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100% 활용법
요한 이데마 지음, 손희경 옮김 / 아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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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100% 활용법의 저자 요한 이데마의 다음의 글이 주의를 끈다. 교향곡 감상은 40, 영화 관람은 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미술관에서는 미술작품과 얼마나 시간을 보낼지 당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문화유산 해설 공부를 함께 하는 공대(工大) 출신의 한 선배는 자신이 받았던 공대 수업과 너무 다르게 문화유산 해설은 창의적이고 자유롭다는 말을 했다. 맞지만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문화유산 해설 수업이 무조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지금 받는 수업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어떻든 나는 요한 이데마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선사 시대 사람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를 추론하는 글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 미술을 위한 미술 즉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 2) 영적 차원이라는 것, 3) 기후 변화로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 등이다.


나는 이 가운데 1번을 지지하고 2번이라도 괜찮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미술관을 찾아 미술 작품을 즐기고 미술 책을 열람하지만 때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즉 원시인들도 미술을 즐겼는데 미술 작품과 관련 책들을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 양가감정과 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미술과의 만남은 기대한 것처럼 언제나 잘 되지는 않는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인용하며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흥미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권태감을 드러낸다는 말을 던진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술관 방문을 뜻깊은 기억으로 바꾸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어쩌면 내가 미술관에서 양가감정을 느끼곤 하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거나 그것에 감동받음으로써 미술과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기대가 좌절로 변한 것이 누적되다 보면 새 기대를 갖는 한편 축적된 기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불편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미술관 다리(museum legs)는 미술관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이사이 오랫동안 천천히 걸은 후 생기는 다리의 통증을 말한다. 어제 나는 조선왕릉 다리(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legs)를 겪었다. 선정릉에서. 성종의 무덤에서 정현왕후의 무덤으로, 다시 중종의 무덤으로 순례를 했는데 드넓은 공간 때문이기보다 불규칙적인 걷기와, 생각을 하며 오래 서 있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주 겪어야 할 일...


저자는 미술은 굉장한 자극이라서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최고의 풍경화는 멜랑콜리, 자부심 또는 노스탤지어 같은 정제된 감정을 전달하고 그런 감정들이 반대로 삶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으니 그저 풍경을 즐기는 데 그치지 말고 그 풍경에 당신의 내면에 불꽃을 일으키는 감정을 느껴보도록 하라는 말을 한다. 이는 미술은 벽에 걸려 있는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과 만날 때에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과 들어맞는다.


반 고흐는 액자 없는 그림은 영혼 없는 육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전하며 저자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당신은 미술관 전체를 당신의 경험을 틀짓는 액자로서 여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미술은 정의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태를 굳이 애매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셈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옳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미술을 정의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술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약간의 맥락과 올바른 마음가짐이라 말한다. 저자는 미술관이 다른 어떤 곳보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데 열린 마음을 갖게 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명작을 발견하고 나면 꼬리표 따위는 잊어버리고 미술을 즐기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이들은 미술관에 따라다니기 마련인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태도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독제이다.


저자는 효과적인 설명에 대해 거론한다. 이는 간결하고 특징적이며 당신이 미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53 페이지) 저자는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촉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말을 인용하며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미술관 세계에서 어떻게 직접 선을 대볼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 (만질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이다. 일부 미술관은 만질 수 있거나 원래 만지게 되어 있는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은 무엇일까? 비관론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미술관은 미술의 묘지라는 말이 그것이다. 저자는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확장하거나 재고하라고 말한다. 이는 미술관의 의미를 찾는 내 상황에 잘 맞는다. 저자는 갤러리 가이드를 만나라고 말한다. 그들은 놀라운 배경 지식을 가진 존재들이다. 다만 우리가 편한 마음으로 나름의 의미를 구축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가이드들이 필요하다.(75 페이지) 이는 문화유산 해설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저자는 속도를 늦춰달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려 만든 작품을 너무 빨리 지나친다.(평균 9. 모나리자의 경우 평균 15.) 저자는 미술관을 체크리스트라 생각하지 말고 메뉴라 생각하라고 말한다. 모든 작품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미술작품은 존재하지 않기에 탐구하고 자신과 연결짓는 것이다.


