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 여행 : 규슈 7대 조선 가마 편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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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님의 ’일본 도자기 여행‘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갈피갈피 일본의 도자기 명소를 찍은 화려한 사진들이 맛을 더한다. 저자가 논문이나 다큐멘터리 형식의 책을 쓰는 것을 넘어 엄청난 노력과 시간, 비용을 들이면서 방대한 도판을 곁들인 것은 그 노력이 우리 도자 산업에 대한 국민적 애정과 질책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도자기 전쟁‘이란 등식을 긍정한다.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면 도공들을 생포해 올 것을 각 장수들에게 명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 바탕에 도자기가 있다는 것, 일본 도자기가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에 자만심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우리 도자 산업을 망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것 등이다. 왜란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일본의 도자기들은 유럽으로 수출되어 막대한 부를 낳았고 이는 메이지 유신이 추진될 수 있는 자본이 되었다. 이 자본을 바탕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도자기의 운명이다. 메이지 유신 성공의 기반이 되었지만 후에 전국의 번을 현으로 바꾸는 폐번치현(廃藩置県) 정책이 펼쳐짐에 따라 다이묘(だいみょう: 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들이 영지를 반환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이 운영하던 전국의 관요(官窯: 어용 가마)들이 폐쇄된 것이다. 팔산(八山: 일본어로는 핫산)이란 이름이 있다. 경북 고령군 운수면 팔산리에 살다가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인 팔산은 1601~1602년 무렵 후쿠오카의 다카도리산 서쪽에 가마를 열어 일본 도자기의 시초가 되었다.


관요 폐쇄로 인해 벌어진 9대 팔산과 10대 팔산의 갈등은 한국 도자기의 역사, 그리고 예술의 위상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 살아남기 위해 가마에 불을 지피고 민간에서 쓰이는 자기라도 만들어 팔아야 한다는 10대 팔산(아들), 대대로 현상물용 명기를 만들어 온 자부심으로 살아 왔기에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그릇을 만들 수 없다는 9대 팔산(아버지)... 9대 팔산은 뜻을 거스른 아들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유명(幽明)을 달리 했다. 작품전을 준비하던 10대 팔산은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60세에 숨을 거둔다.


1973년 서울 신세계 백화점에서 다카코리 세이잔 여사의 작품전이 열렸다. 초대 팔산 입장으로는 11대 후손 팔산인 세이잔 여사의 몸을 빌려 하게 된 375년 만의 귀국인 셈이다. 여사는 주최측이 제공한 비행기를 마다하고 부산행 배를 이용했다. 초대 팔산이 붙잡혀 온 길을 따라 감으로써 그 영혼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싶어서였다. 책의 부제는 ’규슈의 7대 조선 가마‘이다. 가라쓰(당진唐津)를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의 전진기지였던 곳이다. 가라쓰의 원래 이름은 한진(韓津)이었다. 고대 가야 사람들이 처음 이곳과 교류하면서 한민족의 나룻터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일본 도자기에 끼친 조선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소개된 가마는 사쓰마야키 가마이다. 정유재란 때 납치된 조선 사기장들에 의해 도자기의 요람이 된 곳이다. 심수관(沈壽官)을 빼놓을 수 없다. 사쓰마도기(薩摩燒)를 개창한 인물이 심수관이다. 심수관은 왜란 때 일본에 납치되어 간 조선인 도공 심당길의 후손이다. 심수관은 심수관가 15대를 총칭하는 말이다. 일본어로 아시데 가쿠(あして かく)라는 말이 있다. 발로 쓰라는 말이다. ’일본 도자기 여행‘은 그런 말을 붙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귀한 책이다. 아니 단지 열심히 발품을 팔아 낯선 일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수많은 사진을 찍고 글감을 건져올린 노고는 빛난다.


저자는 훗날 자신이 죽어 한 줌 흙이 되었을 때 어느 사기장이 그 흙으로 하나의 찻사발을 만들 수도 있을지니 그것이 바로 억겁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저자는 ’일본 도자기 여행‘이 자랑스러운 것은 메이지 유신과 관련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아리타 및 사가 현이 어떤 공헌을 했는지를 밝힌 것이라 말한다. 그간 우리 학계는 아리타의 출발이 이삼평공(公)이었다는 사실 또는 일본의 본격적 도자 문화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사기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에만 매몰되어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아리타와 도자기가 한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도공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이삼평(李參平)은 일본 아리타(有田), 이마리(伊萬里) 도자기의 비조(鼻祖)로 꼽힌다. 저자는 아리타 및 규슈 도자기의 의미는 조선 출신 사기장에 대한 연구만으로 종결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일본 근대화에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현대 일본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등의 총체적 관계를 모두 풀어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나 역시 물꼬를 튼 저자의 연구가 후속 연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는 점에서 저자와 생각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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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8
호안 푸니에트 미로 지음, 이경자 옮김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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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Joan Miro: 1893 - 1983)는 개인적 이름을 버림으로써 일반적 보편성을 얻는 과정을 통해 침묵 속에 숨어있는 소리, 부동 상태에서의 움직임, 무생물에서의 생명성, 유한상태에서의 무한성, 공백 사이에서의 형태, 익명성 안에서의 자기 자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개관 기념으로 Joan Miro, the parade of obsessions' 전을 개최한 경기도 미술관의 미로 도록(圖錄)에 인용된 미로의 말이다.


