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심리학자의 ‘대통령 선택의 심리학’을 읽고 있습니다. 이 분은 제가 신청한 페친입니다.

제게 여러 전문가들 또는 전문가급의 사람들이 친구 신청을 해오고 있어 귀추(歸趨)가 주목되는 가운데 저는 이 분이 제게 친구 신청을 한 분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시간에 쫓기는 분이고 글을 워낙 잘 쓰는 다른 페친들의 글을 읽는 데만도 시간이 많이 들 것이기에 제 글까지 읽을 여지가 별로 없겠지만 만일 읽는다면 참으로 난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분은 박근혜가 심리적으로 의존 상대를 필요로 하는데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극소수로 그 극소수는 박근혜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인터뷰를 지난 2015년 4월 한 분입니다.

이 분이 예시한 바에 따르면 1940년대 초 미국 OSS(CIA의 전신)가 한 심리학자에게 히틀러의 심리분석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그 심리학자는 히틀러를 직접 만날 수 없기에 그의 저서나 연설, 기사 등에 기초해 심리 분석을 해 히틀러가 위기 상황에 몰리면 극적인 자살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예측을 해 적중시켰지요.

1944년 일본이 항복 후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려는 미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직접 적국인 일본을 찾아갈 수 없기에 저서와 기사, 영화 등의 간접 자료들에 의거해 ‘국화와 칼’이라는 명저를 쓴 루스 베네딕트의 사례를 떠올릴 법도 하지만 히틀러를 정확하게 분석한 그 심리학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어떻든 며칠 전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에 대한 글을 일화(逸話) 중심이긴 하지만 쓴 뒤 물리학 교수 한 분과 과학 저술가 한 분으로부터 좋아요 클릭을 받은 뒤 글을 더 신중하고 정확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받은 친구 신청은 대체로 ‘와서 보라’는 의미의 초대장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전문가들의 그것은 말입니다.

김태형 심리학자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마음의 상처도 대통령이 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말로 안철수의 말을 분석합니다.

개인으로 살아가면 굳이 심리 분석을 할 필요가 없고 대권(이 말은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말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리얼하게 반영하기에 그대로 씁니다.)에 도전한 이상 심리분석은 필수라 말합니다.

‘대통령 선택의 심리학’은 2017년 연말의 대선 정국에 맞춰 기획했지만 탄핵으로 대선이 앞당겨짐으로써 문재인, 이재명, 안철수, 유승민 등만을 대상으로 하고 안희정, 심상정 등은 다루지 못한 미완의 기획입니다.

특히 제가 지지하는 심상정 의원의 결락(缺落)은 아쉽습니다.(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의 분석을 반기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저는 지지하기에 더욱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달 김태형 저자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와 ‘거장에게 묻는 심리학’을 읽은 이래 이 분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실행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 책으로 달래고 본격 가도에 들어설 것을 다시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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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3일 패치라는 이름의 비디오 게임 디자이너가 미국 오리건주 법원으로부터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무성(無性) 판정을 받아냈다.

패치는 원래의 성과 이름을 무효로 하고 무성 판정과 함께 새로 사용하게 된 ‘성명 구별 없는 이름’이다. 패치의 사례는 사상 최초이다.

지난 2013년 앤서니 보개트의 ‘무성애를 말하다’를 읽은 이래 약 4년여 만에 듣는 희유(稀有) 아니 초유(初有)의 소식이다.

무성애는 성욕은 느끼지만 상대와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 경우, 감정적으로 끌리지만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성욕도 느끼고 감정적으로도 끌리지만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 성을 혐오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 등을 말한다.

보개트는 무성애자의 비율을 1%로 추정한다. 이들 가운데 13% 정도가 자신의 정체성이 남성 또는 여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 성애자들 가운데 남성 또는 여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비율은 1 ~ 2%이다.

구글에 무성과 무성애의 차이를 논한 글들이 많지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여섯 살 무렵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말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자신은 트랜스젠더도 아닌 것 같다는 패치의 말이다.

한 외국 사이트는 성 정체성은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지만 패치는 그 스펙트럼의 어떤 곳에도 위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궁금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해서이다. 판결 이전 패치가 간직했던 정체성은 정확하게 남성과 여성의 중간이었을까, 란 점이다.

뷔리당의 당나귀란 개념이 있다. 뷔리당은 14 세기 초, 중반에 주로 활약했던 프랑스의 철학자겸 물리학자인 장 뷔리당을 말한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반박해서이기보다 뷔리당의 당나귀란 개념으로 인해서이다.

당나귀가 질과 양 양면에서 정확히 똑같은 두 개의 건초더미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을 경우 즉 어떤 차이도 없는 경우에 처하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것이다.

