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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과 도마복음예수
청가인 지음 / 도꼬마리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기독교에 관심을 두던 때 외경(外經)의 존재를 알고 기독교가 거대한 신비 또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외경이란 저자 불명, 권위 의심 등의 이유로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전을 말한다. 도마복음은 대표적 외경이다.(도마복음은 아타나시우스 신조 즉 지금의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해 쓰인 문서이다.)
청가인의 ‘이상(李箱)과 도마복음 예수’는 이상의 문학작품이 도마복음에서 언급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도마복음에서 묘사된 예수는 정경의 예수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말할 것은 종교와 문학, 유대와 한국, 2000년의 격차 등을 감안했을 때 일치란 의외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상이 자아수행에 매진한 사람임을 주장한다.
개체유지본능과 종족유지본능을 포기하는 수행을 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소설 ’날개‘의 구절을 실제 이상이 박제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상은 이 세상을 구원적거(久遠謫居) 즉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유배지로 생각했다. 저자는 이상이 그 치열한 극단의 수행 사실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난해한 글을 썼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을 육신으로 태어나서 신이 되어 돌아간 인간으로 정의한다. 이상은 기독교를 몹시 혐오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상은 기독교가 도마복음 예수를 무단 도용, 조작해 자신들의 목적에 합당한 복음으로 둔갑시켰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제국의 이익과 기독교의 이익이 만나는 곳에서 야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말한다. 제국이 기독교로부터 원한 것은 (통합을 위한) 사상이었고, 기독교가 제국으로부터 원한 것은 힘이었다.
이상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한 성경 부분은 창세,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 등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상은 폐인이 되어 주지육림을 헤매면서 대충 살다 간 사람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육신의 세상이 온통 허위라는 진실은 도마복음과 이상이 함께 생각한 부분이라 말한다. 저자는 도마복음은 조작되지 않은 순수한 것이라는 생각을 표한다. 이상은 남자와 여자를 서로 육신의 생활에 붙들어매어 자아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했다.
저자는 이상을 위고(프랑스), 세익스피어(영국)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이며 도마복음 예수의 가치와 동등하거나 어쩌면 능가하는 작품을 쓴 존재로 본다. 예수는 먹고 마신 존재, 이상은 그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다가 간 존재라는 것도 이상이 도마복음 예수를 능가하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도마복음의 핵심이 자아수행을 지금 당장 시작하라는 주장이고 자아를 체득한 후에는 이 세상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라 설명한다.
도마복음이 주장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방편인데 음식에 매여 사는 것은 동물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설이다.(저자는 도마복음 전체를 상세 해설한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국문학 박사들 중 이상의 작품으로 논문을 쓴 사람들이 가장 많은 현실을 상기시키며 자신들도 잘 모르는 내용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제공하며 철밥통을 지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201, 20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도마복음 예수와 마찬가지로 이상은 인생을 여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육신의 일들을 버리고 자아수행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다. 이상은 도마복음을 접하지도 않은 채 오감(烏瞰)을 통해 바이블이 허구라는 사실을 알았다.(216 페이지) 도마복음과 지금의 성경이 보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이블에는 믿음에 대한 강조가 넘치는 데 비해 도마복음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21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수익 사업이기 때문이다. 도마복음 50장에는 예수가 우리는 빛에서 왔고 우리가 바로 그 빛의 아이들이며 우리는 살아 있는 아버지의 선택된 자들이라고 가르치는 구절이 있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예수가 사람들이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의 증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그들에게 그것은 운동과 머무름이라고 답하라고 말한 구절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읽고 가장 크게 놀랐다고 말한다.(222 페이지) 이상은 ’선에 관한 각서 1‘에서 운동에의 절망에 의한 탄생이라는 표현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운동과 머무름‘에 정확히 대응한다. 운동은 설명이 필요 없고, 절망(이상의 표현)은 머무름(예수의 표현)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에도 그 유명한 “복되도다 가난한 자여. 천국이 너희의 것임이라.”는 구절이 있다. 저자는 이를 자아수행으로 인하여 육신(마음이나 심령이 아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너희의 것이기에 복되도다란 의미로 풀고 있다.
자아수행을 거듭 강조하는 도마복음의 논리를 따르면 수행을 하면 육신은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가능하다. 자아수행을 강조한 장은 여럿이지만 특히 2장이 주목된다. “추구하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멈추지 말라. 찾고 나면 고난 받을 것이요. 고난 받으면 놀라워할 것이며 모든 것을 다스릴 것이니라.”(109 페이지) 이상은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벗어나기 어려운 본능을 기독교가 설치한 덫 즉 일요일의 붉은 빛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을 기독교의 신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속임으로써(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아수행에 매진해야 할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다.(231 페이지) 이를 보면 불교의 경우가 생각난다. 기복 불교가 결국 수행 시간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가 너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했음을 설명하며 이상이 남몰래 자아수행을 한 사실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고 마무리짓는다.(241 페이지)
예수는 십자가를 고난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상은 이단(異端)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 차이 말고는 양자의 차이는 없다. 예수는 모든 것을 아는 자라도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는 말을 했다.(도마복음 67장)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결국 니체의 말을 도마복음에 적용하면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틈나는 대로 반복해 읽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난해하고 비밀스런 두 텍스트를 비교 분석한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덧붙여 다른 도마복음 해설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상은 육신을 벽으로 상정했다. 자아합일을 위한 수행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인간의 육신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지도의 암실’이란 작품에 나오는 바 ‘발간 몸뚱이를 가지고 다니는 무거운 노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갈망‘대로 자신의 몸을 박제로 만들었다.(280 페이지)
참 의미심장한 구절이고 해설이다. 도마복음의 의도는 우리 몸이 육신의 부모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육신의 것들에 매몰되어 자아수행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289 페이지) 예수는 ”영혼에 의지하는 자는 육신은 비참하리라. 육신에 의지하는 영혼 또한 비참하리라.“란 말을 했다.(112 장: 본문 299 페이지)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지만 설득력을 지닌 책 또는 저자들이 꽤 있다. 김환희의 ’국화꽃의 비밀‘이 대표적이다. 문학평론가 반경환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나는 ’이상과 도마복음 예수‘를 읽으며 김환희의 책을 읽을 때 맛본 종류의 짜릿함을 느꼈다. 두 책은 모두 주류의 해석에 반(反)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두 저자의 설득력은 충분한데 말하고 싶은 것은 주류의 완고함이다. ’이상과 도마 복음 예수‘는 힘 있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