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와 마음‘(2016년 11월 출간)을 감명 깊게 읽고 저자 명법 스님의 이전 작인 ’미술관에 간 붓다‘(2014년 6월 출간)를 찾아 읽었다.

미학(美學)이란 것이 서양 근대의 도구적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출발했다고 말하는 저자는 천강(千江)의 달 그림자를 이야기한다.

이것들은 불교 예술의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달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부질 없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하늘에 뜬 진짜 달과 함께 달의 진실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지에 집착하지도 말고 이미지를 무(無)라고 내치지도 말라는 것일까?

저자에 의하면 천강의 달 그림자는 궁극적인 깨달음은 삶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존재함을 알리는 은유이다.

이 책에서 서양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비교되는 아사세 컴플렉스를 만났다. 빔비사라 왕이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늙어가자 불안감을 느껴 예언자를 찾아간다.

예언자로부터 숲 속의 선인이 3년 후에 죽어 왕자로 환생한다는 말을 들은 왕은 조급한 마음에 사람을 시켜 선인을 죽인다.

얼마 후 왕비가 아이를 낳는데 어느 관상가로부터 아이가 원한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높은 누각에서 갓난 아이를 떨어뜨려 죽이려 한다.

하지만 왕비의 모성애와 지혜 덕에 살아난 아이는 자기를 죽이려 한 부왕의 진실을 알고 아버지를 죽인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은 아사세 컴플렉스를 작품화한 것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운명 자체에 의해 결정된 것과 달리 아사세의 부친 살해와 모친 유폐는 아사세의 부왕인 빔비사라의 과거 악행의 결과이다. 비극, 비극,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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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간 500권의 책을 저술한 것은 철저한 전략적 독서의 결과이다.
필요한 부분만 읽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철저히 배제한 독서법의 승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나미 아쓰시라는 일본의 독서가는 글의 핵심을 담고 있는 한 줄을 발견할 것을 주문한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 5분이나 걸렸던 그는 바로 그 핵심을 찾는 독서법으로 연간 700권의 책을 읽는 서평가가 되었다.

물론 그렇게 핵심을 담은 문장 하나만이 아닌 여러 덩어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말했듯 책을 아무리 정독해도 한 달 정도가 지나면 기억은 대부분 소멸하고 핵심적인 몇몇 개념들이 남게 된다.

물론 글을 쓰게 되면 더 많은 문장들이나 개념들이 생각나겠지만 장담하지는 못한다.

나의 경우 서평을 충분히 길고 상세하게 써서 블로그에 게시한 후 자주 들여다본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읽은 책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연간 읽은 권수에 집착한다.

집착이라기보다 의미를 둔다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이라 하든 지양해야 할 일임은 분명하다. 때로는 책의 한 두 구절이나 한 챕터만을 읽고도 의미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수준이 문제이지 양은 그간의 독서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것이다. 끊임 없는 읽기와 쓰기를 하려면 시간을 아끼는 수 밖에 없다.

책 한 권을 다 읽는 독서는 무리한 일이다.

깊이 읽고 통째 읽고 몇번 반복해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세상에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제한적이다. 갈 길이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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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그린 2017-02-14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옛 책들은 글씨가 크고 책이 얇은데 권 수를 직접 비교하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17-02-14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런 점도 있지요... 관건은 정진하는 자세이고 필요한 부분만 취하는 효율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1만권 독서는 본문에 언급된 일본인 저자가 읽은 권수입니다.^^

코발트그린 2017-02-14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ㅎ 효율성을 챙겨야 하는 건 격하게 공감 합니다. 좋은 책들 무지하게 쏟아지는데 시간은 부족하니까요 ㅎ

벤투의스케치북 2017-02-15 07: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신경증이란 말은 요즘 전문 영역(학계)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히스테리, 강박증, 충동조절장애, 불안 장애, 공포증 등으로 대체되어 사용된다.

