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富)의 미술관(니시오카 후미히코); 예술

2. 조선의 유학자, 조식(허권수); 역사

3. 우연이 만든 세계(션 캐럴); 생물학

4. 패자의 생명사(이나가키 히데히로); 생물학

5. 과학은 미래로 흐른다(에른스트 페터 피셔); 과학

6.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닐 올리버); 고고학

7.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월터 앨버레즈); 과학(빅히스토리)

8. 과학으로 보는 문화유산(신은주); 문화과학

9. 생명해류(후쿠오카 신이치); 생물학

10. 역사학 너머의 역사(김기봉); 빅히스토리

 

2022년 발간책들 중 베스트 10(서평 작성)을 골랐습니다.(읽은 순서) 예술 한 권, 역사 한 권 외 생물학, 문화과학, 빅히스토리, 고고학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회학, 철학 등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지질학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에 지질 내용이 들어 있고 생명해류에서도 지질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서평을 작성하지 않은 책들 가운데 지질학 책들도 읽은 것이 있습니다. 2023년에 출간될 책 가운데 어떤 책을 처음으로 고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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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행성 물리학, 판 구조론, 지구 내부 화산 원리 등을 연구하는 예일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비코비치의 책이다. 그는 말랑말랑한 과학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책은 전체 여덟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 우주와 은하, 2장 별과 원소, 3장 태양계와 행성, 4장 지구의 대륙과 내부, 5장 바다와 대기, 6장 기후와 서식 가능성, 7장 생명, 8장 인류와 문명 등이다.

 

저자는 어두운 밤 하늘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우주의 시작임을 언급한다. 우주의 나이가 무한대라면 즉 시작이 없다면 밤하늘은 어둡지 않을 것이다. 무한대의 나이를 가정한다면 아무리 멀어도 빛이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고 공간이 팽창한다는 것은 우주에게 생일이 있다는 의미다.

 

우주의 경계면 바깥에는 빛도, 물질도, 에너지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다. 세상에 그런 공간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세상이란 우주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계 바깥이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애써 상상할 필요는 없다. 우주에 존재하는 질량과 에너지의 70%는 암흑 에너지이고 25%는 암흑물질이다.

 

별과 행성, 인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물질은 나머지 5%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들은 거의 대부분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은하와 같이 큰 규모의 우주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한정된 감각으로는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최초의 기체 구름은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지구와 같은 행성이 탄생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그 많은 원소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리튬, 베릴륨, 탄소, 산소, 질소, 납, 철 등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반응을 통해 만들어졌다. 우리 태양은 핵융합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 중력에 의한 수축을 버티면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태양의 중심 온도는 1,500만도c다. 질량이 태양의 15배 이상 되는 별들은 중심 온도가 1,500만 도c에 도달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수축하면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온도가 1억도c에 도달하면 헬륨이 핵융합반응을 일으켜 탄소와 산소를 만들고 이보다 큰 초거성들은 핵융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철까지 만들 수 있다.

 

무거운 원소를 생산하는 핵융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헬륨 원자핵인 알파입자의 융합이다.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세 개의 알파입자가 두 차례 반응을 거쳐 탄소로 변환하는 3중 알파입자 반응은 매우 드물게 그리고 어렵게 일어나는 사건이어서 산소보다 무거운 원소가 생성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태양계에서 수소와 헬륨 다음으로 흔한 물질은 알파입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지구와 생명체를 구성하는 탄소, 산소, 실리콘, 마그네슘, 칼슘, 철 등의 핵심 성분이다. 지구의 생명체들이 탄소에 기반을 두게 된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탄소는 알파입자 연쇄 반응에서 제일 먼저 생성되는 원소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결합 능력이 뛰어나서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생명의 기본단위인 유기분자는 주로 탄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다. 만일 원시지구에 각기 다른 원소를 생명의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들이 무더기로 등장했다면 탄소에 기반을 둔 생명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질소와 인도 탄소에서 시작된 연쇄 핵융합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원자들은 과거 어느 날 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단 물에 포함되어 있는 수소는 빅뱅 직후 만들어졌다. 별의 후손이라고 하면 무슨 외계인이나 신성한 존재를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가 별의 직계후손인 셈이다. 인간은 육지에 기반을 둔 생명체이고 최초의 생명체는 바다에서 태어났으므로 진화의 한 단계에서 우리의 먼 선조들에게는 물 밖에서 생명활동을 이어갈 만한 육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륙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환경이다. 그러나 대륙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하려면 지구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지구의 내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면 깊이 6,400km에 달하는 금속과 바위층을 직간접으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구의 내부는 멀리 떨어진 은하보다 훨씬 관측하기 어렵다.

 

첨단 망원경을 이용하면 50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은하까지 촬영할 수 있지만 6,400km에 불과한 지구의 내부는 아직도 태반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지구의 내부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은 지구를 관통하는 탄성파를 분석하여 알아낸 것이다. 이 분야를 지진학이라 한다. 지구의 평균 밀도는 5.5g/세제곱 cm다. 물의 밀도는 1g/ 세제곱 cm다. 돌의 밀도는 3g/세제곱 cm다.

