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독서 이후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공감하고 또 공감하며 읽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의 도전‘ 이후 그의 후속작들을 읽지 못했다.

감동하면 전작주의자가 되려는 즉 가능한 한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으려는 내 성향, 그리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내 입장을 감안하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물론 그의 글쓰기 정체성이 페미니즘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은 여성주의를 지향하지만 바른 앎과 삶을 추구한다. 최근 그의 글쓰기 스타일을 논한 글을 읽었다. 은유(隱喻)가 거의 없고 예쁘게 쓰려 하지 않는다는 글이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 오늘 그의 글을 읽었다. 남자들이 말이 없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화제가 없거나 무식해서라는 글이다.

공감한다. 말이 없는 남자는 위험하다는 그의 일갈(一喝) 역시 인상적이다. 곁가지를 과감하게 치고 예외를 괄호치는 그의 쾌도난마는 지나치게 보일 수 있지만 그의 불찰(?)은 ˝예외가 있지만˝ 같은 말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렇게 진의를 헤아리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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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8일 북촌(北村)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 중 두 가지가 관심을 끈다. 하나는 종로구 계동에 자리한 유심(惟心)이라는 인쇄소(발행소) 이야기이다. ‘유심(惟心)‘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발행한 불교 잡지이다.(惟心社는 ‘유심‘지를 발행하는 곳이다.)

불교 잡지이니 오직 유(唯)를 쓸 법한데 사유할 유(惟)를 쓴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惟는 사유할 유 외에 오직 유와 다만 유로도 쓰이니 생각과 오직을 두루 의미하는 말이다. 유(惟)는 유(唯)이다.

유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불교의 일체유심조를, 들뢰즈가 말한 욕망과 힘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맥락에서 욕망은 활동을 하게 하는 추진력을 의미하고, 힘은 그것을 실행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임기택 지음 ‘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57 페이지)

불교에서 마음은 시동(始動)을 걸 뿐 실제 에너지가 될 수 없다. 한 유식(唯識) 전공자도 유식(唯識)을 일체유심조로 보는 것은 오해라 말한다.(서광 스님 지음 ‘치유하는 유식 읽기‘ 146 페이지)

다른 하나는 합각 이야기이다. 합각은 지붕 위 양옆의 박공(牔栱)으로 ㅅ자 모양을 이루는 각이다. 박공지붕은 책을 펼쳐 엎어놓은 모양(삼각형)을 한 지붕이다. 합각을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은 스팬드럴(spandrel)이다.

스팬드럴은 아치의 양편과 위쪽에 있는 3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스팬드럴은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해 유명해졌다.

(스팬드럴과 합각을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유사한 지점에 유사하게 위치하는 두 가지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수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굴드는 스팬드럴의 그림 또는 모자이크가 멋이 있기에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으로 볼만하지만 사실 그것은 설계된 것이 아니라 무거운 돔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란 의미이다.

마음은 전부가 아니고 인간은 우연한 진화의 산물이란 말이 실망스러운가? 겸허하게 받아들일 진실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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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에드먼드 리치의 ‘성서의 구조 인류학’이란 책에서이다.

리치는 이 책에서 이야기의 시작 부분 vs 이야기의 끝 부분, 누룩을 넣지 않은 빵 vs 포도주, 사회적 예절의 상징 vs 무절제의 상징, 도시의 문화 vs 광야의 자연 등 대립되는 여러 항목들을 제시한다.
세상이 이것 아니면 저것 즉 이원적으로 선명하게 나뉘는지에 대해서는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생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에서도 이원적 대립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독립적인 아름다움 즉 용도(효용성)와 무관한 아름다움을 참된 것이라 생각했다.

칸트는 용도가 있는 아름다움을 의존(依存)적 아름다움, 순수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라 정의했다. 칸트는 건축을 용도가 있는 것 즉 의존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고(故) 구본준 건축 담당 기자는 최근 나온 ‘세상에서 가장 큰 집’에서 건축에만 있는 것으로 공공성을 들었다. 구본준 기자는 건축은 태생적으로 공공적인 분야라 말한다.