효과적인 가이드들은 사려 깊고 도전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의견을 전한다.(88 페이지) 어느 유명 정치인이 이 드로잉을 아주 좋아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비디오가 우리 개개인의 일상에서 겪는 싸움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줄까?...한편 관람객으로서 가이드 투어에 기여하려면 무엇보다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질문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특히 같이 간 사람들이 묻기 무서워 하는 것들을 질문하라....


날카롭고 예상치 못한 질문은 가이드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할 수 있으며 재치와 독창성 있는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89 페이지) 미술관 관람객의 다섯 유형이 흥미를 끈다. 1) 경험 추구형, 2) 조력자형, 3) 재충전형, 4) 전문가형, 5) 탐험가형... 나는 탐험가형이다. 특정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를 바라는 유형이다. 그들은 자기 의견이 확고하며 스스로의 방식을 찾는 데 익숙하다.(102 페이지)


더 읽을거리로 제시된 책들은 대개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들이 아니다. 몇 권의 책이 눈에 띄는데 나에게는 미리엄 엘리아의 우리는 갤러리에 간다가 마음에 든다. 부모와 아이들이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쉽도록 통속 소설에 버금갈 만큼 재미 있고 다채로운 책을 쓴 저자이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술을 보는 눈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책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과 안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하는 책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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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6-11-0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관 다리는 느껴봤지만 조선왕릉 다리를 아직 느껴보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 부끄럽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16-11-0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반갑습니다. 조선왕릉도 시간나면 한 번 가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가 남자 시인들의 작품을 잘 안 읽는 것은 도덕성이나 심성 면에서 남자 시인들보다 여자 시인들을 더 믿기 때문이다. 시 역시 심성과 다르게 작품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몇몇 남자 시인들의 시는 괴리(乖離)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그 시인들의 삶을 알지 못하기에 무리한 말일 수 있지만 시를 보는 것만으로 즉 직관으로 판단하건대 심성과 꽤 다르게 표현된 시들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남자 시인들이 연이어 성(性)과 관련한 추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시를 읽지 않기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그렇게 추문을 일으킨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면 참 황망할 것이며, 그런 시인들의 시집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지불한 돈이 아깝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고 시집을 버려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 시인들의 시를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황동규, 마종기, 고진하, 송재학, 박남준, 성윤석, 서동욱, 장석남, 송찬호, 엄원태 등의 시인들의 작품은 자주 읽는다.  


거론되지 않은 분들은 내가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분들이다. 정확히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학은 혼자 하는 것이라는 성윤석 시인의 혜안이 반갑다. 아울러 시를 기법이나 수사(修辭)적 장치로 환원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기법과 수사가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은 돌아보지 않고 작품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쓰는 사람은 물론 읽는 사람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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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28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이라는 말을 생략시켜 보면, 도덕성이나 심성 면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을 더 믿기 때문이다, 일단 뛰어난 비교 구문에 밑줄긋고요,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회가 내홍을 겪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표리부동과 파렴치에서 괴리가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2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 감사드립니다. 달아주신 댓글에 공감합니다... 바르고 책임질 줄 아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제목이 역설적이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피아니스트, 교수인 조은아 님의 관련 글이 실렸다. 호지가 공동체적 삶과 자연의 조화를 오래된 삶으로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글이다. 사실 오래된 미래란 개념은 느낌 또는 직관으로 포용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설명하는 것은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베르그손이 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과거는 기억에 의하여 부단히 현실화하고, 현재는 부단히 과거가 된다고 말했다. 이를 노르베르 호지의 개념에 적용하면 우리는 과거 즉 우리가 살았던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재) 현실화해야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과거를 바로잡거나 현실화하는 것도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Ancient Fu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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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과 도마복음예수
청가인 지음 / 도꼬마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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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관심을 두던 때 외경(外經)의 존재를 알고 기독교가 거대한 신비 또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외경이란 저자 불명, 권위 의심 등의 이유로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전을 말한다. 도마복음은 대표적 외경이다.(도마복음은 아타나시우스 신조 즉 지금의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해 쓰인 문서이다.)


