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과 도마복음예수
청가인 지음 / 도꼬마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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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관심을 두던 때 외경(外經)의 존재를 알고 기독교가 거대한 신비 또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외경이란 저자 불명, 권위 의심 등의 이유로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전을 말한다. 도마복음은 대표적 외경이다.(도마복음은 아타나시우스 신조 즉 지금의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해 쓰인 문서이다.)


청가인의 ‘이상(李箱)과 도마복음 예수’는 이상의 문학작품이 도마복음에서 언급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도마복음에서 묘사된 예수는 정경의 예수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말할 것은 종교와 문학, 유대와 한국, 2000년의 격차 등을 감안했을 때 일치란 의외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상이 자아수행에 매진한 사람임을 주장한다.


개체유지본능과 종족유지본능을 포기하는 수행을 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소설 ’날개‘의 구절을 실제 이상이 박제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상은 이 세상을 구원적거(久遠謫居) 즉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유배지로 생각했다. 저자는 이상이 그 치열한 극단의 수행 사실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난해한 글을 썼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을 육신으로 태어나서 신이 되어 돌아간 인간으로 정의한다. 이상은 기독교를 몹시 혐오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상은 기독교가 도마복음 예수를 무단 도용, 조작해 자신들의 목적에 합당한 복음으로 둔갑시켰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제국의 이익과 기독교의 이익이 만나는 곳에서 야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제국이 기독교로부터 원한 것은 (통합을 위한) 사상이었고, 기독교가 제국으로부터 원한 것은 힘이었다.


이상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한 성경 부분은 창세,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 등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상은 폐인이 되어 주지육림을 헤매면서 대충 살다 간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육신의 세상이 온통 허위라는 진실은 도마복음과 이상이 함께 생각한 부분이라 말한다. 저자는 도마복음은 조작되지 않은 순수한 것이라는 생각을 표한다. 이상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육신의 생활에 붙들어매어 자아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했다.


저자는 이상을 위고(프랑스), 세익스피어(영국)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이며 도마복음 예수의 가치와 동등하거나 어쩌면 능가하는 작품을 쓴 존재로 본다. 예수는 먹고 마신 존재, 이상은 그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다가 간 존재라는 것도 이상이 도마복음 예수를 능가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도마복음의 핵심이 자아수행을 지금 당장 시작하라는 주장이고 자아를 체득한 후에는 이 세상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라 설명한다.


도마복음이 주장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방편인데 음식에 매여 사는 것은 동물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설이다.(저자는 도마복음 전체를 상세 해설한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국문학 박사들 중 이상의 작품으로 논문을 쓴 사람들이 가장 많은 현실을 상기시키며 자신들도 잘 모르는 내용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제공하며 철밥통을 지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201, 20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도마복음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상은 인생을 여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육신의 일들을 버리고 자아수행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다. 이상은 도마복음을 접하지도 않은 채 오감(烏瞰)을 통해 바이블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았다.(216 페이지) 도마복음과 지금의 성경이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이블에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넘치는 데 비해 도마복음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21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수익 사업이기 때문이다. 도마복음 50장에는 예수가 우리는 빛에서 왔고 우리가 바로 그 빛의 아이들이며 우리는 살아 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들이라고 가르치는 구절이 있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수가 사람들이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의 증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에게 그것은 운동과 머무름이라고 답하라고 말한 구절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읽고 가장 크게 놀랐다고 말한다.(222 페이지) 이상은 ’선에 관한 각서 1‘에서 운동에의 절망에 의한 탄생이라는 표현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운동과 머무름‘에 정확히 대응한다. 운동은 설명이 필요 없고, 절망(이상의 표현)은 머무름(예수의 표현)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에도 그 유명한 “복되도다 가난한 자여. 천국이 너희의 것임이라.”는 구절이 있다. 저자는 이를 자아수행으로 인하여 육신(마음이나 심령이 아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너희의 것이기에 복되도다란 의미로 풀고 있다.


