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지 않지만 내 서울 나들이의 역사도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90년대 중반 저가이면서 양질의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Naxos 레이블의 클래식 음반을 사기 위해 한동안 압구정의 신나라 레코드를 드나들었다. 당시는 프로그레시브 록도 함께 좋아하던 때여서 홍대 앞의 Mythos에도 자주 갔었다. 그 이후 2001년 논현동의 기수련 센터와 2002년 양재동의 초기 불교 명상 센터를 드나들던 시기를 거쳤다. 창덕궁 인근에 화실을 가지고 있던 도반(道伴) 덕에 궁궐문화와 불교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서점 순례이다. 어느 해에는 200번도 더 넘게 서울의 서점들을 드나들기도 했다. 2002년 폐업한 종로서적이 한창 영업중이던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내 서점 순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어느덧 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올해 들어서는 문화, 역사, 글쓰기, 편집 등의 강의를 듣기 위해 종로(정독도서관, 궁궐문화원), 마포, 구로, 양재 등을 자주(또는 가끔) 방문했으니 특별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하다.

 


역사와 문화, 미술 등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궁궐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자주 찾은 것도 올해 자랑할 만한 개인사이다. 어제는 고궁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어둑해진 안국동 거리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정독 도서관에서 강의를 듣고 집에 오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서울에 가면 걸으면서 책을 읽게 된다. 그 자유가 참 좋다. 이제 서울을 찾게 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것이 골목길 순방이다.

 

 

한양 도성이나 정동길 순례도 있고 경리단길, 가로수길 등도 좋지만 무엇보다 골목길이 마음을 끄는 것은 왜일까?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궁궐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찾아야 할 것이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음악회에 많이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부암아트홀 같은 소극장을 자주 찾고 싶다. “정오가 되면 성공회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처럼 김용범 시인의 서정적인 시를 음미하며 조용히 걸어야 할 곳들이 이렇게나 많아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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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은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가 묻힌 선릉(宣陵), 중종이 묻힌 정릉(靖陵)을 합한 말이다.(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곳이다.) 10월 27일 테마 해설 수업을 듣기 위해 찾게 될 선정릉. 성종(成宗)이란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는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으로 꼽힌다. 법전(法典)인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485년 최종 완성, 반포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되는 듯 하다.


성종의 첫 번째 왕후는 압구정(鴨鷗亭)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이다. 성종은 낮에는 성군(聖君)의 대명사인 (중국 신화 속 군주인) 요순처럼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밤에는 폭군의 대명사인 중국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처럼 쾌락을 탐해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고 한다. 이상곤 한의사는 '왕의 한의학'에서 성종이 묻힌 선릉 주변 거리인 강남을 주목한다. 즉 낮에는 한국 경제 발전의 심장부이지만 밤에는 환락의 거리가 되는 강남에 주요순 야걸주의 임금인 성종이 묻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하지만 함께 묻힌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를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성종과 차이점이 뚜렷한 중종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중종은 우유부단과 잔인함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주요순 야걸주처럼 이중적인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그것을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특기할 것은 그가 죽인 선비들의 수가 형인 연산군이 죽인 선비들의 수보다 많다는 것이다. 중종의 어의(御醫)는 그 유명한 여의 장금(대장금)이었다. 중종이 사사(賜死)한 대표 인물로 조광조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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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이 17권으로 완역, 출간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좋아하는데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안 되겠기에 이번 출간을 계기로 확실한 계보를 그리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다산의 스승은 성호 이익이다. 물론 다산 선생은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했다. 성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다산 선생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고 흔연히 학문을 하리라 마음먹은 뒤 학문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것을 성호라는 큰 호수를 다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둘러싼 것으로 표현했다.(‘다산 정약용 평전’ 96 페이지) a) 궁금한 것은 다산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닌 무명의 선비가 유명한 분을 사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이 그들을 스승 - 제자 사이로 인정할까, 이다.


