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 여이연이론 29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정신분석세미나팀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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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의 두번째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첫 책인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이후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을 읽게 된 것이다. 여러 필자를 대표해 임옥희 교수는 페미니즘과 맑시즘, 정신분석학을 애증의 삼각관계로 정의했다.

 

임옥희 교수는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이 서로 협상하고 공모하면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런 반목과 갈등에서 페미니즘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살펴보려는 것이 책을 기획한 의도의 하나라 말한다.

 

책이 다룬 이론가들은 줄리엣 미첼, 캐롤 길리건, 멜라니 클라인, 제시카 벤자민,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주디스 버틀러 등이다. 줄리엣 미첼은 정신분석은 가부장제 사회를 위한 추천이 아니라 하나의 가부장제 사회의 분석이라는 말을 했다.(21 페이지)

 

미첼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고유하게 동일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미첼은 총체성과 보편성을 추구함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았다. 총체성과 보편성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남성지배질서가 주로 전유(專有)해온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미첼은 정신분석 아버지의 순종적이고 충실한 딸, 프로이트 추종자 등으로 분류, 비판받았다. 미첼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동기간(Sibling)'이 출간되면서이다. 미첼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강력한 주창자이다.(27 페이지)

 

미첼을 논한 필자(신주진)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서로 모순적이라 말한다. 자본주의가 시장체제를 중심으로 한다면 가부장제는 시장체제 바깥의 가족을 중심으로 구축되기 때문이고 자본주의가 근대적 생산양식이라면 가부장제는 근대 이전부터 유구하게 지속되어온 재생산기제이기 때문이다.(28 페이지)

 

신주진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모순적으로 맞물리는 지점에 여성억압과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미첼은 여성을 열등한 지위에 묶어두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전제라 말했다.(28 페이지) 미첼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상호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여성의 임무는 가족의 분해요소를 다른 방면으로 해소시키면서 가족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30 페이지)

 

미첼에 의하면 가족이란 하나의 단일체가 아닌, 전체 사회 경제 안에서 재생산과 아이의 사회화, 커플의 성욕이라는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변화해가는 살아있는 구조이다.(28 페이지) 여성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족 역시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이데올로기 기능이다.(29 페이지)

 

신주진은 미첼이 가부장제 사회를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핵심적 도구로서 정신분석학의 유용함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정신분석학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가부장제의 가장 뿌리 깊은 중핵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듯 하다고 말한다.(33 페이지)

 

미첼은 심리학적 의미로나 심지어 생물학적 의미로도 순수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결합으로서의 양성애 개념의 심리학적 중요성을 강조했다.(39 페이지) 미첼은 어니스트 존스나 카렌 호나이가 프로이트 이론을 남근중심주의, 남성 쇼비니즘 등으로 비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42 페이지)

 

존스나 호나이는 여성성에는 내적인 생물학적 기질이 있고 여성과 남성은 자연적으로 창조된다고 보았다. 반면 프로이트는 남성과 여성은 문화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43 페이지) 신주진은 이렇게 여성과 남성을 문화적으로 형성시키는 것이 바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라 말한다.(43 페이지)

 

미첼은 자본주의 경제의 전복과 정치적 도전이 그 자체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44 페이지) 많은 정신분석 페미니스트들이 남근중심주의적인 프로이트를 거부하면서 어머니 아이의 대상 관계를 중시하는 멜라니 클라인으로 넘어갔다면 미첼은 프로이트를 완전히 거부하지도, 클라인에게 결코 경도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양자를 넘어서고자 한다.(45, 46 페이지)

 

미첼은 아버지를 중시하건 어머니를 중시하건 이는 아이와 부모의 관계라는 수직적 재생산 차원만을 고려한 것이라 말하며 동기/ 또래의 수평적, 측면적 관계가 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의 틀에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을 가져왔다.(46 페이지)

 

신주진은 미첼이 인간의 자아심리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유아 성욕과 애증의 심리 구조는 단지 부모와 아이 또는 어머니 아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고 보는 셈이라 말한다.(48 페이지) 미첼은 동기 개념이 여성성 개념과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가부장제라는 수직적 패러다임이 남자편에서 이해되어 왔다면 동기관계는 남성의 거세에 대한 두려움과는 대조되는 여자이이와 연결된 두려움, 즉 소멸의 두려움,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된다.(49 페이지)

 

미첼은 어머니의 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미첼은 동일자들의 동등한 위치에 젠더를 배치한 것처럼 어머니를 아버지와 동등한 보편적 입법자의 위치에 올려놓고자 한다.(54 페이지) 확실히 미첼은 차이보다 동일성을 강조하는 이론가이다. 미첼은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어머니와 성관계를 갖는 것은 관련이 있지만 별도의 사건인 반면 동기간의 폭력과 성욕은 동일 인물에 대한 것으로 양자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보았다.(56 페이지)

 