히스테리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워낙 잘못 정의되었지만 여전히 관심을 부른다. 히스테리 성향을 띤 사람은 자신의 바람보다 다른 사람의 바람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한다.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욕망하는 것을 이루는 순간 흥미나 관심이 소멸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욕망은 새로운 목표를 찾아 끝없이 떠도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히스테리적 성향의 사람은 상대를 만족시키지 않으려 애쓴다. 상대가 만족하면 자신에게서 욕망을 거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텔 프티콜렝의 ‘나는 너무 생각이 많아‘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감정이입을 잘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너무 잘 파악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잘 파악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 같으면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더 크게 상처받는다.˝

지나진 감정이입도 히스테리적인 것으로 볼 여지가 있지 않을지?란 생각을 하는데...어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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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꽃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지녔지만 내면엔 전사의 강인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내면이 평온합니다.˝

페북에서 만날 수 있는 심리 분석 사이트에서 결과물로 나온 ‘울부짖는 코요테‘라는 내 인디언 이름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바라는 바이다.

‘구글(google) 신(神)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책이 있지만 페북도 심리와 지향점, 성향 등이 노출되는 곳인가 보다.

내게 ‘울부짖는 코요테‘란 이름이 부여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일까? 선사(禪師)들이 지닌 강인하고 유연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져야 한다고 자주 마음을 내보여서일까?

아니면 융 학파의 심리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로부터 받은 감동을 자주 표현했기 때문일까?

’강인하고 유연한 정신력과 체력‘이란 구절에 감명을 받은 일지 스님의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에는 달마도가 험상궂은 산적두목처럼 그려진 이유가 나와 있다.

젊은 나이여서 그랬겠지만 스님의 책을 읽은 후 줄곧 달마대사의 강인함과 기력을 갖기를 원했다. 물론 실패로 끝났다.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통해 나는 “우리는 모두 야성(野性)을 원하지만 우리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말을 만났다.

저자는 많은 여성들이 사막과 같은 삶을 산다고 말한다.(57 페이지) 사막과 같은 삶이란 겉보기에는 아주 작지만 속은 엄청나게 광활한 삶을 의미한다.

울부짖는 코요테라니 기분이 좋다. “꽃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수사(修辭)이거나 과찬이기에 받기 꺼려지지만 내면엔 전사의 강인함이 흐르고 있다는 말은 너무 좋다.

아니 내면과 외부의 극적 대비를 위해 “꽃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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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맨손 타건(打鍵)은 무리한 일이다. 물론 스마트폰은 소프트 터치에도 반응한다. 그러니 타건이란 말은 급한 마음을 반영하는 말이다.

해죽(海竹)을 깎아 만드는 가야금의 술대를 생각하며 터치펜을 구입했다. 술대를 뜻하는 한자 匙는 ‘숟가락 시‘이다. 터치펜은 말 그대로 펜 모양이다.

가야금이란 명칭의 유래는 둘로 나뉜다. 고구려의 명 재상이자 거문고 연주자였던 왕산악(王山嶽)이 임금 앞에서 거문고를 연주하자 검은 학이 날아들었다 하여 거문고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구려의 옛 이름인 검이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 다. 고구려의 자주성(自主性)과 용맹을 생각하면 고구려란 명칭에서 거문고란 이름이 생긴 것이라는 설을 수용하고 싶지만 호의와 유래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

나로서는 거문고는 왜 가야금과 달리 술대를 이용해 연주를 하는지가 궁금하다. 술대가 타악기 효과를 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거문고는 찰현(撥絃) 악기이기보다 타현(打絃) 악기라 해야 옳다.

거문고 현에는 고유 명칭이 있다. 연주자와 가까운 쪽부터 문현(文絃), 유현(遊絃), 대현(大絃), 괘상청(棵上淸), 괘하청(棵下淸), 무현(武絃) 등이다.

왕릉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있듯 거문고에도 문현과 무현이 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왕릉에서도 문인석이 무인석에 비해 능침에 가깝듯 거문고 줄에서도 문현이 무현에 비해 연주자에게서 가깝다.

술대로 연주하는 이유를 추정하면 굵고 단단한 줄과의 접촉으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거나 강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이거나 직접적인 접촉을 꺼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문고의 괘는 음의 고저를 가려주는 받침대이다. 거문고의 6현 중 2, 3, 4현은 괘 위에 위치하고 1, 5, 6현은 안족(雁足) 위에 위치한다.

나는 사실 우리 음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 국악 사랑은 정조(正祖)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시작된 셈이다.

송지원의 ‘정조의 음악 정책‘과 ‘조선의 오케스트라, 우주의 선율을 연주하다‘를 함께 읽어야겠다. 관심이 관심을 부르는 선순환의 생생한 사례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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