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기다리는 사람 - 흰 건반 검은 시 활자에 잠긴 시
박시하 지음, 김현정 그림 / 알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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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기다리는 사람'은 스무 편의 자료가 참고된 산문이다. 시인 박시하가 쓰고 평면 조형 전공자 김현정이 그림을 그린 예쁜 책이다. 부제는 '흰 검반 검은 시'이다. 저자는 쇼팽을 음악을 노래가 되게 했고 시로 만든 사람으로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음악은 언어를 물리친 시이자 단어와 문장이 필요없는 시이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는 수려한 첼로 소나타도 썼다.

 

각자 좋아하는 쇼팽의 피아노 곡이 있다. 여러 곡을 들 수 있겠지만 나는 그의 빗방울 전주곡(op 28 - 15)을 좋아한다. 정말이지 여유롭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 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듯한 곡이다. 박시하의 글을 통해 그가 즐기는 곡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박시하는 자신이 쇼팽의 음악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음악이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영혼이 꾸는 꿈이자 육체를 전율케 하는 힘으로 정의한다.

 

박시하의 인용은 첫 순서부터 인상적이다. 지드가 한 다음의 말이다. "쇼팽은 제안하고 가정하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유혹하고 설득한다. 그가 딱 잘라 말하는 일은 없다." 쇼팽의 노래는 달처럼 희고 매끄러우면서도 어둠 속의 뒷면을 가진 음악이란 것이 박시하의 한 전언이다. 박시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음악이라 말한다. 쇼팽은 병약하고 고독했다. 그는 그런 삶을 살았기에 그토록 아름다운 곡을 쓴 것이리라.

 

박시하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진리, 그 핵심에 다다르려 애쓰다가 막상 어딘가에 도달하고 나면 그것이 지닌 흉측하고 두려운 형상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세상을 이야기(31 페이지)하며 그러나 쇼팽의 음악을 통해 악몽에서 벗어나 비로소 맞닥뜨리는 진실의 빛나는 얼굴을 본다고 설명한다.(33 페이지) 흉측하고 두려운 형상을 유령(정신분석가 백상현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박시하는 멀리 있는 무언가에 대한 채워질 수 없는 소망, 그것 자체를 예술이라 말해도 좋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38 페이지) 삶을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박시하는 자신이 아직 만나지 못한 자신의 문장들과 시를 기다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시하는 자신이 시인이자 한 사람의 생활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려고 애쓰지만 언젠가 무언가는 빗나가기에, 한 편의 시에 담긴 것들이 때로는 너무도 마음을 가득 채우지만 때로는 몹시 무용해서 고통스럽다고 말한다.(46 페이지)

 

헛된 것에 매혹당하고 갈망하고 기다리고 실망하고 울고 웃으며 남겨진 삶의 그 무엇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리려는 충동에 시달린다(54 페이지)는 박시하는 쇼팽의 음악들은 사랑의 기쁨에서 촉발된 영감과 사랑의 절망에서 비롯된 내면의 고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말한다.(57 페이지)


박시하는 쇼팽의 삶을 하나 하나 간추리며 그의 음악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박시하는 사랑은 변하지만 음악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66페이지) 사랑하고, 쓰기 위해서 가장 추한 모습과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박시하. 그의 책은 쇼팽론이자 시론(詩論)이다.

 

박시하는 하나의 면만 갖고 있기에 사람은 좀더 복잡하고 내밀한 존재라는 말로 쇼팽에 대한 세평(우유부단하고 말수가 적고 수줍고 병약했다)에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한다.(70 페이지) 쇼팽의 음악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 박시하의 고백이다. 박시하는 쇼팽의 음악을 떠오르는 해의 음악이 아니라 그 빛을 반사해내는 달빛의 은은함을 지닌 음악이라 말한다 .(76 페이지)

 

박시하는 쇼팽의 뱃노래(바르카롤)에서 검은 안개와 흰 운무를 느낀다. 박시하는 음악을 순간의 환희를 영원에 붙잡아두려는 시도라 말한다.(86 페이지) 쇼팽의 첫 사랑은 동급생이던 미녀 소프라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이다. 쇼팽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은 그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다. 특히 2번 2악장은 남몰래 흠모하던 그녀를 그리워하며 만든 곡이다.