왜 강박(强拍) 또는 망상(妄想)일까?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침묵 속의 소리, 부동 상태에서의 움직임, 무생물에서의 생명성, 유한상태에서의 무한성을 찾는 것은 일본의 유학자 오구라 기조가 말한 제3의 생명을 닮았다. 그가 제시한 제3의 생명이란 어린아이가 보여주는 귀여운 몸짓, 더운 날 오후에 문득 느끼는 바람의 시원함, 꽃 한 송이가 서 있는 모습의 순진함.. 등이다. 기조가 말한 제1의 생명은 육체적 생명, 생물학적 생명을 말한다.


2의 생명은 비물질적 생명, 종교적 생명 등을 말한다. 미로의 경우 침묵 속에 숨어있는 소리, 부동 상태에서의 움직임, 무생물에서의 생명성, 유한상태에서의 무한성, 공백 사이에서의 형태, 익명성 안에서의 자신을 찾는 것과 강박성, 망상 등이 어울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것들을 강박적으로 추구했다고 하면 아귀가 맞는다. 도록에 의하면 미로의 작품은 11,000점 정도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세종문화회관 전시회에 선보이는 미로 작품 수는 300점이니 고도로 압축된 비율의 수이다.


미로의 세 번째 손자인 호안 푸니에르 미로, 페르낭 브로델과 함께 일하기도 했던 글로리아 롤리비에르 라올라가 함께 쓴 미로: 추상과 기호의 장인은 미로에게 최초의 양식(糧食)과 색감을 부여한 것으로 카탈루냐와 마요르카 섬의 산을 꼽는다. 학생 시절의 미로는 점토를 반죽하고 축축한 덩어리를 잡아 누르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데생이나 회화에서 갖지 못했던 육체적 즐거움을 만끽했다. 미로 역시 고흐, 세잔, 쇠라의 작품 경향을 답습하다시피 한 시절이 있었다.


1918년 첫 개인전을 연 미로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당시 구매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미로는 동향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 - 1973)에게 늘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미로가 그린 포도나무 밑동은 미로 자신이 카탈루냐 땅에 쏟는 애착을 반영하듯 휘어져 있다. 이는 강박적인 애착의 결과이다. 28세에 연 첫 번째 국제전시회 역시 실패로 끝났다. 모색의 시기에 미로는 시가 자신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회화를 뛰어넘는 곳으로 자신을 인도했다고 말했다.


미로가 기호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것을 저자들은 그의 작품에 환상이 깃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한다. 미로는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등과 블로메가(: Rue Blomet) 그룹에 속했었다.(블로메는 프랑스의 지명이다.) 전쟁(스페인 내전: 1936 - 1939)이 미로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전쟁은 미로로 하여금 무의식을 그대로 옮겨놓는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 내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미로와 고흐에게 구두가 갖는 공통의 의미이다. 그것은 가난, 기아, 고통, 비극 등을 상징한다. 미로가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같은 참여정신이 담긴 작품을 그리지 않은 것은 서술적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로는 여자, , 새 등을 그리는 데 강박적이었다. 미로가 에드가르 바레즈,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 지미 헨드릭스 등의 음악을 좋아한 것은 이채롭다. 미로는 지미 헨드릭스와 자신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로가 즐겨 읽은 문학작품들은 랭보, 아폴리네르, 로트레아몽 등의 것들이다. 미로는 그림과 시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미로는 청동검을 만들기도 했다. 숭배의 대상인 청동 여성상도 미로의 목록에 포함된다. 커진 육체는 영혼의 보충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르그손의 말이 생각난다. 미로의 추상 세계,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이해하려면 새로운 눈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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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예찬 - 넘쳐야 흐른다
최재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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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품 예찬‘을 읽게 된 이유는 책 읽기 또는 공부와 관련한 습성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시기까지는 이런 저런 분야의 책을 남독(濫讀)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기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 습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습관에서 좀체 벗어나기 어려워서 문제이다. 한편으로는 읽기가 헤프고 비효율적이라 생각을 하고 한편으로는 혜자(惠子)에 대한 장자(莊子)의 일침(一針)을 생각하며 헤프고 넓게 읽는 습관을 정당화하는 습관의 반복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나이다.


장자는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딛고 서 있는 넓이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바닥 밑면만을 남겨두고 주위의 땅을 파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라는 말로 ’자네의 이론은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혜자를 머쓱하게 했다. 장자의 일침은 촌철살인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서문(序文)에서 저자는 맡은 바 소임에 그저 알맞은 정도의 사람을 앉히면 허덕허덕 겨우 해낼 뿐이지만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 일을 맡아야 여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도 말했듯 이런 사고 방식은 자연주의적 오류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자연에서 관찰되는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 즉 좋은 것으로 보고 그로부터 당위를 이끌어내어 사회에 적용하는 오류이다. “인간을 탐구하는 과학이 자연과학에서의 실험실 상황을 흉내냈을 때 그것은 인간적 삶의 현실을 결정적으로 왜곡하게 된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85 페이지) 같은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지구라는 행성의 생물은 낭비를 기본 조건으로 선택했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자연이 낭비를 선택했듯 자본주의도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언제나 출렁이게 마련이라는 말을 하는데 자연주의적 오류를 의식해서인지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대안을 고민하는 현실을 언급한다.


