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슬리퍼(stress sleeper)란 스트레스를 잠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나도 스트레스 슬리퍼일까? 현대는 거듭 전문 용어가 새로 생겨나는 시대인 듯 하다.

늦은 오후 비염 때문에 병원을 다녀올 때 빗방울을 맞았다. 배낭에 우산이 들어 있었지만 귀찮아 꺼내지 않았다. 날이 추워 웅크린 자세로 버스도 탔었다. 어두운 밤 거리가 이상하게 싫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여덟시 무렵 춥고 쓸쓸하고 피로해 쪽잠을 잔다는 생각으로 누윘다. 이럴 때 나에게는 잠이 최고이다. 어느 정도는 슬픔도 정리되고 피로도 풀리고 의지도 생긴다.

나는 예민한 편이지만 잠을 자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일찍 일어나 어디에 가야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새벽 두, 세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스트레스를 측정하는 객관적 지표 같은 것이 있을까? 아니면 스트레스인지 아닌지는 사람마다 다른 주관적인 것일까?

조금 힘든데 큰 스트레스라도 되는 듯 많이 힘들다고 하며 잠을 자가처방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밤 여덟시 무렵 내가 잔 잠은 내일 이후 열흘 정도 이어질 바쁜 상황을 대비한 체력을 세이브하려는 의미의 잠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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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람이 새 작품을 쓸 능력이나 의욕을 잃은 상태를 의미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이란 용어가 있지만 작가가 아닌 나에게 쓸 말은 아니다.

다만 글쓰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마감 날짜에 임박해 글을 쓰는데 그렇게 시작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 같은 것이 휘몰아치듯 글을 쓰게 한다는 한 페친의 글은 음미할 만하다.

예열 없이 바로 시작하지 못하는 습관은 나에게도 해당한다. 슬럼프 시기를 건널 때 놀랍게도 내공이 놀라운 분들이 페친을 신청해온다.

‘좋아요’도 누르고 댓글도 달지만 대개 신청만 하고 묵묵부답이다. 물론 이는 탓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글을 읽으라는 초대장이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대장을 받고 그의 타임라인에 가서 실마리를 얻곤 하는 것이 나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 내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아닌 내가 팔로우하는 시인의 글을 읽었다. 뜻 밖에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번역한 이야기이다.

지난 86년 봄부터 겨울까지 일주일에 한 두번 과천의 그 시인(물론 당시는 서울대생이었다.) 소유의 아파트에 모여 일어판 ‘자본‘을 나눠 가져간 뒤 국역한 원고를 독일어 원전과 비교하던, 서울대 80 학번 다섯 사람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그 다섯 사람들 중 하나였다.

사연이 풍부하고 이야기거리로서는 극적이기에 멋진 글이 될 수 있었지만 시인의 재주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문장론 책들이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든 훌륭한 문장들은 거듭 고치고 다듬은 결과라는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내가 접하는 멋진 글들은 모두 막힘 없이 술술 써내려간 글들인 듯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럴까?

어떻든 아지트, 가명, ‘자본‘ 등의 말을 들으며 나는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을 생각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제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절판이 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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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3/4이 지났다. 바쁘게 보낸 시간들이었지만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는 사실이 시간을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문학 중심의 읽기를 하는 나는 예년만 못 하지만 여전히 자연과학으로부터도 실마리를 얻으려 애쓰고 있다.

작년 이즈음에 비해 올해는 책을 읽은 양이 반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가 아파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읽기와 쓰기에 변화를 주려한 결과이다.

나이가 들면 관심 영역을 좁히게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인문학 공부는 글쓰기로 마무리되어야 의미가 있기에 글쓰기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최근 한 천문학자가 이론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그는 이론을 세계에 관한 검증 가능하고 예측 능력이 있는 모형들을 기술하는 대체로 수학적인 구성물로 정의했다.(데이비드 헬펀드 지음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282 페이지)

나는 이 말을 이론이 현실을 완전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었다. 유연한 눈으로 학문과 세상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한 사회학자의 생자공(生自共)이라는 표현을 흥미 있게 읽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생존’(생산 양식) 전문가, 베버를 ‘자존’(특히 종교사회학) 전문가, 뒤르케임을 ‘공존’(유기적 연대-기계적 연대 등) 전문가로 정의했다.