 

"쇼팽은 음악으로 말했다. 자신의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 언어가 아닌 음표로, 리듬과 악상으로."(106 페이지) 박시하는 쇼팽의 음악은 모든 상실에 대한 애도로 읽힌다고 말한다.(110 페이지) 박시하는 쇼팽이 사랑했던 콘스탄치아 글라드보드스카, 마리아 보진스카, 조르주 상드 등을 차례로 호명한다.

 

"잃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템포 루바토는 쇼팽 음악의 고유하고 특징적인 기법이었다. 마치 기억과 망각 사이의 순간처럼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흔들리는 템포."(114 페이지) 당연하지만 쇼팽은 삶과 이별하는 동시에 음악과도 이별했다. 쇼팽은 죽음 직전까지 음악을 듣기 원했다. 쇼팽은 자신의 장례식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124 페이지)

 

임좀을 지켜보던 의사가 아직도 아프냐고 묻자 쇼팽은 이제는 안 아프다는 말을 했다. 쇼팽의 장례식에는 그의 장송행진곡과 전주곡 4번, 6번,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박시하는 쇼팽의 음악을 듣는 것은 그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 말한다.(126 페이지) 쇼팽은 음악 이외의 삶에서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이었다.

 

박시하는 쇼팽에게 "당신은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로질러 갔습니다."란 편지를 쓴다. 박시하는 말한다. 음악은 몸이 영혼에 줄 수 있는 기쁨이고 쾌락이며 몸의 쾌락은 순간적이고 파괴적이지만 영혼의 쾌락인 음악은 별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별보다 더 영혼에 가깝다고.

 

박시하는 시를 만지기 위해 자신 역시 극한까지 가고 싶어 했다고 말하며 그렇게 나타나는 시의 형상은 결코 조화롭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세상이 조화롭지 않기 때문이다.(177 페이지) 박시하는 쇼팽의 음악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슬픔이라 표현한다.

 

박시하는 쇼팽에게 "우리의 한계는 이토록 분명한데도 어째서 갈망이 끝이 나지 않는지 당신에게 질문을 하겠"다고 말한다. 슈만은 쇼팽을 가리켜 남들이 정한 법칙에 순응하기보다 쓰러질 때까지 혼자 고군분투하는 정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 말했다.(18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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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공학적으로 접근, 해설˝한 동기 이야기를 다른 동기를 통해 듣고 오랜만에 김인환 교수의 ‘상상력과 원근법‘을 들춰보았다.

평론집인 이 책에서 국문학 교수인 저자는 삼각법과 미분을,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마르크스의 가변자본 및 불변자본, 이윤율 등을 수식으로 풀어보이는 이채(異彩)를 선보인다.

파격적인 만큼 인상적이다. 이런 예를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물론 내게는 인문적 성찰 예컨대 ˝비록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그 상황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라고 단정할 권한이 없다. 생활세계를 폐쇄해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등의 말이 훨씬 값지게 다가온다.

경복궁을 공학적으로 푸는 데에서도 관건은 인문적 가치이다. 자연과학이 뿌리라면 인문학은 꽃이다. 하지만 나는 인문적 가치 만큼 자연과학의 가치를 긍정한다.

출구가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해도 그것을 존재의 영원한 질서라고 단정할 권한이 없다는 ‘상상력과 원근법‘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글이 화석화된 생각을 단호하게 깨주기 때문이다.

김중식 시인의 ‘이탈한 자가 문득‘이란 시를 생각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태양도, 뭇별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지만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는 문득 자유롭다는 말을 한다.

나는 김인환 교수의 말로 이 시를 읽어 ‘포기가 존재의 영원한 질서일 수 있을까?‘란 자문(自問)을 한다. 궤도를 이탈해 얻은 자유도 일상이 되고 궤도화하는 것이리라.

동기의 경복궁 공학 해설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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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 평론가 강영희 님의 ‘올바른 불행 사용법 몰랐던 류철균‘이란 글을 읽었다.

류철균이 ˝나는 불행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자신의 카톡 글을 언젠가 ˝나는 불행하다˝는 글로 바꾸기 바란다는 강영희 님이 주장하는 것은 불행에 대한 진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보며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가 ‘문화사의 과제‘란 책에서 진화란 개념이 역사학에서 처음 나온 것이라 주장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통해 돌아보게 되는 것은 진화의 의미, 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 그리고 내 정체성 등이다. 최근 정조(正祖)를 좋아한다는 36기 동기 한 분, 연암 박지원을 좋아한다는 한 시인과 대화를 하며 내 정체성을 돌아보았다.

