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물질(反物質)은 물질과 질량 및 스핀이 같고 전하(電荷)가 반대인 물질이다.

물질이라는 말 대신 입자(粒子)라는 말을 써도 변하는 것은 없다.

두 입자(입자와 반입자)는 서로 닿는 순간 감마선이라는 에너지로 바뀌면서 폭발(소멸)한다. 이를 쌍소멸이라 한다.

물리학자 프랭크 클로우스는 이를 물질이 반물질이라는 자신의 분신을 만나 상쇄되면서 죽음의 춤을 춘다고 표현한다.

전자의 반물질이 양전자(陽電子)이다.(전자는 전기적으로 마이너스 즉 음陰이다.)

클로우스에 의하면 우주에서 138억년 전 있었던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전쟁은 물질의 승리로 끝났다.(‘반물질‘ 107 페이지)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동력은 효율 100 퍼센트를 자랑하는 반물질이라는 말을 한다.(‘스페이스 크로니클‘ 287 페이지)

타이슨은 반물질의 존재를 굳게 믿는다. 믿는다는 말을 하니 이상하지만 타이슨에 의하면 반물질의 존재가 처음 예견된 것은 1928년이다.

그 유명한 폴 디랙에 의해서이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33년 칼 앤더슨은 반물질을 최초로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했다.

세계는 반물질이 아닌 물질로 이루어졌다.

입자물리학자/ 우주론 연구자 리사 랜들에 의하면 통상적인 물질의 질량 대부분은 양성자와 중성자에 들어 있지 그 반입자에 들어 있지 않다.

랜들은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이런 비대칭성이 세계가 우리가 아는 대로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158 페이지)

소립자 물리학자 무라야마 히토시는 10억 분의 2 정도의 차이로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았기 때문에 반물질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물질이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히토시는 물질과 반물질은 분명 같은 수량이 탄생했을 테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우주에 남는 것이 하나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물질도 반물질도 없는 텅 빈 세상이 되어야 한다. 히토시는 우리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미스테리 해명의 열쇠를 중성미자(neutrino)가 쥐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왜, 우리가 우주에 존재하는가‘15 페이지)

히토시는 표준이론에서 질량이 0인 것으로 알려졌던 중성미자에 무게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사건이라 표현한다.(표준이론은 중성미자의 무게가 0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졌다.)

히토시는 중성미자는 예외 없이 왼쪽 돌기였다고 말한다.(89 페이지) 히토시는 중성미자의 반물질인 반중성미자를 이야기한다.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도 다른 물질 - 반물질 커플처럼 1;1로 생성되었지만 중성미자가 살짝 장난을 쳐서10억 개 중에 한 개만 반중성미자와 중성미자의 균형을 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104 페이지)

극단으로 놀라운 일이고 대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기막힌 사건이다.

그런데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소립자 세계의 이야기는 어렵다.

다만 내가 반물질을 이야기하고 중성미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히토시의 책 제목처럼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은 그것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히토시는 중성미자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우주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번역의 문제)

결론은 무엇인가? 반물질을 이야기하고 중성미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이 너무 단조롭고 무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 단조롭고 무미하다고 반물질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니 입자물리학자이자 실험물리학자인 리언 레더먼이 한 말을 전하고 싶다.

˝반물질은 물리학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테마이다. 특히 입자물리학자의 삶은 반물질과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신의 입자‘ 321 페이지)

반물질을 양자(量子) 이론이 일궈낸 또 하나의 위대한 성공이라 말하는 레더먼에 의하면 C(charge conjugation)P(Parity) 대칭이 살짝 붕괴되어 물질이 반물질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몽땅 사라진 후 남은 초과분이 우리를 포함한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신의 입자‘ 502 페이지)

그 대칭 붕괴가 다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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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해설사 동기들과 함께 본 ‘매기스 플랜‘은 근 10년여만에 영화관을 찾아 직접 본 영화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특기할 만한데 내용까지 좋아 별 다섯개를 주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퀘이커교도인 성숙한 여주인공(매기)과 지젝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며 소설을 쓰는 인문학 교수인 남자 주인공의 가볍고 무책임한 인생 편력이 인상적인 영화였다고 기억하고 싶다.

오늘 한 페친의 타임라인에서 ‘매기스 플랜‘에 관한 인상적인 글을 읽었다.

영화평이 그런 것이 아니라 머리가 아파 영화를 보러가 ‘매기스 플랜‘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이상해 보니 ‘퍼스널 쇼퍼‘라는 영화였다는 것이다.

이 일화(逸話)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는 페친이 나이 들어서 그러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십대 때부터 그랬다는 사실이다.

페친은 그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흥미 위주로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어떤 점에서는 페친의 그런 착오가 지성있는 여자의 특징으로 여겨지기까지 해 어느 면 부럽기까지 하다.

나도 실수를 하지만 그것은 영감과 창의 등이 빚어내는 실수와는 거리가 멀어 불만스러운 탓이다.