자아수행을 거듭 강조하는 도마복음의 논리를 따르면 수행을 하면 육신은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가능하다. 자아수행을 강조한 장은 여럿이지만 특히 2장이 주목된다. “추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 찾고 나면 고난 받을 것이요. 고난 받으면 놀라워할 것이며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니라.”(109 페이지) 이상은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벗어나기 어려운 본능을 기독교가 설치한 덫 즉 일요일의 붉은 빛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을 기독교의 신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속임으로써(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아수행에 매진해야 할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231 페이지) 이를 보면 불교의 경우가 생각난다. 기복 불교가 결국 수행 시간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가 너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했음을 설명하며 이상이 남몰래 자아수행을 한 사실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고 마무리짓는다.(241 페이지)


예수는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상은 이단(異端)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 차이 말고는 양자의 차이는 없다. 예수는 모든 것을 아는 자라도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는 말을 했다.(도마복음 67장)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결국 니체의 말을 도마복음에 적용하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틈나는 대로 반복해 읽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난해하고 비밀스런 두 텍스트를 비교 분석한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덧붙여 다른 도마복음 해설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상은 육신을 벽으로 상정했다. 자아합일을 위한 수행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인간의 육신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지도의 암실’이란 작품에 나오는 바 ‘발간 몸뚱이를 가지고 다니는 무거운 노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대로 자신의 몸을 박제로 만들었다.(280 페이지)


참 의미심장한 구절이고 해설이다. 도마복음의 의도는 우리 몸이 육신의 부모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육신의 것들에 매몰되어 자아수행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289 페이지) 예수는 ”영혼에 의지하는 자는 육신은 비참하리라. 육신에 의지하는 영혼 또한 비참하리라.“란 말을 했다.(112 장: 본문 299 페이지)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지만 설득력을 지닌 책 또는 저자들이 꽤 있다. 김환희의 ’국화꽃의 비밀‘이 대표적이다. 문학평론가 반경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나는 ’이상과 도마복음 예수‘를 읽으며 김환희의 책을 읽을 때 맛본 종류의 짜릿함을 느꼈다. 두 책은 모두 주류의 해석에 반(反)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두 저자의 설득력은 충분한데 말하고 싶은 것은 주류의 완고함이다. ’이상과 도마 복음 예수‘는 힘 있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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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8-04-22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책 이상과 도마복음예수에 대한
훌륭한 서평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책을 힘있는 좋은 책으로 써주신
마지막 부분에 대해 특히 더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좋아요를 누른 분 중에
늘 보고싶은 동쪽숲 님도 보여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4-23 04:22   좋아요 0 | URL
네.. 감사드립니다...반갑습니다.. 다음 행보가 기대됩니다..
 
베르그송 읽기 세창사상가산책 9
한상우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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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베르그손, 성자 스피노자, 성령 니체...(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란 신성한 3위 일체 개념은 질 들뢰즈에서 연원(淵源)한 것이다. 내게 베르그손, 스피노자와 달리 니체는 (정서적으로) 버성기는 존재이다. 세창 미디어에서 나온 세창 사상가 산책 시리즈 중 성자, 성령은 아직 미출간이고 성부는 기출간이다.(책 제목은 베르그송 읽기) 아버지부터인가? 작은 판형에 200여 페이지의 미니 시리즈. 3부로 이루어진 책으로 베르그손의 삶(1부), 베르그손의 철학사상(2부), 베르그손의 생명주의 철학의 의미(3부) 등을 만날 수 있다.



저자(한상우 교수)는 누군가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자의 사상이지 대상이 되는 이의 사상이 아님을 강조한다.(22 페이지) 베르그손의 철학을 단 한 단어로 규정한다면 생명주의이다.(29 페이지) 베르그손은 다윈의 점진주의에 대립하는 돌연변이설을 받아들였다.(42 페이지) 베르그손의 생각대로라면 신은 창조 과정 안에 내재하며 창조과정과 더불어 자기 자신도 창조해간다.(47, 48 페이지)


베르그손의 철학을 과정(過程)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화이트헤드(1861 - 1947)가 ‘과정과 실재’에서 자신이 베르그손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것은 유명하다. 베르그손은 실증적 지식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철학도 물리학처럼 추상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과학적 추상 작용 없이 철학의 지식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75 페이지) 물론 화이트헤드는 철학의 대상이 자연과학의 대상과 꼭같은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철학은 거시적, 자연과학은 미시적)


베르그손의 ‘지속과 동시성’은 지속으로 우주를 이해한 베르그손이 동시성으로 우주를 이해한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에 대해 견해를 밝힘으로써 있게 된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적 대화의 결과물이다.(53 페이지. 베르그손: 1859 - 1941. 아인슈타인; 1879 - 1955) 물론 베르그손의 현대 물리학 숙지는 충분하지 않았다.(64 페이지) 베르그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시간과 지속, 의식과 자유의지 등에 대해 다룬 책이다.