청가인의 ‘이상(李箱)과 도마복음 예수’는 이상의 문학작품이 도마복음에서 언급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도마복음에서 묘사된 예수는 정경의 예수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말할 것은 종교와 문학, 유대와 한국, 2000년의 격차 등을 감안했을 때 일치란 의외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상이 자아수행에 매진한 사람임을 주장한다.


개체유지본능과 종족유지본능을 포기하는 수행을 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소설 ’날개‘의 구절을 실제 이상이 박제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상은 이 세상을 구원적거(久遠謫居) 즉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유배지로 생각했다. 저자는 이상이 그 치열한 극단의 수행 사실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난해한 글을 썼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을 육신으로 태어나서 신이 되어 돌아간 인간으로 정의한다. 이상은 기독교를 몹시 혐오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상은 기독교가 도마복음 예수를 무단 도용, 조작해 자신들의 목적에 합당한 복음으로 둔갑시켰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제국의 이익과 기독교의 이익이 만나는 곳에서 야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제국이 기독교로부터 원한 것은 (통합을 위한) 사상이었고, 기독교가 제국으로부터 원한 것은 힘이었다.


이상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한 성경 부분은 창세,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 등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상은 폐인이 되어 주지육림을 헤매면서 대충 살다 간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육신의 세상이 온통 허위라는 진실은 도마복음과 이상이 함께 생각한 부분이라 말한다. 저자는 도마복음은 조작되지 않은 순수한 것이라는 생각을 표한다. 이상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육신의 생활에 붙들어매어 자아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했다.


저자는 이상을 위고(프랑스), 세익스피어(영국)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이며 도마복음 예수의 가치와 동등하거나 어쩌면 능가하는 작품을 쓴 존재로 본다. 예수는 먹고 마신 존재, 이상은 그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다가 간 존재라는 것도 이상이 도마복음 예수를 능가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도마복음의 핵심이 자아수행을 지금 당장 시작하라는 주장이고 자아를 체득한 후에는 이 세상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라 설명한다.


도마복음이 주장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방편인데 음식에 매여 사는 것은 동물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설이다.(저자는 도마복음 전체를 상세 해설한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국문학 박사들 중 이상의 작품으로 논문을 쓴 사람들이 가장 많은 현실을 상기시키며 자신들도 잘 모르는 내용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제공하며 철밥통을 지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201, 20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도마복음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상은 인생을 여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육신의 일들을 버리고 자아수행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다. 이상은 도마복음을 접하지도 않은 채 오감(烏瞰)을 통해 바이블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았다.(216 페이지) 도마복음과 지금의 성경이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이블에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넘치는 데 비해 도마복음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21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수익 사업이기 때문이다. 도마복음 50장에는 예수가 우리는 빛에서 왔고 우리가 바로 그 빛의 아이들이며 우리는 살아 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들이라고 가르치는 구절이 있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수가 사람들이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의 증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에게 그것은 운동과 머무름이라고 답하라고 말한 구절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읽고 가장 크게 놀랐다고 말한다.(222 페이지) 이상은 ’선에 관한 각서 1‘에서 운동에의 절망에 의한 탄생이라는 표현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운동과 머무름‘에 정확히 대응한다. 운동은 설명이 필요 없고, 절망(이상의 표현)은 머무름(예수의 표현)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에도 그 유명한 “복되도다 가난한 자여. 천국이 너희의 것임이라.”는 구절이 있다. 저자는 이를 자아수행으로 인하여 육신(마음이나 심령이 아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너희의 것이기에 복되도다란 의미로 풀고 있다.


