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광화문 촛불 집회(100만 촛불 항쟁)에 실업, 여혐, 차별 등으로 분노한 청년과 여성들이 ‘저항’의 중심에 섰다는 글(경향신문)이 눈에 띈다. 꽤 오래 페미니즘의 흐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입장이지만 참 많이 반가운 현실이다. 책세상 문고로 나온 페미니즘 이론서 가운데 이현재 님의 ‘여성의 정체성 -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김미경 님의 ‘여성주의적 유토피아, 그 대안적 미래’ 등을 읽은 것이 10년 쯤 전이니 이제 다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여성 혐오 셀프 테스트를 받았다. 11개의 항목들 중 나는 10개에 걸쳐 ‘좋아요’란 평가를 받았다. ‘좋아요’ 평가를 받지 못한 단 하나의 항목은 남편도 아내의 집안일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란 물음이다. ‘그렇다‘를 선택했지만 답은 집안일은 한 집안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니 당연히 남자도 함께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혹시 그럴 필요가 없어 아니오를 선택한 것은 아니겠지요?’란 물음이다.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는 더 중요한 사회문제를 먼저 해결한 뒤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아니오’를 택했다. 앞에서 언급한 이현재 님의 책은 주요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사상을 일별(一瞥)한 책이어서 내게 큰 도움이 된 책이다. 최근 이 분이 쓴 ‘여성 혐오, 그 이후’란 책이 나왔다. 150여 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여성 혐오, 비체(卑體) 등의 개념들이 다루어진 의미 있는 책이어서 바로 구입했다.(150 페이지는 책세상 문고보다 얇은 분량이다.) 현대적 흐름을 알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의 관계가 정리된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임옥희, 신주진 외 지음)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은 페미니즘에 살모충동을 느끼고, 페미니즘은 정신분석학에 살부충동을 느끼면서도 두 이론이 서로 협상하고 공모하면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란 책 소개 글에 눈이 번쩍 뜨인다.(이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스테판 츠바이크의 ‘프로이트를 위하여’와 함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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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주(宇宙)라고 할 때 우(宇)는 나무 뼈대를 덮은 풀엮음, 주(宙)는 나무 뼈대였다. 구석기 시대에도 움막 안에 누워 천장을 보면 나무 뼈대인 주(宙)가 보이고 그 위를 덮은 우(宇)가 보였을 것이고, 집 밖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면 둥그런 천구(天球)가 보였기에 그 둥그런 천구를 하늘의 집이라 생각할 수는 없을까, 란 생각에서 우주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서윤영 지음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참고)

 

뼈대 즉 주(宙)가 먼저이고 그 위의 풀엮음 즉 우(宇)가 나중이니 주우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만 우리는 우주라고 한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이 생각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신영복 님은 우리가 실제 집을 지을 때는 기초를 파는 등 아랫 부분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해 위쪽으로 나아가지만 집의 모습을 화면에 담을 때는 지붕부터 그리기 시작한다는 말을 했다. 집 하나에도 이런 의미가 깃들어 있다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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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복궁의 서수(瑞獸), 문양(汶樣), 단청(丹靑) 등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단청은 조금) 내 관심은 환유적인지 나는 설명되는 것과 다른 것을 마음 속으로 자꾸 비교하곤 하고 몇몇 건에 대해서는 질문으로 답을 구하기도 한다.

가령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등의 이름이 시경이나 서경 등에서 유래했는데 교태전만 주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태전 말고 주역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다른 건물이 있습니까?˝ 식으로.

그리고 경복궁의 낙하담(落霞潭)이 설명되는 시간에는 ˝저 하(霞)란 글자는 자하문(紫霞門)의 하란 글자와 같은 것이지요?˝처럼. 궁궐 답사(?) 또는 탐사(?) 또는 관람(?) 경험이 일천해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왜 궁궐 어플리케이션에서 경희궁은 포함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설명되는 것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는 것은 덜 알려지고 방문객이 적은 곳에 대한 내 나름의 대안이라면 지나칠까? 지금은 경복궁을 위주로 배우고 있고 개인적으로 덕수궁과 창덕궁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 외의 궁궐들도 두루 공부하고 싶다. 그렇게 공부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조재모 교수의 ‘궁궐, 조선을 말하다‘이다.

내가 하나의 궁궐 안에서 정전, 편전, 침전의 차이 또는 하나의 궁궐과 다른 궁궐의 차이에 초점을 둔다면 조재모 교수는 궁궐을 만든 사람들과 사용한 사람들의 관점을 나누어 궁궐을 볼 것을 요구한다.