스펜서의 철학사상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책이기도 한 이 저서는 한편으로는 칸트의 시간과 자유의지에 관한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 할 수 있다.(59, 60 페이지) 베르그손은 칸트가 시간을 등질적이며 일회적이고,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공간화된 시간으로 보았다고 비판했다. 베르그손은 시간이란 공간화할 수 없고 균질적이지 않으며 나란히 병행해 놓을 수 없고, 어느 한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60 페이지)


윌리엄 제임스는 베르그손을 수수하고 겸손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 천재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평했다(아,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실용성, 유용성 등을 오류와 동의어로 여겼다.(70 페이지) 스피노자의 철학이 범신론이냐 아니냐란 논쟁을 낳고 있듯 베르그손 역시 범신론적 신비주의냐 아니냐란 논쟁을 낳고 있다. 이 우주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는 없다. 이 우주는 과정과 사건의 집합이다.(78 페이지)


이 밖에 베르그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장켈레비치, 테야르 드 샤르뎅(1881 - 1955)을 들 수 있다. 베르그손은 바슐라르와는 대립적이었다.(베르그손: 1859 - 1941. 바슐라르: 1884 - 1962) 테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은 베르그손과 같이 자연발생적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적 진화론이고 비약을 통한 전혀 새로운 종으로의 진화론이다.(83 페이지)


2차 대전 이후 일반인에게는 완전히 잊힌 철학자 베르그손을 부활시킨 사람은 질 들뢰즈이다. 들뢰즈에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베르그손의 철학은 ‘창조적 진화’에서 제기된 헤겔 변증법에 대한 부정이다.(88 페이지) 베르그손의 영향을 받은 중요한 철학자로 모리스 메를로 퐁티를 빼놓을 수 없다. 베르그손은 생성과 흐름, 창조로서의 삶과 생명을 중시한 철학자, 개념의 굳은 틀에 의거해 철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경계한 철학자, 결정론적 사고, 기계론, 목적론, 체계의 철학에 강력 반대한 철학자이다.(89 페이지)


저자는 베르그손의 사상은 결코 체계와 도식을 세워 전 우주를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90 페이지) 그러나 참고할 말이 있다. “...그러나 그 황홀감(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때 그렇듯 우주의 모든 것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한 지적 황홀감)이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사이의 간격, 차이, 갈등을 장려한 개념적 체계 속에 녹여버림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현대 철학은 그 황홀감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했다.”(이정우 교수 지음 ‘담론의 공간’ 274, 275 페이지)


베르그손은 전통 형이상학의 중심 문제였던 존재의 문제를 생성의 문제로 바꾸었다. 존재가 아닌 생성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직관을 통해 파악하려 한 것이다.(9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단일성, 분할 불가능성, 불변성을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존재의 복수성과 생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한 절충으로 제시된 것이 플라톤의 사상이다. 플라톤은 영원, 불멸, 불변, 완전의 이데아와 불완전하고 변하는 현상계라는 이분법을 제시했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변하는 이데아가 현실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내재한다고 보았다.(97 페이지) 운동성에 주목한 베르그손은 연역 - 귀납, 분석 - 종합의 방법은 고정된 관념으로 생성을 파악하려는 시도라 정의했다. 베르그손은 스승격인 헤라클레이토스가 생성과 변화를 파악한 것은 훌륭하지만 이는 고정된 관점으로 생성과 변화를 파악한 것일 뿐 운동성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직관은 운동성을 운동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베르그손은 과학은 완전히 일어난 일에 대해 파악하는 방법이므로 일어나고 있고 움직이고 있는 사물의 생명인 생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철학은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생성으로서의 지속을 탐구해야 하는데 지속은 직관에 의해서만 직접 우리에게 제시될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이미지에 의해서 시사될 수 있을 뿐 개념적 표상에 가둬 둘 수 없다.(105 페이지)


다양성을 중시하는 과학과 철학은 수많은 시간 안에 낱낱이 흩어져 사실만을 볼 뿐이고 통일성을 중시하는 과학과 철학은 추상적 영원을 볼 뿐 구체적 실재를 파악하지 못한다.(106 페이지) 베르그손은 철학함이란 일상적 사고 작업의 습관적 방향을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정의했다. 베르그손은 지속이란 개념으로 자유의지와 인과율의 확실한 결합을 시도한 철학자이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참된 실재는 생성이며 다양성의 통일성이며 동시에 끊임없는 움직임이고 고정불변한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지속이다. 지속은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지속은 끊임없는 움직임이며 흐름이다.) 어떤 도시를 수집 가능한 항공사진들을 조각조작 맞추어 파악하려는 것이 개념적 이해라면 그 도시로 직접 들어가 주요 유적이나 사물들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직접경험인데 이는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베르그손의 생각이다.


