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 과정이다. 해석학적 접근에서는 새로운 이해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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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신이치는 제가 좋아하는 생물학자입니다. 2008년 ‘생물과 무생물 사이’, 2009년 ‘모자란 남자들’을 읽은 데 이어 2010년 ‘동적 평형’을 읽은 지 12년만인 올해 ‘생명해류’를 읽었습니다. 아니 만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책을 선택해 읽은 것이지만 후쿠오카 신이치가 말한 대로 “작가를 발굴하고 치켜세우고 달래고 얼러서 글을 쓰게 하는 사람”인 편집자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본 책이 제 앞에도 나타났기에 저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뿐입니다.

 

앞의 세 책은 생물학 전문 책이지만 ‘생명해류’는 일정 부분 지질학과도 관련이 있는 생물학 책입니다. 제게는 정독한 세 권의 저자가 쓴 신간이지만 지질학과 연관이 없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벌써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이번에 읽은 ‘생명 해류’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작가는 혼신을 다해 작품을 쓴다.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때만의 에너지라는 게 있다. 그래서 비슷한 것은 이제 쓸 수 없다. 인생작은 2개일 수 없다. 두 번째는 언제나 빛바랜 하찮은 것일뿐이다.”

 

언제일지 모르나 다음에 나올 책은 ‘생명해류’와 다르되 지질학의 성과나 내용도 반영되는 책이기를 기대합니다. 세 권의 생물학 책에 이어 지질학적 내용이 반영된 책이 나온 것은 작가의 집필 계획 또는 사상의 변천에 따른 것인지 편집자의 의도를 따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작가는 평소부터 다윈이 탐험한 진화론의 산실인 갈라파고스 제도(諸島)를 그대로 밟기를 소망했었습니다.

 

그의 그런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관련 강연 등을 보고 출판사측에서 탐사 제안이 온 것입니다. 저자는 다윈의 고향이라 불리는 갈라파고스는 사실은 가장 다윈적이지 않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근거는 갈라파고스 생물들은 광대한 생태적 지위를 누리며 서로 자유롭게, 생존의 선택지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존경쟁이나 자연도태의 압력에 노출되지 않고 오로지 좋아하는 장소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좋아하는 먹이, 좋아하는 행동양식을 선택하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해류’를 흥미 있게 읽은 것은 남미대륙에서 1000km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의 갈라파고스를 탐사한 생물학자의 지질 내용도 반영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생명해류’는 작년에 읽은 윌리엄 글래슬리의 ‘근원의 시간 속으로’와 대조적입니다. 이 책은 지질학자의 지질탐험기입니다.

 

대조적이라 했지만 이런 부분은 어떤가요? “이곳 바다에서는 바다를 둘러싸는 암석의 일부였던 원자가 표면에서 떨어져나간 뒤 조류(潮流)의 흐름에 따라 자유로이 떠다니고 있다. 이 원자는 단순한 열역학으로 싸인 대화를 통해, 바람에 실려온 먼지, 성간(星間)입자, 분해된 동물의 사체, 썩어가는 식물에서 온 다른 원자들과 뒤섞인다. 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는 하나의 개체로 통합되고 진화하면서, 생명체나 화학적 퇴적물 혹은 단순한 용해 분자를 구성하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깊이 흘러들어가거나 바다의 표면으로 솟아오르고 증발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눈송이가 되고 갠지스강의 홍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우리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179 페이지)

 

"별이 바위에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는 오규원 시인의 시 구절을 다시, 더 구체적으로 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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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논어를 만나 행복해졌다 - 나로 살아가기 위한 든든한 인생 주춧돌, 논어 한마디
판덩 지음, 이서연 옮김 / 미디어숲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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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논어를 만나 행복해졌다'의 저자 판덩은 '나는 불안할때 논어를 읽는다' 등을 쓴 논어 전문가이다. 그는 혁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공자의 말에 견주어 보자. 공자는 자신은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술이부작이라는 말도 했다. 계승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는 배움에 대해 세 가지를 말했다. 묵묵히 아는 것, 싫증 내지 않고 배우는 것,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등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도 공자처럼 묵묵히 아는 것, 싫증 내지 않고 배우는 것,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실천할 수 있을까? 배움을 즐기는 공자의 경지에 다가가기 힘들다면 우리는 만족지연능력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만족을 미룰수록 인생의 선물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남을 보듯 자신을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공자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소중히 대하라고 말했다. 공자는 꿈 속에서도 주공을 그리워했다. 젊은 시절 공자는 주공의 꿈을 자주 꿨다. 하지만 노년의 공자는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었던 것 같다.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이제는 정말 늙었구나. 주공을 꿈에서 못 본 지가 오래 되었다. 공자는 은나라의 주왕을 물리친 주나라 무왕의 동생 주공을 존경했다.