‘주역’에 교육에 관한 괘(卦)가 두 개 있다. 산천대축(山川大畜)과 산수몽(山水蒙)이다.(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주역의 괘와 명칭의 관계도 자의적이고 그 의미도 자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다만 그들이 두 가지 괘를 설정했다는 말 정도를 하려는 것이다.) 산천대축은 사숙에 해당, 산수몽은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에 해당. 나는 불교의 성문, 연각, 보살 중에서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을 좋아하기에 사숙, 산천대축을 세트로 좋아한다.(사숙: 산천대축: 연각: 독각/ 직접 배움: 산수몽: 성문(聲聞): 우파니샤드?) 성호, 다산 모두 실학자이다. 약 20년 전 한형조 교수가 ‘주희(朱熹)에서 정약용으로’를 낼 때 이제부터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는 말을 했다.


학위 논문을 쓸 때 다산의 주자학 비판을 발전사적 관점과 진보적 시각으로 보았는데 논문을 마칠 때쯤 되자 다산의 주자학 비판이 전적으로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직 관련 출간 소식은 없어 많이 기다려진다. 알기로 주희는 희(熹: 밝을 희)의 기운을 중화시키기 위해 그믐 회(晦)를 써서 호(號)를 회암(晦庵)으로 했다. 때마침(?) 지난 달 23, 24일 실학 담론 학술대회가 열렸다. 실학(實學)이(라고 하지만) 실천 없는 말잔치였다는 의견과 유학(儒學)의 역동적 흐름이라는 의견이 맞섰다. b) 이런 경우는 보는 입장에서 참 난감하다. 실학이 20세기 후반, 근대에 대한 절실한 욕망이 만들어낸 유령이라는 입장이 학계의 공식 입장이라고..(재작년부터 유령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백상현 교수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부터..)


c) 유령이란 존재들의 있음의 질서 속에서는 출현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그와 같은 존재 질서의 일관된 흐름이 멈추는 지점에서 출현하게 되는 무언가이다. 세계에 출현하는 모든 것들을 환영(幻影)으로 간주한 라캉은 세계 - 현실이 가진 환영적 정체를 삶의 가짜 리얼리티,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들의 정상성의 효과들을 스크린이라 표현. 스크린은 인간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영화 스크린 같은 것으로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13, 14 페이지)


사실 실학 논쟁에서 나온 유령과 ‘라캉의 미술관‘에서 언급된 유령은 다르다. 전자는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세계의 거짓을 가리는 스크린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출현하는 무엇이다. 라캉은 진리를 갈구하는 주체의 응시를 진정으로 충족시키기보다 이미지의 속임수 속에서 응시를 달래는 한 줌의 유사 진리를 던져주는 그림의 속성을 언급하며 그런 화가들을 소작농 협회에 종속된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라캉이 보기에 화가들은 우리가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진리 자체를 은폐하는 마술사, 미혹하는 자들이었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86 페이지)


유령 즉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는 그림이 아닌 그것을 폭로하는 그림 이미지를 남긴 화가들의 사례를 찾아야겠다. 백상현 교수는 (진정한) 예술가들이란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들이라 말한다. 현실의 질서를 구성하는 규범적 아름다움의 영상을 비틀어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고자 투쟁하는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저자가 예시하는 화가들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피카소,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 등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화가가 전쟁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이다. 이 그림들은 현실을 폭로하는 그림들이지만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기존의 상식을 뒤트는 그림이 된 것이다. 사각의 큐빅 모양으로 입체감을 표시했고,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하나의 평면에 합쳐 그림을 완성했다. 앞으로 누가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으로 기록될지? 화가만이 아니라 철학자, 작가, 시인 등도 그 대열에 포함될 것이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사람들은 단연 철학자들이다. 새 철학자들을 찾는 데 힘을 기울여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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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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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에리히 프롬에 빠진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계기로. 무기력의 반대는 자유. 프롬은 자유란 사실이기보다 가능성이라 말한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이라고 말한다.(60 페이지) 프로이트,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듯 인간은 타자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이를 프롬식으로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는 말이 된다. 4년 전 ‘피로사회’란 책이 나왔었다. 이 책은 자기를 착취하는 피로사회에 대한 책이다.