핵심 챕터인 ’자연은 낭비를 선택했다’(1부)를 포함한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거품 예찬‘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을 두루 담아낸 책이다. 거품 예찬을 뒷받침하는 말은 ’넘쳐야 흐른다‘는 말이다. “무모하리만치 많이 태어나고 그중에서 특별히 탁월한 개체들만이 살아남아 번식에 이르는 과정에서 바로 자연선택의 힘이 발휘된다. 그 결과로 적응 진화도 일어나는 것이다.”(39 페이지)


’나눔과 베풂‘이란 글에서 저자는 경쟁자가 거의 다 제거되었을 때 다양성을 잃어 천재지변이나 병원균 등 외부의 침입에 취약해지는 생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생태계에서 지나친 독점이 파멸을 부르듯 인간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은 자연과 사회를 연결짓는 저자의 주지(主旨)를 다시 접하게 하는 부분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얼핏 생각난다. 굴드는 생물 진화에는 목적성이나 방향성이 없다는 말을 했다. 낭비라는 개념으로 진화를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정해진 길, 정해진 목적이 없기에 무분별하고 비효율적인 것 즉 낭비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자연은 먼 옛날 벌어진 진화의 결과에 따라 각본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86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들려준다. 행동생태학의 불모지인 이 땅에 들어와 학생들의 다양한 학업 욕구를 무시한 채 자신만의 연구 주제를 고집하기 매우 어려웠다는 저자는 그래서 일찌감치 자신을 버리고 학생들과 함께 실로 다양한 동물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해 왔기에 자신의 연구 논문 목록이 그야말로 산지사방(散之四方: 사방으로 흩어짐), 중구난방(衆口難防: 여러 사람의 입은 막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일일이 막아 내기 어렵게 사방에서 마구 지껄여 댐을 이르는 말)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에게 일관된 키워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회‘이다. 어떻든 나는 산지사방, 중구난방이란 저자의 말에서 넓어 헤프고 비효율적인 내 관심의 스펙트럼을 본다. 관련하에 유의미하게 읽히는 글 가운데 ’피카소처럼 살자‘를 빼놓을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이라는, 아무나 칠 수 있는 홈런이 아닌 ’최고의 홈런‘을 친 야구 선수에 비유된다면 피카소는 좋은 공, 나쁜 공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방망이를 휘두르며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 야구 선수에 비유된다고 말하는 이 글의 요지는 섬광처럼 빛나는 천재성보다 성실함과 약간의 무모함이 때로 더 큰 빛을 낸다는 것이다. 거품 예찬의 진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글이다.


실제 야구에서 이 공 저 공 다 휘두르며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타자가 출루율이 높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볼넷을 얻어낸다는 말은 나쁜 볼을 골라냈다는 의미이다. 이 공 저 공 다 휘두르면 안타수는 많아진다. 야구는 안타를 치려는 타자의 시도를 정해진 룰 안에서 방해하는 상대팀 투수라는 장애물이 있지만 피카소의 경우 매너리즘이나 슬럼프에 빠지는 자신이 유일한 난제였으리라. 거품 예찬이란 말보다 피카소처럼 살자란 제목을 지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거품, 천재성보다 성실함과 약간의 무모함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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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꽃잎 속 서정시학 시인선 120
김명리 지음 / 서정시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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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시인의 ‘제비꽃 꽃잎 속’은 다소 특이한 시집이다. 내게 그렇(게 읽힌)다는 의미이다. 구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거의 다 읽었기 때문이다. 정제된 아름다움의 풍성함이 눈길을 떼지 못하게 했다. 요즘 시집들이 대체로 쉽게 읽히지 않는 편인데 비해 쉽게 읽힌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특이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읽힌 것에 비해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든 소감을 다듬어 쓰는 것이든 쓸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이다.


좋은 시이고 이전 시집들에 비해 한층 더 세련된 느낌을 전해주지만 특별히 이야기할 것이 없다. ‘제비꽃 꽃잎 속’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시인의 시집은 ‘적멸의 즐거움’ 단 한 권이다. 나는 물론 ‘적멸의 즐거움’ 리뷰를 쓰지 못했다. 이 시집에서 내가 즐겨 읽는 시는 여럿인데 이 가운데 ‘먼 길’ 같은 시는 외울 때도 무난했고 리듬감이 느껴져 잘 잊히지 않는 좋은 시로 기억한다.