어떻든 부가적으로 이 부분에서 ‘퍼스널 쇼퍼‘가 어떤 영화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매기스 플랜‘을 보았기에 당분간 다른 영화를 생각할 여력이 없는 나는 페친이 연출한 상황과 비슷한 구절이 있는 시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썼다.

시인도 생각나지 않고 제목도 긴가민가해 한 동안 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든 결국 그 시는 한강의 시 ‘저녁 잎사귀‘였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년 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 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년 쯤
볕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나로서는 아름다운 시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페친의 일화(逸話)에 힘입어 구체성까지 느낄 수 있게까지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일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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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damn Particle‘에서 ‘God Particle‘로 바뀐 것이 리언 레더먼(Leon Lederman)의 ‘신의 입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등을 뜻하는 ‘Goddamn‘의 부정성을 우려한 출판사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레더먼은 중성미자(neutrino)를, 우리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관측할 수 없으면 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레더먼은 뮤온 뉴트리노와 바닥 쿼크(bottom quark)를 발견한 물리학자이다.

레더먼은 언어의 마술사라 할 만하다.

대표작인 ‘신의 입자‘도 언어적 감수성이 빛난다.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에서 레더먼은 ˝최선의 시는 존재하지 않고 위대한 시에 대한 해석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381 페이지)는 말을 했다.

레더먼은 양자 물리학을 시와 같은 반열에 두는 듯 하다.

레더먼은 양자 물리학에 대한 최선의 기술(記述)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덧붙여 최선의 기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한다.

로버트 프로스트, 에밀리 디킨슨, 에드가 앨런 포,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를 인용하며 양자 물리학을 친근하게 대하도록 애쓴 레더먼의 노고는 칭찬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은 시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책이기보다 양자 물리학과 시의 연관성에 초점을 둔 책이다.

레더먼은 아이스킬로스에서부터 토머스 핀천에 이르기까지 축적해온 시와 문학을 총동원해도 모든 개인의 경험을 다 아우르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런 점을 거대한 원자 집단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엄격한 물리학 체계가 20세기 벽두에 완전히 무너진 것에 견준다.(25 페이지)

학 음악학자가 과학적 사실에 가장 무지한 사람으로 시인을 들었다.

어떻든 그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시인을 위한 양자 물리학‘은 가장 시적인 양자 물리 교양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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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7월 이후 올 2월까지 ‘양재시민의 숲’역을 네 번 찾았다.

인근에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어 매헌(梅軒)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역에서 내려 세 번 모두 3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올라왔었다.

서울을 찾으면 강북 그 중에서도 종로 일대에 머물곤 하는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한 숲 해설사는 ‘양재시민의 숲‘역에 내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3번 출구로 나와 숲을 찾는다는 말을 한다.

이 분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출구는 8번 출구이다. 이 출구를 통해 찾는 숲이야말로 양재동의 진짜 멋진 숲이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3번 출구를 이용한 것은 모두 어떤 출판사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떻든 나는 (출판사 송년회를 위해 한 번 모인 것을 제외한) 출판사를 찾은 세 번 모두 택배를 통해서든 직접이든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얻어가지고 왔었다.

그러니 ’양재시민의 숲’역에 대한 내 기억은 좋을 수 밖에 없다.

말했듯 ‘양재시민의 숲’ 역 인근에는 숲이 있지만 와인바와 이색 맛집들도 즐비하다고 한다. 서울의 이색지대라 할 만하다.

이곳 ‘양재시민의 숲‘ 역 8번 출구는 사람들로 넘치는 인근의 강남역과는 너무도 다르게 한가롭다.

당연히 양재시민의 숲 역시 한가롭다.

그리고 자생하는 나무들 가운데 고요한 명상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가 있다.

메타세쿼이아의 사촌급에 해당하는 낙우송(落羽松)이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는 세쿼이아 다음(meta)에 발견된 나무이다.

지난 해 12월 정독 도서관 독서진흥과에 들렀을 때 직원 두 분이 내게 명함을 요구했었다.

그 중 한 분이 자신이 사는 곳이 바로 ’양재시민의 숲‘역 인근의 서초구 강남대로라는 말씀을 하셨다.
서울 강남이 계획도시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지만 양재마을은 더디게 강남권에 편입되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택지로 조성됐지만1980년대 초만 해도 버스 2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던 그곳에 양재 시민의 숲이 들어선 것은 1983년이었다.

그 이후 8차선 도로가 뚫려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땅값이 올랐지만 강남에서 그나마 집값이 낮아 20~30대 직장인이 많아 자고 나면 생기는 것이 커피점과 24시간 편의점이었다고 한다.

나도 처음 출판사에 전화를 해 길을 물었을 때 직원으로부터 출판사가 있는 곳이 준 5도씨 인근이라는 말을 들었다.

준 5도씨가 June 5 도(度) C(centigrade)라는 카페라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현재 논현동 청호불교문화원의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의 대표이신 묘원(妙圓) 법사님을 모시고 명상을 하던 지난 2002년 우리가 모이던 곳이 양재동 강남 여성회관이었다.