뷔리당의 이야기는 뒤얽힌 채 알려져 있다. 뷔리당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 조롱의 의미가 다분한 뷔리당의 당나귀란 개념은 뷔리당이 제시한 것이 아니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던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부정(결정론을 제시)한 뷔리당을 조롱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다.

수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란 책에서 뷔리당의 반대자들이 제시한 가정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피셔는 물론 뷔리당에 대해서 반박하는데 이는 그가 역사적 배경에 무관심해서일 것이다.

피셔의 논리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일한 건초더미는 없고(“물리학적 세계는 통계적 편차로 가득하고, 생물학적 세계는 변이들로 가득하다.“),
두 물체 사이의 정확한 중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이상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하기에 당나귀는 어느 한 쪽으로 가서 건초를 먹어 주린 배를 채워 굶어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동요에 빠져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은 당나귀이지만 그런 정신의 동요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 즉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사유의 힘이라는 말을 했다.

잘 알려졌듯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부정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자유는 인정했다.(이 부분은 길고 복잡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심강현의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3부 ‘자유, 전염된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으로’를 참고하면 좋을 것.)

이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 말하면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성 정체성 스펙트럼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위치할 수 있을까, 란 의문이다.

미세한 차이의 물매(기울기)가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물론 패치는 극히 사소한 차이는 가지 치고 크게 보아 중간이라 의미 없다고 말했을 테니 내 이야기는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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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와 요하네스 페르메르(얀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에 공통으로 사용된 색이 있다.

청금석(靑金石)이라 불리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라는 광석을 가루내어 만든 울트라 마린이란 안료에서 유래한 청색이다.

작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황금 유물전에서 라피스 라줄리를 알았다.

그리고 그 해 8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미세하게 차이나는 몇몇 청색의 다채로움을 보았다.

이중섭이 사용한 이런 저런 청색들 가운데 청금석에서 유래한 안료(인공 합성)로 그린 것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흐와 이중섭이 모두 불우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흥을 깨는 것인지 모르지만 울트라 마린이란 이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바다를 통해 이탈리아로 안료가 수입된 까닭에 바다 너머를 의미하는 라틴어 울트라마리누스에서 유래했다.

고흐의 삶은 blue와 yellow, 그리고 플레임(flame) 이란 말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우울(블루)했지만 또는 우울했기에 희망의 노란색 그림들을 많이 그렸고 불꽃처럼 사라진 사람. 내게 배정된 라피스 블루(lapis blue)란 색을 보며 떠올리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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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박이문 교수께서 향년 88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다고 하네요. ‘다시 찾은 빠리 수첩‘, ‘현상학과 분석철학‘, ‘하나만의 선택‘ 등 제가 읽은 책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가운데 ‘다시 찾은 빠리 수첩‘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란 점 말고 인상적인 글 때문에 자주 펴보는 책입니다.

다름 아닌 자신을 ‘늙은 열등생‘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공감하고 또 공감하는 문구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저를 표현하는 말인 듯 여겨집니다.

시인이기도 한 이 분의 말 가운데 ˝아무리 서정적 시라도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러할 때에 비로소 논리를 초월한 시적 가치를 체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애써야 하리란 생각을 합니다.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몆 권 있으니 이제 그 책들을 읽어야겠습니다.

그 분의 ‘노장(老莊)철학‘을 읽느라 애쓰던 때가 30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그 분의 폭넓은 사유와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음을 고백합니다... 직접 그 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타계가 마치 가족의 일인 듯 허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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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3-2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이문 교수님을 잘 알지 못했는데 많은 분들께서 애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교수님의 사상에 눈이 가네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3-2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바람직한 지식인의 표상 같은 분이셨죠... 고인의 명복을 비시는 따뜻한 마음, 감사합니다.
 

테리 이글턴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래지 않다.

최근 읽은 그의 책은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이다.
이 책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 이어 내가 두번째로 완독한 그의 책이다.

‘낙관하지 않는 희망‘을 읽다가 중도에 그만둔 난감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다.

물론 완독에 큰 의미가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내가 책의 핵심을 바로 이해했는지도 자신할 수 없다.

여러 부분을 말할 수 있는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에서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끈 부분은 니체에 대한 지적 부분이다.

이글턴은 니체의 초인을 언급하는데 그에 의하면 전능한 신처럼 초인도 오로지 자신에게 의지하는 바 퇴행적으로 신학을 훔쳐보지 않으면서 자율성이나 자기생산을 말할 수는 없다.

이글턴은 니체는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죽음이라기보다 인간의 불신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258 페이지)

이동용 교수는 자기 삶이 미로라면 들어서야 한다고 말한다.(‘망각 교실‘ 7 페이지) 미로 같은 니체 철학에 들어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들어서야 할 뿐 아니라 목숨 걸고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의 세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제 이글턴의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나 ‘인생의 의미‘ 중 한 권은 어떨지?

이글턴 읽기에도 순서 또는 로드맵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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