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을 전공하고 동시대 미술과 사진 이론을 가르치는 한 세련된 분이 ‘볼작시면‘이란 말을 쓴 것을 보고 혼자 웃었다.

˝반면에 피카소가 그린 ‘칸바일러‘를 볼작시면 관람자는 당황한다. 최초의 당혹감은 이 그림이 초상화라는데 인물을 단박에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나온다. ..˝

단박에란 말도 미학자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단박에는 지체 없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를 뜻하고 -ㄹ작시면은 우습거나 언짢은 경우에 흔히 쓰는 말이다.

물론 ˝어머니께 딸이, 딸에게 엄마가˝란 인상적이고 멋진 표현을 한 이 저자의 면모를 나는 부럽게 생각한다.

어머니에서 딸에게만 유전되는(아들에게로도 전해지지만 이 경우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전할 수 없다.) 미토콘드리아를 생각할 만하지만 딸이 어머니께 드리고(책 헌정) 그 딸(저자)은 엄마로서 딸에게도 책을 헌정한 것이니 미토콘드리아와는 다르다.

굳이 헤아리자면 저자가 시간을 역류해서는 물론 순방향으로도 책이라는 문화적 미토콘드리아를 전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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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額子)의 액은 이마 액자이다. 조주연 교수의 ‘현대미술 강의’에서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액자를 그림과 세상을 단절(고립)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는 내용을 읽고 있는 입장에서 흥미를 느끼게 하는 사실이다.

말라르메의 말은 더 이상 우리가 보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심리 상태 등을 표현하는 현대 미술의 특성을 설명하는 말로 그림 밖의 세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인 반면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액자 소설이란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것이 이청준의 ‘매잡이’이다. ‘매잡이’는 액자 밖 인물인 소설가 지망생 민태준(평생 자료수집을 하러 다녔을 뿐 단편 소설 하나 발표하지 못한)과 액자 안 인물인 매잡이 곽돌(변해 버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잡이라는 옛것을 고집하는)의 삶이 묘하게 닮았음을 드러내 보이는 소설이다.

서술자인 ‘나’는 민태준의 취재 노트를 넘겨 받아 ‘매잡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장인 정신을 알게 된다. 액자 안 인물과 액자 밖 인물이 무관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액자 안 인물과 액자 밖 인물이 무관한 소설이 있는지 궁금하다.

(말라르메가 이야기한) 현대 미술과 현대 소설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액자 밖 인물과 액자 안 인물이 무관한 소설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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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도착한 박성규 시인의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는 등단 13년 된 시인의 열번째 시집이다. 다작의 시인이란 말을 할 수 있겠다.

그의 직전 시집인 ‘오래된 곁눈질‘에 ‘라제통문(羅濟通門)‘이란 시가 있어 조어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 한성백제 박물관에서 제라동맹(濟羅同盟)이란 문구를 보았는데 이번엔 라제통문이다. 제라동맹은 백제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라제통문은 백제 지역인 무주에 새겨진 이름인데 제라통문이라고 하지 않아 배경이 궁금하다. 누군가는 제라동맹이란 말을 우습다고 하지만 이는 현명한 생각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자신이 신라식 명명에 물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사소한 것 같지만 나는 섬세하고 고운 백제 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다.

신라가 아닌 고구려에 의해 통일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신라보다 백제의 미의식과 안목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은 하고 싶다.

나는 백제 지역과 무관한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백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 어떻게 보면 안타까워 하는 것은 지역과 무관한 것이다.

오늘날의 러브샷이나 원샷에 해당하는 술자리에서의 벌칙이 한문으로 쓰인 안압지 출토 주령구를 보며 이두가 있었음을 상기시킨 뒤 순수 한자로만 쓰여진 글은 절대 화랑들 또는 신라 귀족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한 경주 출신의 한 분이 생각난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12세기 프랑스 철학자 위그(Hugues de Saint Victor)의 말을 인용해야 할까?

물론 곧바로 쓰기에는 전제가 많다. 그러니 나는 다만 친숙한 것은 낯설게 보고, 낯선 것은 친숙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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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특히 음악 그 중에서도 고전 및 낭만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부암아트홀(160석) 같은 아늑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특히.