 

대부분의 금속은 10g/ 세제곱 cm다. 그러므로 지구의 밀도는 바위와 금속의 중간쯤 되며 내부 깊은 것은 압력이 매우 높다. 지구 내부는 크게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바깥은 가벼운 바위로 이루어진 얇은 지각이고 그 밑으로 지구 반지름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거운 바위로 이루어진 맨틀로 되었으며 가장 깊은 중심부 맨틀보다 무거운 철 코어가 자리잡고 있다.

 

맨틀과 핵의 두께는 거의 같지만 맨틀이 핵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부피는 맨틀이 압도적으로 크다. 실제로 지구 전체에서 맨틀이 차지하는 비율은 80%가 넘는다. 밀도가 다르다는 것은 온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핵을 둘러싸고 있는 맨틀은 마그네슘, 철, 실리콘(규소), 산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큰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을 거쳐 생성된 원소들이다.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지각은 실리콘과 산소를 비롯하여 칼슘, 포타슘, 알루미늄, 나트륨 등 다양한 광물질이 섞여 있다. 처음 이 다양한 원소들은 골고루 섞여 있었으나 융해 과정을 거쳐 분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의 맨틀은 매우 거대하고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냉각 과정뿐 아니라 지질학적 변화 흔적까지 곳곳에 남아 있다.

 

시생대의 맨틀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몇 군데 중요한 지점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굳은 상태였다. 한편 우라늄, 토륨 등 불안정한 방사성 원소와 칼륨의 불안정한 동위원소가 붕괴하면서 발생한 에너지는 맨틀에 열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뜨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을 열대류 또는 자유대류라 한다.

 

맨틀은 물론이고 바다와 대기, 행성과 별, 그리고 당신의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잔에서도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구 대류는 태풍과 뇌우를 일으키고 태양 대류는 흑점을 만든다. 단 대류가 일어나려면 물질의 유동성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 뜨겁고 가벼운 물질과 차갑고 무거운 물체가 쉽게 자리를 바꿀 수 있다. 맨틀은 고체 상태였지만 긴 시간 규모에서 볼 때 유체처럼 행동한다.

 

빙하가 높거나 흔들리지 않고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류는 유체가 열을 식히는 방법 중 하나다. 지표면 근처의 차가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가라앉아서 내부의 뜨거운 물질과 섞이면 전체 온도는 내려간다. 중심부의 뜨거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 표면의 차가운 물질과 섞일 때도 빠른 속도로 열이 손실된다. 그러므로 지구는 자신과 같은 크기의 거대한 돌덩어리보다 식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도 맨틀 대류 자체는 워낙 느리게 진행되기에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거의 정체 상태나 다름없다. 외핵은 액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흐를 수 있고 주성분이 전기적 도체인 철이기 때문에 전류를 실어나를 수 있다. 외핵에서 일어나는 유체운동은 주로 대류와 지구 자전에 의해 발생하며 여기에 걸려 있는 외부 자기장에 의해 전류가 발생한다. 이 과정은 발전기의 작동 원리와 비슷하다.

 

지질학자들은 판구조론 혁명을 불러일으킨 1등공신으로 해저확장의 발견을 꼽는다. 지구의 표면이 움직이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처음으로 대두된 것은 1930년대였는데 당시 유행했던 대륙이동설은 판구조론과 사뭇 다른 이론이었다. 독일의 기상학자 베게너가 처음 제안했던 대륙이동설은 대륙이 대양 지각을 밀어내면서 마치 빙하처럼 표류 한다는 이론(후일 이런 식의 이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인 판구조론은 지표면 전체가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뉜 채 각자 상대적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개개의 조각 위에 놓인 대륙들은 판이 이동할 때마다 무임승차한 승객처럼 따라서 움직인다는 이론이다.

 

지각판이 갈라진 이유는 미스테리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행성 표면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있지 않다. 해저 확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지각판들이 서로 멀어지는데 한 지역에서 멀어지면 다른 지역에서는 가까워져야 한다. 하나의 판이 이웃한 판으로부터 멀어지면 반대편의 또 다른 판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데 섭입대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지질구조판이 처음 생성된 뜨거운 지역에서 멀어지면 차갑고 무거워지면서 서서히 흐르는 맨틀 쪽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해양에서 분출한 용암이 물과 반응하면 각섬석(角閃石; amphibole)이나 사문석(蛇紋石; serpentine) 같은 함수광물(含水鑛物)이 생성된다. 함수광물이 맨틀의 특정 깊이(약 100km)에 도달하면 온도와 압력이 너무 높아 수분을 밖으로 토해내는데 이 수분은 섭입판의 상부로 올라왔다가 근처의 맨틀바위로 유입된다.

 

이렇게 수화(水化)된 바위는 마른 바위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수분을 머금은 맨틀에 용해된다. 실리카를 가장 많이 함유한 마그마는 화강암으로 이는 차가운 용해 과정의 전형적 산물이다. 화강암은 지각이 녹았다가 굳고 또 녹으면서 지금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이는 가벼워서 맨틀에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욕조 배수구 위에 떠다니는 장난감처럼 섭입대 근처에 계속 쌓인다.