또한 어떤 구절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공감하는 것이 직관이라는 것도 베르그손의 생각이다.(직관은 참된 실재를 직접 파악하는 능력이다.) 베르그손은 물리학은 운동성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베르그손은 지성이 표현하는 운동은 부동적인 것을 병렬시켜 그 운동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118 페이지) 생명체는 분리될 수 없고 재구성될 수 없고 부분으로 파악될 수 없다.


베르그손은 유기체로서의 생명체에 대한 파악은 결코 분할과 재구성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는 지성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베르그손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삶은 예견 불가능한 창조적 성격을 지니기에 지성의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발전된 본능으로서의 직관이 무의식에 가깝다면 지성은 의식에 가깝다. 베르그손은 생명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인 능력은 본능이며 부동적인 것과 이미 주어진 것을 다루는 데 자신감을 갖는 지성은 물질 쪽으로 향해가지만 본능은 생명 쪽으로 향한다고 보았다.(베르그손의 직관은 본능의 소산이며 능력으로서 구체적이고 독창적으로 참된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성에 의한 본질직관을 거부하고 감성직관을 인정한 칸트와도 경해를 크게 달리한다. 베르그손의 직관은 가장 단순한 공감행위이다.(127 페이지) 베르그손은 공감행위로서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생성, 변화,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참으로 실재하는 세계 즉 지속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지속을 우리의 의식 즉 자아라 보았다.(127, 128 페이지)


베르그손은 우리가 강도(强度)를 크기와 동등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포적이며 분할 확장될 수 없는 순수하게 내적인 상태를 외연적이고 확장 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데 알맞는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질적인 변화를 양적인 변화로 간주한다고 보았다.(129 페이지)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은 간단히 정의할 수 없다. 베르그손의 철학 자체가 지속의 철학이다. 베르그손은 시간 그 자체는 살아 있는 것이며 공간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단위로 분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분할 불가능한 움직임 자체로 보았다.(140 페이지)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불가역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물리적 시간을 상정하는 사람도 시간은 불가역적이라 말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시간은 부단한 흐름을 각 순간들로 나눌 뿐 아니라 동일한 행위가 두 번 이상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141 페이지) 고대 철학이 말하는 형상이나 이데아는 이 지속으로서의 시간에서 독립한 영원이다(141 페이지)


베르그손은 정신이 개념 속에 유리(遊離)시키고 저장하는 형상이란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을 밖에서 촬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근대과학자들은 부단한 흐름이며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시간을 수없이 분할된 공간상의 점들로 공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끊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동작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수많은 사진과 정지된 화면의 연결일 뿐인 영화를 생각해보자. 베르그손에 의하면 진화는 지속이며 창조이다.(143, 144 페이지)


베르그손은 우리의 자아를 각 부분이 내적으로 상호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지어진 전체로 본다.(145 페이지) 끊임없는 지속으로서 우리의 의식이 받아들이는 경험은 결코 서로 비교해서 동질적인 요소만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의 이론을 따라 우리는 같은 음악이라도 어제 감상한 것과 오늘 감상한 것이 같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가 바로 순수지속이며 우리의 삶은 과거가 미래를 잠식하고 불어나면서 전진해가는 연속성으로서의 지속이다. 과거는 지속으로서 우리의 삶 그 자체이며 기억에 의하여 부단히 현실화하고, 현재는 부단히 과거가 되는 지속이며 변화이다.(151 페이지) 현재는 부단히 과거가 되고 과거는 기억 때문에 현재화한다. 미래는 예견불가능하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예견불가능성은 미래의 개방성이며 부단한 창조이고 자유로운 행위이다.(154 페이지) 이는 결정론자들과 숙명론자들이 말하는 닫혀 있고 이미 결정된 미래와 반대된다. 그리고 이미 정해진 목적과 목표를 향해 계획된 그대로 진행되어 간다는 목적론적인 사고방식과도 반대된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보며 이미 주어진 결과가 미래에 실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베르그손에 의하면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157 페이지) 생명의 약동(elan vital)은 기계론과 목적론 외의 제3의 길을 찾으려 시도한 결과물이다. 공간과 비유기체적인 물질은 분석적인 오성의 영역에 알맞은 것이며 순수 지속으로서 생명은 직관이라는 철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159 페이지)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물질과 생명 모두 지속에 참여하고 있다.