자아수행을 거듭 강조하는 도마복음의 논리를 따르면 수행을 하면 육신은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가능하다. 자아수행을 강조한 장은 여럿이지만 특히 2장이 주목된다. “추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 찾고 나면 고난 받을 것이요. 고난 받으면 놀라워할 것이며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니라.”(109 페이지) 이상은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벗어나기 어려운 본능을 기독교가 설치한 덫 즉 일요일의 붉은 빛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을 기독교의 신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속임으로써(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아수행에 매진해야 할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231 페이지) 이를 보면 불교의 경우가 생각난다. 기복 불교가 결국 수행 시간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가 너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했음을 설명하며 이상이 남몰래 자아수행을 한 사실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고 마무리짓는다.(241 페이지)


예수는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상은 이단(異端)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 차이 말고는 양자의 차이는 없다. 예수는 모든 것을 아는 자라도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는 말을 했다.(도마복음 67장)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결국 니체의 말을 도마복음에 적용하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틈나는 대로 반복해 읽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난해하고 비밀스런 두 텍스트를 비교 분석한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덧붙여 다른 도마복음 해설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상은 육신을 벽으로 상정했다. 자아합일을 위한 수행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인간의 육신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지도의 암실’이란 작품에 나오는 바 ‘발간 몸뚱이를 가지고 다니는 무거운 노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대로 자신의 몸을 박제로 만들었다.(280 페이지)


참 의미심장한 구절이고 해설이다. 도마복음의 의도는 우리 몸이 육신의 부모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육신의 것들에 매몰되어 자아수행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289 페이지) 예수는 ”영혼에 의지하는 자는 육신은 비참하리라. 육신에 의지하는 영혼 또한 비참하리라.“란 말을 했다.(112 장: 본문 299 페이지)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지만 설득력을 지닌 책 또는 저자들이 꽤 있다. 김환희의 ’국화꽃의 비밀‘이 대표적이다. 문학평론가 반경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나는 ’이상과 도마복음 예수‘를 읽으며 김환희의 책을 읽을 때 맛본 종류의 짜릿함을 느꼈다. 두 책은 모두 주류의 해석에 반(反)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두 저자의 설득력은 충분한데 말하고 싶은 것은 주류의 완고함이다. ’이상과 도마 복음 예수‘는 힘 있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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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8-04-22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책 이상과 도마복음예수에 대한
훌륭한 서평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책을 힘있는 좋은 책으로 써주신
마지막 부분에 대해 특히 더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좋아요를 누른 분 중에
늘 보고싶은 동쪽숲 님도 보여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4-23 04:22   좋아요 0 | URL
네.. 감사드립니다...반갑습니다.. 다음 행보가 기대됩니다..
 
베르그송 읽기 세창사상가산책 9
한상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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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베르그손, 성자 스피노자, 성령 니체...(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란 신성한 3위 일체 개념은 질 들뢰즈에서 연원(淵源)한 것이다. 내게 베르그손, 스피노자와 달리 니체는 (정서적으로) 버성기는 존재이다. 세창 미디어에서 나온 세창 사상가 산책 시리즈 중 성자, 성령은 아직 미출간이고 성부는 기출간이다.(책 제목은 베르그송 읽기) 아버지부터인가? 작은 판형에 200여 페이지의 미니 시리즈. 3부로 이루어진 책으로 베르그손의 삶(1부), 베르그손의 철학사상(2부), 베르그손의 생명주의 철학의 의미(3부) 등을 만날 수 있다.



