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란 구절을 보고 용원화(溶原化)라는 생물 용어를 생각했다면 시인에게, 그리고 글을 올리신 ***님께 실례일까요? 용원화는 바이러스의 DNA의 양끝이 숙주의 끊어진 DNA와 결합해 하나의 DNA가 되는 것을 말하지요. 저는 다시 과학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시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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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신의 선물이라면 마지막 문장은 무엇일까?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자크 모노의 자연과학서 ‘우연과 필연’과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들 수 있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그가 이 우주 속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모노. 

 

”...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와 나는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라 말하는 카뮈. 광대한 무관심이란 단어와 부드러운 무관심이란 단어가 대비되어 울린다. 당연히 부드러운 무관심이 좋으리라. 그 세계는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기고 ”아프게 사라”(이상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에서 인용)지는 사람들에게 눈물이라도 뿌려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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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
이영진 지음 / 홍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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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불가피하게 나는 다니엘 파울 슈레버 생각을 하게 된다.(슈레버는 치매, 신경증, 편집증 등을 앓았던 20 세기 초 독일의 판사로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의 저자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을 발하는 거대한 신경망을 통해 자신을 파괴하려던 신과 소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가 여자로 변신하는 환상 등을 고백한 사람인 다니엘 파울 슈레버. 그의 원형이라 할 스베덴보리를 이야기하며 칸트는 그런 소리를 헛소리로 치부하면 중요한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난을 받고, 진지하게 반박하면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했지만 내 피난처는 스피노자의 사상 즉 신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신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본원성이라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 이성(理性)이라는 데카르트의 신, 관념이라는 칸트의 신, 합리성이라는 헤겔의 신, 진화라는 다윈의 신, 물질이라는 마르크스의 신, 허무라는 니체의 신,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신, 존재와 현상이라는 하이데거의 신, 구조라는 소쉬르의 신, 욕망이라는 라캉의 신, 해체라는 데리다의 신 등을 이야기한 이영진 목사의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는 참고 자료로 삼을 만하다. 부제는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이다. 저자는 작고 아름다운 교회를 지향하는 미문(美門) 교회를 설립, 목회를 병행하며 책을 쓰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스베덴보리의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2009년이다. 칸트(1724 - 1824)보다 한 세대 앞섰던 스베덴보리(1688 - 1772)는 스웨덴의 과학자 출신의 영성 신학자로 칸트는 수백 km 떨어진 곳의 화재 상황을 화면을 보듯 중계한 스베덴보리의 능력에 매료되어 그를 영혼을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시령자(視靈者)로 인정하지만 후에 스베덴보리의 능력을 부정한다. 순수이성은 신, 영혼 등을 파악할 수 없지만 실천이성적 관점에서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 칸트. 열린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스베덴보리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는 해당 사상가의 사상 중간 중간에 관련 영화 이야기를 넣은 구성이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플라톤을 재구성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으로 재구성한 인물”이라는 구절(29 페이지) 등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플라톤: 연역적: 어거스틴적이라는 공식과, 아리스토텔레스: 귀납적: 아퀴나스적이라는 공식을 얻게 된다. 앞서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했지만 칸트는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영역에서 출몰하는 판단과 행위를 회의론자들이 부정의 형식에 대입한 것과 달리 적극 수용하여 변증했“다.(61 페이지)


칸트는 쾌감이란 이성 없는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며 선(善)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동물적이면서도 이성적 존재자에게 즉 이성적 존재자이면서 동물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보았다.(’판단력 비판‘) 칸트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두려움으로 정의했다. 이 두려움이란 자연을 만났을 때의 감관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통해 놀라고, 그 놀라움을 타고 들어온 미적 쾌감을 통해 비로소 즐거움에 이른다.(73 페이지) 저자가 헤겔의 합리성을 설명하는 데 든 영화는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장 발장인데 발장은 성(姓)이고 장은 이름이다.


마르크스의 신 즉 물질은 다소 논쟁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칼 마르크스에게 종교란 아편이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관념으로 이루어진 착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는 관념이 아니다. 철저한 인성 즉 물적 토대에 기인한다. 이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 하였다.“(129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확실한 물적 토대에 기인한 것은 십자가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관념적이라 말하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물적 토대에 기인한 십자가를 못 보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관념적 해결책을 구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니체를 이야기하며 저자가 거론한 것 즉 ”근대 이성주의 과학은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은 존재하지도 않는 초월적 가치 위에 성립“(141 페이지)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를 관념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신뢰할 만한 가치기준을 잃고 주춤거리는 소극적 허무주의와 달리 적극적 허무 즉 영원회귀를 할 것을 주문했다. 그 과정을 통해 초인이 되는 것이다.(관념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우상을 제거하는 의미로 발(發)해진 말이지만 프로이트의 ”의심“은 그들과 달리 자기 우상을 제거하는 공적(功績)이 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는 의식할 때(노에시스) 의식된다.“(노에마)는 현상학의 명제와 다르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플라톤의 생각과 달리) 천상에서 하계(下界)로 내던져졌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자의와 상관없이 내던져졌다는 의식으로 인한) 불안감을 통해 존재한다고 보았다.(174 페이지. 피투성: 被投性)


