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을 몇년 하고 나니 내게 한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몇 가지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페친 신청은 꾸준한데 비해 좋아요는 별로이고 페친 신청 전에 좋아요를 클릭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페친 수락을 받고 나서 밀린 빨래라도 하듯 좋아요를 클릭하고는 방문은 하는지 안하는지 흐지부지인 경우가 많고 페친 수락 인사를 남기는 경우도 거의 없다. 페친 수락 이후 인사 받은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과 페북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글이 꽤 많이 어긋난다는 점도 그렇다. 대개 전공에 한정된 글을 올리는 페북인은 자신의 관심권 안의 글에 대해서만 좋아요를 클릭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 여지도 물론 있다. 페친 신청을 받은 사람이 신청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점이다. 동남아 불교 승려들은 자신들이 시주를 받음으로써 시주하는 사람들이 덕을 쌓는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페친 관계도 그런 것일까? 무심코 좋아요를 클릭하는 경우도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최근 페친 대량 삭제 사건(?)을 통해 짐작하게 된 이야기여서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어떤 페북인의 말도 안되는 글에 좋아요를 클릭한 사람들 중 자신의 친구들을 페친 삭제한 시인에게 무심코 좋아요를 클릭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친구 신청보다 팔로우를 하는 분들의 심리도 궁금하다.(나는 팔로우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다. 페친 신청을 하면 팔로우도 함께 되는데 만일 거절도 아니고 수락도 아닌 유보 상태로 두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려는 것이다. 페친이 좋은데 수락받지 못하면 팔로우도 철회하는지 아니면 팔로우는 유지하는지 말이다. (페친 신청과 함께 팔로우도 되는 것은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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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3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상대방이 북플 친구 신청을 하면 수락하고나서 그 사람이 쓴 글을 봅니다. 인사말은 남기지 않아도 `좋아요` 누르고, 댓글을 남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하지만 제가 먼저 반응을 주는데도, 답글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 회원도 있어요. 그러면 친구 관계를 해제해요. 너무 단순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쓴 글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북플에서도 페북에서 봤던 회원들의 사용 패턴이 보여요. 북플 활동이 많은 분들이 `좋아요`와 댓글 수가 많은 편입니다. 그분들과 친구를 맺으면 매일 그분들이 쓴 글만 봅니다. 저도 그런 패턴에 익숙해진 상태인데요, 가끔은 잘 모르는 분들의 글도 보려고 합니다.
 

 

개인 회고록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책 서애(西厓)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국보 132호) 우리의 숱한 역사적 유물, 기록물 등의 이름이 중국의 경서나 서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듯 ‘징비록’ 역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에서 이름을 취한 것. 관건은 단순한 대비(對備)가 아니라 징비(懲毖) 즉 지난 잘못을 징계하는 것. 우리가 잘 하지 못해왔고 지금도 그런 부분. 언제 벌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벌을 받는 세상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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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이 없던 시절 나는 블로그를 출판사 열화당(悅話堂)에 영감을 준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인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란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친척들의 정겨운 말을 들으며 즐거워 한다는 의미인데 지금의 SNS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페북은 부처님이 하신 "와서 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사실 블로그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다툼, 갈등 등이 없을 수 없다.) 내 친구들은 대체로 진지한 분들이기에 크게 관련이 없지만 페북은 블로그에 비해 기동력 있는 짧은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 "와서 보라"는 말은 자신감의 표현인데 이는 사방팔방으로 트인 페북 공간에 잘 맞는 말 같다.


그런데 자신감이 과도해 영악하기까지 한 현대적 마인드를 과거로 투사해 이완용의 매국을 국력 키우기의 일환으로 보는 사람도 눈에 띈다. '우리'는 고려하지 않고 강국의 패권적 힘을 우리 것으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이 아닐 수 없다.(물론 사학자 김윤희 박사의 말처럼 대한제국의 정치 구조 속에 배태되어 있던 문제들을 이완용 개인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이완용을 제외한 다른 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내 페친 중에 그의 비상식적인 글에 '좋아요'를 클릭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다행이다. 최광임 시인의 경우처럼 "제법 친한" 분을 페삭하는 안타까움을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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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0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북은 누구나 글과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고, 그런 분위기에 취해 자만심을 가지게 되는 무서운 공간입니다. 쌍방향 의사소통이 원활한 공간이라고 해도 자신의 귀에 듣기 싫은 의견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페북이 치열한 인정투쟁의 장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인품도 갖추어야 할 사람들이 꽤 있지요. 감사 합니다 .
 