‘적멸의 즐거움’에 실린 시들을 키워드로 나누면 사찰, 여행, 가족, 사찰 여행, 꽃, 물, 계절, 나무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전형적인 서정시의 시어들이 아닌가. 이번 시집은 어떤가. 물소리, 봄날, 꽃, 나무, 새, 가을, 시간, 산그늘, 적소, 가족 등이 주요하게 눈에 띈다. 특기할 것은 당신이란 시어들이 눈길을 끈다는 점이다. ‘적멸의 즐거움’에 당신이란 시어가 들어 있는 시가 ‘사랑의 길’ 한 편이고, 당신으로 바꿔 부를 만한 시가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가을 나무의 말’임을 감안하면 주목할 만하다.


오마던 사람을 당신이라 바꿔도 무리는 없다. 이번 시집에서는 당신이란 단어가 어려 군데 눈에 띈다. “삼만 년 전부터 분홍/ 분홍 터번을 두르고/ 무화과를 팔고 있던 당신을 기억해...”(‘분홍 일다‘), “..먼나무를 오래 그리워하면/ 눈이 먼 나무가 될 것 같다/ 나는 당신이라는 먼 나무 곁으로 가지 못했다...”(’먼 나무‘), “...야간성묘객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밤의 피륙으로 레이스를 뜨며/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베고니아 화분이 놓였던 자리‘), “..나 어디 있는지 당신이 물어오면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당신이 그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어요...”(’풍문‘), “..어느 먼 시간 속엔/ 당신이 타고 내가 내리는 기차...”(’잠잠‘), “...단 하루/ 울지 않은 날의 / 메마른 손바닥에서// 당신 냄새,...”(’달의 민박‘), “오늘따라 당신의 거친 턱수염이 조금도 따갑지 않다...”(’먼 입술‘), “우리가 헤어지던 그해 겨울 당신은 내게 향로를 주었다...”(’선물‘) 등이다. ’적멸의 즐거움‘에서 오마던 사람을 당신이라 바꿔 부를 수 있듯 ’제비꽃 꽃잎 속‘에서는 ’꽃잎 장례‘의 ’그대’를 당신이라 바꿔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화창한 봄날’에 나오는 “...나는 그대가 꾼 길고 긴 꿈..”이란 말에서 그대도 당신으로 바꿀 수 있다. 물론 ‘제비꽃 꽃잎 속’과 비교 대상으로 삼은 시집이 단 한 시집이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래도 덧붙여 리기다 소나무, 두물머리 등의 시어들이 주요하게 재등장했다는 사실은 말하고 싶다. 물론 가장 중요한 단서는 환(幻)이란 단어이다. ‘적멸의 즐거움’의 자서(自序)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나의 시들이 더 낮은 포복으로 대지의 숨통에 깃들여져서 자잘한 한 포기의 풀이나 한 떨기의 꽃으로 환(幻)하기를 소망한다.”는. 일반적으로 환생이란 말은 還生으로 쓰고, 幻生으로도 쓴다. 대체(代替) 가능한 말이다, 그렇다면 한 음절의 환(幻), 거기에 하다를 붙여 쓰는 幻하다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글자는 변할 환, 헛보일 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변할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幻하다란 시어가 있는 시가 한 편 있다. “.. 또 한세월 벙어리가 꾼 꿈으로 환幻하는지..”(‘그 사이’) 그리고 “환幻인 듯“이란 시어가 두 편 있다.”(‘강물 소리’, ‘꽃잎 장례’) 그렇다면 김명리 시인의 시는 왜 특별히 이야기할 것이 없는가. 표면적으로는 시인이 수행자 같은 시심을 발휘해 평정함 속에 미세히 흔들리는(움직이는) 마음의 결을 드러낸 것을 포착하기 쉽지 않아서이다. 구체화해 말하면 아직 시인의 그런 마음씀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내면에서부터 잘 다듬어진 감정으로 바라본 현상들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들려준다. 수없이 찢고 지우고 다시 써내려가는 한 줄의 문장, 잠든 혼을 일깨워 쓰는 한 편의 시...“ 그렇게 전전반측했을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에 근접하는 헤아림과 생각의 숱한 진퇴(進退)를 겪어야 한다. 시인은 그래도 아니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슬픔을 이야기한다.


‘분홍 일다’, ‘제비꽃 꽃잎 속’, ‘산벚나무의 시간’ 등 시집에 수록된 첫 세 편에서 슬픔이란 단어를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이 밖에 ‘이 화창한 봄날’, ‘달의 동심원의 뒤편’, ‘맨드라미’,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낙원의 풍경’, ‘러시안 룰렛’, ‘일월日月을 거쳐’, ‘꽃잎 장례’ 등에 슬픔이란 단어를 만나게 된다. 슬픔이란 단어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단어들로 슬픔을 표현한 시들을 헤아리면 더 많은 목록을 기록할 수 있다.


