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함께 춤을
이동용 지음 / 이파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니체와 함께 춤을’은 이동용 교수가 니체가 28세에 쓴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해설한 책이다. 530여 페이지의 압도적 분량이 눈길을 끄는 해설서이고 ‘비극의 탄생’을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비극의 탄생’은 쉽지 않은 책이다.“, ”니체의 전집 중 가장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9 페이지) ‘니체와 함께 춤을’이란 제목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에서 연유했다.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제발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의 다리도 들어올려라. 그대들 멋지게 춤을 추는 자들이여,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다!”(문예출판사 출간 황문수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96 페이지)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인들에 관한 니체 자신만의 생각을 서술한 책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3 페이지) 니체는 쇼펜하우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처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했을 때 음울한 정령을 경험했다.


이 책으로부터 니체가 접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이다. 물론 니체는 염세주의에서 더 나아가 허무주의를 정초(定礎)했다. “니체에게는 이제 오직 인생, 오직 삶, 오직 이 땅 뿐이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지금과 여기일 뿐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95 페이지) 이것이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란 이 곳, 이 세상 외의 곳은 없다는 개념을 담은 주장이다. 우리를 규정하는 신을 죽이고 인간에 대해 희망을 갖자는 메시지를 담은 주장이다.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은 인간애를 의미한다. 얼핏 허무주의란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고자 했다면 니체는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고자 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84 페이지) 허무주의 철학은 “신은 죽었다.“로 대변된다. 니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몰입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93 페이지) 어떻든 이처럼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비극이란 개념이다. 비극이 탄생했다고 하니 슬프고 허무한 일, 나쁜 일이 생긴 것이 생겼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다르다.


그가 말한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이중성에 의해 생겨나는 바람직하고 유용한 것이다. 니체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아카넷 출간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 47 페이지) 비극은 허무를 견디고 삶을 계속하게 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를 사주(?使嗾)해 비극을 단번에 흔적도 없이 몰락시켰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논리에 집착해 비극을 죽인 인물, 이 세상을 무의미하고 헛된 그림자로 간주하고 이념계에 불과한 이데아를 염원하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보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자체를 음악이라 선언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54 페이지) 아폴론이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이다. 언어가 아폴론적인 영역에 속한다면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영역에 속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180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평안과 평온을 가져다 주는 것 즉 모든 것을 설명해줌으로써 만족하게 해준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말로 형용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1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칙을 미화해내는 힘(‘니체와 함께 춤을’ 368 페이지)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 일자(一者)와 관련된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3 페이지)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고, 그 음악을 모태로 한 비극이고, 황홀경에서 쏟아내는 무아지경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고, 신비로운 어스름한 빛 속에서 탄생하는 환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97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현상적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본질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69 페이지) 니체 철학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조각가의 예술이 아폴론적인 예술이라면 비조형적 예술인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99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빛/ 조형(造形)/ 개인/ 꿈을 의미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둠/ 파괴/ 망아(忘我)/ 도취를 의미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121, 123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그 둘이 모여 하나가 될 때 비극이 탄생한다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71 페이지)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도덕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주체로 보았다. 니체는 순수하게 심미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76 페이지)


니체는 ‘도덕은 삶을 부정하는 의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태양신인 아폴론은 시(詩)의 신이고 조형력의 신이고 예언하는 신이기도 한데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꿈과 연결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꿈은 창작을 위한 정신적 활동 중 하나이다.(니체가 말하는 꿈은 허무맹랑한 것 즉 공상 같은 것이 아니다.)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흐릿한 형상은 아폴론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니체와 함께 춤을’ 117 페이지) 꿈은 아름다운 가상(假想)이다. 적절한 한계 설정에 의해서만 가능한 지혜로운 평정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창조를 위한 아름다운 가상을 보게 해줌으로써 모든 인간을 완전한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버린다.(‘니체와 함께 춤을’ 127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리에 의한 자기인식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기 포기를 통한 새로운 개체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09 페이지)


디오니소스가 삶에 대한 고통으로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면 아폴론은 그에 대한 치유의 손길을 뻗쳐준다. 그러다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생겨난 개별적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디오니소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34 페이지) 니체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지적하자. 니체는 신을 죽인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는 신을 찾았다.