 

본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번민하지 않는 자에게 열 번을 말해도 소용없다. 공자는 번민하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않고 애써 표현하려 하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었을때 세 모퉁이에 반응하지 않으면 더는 반복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공자는 마음속 괴로움과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니 나는 너희들을 성급하게 일깨워 주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답을 알려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져 스스로 문제를 깨닫게 할 수도 있다. 문제에 대한 답이 입가에 맴돌 정도로 고민한 흔적이 보일 때에야 나는 너희에게 설명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 먹을 때는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공자는 예를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은 사람과 유족들을 사랑한다면 장례식에 참석해 저절로 예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의 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공자는 안연에게 부가 만약 구해서 되는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잡는 사람이라도 나 또한 하겠다. 만일 구해서 되는게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걸 따르겠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 소(韶)를 듣고 3개월 동안 고기맛을 몰랐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자를 고리타분한 책벌레로 상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공자는 다재다능 했다. 마차를 직접 몰았고 무예에도 출중 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삶의 품격과 정치를 중요시했던 공자는 음악과 예술을 좋아했다. 어떤 일에 깊이 몰두해 파고들다 보면 자신까지 잊어버리곤 하는데 무아지경이라는 사자성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무아지경은 서양의 한 천재 과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뉴턴의 여동생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뉴턴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떤 일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식사 시간을 알려 주지 않거나 식탁에 밥이 놓여 있지 않으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뉴턴의 사진을 보면 상상이 갈 것이다. 잠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산발이 된 머리로 일상을 보냈다. 아마 머릿 속에는 언제나 우주의 비밀을 해결하기 위한 공식들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던 뉴턴에게 밥을 먹는 일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수학자 가우스도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다. 산책을 하던 도중 대단히 아름다운 공식을 떠올렸던 가우스는 그 공식을 까먹을까 두려워 빨리 기록하려 했지만 수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가우스의 눈에 검은 칠판이 들어와 재빨리 공식을 적었다.

 

그런데 갑자기 칠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우스는 칠판을 쫓아가며 계속 공식을 적었다. 한참 칠판을 쫓아가던 가우스는 자신이 공식을 적은 칠판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마차 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의 무아지경은 짧게 끝나지 않았다. 석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물론 몰입의 시간으로 사람의 진지함을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로 혼신의 힘을 쏟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친 밥을 먹고 냉수를 마신 뒤 팔베개를 하며 즐기는 삶. 이런 일상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극히 평범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시간도 행복하다고 느끼면 지상 낙원이 될 수 있다. 공자는 내면을 다스려 그 어떤 순간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초월과 해탈의 경지에 오른 인물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공자는 5, 60대에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늦은 나이에 공자는 주역에서 자신이 주장해온 중용의 도를 뒷받침하고 검증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마도 주역을 일찍 배웠다면 좀 더 선명하게 난세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공자는 노력하면서 즐거워해야 비로소 몰입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즐겁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몰입의 상태가 되지 않는다.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있는다라는 공자의 말은 노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는다는 말은 즐거움을 뜻한다. 늙음이 장차 다가오는 것도 모른다는 말은 몰입의 상태에 이미 들어섰다는 의미다. 삶의 즐거움은 몰입에 있는 것이다.

 

부의 엔트로피 행위를 통해서 엄격하게 자신을 단속하고 타인의 선한 점을 가려 따르고 단점을 바로 잡는 성장의 마인드셋을 하자. 타인의 행동과 결과는 그것이 옳건 그르건간에 모두 자신에 대한 경험으로 삼을 수 있다. 타인은 언제나 나에게 참고서가 된다. 공자의 말은 쉽다. 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부의 엔트로피 행위나 마인드셋이란 용어는 이렇게 쉬운 행동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공자는 사람을 성인, 어진 사람, 군자, 일반인으로 구분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성인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 공자는 살아 생전 성인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공자를 성인이라 생각하지만 공자는 자신이 성스러움과 어짊에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공자는 남에게서 좋은 점을 배우는 것을 지식을 구하는 차등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지식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다. 이는 성인에 해당된다. 다음 단계는 배워서 아는 사람이다. 곤경에 처해야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일단 창업을 해놓고 난관에 부딪혔을 때 배우리 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곤경에 처해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배움의 단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공자는 배움을 통한 점진적인 발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동시에 갑자기 이치를 깨닫는 순간도 있다고 말했다. 공자는 묵묵히 아는 것, 배움을 싫증 내지 않는 것,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배움을 통한 점진적인 발전이다. 공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생활태도를 거론했다. 사치스러운 것과 지나치게 검소한 것이다.