프롬은 오늘날을 모두가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정의한다. 이는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하는 사회상을 지적한 말이다. 프롬은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프롬은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프롬은 오늘날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는 평등은 사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평등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위인이며 결코 타인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평등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201 페이지)


프롬은 우리가 소속감, 팀워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실상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이라 말한다. 프롬은 인간 본질이라는 말이 이용(착취 정당화, 침략 정당화 등)당한 과거를 언급하며 그럼에도 인간의 본질이란 말을 포기할 수는 없고 본질적 속성이라고 말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모든 속성과 그 이상을 포괄할 수 있으며 어쩌면 다양한 속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보(進步)를 우리 의식의 꾸준한 성장으로 이해하는 프롬은 인간을 상수(常數)와 변수(變數)로 설명한다.


프롬은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고, 지능을 넘어 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고 설명한다. 프롬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스토아학파, 스피노자 등을 결정론자라 볼 수 있지만 그들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고 인간이 인간 현존의 지연적, 역사적 조건 안에서 최대의 자유에 도달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59 페이지)


종합하면 자유는 사실이기보다 가능성이며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이며 장애 및 조건과 투쟁하여 얻어내는 것이다. 프롬은 자유는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유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 말한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하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프롬은 사회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자신만 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만든 거울에 빠져 죽는다는 말(65 페이지)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이다. 광기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상태라는 말(19 페이지)도 그렇다.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만,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만 자유로워진다는 말(62 페이지)을 한 프롬은 같은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인간은 희망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을 더한다,(65 페이지) 정신적 인간이란 존재도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으면 비정신적 인간이라 말하는 프롬은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내적 조화의 체험이라 설명한다.


인간은 본질상 초월의 욕망을 품은 존재라는 말(70 페이지)도 그렇다. 프롬은 활동을 감정의 영역, 지적인 영역, 감각적 영역, 의지의 영역 모두와 관계된 것으로 풀이한다. 이런 다양한 영역들을 통합했을 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프롬의 진의이다. 프롬은 자발적 활동이 자유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된다고 말한다.(자발성 즉 자유는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소극적 자유와 다른 것이다. 이런 소극적 자유만 있으면 고립되고 만다.)


프롬은 자발성의 두 요소로 사랑과 노동을 든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자아가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 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다. 또한 노동은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노동이다.(81, 82 페이지) 프롬은 자발성을 그 이전에 누구도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말한다,(87 페이지)


프롬은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 진리를 깨달을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기는 사회를 비판한다.(95 페이지) 프롬은 현대인의 특징으로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이라고 말한다.(98 페이지) 프롬은 현대인들은 감정, 사고에서 뿐 아니라 소망에 대해서도 독창성이 결핍되었다고 말한다, 프롬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100 페이지)


프롬은 나라는 존재가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묻는다.(103 페이지) 프롬은 현대인의 행동 동기인 자아는 사회적 자아로서 타인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연기를 하는, 그가 맡은 객관적 기능의 주관적 위장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자아라고 설명한다.(109 페이지) 어빙 고프먼의 '자아연출의 사회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프롬은 최면술사에 의해 주입(암시)된 생각을 자신의 고유의 것이라 착각하는 피실험자의 실험을 소개하며 이는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 설명한다.