 

그러므로 화강암은 지각 위에 점점 더 두껍게 쌓여 대륙지각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124, 125 페이지) 맨틀에 섞여 있던 규산염과 화강암이 융해와 분리를 반복하면서 대륙을 이룰 정도로 누적될 때까지 20억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초대륙의 이합집산 주기를 윌슨 주기라 한다.(윌슨은 캐나다의 지질학자 '투조 윌슨; Tuzo Wilson'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지질구조판과 물은 오랜 세월 지구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지질구조판, 물, 적절한 온도는 삼각대의 다리처럼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 둘이 필요한 관계였다.) 두께가 100km에 달하는 판의 경계면 전체를 매끄럽게 만들 정도로 물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토록 압력이 높은 곳에 다량의 물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빠르게 변형된 판의 경계면에 자연스럽게 노출된 바위들은 특히 작은 광물 알갱이를 함유하고 있는데 이런 바위를 압쇄암이라 한다.

 

이 알갱이들이 바위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판의 경계면이 매끄러워졌고 판이 미끄러지면서 경계면 바위에 손상을 입혀 알갱이는 더욱 작아졌다. 아마도 대륙의 경계는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물 알갱이는 혼자 있을 때 서서히 커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바위는 일종의 치유과정을 거쳐 다시 견고해지고 이런 과정은 온도가 높을수록 빠르게 진행된다.

 

현재 바닷물의 총 무게는 맨틀 무게의 0.05%에 불과하다. 고체 맨틀의 대류는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뜨거운 바위가 압력이 낮은 표면으로 올라오면 쉽게 녹고 녹은 바위는 대부분 대양지각이 되었다. 고체 맨틀의 일부가 녹아서 물과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후 지표면으로 배달되면 화산을 통해 분출된다. 화산은 지면에도 있고 깊은 바닷속에도 있다. 그러므로 대기와 바다가 지구 내부에 존재했다는 가설도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대기의 압력이 1기압일 때 물은 100도c에서 끓지만 기압이 높으면 더 높은 온도에서 끓는다. 부엌에서 쓰는 압력솥은 이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구의 대기압이 60 기압이었던 시절 물은 200~ 300 도c에서도 액체상태로 존재했다. 정확한 비등점은 270 도c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물과 바위에 스며들면서 기온이 서서히 내려갔다. 온실효과가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날씨란 대기의 가장 낮은 층인 대류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류권의 고도는 지표면에서 약 10km까지로 이 영역에서 빠르고 변화무쌍한 열역학적 대류가 일어난다. 대류권 위의 공기층을 성층권이라 한다. 대류권과 달리 성층권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 성층권의 온도가 높은 이유는 오존 때문이다. 오존은 생성되거나 분해될 때 특정 파장의 자외선을 흡수한다.

 

오존층이 없다면 지구 생명체들은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되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동물은 식물에게 산소, 오존이라는 이중의 신세를 지는 것이다. 성층권은 고도 50km까지 계속된다. 성층권 위로 고도 100km까지를 중간권이라 한다. 중간권에서는 열복사가 훨씬 효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성층권보다 온도가 낮다. 중간권 위로는 온도가 훨씬 높고 밀도가 희박한 열권이 있고 그 위로 1만 km까지를 외권이라 한다. 외권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우주(행성간 공간)라 할 수 있다.

 

행성이 태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물이 얼어붙고(화성), 너무 가까우면 증발해 버린다.(금성) 행성에 물이 존재하려면 골디락스 영역에 놓여 있어야 한다. 희귀 지구 가설에 의하면 지구는 은하수의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은 덕분에 생명체 탄생의 적절한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의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에 가까웠다면 초대형 블랙홀이 내뿜는 가공할 복사 에너지에 초토화 되었을 것이다.

 

또한 지구는 탄생 시기도 적절했고(생명이 필요한 원소들이 모두 만들어진 후에 탄생했다.) 물이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태양과의 거리도 적당했다. 천문학적 조건 외에도 지구는 지질구조판을 가지고 있어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달의 조력(潮力)에 의한 조수현상 덕분에 수상 생물이 육지생물 진화할 수 있었다.

 

조간대(潮間帶)에 사는 생물들은 물이 찼을 때 물속에서 살다가 물이 빠지면 육지 생활을 하면서 육상생물의 첨병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지구는 자전축의 공전면에 대하여 적당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서 계절이 주기적으로 변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행성이 떨어지거나 대형 화산이 폭발하여 생명체가 대량으로 멸종한 적도 있고 초대륙이 형성된 후에는 해안선이 급감하여 연안 생태계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량멸종이 일어날 때마다 지구의 생태계는 새롭게 정리되어 생물학적 다양성과 진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저자는 생명이란 화학반응을 이용해 주변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취하여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개체를 말한다고 설명한다.(209, 210 페이지)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결과물이 반응 자체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자가촉매적이다.

 

무기화학반응 중 생명 활동의 특성을 그대로 빼닮은 것도 있다. 가령 불은 호기성 생물처럼 물질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물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광합성과 정반대) 불은 생명과 마찬가지로 더 많은 연료(나무, 잔디 등)를 소모하기 위해 멀리 퍼져나가고 발화할 때까지 연료를 태우면서 자신의 활동을 촉진한다. 그러나 불은 물이나 이산화탄소와 같이 단순한 분자만 재생산할 수 있다.