저자(한상우 교수)는 누군가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의 사상이지 대상이 되는 이의 사상이 아님을 강조한다.(22 페이지) 베르그손의 철학을 단 한 단어로 규정한다면 생명주의이다.(29 페이지) 베르그손은 다윈의 점진주의에 대립하는 돌연변이설을 받아들였다.(42 페이지) 베르그손의 생각대로라면 신은 창조 과정 안에 내재하며 창조과정과 더불어 자기 자신도 창조해간다.(47, 48 페이지)


베르그손의 철학을 과정(過程)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화이트헤드(1861 - 1947)가 ‘과정과 실재’에서 자신이 베르그손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것은 유명하다. 베르그손은 실증적 지식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철학도 물리학처럼 추상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과학적 추상 작용 없이 철학의 지식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75 페이지) 물론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대상이 자연과학의 대상과 꼭같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철학은 거시적, 자연과학은 미시적)


베르그손의 ‘지속과 동시성’은 지속으로 우주를 이해한 베르그손이 동시성으로 우주를 이해한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에 대해 견해를 밝힘으로써 있게 된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적 대화의 결과물이다.(53 페이지. 베르그손: 1859 - 1941. 아인슈타인; 1879 - 1955) 물론 베르그손의 현대 물리학 숙지는 충분하지 않았다.(64 페이지) 베르그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시간과 지속, 의식과 자유의지 등에 대해 다룬 책이다.


스펜서의 철학사상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책이기도 한 이 저서는 한편으로는 칸트의 시간과 자유의지에 관한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 할 수 있다.(59, 60 페이지) 베르그손은 칸트가 시간을 등질적이며 일회적이고,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공간화된 시간으로 보았다고 비판했다. 베르그손은 시간이란 공간화할 수 없고 균질적이지 않으며 나란히 병행해 놓을 수 없고, 어느 한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60 페이지)


윌리엄 제임스는 베르그손을 수수하고 겸손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 천재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평했다(아,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실용성, 유용성 등을 오류와 동의어로 여겼다.(70 페이지) 스피노자의 철학이 범신론이냐 아니냐란 논쟁을 낳고 있듯 베르그손 역시 범신론적 신비주의냐 아니냐란 논쟁을 낳고 있다. 이 우주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는 없다. 이 우주는 과정과 사건의 집합이다.(78 페이지)


이 밖에 베르그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장켈레비치, 테야르 드 샤르뎅(1881 - 1955)을 들 수 있다. 베르그손은 바슐라르와는 대립적이었다.(베르그손: 1859 - 1941. 바슐라르: 1884 - 1962) 테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은 베르그손과 같이 자연발생적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적 진화론이고 비약을 통한 전혀 새로운 종으로의 진화론이다.(83 페이지)


2차 대전 이후 일반인에게는 완전히 잊힌 철학자 베르그손을 부활시킨 사람은 질 들뢰즈이다. 들뢰즈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베르그손의 철학은 ‘창조적 진화’에서 제기된 헤겔 변증법에 대한 부정이다.(88 페이지) 베르그손의 영향을 받은 중요한 철학자로 모리스 메를로 퐁티를 빼놓을 수 없다. 베르그손은 생성과 흐름, 창조로서의 삶과 생명을 중시한 철학자, 개념의 굳은 틀에 의거해 철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경계한 철학자, 결정론적 사고, 기계론, 목적론, 체계의 철학에 강력 반대한 철학자이다.(89 페이지)


저자는 베르그손의 사상은 결코 체계와 도식을 세워 전 우주를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90 페이지) 그러나 참고할 말이 있다. “...그러나 그 황홀감(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 그렇듯 우주의 모든 것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한 지적 황홀감)이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사이의 간격, 차이, 갈등을 장려한 개념적 체계 속에 녹여버림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현대 철학은 그 황홀감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했다.”(이정우 교수 지음 ‘담론의 공간’ 274, 275 페이지)


