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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인문학의 대화 - 철학사적 조망
황수영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철학은 참 지식 즉 에피스테메(episteme)와 억견(臆見: doxa)의 구분이다. 에피스테메는 엄밀한 근거로부터 얻은 지식을 말하고 억견은 그럴 듯한 의견들을 말한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과의 관계이다. 중요 부분이었던 자연학이 빠져 나간 것을 계기로 철학은 자연세계를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학문이 되었다. 나는 철학을 과학의 종합으로 보는 프랑스적 전통을 바람직하게 본다. 아니 편하다고 해야 할까?
오늘날 철학은 일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정신, 반성과 비판 정신 등을 공통 요소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같은 존재에 관한 물음은 철학 고유의 것이다. 동양에서 인문학과 철학은 분리되기보다 연속선상에서 다루어졌다. 반명 서양 가령 플라톤에게 철학은 참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되었던 데 비해 인문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가변적 인식 세계를 대상으로 한, 진리의 불완전한 모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철학과 인문학은 밀접한 상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철학은 믿었던 장남(자연과학)에 버림받고 차남(사회과학)에게도 멸시받으며, 애초에 무시했던 딸(인문학)에게 얹혀 사는 형국이 된 것“이란 저자의 말은 그래서 시의적이다. ‘주역(周易)’의 비괘(賁卦: 64 괘 중 스물 두 번째 괘)에 ”천문을 살펴 계절의 변화를 알아내고, 인문을 살펴 천하의 변화를 이룬다“(관평천문觀平天文 이찰시변以察時變, 관평인문觀平人文 이화성천하以化成天下)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인문의 어원이다.
인문학은 인간현상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움, 인간적인 것 등의 이념으로 인간적 사실을 대하고 판단한다. 가치판단을 한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비판정신이 결여된 인간다움을 비판적으로 본다. 인문학은 인간이 대상이자 주체인 학문이다. 과거 내가 큰 관심을 기울였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는 인간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를 해체하고 인간이 가진 타자성, 무의식, 감성과 욕망의 영역에 눈을 돌리는 학문이다.(42 페이지)
문화는 자연과 대립적인 개념이다. 자연과학의 성립에도 문화적 요소가 있다. 자연과학은 과학자 집단이 근거한 기존의 학문 풍토 즉 언어, 학문하는 방식, 세계관 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그 학문풍토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의 자연과학을 대상으로 삼되 그것이 형성된 배경, 성립조건, 철학적 전제 등을 문제 삼는다. 사회과학이 일정한 객관적 법칙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인문학은 객관적 사실의 탐구가 아니라 그 객관적 사실과 인간의 관계에 따른 의미를 찾는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대한 공자는 인문학의 대표 사례라 할 만하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상 과학이 될 수 없는 인문학에 과학의 특성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인문학은 효율성이나 엄밀성 면에서 과학에 뒤질 수 밖에 없다. 나도 여러 차례 제기했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내가 즐겨 읽는)의 경우 엄밀한 뇌과학의 결여로 인해 객관적 학문이라 할 수 없다는 문제 제기에 노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는 인문학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이기보다 비판적 이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의 통일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독자적 방법이어야 할 것이라 말한다.(46 페이지) 인문학은 순수하다. 순수하다는 것은 대상을 설명하고 이해할 때 인간적 이해관계나 감정적 요인에 좌우되지 않는 것, 초자연적 지배자와 같은 비합리적 원인을 거부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을 생각하며 이성(理性)에 대해 숙고해보자. 이성은 외적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의 고유한 능력인 논리적 추론이나 직관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60 페이지)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주장했다, 이데아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일체의 경험적 지식들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수학적 인식의 모델로 이성의 절대성을 주장한 합리론에서 지식의 형식적 측면을, 감각적 경험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식자료로 보는 경험론에서는 지식의 내용(재료)적 측면을 취하여 이들을 토대로 종합적 판단을 구성했다.
칸트에 있어 인식은 감각을 토대로 형성되지만 감각은 그것만으로는 어떤 질서도 없는 무규정적인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주관 속에 있는 선험적 감성형식에 의해 비로소 경험으로 성립한다. 또한 감성의 표상들은 지성의 선험적 형식들에 의해 개념화될 때만 인식의 대상으로 성립한다.(89 페이지) 중요한 것은 인간의 초월적 주관 속에 선험적으로 있는 감성과 지성이라는 두 형식이다.