또한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하나의 오류(‘우상의 황혼’ 참고)라 말했는데 이는 삶을 견디게 하고 허무감을 이기게 하는 비극으로서의 음악을 말한다. 아폴론적인 가상은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삶으로서 유혹이 넘치는 가상인데 이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157 페이지) 플라톤이 건강한 국가를 위해 비극을 거부했다면 니체는 건강한 인생을 위해 비극을 필요로 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157 페이지)


니체는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일 뿐이고 합창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183 페이지) 비극에서 관객은 그 자체가 비극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4 페이지) 비극은 형이상학적 위안을 준다. 니체도 형이상학을 인정했다. 다만 삶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렇다.(‘니체와 함께 춤을’ 193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필요로 하는 힘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서정시로 말을 하게 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노래를 하게 한다.


황홀경의 소리는 이성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지혜는 끔찍하다. 현실에 대한 구토증을 이끌기 때문이다. 의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때 다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폴론적인 힘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자는 자신의 변신을 통해 자기 밖에서 새로운 환영을 자신의 현 상태의 아폴론적 환상으로 보게 된다.(‘니체와 함께 춤을’ 212 페이지)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라는 흥미로운 구도가 있다.


괴테는 거인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1) 괴로워할 줄 알고, 2) 울 줄 알고, 3) 즐길 줄 알고, 4) 기뻐할 줄 알고, 5) 신의 종족을 존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36 페이지) 니체는 신을 죽이고 인간을 살리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던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43 페이지) ”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거인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거인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의 지혜는 영원한 고통의 대가로 획득했다. 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엇인가 얻고자 하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도 신을 죽이려면 얼마나 큰 고통을 치러야 할까?“(‘니체와 함께 춤을’ 243 페이지)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를 포함한 그리스 무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공 디오니소스가 가장(假裝)한 인물들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57 페이지)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부활만을 희망으로 보았다. 그런데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죽었다.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는 서사시의 연극화를 해답으로 발견했다. 서사시는 사물과 사실을 관조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사시인은 사물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설명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묘사된 사건의 내용과는 어떤 내면적 관계도 요구되지 않는 그런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받아들인 예술을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영역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는 니체가 비극의 두 가지 충동으로 설명했던 아폴론적인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짝짓기되지 않은 아폴론적인 것을 말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297 페이지) 저자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세계를 이해해야 니체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디오니소스 무대에서의 진정한 배우는 무감각한 냉담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니체와 함께 춤을’ 312 페이지)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은 아폴론적 요소 위에서만 세워졌다. 니체가 비판하는 핵심은 이 부분이다. 비극의 종말과 함께 그리스인은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고 이상적 과거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이상적 미래에 대한 믿음까지도 포기했다. 이성의 시대가 펼쳐짐으로써 신화시대도 끝장이 났다.(‘니체와 함께 춤을’ 317 페이지) 소크라테스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 그와 함께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꿈과 도취 상채가 교묘히 오가는 상황은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이성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니체와 함께 춤을’ 319 페이지) 이런 상황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이 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 또는 플라톤에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인들은 거짓말을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니체는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가 비극을 죽인 살인의 원칙이라 단호하게 평했다.


저자는 정치적으로는 소크라테스를 아제비 재판을 통해 독배를 마시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마신(魔神)이 이겼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설명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329 페이지) 소크라테스의 정신 속에서는 너 자신만을 알라는 명령어가 시사하듯 ‘너‘로만 가득차 있다. 거기에 ’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적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음악이 전하는 형이상학적 위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사람,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해야 알아듣는 전형적인 이론적 인간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87, 388 페이지)


