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좋아하던 성경구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개역개정)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 앞에는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8절),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9절) 등의 구절이 있다.

지금 내 마음에 더 와닿는 구절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란 구절이다. 두 구절은 지금은 고통(불확실)스러우나 미래에는 그것들이 극복되어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 희망 등이 담긴 구절들이라는 점에서 같다. 또한 이 구절들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의 첫 구절(1비가)을 연상하게 한다.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물론 전자는 절망스럽지만 희망을 예기하게 하고 후자는 그냥 절망스럽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10비가)에서 릴케는 ˝그리고 우리, 솟아오르는 행복을 생각하는 우리는 감동을 느끼리라, 행복함이 내려 떨어질 때 우리를 거의 당황하게 하는 감동을˝이란 말로 희망을 전한다.

욥의 말은 거창하다. 바울의 말은 소박하다. 이 차이 때문에 나는 젊어서 좋아하던 구절을 놓고 소박한 바울의 말을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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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10-07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여기지만, 성경은 참으로 인간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인간적이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몇 가지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신학자 송기득 박사가 말씀한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의미와 통하는 바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군상들은 어설프고 약하고 질투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벽 서 너시에 눈이 떠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어제 선생님께 홀로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으로 나를 설명했는데 정확한 의미는 나도 잘 알지 못해 고정희 시인의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를 찾아 본다. "새벽에 깨어 있는 자, 그 누군가는/ 듣고 있다 창틀 밑을 지나는 북서풍이나/ 대중의 혼이 걸린 백화점 유리창/ 모두들 따뜻한 밤의 적막 속에서도/ 손이라도 비어 있는 잡것들을 위하여 눈물 같은 즙을 내며 술틀을 밟는 소리...."  시인은 각 연의 마지막에서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란 말을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마지막 연에는 주의(周衣)라는 말이 나온다. "...그의 흰 주의(周衣)는 분노보다 진한/ 주홍으로 물들고 춤추는 발바닥 포도 향기는/ 떠서 여기 저기 푸른 하늘/ 갈잎 위에 나부끼는 소리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 사전을 찾아 보니 술틀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 송이를 넣고 발로 밟아 짜는 큰 통이라고...고정희 시인의 시에서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은 홀로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심하며 애쓴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눈물  같은 즙을 내며 술틀을 밟고 아픈 심지 돋우며 홀로 술틀을 밟는다는...


주의(周衣)는 외투용으로 겉에 입는 한복이라고...나는 홀로 술틀을 밟는다는 표현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의미로 썼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심하며 준비한다는 의미가 깃든 구절이라 해야겠다. 너무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인... 25주기(週忌).... 살아 계셨다면 내년이 7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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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고 깨끗하다, 행동이나 행실이 깔끔하고 얌전하다, 외모나 모습 따위가 말쑥하고 맵시있다.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는 조촐하다. 부사형은 조초리. 막연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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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에 성 어거스틴이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아마 착한 사람이지 않겠나, 생각하는 사람들은 몽땅 세례 좀 퍼부어야..라 쓴 분에게 어거스틴과 플라톤을,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결지어 생각하면 될까요? 란 댓글을 달았더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란 글이 달렸다.(새벽 3시 무렵) KBS classic FM에서 네빌 마리너의 타계를 알리는 특집으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을 보내고 있다. 새벽 아니 한 밤에 이런 일도 만들고 누리는(?) 것이 인터넷 공간이다.(아퀴나스를 아우구스티누스로 착각했음. 설령 착각하지 않았다 해도 그 분이 생각한 관계와 내가 생각한 관계는 맥락이 다른 것이라 해아 할 것 같다. 그보다는 사울과 바울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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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였던 몽골 여자 나라(Happa)는 우리가 고비라 부르는 사막을 곱이라 발음했다. 인도인들은 우리가 갠지스라 부르는 강을 강가(Ganga)라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르는 쿠마리, 타르쵸 같은 것들도 나름의 이름이 달리 있을지도 모르겠다.

 

쿠마리는 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되는 5세에서 6세에 이르는 여자 아이를 말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신전에 들어가 사는 그들은 석가족이어야 하고, 모발과 눈동자는 검어야 하고, 몸에 흉터가 없어야 하는 등 32가지의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

 

대단한 대우를 받으며 살지만 첫 생리가 시작되거나 몸에서 출혈이 생기면 쿠마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런 이유들로 신전에서 쫓겨난 그들은 결혼도 귀가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럴 경우 가족에게 재앙이 닥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무슨 기막힌 일인가.

 

고진하 시인은 강가를 이렇게 표현한다. ˝...강물도 흐리고 하늘도 흐린 날/ 어머니 신 강가는/ 걸신들린 세계의 아가리에/ 윤회의 수레 가득한 눈물의 비빔밥을 퍼 먹이네..˝(Ganga 중에서) 어머니 신이란 말보다 윤회의 수레 가득한 눈물의 비빔밥이란 말에 더 큰 무게감이 실린 시이다.

 

몽골인들은 물이 부족한 건조지대에서 가뭄과 혹독한 추위가 함께 어우러져 생명 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연의 대재앙이자 구성원들의 서열을 명확하게 가르는 자연선택적 메커니즘을 조드라 부른다. 김형수 작가는 13세기 테무진이 고원을 평정해 징기스칸이 된 것을 조드에 의해 잉태된 역사의지와 연관짓는다.

 

나는 이 불요불굴의 의지도 생각하고 ˝....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이란 허수경 시인의 시(`혼자 가는 먼 집`)도 생각한다. 불요불굴도 한 슬픔 다음에 이어지는 또 다른 슬픔들의 연속을 견디는데서 싹트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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