 

공자는 사치스러운 사람은 버릇이 없거나 겸손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사치와 버릇없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사치는 자신의 체면을 높이고 자기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사치스러운 사람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타인의 평가에 신경쓰기 때문이며 이들은 자신의 체면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태어나면서부터 예를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살아가면서 자신을 반성하며 천천히 일의 경계를 배우고 기준을 명확히 세우며 예로써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에 부합하는 사람은 과격하지 않고 극단적이지 않고 무모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모습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성격이 남달랐다. 내성적인 안회는 항상 온화하고 침착했다. 모든 일에 만족했고 즐거움을 찾으려고 부단히 수련했다. 노자와 함께 도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장자는 안회의 말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을 정도이니 역시 수련의 경지가 높았던 공자의 제자였다고 볼 수 있다. 호기심이 강한 자공은 질문을 좋아했다. 스승인 공자와의 토론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자로는 경솔하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다. 천하를 마음에 품은 증자는 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의 문장은 스승인 공자보다 더 웅대하고 힘이 넘쳤다. 심금을 울리고 깨달음을 주는 내용도 많았다. 증자는 6척의 고아를 맡길 수 있고라고 말했다. 6척은 약 140센치 미터이다. 6척의 고아는 그래서 머리가 굵어진 아이를 말한다.

 

대개 입양을 할 때는 친자식처럼 키울 수 있는 갓난아이를 선택한다. 하지만 6척의 고아는 친자식처럼 키우기 힘든 나이다. 몸과 마음이 제법 성숙해진 청소년을 입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식도 청소년 시절에는 힘들기 마련인데 오죽할까?

 

증자가 6척의 고아를 맡길 수 있고라고 말한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이라도 상대방에게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가 두텁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공자의 우상인 주공은 강태공과 더불어 주나라를 창건한 공신이다. 주공은 주나라 왕실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 주례를 제정했다.

 

공자는 종종 사람을 칭찬할 때 그 당사자를 주공과 비교했다. 공자는 주공 같은 재주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거만하고 인색하다면 볼 것도 없다고 말했다. 거만하고 인색한 사람이라면 능력이 아무리 많아도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거만함과 인색함을 가진 사람은 내면의 즐거움이 부족하다.

 

다시 일어서는 용기의 작가 알프레드 아들러는 열등감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의 가치와 전체 사회의 가치가 하나로 융합되게 하려면 자기중심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아야 한다. 모든 일에서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 곤경에 빠지기 쉽지만 사회 가치를 고려하면 어떤 성과든 이룰 수 있다. 공자의 말은 항상 침착하고 여유가 있다. 그는 천하의 도가 있고 없는 것과 같이 중요한 주제까지도 담담하게 말한다.

 

그가 이처럼 담담할 수 있는 이유는 운명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든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를 찾아 계속해서 더 높은 것으로 오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공자는 사람들이 멀리해야 할 세 가지 단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 단점은 호기스러우면서 곧지 못한 것이다. 호기스러우면서 곧지 못한 사람이란 겉으로는 털털하고 너그럽게 행동해 뭐든 문제 삼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마음은 그렇지 못한 이를 말한다.

 

두 번째 단점은 무지하면서 성실하지 않은 것이다. 무지한 사람이 성실 하지도 않다면 큰 문제다. 세 번째 단점은 무능 하면서 신뢰가 없는 것이다. 공자는 위와 같은 단점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고 뭐라 해 줄 말도 없다고 말한다. 장점으로 단점을 보완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장점이 더 많은 사람이라면 장점과 장점이 합쳐져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겸손하고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잘 한다면 지혜로운면서 어질게 변할 수 있다. 장점들은 서로 합쳐져서 상부상조 한다. 우리는어짊에 대해 비록 거기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은 향해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목표로 삼아 추구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결코 권태로운 과정이 아니며 오히려 도중에 있는 수많은 검증과 시험이 우리의 인생을 더욱 더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공자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굳이 고대의 예법을 고민하면서까지 쓸데없는 예식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절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국가의 정상을 만났을 때도 허리를 굽혀 악수하면 그만이니 예법이 갈수록 간소화되고 있다.