소크라테스는 낙천주의자다. 알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인간은 사물의 근거를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진정한 인식을 분리해내는 일을 한다. ‘오직 이성’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세상을 경직되게 한다.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우리 눈에 지금 보이는 것을 그림자로 파악했다. 만족하지 못했기에 이상향을 그리워한 것이다. 이데아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믿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낙천주의적 인식은 먼 곳만을 바라본다.(‘니체와 함께 춤을’ 363, 364 페이지)


음악에서 비극 예술이 탄생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의 힘에서 발견된다. 진정한 음악의 정신은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에 도달하게 해준다. 음악은 개체를 파멸시키지만 또 다른 세계로의 영입을 가능하게 해준다.(‘니체와 함께 춤을’ 374 페이지) 진정한 자유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진다.(‘니체와 함께 춤을’ 377 페이지)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허무주의 철학의 근본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82 페이지) 믿고 따라온 논리의 결과 앞에서 파멸을 예감하는 이론적 인간의 위기, 그것이 현대의 위기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07 페이지) 모든 것을 알려고만 하는 충동이 현대인을 위기로 몰고 있다. 모르면 불안하다. 니체는 오페라의 등장을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산물로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419 페이지) 니체가 염원한 것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이었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건강을 위협할 정도의 끔찍한 진리를 깨닫게 했다면 이제는 아폴론적인 충동이 건강회복의 마법을 보여준다. 물론 아폴론적인 것이 확고해지면 해질수록 권태와 구토증으로 또다시 위기기 초래되는데 이때 다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구원의 힘으로 작용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459 페이지) 타당한지 자신할 수 없지만 나는 쉬운 길과 고전이 아닌 다이제스트, 묵직한 진실이 아닌 즐거운 것만 찾는 시대는 비극이 사라지고, 고통이 외면받는 시대의 새로운 버전이란 생각을 한다.


전대호가 ‘철학은 뿔이다’에서 분류한 존재파와 주체파의 대립(?)이 생각난다. 물론 이 대립은 비극과 이론의 대립과 무관하다. 전대호는 존재파는 주로 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고 주체파는 시장의 난장판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라 말한다. 니체는 비극이 사라진 시대의 음악이 아폴론적 내용을 근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수단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459 페이지)


진정한 예술가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완벽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둘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472 페이지) 플라톤은 사람을 약하게 한다고 비극을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혼탁한 감정은 카타르시스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다고 보았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해석을 따랐다.(‘니체와 함께 춤을’ 483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91 페이지) 그러나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비극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01 페이지) 비극적 신화는 오로지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아폴론적 예술 수단을 통해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니체와 함께 춤을’ 486 페이지) 에우리피데스 이후 사라진 비극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비극인 양 여겨지는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말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 애호가들로 넘치는 시대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니체는 고통을 극복하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가상, 새로운 미화의 가상, 희망, 이런 것이 삶을 삶 속에 붙잡아두게 해준다. 희망을 가지는 것도 능력이다. 그 희망의 힘을 전하는 것도 능력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23 페이지) ”인간은 환상이 필요하다. 이 세상 이 대지를 위한 환상이어야 한다. 지금과 여기를 버리고 내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세를 버리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지금과 여기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환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24 페이지)


아폴론적인 힘은 세상의 더러운 꼴들을 아름다운 베일로 덮어주고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니체와 디오니소스는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처럼 둘이면서 하나이다. 디오니소스는 미학적 차원에서 거론되는 개념이고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의 이름에서 등장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529 페이지) 디시 한번 말하는 바이지만 니체 특히 ‘비극의 탄생’은 환희와 고통, 비탄과 감동이 뒤범벅된 채 전전반측하듯 씨름하듯 읽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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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武人石)이 아닌 무석인(武石人)이라고, 문인석(文人石)이 아닌 문석인(文石人)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인석이나 문인석이라 하지 않고 무석인이나 문석인이라 말하는 것은 그들을 돌이 아닌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를 읽다가 노예적 정신들이란 표현을 보고 무석인, 문석인이란 표현을 생각했다.

