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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흔적 - 진화는 왜 사실인가
제리 코인 지음, 김명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꽤 진지하면서도 흥미롭고 유익한 진화생물학 책이다. 저자 제리 코인은 초파리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하는 진화생물학자다. 리처드 르원틴의 제자다. 부제는 ‘진화는 왜 사실인가‘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유전학, 고생물학, 지질학, 분자 생물학, 해부학, 발생학 등 현대의 여러 연구를 하나로 짜깁기할 것이라 말한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이 책은 10년전부터 서재에 꽂아두고서도 읽지 않았던 또는 못했던 책이다. 읽지 못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한 기독교인이 쓴 창조론과 지적설계론 등 반진화론 진영의 주장을 가차 없이 공격한 책에 소개된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상적이게도 진화론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는 허무주의자가 될 필요도 없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빼앗길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진화가 반드시 무신론을 진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책은 무신론, 하면 생각나는 리처드 도킨스 등과 생각의 결을 달리 한다.
대륙 이동설의 메커니즘이 판구조론이듯 진화의 메커니즘은 자연선택이다. 저자에 의하면 진화의 특성인 점진주의가 종이 늘 일정한 속도로 진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종도 진화적 압력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함에 따라 진화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종은 유전자를 교환하는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종이 분화한다는 것은 유전자를 교환하지 못하는 집단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진화, 하면 다윈을 빼놓을 수 없다. 다윈 이전에도 진화는 있었다. 다윈에게는 유전적 지식이 없었다. 다윈과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자연선택 이론을 같은 시기에 생각했다. 다윈은 선택의 개념을 상술하고 증거를 대고 여러 의미를 탐구했다. 월리스는 찰스 라이엘과 같이 진화 개념은 승인하면서도 자연 선택이 인간의 고차원적인 정신적 재능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믿지 않았다.(273 페이지)
인간의 고환 발생 프로그램은 어류와 가까웠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자연선택은 이처럼 완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을 개량한다.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진화적 변화는 거의 언제나 옛것을 새것으로 개조하는 과정이라 말한다.(89 페이지) 생물학자들은 진화를 인정했으면서도 그것의 원인이 다른 데 있을 것이라 생각하다가 한참 후 자연선택을 인정했다. 저자는 과학에서 이론은 사물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추론 그 이상이라 말한다.(41 페이지) 그것은 수많은 엄밀한 진술들의 집합이다.
생물학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석이라 할 수 있다. 화석 생성 과정은 단순 명쾌하지만 굉장히 특수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동식물의 유해가 물에 빠져 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하고 금세 침전물에 덮여야 한다. 유해가 묻히면 골격의 단단한 부분에 용해 미네랄이 침투한다. 또는 아예 미네랄이 그 자리를 대치한다. 결국 생물체의 주형(鑄型)만이 남고 계속 그 위에 쌓이는 침전물의 무게에 짓눌려 주형은 돌로 굳는다. 생명 역사에서 80 퍼센트가 넘는 기간은 모든 종이 부드러운 몸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화석은 끊임없는 지각 이동, 접힘, 열기 압력을 견디고 살아 남아야 하고 사람에게 발견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화석은 땅 속 깊숙이 있어 우리 손이 닿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초에 화석 기록을 순서대로 정렬한 사람은 진화론자가 아닌 창조론자인 지질학자들이었다. 어려운 점은 화석은 보존되지만 환경은 보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어떤 두 집단이 공통 선조에서 유래했음을 보여 주기 위해 반드시 그 공통 선조의 화석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한다.(67 페이지) 중요한 점은 그 화석이 지질학적으로 올바른 연대에 등장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같은 차원에서 우리와 유인원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가 발견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 말한다.(275 페이지)
저자는 많은 종들의 불완전한 설계는 전능한 설계자의 표시가 아니라 진화의 표시라 말한다.(93 페이지) 진화 이론은 흔적 기관의 속성에 아무런 기능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기능이 없어서 흔적 기관이 아니라 원래 진화의 목적이었던 그 기능을 더는 수행하지 않아서 흔적 기관이다. 인간의 꼬리뼈는 대표적 흔적 기관이다. 기능하지 않는 유전자를 유사 유전자라 한다. 인간의 유사 유전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GLO다. 거의 모든 포유류는 비타민 C 합성 경로를 가지고 있다. 모든 영장류의 선조가 비타민 C 생성 능력을 망가뜨리는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자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기니피그, 과일 박쥐 등이 비타민 C를 체내 합성하지 못한다. 인간도 그렇다.
