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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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하 시인의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는 아득한 시의 길을 조용히 생각하겠다는, 창조적 정신의 불씨를 지키는 새로운 사색이 필요하다는, 시의 결을 가지는 문체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등의 말로 치열한 준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인의 근황을 말하는 책이다. 저자는 시를 존재와 언어 사이의 틈을 메우는 것으로 정의한다.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 저자는 시인을 그렇게 섬세한 감각을 가진 낙타에 비유한다.


저자는 풍경은 체험과 무관하지 않기에 길을 떠나면 자신의 내면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인을 삶의 풍경을 가장 멀리 보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낙타는 섬세한 동물이고 사막을 건너는 강인한 동물이다. 시인 저자도 시를, 그리고 산문을 건져올리기 위해 길을 가고 또 간다. 저자는 하나의 풍경이 나의 체험이 되고 나의 체험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일순(一瞬)을 말한다.


시인이 울주군 서생면에 속한 진하(鎭下)라는 해변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나는 내 서생 시절을 떠올린다. 서생면 신암리, 간절곶에서 가까운 그 바다. 동해남부선이 지나는 마을. 그곳에서의 시간들을 추억하는 나... 견자(見者)의 그 랭보,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는 ‘말테의 수기’의 릴케.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우상의 황혼’의 니체 등을 이야기하며 시인은 본다는 것의 남다름을 이야기한다.


시인에게 그런 새롭고 독창적인 시각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낙타는 십리 밖 냄새를 맡는다’는 기행 산문집이기도 하다. 로마 기행에서 시인은 릴케의 ‘로마의 분수’라는 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서는 수직성이란 평면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서는 실존이란 말을 한 메를로 퐁티를 생각한다. 시인은 릴케가 본 세잔보다 메를로 퐁티가 읽은 세잔에 더 끌린다고 말한다. 시인은 메를로 퐁티의 릴케 읽기는 피나는 사색의 결과로 본다.


시인은 꽃이 시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꽃을 위해 있다는 존 러스킨의 말에서 단서를 얻어 시인이 언어라는 그릇을 빌려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시인의 표현을 빌려서 스스로를 전개한다는 표현을 한다. 시인은 시를 우리의 논리의 손가락 사이를 새어나가는 모래에 비유한다. 시인은 지구는 푸르다고 말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말과 그 이전에 상상력으로 지구를 푸른 것으로 본 폴 엘뤼아르라는 시인의 말을 소개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시인 역시 상상력으로 미술품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시에서 산문적 의미만을 찾지 말 것을 말한다. 시인이 즐겨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메를로 퐁티라면 주안점을 두어 이야기하는 시인은 릴케이다. 시인에 의하면 파스칼이 우주가 침묵을 속성으로 한다고 보았던 데 비해 릴케는 세계가 침묵이 아닌 노래라 생각했다. 시인은 언어의 본질은 현실 인식의 도구가 아닌 아름다움과 에로스를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데리다의 인식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흐의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에 나오는 불꽃이, 시인은 빛의 유용한 원천이 아니라 빛을 남에게 베풀고 자신은 고독하다고 한 바슐라르의 논의와 아름답게 호응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시인은 시론에 강하다. 시인에 의하면 자신은 시란 무엇인가란 물음보다 자신은 시의 근거를 어디에 두는가란 물음을 선호한다고 한다. 시 창작이란 수많은 시론들을 생각한 뒤에라야 효과적이고 매끄러울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시인을 보며 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시의 근거를 죽음을 향한 생의 일회성에 두고 싶다고 말한다.