 

불은 습도에 강한 것과 약한 것이 따로 있지 않아서 주변에 습기가 많으면 그냥 꺼진다. 생명체는 물 이외에 포도당, 지방산, 아미노산, 뉴클레오티드 등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다섯 종류(수소, 탄소, 질소, 산소, 인)로 이루어졌다. 수소는 빅뱅 직후 만들어졌고 나머지는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졌다.

 

지표면에 사는 생명체는 예나 지금이나 직간접적으로 광합성에 의존해왔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지구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생명체의 출현이고 두 번째는 광합성의 개발이다. 지구에 생물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태양에너지와 급변한 대기, 그리고 광합성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광합성을 어린 학생들도 아는 기초 지식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새로 발견되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복잡하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과 침팬지는 지금으로부터 700만년전에 진화나무에서 분화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차드에서 발견된 초기 인류의 화석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인간이 침팬지와 작별을 한 결정적 계기는 직립보행이다. 대형 유인원도 두 발로 걸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직립보행의 가설들 중 셋이 눈길을 끈다. 1) 음식을 손으로 운반하면 은밀한 곳에 저장해놓을 수 있어 끼니때마다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2) 먼곳까지 볼 수 있어 포식자를 피하고 음식을 찾는 데 유리하다. 3) 두 발로 서서 양팔을 휘두르면 몸집이 실제보다 커보여 상대방을 위협하여 우위를 점하거나 더 좋은 짝을 만날 수 있다 등이다.

 

직립보행은 체온을 유지하는 데도 유리하다. 우리가 땀으로 체온을 조절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기가 뜨겁고 습했던 5천만년 - 3천만년전에 태어났다면 다른 방식으로 체온을 조절했을 것이다. 사람의 땀은 춥고 건조한 날씨에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저자는 지질학자로서 재러드 다이아몬드가‘총, 균, 쇠’에서 제기한 근대사에서 식민지 확장 사업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의문에 대해 논한다. 다이아몬드는 그 원인을 대륙의 방향성에서 찾는다. 대륙의 방향성을 결정한 것은 판의 구조다. 거대한 대륙의 한복판에 자리한 유라시아 문명은 주로 동서 방향으로 확장했기 때문에 제국 전체에 걸쳐 기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적인 기후대가 수백, 수천 km에 걸쳐 비슷하더라도 도중에 사막이나 강이 있으면 수십 km 간격을 두고도 환경이 크게 달라진다. 지질구조판 중 유라시아 판은 지질학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대륙의 축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어서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영토확장을 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농경민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다른 대륙들은 대부분 남북방향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기후가 비슷한 동서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어려웠고 남북으로 진출하면 국물과 가축들이 서식가능 지역을 벗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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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에너지,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지자기장, 지질구조판, 물이 있어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성"(데이비드 비코비치 지음 '거의 모든 것의 기원' 128 페이지)이란 말처럼 지구에 물이 많다. 하지만 담수는 제한적이고 그와 관련한 문제의식은 너무 미진하다. 기상 이변이 빈번하면 우리 몸에 물을 넣는 것조차 쉽게 할 수 없는 험난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식량 위기 거론은 제한적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지(衆智)를 모아야 할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첨단의 미래 식량을 논의한다. 누군가 인간을 석기 시대의 심성을 가지고 중세의 사상에 묶여 21세기의 첨단 기술로부터 도움을 받는 존재(복합체)로 규정한 것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운 2022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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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이 다 간다. 올해 읽은 책 가운데 인상 깊은 책을 고르는 것은 미루고 오늘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 이야기를 할까 한다. 올 9월에 읽은 ‘과학은 미래로 흐른다’가 내가 가장 최근 읽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책이다. 이 책 외에 내가 읽고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 ‘빛보다 빠른 생각 아인슈타인’ 등이다.

 

최근 읽은 김기봉 교수의 ‘역사학 너머의 역사’에서 갈릴레이와 브루노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다가 피셔의 ‘금지된 지식’이란 책을 만났다. 피셔의 ‘또 다른 교양’이 더 관심을 끄니 ‘금지된 지식’은 후일을 기약해야겠다.

 

제3장 유럽 근대 과학의 탄생이란 챕터에 수록된 글들이 눈길을 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 / 코페르니쿠스적 귀결 / 인간의 코페르니쿠스적 분열 / 가설과 그것의 실험 / 운동 속의 세계 / 운동의 법칙 / 빛의 운동 등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말만을 들어본 입장으로는 그의 이름 뒤에 전회는 물론, 귀결, 분열 등의 명사가 붙은 글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기대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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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 - 지구 살림의 길, 철학이 답하다
신승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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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명해류‘에서 언급된 갈라파고스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다윈은 갈라파고스에 가서 진화의 신비를 발견했지만 만일 그곳에 철학자가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묻는다. 이는 현대문명의 대안을 구상하는 차원의 말이다. 물론 후쿠오카 신이치는 직접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했고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

 