인간의 GLO 유전자 서열은 침팬지와 굉장히 비슷하고 오랑우탄과는 차이가 있다. 기니피그의 서열은 영장류와는 전혀 다르다. 먼 친척끼리보다 가까운 친척끼리 DNA 서열이 더 비슷하다. 인간은 다른 종의 죽은 유전자도 품고 있다. 바이러스가 그것이다. 내생성 레트로 바이러스는 자신의 게놈을 복사한 뒤 숙주종의 DNA에 끼워넣는다. 바이러스가 정자나 난자를 만드는 세포를 감염시키면 미래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다. 인간의 게놈에는 그런 바이러스가 수천 개 존재한다. 대부분 돌연변이로 무해하게 변했다. 이는 고대에 우리 선조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흔적이다. 일부는 인간과 침팬지의 염색체에서 정확하게 같은 위치에 존재한다. 만일 바이러스가 두 종에 독자적으로 삽입되었다면 정확히 같은 위치에 끼어들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공통 선조를 강하게 암시하는 증거다.
우연성과 법칙성의 독특한 상호 작용을 파악하지 않고는 진화를 이해할 수 없다.(161 페이지) 우연성은 중요하다. 동식물의 확산은 바람, 해류, 이주 기회 같은 예측불허의 변덕스러움에 달렸다. 하지만 법칙성도 있다. 진화 이론이 예측하는 바 새롭고 텅 빈 서식지에 도착한 동식물은 그곳에서 진화하며 번성할 것이고 새로운 종을 형성할 것이고 빈 생태 지위(Niche)를 메울 것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적응이 이루어지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시작 집단에 변이가 존재하기. 둘째, 변이의 일부는 유전자 변이에서 기인하기. 셋째, 유전적 변이 때문에 개체의 후손을 남길 확률이 바뀌기 등이다.
유전적 변이는 돌연변이에 의해 생긴다. 이는 DNA 서열이 우연히 바뀌는 것으로 보통 세포 분열 도중 DNA 복사에서 실수가 생겨 일어난다.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이다. 무작위적이란 개체에게 주는 유용성과 무관하다는 의미다. 진화에서 모든 것은 우연히 벌어진다는 생각은 틀렸다. 진화가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만으로 굴러간다면 종들은 금세 퇴화하여 멸종할 것이다.(174 페이지) 우연만으로 개체의 경이로운 적응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자연선택은 명백히 무작위적이지 않다. 자연선택은 강력한 형성력이다. 다른 유전자에 비해 전수될 가능성이 높은 유전자만을 축적함으로써 개체가 환경에 더 잘 대응하도록 만들어준다.
생물체의 적응 메커니즘은 돌연변이와 선택 - 우연성과 법칙성 - 의 독특한 조합에서 읽어낼 수 있다.(174 페이지) 자연선택이 진화의 유일한 과정은 아니다.(178 페이지) 진화의 한 종류인 유전자 부동(浮動)은 유전자 빈도가 무작위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유전자 부동은 어떤 속성이 보유자에게 유용한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대립 유전자의 빈도를 바꾼다. 선택은 늘 해로운 대립 유전자를 없애고 이로운 대립 유전자의 빈도를 높인다.(179 페이지)
종 분화가 없다면 생물 다양성도 없다. 스티븐 핑커는 '언어 본능'에서 언어와 종(種) 분화의 놀라운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 논했다. 지리적 종 분화 이론은 지리적 격리가 종의 기원의 첫 단계라는 생각을 말한다. 격리된 상황이 아닐 경우 집단들을 다른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선택의 힘이 그와는 달리 개체들을 계속 만나게 하여 유전자를 섞는 상호 교배의 힘과 맞서야 한다. 격리를 추동하는 힘과, 만남을 계속 하게 하는 힘은 중력과, 별의 복사압의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제리 코인에 의하면 지리적 격리는 흔하다. 산맥이 솟고 빙하가 확산하고 사막이 생기고 대륙이 움직이고 한 덩어리였던 숲이 가뭄 때문에 둘로 나뉘고 그 사이에 초원이 생긴다.