‘낙타는 십리 밖 냄새를 맡는다’는 저자가 시, 서, 화, 도자기 등의 예술에 고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하는 책이다. 시인은 그림은 시가 그렇듯 수수께끼의 심연이라 설명한다. 릴케는 세잔의 그림에서 사물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요구하는 긴 인내를 배웠다고 한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것을 알아볼 지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를로 퐁티의 릴케 읽기는 피나는 사색의 결과라는 말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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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덕혜옹주‘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나는 그분은 고종과 귀인(貴人) 사이에서 태어난 분이지요?란 말을 했다.(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분.) 나는 후궁이란 말이 싫다. 주궁(主宮) 뒤편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어 그렇고, 종1품을 의미하는 의젓한 귀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귀인은 따로 있다. 귀인(貴人)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부족하거나 넘치는 기운을 바르게 해 나를 완성시켜주는, 명리학이 말하는 소중한 분을 의미한다. 나는 귀(歸)in이란 말도 쓴다. 귀납법은 induction이란 의미이다.


귀(歸)in과 함께 연(演)de라는 말도 쓴다. 연역법은 deduction이란 의미이다. 한 유명 문학평론가가 환원(reduction)을 연역(deduction)으로 읽은 사례가 있다. 이로 인해 이 분은 바슐라르의 감싸기란 개념을 이야기하며 감싸는 이론과 감싸이는 이론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자가 후자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확장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귀납에 의해 이론을 수립하는데 관찰해야 할 대상은 무한이기에 즉 언제까지 계속 관찰을 할 수는 없기에 귀납을 넘어 연역을 통해 관찰에서 제외된 대상을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에 의하면 귀납은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을 되풀이하며 도/道를 향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고, 연역은 상명하달하는 방식이다. 공자가 연역적인 방식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조의 결론이다. 공자는 귀납적, 소인은 연역적이란 것도 그렇다. 어떻든 오독 사례가 있기에 이런 편법 조어와 암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덕혜옹주‘를 감상하러 가야겠다. 귀인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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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관람하고 왔다.(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국립기관으로는 처음 여는 것이라고 하니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그런 반면 이제야, 라며 푸대접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확하게 말해 나의 경우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관람을 마쳤다고 해야 옳다. 물론 주최측의 기획의도에 따라 도슨트의 해설이 맞추어졌을 것이고 그 도슨트의 해설에 맞추어 관람자들의 사유의 길이 유도되는 것은 유별난 일은 아니다. 한정된 시간 때문에, 그리고 관람자들의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도슨트의 해설 이후 각자 돌아가 이중섭 화가의 그림과 삶에 대해 퍼즐을 짜맞추는 것에 맞먹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올해는 이중섭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가난, 가족과의 이별, 사기(詐欺)를 당한 뒤 맞은 파탄, 식욕부진과 우울증, 분열증, 간염, 정신병원행 등으로 얼룩진 그의 삶에 유일하게 희망적이고 밝았던 시기는 통영 시절이었다. 이 시절 그가 그린 소는 참 역동적이었다. 반면 통영 이후 대구에서 그린 소는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가 맞은 시기에 따라 소도 얼마나 달랐는지 알 수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은지(銀紙)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은지화)이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다.(은박지에 철필 같은 것을 꾹꾹 눌러 그림을 그리고 채색까지 한 그림) 그것은 화가 생존 시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형편이 좋아지면 은지화 기법으로 벽화를 그려보고 싶다던 이중섭의 바람을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타이틀에 따라 그의 작품을 알리는 기획자들이 컴퓨터 작업으로 대형 벽화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배려해 만족시킨 것이다.


신화화되었다는 이유로 이중섭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대구 시절 지신의 그림을 정상적인 화풍으로 여기지 않는 정신적 폭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신화화의 장막을 걷어내고 보아도 이중섭은 충분히 뛰어난 역량을 앞서서 보여준 화가라 해야 한다. 이중섭은 민족을 상징하는 소를 거침 없이 그렸는데 그것은 민족적 요소와 독창성의 결합이라 할 만하다.


여러 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내 눈길을 끈 작품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란 작품이다. 오른쪽에 창틀에 몸을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가 그려져 있고, 왼쪽에는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더 근사(近似)하게 말하면 오른쪽의 남자와 왼쪽의 여자 사이에 벽이라도 놓여져 있는 듯 하다. 여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이중섭의 삶을 고려하면 그림의 여인은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다.