울음이란 말, 메나리 조(調)라는 말, 눈물이라는 말, 눈물방울이란 말, 울먹이는 것들, 비명이란 말 등이다. ‘꽃보다 작은 꽃’에 나오는 ‘어룽거리’다란 단어도 슬픔 또는 눈물과 상응하는 시어이다. ‘비의 고래’에 나오는 눈시울이란 말은 어떤가. 이 말은 눈 언저리를 뜻하지만 눈시울이 젖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등의 용법을 통해 알 수 있듯 슬픔, 눈물 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꽃밭의 시학’에서 시인은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듯이 피는 꽃도 있다..“고 말한다. ‘눈의 무게’에서는 ”..눈물로 변해서 흘러 다니는 새들의 발자국..“이란 말을 한다. 물론 이 시에는 ”...분통을 터뜨리듯이 피는 꽃..”이란 구절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이다. 이 시에 함께 들어 있는 “..팔순의 어머니/ 주름진 눈가에/ 가물가물 분홍 물살 이는데...”라는 구절 역시 슬픔, 눈물 등을 표현한 구절이다.


시인은 ‘키쿠치의 집’에서 “..무단횡단하고 싶은 마음의 세찬 빗방울들..”이란 말을 한다. ‘눈의 무게’에서는 “,..눈물로 변해서 흘러 다니는 새들의 발자국..”이란 말을 한다. ‘북인도의 달’에서 시인은 “..흙 빛깔의 해 그림자는/ 엷고 푸른 사리를 두른 여인의/ 눈물 괸 검은 눈 속에서 물결인 듯 출렁이고 있다..”는 말을 한다. ‘두물머리 시월’에서는 “.. 길의 서쪽부터 일제히 파랑 이는 저녁의 물살..”이란 말을 한다.


‘입동’에서는 “..궂은 일 없어도 누가 울면/ 흥건히 따라 울고 싶은 입동”이란 말을 한다. ‘러시안 룰렛’에서는 “..너는 무수히 실금 간 내 유골항아리를 들고/ 나는 슬픔을 총알처럼 또 한 발 장전해놓고”란 말을 한다. ‘시간의 흰 그림자들’에서는 “..링거액 반 쯤 찬 겨울하늘 속으로/ 한 덩이 매지구름이 단단히 뭉쳤다 흩어지는 것/ 우리들 둘러싼 시간의 입자들이/ 무수히 방울지고 출렁이는 순간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는 “건기의 밤하늘에도 움푹 팬 물웅덩이가 있네... 사금파리 같은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 여태도 그 속에서 맴돌고 있네/....한 슬픔 떠나보내기 무섭게 뒤이은 슬픔들 흔들흔들 몰/ 려오네 물에도 젖지 않는 저 작은 슬픔들이 와서, 소스라/ 치게 놀란,....// 쏟아지기 직전의 물웅덩이 속에는..../ 물 잔뜩 머금은 구름 그림자가...” 등의 시어로 그야말로 잘 묘사된 슬픔의 촉촉한 정서를 드러낸 시로 읽힌다.


슬픔은 침묵으로 마음 속에서만 일렁이기도 한다. 시인은 “..나는 다만 늙은 산벚나무 꽃그늘 아래/ 진액(津液)이 다한 거름으로 누웠다..”는 말을 한다.(‘내 생애의 백 년 후’) “...나 생겨나기 전의 까마득한 어느 봄/ 날이 꽃 없는 꽃줄기마다 선득선득 고여오는 것만 같다..“는 표현(‘봄날 저녁’)도 슬픔이 고여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부풀어오르는’, ‘비등하는’, ‘일렁거린다’ 등의 시어도 모두 슬픔의 동선을 표현한 것이다.


시집 전체가 슬픔을 표현하는 ‘흐름’의 어휘로 채색되었다. 슬픔으로 일렁이지만 다듬어진, 정련(精練)된 채로이기에 넘치지 않는다. 애이불비(哀而不悲)라고 할까? 주목되는 것은 ‘늦은 독서’란 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러고 보면 내 모든 독서는/ 갈수기(渴水期)의 냇바닥처럼 낮고 메마르고..“란 말을 한다. 촉촉함과 일렁임이 만발한 곳에서 건조함을 표현한 드문 시이다.


시인은 ‘여기를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에서는 ”건기의 밤하늘에도 움푹 팬 물웅덩이가 있네....“란 말을 한다. ‘달의 민박’에서는 ”..단 하루/ 울지 않은 날의/ 메마른 손바닥에서.,..“란 말을 한다. ‘가을빛 속으로’에 나오는 ‘메마른 목숨 끝’이란 시어와 함께 이 시들은 건조함을 표현하는 몇 되지 않는 시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마름과 젖음은 순환한다는 점이다.