개인을 위한 건물들도 땅에 뿌리박혀 풍경이 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칸트와 구본준 기자의 관점은 이렇게 대립된다.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칸트는 어쩌면 비구상 예술과 추상 예술이 활짝 꽃피기 1세기 전에 그것을 옹호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건축을 위한 예술’ 118 페이지)

경복궁 해설을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경복궁(정도전) vs 창덕궁(이방원)은 물론 한스 샤로운 vs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대립항을 알게 되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의도해 지은 궁궐이고, 창덕궁은 이방원이 왕 중심의 세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주조의 형태도 취하지 않고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는 건물로 지었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 - 1981)는 히틀러의 욕망을 눈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건축가이다. 히틀러의 애완 건축가로까지 불린다.

히틀러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진학에 실패한 뒤 건축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교수의 말을 듣고 건축가를 꿈꾸었다는 사실은 조금 생소하다.

어떻든 건축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히틀러는 대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건축가를 고르는데 그가 알베르트 슈페어이다.

임기택은 건축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 및 시대에 따른 외적 변수들을 잘 통합하여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인문 및 감성적 요소들을 잘 통합해 현실화해야 한다고 말한다.(‘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 83 페이지)

타당한 말이다. 나는 칸트가 아닌 구본준의,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의, 알베르트 슈페어가 아닌 한스 샤로운의 관점과 선택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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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가 주는 쓸쓸함과 처량함을 마음에 둔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어난 경기도 양주(楊州)에도 폐사지가 있다. 고려 시대의 절터인 회암사지(檜巖寺址)이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내 어릴 적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곳이다.(지금의 회암사는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지어진 사찰이다.)

 

지난 번 친구 어머니 장례때 알게 된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 해설사께, 해설을 들으려면 최소 인원 규정이 있는지 물었다. 회암사지는 관람객이 많지 않아 한 사람이 신청해도 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안녕하신지요?‘라는 내 물음에 그 분은 ˝안녕하십니다.˝라는 답을 보내왔다. 무언가 함축적인 아니면 시를 생각하게 하는 답이다.

 

<안녕하시냐는 제 물음에 ˝안녕하십니다˝라고 하시니 조용미 시인의 ‘봄, 양화소록‘ 중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내 사는 곳 근처 개울가에 복사꽃 활짝 피어 봄빛 어지러운데 당신은 잘 지내나요... 복사꽃이 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봄날이 가는데 당신은 잘 지냅니다...˝

아련한 시이지요...>

 

그 분은 아침부터 양화소록에 끌려 고사관수도까지 보았다며 좋은 지적 자극, 좋은 동기 부여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이제 경복궁 해설(12월 23일)에서는 그 분이, 경복궁 이후 곧 찾을 회암사지에서는 내가 듣는 입장이 된다. 내가 먼저 듣는 시간을 갖고 싶지만 부담에 먼저 해설하는 쪽을 택했다. 겨울의 냇물을 건너듯(여與), 이웃을 두려워 하듯(유猶) 한다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처신처럼 조심스러운 행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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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이다. 물론 몇 해 전 일련의 건축 책들을 읽었으니 이번 관심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관심이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지금의 관심은 궁궐(宮闕) 공부에서 시작된 공부가 발전한 결과이다. 물론 궁궐에 대해서든 건축에 대해서든 지금 내 공부는 모두 소략(疏略: 꼼꼼하지 못하고 거칢, 엉성함)하기만 하다.

건축을 의미하는 영어 architecture는 으뜸, 처음, 근원 등을 의미하는 아치(arch)와 기술이나 학문을 의미하는 tect가 결합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 건축은 최고의 학문이란 말이 가능하다. 최고의 학문을, 산을 오를 때 자세를 낮추는 입산위하(入山爲下)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내 관심은 언제든 건축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갈 능성이 있다.

건축학 박사/ 철학 박사인 브랑코 미트로비치는 ‘건축을 위한 철학‘에서 이런 말을 했다. 본래 철학이 건축을 닮으려 한 것이지 건축이 철학을 닮으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그는 건축 철학이나 건축미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은 철학과 미학이 탐구하는 바를 이미 그 안에 품고 있다는 말을 한다. 지금 건축학 교수 임기택이란 분의 ‘생성의 철학과 건축이론‘을 읽고 있는데 미트로비치의 말을 수용한다면 철학적 시각으로 건축을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들뢰즈와 니체,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 흄과 베르그손, 그리고 노자(老子) 등의 철학을 건축의 시각으로 보는 저자의 시각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는 내가 쉽게 매혹되는 영혼이어서만은 아니다. 철학자 박영욱의 ‘필로아키텍처‘를 필두로 해 숨은 그림을 찾는 것이 될 내 건축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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