 

사실 이는 필연적인 일이다. 세계 모든 문화, 민속, 예절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물질적인 부분이 변하면 민간 풍속도 서서히 따라서 바뀌고 민간 풍속이 바뀌면 제도도 따라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두뇌는 선형 구조가 아니다. 만약 우리의 두뇌가 선형 구조라면 70세까지 사는 사람과 50세까지 사는 사람이 얻은 지식함양 비율은 7대 5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의 두뇌는 지수형 성장을 한다. 사람의 두뇌는 신경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마다 두뇌 신경의 수량은 거의 차이가 없지만 대뇌 신경의 연결이 지수적 구조의 양상을 띠기 때문에 공자처럼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하고 귀찮은 일 중에 잘하는게 많은 사람은 두뇌 신경의 연결이 더 많을 수 있다.

 

게다가 공자는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가르쳐주었다. 지식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지식을 전수해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자의 대뇌 신경은 아주 긍정적인 자극을 받아 지수형 성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과 자신의 나이 차이가 5년, 10년 밖에 나지 않는데도 학문의 경지는 상상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배움의 과정은 항상 직선으로 상승하지 않는다. 오히려 임곗값을 돌파하면서 성장한다. 임곗값 돌파란 무엇인가? 일반 대기업에서 물을 끓인다면 온도계가 없어도 섭씨 99도에서 물이 끓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섭씨 99도에서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섭씨 100도에 이르면 보글거리며 거품이 생겨난다. 섭씨 99도에서 백도에 이르는 과정을 바로 임곗값 돌파라고 한다.

 

슬럼프와 같이 견디기 힘든 상황을 겪으면 자신이 제대로 배우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고 배우는게 무슨 가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다른 사람은 왜 쉽게 배우는 거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성과를 거두고 논문을 쓸 수 있는 거지? 왜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은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런 상황에 부딪히는 이유는 평지만 걸어와서 지수형 성장 과정에 진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포기한다면 임곗값을 돌파하지 못하고 계속 평지에만 머물게 된다. 난관에 직접 부딪혀야만 임곗값을 돌파하고 S형 곡선을 그리며 위로 상승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임곗값을 돌파하는 과정이다. 안회, 자공, 자로가 오랜 시간 배웠음에도 공자와 격차를 줄이지 못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임곗값의 근사치에만 머물렀고 공자는 이미 임곗값을 돌파했다. 공자는 시간은 눈앞에 흐르는 강물처럼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러간다고 말했다.

 

중국 당나라 시인 진진앙이 쓴 등유주대가가 명시로 손꼽히는 이유도 공자처럼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밀하면서 간결한 문장으로 모든 사람이 속으로 생각하지만 말로는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해 냈다. "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고 뒤에 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천지의 유구함을 생각하다가 홀로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

 

저자는 인생의 진리 중에는 반복해서 들을 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은 논어를 몇십 차례 읽었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논어를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생에서 더 경계해야 할 점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의지가 꺾이는 경우다.

 

이따금 우리는 외부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의지를 빼앗기기도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학업과 이상을 포기하라 강요하지 않는데도 쉽게 포기한다. 사실 사람은 눈앞에 고통이 아닌 행복이 있을 때 더 쉽게 의지를 빼앗긴다. 부유함과 편안한 삶 앞에서 목표와 신념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소 배움에 힘쓰는 사람이라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당장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면 의지가 흔들려 뜻을 빼앗기게 된다.

 

공자는 자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한 칭찬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않는 장점만 있을뿐 선량하고 훌륭한 기존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그러니 너는 아직 배워서 발전에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불교의 세 가지 보배는 불, 법, 승이다.

 

도교에도 세 가지 보배가 있다. 노자는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항상 잘 지켜 보존한다. 하나는 자비이고 둘째는 검소함이고 셋째는 감히 천하의 일에 앞장서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유교에도 세 가지 보배가 있다. 바로 지혜로움, 어짊, 용맹스러움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통하는 세 가지 미덕이자 유교가 이상으로 추구하는 인격이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맹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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