이 진리를 표현하는 시어들이 있다. 한 사물의 일시적인 상황을 묘사한 시를 포함해 그렇다. ‘오므리고 펼치고 잠기며/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구름들’, ‘찬찬히 오므렸다 펴는’, ‘팽창하고 수축하는’, ‘오므리고 펼치고 서리고 꺾으며/ 물보라로 단단해진 저 환한 달무리’, ‘오방색으로 일렁이고/ 흩어지는 저녁 잔광’, ‘살아서 천 년, 시들어서 천 년/ 쓰러져서도 천 년을 산다 하는/ 호양나무 뿌리를 적시러’, ‘한 슬픔 떠나보내기 무섭게 뒤이은 슬픔들 흔들흔들 몰/ 려오네’, ‘끝없이 펼쳤다 오므렸다 하네’, ‘꽃 핀 고사목처럼 갸우뚱 부풀어 오르는 봄밤/ 낡은 상앗대로 간신히 괴어 논/ 꽃 피는 밤의 무게에 활처럼 휘면서 번지면서/ 모든 슬픔을 그 속에


지닌/ 품속에 지녀온 날카로운 비수를/ 가만히,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총상 꽃차례로 모였다 흩어지는 저 꽃잎들’, ‘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왔단다 누군가는/ 그 사이 태어나고/ 어느 새 누군가 죽었다는 부고가/ 이따금씩 날아들었단다’, ‘물방울이 뼈에 맺혔다 하느니 솔찮게 풀어졌다 하/ 느니’ 등이다. 이런 영고(榮枯)의 변화는 자신의 시가 자잘한 한 포기의 풀이나 한 떨기의 꽃으로 幻하기를 바란다는 시인의 바람과 상응하고 또 그런 변화를 표현한다.


전문을 소개할 시를 고르라면 나는 ‘물그림자’를 들 것이다.


목백일홍 꽃가지 끝에
한숨처럼 빈 방 늘어간다
텅 빈 꽃 그림자 흰 그늘 속으로
길 잃은 듯 벌 나비 간간히 날아들지만
향기에 이끌리는 양방향 향적만이
날것들의 길은 아닐 것이다
하늘 가득히 오연한 물소리
스카이라인을 뭉개는
물의 무수한 혓바늘들
한 나무의 나뭇잎이 지구중력을 벗어나는
순간의 격통을 나는 느낀다
천기를 짐작할 수 없는 미연未然의 나날들
어스름이 물의 숙박부에
무루無漏라고 제 이름을 적고
나보다 앞서 빈 방에 든다 빈 방이 부푼다
저 골짜기에 피어오른 이내가
이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이내를 서서히 감싸 안는다


슬픔과 거리가 있는, 힘이 느껴지는 시이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통쾌한 시이다. 무루라는 단어도 마음에 든다. 無漏는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이다. “저 골짜기에 피어오른 이내가/ 이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이내를 서서히 감싸 안는다”는 표현은 포용 상생 등을 생각하게 한다. 물의 숙박부란 표현은 재미있다. 하늘 가득히 오연한 물소리란 구절이 눈길을 끈다. 슬픔의 전체를 이기고 함께 조화로운 시어이고 시이다. 아름다운 흐름이 감지되는 시이다. 쓸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글, 이만 줄여야겠다. 오독(誤讀)이 아니기를, 오독이라면 배울 것이 있는 오독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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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때까지 안 아프며 살고 싶다 - 30년 임상 경험의 약사가 온몸으로 체험한 혈허 이야기
송명희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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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혈(血)이 영화를 누리지 못해 살이 찌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내려진 말이 아니지만 귀가 번쩍 뜨였다. 어지러움, 두통, 피로, 무력감, 그리고 이 모든 현상으로 인한 결과일지도 모를 저체중에 시달리는 내게는 무시할 수 없는 말이다. 혈허(血虛)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송명희 약사(藥師)님의 ‘나는 죽을 때까지 안 아프며 살고 싶다’란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30년 쯤 전 ‘전기한 내 증상을 훨씬 상회하는 증상들’을 앓던 끝에 혈허, 흡혈기생충, 장누수, 골수 기능 등의 네 가지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어 건강을 설명하고 회복의 비책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이 네 가지 키워드가 모든 난치병의 거의 모든 원인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한다. 특기할 것은 똑같이 민물 생선회나 덜 익은 쇠고기를 먹어도 장벽에 미세한 구멍이 뚫린 장누수증자(腸漏水症者)만이 흡혈기생충에 감염된다는 점이다. 장 누수는 익히 들어 알고 있고 밀가루 음식의 면발을 쫄깃하게 하는 글루텐이란 성분이 장 누수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장 누수는 LGS: leaky gut syndrome라 하는데 이는 1974년 미국 의사에 의해 규명된 것이다.)


혈액 양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한의학적 개념인 혈허는 양방에서 말하는 빈혈과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개념이 다르다. 양방의 혈액 검사는 양(量)이 아닌 적혈구나 헤모글로빈의 개수를 측정한 후 그 수와 혈장(plasma)의 비율을 측정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혈허는 머리를 아프게 하고 쉽게 피로하게 하고 기상을 힘들게 하고 불면증에 빠트린다. 또한 어지러움과 눈 침침, 빈맥, 가슴 답답함, 울혈성 심부전증 등을 초래한다. 혈허인 사람은 쉽게 짜증을 내고 커피나 카페인 음료를 즐긴다. 잘 붓고 머리가 무겁고 맑지 못하다. 온몸이 아픈 것도 그 주 증상이다. 손끝과 발끝도 저리고 저혈압이 된다.