광화문의 금호아트홀(390석)이나 여의도의 영산아트홀(598석)은 아늑하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지만 대형 공연장에 비해 관심을 더 갖게 한다.

영산의 의미가 궁금해 문의했더니 창설도 오래 되었고(1999년) 운영업체도 많이 바뀌어 잘 모르니 알아 보고 답해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어떤 연유로 묻게 되었는지 물어 나는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같은 대형 공연장에 비해 작고 아늑한 공간에 대한 글을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쓰려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직원은 블로그 주소를 물었고 나는 내 (네이버) 블로그는 myrteo21을 아이디로 하는 블로그로 myrteo는 슈만의 가곡집 ‘미르테의 꽃’에서 미르테를 조금 변형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영산이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그 영산과 관련이 있는가 물었고 직원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영산(靈山)이란 이름 때문이겠지만 석가모니가 중생을 구도(求道)하기 위해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던 라지기르의 영산(영축산. 영취산)에 대한 매혹 때문에 나는 어쩌면 영산아트홀에 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지기르에는 이 밖에도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 제1 결집 장소인 칠엽굴 등의 중요 불교 유적이 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음악이론가이자 작가인 미셀 슈나이더는 무엇이 근원적인 파동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리듬상의 방식과 스스로 불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리듬, 양손이 각각 다른 박자를 따르는 것을 몹시 좋아한 불균형에 대한 슈만의 지향성이 연주자와 마찬가지로 듣는 이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길을 잃고 평정을 잃게 한다는 말을 했다.(‘슈만, 내면의 풍경’ 90 페이지)

‘슈만, 내면의 풍경’은 슈만의 곡을 아픔의 원인과 아픔 없는 상태 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괴리를 가진 것(62 페이지), 우울증 환자의 목소리처럼 점점 무거워지고 어두워지는 것(145 페이지) 등의 말로 표현한다.

‘슈만, 내면의 풍경’에 언급된 곡들은 그런 특성에 부합하는 곡들이다.(백곡 이상의 곡이 언급되지만 ‘미르테의 꽃’은 나오지 않는다.)

적절한 공연을 골라 궁(宮)이나 능(陵), 박물관, 도서관 만큼 자주 찾아야 할 곳이 공연장이다.(당분간 영화에 대한 관심은 기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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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알지 못하는 시인의 시집을 받았다.(죄송) 박성규 시인의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란 시집이다.(문학의 전당 시인선 0252번. 2017년 3월 20일 출간)

겉봉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시인이 직접 받아 자신은 고영 시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시집을 보낸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귀한 시집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며 열심히 읽겠다는 답을 했다. 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열심히 읽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에서 무엇보다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문학의전당이란 출판사는 박지영 시인/ 평론가의 정신분석 시론집인 ‘욕망의 꼬리는 길다’의 출간사인데 나의 경우 그 분의 ‘귀갑문 유리컵‘이란 시집을 읽고 리뷰를 올린 뒤 시인께 큰 찬사를 받는 호사를 누렸다.

통화를 마치고 ‘이제 반딧불을 밝혀야겠다’의 해설자로 박지영 님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분 덕에 시집을 받게 된 것이 분명하다.(고영 시인은 문학의전당의 대표이다.)

내게 격려(시도 잘 쓸 것 같다는..)도 많이 해주시고 절판된 ‘서랍 속의 여자’와 ‘눈빛’이란 시집을 보내주시고 박성규 시인의 시집도 받게 해주신 박지영 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낮에는 의정부의 모(某) 시 동호회 회장으로부터 조만간 시론(詩論)을 들려달라는 말을 듣고 난감함을 느꼈다.

퇴근 후에는 나비(nabis)와 나비(butterfly) 등과 관련한 내 글에 나비는 이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댓글을 단 블로거에게 답을 했다.

그 덕에 나희덕 시인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서 오는가’ 등을 오랜 만에 다시 읽었다.

시로 충만(?)한 하루였지만 실속이 없는 것은 내 삶이 시와 거리가 멀기(시와 시론을 읽지만 시도 시론도 쓰지 못하는...)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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