물리 질서는 자동적인 질서이며 생명 질서는 자발적인 자유의 질서이고 목적성을 초월한다.(166 페이지) 베르그손은 생명 그 자체보다 무생물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지성의 결점을 본능의 소산인 직관이 보충할 수 있다고 보았다.(173 페이지) 베르그손의 철학은 지성에만 치우쳐 있는 철학을 거부하되 직관과 지성의 균형을 잡으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베르그손은 단일성과 다수성의 구분은 무생물질의 범주에 속하며 생명의 약동은 순수한 단일도 다수도 아니라고 보았다.(175 페이지)


베르그손에게 창조란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에게 우주적 차원에서의 창조도 인간 의식에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같다. 우주적 차원에서의 창조는 생명 자체의 힘이며 생명 자체의 요구이고 생명의 약동이다.(179 페이지) 베르그손에 의하면 이 우주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것 즉 새로운 참가(參加)에 의해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새로운 발명이나 창조가 없다면 시간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180 페이지) 베르그손이 말하는 창조란 우주적인 차원에서나 인간 차원에서나 끊임 없이 완성되어 가는 생명의 자유로운 행위를 의미한다.(181 페이지) 베르그손에게서 창조와 진화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손은 물질과 생명을 절대적으로 분리해보는 진화생물학의 바탕 위에 서 있으면서도 차이점을 강조한다.(184 페이지)


베르그손에 의하면 우리에게 창조와 의식, 창조와 자유는 동의어이다.(188 페이지) 저자는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 그 자체인 신도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192 페이지) 사랑을 베풀기 위한 창조란 의미이다. 베르그손은 뇌를 기억의 저장 공간이 아니라 기억이 현재화하는 지점으로 보았다.(199 페이지) 베르그손의 메시지는 사랑 자체인 신과 열린 종교, 열린 도덕성, 자기 한계 극복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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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 - 평범한 사람들의 기이한 심리 상담집
타냐 바이런 지음, 황금진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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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 바이런(Tanya Byron: 1967 - )은 자신의 할머니가 임신한 젊은 헤로인 중독자가 휘두른 강철봉에 머리를 강타당해 목숨을 빼앗긴 사건을 겪고 인간의 (병리적) 전두엽에 관심을 가지고 임상 심리학자가 된 영국의 저자이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저자가 임상심리사가 되는 과정에서 치른 실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가 만난 환자들은 공황 발작 환자,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인 열두 살 소녀, 생모를 거부하는 여자 등등이다.


첫 환자는 뜻 밖에도 소시오패스였다. 저자의 말에 환자가 눈물을 흘리는 등 성공적인 듯 보였던 첫 만남은 소시오패스로 밝혀진 그 공황발작 환자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한 저자가 구출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전개 양상을 보인다. 저자가 이렇듯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사건을 당하고서 자기 탓을 하자 그의 진로를 결정할 책임자인 정신과 전문의는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과, 자기 자신에게 덤터기 씌우는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물론 책은 소설처럼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해석, 무의식, 투사, 전이, 역전이 등 추상적이고 심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용어들을 핵심 용어로 채택하는 정신분석은 지나치게 종교적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여성혐오적인 이론(85, 86 페이지)이라는 저자의 말은 어디서든 쉽게 접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두 번째 사례에서도 이 같은 진지한 통찰이 제기된다.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인 열두 살 소녀 환자가 자신의 양쪽 허벅지 등을 상처 입힌 것과 강박적으로 줄넘기를 한 것을 병리적인 행동으로 간주한 기존의 관례에 이의를 제기하며 저자는 그것을 병적 불안을 조절하는 전략,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 설명한다.(100, 101 페이지)


그런데 병원은 줄넘기를 소녀가 자살을 할 도구로 여겨 금한다. 저자는 죽고 싶어 헸으나 이제 살고 싶어 하게 된 아이를, 그런 행동을 유발한 원인을 규명하지도 않고 그를 애초에 죽으려는 마음을 갖게 만든 이 거지 같은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려는 병원을 보며 불안감과 불편감을 느낀다. 저자는 정신분석을 싫어하지만 정신분석가의 견해를 듣는 데다가 더 나아가 한 정신분석가와 많이 친해지기까지 한다.