혈허인 사람은 세포 재생이 빠른 위 점막이나 장 점막 세포가 약해지며 위축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고 놀랐다.(위축성 위염과 장상피화생이 내 증상이기 때문이다.) 혈허인 사람은 추위에 견디는 힘이 약하고 체온 변화에 민감하다. 손발이 차고 몸이 전체적으로 냉하다. 혈액이 부족하면 혈액 순환이 잘 안 되는데 중요한 것은 증상이 비슷해도 원인은 여럿이기에 그에 맞게 처방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혈관이 막히거나 좁아져도 혈액 순환이 잘 안 된다.(이 경우는 조혈영양제의 효과가 없다.) 혈액의 점도(粘度)가 높아도 혈액 순환이 잘 안 된다.


심장 박동력이 약해도 혈액 순환이 잘 안 된다. 모든 만성 질환의 진행은 혈관 막힘 정도에 비례한다. 혈허 치료는 골수 치료를 동반해야 한다. 간과 신장, 골수가 혈액을 만들어낸다. 골수가 가장 중요한데 골수의 기능 정도가 혈허 치료의 포인트이다. 저자는 혈허를 10년 앓았다면 치료 기간은 1년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극심한 혈허는 관절이나 디스크의 손상을 초래한다. 류마티즘 관절염의 원인도 결국 혈허이다. 정(精)은 혈액 100방울이 모여 만들어진다. 정액을 낭비하면 그만큼 몸이 허약해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콩팥과 조금 다른 신(腎)은 정(精)을 주관하고 골(骨)과 관련된다. 신 기능이 약해지면 뼈가 튼튼할 수 없다. 여기서의 뼈는 물리적인 뼈만이 아니라 골수, 척수, 척수액, 뇌까지 연결되는 말이다. ‘동의보감’에서 어지러움을 뇌척수액의 부족으로 설명한다는 한 한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치매나 파킨슨병은 뇌(척수액) 문제로 인한 결과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기생충약과 조혈영양제를 함께 복용하는 것이다. 근본 원인을 제거한 후 피를 만드는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약국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구충제(驅蟲劑)가 아닌 특별 제조한 생약이라야 한다.


장누수 이야기를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육회를 먹어도 아무렇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불고기를 먹어도 감염된다는 점도 기이하게 여겨진다.(장누수란 장 점막에 구멍이 뚫려 장의 내용물이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장은 중요하다. 아니 제2의 뇌라 불린다. 장이 제2의 뇌로 불리는 것은 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장의 신경총(神經叢)이 척수와 뇌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장에는 신경이 많이 밀집해 있다. 장 안에는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세균이 약 100조개 이상 존재한다. 무게로 환산하면 약 1.5kg이다.(마이클 거숀의 ‘제2의 뇌‘, 앨러나 콜렌의 ’10퍼센트 인간‘ 등을 참고할 만하다.)


사례에 따라 다르지만 며칠 또는 한 달 정도의 구충제 복용만으로도 변화는 드라마틱하다. 소장(小腸)은 유익한 유산균과 유해균의 비율이 85:15 정도로 맞추어져 있어야 가장 이상적이라 한다. 인체 면역 세포의 70퍼센트가 모여 있는 장은 면역 기관이기도 하다. 골수, 흉선이 생산하는 면역 세포를 장도 생산한다. T세포는 골수에서 만들어지고 흉선에서 교육을 받는다. 가슴 가운데에 있는 흉선이란 장기는 10대 후반에 35그램 정도 크기로 전성기를 맞이하다가 우리 수명의 중간 정도까지 그 기능을 유지한다. 그 이후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리다가 마지막에는 지방 덩어리가 되어 역할을 마친다.


면역력에 문제가 생길 법하지만 장 점막에서 인터루킨 7이라는 면역 세포를 육성하는 물질이 나와 T세포를 만드는 덕에 암이나 각종 질병 등에 대한 저항력을 지킬 수 있다.(장에서 만들어진 T세포를 흉선외분화 T세포라 한다.) 관건은 유익균이 우세한 장내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흉선외분화 T세포가 만들어지고 그 능력을 총괄적으로 발휘한다, 저자는 감기에 자주 걸리는 사람, 세균이나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늘 지기만 하는 사람들은 일단 인체에 쌓여 있는 곰팡이 독소를 의심해볼 것을 권한다. 혈허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장 누수는 일반적이다.


저자는 스스로 허약 체질이라 생각한다면 장 누수가 있는 것이고 비교적 강단이 있고 건강 체질이라면 장 누수가 없는 것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저자는 A.K(pplied kinesiology) 테스트를 통해 머릿 속에 곰팡이 독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액상 차를 일정 기간 마셔 독소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액상 차로 장 누수도 치료되었다고 한다. 훌다 레게 클락(Hulda Regehr Clark: 1928 - ) 박사의 ’병을 넘어서‘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장 누수가 있어야 장 흡충에 감염된다. 장내에서 유익균이 우세하면 발효가 일어나고 유해균이 우세하면 부패가 일어난다.