이 그림을 보고 기형도(1960 - 1989) 시인의 ’엄마 걱정‘이란 시를 떠올렸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유년의 윗목”


통하는 부분이 많은 그림과 시이다.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삶과 그림을 나누어 보고 싶다던 내 생각은 잘못이라 해야 한다.) 문학적 관점에서의 이중섭 강의(권영민 교수), 심리학 관점에서의 이중섭 강의(우종민)를 들을 기회를 놓쳤고 이제 남은 것은 미술사 관점에서의 이중섭 강의(김현숙)이다. 일찍 알았다면, 그리고 현실적으로 서로 다른 강의를 듣기 위해 세 번이나 그림을 보러 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기에 만일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골랐을까?


심리학 강의를 골랐겠지만 관건은 그를 이해하는 데에 있지 그를 분석하고 재단(裁斷)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번 읽은 저자이기에(믿을 수 있기에: ‘미술 전시장 가는 길‘, ’예술가로 산다는 것‘) 박영택 교수의 ’그림으로 삶을 완성한 화가 이중섭‘을 읽어야겠다. 대구 시절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 - 2004)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나 비참한 결과를 맞보고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된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지만 줄곧 희망을 생각했던 화가 이중섭...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은 사실보다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소 그림의 터치를 추사체처럼 처리한 역동성과 연계성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래야 덜 우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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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한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 글 또는 문화로써 벗을 모으고 벗과 더불어 사랑의 공동체를 키워나간다)이라는 말. 이는 군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군자란 말이 걸릴 수 있지만 군자는 대의(大義)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일본의 오구라 기조는 군자는 특정 형태 또는 용도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해석되어온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군자는 중요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구별 없이 모든 일에서 인(仁)이라는 ‘사이의 생명’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최근에는 ‘군자를 버린 논어’라는 책도 나와 관심을 끈다. 공자는 스스로를 성인(聖人)이나 인자(仁者)가 되기 위해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떻든 이문회우 이우보인이란 말은 참 아름답다. 비현실적이라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군자의 의미를 유연하게 해석한다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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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1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자는 많이 만나게 되지 않는데 ㅡ 정말 다양하게도 읽으십니다~^^ 잘 듣고 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0:34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다양하기보다 두서 없이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장소] 2016-08-17 06:18   좋아요 0 | URL
두서없음 이 다양함일지 ..모르겠네요 .^^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7:19   좋아요 1 | URL
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8-17 07:26   좋아요 0 | URL
저도 저도~ 감 ,사드릴....게요!!^^ㅋㅋㅋ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7:30   좋아요 0 | URL
네? ㅎㅎ...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그장소] 2016-08-17 08:11   좋아요 0 | URL
벤투의 스케치북님도요!^^

벤투의스케치북 2016-08-17 08:34   좋아요 1 | URL
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열리고 있다. 조재모 교수의 '궁궐, 조선을 말하다‘ 기억이 나 얼른 펼쳐보니 덕수궁은 세워지기 전이어서 김정호 선생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나와 있지 않다.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지만 그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덕수궁을 말하는 것은 덕수궁에 이르는 돌담길, 정동길 등을 산책하려는 두서 없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누구나 아는 화가이지만 제대로 아는 바도 없지 않는가 싶다.


물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는 이름에 말을 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화가의 삶과 화풍을 분리해서 볼 수 없음에도 그의 신산(辛酸), 고초(苦楚)의 삶과 그림을 나누어 보고 싶다. 나는 그림 이상으로 화가가 생전에 살았던 곳에 더 관심이 간다. 통영, 제주 등... 모두 바다와 관련한 이 곳들은 결국 내가 아직 가지 못해 로망처럼 여기는 곳들이다. “한 겹 아래 저 세상으로/ 또 피난”(김혜순 시인의 시 ‘진행’의 일부)을 가는 마음으로 가고 싶은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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