 

무인석(또는 문인석)이란 표현과 무석인(또는 문석인)이란 표현은 너무 다르다. 하지만 노예적 정신들이란 표현과 정신적 노예들이란 표현은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게 노예적 정신이든 정신적 노예이든 예속적이고 피학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노예적 정신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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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100% 활용법
요한 이데마 지음, 손희경 옮김 / 아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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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100% 활용법의 저자 요한 이데마의 다음의 글이 주의를 끈다. 교향곡 감상은 40, 영화 관람은 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미술관에서는 미술작품과 얼마나 시간을 보낼지 당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문화유산 해설 공부를 함께 하는 공대(工大) 출신의 한 선배는 자신이 받았던 공대 수업과 너무 다르게 문화유산 해설은 창의적이고 자유롭다는 말을 했다. 맞지만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문화유산 해설 수업이 무조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지금 받는 수업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어떻든 나는 요한 이데마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선사 시대 사람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를 추론하는 글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 미술을 위한 미술 즉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 2) 영적 차원이라는 것, 3) 기후 변화로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 등이다.


나는 이 가운데 1번을 지지하고 2번이라도 괜찮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미술관을 찾아 미술 작품을 즐기고 미술 책을 열람하지만 때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즉 원시인들도 미술을 즐겼는데 미술 작품과 관련 책들을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 양가감정과 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미술과의 만남은 기대한 것처럼 언제나 잘 되지는 않는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인용하며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흥미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권태감을 드러낸다는 말을 던진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술관 방문을 뜻깊은 기억으로 바꾸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어쩌면 내가 미술관에서 양가감정을 느끼곤 하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거나 그것에 감동받음으로써 미술과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기대가 좌절로 변한 것이 누적되다 보면 새 기대를 갖는 한편 축적된 기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불편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미술관 다리(museum legs)는 미술관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이사이 오랫동안 천천히 걸은 후 생기는 다리의 통증을 말한다. 어제 나는 조선왕릉 다리(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legs)를 겪었다. 선정릉에서. 성종의 무덤에서 정현왕후의 무덤으로, 다시 중종의 무덤으로 순례를 했는데 드넓은 공간 때문이기보다 불규칙적인 걷기와, 생각을 하며 오래 서 있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주 겪어야 할 일...


저자는 미술은 굉장한 자극이라서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최고의 풍경화는 멜랑콜리, 자부심 또는 노스탤지어 같은 정제된 감정을 전달하고 그런 감정들이 반대로 삶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으니 그저 풍경을 즐기는 데 그치지 말고 그 풍경에 당신의 내면에 불꽃을 일으키는 감정을 느껴보도록 하라는 말을 한다. 이는 미술은 벽에 걸려 있는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과 만날 때에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과 들어맞는다.


반 고흐는 액자 없는 그림은 영혼 없는 육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전하며 저자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당신은 미술관 전체를 당신의 경험을 틀짓는 액자로서 여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미술은 정의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태를 굳이 애매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셈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옳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미술을 정의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술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약간의 맥락과 올바른 마음가짐이라 말한다. 저자는 미술관이 다른 어떤 곳보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데 열린 마음을 갖게 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명작을 발견하고 나면 꼬리표 따위는 잊어버리고 미술을 즐기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이들은 미술관에 따라다니기 마련인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태도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독제이다.


저자는 효과적인 설명에 대해 거론한다. 이는 간결하고 특징적이며 당신이 미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53 페이지) 저자는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촉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말을 인용하며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미술관 세계에서 어떻게 직접 선을 대볼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 (만질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이다. 일부 미술관은 만질 수 있거나 원래 만지게 되어 있는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은 무엇일까? 비관론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미술관은 미술의 묘지라는 말이 그것이다. 저자는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확장하거나 재고하라고 말한다. 이는 미술관의 의미를 찾는 내 상황에 잘 맞는다. 저자는 갤러리 가이드를 만나라고 말한다. 그들은 놀라운 배경 지식을 가진 존재들이다. 다만 우리가 편한 마음으로 나름의 의미를 구축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가이드들이 필요하다.(75 페이지) 이는 문화유산 해설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저자는 속도를 늦춰달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려 만든 작품을 너무 빨리 지나친다.(평균 9. 모나리자의 경우 평균 15.) 저자는 미술관을 체크리스트라 생각하지 말고 메뉴라 생각하라고 말한다. 모든 작품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미술작품은 존재하지 않기에 탐구하고 자신과 연결짓는 것이다.