베르그손은 전통 형이상학의 중심 문제였던 존재의 문제를 생성의 문제로 바꾸었다. 존재가 아닌 생성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직관을 통해 파악하려 한 것이다.(9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단일성, 분할 불가능성, 불변성을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존재의 복수성과 생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절충으로 제시된 것이 플라톤의 사상이다. 플라톤은 영원, 불멸, 불변, 완전의 이데아와 불완전하고 변하는 현상계라는 이분법을 제시했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변하는 이데아가 현실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내재한다고 보았다.(97 페이지) 운동성에 주목한 베르그손은 연역 - 귀납, 분석 - 종합의 방법은 고정된 관념으로 생성을 파악하려는 시도라 정의했다. 베르그손은 스승격인 헤라클레이토스가 생성과 변화를 파악한 것은 훌륭하지만 이는 고정된 관점으로 생성과 변화를 파악한 것일 뿐 운동성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직관은 운동성을 운동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베르그손은 과학은 완전히 일어난 일에 대해 파악하는 방법이므로 일어나고 있고 움직이고 있는 사물의 생명인 생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철학은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생성으로서의 지속을 탐구해야 하는데 지속은 직관에 의해서만 직접 우리에게 제시될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이미지에 의해서 시사될 수 있을 뿐 개념적 표상에 가둬 둘 수 없다.(105 페이지)


다양성을 중시하는 과학과 철학은 수많은 시간 안에 낱낱이 흩어져 사실만을 볼 뿐이고 통일성을 중시하는 과학과 철학은 추상적 영원을 볼 뿐 구체적 실재를 파악하지 못한다.(106 페이지) 베르그손은 철학함이란 일상적 사고 작업의 습관적 방향을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정의했다. 베르그손은 지속이란 개념으로 자유의지와 인과율의 확실한 결합을 시도한 철학자이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참된 실재는 생성이며 다양성의 통일성이며 동시에 끊임없는 움직임이고 고정불변한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지속이다. 지속은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지속은 끊임없는 움직임이며 흐름이다.) 어떤 도시를 수집 가능한 항공사진들을 조각조작 맞추어 파악하려는 것이 개념적 이해라면 그 도시로 직접 들어가 주요 유적이나 사물들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직접경험인데 이는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베르그손의 생각이다.


또한 어떤 구절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공감하는 것이 직관이라는 것도 베르그손의 생각이다.(직관은 참된 실재를 직접 파악하는 능력이다.) 베르그손은 물리학은 운동성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베르그손은 지성이 표현하는 운동은 부동적인 것을 병렬시켜 그 운동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118 페이지) 생명체는 분리될 수 없고 재구성될 수 없고 부분으로 파악될 수 없다.


베르그손은 유기체로서의 생명체에 대한 파악은 결코 분할과 재구성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지성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베르그손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삶은 예견 불가능한 창조적 성격을 지니기에 지성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발전된 본능으로서의 직관이 무의식에 가깝다면 지성은 의식에 가깝다. 베르그손은 생명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인 능력은 본능이며 부동적인 것과 이미 주어진 것을 다루는 데 자신감을 갖는 지성은 물질 쪽으로 향해가지만 본능은 생명 쪽으로 향한다고 보았다.(베르그손의 직관은 본능의 소산이며 능력으로서 구체적이고 독창적으로 참된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성에 의한 본질직관을 거부하고 감성직관을 인정한 칸트와도 경해를 크게 달리한다. 베르그손의 직관은 가장 단순한 공감행위이다.(127 페이지) 베르그손은 공감행위로서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생성, 변화,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참으로 실재하는 세계 즉 지속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지속을 우리의 의식 즉 자아라 보았다.(127, 128 페이지)


베르그손은 우리가 강도(强度)를 크기와 동등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포적이며 분할 확장될 수 없는 순수하게 내적인 상태를 외연적이고 확장 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데 알맞는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질적인 변화를 양적인 변화로 간주한다고 보았다.(129 페이지)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은 간단히 정의할 수 없다. 베르그손의 철학 자체가 지속의 철학이다. 베르그손은 시간 그 자체는 살아 있는 것이며 공간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단위로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분할 불가능한 움직임 자체로 보았다.(140 페이지)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물리적 시간을 상정하는 사람도 시간은 불가역적이라 말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시간은 부단한 흐름을 각 순간들로 나눌 뿐 아니라 동일한 행위가 두 번 이상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141 페이지) 고대 철학이 말하는 형상이나 이데아는 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에서 독립한 영원이다(141 페이지)