신주진은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보다 동기 콤플렉스가 죽음충동과 연결된 성욕과 폭력의 상호연관성을 더욱 잘 표지하는 이유일 것이라 말한다. 미첼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의 가부장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58 페이지) 오랜 임상 기간을 거쳐 나온 동기간; 성과 폭력은 수평적이고 측면적인 관계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통찰을 제시한다.(59, 60 페이지)

 

캐롤 길리건은 여성은 왜 남성과 같은 평등한 시민(노동자)이 될 수 없는가?”란 물음과 달리 남성은 왜 여성과 같이 배려하는 시민(양육자)이 될 수 없는가?”란 물음을 던졌다. 중심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이 주목된다. 페미니스트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전투적이 되기보다 타협하고 공존을 추구하고 한다는 사실이 캐롤 길리건의 기쁨의 탄생에 잘 드러나 있다.(83 페이지)

 

기쁨의 탄생이후 10년이 지난 나온 저서가 저항에 합류하기이다. 길리건은 아이와 엄마 사이에 끼어 들어와서 관계를 파괴하는 위협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공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새로운 아버지의 역할에 환호한다.(88 페이지)

 

필자(임옥희)는 길리건이 지적하듯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들여다보고 자유, 용기를 가지고 정직하게 현실에 저항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고 말하며 그 점에서 길리건의 이론을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다 한 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결론짓는다.(95 페이지)

 

멜라니 클라인은 자신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동정신분석이 불가능하다는 프로이트와 달리 아이가 놀이를 통해 강박증, 갈등, 환상 등을 표현한다고 보고 최초로 놀이 치료를 아동정신분석에 도입,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법을 통해 아동정신분석의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98 페이지)

 

정신분석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주체 형성의 준거를 아버지로 설정하고 어머니를 배제하여 출계의 원리처럼 그를 그림자로 만들었다.(100 페이지) 클라인에게서 특징적인 점이자 프로이트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은 유아가 성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상이 (젖가슴을 가진) 어머니라는 사실이다.(102 페이지)

 

프로이트에서 유아는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등과 같은 발달 경로를 경유하지만 클라인에서는 편집 분열증 위치, 우울적 위치를 경유한다. 클라인은 프로이트가 사용한 단계라는 용어 대신 위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아이가 보이는 발달 과정이 단계적인 것이 아니라 선형성과 공시성을 동시에 가지는 병존과정으로 본 결과이다.

 

클라인에게 있어서 오이디푸스 과정은 프로이트에서 보듯 일반적인 대상 상실이 아니라 이유(離乳)와 관련된 경험에 기인하므로 어머니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오이디푸스 갈등은 편집 분열적 위치를 지나 우울적 위치가 확립됨으로써 생긴다. 클라인의 오이디푸스 단계는 시기적으로 매우 선행적이다.(109 페이지)

 

프로이트에서 오이디푸스 시기의 주요 드라마는 남근의 존재 유무이다. 클라인에서는 이유(離乳)가 관건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으로부터 분리를 요구받는 이유(離乳)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제3자인 아버지의 존재를 부상시키고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완벽한 합일을 깨뜨린다. 3자 구도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야기한다.(110 페이지)

 

클라인은 아이에게 남근은 소유의 대상이 아닌 구순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다.(112 페이지) 프로이트와 클라인에게서 오이디푸스 단계로의 이동을 견인하는 요인은 서로 상이하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단계로 이동한 이후의 발달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성의 해부학적 차이에 기반하며 그에 기초하여 선 분화를 이루게 된다.(113 페이지)

 

클라인과 프로이트의 유아는 서로 다른 출발과 발달 경로를 거치지만 최종적으로 오이디푸스 과정을 통해 성별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귀착점으로 수렴된다.(113 페이지) 클라인에게 남성성은 여성성의 억압의 결과 이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는 어머니와의 완전한 결별을 내포한다.

 

아이가 어머니와의 결별 즉 어머니라는 대상의 결핍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우울적 위치의 성공적인 통과를 의미한다. 어머니를 상실하고 떠나보내는 애도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새로운 주체의 토대이자 창조성의 원천이 된다.(114 페이지)

 

프로이트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정체성이 생물학적 몸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발달의 산물임을 이론으로 정초하여, 본질주의적 정체성을 해체하려는 페미니즘에 기여하고 친화성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남성의 우월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는 이유로 가부장적 인식틀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필자(이해진)는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와 영화 블랙 스완을 예시하며 좌절된 욕망을 자식을 통해 대리 실현하고자 그 꿈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어머니로 인해 분리는 지연되고 주체화가 방해받는 사례를 제시한다.(116 페이지)

 

분리를 거부하는 욕망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있다.(118 페이지) ‘피아노 치는 여자의 에리카와 어머니의 병리적 애착관계는 어머니의 소유욕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리카 역시 어머니의 욕망과 공명했다.

 

클라인에서는 모친 살해를 통해 주체가 완성된다. 통합된 대상이라 생각한 어머니를 독립된 외부 대상으로 인지하고 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공백을 통해 아이는 자아의 윤곽을 그리고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124 페이지)

 

필자는 박선영이 어머니는 환상 속에서 구성된 어머니이지 생물학적 어머니가 아니라는 이유로 크리스테바와 달리 클라인 이론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표하지만 환상 속에서 구성된 어머니가 실제의 어머니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 아님을 주지시킨다.