저자는 생물학자들이 종의 형성 과정을 발견하는 방법은 천문학자들이 별의 진화 과정을 발견하는 방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두 과정은 너무도 느리다. 창조론자들은 우리가 생애 내에 종이 진화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다면 종 분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우리가 하나의 벌이 완전한 생애 주기를 다 겪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별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주장 또는 우리가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으니 언어는 진화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다름 없다.(259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인간은 다른 유인원들에서 유래한 유인원이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촌은 침팬지이고 우리의 선조와 침팬지의 선조는 수백만년전(7백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갈라졌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는 우리의 인간성을 훼손하기는커녕 만족과 감탄을 안겨주어야 마땅하다.(270 페이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 명명한 뒤 해부학적 유사성에 근거해 원숭이 유인원과 한데 묶은 사람이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린네다. 인간은 현대 유인원의 진화에서 홀로 튀어나온 외톨이다.(276 페이지) 다른 유인원들은 사람을 닮기보다 자기들끼리 더 닮았다. 최근의 화석으로 넘어올수록 사람의 속성을 조금 가지고 있던 선조는 뇌는 상대적으로 더 커지고 송곳니는 더 작아지고 치열은 직사각형에서 자세는 점점 직립해야 한다. 화석은 실제로 그런 패턴을 보여준다.
인간 선조가 침팬지와 갈라져 나온 뒤 사람쪽 계통수에 존재했던 모든 종을 호미닌이라 한다.(278 페이지) 호미닌 중 가장 유명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일명 루시)는 20에서 30세 사이의 키 1미터, 몸무게 27kg 정도의 여성이다. 라에톨리 발자국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발자국으로 루시의 친족이 낸 발자국이다.(283 페이지) 루시의 발자국은 320만년전 것, 루시의 친족이 낸 라에톨리 발자국은 360만년전 것이다. 루시는 반(半) 포물선 치열과 작아진 송곳니로 유명하다. 루시는 목 위로는 유인원이고, 몸통 중간은 유인원과 호미닌의 특성이 섞여 있고 허리 아래로는 거의 현대 인류다.
큰 뇌가 진화한 후 직립한 것이 아니라 직립한 후 큰 뇌가 진화했다. 허리 아래가 현대 인류와 거의 같다는 말은 넙다리뼈가 골반에서 내려오다가 서로를 향해 굽어 있는 데서 나온 말이다.(282 페이지) 화석을 이 이름으로 부르느냐 저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뇌 크기에 따라 나뉜다. 600 세제곱 센티미터가 기준으로 크면 호모, 작으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부른다.(286 페이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루돌펜시스는 뇌 크기가 중간이어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호모라고 불러야 할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불러야 할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도구를 쓴 첫 인간은 호모 하빌리스였다. 호모 하빌리스란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란 의미다. 이들 가운데 어떤 뇌 주형에서는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에 해당하는 부위가 부풀어 오른 것이 확인되어 이들이 말을 한 첫 인류가 아닌가 하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호모 하빌리스의 하나인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는 별명이 호두까기 사람이고 110만년전에 멸종했고 자손을 남기지 않았다. 파란트로푸스 로보스투스, 파란트로푸스 아이티오피쿠스도 호모 하빌리스에 속한다. 호모 하빌리스는 호모 에르가스터,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렉투스 등 다른 호모속 종들과 공존했을지도 모른다.