생명, 생태, 생활을 범주로 삼원 다이아그램을 그린 저자는 자신의 책이 세상을 관조하도록 만드는 창문이 아니라 거주지를 벗어나서 세상에 들락날락하며 접속을 만들어내는 창문이 되기를 희망한다. 1부 동물, 생명 그리고 철학/ 2부 세 가지 생태학/ 3부 탄소 중독적 문명/ 4부 에너지, 석유 정점/ 5부 성장의 한계 등으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는 플라톤의 실재론에 맞서 반실재론의 입장에서 강의록을 준비했다. 저자는 철학이 네모는 네모다라는 식의 고정관념 대신 네모가 세모가 되고 세모가 원이 되고 원이 별표가 될 수는 없는지,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고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다채로운 변화를 유발하는 잠재성의 뾰족한 측면을 개념화하는 작업이며 이에 따라 현실세계는 욕망과 사랑, 정동의 비표상적인 흐름이 갖는 잠재성 자체이지 표상적인 고정관념으로 이루어진 실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저자의 책을 통해 과학, 실험실 등에 대해 알 수 있음은 다행이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 과학은 서로 연결된 종합적 현실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실험실이라는 이상적인 평균 상태의 공간이 필요해진 것이다.(23 페이지) 생명 각각의 개체가 갖고 있는 특이성과 창의적인 능력이 모두 보편적이고 추상화된 질서 속에 놓이는 것이 실험실 공간이다.

 

플라톤의 보편적 형상은 어떤 개체적 속성도 배제된 채 똑같은 조건에 갇힌 실험동물의 모습과 같다. 플라톤의 실재론과 동물실험실을 연결시켜 사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프랑스의 과학자 철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다. 라투르는 돼지 뇌 3,000개를 녹여서 만든 TRF라는 물질은 실험실에서는 실재하지만 자연환경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쿼크 입자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에 의하면 쿼크 입자는 사실상 과학 실험실에서만 존재하지 자연환경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반실재론의 질문은 의학, 생명공학, 과학 등에서 당연히 진리라고 여기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은 현실 세상을 넘어 아주 다른 진리의 공간을 조성했으며 그것은 마치 실험실과도 같은 이상화된 공간일 뿐이다.

 

원자 단위 이하의 물질에 빛(광자)을 쏘는 순간 이미 그 물질은 튕겨져 나가거나 변화해 버린다. 눈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조차도 하나의 개입이다. 저자는 반실재론자다. 반실재론이란 지식이란 스스로의 힘과 삶이 구성한다는 점에서 구성주의다. 객관적인 진리를 밝히는 것이 철학의 목표가 아니며 진리는 스스로 자기 생산하고 구성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기성 아카데미에 기반한 사람들로부터 진리의 추구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강력한 항의를 들어야 했다.

 

저자는 이에 진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고, 뜨겁게 그 일을 해낼 사람이 만들어지고 열정과 욕망, 열정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구성적 실천의 순간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분리시키고 격리시켜 이상화하는 방식 즉 분석적 실재론의 방식이 아니라 공유지에서의 연결과 접속, 접촉을 통해서 암묵지, 노하우, 집단지성, 오픈 소스 등을 추구하는 것이 생태적 지혜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생명의 고통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생각들의 인식론적 기반 중 많은 부분이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되었다. 공장식 축사에서는 동물을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존엄이 배제되어 있는 단어인 도체(屠體)라고 부른다. 도체는 반도체나 물체와 유사하게 들리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 도체는 도살한 가축의 가죽, 머리, 발목, 내장 따위를 떼어낸 나머지 몸뚱이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데카르트는 신체를 가진 존재가 아닌 의식하는 존재만을 주체로 간주했다. 저자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기계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 들뢰즈, 가타리의 기계 개념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기계학처럼 하나의 큰 구조에 종속되어 부품처럼 움직이는 폐쇄되고 코드화된 기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자기 생산하며 외부에 대해 열려있는 네트워크나 생태계 ,공동체와 같은 자율적인 기계로 구상되었다.

 

이러한 기계 개념은 자동적인 기계가 아니라 자율적인 기계를 의미하며 동일성 반복의 기계 혹은 반복강박 기계가 아닌 차이 나는 반복의 기계 혹은 편위 운동의 기계를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자동기계 개념을 비판한다고 해서 기계 전부를 거부하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계 작동은 신체와 동물들에 대한 경멸 속에서 구축되었던 자본주의 문명을 고장내고 자율적인 움직임을 도모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동물을 자동 기계라고 간주하는 근대주의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등장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반격을 받았다. 이 문제제기는 근본주의 노선인 동물권리론과 현실주의, 점진주의, 개량주의 노선인 동물복지론 사이에서 과정적이고 진행형적인 동물보호운동 노선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근본주의와 현실주의의 이러한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기계가 아니며 공장식축산업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공통된 인식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생태중심주의는 생태계라는 연결망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개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분리되거나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일종의 시스템적 사유로 나아간다. 저자는 피터 싱어의 유정성(有情性) 논의가 수동의 정동에만 머물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개념은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능동의 정동인 기쁨과 수동의 정동인 슬픔을 구별하면서 서로에게 윈윈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구도를 구상한 바 있다.

 

정동은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촉발된다는 점에서 수동이다. 그래서 수동의 수동으로서의 정동인 슬픔이라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정동이 동물에게 분명히 있지만 더 나아가 수동의 능동으로서의 정동 즉 서로 상호 긍정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쁨의 정동 역시도 있는 것이다. 정서가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근원이라면 정동은 그 저변에 흐르는 힘과 에너지다. 정동이 움직일 때의 마음이라면 감정은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다.