 

클라인의 모성은 희생하는 모성이 아니라 자식을 지배하고 집어삼키는 전능한 초자아의 모성권력이다.(127 페이지) 클라인을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어머니는 모성 신화에 대한 문화적 환상을 비틀어버린다.(128 페이지) 필자는 근대적 여성 교육이 시작된 지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상은 여전히 시민이기보다 어머니로 호명된다고 지적한다.(129 페이지)

 

어머니의 역할에 갇힌 여성들에게 자식은 좌절된 자아실현의 꿈을 이식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손쉬운 대상이다.(129 페이지) 제시카 벤자민은 페미니즘이 정신분석학을 폐기처분하면 여성의 주체, 젠더, 섹슈얼리티를 이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보았다.(135 페이지)

 

프로이트의 패러다임을 문제시한 페미니스트들은 오이디푸스 아버지 대신 전능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대상관계이론에서 출구를 찾았다. 프로이트의 패러다임이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다면 대상관계이론은 오이디푸스 단계 이전의 전() 오이디푸스 단계(아버지가 개입하기 이전 단계)에서 보여주는 엄마와 아이의 이자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137 페이지)

 

남자 아이가 거세 공포로 설명된다면 (이미 거세된) 여자 아이를 설명하는 것은 페니스(남아: 南兒) 선망이다. 그와 더불어 자신에게는 열등한 페니스(클리토리스)를 준 엄마를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욕망하게 된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페니스를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 아이라는 선물을 통해서이다.(139 페이지)

 

여자 아이는 엄마를 욕망하는 것은 동성애이므로 안 되고 아버지와 동일시하면 남성과의 동일시이므로 여성성을 획득하기가 힘들다.(140 페이지) 대상관계이론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전능한 엄마와 무기력한 아이라는 프레임에서 양자관계를 분석한다.(141 페이지)

 

제시카 벤자민을 다룬 장에서 필자(임옥희)는 프로이트의 분석임상을 거쳐간 많은 여성들이 후일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149 페이지) 프로이트는 좌절된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원형적인 이마고(imago)를 환자의 편에서 분석가에게 투사(投射)하는 것을 전이(轉移)로 개념화했다.

 

필자에 의하면 전이는 환자의 편에서 보여주는 강력한 무기다. 환자는 권위적인 분석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그의 권위에 도전한다. 환자들은 자기의 분노와 저항을 분석가에게 사랑의 감정으로 전이하면서 위장한다.(151 페이지)

 

한편 역전이로 인해 분석가도 정신분석의 풍경에서 중립적인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없다는 점을 노출시키게 된다.(152 페이지) 필자는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란 소설을 사도마조히즘 관계에서 상호인정을 통해 상호주체가 될 수 있는 사이 공간을 나타낸 작품으로 설명한다.(163 페이지)

 

제시카 벤자민에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정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이항대립적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했듯 제시카 벤자민이 성취한 것은 외부의 대타자를 설정함으로써 헤겔처럼 인정투쟁이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를 건 투쟁이 아니라 상호주체성과 상호인정의 가능성을 열어나간 데 있다.(165 페이지)

 

크리스테바를 다룬 장에서 필자(김남이)는 정신분석학이 성적 정체성이 생물학적 성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페미니즘 이론가들에게 해방의 영감을 주어왔다고 말한다.(170 페이지) 정신분석학은 각 주체의 성적 정체성은 생물학적인 것 뿐 아니라 정신심리적인 것에 의해 구성된다.

 

이런 주장은 몸과 마음의 철저한 이분법을 거부하면서도 그 두 항의 구조적 역학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전인적 개체이론을 전개하는 정신분석학은 몸을 주체이론에 끌어들여 감성/ 이성, 자연/ 문화, 질료/ 형상 등의 많은 이분법들을 해체함으로써 페미니즘 이론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170 페이지)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정체성의 근원은 성적인 것이며 최초로 발현되는 인간의 능동적인 정신 능력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 혐오, 수치, 질투 등의 감정이다.(171 페이지)

 

이런 장점이 있어서 정신분석학은 가부장적임에도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정신분석학은 가부장적 실체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의 전복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준다.(171 페이지) 라캉은 자아를 외부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아이가 최초로 자아를 인식하는 것은 거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174 페이지)

 

이처럼 외부에 놓인 자아로 인해 유아는 자신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파편화된 몸의 감각 즉 감각들의 혼돈 상태를 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이렇게 망각된 감각들은 의식 저편으로 물러나는데 그렇게 의식 저편으로 물러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그것이 실재(the real)이다.(174 페이지)

 

거울단계는 최초로 자아를 획득하는 단계인 동시에 최초로 타자를 인식하는 단계이다.(175 페이지) 최초로 타자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유아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경험한다. 내가 어머니에게 타자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어머니의 시선은 이미 상징적 기능을 하고 있다.(179 페이지)

 