효과적인 가이드들은 사려 깊고 도전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의견을 전한다.(88 페이지) 어느 유명 정치인이 이 드로잉을 아주 좋아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비디오가 우리 개개인의 일상에서 겪는 싸움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줄까?...한편 관람객으로서 가이드 투어에 기여하려면 무엇보다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질문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특히 같이 간 사람들이 묻기 무서워 하는 것들을 질문하라....


날카롭고 예상치 못한 질문은 가이드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할 수 있으며 재치와 독창성 있는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89 페이지) 미술관 관람객의 다섯 유형이 흥미를 끈다. 1) 경험 추구형, 2) 조력자형, 3) 재충전형, 4) 전문가형, 5) 탐험가형... 나는 탐험가형이다. 특정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를 바라는 유형이다. 그들은 자기 의견이 확고하며 스스로의 방식을 찾는 데 익숙하다.(102 페이지)


더 읽을거리로 제시된 책들은 대개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들이 아니다. 몇 권의 책이 눈에 띄는데 나에게는 미리엄 엘리아의 우리는 갤러리에 간다가 마음에 든다. 부모와 아이들이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쉽도록 통속 소설에 버금갈 만큼 재미 있고 다채로운 책을 쓴 저자이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술을 보는 눈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책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과 안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하는 책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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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6-11-0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관 다리는 느껴봤지만 조선왕릉 다리를 아직 느껴보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 부끄럽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16-11-0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반갑습니다. 조선왕릉도 시간나면 한 번 가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가 남자 시인들의 작품을 잘 안 읽는 것은 도덕성이나 심성 면에서 남자 시인들보다 여자 시인들을 더 믿기 때문이다. 시 역시 심성과 다르게 작품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몇몇 남자 시인들의 시는 괴리(乖離)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그 시인들의 삶을 알지 못하기에 무리한 말일 수 있지만 시를 보는 것만으로 즉 직관으로 판단하건대 심성과 꽤 다르게 표현된 시들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남자 시인들이 연이어 성(性)과 관련한 추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시를 읽지 않기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그렇게 추문을 일으킨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면 참 황망할 것이며, 그런 시인들의 시집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지불한 돈이 아깝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고 시집을 버려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 시인들의 시를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황동규, 마종기, 고진하, 송재학, 박남준, 성윤석, 서동욱, 장석남, 송찬호, 엄원태 등의 시인들의 작품은 자주 읽는다.  


거론되지 않은 분들은 내가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분들이다. 정확히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학은 혼자 하는 것이라는 성윤석 시인의 혜안이 반갑다. 아울러 시를 기법이나 수사(修辭)적 장치로 환원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기법과 수사가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은 돌아보지 않고 작품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쓰는 사람은 물론 읽는 사람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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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28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이라는 말을 생략시켜 보면, 도덕성이나 심성 면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을 더 믿기 때문이다, 일단 뛰어난 비교 구문에 밑줄긋고요, 현재 대한민국 정치,사회가 내홍을 겪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표리부동과 파렴치에서 괴리가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2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공감 감사드립니다. 달아주신 댓글에 공감합니다... 바르고 책임질 줄 아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제목이 역설적이다.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피아니스트, 교수인 조은아 님의 관련 글이 실렸다. 호지가 공동체적 삶과 자연의 조화를 오래된 삶으로부터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글이다. 사실 오래된 미래란 개념은 느낌 또는 직관으로 포용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설명하는 것은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베르그손이 한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과거는 기억에 의하여 부단히 현실화하고, 현재는 부단히 과거가 된다고 말했다. 이를 노르베르 호지의 개념에 적용하면 우리는 과거 즉 우리가 살았던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재) 현실화해야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과거를 바로잡거나 현실화하는 것도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Ancient Fu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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