 

감정은 우발적인 사건과 표상에서 발생하는 정서표현 양식이고 정동은 표상과 표상, 사건과 사건을 이해하고 횡단할 때 생기는 강도, 온도, 밀도, 속도와 같은 강열도의 정서 변환 양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동저작은 욕망과 무의식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성과 의식 중심의 기존 서양철학과 달리 우리 내부에 있는 욕망의 야생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주 심원한 무의식과 욕망의 지연도 속에서 자본주의는 정신분열증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이 두 사람의 지적이다.

 

정신분열증은 야생성이 억압된 동물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정형행동에 비유될 수 있다. 정형행동은 자유롭게 대지와 영토를 뛰어놀고 움직이고 자라는 욕망이 억압되는 순간 만들어지는 협착과 폐색 이후의 심상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욕망의 야생성을 억압하여 가족, 국가, 신 내부로 감금해야 하며 그 때문에 마치 야생동물이 철창에 구속되면 보여주는 모습처럼 무의식에 구속복이 생겨 정신분열증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억압되어 구속된 정신분열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야생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탈주로와 지평을 개척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주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아래서 가족이라는 세포 단위로 관리되고 있는 인간들이 원래는 광야에서 늑대 무리처럼 횡단하고 이동하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야생동물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욕망을 분출하여 색다른 집단을 이루는 것을 분열이라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에서의 정신분열증과 구별하였다. 분열은 야성적인 욕망이 폭발할 정도로 생명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고 흐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현존 문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들에 대해 반문명증이라는 규정을 내리면서 공격한다. 이 두 사람이 아이, 광인, 여성, 동성애자 등 소수자 주체성 내부에서는 생명의 에너지와 활력의 역동성과 같은 사자와 늑대의 야생성을 지상에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에는 동물 되기에 대해 언급한 장이 있다. 되기의 개념은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서 사람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되기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나서였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되기는 변형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는데 쉽게 생각해서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에서 벗어나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사랑하고 신체가 변형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상대의 정동에 감응하여 사랑하기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 변형이며 동일성의 철학처럼 사랑하기에 같아지는 것이거나 커먼즈나 공통성의 철학처럼 사랑하기에 닮아가는 것과는 궤도를 달리한다. 철학적으로 ’되기’는 흐름의 전통을 형성해왔고 ’이기’는 존재의 전통을 형성해왔다. 물론 주류의 철학은 이기의 전통이 장악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 되기는 인간 자신에 대한 야생적 생명력을 되찾자는 개념이다. 이것은 현존 문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역적이고 역행적으로 느껴질만한 개념이다. 보통 생태주의라는 개념은 자연생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가타리는 우리의 마음과 사회적 관계로까지 그 개념을 확장시킨다.

 

가타리에게 마음 생태학, 사회생태학, 자연생태학이라는 개념이 세 가지 생태학이다. 저자는 전체론적 입장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생태계라는 개념을 나무와 숲의 비유를 통해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따로 떨어져 있는 나무 100그루보다 서로 연결되어 숲을 이룬 나무 50그루가 외부 환경에 더 잘 맞설 수 있다고 한다. 숲 내부에는 외부환경과 구분되는 내부환경이 생겨서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질서로서의 생태계의 윤곽이 어렴풋이 느껴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지배가 인간에 의한 자연에 대한 지배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의 최고 형태는 계급 문제를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이기에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 양상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 형태로 나타난다는 에코 패밀리즘도 사회생태주의와 공명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이란 책에서 마음생태, 자연생태와 더불어 사회생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적 관계와 배치의 변화 없이 생태위기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인식의 전제조건에 질문을 던지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감행했다. 인식은 대상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마음의 문제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기한 것이다. 즉 인식주체의 문제인 어떻게 인간의 인식이 가능한가, 어떻게 이성적인 사유가 가능한가?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대상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인식의 그물망에 걸려든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토성 그 자체는 알 수 없으며 망원경에 비친 토성이라는 영상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근대사회에서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개념이 중요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자연과의 관계회복으로의 전회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칸트의 선험적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이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자연을 파악할 수 없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선험적이라는 개념은 자연도, 생명도 인간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칸트는 선험적이면서도 종합적인 판단으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등을 사례로 든다. 칸트는 자신의 선험적 종합판단이 필연적이면서도 정보량을 확장하는 합리적인 인식능력이라고 스스로 평가하지만 단지 사고 실험이나 논증구조 개념의 구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저자는 칸트의 종합판단은 생태계의 원리로서의 종합이 아니라 단순히 사고실험에 기반을 둔 인식의 방법론상에서의 종합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범주와 도식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려는 칸트의 복잡한 그물망을 보면서 사실 그러한 그물망으로도 대상 세계인 자연을 완벽히 파악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의 인식이나 앎은 자연의 일부만을 파악할 수 있을뿐 자연과 생태계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物) 자체를 이야기하는 칸트는 겸손하게 말할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지만 남달리 정교한 방법을 갖고 있다.” 자신을 낮추면서도 어필하는 그의 말이 상당히 호소력 있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저자는 생명의 구성주의를 언급한다. 이는 ‘앎 = 함 = 삶‘의 구도를 갖는다. 이는 학(學)이라는 아카데미아 전통이 아닌 습(習)이라는 도제조합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다.(172 페이지)

 