다른 동물들처럼 태어나자마자 본능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주체가 된다. 크리스테바가 라캉에 동의하는 바는 주체는 자율적이고 의식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 의존적이고 무의식적 주체라는 것이다.(183 페이지)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라캉이 주체의 원형인 최초의 자아 형성의 계기를 거울 단계에 둔 것은 주체 형성 과정에서 어머니의 역할 즉 모성적 기능을 삭제하고 특히 그 기능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을 정신기능으로 환원한 것으로 보았다.(183 페이지)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에 대한 유아의 동일시와 부정은 거울 단계 이전에 이미 유아가 경험하는 것으로 보았다. 라캉이 부성적 기능에 두었던 금지와 분리를 크리스테바는 그보다 앞선 모성적 규제와 아브젝시옹에 두었다.(184 페이지)

 

크리스테바에게 말은 상징적 차원 뿐 아니라 기호적 차원에도 걸쳐있다. 명료한 문장과 명제가 상징계의 차원에 있다면 주체의 충동과 욕망의 표출은 기호계의 차원에 있다.(185 페이지) 우리가 하는 말은 고정되고 정체되어 있는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기호계적 특징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과 역동성을 갖는, 상징계와 기호계의 상호작용의 실천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상징계는 기호계의 도움 없이는 주체의 의미작용 과정이 불가능하다.(186 페이지) 마찬가지로 기호계가, 말하는 주체를 통해 표현되려면 상징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에게 상징계와 공존하고 있는 기호계는 언제나 충동이자 에너지의 과잉이기에 상징계로 포착되지 않는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호계가 항상 과잉이라는 사실은 상징계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기호계는 사실상 표현/ 분절하고 정지하는 상징계의 기능을 선취하는 기호의 기능을 이미 하고 있기에 기호계와 상징계는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배타적이지는 않다. 언어로 진입하기 전에 유아-주체는 기호적인 것으로 가득 찬 공간에 있다.(187 페이지)

 

크리스테바는 리듬(언어에 의해 의미되는 것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운동과 정지의 반복된 리듬)이 가득 찬 공간을 기호적 코라라 불렀다. 기호적 코라는 규제되는 만큼 움직임으로 가득한 운동성 안에서 충동과 충동의 정지에 의해 형성되는 비표현적 총체이다.

 

플라톤의 코라는 무정형의 수용적 공간이지만 크리스테바의 코라는 에너지로 충만한 동적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상징적 논리가 아닌 기호계의 특유한 논리에 따라 그 충동을 질서짓는 최초의 공간이다.(187 '페이지)

 

기호적 코라는 모성적 공간이다. 기호계는 거부를 고유의 속성으로 지닌다. 크리스테바가 설명하는 기호적 코라 즉 모성적 공간은 어머니와 유아 주체가 미분리된 합일의 공간이다.(188 페이지) 크리스테바는 자아에게 있어 물질적(육체적) 거부의 과정이 상징적 거부의 과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 또는 그 둘이 착종되어 있는 과도기적 행위를 아브젝시옹이라 불렀다.(189 페이지)

 

아브젝시옹은 판단과 정서, 비난과 동경, 기호와 충동의 혼합물이다. 아브젝트와 대상은 구분된다. 아브젝트가 거울단계 이전이라면 대상은 거울단계 이후이다. 아브젝트가 주체와 거리가 없다면 대상은 주체와 거리가 두어졌다. 아브젝트가 불안정하고 위협적이라면 대상은 안정적이다.

 

아브젝트가 정감적이고 무의식적이라면 대상은 논리적이고 의식적이다. 아브젝트가 불분명하고 모호하다면 대상은 분명하고 명확하다. 아브젝트가 상상적이고 기호적이라면 대상은 상징적이다.(192 페이지)

 

크리스테바에게 중요한 것은 아브젝트들이 혐오스러운 동시에 매혹적이라는 점이다. 아브젝트의 전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어머니의 몸이다. 출산시 아이에게 어머니의 몸은 다음을 살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할 전대상 즉 아브젝트이다.(193 페이지)

 

뤼스 이리가레를 다룬 장(‘정신분석을 분석하다‘)에서 필자(김남이)는 남/ , 섹스/ 젠더 등의 이분법 해체는 결국 본질적인 여성성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문제를 거론한다.

 

이리가레는 해체 담론 이후에 이르러 다른 길을 택했다. 이리가레 또한 포스트페미니즘의 해체 기획에 동의하면서도 해체 이후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해체 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적, 정치적으로 무책임하다고 주장한다.(208 페이지) 이리가레는 재현이나 규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재현이나 규범을 재생산하는 구조를 문제시했다.