칸트에게서 지성과 이성은 구분된다. 지성이란 데까르트의 절대적 이성의 개념에서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측면을 말하고, 이성은 지성에 의해 사유된 것들을 종합적으로 통일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인본주의적이란 말을 인간에 관한 문제들을 과학적 방법으로는 다룰 수 없다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이론과 방법을 제시하는 모든 흐름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107 페이지)
해석학(解釋學)의 출발점은 심리적 기술이 아니라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데서 나오는 직접적 체험이다.(112 페이지) 직접적 체험이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반성적 내용 즉 사유된 것이 아니라 반성 이전의 삶과 행동 그 자체이며 시간 속에서 일회적으로 일어나는 개별적 경험으로서 인간의 삶에서 일차적으로 주어진 것을 말한다. 후썰은 선입견에 물든 모든 입장을 배제하고 직접적으로 명증한 의식 안으로 들어가서 순수한 사태 그 자체를 직관할 것을 주장했다.
직접적 의식이 명증한 것은 외적 지각이 언제나 음영과 함께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 의식 안에서는 대상이 전체성 속에서 남김 없이 파악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나 과학을 거부하지 않고 그것들의 근본 전제를 문제삼고 이를 생성의 형이상학으로 대체한 베르그손을 빼놓을 수 없다. 베르그손의 형이상학은 고정적이고 부동하는 본질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전통 형이상학이 아닌 운동과 변화, 생명과 시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형이상학이다.
고전역학은 운동과 변화를 위치이동으로 간주하고 수학적 법칙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은 시간의 질적인 측면을 사상(捨象)하는 데서 성립한다. 의식 상태의 지속은 현재의 고유성에 과거 전체가 함께 어우러져 생성되는 새로움 자체이며 표면상의 자기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심층에서는 개별성, 특이성, 고유한 차이들을 간직하고 있다.(125 페이지) 베르그손 이래 그의 영감(靈感)을 취하는 프랑스 철학은 문학, 예술 및 여타 학문적 활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학문간의 위계를 허무는데 이는 철학과 인문학이 분리된 고전적 학문풍토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문주의적 학풍의 등장을 예고한다.(126 페이지)
베르그손에서 경험은 좁은 의미의 감각 경험이 아니라 의식의 총체적 체험이며 사실의 직관이라는 그의 철학적 이상과 맞물려 과학과 철학을 매개한다. 베르그손은 물리적 환원주의를 거부하지만 인간의 독자성을 강조하기보다 존재자들의 다양성과 차이들을 긍정하고 개별 학문들의 독자적 존립 가능성을 시사한다.(134 페이지) 해석학, 현상학,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등의 인본주의적 입장은 주체의 역할을 너무 강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 목적, 역사, 윤리 등의 인간적 가치들에 치중한다.(135 페이지)
구조주의는 계몽주의나, 헤겔,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처럼 하나의 보편적 이념에 의해 역사가 인과적이고 일직선적인 흐름으로 진행된다고 보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이성적 주체와 동일성의 원리를 포기하고 각 문화현상이 갖는 독특한 구조에서 출발하여 각각의 특이성이 다른 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탐구한다. 물론 구조주의는 인류가 가진 보편적 사고구조를 부인하지 않는다. 구조주의는 요소들간의 관계들의 체계를 조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철학과 인문학의 형성기에 있었던 대립은, 철학이 자연과학에서 나타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이념을 공유한 반면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의 가변적인 모습에 관심을 두었던 데서 유래한다.(161 페이지) 인문학적 탐구는 어떤 방향을 취하건 간에 철학적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다. 현재 철학은 인문학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오늘날 철학을 인문학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것은 보편화된 경향이다. 물론 철학과 인문학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과 긴장이 엄존한다.(164 페이지)
저자는 문제들은 곳곳에서 서로 관통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핵심적인 빛나는 지점들을 찾아내기란 진실로 쉽지 않은 일이라 말한다.(220 페이지) 문제들이 곳곳에서 서로 관통하고 있는데 어떤 핵심적인 빛나는 지점들을 찾아내기란 진실로 쉽지 않은 일이라 했다면 좋았을 문장이다. 저자는 인문학의 역량은 자유로운 유희에 있지 않을까?란 말을 한다.(22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는 것은 역사이고 역사는 우리에게 인내와 관용을 가르쳐준다. ”철학적 진지함도 이 역사 속에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22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