나는 조재모 교수의 ‘궁궐, 조선을 말하다‘를 추천하고 싶다. 이유를 말하라면 편하고 솔직한 서술 때문이라 답하겠다. 물론 이 분은 전문적인 지식도 갖추었다. 단청 자료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 서재를 찾아 보니 ‘궁궐, 조선을 말하다‘가 눈에 띄어 펼쳐 보았다.(재독해야 할 것이다.)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가 파랑새를 찾아 다니다가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 파랑새를 발견한 것처럼 나는 조재모 교수의 책이 파랑새란 생각을 한다. 경복궁 단청에 대한 내용은 두 군데 정도에서 볼 수 있지만 서술 방식에 주목할 책이 ‘궁궐, 조선을 말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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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나온 헤겔 전공자 전대호 님의 `철학은 뿔이다`를 최근에야 읽었다. 망설임 끝에..김상봉, 이진경, 김상환 등의 철학을 헤겔적 시각으로 읽고 비판한 책. 전공자답게 저자는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고전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오류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와 관련이 있다고 풀었다.

오늘 아침 도정 스님의 화엄경 관련 글을 읽었다. 화엄경의 대의는 깨끗한 업(현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인데 중생들이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자꾸 설법을 요청한 결과 방대(스님의 표현은 광대)한 경전이 되었다는 것이 스님의 결론이다.(화엄경과 헤겔 철학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헤겔철학도 어마어마하게 방대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철학사상 역시 기존 철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점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하고 전문화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스님의 말씀을 나는 오류를 철저히 청산하고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불교적 의미에서 업을 깨끗이 하는 것은 통한다고 읽었다.(여시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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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우연히 우울한 소식을 두 가지나 접했다. 하나는 시에 관한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에 관한 소식이다. 시와 역사라는 말을 듣고 어쩌면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든 시에 관한 소식은 유형진 시인이 쓴 '현대시학 10월호를 보며 드는 심정'이란 글을 통해 접한 것이고, 역사에 관한 소식은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 과잉의 시대, 어느 젊은 역사학자의 죽음'이란 글을 통해 접한 것이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시와 역사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과거의 일만이 아닌 있을 수 있는 일까지 그려내는 시의 미덕을 보고 한 말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에 비해 유연한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가 그렇게 있을 수 있는 일까지 그려낸다면 역사는 해야 할 바를 일깨우기에 나는 역사는 시보다 사회적이란 말을 하고 싶다.


서론이 길었으니 각설(却說)하고 말하자면 시인의 수와 내 삶이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착잡한 마음마저 든다는 말을 우선 하고 싶다. 나는 시인들의 가난과 그들의 수적 포화가 연관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난감한 마음이 든다. 두 이야기라 했으나 시의 필자는 엄연히 당당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 역사 이야기의 당사자는 글의 제목을 보고 알 수 있듯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시 이야기의 필자인 유형진 시인은 출간 5년만에 첫 시집인 '피터 래빗 저격사건'(2005년 5월 출간)을 재쇄(再刷)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재쇄한 책이 거의 재고로 남아 처치곤란한 애물단지가 되어 그 시집을 절판시키고 복간을 하고 싶어 다른 출판사에 문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확인한 사실은 재고를 모두 떠안고 출판권을 정지시켜야 절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아는 시인은 기껏 50여명이고, 가지고 있는 시집은 300여권이란 말을 하며 그 많은 7만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시집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요?란 질문을 던졌다. 시인은 최근 문제가 된 남성 시인들의 성추행(또는 폭력)에 관해 심경을 밝힌 글이기도 한 '현대시학 10월호를 보며 드는 생각'이란 글에서 성추행 당사자 중 한 명이 낸 힛트 시집과 자신의 시집이 같은 출판사를 통해 같은 날 나왔으나 분명하게 엇갈린 길(명성, 판매 등에서)을 걷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신춘문예 투고자들은 그 남자 시인의 문체나 시어를 따르고 추종했고 문단의 원로들은 그를 극찬했다는 부분이다. 시인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글은 이미 한 번 썼기에 생략하고 말하면 우리의 쏠림을 돌아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는 유형진 시인의 다음의 말과도 관계있다. "저는 제 시가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린 시들보다 못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벤치에서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대기 선수 취급 받은 것은) 오랫동안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승자독식을 만들어주는 쏠림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그렇기에 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반면 역사학도의 죽음에 대한 글은 더 딱한 사정을 전한다. 41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뜬 고구려사(高句麗史) 박사인 그는 연구가 아닌 과중한 행정업무에 시달리는 등 매일 야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는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계약직 연구자였다. 기자는 지금 우리 시대를 연구자들에게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시대로 정의했다.


왜 우리나라에 유리한 역사를 쓰지 않느냐는 말은 한 국회의원이 실제 한 말이다. 나는 시에 관한 글에 대해서는 나 역시 명성에 휩쓸리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역사과잉이 역사학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글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덧붙일 것은 우리가 너무 역사를 재미에 치우쳐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을 품는다는 점이다. 내게는 두 개의 날개 같은 시와 역사! 문외한이기에 누구보다 바람직한 습관을 들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설사를 꿈꾸는 사람인 나에게 시인과 계약직 연구자가 겪은 일 모두 남의 일 같지 않다. 고난(苦難) 과잉(過剩)의 시대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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