베르그손은 정신이 개념 속에 유리(遊離)시키고 저장하는 형상이란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을 밖에서 촬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근대과학자들은 부단한 흐름이며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시간을 수없이 분할된 공간상의 점들로 공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끊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동작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수많은 사진과 정지된 화면의 연결일 뿐인 영화를 생각해보자. 베르그손에 의하면 진화는 지속이며 창조이다.(143, 144 페이지)


베르그손은 우리의 자아를 각 부분이 내적으로 상호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지어진 전체로 본다.(145 페이지) 끊임없는 지속으로서 우리의 의식이 받아들이는 경험은 결코 서로 비교해서 동질적인 요소만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의 이론을 따라 우리는 같은 음악이라도 어제 감상한 것과 오늘 감상한 것이 같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가 바로 순수지속이며 우리의 삶은 과거가 미래를 잠식하고 불어나면서 전진해가는 연속성으로서의 지속이다. 과거는 지속으로서 우리의 삶 그 자체이며 기억에 의하여 부단히 현실화하고, 현재는 부단히 과거가 되는 지속이며 변화이다.(151 페이지) 현재는 부단히 과거가 되고 과거는 기억 때문에 현재화한다. 미래는 예견불가능하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예견불가능성은 미래의 개방성이며 부단한 창조이고 자유로운 행위이다.(154 페이지) 이는 결정론자들과 숙명론자들이 말하는 닫혀 있고 이미 결정된 미래와 반대된다. 그리고 이미 정해진 목적과 목표를 향해 계획된 그대로 진행되어 간다는 목적론적인 사고방식과도 반대된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보며 이미 주어진 결과가 미래에 실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베르그손에 의하면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57 페이지) 생명의 약동(elan vital)은 기계론과 목적론 외의 제3의 길을 찾으려 시도한 결과물이다. 공간과 비유기체적인 물질은 분석적인 오성의 영역에 알맞은 것이며 순수 지속으로서 생명은 직관이라는 철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159 페이지)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물질과 생명 모두 지속에 참여하고 있다.


물리 질서는 자동적인 질서이며 생명 질서는 자발적인 자유의 질서이고 목적성을 초월한다.(166 페이지) 베르그손은 생명 그 자체보다 무생물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지성의 결점을 본능의 소산인 직관이 보충할 수 있다고 보았다.(173 페이지) 베르그손의 철학은 지성에만 치우쳐 있는 철학을 거부하되 직관과 지성의 균형을 잡으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베르그손은 단일성과 다수성의 구분은 무생물질의 범주에 속하며 생명의 약동은 순수한 단일도 다수도 아니라고 보았다.(175 페이지)


베르그손에게 창조란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우주적 차원에서의 창조도 인간 의식에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같다. 우주적 차원에서의 창조는 생명 자체의 힘이며 생명 자체의 요구이고 생명의 약동이다.(179 페이지) 베르그손에 의하면 이 우주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것 즉 새로운 참가(參加)에 의해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새로운 발명이나 창조가 없다면 시간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180 페이지) 베르그손이 말하는 창조란 우주적인 차원에서나 인간 차원에서나 끊임 없이 완성되어 가는 생명의 자유로운 행위를 의미한다.(181 페이지) 베르그손에게서 창조와 진화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생명을 절대적으로 분리해보는 진화생물학의 바탕 위에 서 있으면서도 차이점을 강조한다.(184 페이지)


베르그손에 의하면 우리에게 창조와 의식, 창조와 자유는 동의어이다.(188 페이지) 저자는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 그 자체인 신도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192 페이지) 사랑을 베풀기 위한 창조란 의미이다. 베르그손은 뇌를 기억의 저장 공간이 아니라 기억이 현재화하는 지점으로 보았다.(199 페이지) 베르그손의 메시지는 사랑 자체인 신과 열린 종교, 열린 도덕성, 자기 한계 극복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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