특정한 조건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주입된 것이라는 의미이다.(120 페이지) 프롬은 미적 판단에서도 그런 점(비자발성)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김영민 교수의 ‘진리 일리 무리’에 수록된 제 6장 ‘가벼움에 대해서: 앎. 느낌. 기법. 해석‘을 참고하면 좋다. 상술할 수는 없고 내용 중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는 말 정도를 하고 싶다. “나의 것 중의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밀(私密)한 느낌마저 나를 벗어나 표준화된 길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오늘의 감성 현실이다.”(229 페이지)


프롬은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127 페이지) 프롬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심을 했다고 믿지만 고립을 염려해 남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현대인들의 특징을 언급한다. 프롬은 인간이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지 이해한다면 스스로 결심을 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관습을 지키거나 의무감이나 아주 단순히 압박감에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라 말한다.(135 페이지)


프롬은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고 말한다.(142 페이지) 현대인이 깊은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익명의 권위에 의지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아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럴수록 더 무력감을 느끼고 순응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143 페이지) 프롬이 파악하는 현대인은 본질적으로 무력감을 인식하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프롬에 의하면 극단적 무력감은 대부분 신경증적 인성에서 발견된다. 물론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무력감은 발견된다. 무력감은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매우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인성 구조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에 매달린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자신은 그 결과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무력감을 의식하는 사람도 정신분석을 통해 그렇게 의식하는 부분이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무력감에 동반하는 깊은 두려움 탓에 아주 약화된 형태로만 무력감을 의식하는 것이다. 단순하지 않은 것은 과보상(過報償) 행동과 은폐 목적의 합리화로 대체되는 무력감의 경우이다. 깊은 무력감을 억압한 사람들은 특별히 활동적이고 분주하다. 이를 가짜 활력이라 하지만 진짜 활력과 가짜 활력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가짜 활력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까지 확장된다. 무력감은 통제, 권력에 대한 소망 등으로 나타난다. 통제, 권력에 대한 소망이 무력감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프롬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약화된 형태로라도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신분석 의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170, 171 페이지) 이 경우 환자가 자신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다고 믿듯 그런 의사 역시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런 의사의 직업적이며 의식적인 낙관 속에는 깊은 불신이 숨어 있다.


프롬은 정신분석 이론이 단순화된 탓에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정신분석이 세 살 때 엄마에게 맞았거나 다섯 살 때 오빠에게 놀림을 당했기 때문에 무력해졌다고 믿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158 페이지) 아이가 근본적으로 어른이 자신을 유념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성장(175 페이지)한다면 아이는 무력감에 빠져 상당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사례(세 살 때 엄마에게 맞았거나 다섯 살 때 오빠에게 놀림을 당한 것)가 일회성의 특별한 경우(물론 이런 사례도 몇 차례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인 데 비해 근본적으로 어른이 아이를 유념하지 않으며 아이의 뜻에 반하는 모든 것을 하는 상황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일 것이다. 정신분석(심리치유 포함)이 있기에 가능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정(양육)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은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개인적인 상황이 원인일 수 있겠지만 그 뿌리는 사회 전체와 그 사회가 결정하는 정신적 상태라고 말한다.(176 페이지) 프롬(뿐만이 아니지만)은 현대 사회를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평가하는 사회로 파악한다. 사회적 위치상 무력한 사람은 무기력을 보상하는 심리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강하고 우월하다는 느낌을 가지려 한다.(178 페이지)


이런 사회에서 어른은 진정으로 바라고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성공도 실패도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다.(178 페이지) 맥락이 다르지만 이런 상황을 두고 이해인 시인의 ’사랑‘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문 닫아도 소용 없네/ 그의 포로 된 후/ 편히 쉴 날 하루도 없네..” 아마도 수녀(修女) 시인인 이해인 님은 신(神)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를 삶이라 바꾸어보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편히 쉴 날(문제 없는 시기)이 하루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유용하지만 슬픈 현실을 드러내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는 프롬의 다른 책들(‘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이 그렇듯 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 책이다. 프롬이 무기력을 길게(짧은 200여 페이지의 책이지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정신분석이란 이론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프롬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마르크스, 스피노자, 베르그손, 칸트, 밀 등과 함께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라(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라) 본 사람이다.(60 페이지)