 

미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플로이드 델(Floyd Dell: 1887 - 1969)이 "한가함이란 어떤 할 일도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Idleness is not doing nothing. Idleness is being free to do anything.)"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생각한 것은 일본 임제종 소속 승원사(承元寺: 죠겐지)의 주지인 시게마츠 소이쿠(重松宗育: 1943 - )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무아(無我)는 무기력하고 무감동이며 허무주의적인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무아의 인간은 머리가 텅 빈 로봇 인간이 아닙니다. 무아는 대자연 전체의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생겨 나는 유일한 개(個)에 대한 자각입니다. 즉 지금 이곳에 있는 나(에 대한 자각)입니다."('앨리스 선(禪)을 말하다' 47 페이지)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기에 추가하면 불필요한 덧칠을 하는 것일 수 있어 소이쿠의 책은 가도와키 가키치(門脇佳吉)의 '선(禪)과 성서'와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라는 말 정도를 덧붙이게 된다. 소이쿠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선을 말하다', '어린 왕자 선을 말하다','(미하엘 엔데의) 모모 선을 말하다'에 이어 앞으로 어떤 책을 선으로 풀이할지 기대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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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수국
김정수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지금은 아산이 된 온양(溫陽)에서 태어나 성장 후 결혼해 남양주(南楊州)의 시댁으로 들어가 살게 된 김정수 작가(수필가). 이 분은 자신의 생을 온통 빛과 볕을 향해 있었던 향일성 식물 같은 삶으로 소개한다. 저자는 남양주를 ‘남쪽의 빛 고을’로 풀이한다. 물론 남양주의 양은 볕 양(陽)이 아닌 버드나무 양(楊)이다. 양(楊: 버드나무) 자체에는 빛이나 볕을 의미하는 바가 없지만 양수(陽樹)로 통하는 것을 감안하면 할 수 있는 연결이라 할 수 있다.


양수는 하루에 3에서 5시간 직사광선을 받아야 하는 나무이다. 버드나무는 극(極)양수라고 한다. 양수는 그늘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이고, 음수(陰樹)는 그늘을 잘 견디는 나무이다. 이 분의 수필집 ‘청색 수국’은 여행을 많이 하고 삶의 현장에서 깨달음을 얻어내는 데 능한 60 중반의 여성 작가의 섬세한 일상성을 풍족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수필은 essay와 miscellany로 나눌 수 있다. 흔히 essay를 중(重)수필, miscellany를 경(輕)수필이라 칭하는데 나는 essay는 사색을 위주로 하는 관념적인 수필, miscellany는 체험을 위주로 하는 실제적인 글로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miscellany에 속하는 ‘청색 수국’의 특징은 그야말로 일상에서 소재들을 취한 책으로 서평, 영화평, 여행기 등과 거리를 갖는다. 이 책의 특징은 쉽고 잔잔한 감동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짧은 글들이 대종(大宗)을 이룬다는 점도 특징이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힘을 빼고 편하게 쓴 수수한 분위기의 글들이 읽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글이라 해서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입천출(深入賤出: 깊이 공부하고 쉽게 설명하는 것)이란 말이 알게 하듯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참고로 나는 심입천출보다 심찬이시(深撰易施)라고 부른다. 撰은 지을 찬, 施는 베풀 시이다. 깊이 생각하고(짓고) 가려내 쉽게 (베)풀어보인다는 의미이다.


어떻든 miscellany이기에 당연히 체험 특히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표제작인 ‘청색 수국’을 보자. 저자는 수국은 음지를 더 좋아하는 식물이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다. 수국은 토질에 따라 흰색, 보라색, 붉은색, 청색 등으로 피어난다고 한다.(106 페이지) ‘청색 수국’은 아파트 앞 화단에 버려진 수국을 데려다 정성으로 키워 청색 수국을 피워낸 저자의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이다.


저자는 청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신비와 동경을 상징하는 노발리스의 ‘푸른 꽃‘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 역시 청색을 좋아한다, 보라색이 신비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청색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신비와 동경은 깨지기 마련인지 저자가 애지중지 키우고 애틋하게 대하던 그 꽃이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고 말았다. 저자는 그를 무정한 사람이라 표현한다.


수국을 볕이 드는 곳으로 옮겨주어 문제의 그 사람의 눈에 띈 것이 발단이 된 그 사건을 저자는 볕으로 향하는 자신의 “잠재의식“이 만들어낸 일이라 표현한다. 이 글을 읽고 생각한 시가 있다. 배현순 시인의 ’봄‘이란 시이다. ”여린 연둣빛 봄/ 아장아장 새순 움트려 왔다가/ 호르르 가 버리는구나// 내 탓이구나/ 내가 너무 귀찮게 했구나/ 꽃이 만개했다고 속절없이/ 재잘 거렸구나//


형형색색 고운 빛에 취해/ 만지지 말라는 것을/ 그만, 손대고 말았구나/ 여리고 민감한 네게 거친 호흡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니/ 꽃물이 되어 버리고 마는 붉은 눈물/ 바라보기 가슴이 에는구나// 미처 몰랐다/ 나로 인해“ 서른 막바지에 이르러 곧 마흔살이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저자는 그 허망함을 달래기 위해 문학 강의를 들으러 가서 만난 문단의 선배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육십대에 수필을 쓰기 시작했어. 지금 제비꽃 나이잖아. 앞으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어. 그러니 어서 글 써.“ 어렵게 등단한 뒤 20년간이나 글을 쓰지 않은 저자는 이 말에 힘을 얻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필의 힘은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으리라. 저자는 쓰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 한다. ”절망은 견디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때로는 쓸쓸한 가슴을 정화시켜주는 청량제가 되어주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저자. ”나에게도 언젠가 꽃이 활짝 피어나는 봄이 오리라. 아직도 믿고 있다.“는 저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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