나는 정조를 좋아하고, 연암보다 다산을 좋아한다. 연암은 자신을 감추는 글을 잘 썼고, 다산은 자신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글을 잘 썼다. 연암이 해학과 골계에 능했다면 다산은 진지하고 간곡했다.

연암과 다산 사이에 정조가 있다. 문체반정으로 인한 화제거리는 그 한 예이다. 정조의 독살설, 정조가 고백한 태양증(기와 담 등의 울체로 인한 다혈질, 조급증 등) 등을 더 알아보아야 한다.

정조는 밤에 벽을 돌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조의 개혁군주 여부 즉 정조가 개혁 군주인가 아니면 수구적 인물인가의 여부 등도 더 알아 보아야 한다.
물론 내게는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치우고 어좌 뒤에 책가도 병풍을 둘러친 정조,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안고 반대파에 둘러 싸인 채 왕이 된 정조,

총애하는 의빈 성씨 사이에서 얻은 세자 순의 이른 죽음을 지켜보며 한없는 상실감에 싸였을 정조에 관심(연민)이 간다.

불행 그리고 거기서 나아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을 경우 나타나는 증상의 생생한 예가 최근 드러났다. 삼성의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에 이의제기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성한 삼성을 흔들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는 이상한 괴물 같은 족속들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본주의의 영향에 괴물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우려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한 생명에 대한 비인간적 시각은 백번 탄핵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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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文孝)세자는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장자이다. 세 살에 세자가 되었으나 다섯 살에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정조는 화마(火魔)를 입었거나 아픈 기억이 있는 창덕궁 동궁 영역을 보수하지 않고 내전인 성정각 옆에 중희당이란 새 동궁을 지어 세자를 가까이 있게 했다.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관계를 경험으로 체득한 결과이다. 고궁박물관 궁궐실의 창덕궁 동궁과 후원 코너를 설명하는 글을 쓰다가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발표 전이어서 다행이지만 마음이 좋지 않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을 내원화상임자갱재축이라 쓴 것이 하나이다.

내원(內苑)은 후원의 다른 이름이고 상화(賞花)는 꽃구경을 의미한다. 임자(壬子)는 1792년이다. 갱재(賡載)는 임금이 시문을 지으면 신하들이 이어 짓는 것이다. 축(軸)은 두루마리이다.

정리하면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은 1792년 정조(1752- 1800)와 규장각 관원들이 창덕궁 후원에서 술을 즐기며 시를 짓고 화답한 내용을 모은 두루마리이다.

어렵다기보다 생소하다고 해야할까? 공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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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 1896 - 1971)은 대상 관계이론분야의 전문가인 영국의 정신분석가이다. 진정한 자아와 거짓 자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페북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을 읽었다. ˝It is a joy to be hidden, but disaster not to be found.˝ 인간 심리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면모를 잘 설명한 글이란 생각이 든다.

국내에 나온 책으로 ‘한 어린 소녀의 정신분석적 놀이 치료사례‘라는 부제가 붙은 ‘피글‘이란 작품이 있다.(이 책은 내게 잘 맞을 것 같다. 놀이, 정신분석, 어린 감수성 등이 키워드란 점에서.)

백의에서 나온 장 다비드 나지오의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에 7인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다.(도널드 위니코트로 명명)

나지오는 눈(NUN)에서 나온 ‘카우치에 누운 정신분석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밖에 눈에서 나온 안젤라 조이스의 ‘리딩 위니코트‘가 있다.

다시 위니콧의 말을 이야기하면 나는 언급된 그 글을 보고 나희덕 시인의 ‘푸른 밤‘을 생각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길이었다....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지름길이었다˝(직관적이지만...)

출처(出處)란 말이 있다. 출(出)은 출사(出師) 즉 현실 정치에 참여해 배운 바를 실천하는 행위이고 처(處)는 은일함 곧 초야에 묻혀 도를 연마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숨음(hidden)이든 발견(found)이든, 출이든 처이든 모두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 내게 유난히 어필되는 것은 내 마음의 갈팡질팡 때문.

정중동(靜中動)이나 동중정(動中靜)은 있지만 출중처(出中處)나 처중출(處中出), 은중현(隱中顯)이나 현중은(顯中隱)은 없는 세상. 그 둘 사이에서 매혹되는 것은 나의 신경증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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