 

이리가레는 지금까지의 문화, 과학, 철학 등의 상징적 질서는 단성(單性) 즉 남성동성애적이었다고 보았다.(209 페이지) 이리가레는 라캉의 상징계를 비판한다. 상상계가 이미 성차화되어 있고 기존의 성차화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210 페이지)

 

이리가레에게 몸과 육체성이란 개념은 구조화되고 각인되고 구성되며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몸이다.(214 페이지) 이리가레는 주체를 해체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주체성이 아니라, 촉각적인 것, 액체, 복수성, 차이 등을 배제하거나 억압하고, 시각적 단일함, 고체, 전체성, 하나임만을 고집하면서 동일자적 주체를 생산하는 지배적 담론 자체이다.(220 페이지)

 

이리가레가 정신분석학을 비판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정신분석학이 로고스중심주의라는 전통 철학들의 잔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그 둘의 구조적 역학을 주장하는 급진적 이론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 몸은 생물학적인 실체 또는 해부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정신의 구성에 관여하는 능동적인 기능으로 제시된다.(221 페이지) 정신분석학은 과도한 시각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프로이트는 남아의 경우 어머니와 남아 사이에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진입하고 여아의 경우 남아의 남근을 봄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진입한다고 보았다. 다만 여아는 이미 거세된 존재이므로 남아와 달리 위협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신체가 손상받았다는 느낌을 받으며 페니스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고 자신을 거세된 채 낳아준 어머니를 증오하게 된다.

 

이 선망으로 여아는 사랑 대상을 증오스러운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옮긴다. 그러나 이는 근친상간이므로 여아는 한 번 더 사랑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를 포기하고 방향을 전환하여 어머니를 다시 동일시해야 한다.

 

이때 동일시하는 어머니는 여성으로서의 어머니가 아닌 모성의 대리자로서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여아는 양성적인 리비도의 공격성과 능동성을 여성의 수동성으로 전환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정상적인 여성성의 발달 과정이라고 주장했다.(222, 223 페이지)

 

이리가레는 프로이트의 성차 이론에서 여성이 스스로 정의하는 여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25 페이지) 이리가레는 라캉이 페니스와 팔루스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229 페이지)

 

이리가레는 라캉의 거울(평면거울)과 다른 검시경을 제시한다. 상이 왜곡되고 여러 시점을 가지며 접촉해서 보아야 하는 이리가레의 검시경은 여성의 성적 특수성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비출 수 있는 거울로 여성이 자신의 특수성을 말하고 재현할 수 있는 도구이다.

 

이때 여성이 각기 보는 자신의 특수성은 시점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는 보편주체를 상정하는 팔루스 로고스 중심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차이를 지닌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다.(231 페이지)

 

이리가레가 보기에 몸은 완전히 자연적이지도 구성적이지도 않다. 그녀에게 몸은 외부로부터의 각인과 내부로부터의 충동 사이의 긴장이 항존하는 열린 장이다.(231 페이지) 조현준 교수는 주디스 버틀러를 다룬 장(’젠더 계보학’)에서 정신분석학이 여성의 욕망 연구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이 학문이 여성에게 호의적이거나 여성의 심리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238 페이지)

 

필자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거세공포로 인해 초자아에 진입해 문명 건설의 주역이 된) 남자와 달리 (이미 거세된) 여자는 애초부터 불안이나 공포를 일으킬 요인이 없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문명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보았다.(239 페이지)

 

남성은 자신의 거세위협을 일깨우는 여성을 보며 자신도 거세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문명적 주체가 되고 여성은 자신은 이미 거세된 존재라서 문명의 발전과 관련이 없고 거세되지 않은 완전한 존재를 평생 시기한다는 것이다.(240 페이지)

 

카렌 호나이는 일차적 여성성이나 페니스 선망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보다 하나의 방어기제 형성에 불과하다고 보았다.(240 페이지) 보봐르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남성의 근원적 우월성은 자연적이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추된 것이라 보았고 케이트 밀레트는 성이란 해부학적 양상이 아닌 정치적 양상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테바는 라캉이 주장하는 아버지의 법과 견고한 상징계의 설명체계가 간과한 어머니의 몸, 기호게의 코라가 갖는 혁명적 전복성을 타진했다.(241 페이지)

 

주디스 버틀러는 섹스는 언제나 젠더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다. 필자는 버틀러의 젠더 계보학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전체화된 주장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경계하지만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 동향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적이고자 한다고 말한다.(270 페이지)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은 남녀의 이분법에 기초해 남성은 억압자, 여성은 이억압자라는 구조 속에서 억압당해온 여성의 위상을 회복하려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노력이었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의 범주를 단일한 것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모든 여성을 피억압자로 규정하기도 어렵거니와 트랜스와 크로스 영역을 사는 주체를 여성 일반으로 범주화하기도 어렵다.(270 페이지)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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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 번째 시간에 장 선생님은 내가 어떤 연유로 정신분석을 공부하는지 궁금해 했다. 그래 내가 '다음 시간에 짧게 정신분석에 대해 이야기 할까요?‘라고 말하자 장 선생님은 기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첫 시간에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읽고 있다고 말한 것이 내가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사람이 된 발단일 것이다. 사실 공부랄 것도 없는 것은 나 혼자 좋아 느슨하고 비경제적으로 관련 책들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 분야의 책을 읽게 된 동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는데 딱히 왜 그 세계에 입문했는지 나로서도 확정짓기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호기심 때문이고 전이(轉移)나 역전이(逆轉移) 등의 개념에 막연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이 즉 착오(錯誤)가 진실에 이르는 길일 수 있다는 점도 역설적인 매력으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제시카 벤자민을 설명한 임옥희 교수에 의하면 전이는 환자가 보여주는 강력한 무기이다.