칸트의 인식론적 구성주의는 생명 활동이 전제되지 않은 인식의 그물망에 불과했지만 생명의 구성주의는 생명활동 자체가 스스로의 존재와 인식을 구성하는 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폴 비릴리오의 질주학(dromology)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간의 정치가 무력화된 곳에는 속도의 정치만이 존재하게 된다. 비릴리오는 전쟁에서 속도가 도입된 최초의 사례를 손자병법에서 찾는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구절로 유명한 손자병법은 사실 전쟁에 속도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병법서다. 이 책은 적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기동적으로 적과 싸울 것을 제안한다. 비릴리오는 2500년전 손무가 보여준 ’속도를 전쟁에 도입하는 생각‘을 정치 전략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손무 이전에는 전쟁을 적에 대한 무차별 기만이나 후방교란, 기동전과 같은 속도가 개입된 요소보다는 진지, 참호, 요새, 성곽 같은 영토적인 성격으로만 바라 보았다.

 

손자병법은 이후 전세계 군사전략가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그 최종 결과물이 나치의 전격전이었다. 현대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속도에 기반한 파시즘의 리듬으로 숨쉬며 작동한다. 오늘날 초국적 자본은 매끄러운 운동이 보여주는 속도의 정치를 통해 국가라는 차단벽마저 무력화시키려 한다. 파시즘의 전격전보다 더 빠르고 무시무시한 속도를 내는 일상이 민중에게 요구된다. 그 이유는 민중이 다른 생각을 품고 모여 거리를 점거하는 등의 특이한 방식으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속도에 몸을 싣고 있는 직장인, 노동자, 시민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인 줄 꿈에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며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오늘날 질주하는 자동차 문명을 멈추기 위해서는 시간의 바리케이드를 쌓아야 한다. 경쟁사회와 속도 사회에서 정지는 곧 죽음이지만 생명과 자연에게 정지는 지속이며 창조적 진화의 출발점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인 자동차 문명 내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속도에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달려가며 그것이 자본주의 외부를 상실시켜 세계 어디에나 똑같은 삶을 인식하는 과정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일본의 경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뜻 있는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움직여서 매주 금요일 완전 재가동을 반대하는 자양화(紫陽花; 수국) 혁명이라는 시위를 조직했다.

 

2012년 7월 15일 도쿄 남부의 요요기 공원에는 20만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다. 이 집회를 주도한 수도권 반원전 연합은 처음에 시작할 때 30명을 목표로 한 집회가 20만명의 거대한 시위대로 확산되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나 국가주의는 니체 본인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지만 니체가 초인을 이야기할 때 가치 창조자로서 생성과 긍정의 시각을 보이면서도 공동체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존 가치를 모두 거부하고 기존의 사회적 관계망을 초극한 인물로서 초인을 설정한 점은 역사적 왜곡의 근거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치는 핵 개발을 시도했다. 이는 독일 우정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엄청난 물량과 인력이 투자되었지만 나중에는 나치가 핵개발이 될 때까지 전쟁을 끌면 불리하다는 판단해서 재정후원이 약화되었다. 당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아 유명해진 하이젠베르크는 베를린 물리 연구소 소장으로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관여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중수(重水)를 실은 배가 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거나 나치의 핵무기 기술이 미국의 핵개발 계획인 맨하튼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등을 조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역사적인 실증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졌건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독일 점령은 나치 핵무기 개발을 중지시키고 그 기술력을 미국 등 연합국에 이전시키것으로 보인다. 나치의 핵개발 시도는 니체의 초인 사상이 핵을 통해 완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의식한 결과로 나타났다. 아주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영역에서의 원자들의 충돌이 연쇄반응으로 전체 사회를 파괴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원자 폭탄의 원리는 사실 가치 창조자이자 가치 파괴자인 초인 사상의 궤적을 따른다.

 

핵 에너지는 생명과 생태와 무관하게 색다른 움직임이 될 수 있다는 양자 수준의 가치 창조자인 초인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핵 에너지는 파시즘의 숨결을 가지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폴 비릴리오는 핵이야말로 현대 속도 문명의 최종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문명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값싼 석유였다. 석유는 태양에너지를 받아 증식했던 생명들이 1억년 가량 농축되고 발효되어 만들어진 고농도 에너지원이다.

 