장명(腸鳴)이나 트림은 유해균에 의한 가스 생성과 관련 있다. 목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매핵기(梅核氣)도 신경성이 아니라면 장내 유해 가스 때문이다. 장내 세균 균형이 깨질 때 가장 흔한 증상이 허열(虛熱)이 위로 오름으로써 느껴지는 열감(熱感)이다. 뒷머리가 아픈 것, 일반적인 두통 등의 가증 중요한 원인은 허열 상승으로 인한 혈관 확장이다. 한의학에서는 입 안 건조는 심장 열 때문이고, 입술 건조는 위의 열 때문이고, 혀의 백태는 소화기에서 발생하는 열 때문이고, 코가 막히거나 코 안이 건조한 것은 폐의 열 때문이라 본다.(146 페이지)


목감기에 항생제를 처방하면 후유증으로 장 누수가 생긴다.(165 페이지) 장이 좋지 않으면 마른 기침이 생긴다는 점도 흥미롭다.(173 페이지) 장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물을 마셔도 흡수가 되지 않는다.(178 페이지) 혈액이 부족한 사람은 쉽게 열을 받는다. 물이 많이 든 주전자보다 물이 적게 든 주전자가 더 빨리 끓는 것을 생각해보라.(179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자신의 몸 하나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도 참 많은 요인과 도움의 손길로 이루어진다. 사는 것은 참 어렵다는 말이 절대 허언이 아니다. 저자의 논지는 한방에 근거한다. 그렇기에 증상만을 보거나 몸을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현대의학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가령 부신피질 호르몬은 면역을 담당하는 백혈구의 기능을 억제하는데 그 결과 염증 반응이 사라진다. 염증 반응은 백혈구와 세균이 싸움으로써 또는 독소와 백혈구의 반응으로 일어나는 현상인데 면역 기능이 정지되기 때문에 염증이 사라지고 피부 트러블도 가라앉게 된다. 이때 염증을 유발하던 독소는 심층부로 숨어든다. 부신피질 호르몬을 장기 투여하다가 중단하면 숨어 있던 독소가 올라온다. 이를 명현(瞑眩) 반응으로 볼 여지가 있다. 피부 호흡을 통해 독소가 만성 피부 질환으로 나타나는(빠져나가는) 것이다. 관건은 해독(解毒)에 있다.


장 누수만 좋아져도 비염이 사라지는 체험을 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원인은 혈허로 인해 심장이 약해진 경우이다.(203 페이지) 인체의 모든 질병은 만성 염증의 결과이다. 만성 염증은 산소 부족으로 진행된다.(207 페이지) 저자는 탈모의 원인을 영양실조로 본다. 이는 모근세포에 충분한 영양이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파킨슨병도 혈허 개념에 따라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신기하다. 저자는 퇴행성으로 뇌 조직 세포가 파괴되어 진행된 파킨슨병과 파킨슨 증후군을 혈허가 원인이 되어 진행된 병이라고 생각한다.(238 페이지)


치매보다 더 깊이 뇌 세포의 손상이 진행된 것이 파킨슨병이다.(240 페이지) 저자는 조(燥)와 고(枯)의 개념을 비교, 설명한다. 둘 다 마름을 의미하는데(燥: 마를 조, 枯: 마를 고) 진행 원인과 방법이 확연히 다르다. 조는 인체 내의 과도한 열에 의해 나타나는 증세이고, 고는 세포에 혈액과 진액에 해당하는 호르몬과 세포액, 체액들이 모두 고갈된 상태이다. 저자는 사혈(瀉血)이나 부항(附缸) 등을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최근 두통으로 사혈, 백회 뜸을 제의받았는데 다 물리쳤다. 모두 엄두가 나지 않았서였는데 구체적으로는 부작용이 걱정되어서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치매나 파킨슨병은 위축성 위염, 신장 위축, 간경화 등 허열에 의한 장기(臟器) 문제 다음에 나타나는 증세라는 사실을 알았다. 파킨슨병은 골수(骨髓)의 병이다. 심장 기능이 위축되어 뇌까지 피를 보내기 어려워지면 뇌세포가 위축되어 파킨슨 질환이 온다. 최근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에 나오는 마른 늪에서의 낚시를 생각한 적이 있는데....


혈허(血虛)를 치료하지 않고 낫기를 바라거나 다른 처방을 쓰는 것은 마른 늪에서 낚시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학철부어(涸轍鮒魚)라는 말도 생각난다. 학철부어란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물에 있는 붕어라는 뜻으로 몹시 곤궁(困窮)하거나 위급한 처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혈허가 지속되면 골수도 손상을 입는다. 생명력과 연관되는 또 한 가지 기능이 골수에서 이루어지는 줄기세포 생성이다.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성체 줄기세포는 혈관을 타고 온몸을 순환하다가 조직세포의 손상이 진행된 장기에서 그 조직세포로 분화하여 우리 조직을 재생시키고 손상을 수리해준다고 한다.(247 페이지) 영양이 중요하지만 관건은 식단을 잘 짜서 밸런스를 맞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소장의 유익균과 유해균의 조화로운 균형에 있다.(251 페이지) 저자는 더 이상 병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다면 우리 몸에서도 그 신호를 받아들여 협력해올 것이라 말한다. 대장정(大長程)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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