물론 세 사상가 모두 각각의 전공 영역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어느 누구도 세 영역의 유기적 - 체계적 상호작용과 연계상황을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교수신문 2017년 9월 13일)

이런 글은 학문간 또는 사상가간 관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지만 공부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뜻의 소년이로학난성(少年而老學難成)이라는 주희의 말이 와닿는 시간들이다.

물론 주희는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말을 처방으로 제시했고 자극도 되고 격려도 되는 말도 했다.

섬돌 앞 오동나무 잎 가을 소리를 낸다는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란 낭만적인 구절이 그것이다. 여전히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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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는 쉬운 책도 있고,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운 책도 있다.

내게는 잘 읽히지 않는 쉬운 책 중 하나가 2015년 겨울(12월) 월동 준비라도 하듯 사 서가(書架)에 꽂아둔 뒤 이듬해 봄(5월) 박물관 나들이시 손에 들고 다닌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이었다.

이 책은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가 하나의 주제를 각자의 설명 방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가령 자연과학자는 연리목은 몸의 공유를 택한 경우로, 혼인목은 공간의 공유를 택한 경우로 설명하고 인문학자는 배려의 최고봉은 뿌리도 둘이고 몸도 둘이지만 두 나무가 하나처럼 사는 혼인목이라 풀어낸다.

어떻든 나는 250여 페이지 정도에 시집만한 크기를 가진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다 읽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최근 나무에 대해 다시 생긴 관심으로 그 책을 펴보게 되었다. 분명 같은 책이지만 이전과 다른 분위기, 다른 뉘앙스를 가진 책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 뿐 아니라 나는 그 낯선 새로움에 편승해 시인들이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한 나무 시들을 찾아 읽었다.

리기다 소나무의 제법 굵은 삭정이가 자신의 걸음 앞에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무가 썩어가는 제 팔 하나를 스스로 잘라내가면서 말을 건넨 것으로 표현하는 시(엄원태 시인의 ‘나무가 말을 건네다‘).

꽃피는 열기에 봄비가 휘어져 내리는 목련 부근을 이야기하는 시(고옥주 시인의 ‘다시 목련’).

엄원태 시인의 시는 오래도록 병을 앓고 있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시로, 고옥주 시인의 시는 공간을 휘게 하는 중력장(重力場)을 연상하게 하는 시로 나는 읽었다.

이 두 생각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천문학자는 진정한 과학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으로 호기심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큰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진리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이다.(데이비드 헬펀드 지음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36 페이지)

물론 헬펀드가 말한 진리 구성의 주체는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지성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없이 집단지성은 있을 수 없다.

호기심과 진리 구성(構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리라. 당연히 나무를 보는 데에도 적용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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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감상을 위한 소설을 읽는다. 김경해의 소설집 ‘드므‘란 책. 이런 의도로 소설을 읽는 것은 작년 7월 한강의 ‘흰‘ 이후 15개월만이다.

드므는 궁궐의 전각 한쪽에 불을 끄기 위해 설치한 가마솥 모양의 물동이이다. 하지만 그릇을 직접 보면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주술을 위한 그릇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옛날 사람들은 화마(火魔)가 건물을 향해 날아들다가 드므 속 물에 비친 제 흉악한 얼굴을 보고 놀라 달아날 것이라 믿었다.

이런 정서는 월대란 말에도 나타난다. 궁궐의 주요 전각들을 떠받치는 섬돌인 월대는 월대(越臺)가 아닌 월대(月臺)이다. 달을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대라는 뜻이다. 물론 얼마 높지 않은 월대에 올라선들 달과의 거리에는 별 차이가 없다.

‘드므‘는 전 수록작들이 궁궐 또는 박물관, 능 등의 소품들을 매개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독특한 작품집이다. 책을 어느 정도 읽고 보니 해설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순수 감상을 위한 책과 자료 차원의 책이 따로 있지는 않다. 궁궐이나 박물관, 능의 소품들을 작중 주인공들이 어떻게 오브제들로 삼을까, 하는 궁금증이 책을 계속 읽게 하는 힘이 된다.

감상을 위해 읽는 책에서 자료를 건질 수 있고 자료를 위해 읽는 책에서 즐길 거리를 얻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드므‘로부터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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