책 제목의 그 소녀(열두 살)는 다섯 살이 된 여동생이 익사하는 걸 거들었다. 다섯 살은 열두 살 소녀가 새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기 시작한 나이였다. 열두 살 소녀는 새 아버지의 성적 대상이 자신에게서 어린 동생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자는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단위로 다른 현장에 배치되는 임상 실습은 너무 잔인하기에 환자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 다짐한다.


소설 같은 형식을 취한 것은 더 있다. 지도 교수가 개인적인 일로 며칠간 자리를 비우자 고립무원감을 느낀 저자는 이 일로 그와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갈등은 환자와의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저자는 심리에 초점을 맞춘 섹스 요법을 시행하는데 그 부부 환자로부터 선생님은 너무 어리고 아직 정식 의사도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다. 남자는 저자에게 당신은 사기꾼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한다. 저자는 외로움은 정신이상, 나아가 죽음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확신 하에 관련 자료를 찾는다. 외로움은 몸과 마음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장은 외로움으로 인해 이상 심리를 보이는 사람들을 다룬 장이다. 저자는 극적인 요소가 좀 덜해 보이는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네 번째 장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할머니 이야기가 담겼다.(이 책의 원서 출간 년도는 2014년이지만 저자가 경험한 시간대는 저자 나이 스물세 살 무렵인 지난 90년 초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69세의 남편과 치매에 걸린 아내의 이야기이다. 뇌 이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정신적으로) 다시 겪는 할머니는 측두엽 활동 정지로 변연계에 의존해 사는 탓에 영원히 불안에 시달리고 외부에 대한 과잉 경계로 투쟁과 도주(fight or flight)라는 생존 모드에 돌입할 태세를 보이는 분이다.


할아버지는 자신 역시 미쳐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미 아내가 미쳐가는 걸 보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너무도 잘 아는 난감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실습생 신분이기에 또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구원이라는 망상, 구조 판타지(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는 모습도 곧잘 연출한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의 끔찍하고 잔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이라면 할머니를 죽인 살인범을 죽일 거야?란 질문을 받는다.


저자가 자신에게 기회가 생겼다면 정말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그렇다면 선생은 이미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고 (살해당한) 할머니를 아직 보내드리지 못한 것이라는 말을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식이 장애 병동을 무대로 펼쳐진다. 그곳에서 저자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굶어 죽고 싶어 하는 소녀를 만난다. 저자는 그 아이의 자기 통제 욕구와 능력이 그 아이를 낫게 도와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클까봐 두려워 한다.


저자는 그 소녀의 거식증은 사이가 벌어진 부모님을 뭉치게 해준 접착제였던 것일까?란 말을 한다. 그 소녀에게 거식증은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는 걸 미루게 하는 방편이었다. 그 소녀의 엄마는 빈둥지 증후군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다. 소녀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가족 모두의 기대와 달리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소녀는 자신이 떠나면 엄마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는 말을 털어놓는다. 저자는 소녀의 거식증에 관해 가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을 소녀의 엄마에게 한다. 소녀는 결국 그 말은 자신의 가족 중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냐며 반발한다.


저자는 소녀에게 엄마를 못 떠날 것 같은 네 감정이 어쩌면 네가 아프게 된 이유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한다. 소녀는 어째서요?라 되묻는다. 소녀는 결국 저자에게 선생님 말씀이 모두 옳은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소녀의 거식증을, 절망에 빠진 엄마가 활짝 열어놓은 품 안으로 퇴행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빠져 나올 수 없는 덧에 걸린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는 교통 사고로 숨진다. 인지적 도전도 체계적 해석도 시의적절한 개입도 소용없는 순간이다. 물론 소녀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은 얄궂게도 소녀로 하여금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여지를 주었다.(352 페이지)