 

이성적이고 권위적인 분석가에 복수하고 싶은 환자가 분석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사랑의 전이를 통한 환자의 저항이다.(’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 149 페이지)

 

이런 새로운 앎이 좋다. 어떻든 지금의 내 입장에서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점은 정신분석 학파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이론을 만드는 고투를 거쳐야 학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멜라니 클라인, 줄리엣 미첼,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정신분석가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점 때문이다.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은 개인은 물론 사회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었고(’헬조선에는 정신분석‘ 204 페이지)

 

줄리엣 미첼은 부모 아이의 수직 관계가 아닌 동기간 관계의 중요성을 중점적으로 부각시켰고(’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 46 페이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을 전제로 한 분석에서만 분석받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 타자에 대한 욕망, 죽음을 포함한 성욕 등을 말할 수 있다고 본(’페미니즘과 정신분석‘ 213 페이지) 정신분석가이다.

 

물론 이 난삽한 설명을 쉽고 간결하게 만들어야 언제든 장 선생님에게 내 정신분석 공부의 동기를 책임감 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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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타자를 발명하는 과정이란 글이 눈길을 끈다. 임옥희 교수의 글(‘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 14 페이지)이다. 필자에 의하면 아이는 복수와 증오의 감정의 이면인 사랑의 감정과 더불어 자기 경계를 침범한다고 상상한 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타자라는 점을 인식하고 인정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능동적인 정신 능력인 이성은 사랑, 혐오, 수치, 질투 등의 감정 이후에 사후적으로 발명된다고 필자는 말한다..타자를 발명하는 과정인 '사랑'을 체득(體得)하는 데 실패한 사람은 이성을 갖출 수 없다는 말이 가능할 것이다.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을 산 것은 멜라니 클라인의 인상적인 사상을 더 알아보고 싶어서이다. 여러 필자가 참여한 이 책에서 이해진 필자는 클라인은 양육의 실제 책임자인 어머니를 조명함으로써 아버지를 주체 구성의 원리로 설정한 프로이트의 가부장성과 남근중심주의를 넘어섰고 정신분석과 페미니즘 사이의 새로운 관계 가능성을 열었다고 썼다.(126, 127 페이지)

 

하지만 클라인의 모성은 희생하는 모성이 아니라 자식을 지배하고 집어삼키는 전능한 초자아의 모성권력이다.(같은 책 127 페이지) 이지영 교수의 책에서 읽게 된 내용이지만 김영희 교수는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를 통해 한국의 구전 서사에 부친 살해 모티브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고 썼다.

 

반면 우리나라 서사에서 흔히 목격되는 것은 자식살해 모티브이다. 이 서사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법, 권위, 질서, 가치에 대한 순종과 헌신으로 귀결된다.(‘BTS 예술혁명’ 47 페이지) 일전에 서양 문학작품에서는 비극이 일반적이지만 동양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 차이가 뭘까? 부친살해 서사의 일반성과 비극의 일반성은 연관이 되는 것일까? 자식 살해 역시 비극인데...어려운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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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상징폭력이란 개념은 참으로 의미 있는 개념이다. 오독일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말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이 개념은 학계에서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인정받는 최고 학자의 학문적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이 치르는 진입의 고통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특정 저술을 통해 선학(先學)들과 대화 또는 대결하는 상징적 공간에 진입해 그 공간에서 필요로 하는 과제를 연구하고 시간과 경제력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또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선별적인 것이다.

 

오늘 또 한 권의 주역 책을 사며 나는 내가 주역 연구에 시간과 경제력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폭력을 자초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황홀한 글 감옥(조정래 작가의 표현)이란 말처럼 상징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의미로운 일이다.

 

오늘 산 주역 책의 추천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가지고 싶은 책들 중 꼭 한 권 밖에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기에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책을 까다롭게 골랐지만 지금은 거의 아무 책이나 사들고 들어오는 편이라는 글이다.

 

슬프지만 이 글에서 나는 내 젊은 시절을 보았다. 새 것이나 다름 없고 필독하지 않을 수 없는 알라딘의 좋은 중고 책들에 홀려 지난 3개월간 실제 구입액이 397천원에 이르렀다는 메일을 받았다.

 

책을 줄곧 좋아했지만 이렇듯 무분별하다 싶을 만큼 많은 책을 구입한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확정지을 것은 없다. 다만 (아직 장담하기가 꺼려지지만) 건강(위장) 문제가 해결된 것을 자축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싶다.

 

지금부터는 컨디션이 좋다고 책을 펑펑 사기보다 생각으로 짓는 내 집이 그럴 듯 해서, 거기에 화룡점정할 만 해 책을 펑펑 사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리라. 지출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지 못한 읽기가 안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사족처럼 달아야겠다. 자백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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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지금은 논쟁이 사라진 시대인 듯 하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계라면 인상비평, 끼리끼리 해먹는 카르텔 때문이지만 사회학계에서는 철저하지 못한 학문 자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만 교수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매우 시사적인 책으로 꼽을 만하다.