피터 위어의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스튜디오라는 갇힌 공간에서 탈출하고 뛰쳐나와야만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 내에서 이미 불안감을 통해 자신을 내던져진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존재가 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파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세계 속에서 갖는 지위 즉 세계의 총체적인 도구적 연관 속에서 탈은폐되는 순간 저절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소쉬르의 신 구조에서 저자는 랑그와 파롤을 이야기한다. 오순절에 방언(方言)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늘의 언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교도의 악령의 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하며 이는 방언이라는 시니피앙이 지닌 시니피에를 오독한 데 따른 결과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으로 유비(類比)한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대두된 남근을 생물학적 성의 기관이 아닌 일종의 기표로 제시했다.(211 페이지) 이는 남근이 남성성에게는 아버지 되기이며 여성성에게는 이성의 선망이라고만 정의되는 한계에 대한 보충이다.


라캉은 성적 결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 답에 착안한 것이다. 라캉은 주체는 결핍이고 욕망은 환유적이라는 명제를 도출했다.(환유는 그것이 지닌 속성과 밀접한 다른 관계를 지닌 것을 빌려 나타내는 수사학 방법이다. 은유란 어떤 사물의 표현을 빌려 그 의미를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마지막 장은 데리다의 신 해체이다. 이 챕터에 인용되는 영화는 ’시네마 천국‘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특별한 것은 언어에 대한 해체이다. 그의 에크리튀르는 글씨, 필적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이지만 데리다는 활자로 된 문자로서의 글씨라기보다 흔적과 자국의 의미로 채용했다. 에크리튀르는 원저자가 처했던 상황을 보존하고 있는 개념으로 저자가 사라지면 문맥도 사라지겠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그렇기에 그것은 반복된 읽기의 가능성으로 열린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반복 가능성을 지닌 (문자적) 에크리튀르야말로 우월한 언어라고 역설했다. 데리다가 음성언어에 반하는 언어로서 제시한 에크리튀르는 해석학상의 궁극적 언어인 소리로서 언어의 기능을 연상시킨다.(23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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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선생의 책을 뒤져 기어이(?) 편지에 관한 글을 찾아냈다. 참 오래 전 읽은 기억을 되살려 그의 에세이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찾은 글은 이렇다. “방안에 들어가 서신함을 보고 편지가 없으면 전쟁 통에 오래 소식이 두절된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의 대략을 기억하는 것은 이 글이 워낙 임팩트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1964년 6월 그러니까 자살하기 몇 개월 전의 일기로 이 글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그의 천재성과 광기에 찬 지식욕, 가을과 봄, 겨울을 보는 낭만성, 편집적이라 할 수도 있을 만큼의 생에 대한 사랑과 낯선 것에 대한 동경(憧憬) 등을 확인했다. 전혜린 선생의 일기는 짧고 강렬하다. 어쩌면 그에게 흰 종이에 단지 “죽었니?”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는 어느 지인의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전혜린 선생이 페북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에게 어떤 풍경이 빚어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좋아요의 부재를 전쟁 통에 편지가 두절된 것 만큼 느끼는 사람들이 만드는 페북 시대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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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0-02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글들을 보면 저 난리통 ( 전쟁의 와중) 속에 그 느린 서신이란 교통의 방법에 , 그게 유일한 통신이란 걸 알면서 놀랍고 신기합니다 . 하긴 , 펜팔을 해봐서 하루하루 편지를 주고받던 날들의 기다림에대해 알지만 ..( 잊고 있었는데)그럼에도 그게 환경의 특수성을 말하면 늘 놀라운 일 ... 간절한 일이라 가능한 건지 싶다는 ...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뜨거웠던 여름의 흔적을 그리다 사라진 젊은 화가에게서 불현듯 전사통지서가 날아오고....˝란 시가 생각납니다.
 

 

최근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를 낸 철학자 김상환 교수님의 열린 연단 '욕망과 기율' 강의를 들었다. 내게는 열 여덢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이정우 교수님에 미치지 못하지만 김 교수님도 내가 철학적 사유를 형성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이다. 읽은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김 교수님의 첫 책인 '해체론 시대의 철학'은 이 교수님의 첫 책인 '가로지르기'보다 약 1년 정도 이른 1996년 7월에 출간된 책이다. 두 분은 나로 하여금 처음 철학을 사랑하게 한 분들이다.