전편(全篇)에서 그렇지만 저자의 문학적 감수성과 소설적 구성력 그리고 흥미를 자극하는 능력은 마지막 장인 약물중독 병동과 HIV 보균자 및 에이즈 환자를 연구하고 치료하기 위해 신설된 시설인 말기 환자 병동에서 유감 없이 발휘된다. 저자는 임상심리사들은 어떤 증상을 보고 알아내고 고친다기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포착해내는 인본주의적 접근 방식을 쓰는 사람들이라 말한다.(375 페이지) 똑똑하고 논리적인 완벽주의자인 여자 증권 중개인의 내러티브가 눈길을 끈다. 경쟁이 치열하고 성과(成果) 중심적인 증권 중개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초인(超人)이 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최고를 달성할 수도, 최고가 될 수도 없는 지경에서 그녀는 코카인을 만났다.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절로 갖게 하는 것은 속도감 있는 대화이다. 가령 커밍아웃하게 된 이유는 뭐였어요?, 난 커밍아웃 같은 거 안 했어. 그냥 나로 살았을 뿐이야., 그렇다면 지금도 자신으로 살면 되잖아요? 왜 자살을 하려고 해요?같은 대화를 보라. 저자는 자격증을 딴 지 25년이 되었고 책을 내겠다고 생각하면서 12년을 보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회고록이 아닌 허구라고 설명한다.


정신 건강 분야 종사자들이 자신들이 직접 다룬 사례라며 내놓은 책을 수없이 읽었다는 저자는 25년간 얼마나 불안했고 또 얼마나 오만했고, 얼마나 순진무구했는지 잊고 있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치료해야 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머릿 속이 더 뒤죽박죽인 적도 많았다는 저자는 그들이 있었기에 자신이 노련한 상담사, 아니 어쩌면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의 압권은 재미이지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 저자의 인본주의적 정신이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자신이 책을 집필한 동기는 정신 건강 치료를 둘러싼 수많은 복잡하고 부당한 사건들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 나름의 이유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는 말을 한다.(435, 436 페이지) 감동적이고 재미 있고 의미로 넘치는 책을 읽은 기쁨이 크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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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自殺)에 관한 책을 빌리고 싶다는 아이한테 사서(司書)가 “꺼져버려. 책 반납 안 할 거잖아.”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임상심리사(정신과의사) 타냐 바이런의 책입니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바이런의 임상 실험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은 바이런이 치료한 환자들보다 바이런에 주목하게 하는 책입니다. 다른 과정이지만 저자가 임상 심리 교육 과정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주눅들어하고 정신과는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는 말을 듣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최근 두 분에게서 문화유산해설(文化遺産解說)이란 판단하는 것이 아닌 중립을 지키는 일이란 가르침과 역사학(歷史學) 강의가 아닌 일상 어휘로 쉽게 유물(遺物)들을 설명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감사드립니다.) 첫 순서부터 바이런은 소시오패스의 공격을 받는 예상 못한 상황에 처하는가 하면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인 열두 살 소녀를 만납니다. 바이런은 열두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의 아동을 위한 정신과 입원 병동에서 실습을 진행하라는 말을 듣고 동의하는 한편 떨떠름해 합니다. 공감이 갑니다. 앞으로 어떤 다른 공감 거리들을 만나게 될지 흥미진진합니다. 소설 같은 방식으로 여섯 환자에 대한 기록을 펼쳐보이는 이 책은 왠만한 소설 이상의 재미까지 주는 착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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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만난 사람을 오후에 또 만나게 되다니...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만난 것이다. 자하子夏라는 인물로 공자시대 사람이다. 오전에는 가지 노부유키의 ‘유교란 무엇인가’에서 공자가 자하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는 말을 했다는 부분에서 자하를 만났는데 오후에는 신명호 교수의 ‘조선왕조 스캔들’의 선정릉(宣靖陵) 도굴 사건 부분에서 자하를 만났다. 저자는 조상(선왕)의 묘를 도굴한 불구대천의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하며 자하가 부모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자에게 묻는 장면을 인용한다. 이런 우연은 흥미롭다.

 

선정릉이 파헤쳐진 시기는 선조가 파천(播薦: 임금이 난을 피해 먼 곳에 가 있는 것) 중인 때였다. 선정릉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가 묻힌 선릉(宣陵)과 중종이 묻힌 정릉(靖陵)을 합해 부르는 말이다.(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비(妃)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곳이다.) 선조는 늘 문제적인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조선의 군주이다... 언제 치적을 논하는 부분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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