 

이 책에는 상징자본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이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용어이다. 그는 재산, 소득 등은 경제적 자본으로, 인맥 등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자본으로, 명예, 위신 등은 상징 자본으로 불렀다. 그는 문화 자본도 언급했는데 그의 분류에 의하면 지식, 교양, 기능, 취향, 감성 등은 체화된 문화자본이고 문화상품, 골동품, 예술품 등은 객체화된 문화자본이고 졸업장이나 학위, 자격증 등은 제도적 문화자본이다.

 

저자는 한국사회과학의 서구 종속적 재생산 구조를 비판한다. 저자는 우리가 서구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로벌 지식장에 직접 둘어가 상징 공간을 지배하는 서구 학자들과 부딪치고 논쟁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놓은 지식장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비판적 정신에 근거한 철저한 연구 및 사고(思考)가 학문에 필요한 것 중 하나임을 알게 된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출간 3년이 넘은 시점인 최근의 일이다. 저자의 철저한 논리에 통쾌함마저 느꼈는데 나는 저자에 의해 실명(實名) 비판을 받은 학자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기사를 찾으면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부분적 오류나 오해가 있겠지만 저자의 논지는 대체로 타당해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나는 실명 비판의 대상이 된 학자들이 참 안일(安逸)하고 불철저하게 사유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은 글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독자들은 자신의 논리에 이상함이 발견되면 거울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듯 저자의 책을 논리적 기준점으로 삼을 만하다. 저자의 날카로운 논리에 비판 대상자들은 여지 없이 어설른 좌충우돌의 논리를 보여준 학자, 생각이 잘못된 학자들이 되었다.

 

한 학자는 기의 소생, 기의 소진 등의 용어를 썼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과학적 용어 또는 설명이 될 수 없다. 학자들이 그럴진대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원전을 읽지 않고 공부하니 능률이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난해한 서구 이론가들의 논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 시간에 이론이나 이성적인 이야기가 아닌 정서나 느낌 차원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서구 학자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고 그 학자의 이론은 현학적 지식 놀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거나 현실적합성이 없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에게 푸코의 담론장이나 권력 또는 분류와 담론 구성체나 계보학 같은 강력한 이론적 자원이 있는가?라고.(93 페이지) 저자는 1900년대의 형평사 운동(백정들의 신분제 철폐 운동)을 분석할 때 서구 지식사회학 가령 카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의 중심 개념인 계급, 불평등, 지배, 이데올로기 등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적실성 문제를 떠나 어떤 문제를 한국 학자가 연구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개념적 자원이 없기 때문에 서양이론을 차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대안은 유교가 아니라 서구 사회과학 전통이라 본다. 설령 유교가 대안이라 해도 그것은 아주 비생산적인 대안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9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유교를 재해석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고 비용면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작업이다.(101 페이지) 저자는 묻는다. 이론이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라면 왜 토착이론이 필요한가?라고.(107 페이지) 저자는 각 나라마다 그에 적합한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전 역사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당대의 지적 관심 공간에서 살아남는 학파나 사유의 수는 항상 소수의 법칙을 따르는바 그 수는 적게는 셋이고 많게는 여섯이다.(109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이론이 무엇인지 답하지 못하면서 한국적 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만 난무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저자에 의하면 무질서한 자료(자료더미)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이론이다.(110 페이지) 무질서한 자료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은유(隱喩)이다.(112 페이지) 과학철학자들의 주장대로 이론이 일종의 은유라는 말은 연구대상의 세부적 경험 내용의 일부를 희생하더라도 은유를 매개로 낯설거나 추상적인 대상을 익숙하고 구체적인 대상으로 치환하는 이론적 이상화 과정을 함축한다.(113 페이지)

 

무엇이 선험적인지(당연한 것인지) 분석적인지는 맥락을 초월한 보편 기준이 아니라 주어진 이론틀에 따라 결정된다.(118 페이지) 그렇다면 인간 사회를 기본적으로 갈등(마르크스적 관점) 관계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조화(뒤르켐의 관점) 관계로 보아야 할까?

 

두 이론가는 이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선험적/ 분석적 답을 제시한다. 이론은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개념들의 유기적 연결망이다.(118 페이지) 망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은유이고 은유에 따라 망에 들어갈 개념들이 결정될 뿐 아니라 개념들의 관계도 결정된다.

 

상징폭력이란 물리적 폭력과 대비되는 말로 교육과정을 마치고 전문 사회학자가 되어서도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연구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123 페이지) 가령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문화연구도 부르디외의 기여를 모른 척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든 아니든 그의 유산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 나라 연구자들에게 상징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징폭력은 누구에게나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폭력은 장()의 환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가해진다. 상징공간(저술을 통해 대화하는 공간)에 진입해 장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내기물(내기에 건 돈: stake)이 연구할 가치가 있고 또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부르디외 용어로는 오인하는) 행위자에게만 가해진다.

