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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
이영진 지음 / 홍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불가피하게 나는 다니엘 파울 슈레버 생각을 하게 된다.(슈레버는 치매, 신경증, 편집증 등을 앓았던 20 세기 초 독일의 판사로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의 저자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을 발하는 거대한 신경망을 통해 자신을 파괴하려던 신과 소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가 여자로 변신하는 환상 등을 고백한 사람인 다니엘 파울 슈레버. 그의 원형이라 할 스베덴보리를 이야기하며 칸트는 그런 소리를 헛소리로 치부하면 중요한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난을 받고, 진지하게 반박하면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했지만 내 피난처는 스피노자의 사상 즉 신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신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본원성이라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 이성(理性)이라는 데카르트의 신, 관념이라는 칸트의 신, 합리성이라는 헤겔의 신, 진화라는 다윈의 신, 물질이라는 마르크스의 신, 허무라는 니체의 신,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신, 존재와 현상이라는 하이데거의 신, 구조라는 소쉬르의 신, 욕망이라는 라캉의 신, 해체라는 데리다의 신 등을 이야기한 이영진 목사의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는 참고 자료로 삼을 만하다. 부제는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이다. 저자는 작고 아름다운 교회를 지향하는 미문(美門) 교회를 설립, 목회를 병행하며 책을 쓰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스베덴보리의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2009년이다. 칸트(1724 - 1824)보다 한 세대 앞섰던 스베덴보리(1688 - 1772)는 스웨덴의 과학자 출신의 영성 신학자로 칸트는 수백 km 떨어진 곳의 화재 상황을 화면을 보듯 중계한 스베덴보리의 능력에 매료되어 그를 영혼을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시령자(視靈者)로 인정하지만 후에 스베덴보리의 능력을 부정한다. 순수이성은 신, 영혼 등을 파악할 수 없지만 실천이성적 관점에서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 칸트. 열린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스베덴보리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는 해당 사상가의 사상 중간 중간에 관련 영화 이야기를 넣은 구성이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플라톤을 재구성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으로 재구성한 인물”이라는 구절(29 페이지) 등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플라톤: 연역적: 어거스틴적이라는 공식과, 아리스토텔레스: 귀납적: 아퀴나스적이라는 공식을 얻게 된다. 앞서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했지만 칸트는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영역에서 출몰하는 판단과 행위를 회의론자들이 부정의 형식에 대입한 것과 달리 적극 수용하여 변증했“다.(61 페이지)
칸트는 쾌감이란 이성 없는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며 선(善)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동물적이면서도 이성적 존재자에게 즉 이성적 존재자이면서 동물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보았다.(’판단력 비판‘) 칸트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두려움으로 정의했다. 이 두려움이란 자연을 만났을 때의 감관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통해 놀라고, 그 놀라움을 타고 들어온 미적 쾌감을 통해 비로소 즐거움에 이른다.(73 페이지) 저자가 헤겔의 합리성을 설명하는 데 든 영화는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장 발장인데 발장은 성(姓)이고 장은 이름이다.
마르크스의 신 즉 물질은 다소 논쟁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칼 마르크스에게 종교란 아편이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관념으로 이루어진 착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는 관념이 아니다. 철저한 인성 즉 물적 토대에 기인한다. 이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 하였다.“(129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확실한 물적 토대에 기인한 것은 십자가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관념적이라 말하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물적 토대에 기인한 십자가를 못 보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관념적 해결책을 구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니체를 이야기하며 저자가 거론한 것 즉 ”근대 이성주의 과학은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은 존재하지도 않는 초월적 가치 위에 성립“(141 페이지)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를 관념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신뢰할 만한 가치기준을 잃고 주춤거리는 소극적 허무주의와 달리 적극적 허무 즉 영원회귀를 할 것을 주문했다. 그 과정을 통해 초인이 되는 것이다.(관념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우상을 제거하는 의미로 발(發)해진 말이지만 프로이트의 ”의심“은 그들과 달리 자기 우상을 제거하는 공적(功績)이 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는 의식할 때(노에시스) 의식된다.“(노에마)는 현상학의 명제와 다르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플라톤의 생각과 달리) 천상에서 하계(下界)로 내던져졌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자의와 상관없이 내던져졌다는 의식으로 인한) 불안감을 통해 존재한다고 보았다.(174 페이지. 피투성: 被投性)
피터 위어의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스튜디오라는 갇힌 공간에서 탈출하고 뛰쳐나와야만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 내에서 이미 불안감을 통해 자신을 내던져진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존재가 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파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세계 속에서 갖는 지위 즉 세계의 총체적인 도구적 연관 속에서 탈은폐되는 순간 저절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소쉬르의 신 구조에서 저자는 랑그와 파롤을 이야기한다. 오순절에 방언(方言)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늘의 언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교도의 악령의 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하며 이는 방언이라는 시니피앙이 지닌 시니피에를 오독한 데 따른 결과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으로 유비(類比)한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대두된 남근을 생물학적 성의 기관이 아닌 일종의 기표로 제시했다.(211 페이지) 이는 남근이 남성성에게는 아버지 되기이며 여성성에게는 이성의 선망이라고만 정의되는 한계에 대한 보충이다.
라캉은 성적 결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 답에 착안한 것이다. 라캉은 주체는 결핍이고 욕망은 환유적이라는 명제를 도출했다.(환유는 그것이 지닌 속성과 밀접한 다른 관계를 지닌 것을 빌려 나타내는 수사학 방법이다. 은유란 어떤 사물의 표현을 빌려 그 의미를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마지막 장은 데리다의 신 해체이다. 이 챕터에 인용되는 영화는 ’시네마 천국‘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특별한 것은 언어에 대한 해체이다. 그의 에크리튀르는 글씨, 필적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이지만 데리다는 활자로 된 문자로서의 글씨라기보다 흔적과 자국의 의미로 채용했다. 에크리튀르는 원저자가 처했던 상황을 보존하고 있는 개념으로 저자가 사라지면 문맥도 사라지겠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그렇기에 그것은 반복된 읽기의 가능성으로 열린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반복 가능성을 지닌 (문자적) 에크리튀르야말로 우월한 언어라고 역설했다. 데리다가 음성언어에 반하는 언어로서 제시한 에크리튀르는 해석학상의 궁극적 언어인 소리로서 언어의 기능을 연상시킨다.(23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