하지만 프로이트는 오랜 동반에도 불구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다. 프롬 역시 정신분석 전문가이지만 그는 정신분석의도 무기력하고, 직업적이며 (환자를 고칠 수 있다는) 의식적인 낙관 속에 깊은 불신을 숨길 수 있다는 점 등을 폭로(?)했고, 정신분석이란 것이 유치한 외상적 기억이나 어떤 다른 원시적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여는 것이고, 내 안의 온갖 비이성적인 면을 향해 끊임없이 나를 열어 마침내 나의 환자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정신분석과 듣기 예술’ 133 페이지)을 했다.


참 따뜻하고 호감이 가는 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바슐라르나 세 명의 기쁨의 철학자들 중 니체를 제외한 베르그손이나 스피노자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물론 나는 그의 주옥 같은 책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착(穿鑿)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분야가 다르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약한 것은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믿게 될수록 무기력은 더욱 심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179 페이지) 프롬은 선(禪)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사실 내가 읽은 그의 첫 책이 ‘선(禪)과 정신분석’이다. 지금은 대의(大義)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당시는 내가 그가 윤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관심을 둘 만한 문제의식이 없었다. 프롬은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특수한 정치경제학이 필요하고, 개인의 인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면 정신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79, 180 페이지)


카렌 호나이의 ‘내가 나를 치유한다’, ‘자기분석’, ‘우리 시대는 신경증일까?’ 등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 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을 믿지만 그것은 이미 미친 사람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혼동이라 말한다.(185 페이지) 프롬은 약간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말을 한다. 누군가 장미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 장미를 본 것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대상을 보면서 자신들이 본 것이 장미라는 개념에 해당하며 그런 이유에서 장미를 본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순수한 개념적 인식으로서의 나무는 개성을 갖지 않으며 그저 나무 종(種)의 한 가지 사례, 추상(抽象)의 대변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완벽한 인식의 경우에는 추상이 없다. 이 경우 나무는 완벽한 구체성과 더불어 유일성을 간직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프롬에 의하면 그런데 우리는 구체적 사람에게서 추상을 본다. 그 이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189 페이지)


프롬에 의하면 우리는 투영(投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이미지를 왜곡한다. 이는 프롬의 말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3독(탐진치)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가 강요하는 대로, 우리의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190 페이지)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보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의미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프롬은 감탄의 능력을 강조한다.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또한 집중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아경험의 능력을 강조한다. 프롬은 갈등을 감탄의 원천으로 본다.(199 페이지) 개인적이고 우연한 갈등도 있지만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내린 갈등도 존재한다. 이는 동물적 왕국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 이 왕국과 본성을 초월하는 사실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다. 프롬은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201 페이지)


이 말은 참된 인식은 자기 부정의 연속이라는 말(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09 페이지)을 연상하게 한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202 페이지)... 이렇듯 감동적인 책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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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을 뽑는 신명호 님의 ‘조선왕조 스캔들’ 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88명이 몰렸습니다. 그 5명 중 하나에 제가 선정되었습니다.(왜 이 책이 읽고 싶은지를 설명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기쁘기보다 문화유산 해설과 관련해 관심을 두게 된 조선이란 나라가 제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조선은 묵직한 책들 가령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김용현)이나 ‘한국의 유교화 과정’(마르티나 도이힐러) 같은 책들을 통해 알고 싶지만 스캔들(을 통해 교훈을 얻는 것)도 필요할 듯 합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같은 외국(스위스) 분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 연구는 자극이 됩니다. 일본인인 노마 히데키가 쓴 ‘한글의 탄생’이 그렇듯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제 관심은 “각각 따로”인 “치병과 환후”(허수경 시인의 시 ‘혼자 가는 먼 집’에서) 같기만 합니다. 아니면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이야기한 “지금은 남의 땅”을 조금 뒤틀어 말하자면 ‘아직은 남의 이야기’인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유난히 슬프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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