 

장 내부에 일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해지지 않는 것이다. 상징폭력을 당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서구의 대다수 학자들이 당하는 것이 상징폭력이다. 지적 종속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127 페이지) 저자는 부르디외의 장이론은 한국 사회과학을 글로벌 지식장에 위치시켜 한국 사회과학의 민낯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고 미래를 조망하게 하는 매우 풍부한 적실성이 있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저자는 학술적으로 통제된 이론적 인식론적 논쟁을 요구하는 글로벌 지식장의 참여자가 되기보다 대중과 미디어의 시선을 끌 흥미 본위의 시사적인 작업을 하며 장외의 방관자로 남길 원했던 우리 학자들을 비판한다.(130 페이지) 저자는 네덜란드의 한 사회학자가 부르디외에게 한 질문과 부르디외가 한 답을 제시한다.

 

질문자가 당신 글은 왜 그토록 어렵고 난해하냐고 묻자 부르디외는 (자신이) 다루는 사회현상이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라 답했다.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그 답은 반만 맞는다고 말한다, 사회현상이 어렵고 복잡하기에 어려운 것이만 그가 상대한 수많은 학자들의 글이 일상세계와 유리된 학문장에서 오랜 세월 진화해온 상징 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131 페이지)

 

저자는 서구 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끈질긴 노력은 결국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순수한 학문연구를 무시하는 풍토에서 지식장의 자율성을 기대할 수 없고 그렇다 보니 지식장 밖에서 추대한 사회과학의 가짜 거장들이 판치는 난국이 형성되어 있다고 말한다.(134, 1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눈앞에서만 한국적 이론 구축을 주장하면서 뒤로는 이론과 실천의 경계 허물기에만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독창적 이론이 나올 가능성은 아예 없다. 지난 반세기 넘게 한국적 이론을 외쳐왔음에도 아무 결실을 거두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135 페이지) 저자는 담론과 해방’(2005년 출간)의 출간으로 글로벌 지식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 단계 상승시켰다는 안도감과 중압감을 함께 느꼈다고 말한다.

 

새로운 연구의 이정표를 만들고 곡괭이질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야 할 연구 방향을 재설정하고 책에서 한 주장을 더 확장하고 발전시켜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입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중압감이다.(209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 이후 중요한 사실을 전한다. 부르디외의 과학학과 성찰성을 세계적인 사회학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기든스도 부르디외도 상징자본이 보잘 것 없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한다.(247 페이지) 두 사람 모두 글로벌 지식장이 요구하는 수준의 학문적 하비투스를 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당시 글로벌 지식장을 지배하던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함으로써 점차 세계 최고의 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글로벌 지식장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사회과학자를 배출하려면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다른 나라의 학자들과 논쟁하고 경쟁하는 튼튼한 중간계층 학자들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247 페이지)

 

저자는 부르디외가 미국 사회학에 대항해서 글로벌 지식장의 지배구조를 바꾸기 위해 프랑스의 지적 자원(뒤르켐, 메를로퐁티)에만 매달리지 않았고 미국의 이론적 전통(고프먼과 가핑클)과 통계방법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결과 발생론적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체계를 정립하고 그 당시 이미 현대의 고전이랄 수 있는 수많은 경험연구를 양산했다고 말한다.(249 페이지)

 

1970년대 글로벌 지식장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부르디외가 장을 지배하는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적 사회과학을 부르짖는 국내학자들과 다르게 미국사회학과 단절했기 떄문이 아니라 미국 사회학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비판에 기초한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장의 지형을 바꾸려는 지속적이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경주(傾注)했기 떄문이다.(250 페이지)

 

이제 우리는 병적으로 집착했던 한국적인 그 무엇을 찾아헤매는 우회적이며 비생산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서구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 비판을 토대로 한 창의적인 이론을 무기로 글로벌 지식장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251 페이지) 필요한 것은 서구 이론들을 재생산하는 것도 배척하는 것도 아닌 비판이다.

 

저자의 책을 두루 공감하며 읽었다. 논쟁의 방식과 그 내용들을 익히려고 산 책이지만 논쟁거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의 주장을 반박할 학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저자가 비판한 최재천 교수의 통섭을 비판한 책(’통섭과 지적 사기‘)을 읽을 차례이다. ’통섭을 너무 비판 없이 읽은 지난 행적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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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4-20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에의 ‘구별짓기‘는
오늘날 양극화와 차별을 이해 할수 있는 중요한 저작이지요.물론 자본주의 를 용인하는 보수적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핵심을 찌른다고 봅니다.
부르디외는 훌륭한 사회학자예요. 사회참여 와 비판의식이 있는 실천적 지식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진보주의자가 있습니까? 잘난척 하면서 입으로만 진보를 외치는...프랑스의 지적 풍토가 부럽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4-20 20:57   좋아요 0 | URL
네. 부르디외가 프랑스 이론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미국 이론과 투쟁한 끝에 세계적인 이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풍토와 많이 다른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풍토가 부럽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