사실 어떤 에너지원도 석유 만큼 농축 비율이 높지 못하다. 기후 위기 상황의 도래는 성장과 축제가 끝났으며 다른 방식의 문명을 수립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의 문명은 미래세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것을 탕진하고 소모하겠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석유에 기반해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던 근대화 과정에 대한 향수와 낭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축제는 끝났고 무대는 철거되고 있다. 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생물대멸종의 위기가 너무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가톨릭 가정의 안정되고 안락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으나 나치 정권에 동조한 프랑스 비시정권의 비굴함과 이에 동조하는 기성세대의 위선에 대한 반항심 속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푸코는 대학 시절 온몸을 자해한 채 교정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것이 동성애에 의한 자기혐오와 수치에 의한 것인지 기성세대의 혐오와 니체 사상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만났다. 그의 책 ’광기의 역사‘의 소재이기도 한 그 시기의 경험은 그가 근대의 주체와 진리를 의심하게 되었던 내재적인 이유가 되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은 봉건제 때의 말 20필과 하인 20명에 해당하며 도시 중산층의 삶의 수준은 세종대왕이 누렸던 생활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화석연료 이전 모든 에너지는 소수의 권력에 집중되어 있어서 개인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수많은 영역에서의 미시 권력은 개인에게 분산되고 우리의 모든 삶에 침투 하였으며 마치 네트워크 효과처럼 개인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서 순환하는 에너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푸코가 언급한 권력의 미시 물리학은 화석연료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다. 화석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통속적 삶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 미시적인 관계 영역에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들고 주체를 생산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삶이 아니라 사실은 통제사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푸코에게 배치는 권력이 개입되어 있는 미시 관계망의 일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힘의 관계가 관철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배치에서 생명체의 삶은 주조되거나 포획된다. 기후위기로 인한 화석 문명 이후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문명의 시작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가올 문명을 준비하고 미래세대에게 새로운 희망을 약속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존의 사람 중에서 외부로 던져 버린 많은 부분들을 복권해야 하며 마을과 주변에 살아가는 마을 주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알고 있는 오래된 지혜에 접속해야 한다.

 

그렇다면 화석 문명 외부는 죽음과 공포의 외부가 아니라 새로운 활력과 즐거움의 외부일 것이다. 화석문명 이후의 희망은 경제체제와 시스템의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을 때 가능하며 동시에 외부는 우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재생에너지 기반의 삶을 살고 있는 공간은 유일하게 마라도였다. 마라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양광 에너지 등을 이용하여 섬의 에너지 수요를 자체조달 했다. 그러나 마라도 관광객들을 위한 카트 전기 차가 급격히 늘어나더니 이를 충전하기 위해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해졌고 결국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하게 되었다. 시장의 논리에 따라 에너지 자립마을 마라도가 중앙에너지에 의존하는 섬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이야기 했던 정신역동학 과정이 우리의 삶과 욕망에 작동하고 있으며 탄소 중독적인 삶과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기후변화에도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2008년 탄소발자국이라는 개념이 창안되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발생하는 탄소를 빨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면적을 환산한 수치다.

 

하지만 보이지 않던 탄소 소비 수치를 숲의 면적으로 환산하여 보이게 한다 해도 탄소를 배출하는 삶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이는 프로이트가 언급했던 ’무의식이 의식화되면 치유된다는 자유연상 기법‘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처나 트라우마의 원인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배치가 바뀌지 않으면 정신적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중독이라고 할 만큼 탄소를 소비하는 통속화된 삶의 방식은 무의식적인 삶의 배치의 영역에 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아주 기이한 책이다. 한때 스피노자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는 것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스피노자는 평생 하숙집에 살며 아주 소박하게 살았으며 초월적 신의 덕목인 검소, 순수, 겸양을 자신의 내재적 삶의 원리로 삼았다. 철학사에서는 흔히 스피노자를 합리론자로 분류하지만 그의 사상 내부는 냉철한 합리론이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의 따뜻한 사랑과 욕망에 대한 탐구로 가득하다.

 

더욱 합리론자들이 거부하는 욕망을 끌어안음으로써 인간 내부의 역동적인 활력과 정서를 만드는 욕망과 정동을 철학의 주제로 만들었다. ’에티카‘는 첫사랑이 젊은이들의 신체를 변용시켜 감정의 기복과 호르몬 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변용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변용은 신체 조성이 부드럽게 또는 연약하게, 딱딱하게 바뀌는 현상으로 자신의 외부의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변용을 되기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사랑과 욕망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사랑과 욕망이 공동체적 관계망에 나타날 때 그것은 관계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티카‘를 읽다 보면 공동체적인 관계망에 사랑과 욕망의 내재적인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사회의 아주 가까이에 있는 유한하고 국지적인 생활 세계에 대한 미시적인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예속되었기 때문에 슬프고 무능력해지는 예속인의 삶과 자유롭게 때문에 사랑과 욕망으로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며 역능으로 가득 찬 자유인의 삶을 대조하면서 서술한다.

 

사실 예속과 복종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진단이다. 모든 초월적 권력의 작동원리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삶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과 자유를 향항 욕망으로 가득하다. 스피노자는 자신을 후원하던 공화파 드 비트 형제가 정치적 반혁명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이에 맞서 피켓시위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그의 친구들의 간곡한 만류와 제지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책의 후반부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서술 되어서인지 자유인의 사랑의 행동과 공동체의 기쁨의 관계망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가득하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신이 자연에 내재한다는 사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범신론을 아주 오해하는 것이다. 신은 가까운 사람과의 사랑 속에 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원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신은 자연과 생명, 신체에 내재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될 수 있다.

 

무한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신이 아주 구체적인 사물이나 신체 양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작은 공동체 내에 사랑은 유한하며 국지적이지만 신의 사랑이 내재되어 있고 그 사랑의 관계망이 무한히 조합되고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줄 가능성을 품고 있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유한한 자연, 사물, 생명이 연결되어 무한히 결합되고 변용되는, 무한으로 이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자연을 응시한다.

 

물론 다양한 자연과 생명의 양태들이 접촉하고 연결되어야 비로소 이런 무한한 변용이 가능하다. 생태계의 연결망이 가진 무한한 능력 속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이며 서로 관계하는 과정들 속에서 자연생태는 순환하며 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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