 

20년이란 시간이 한 순간인 듯 느껴진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의 첫 두 문장이 김수영 시인의 '비'의 일부를 인용한 뒤 붙인 "김수영은 시를 사랑의 기술이라 했다.그것은 구하던 것보다 피하려던 것을 먼저 만날 때 생기는 기술, 소모 속에서 생의 본능을 키워가는 언어적 행위"라는 구절임을 감안하면 최근 나온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 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예견 가능한 출간이라 할 수 있다. 올 들어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와 신정근 교수의 '공자의 인생강의', 이한우 기자의 '슬픈 공자' 등을 읽은 내게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는 제대로 김수영 시인의 시에 흥미를 붙일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한명희 교수의 '현대시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도 만날 수 있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김종삼 등의 시인과 함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분석하기에 충분한 이야기거리가 있는 시인으로 나온다.'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 김 교수님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을 계획이기에 이 가을은 아무래도 철학과 (인)문학으로 물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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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0-0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건지 당연한 건지 한국 대다수 남성 시인의 시집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독선적인 가부장,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 자본주의의 첨병 뭐 그런 역할을 한국 아버지들이 두루 갖춰? 보여줘서 그런 걸까요? 아버지 계승보다 아버지를 죽여야 독립이 더 확고하기도 할 테니...
말은 거칠게 해도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보여주는 여성 시인도 많고.
둘러싸임과 벗어남의 미묘한 결합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0:53   좋아요 1 | URL
김화영 교수는 ‘프랑스 문학 산책’에 수록된 ‘아버지’의 신화 - 파스칼 자르뎅의 ‘노란 꼽추’란 글에서 이런 작가들은 거론합니다. 샤를르 페기,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루이 아라공, 사르트르, 카뮈... 이들은 프랑스 문학사 속에서 어린 시절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거나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자란 작가들입니다. 김 교수의 결론은 이들이 아버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자랐다면 운명(삶, 작품)은 달라졌을 것이란 점입니다. 김 교수는 카뮈의 삶(저 말없는 어머니라는 우회를 통하여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도정)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문학의 예외로 마르셀 파놀의 ‘내 아버지의 영광’을 듭니다. 이 작품은 “온통 정다운 아버지의 포근한 웃음 속에 묻힌 천재의 걸작“으로 작가는 이를 의식했음인지 이후 세 권의 소설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청산하려는 듯 빠르고 따뜻하고 때로 잔혹하게 ‘아버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카뮈의) 어머니를 이야기했지만 제게 큰 격려를 해주신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 평론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욕망의 꼬리는 길다’에서 저자는 이성복 시인의 몇몇 시에서 시인이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지 않았는가 즉 자신을 심리적으로 여성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합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으면 좋겠어“란 구절이 있는 ‘口話’가 대표적입니다. 개인사를 들추고 싶지 않고 또 그럴 수 있어 시인의 삶을 잘 알 수 있다 해도 그런 앎이 환원주의적으로 시 분석에 유용한 의미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삶을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갈등 관계를 여하히 극복하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 자본주의적 관계가 굳이 아니라 해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구성하는 주 내용이 아버지에 대한 것인지 사회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시인들이 언급하는 그 콤플렉스는 어느 정도는 삶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진정성이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그것이 고급스런 내용물이라는 점에서 (‘책으로 사랑을 배웠어요“란 어느 코미디의 대사처럼) 자신의 진정한 것이 아니기에 의도적인 위악(僞惡) 또는 과장(誇張)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만일 시인들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로이트와 그가 말한 콤플렉스에 대한 앎을 갖지 못한 채 시를 썼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페북의 한 여성 시인 친구는 차(茶)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그렇다고 합니다.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관계라 해도 들뢰즈가 말한 가족 관계에 주목하거나 스피노자의 기쁨에 영향을 받았다면 시는 많이 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AgalmA 2016-10-02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도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런 작품이 안 나왔을 수 있겠죠.
기형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런 시를 쓸만큼 우울한 가계가 아니었다고 말하죠. 그 시절 고만고만한 가난이었고 그는 유쾌한 사람에 더 가까웠다고. 즉 현실보다 시인 스스로가 시 속에서 구축하며 바라보는 시점이 가장 큰 원형이겠죠.
이성복 시인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온통 임신 얘기죠. 아무래도 이성복 시인의 여성성은 예술가들의 창작 배출의 심리와 맞닿지 않을까 싶어요. 잉태와 힘든 출산을 하는 과정은 창작의 그것이죠. 이성복 시인을 비롯 제가 아는 시인들은 프로이트를 엄청 읽더라는. 스스로에 대한 치유가 갈급한 사람들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글을 쓰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던 예전 방식에서 좀 벗어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茶 공부도 좋네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나가고 나니 언니와 차남들의 세계도 왔잖습니까. 유령 가족을 꾸리는 시인들도 있고. 시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란 여러모로 모색해 볼 여지가 있죠.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1:31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참고의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와 기형도 시인의 예는 흥미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기 치유의 차원을 넘어 즉 프로이트 탐독에서 더 나아가 다른 창의적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고착되면 문제라 생각합니다. 자기 치유를 위해 프로이트를 엄청 읽는 시인을 말씀 하셨지만 부작용으로 병리적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김승희 시인이 ‘객석에 앉은 여자’에서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늘 여기 저기가 아프다고 말하는 여자를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에드가 모랭이 말했듯 인간은 환상과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광기의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病)에 정듭니다...“란 허수경 시인의 시구처럼 병리(病理)적인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