당시 함께 명상에 참여하셨던 여(女) 원장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그 이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명상이라 했지만 숲길을 산책하는 것도 좌정(坐定)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와인바와 이색 맛집보다 먼저 찾아야 할 곳이 숲길이 아닌가 싶다.

궁(경복궁, 창덕궁)과 능(선정릉), 그리고 서점 외에 내가 찾을 서울의 새 명소로 만들고 싶다.

다음 주 수요일 만남 프로그램에 양재시민의 숲 모임을 넣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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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대학 생활 - 경제적.정치적.심리적.성적인 측면, 특히 지적인 측면에서의 사유와 치유 방법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스트라스부르대학교 총학생회 지음, 민유기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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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비참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재정을 좌지우지하는 권력과 교육 관료들의 눈치를 보며 발전 방향이나 미래상을 설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은 사회를 선도하는 가치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취업 기관의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 한하는 일은 아닌 듯 하다.

 

1957년에 결성된 단체로 프랑스 68운동의 슬로건인 반권위주의와 반관료주의, 소외의 극복과 지겨움의 탈피, 놀이를 통한 억압적 사회질서의 전복, 자주관리와 노동자평의회 등의 슬로건과 일치하는 이념을 표방했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그리고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총학생회가 함께 지은 '비참한 대학생활'은 대학생들이 처한 경제적, 정치적, 심리적, 성적, 지적 측면에서 비참함을 논하고 치유 방법들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은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났고 내용도 유럽과 미국 등의 것에 대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마치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들린다. 저자들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외와 같은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유를 알아야만 비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들은 갈수록 많은 청소년이 노골적 착취 관계 속으로 더욱 빠르게 진입하기 위해 도덕적 선입관과 가족의 권위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시대를 이야기한다.

 

저자들은 소외를 만족스럽게 소비하려는 불건전한 대학생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들은 대학생을 스토아철학의 노예라 부른다. 저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권위의 사슬들이 얽어맬수록 자유롭다고 믿는다. 스토아철학이란 세상의 일에 초연하며 순수하고 보편적인 사상의 체계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철학이다. 사토리(さとり) 세대라는 말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일본에서 기원한 사토리 세대는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깨달음을 얻은 듯 행동하는 세대를 말한다.

 

저자들은 대학은 제도화된 무지의 기구로 전락했고 고급문화 자체는 몇몇 교수들이 지식을 대량생산하는 가운데 사라져간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대학생이 겪는 실제적인 비참함은 문화상품이라는 중요한 아편에서 직접적이고 환상적인 보상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대학생들을 슈퍼마켓에서 셀로판지로 포장되어 판매되는 얼어붙은 예술시체의 가장 탐욕스러운 소비자로 규정한다.(38 페이지)

 

저자들은 대학생들이 갖는 잘못된 믿음 즉 허위의식 같은 생각을 집중 비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루신이 폭로한 정신 승리법을 생각하게도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대학생들은 순진하고 어리석고 진부하다. 예술시체의 소비자로 규정된 대학생들은 어느덧 신의 오만한 시체를 숭배하는 무리들로 규정된다.

 

저자들은 대학생은 사회 전체에 대항 저항을 통해서만 극단적 소외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지만 이런 비판은 결코 대학생의 영역에서는 제기될 수 없다고 말한다.(46 페이지) 저자들은 청춘은 저항하는 반면 어른들은 매우 체념적이라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프로보타리아란 말이 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합성어로 세기의 모든 얼간이들이 알맹이 없이 잘난 체하는 말이다.(55 페이지) 저자들은 승리한 패배가 존재하고 패배보다 더 수치스러운 승리도 존재한다는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의 말을 인용한다.(70 페이지)

 

저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첫 번째 위대한 패배인 파리코뮌을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프롤레타리아의 첫 번째 위대한 승리인 볼셰비키 혁명을 결국 가장 무거운 결과를 초래한 패배로 규정한다.

 

저자들은 볼셰비키 당이라는 잘 맞지 않는 대상에 적용하긴 했지만 게오르크 루카치가 정확하게 파악한 것처럼 혁명 조직은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인간과 역사 사이에서, 노동자 대중과 계급으로 뭉친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필요한 중재자라 말한다.(79 페이지)

 

저자들은 상품 물신화는 총체적 해방과 삶의 자유로운 구성에 저해되는 본질적인 장애물이라 말한다.(83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상품 생산의 원칙은 자신의 창조자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세계를 무질서하고 무의식적으로 창조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84 페이지)

 

저자들은 급진적 비판과 소외된 현실이 부과한 모든 행동들과 가치들의 자유로운 재구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최대 강령이고 삶의 모든 순간과 사건들의 구성 속에서 해방된 창조성이 승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시, 모두에 의해 쓰인 시이며 혁명적 축제의 시작이라 말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일 뿐이다. 혁명들이 안내할 삶 자체가 축제의 신호 아래에서 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놀이는 이런 축제의 궁극적 목적이며 승인할 수 없는 유일한 규칙들을 무의미한 시간 없이 살아가기 그리고 제한 없이 향유하기이다.(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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