호모 에렉투스는 150만년전쯤 생존했고 30만년전부터 화석기록에서 사라졌다. 아종(亞種)은 서로 구별되지만 교배가 가능한 집단을 말한다. 약 6만년전에 모든 호모 에렉투스 개체군이 갑자기 사라졌고 해부학적으로 현대 호모 사피엔스 화석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상의 모든 호미닌을 떼밀어 냈다.(289 페이지)
저자는 인간의 진화 방식에 수수께끼가 있다고 해서 인간이 진화했다는 엄연한 사실까지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설령 화석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비교 해부학. 발생학, 흔적 기관, 생물 지리학이 제공하는 인류 진화의 증거들이 있다. 저자는 사람 게놈에는 단백질 생산 유전자가 25,000개쯤 있으나 그 중 20,000개 이상이 침팬지와 서열이 다르다는 말을 한다. 사람과 침팬지는 해부 구조는 물론 생리작용, 행동, 언어, 뇌 크기와 구조도 다르다, 우리가 영장류 사촌들과 유전적으로 닮긴 했지만 그래도 유인원을 닮은 선조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상당한 유전적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296 페이지)
어느 한 유전자로 좁혀서 그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사람/ 침팬지의 차이를 생성했다고 증명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어떤 유전자가 사람/ 침팬지 차이를 일으킨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려면 그 유전자를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옮겨 어떤 차이가 빚어지는지 관찰해야 하는데 누구도 그런 실험은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제리 코인의 스승인 리처드 르원틴의 생각을 읽게 된다.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우리 스스로를 진화의 끈에 묶여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321 페이지)
저자는 유전자는 운명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도 새상에는 이기주의, 부도덕, 부정이 판을 친다. 그러나 친절하고 이타적인 행동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양쪽 모두에 진화적 유산에 해당하는 요소가 담겨 있겠으나 이런 행동들은 대체로 선택의 문제이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다.(322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어떤 유전적 유산을 물려받았든 그것은 우리를 짐승다운 선조의 방식에 영원히 가둬두는 구속복이 아니라 말한다. 진화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줄뿐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323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진화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 진행형의 작품이란 말을 한다. 진화는 과학적 사실이다.(311 페이지) 진화의 허위성을 입증할 가능성이 있는 관찰도 무수히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런 것은 실제로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312 페이지) 선캄브리아 암석에서 포유류가 발견된 일은 없고 사람과 공룡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 일은 없으며 진화적 순서에서 어긋난 화석이 하나라도 발견된 일은 없다. 물론 진화생물학에는 의문과 논쟁이 북적거린다. 진지한 생물학자들은 진화 이론의 주요 요점들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다. 진화의 세부 방식이나 다양한 진화 메커니즘들의 상대적 역할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을뿐이다.(313 페이지)
저자는 요즘은 심리학자, 생물학자, 철학자 사이에 인간의 모든 행동을 다윈주의로 설명하려는 심란한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한다.(317 페이지) 다른 동물들의 상황을 확장하여 우리에게 적용할 때는 무척 조심해야 한다. 남성은 여성을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몸집이 커진 것이 아니라 노동 분업 때문에 그렇게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진화적 적응 환경에서 아마도 남자들은 사냥을 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며 식량을 채집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사냥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가설과 다른 방향의 진술이다.
우리 섹슈얼리티의 모든 측면을 진화로 설명하려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 곡해를 낳는다. 책의 끝부분에 중요한 철학적 통찰이 제기된다. 즉 진화가 목적 없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사실이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323 페이지)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든 세속적 철학을 통해서든 삶의 목적, 의미, 도덕을 만들어 간다. 진화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진화는 존재할뿐이다. 우리는 방대한 진화 계통수에서 하나의 잔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주 특별한 동물이다.
우리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헤아릴 만큼 복잡한 뇌를 자연 선택에 의해 갖게 된 유일한 생물이다.(325 페이지) 이 구절이 책의 대단원(大團圓)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의 결말에서 선보인 글과 결이 아주 다른 듯 공명하는 글이다. “옛날의 결속은 깨어졌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그가 이 우주 속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궁리 출판사 출간 자크 모노 지음 ’우연과 필연‘ 257 페이지)
자크 모노의 결론은 차갑지 않다. ’지울 수 없는 흔적‘의 저자 제리 코인은 “진화에서 모든 것은 우연히 벌어진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화가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만으로 굴러간다면 종들은 금세 퇴화하여 멸종할 것이다. 우연만으로 개체의 경이로운 적응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지울 수 없는 흔적‘은 저자 제리 코인의 스승인 리처드 르원틴의 ’DNA 독트린‘을 읽은 지 10여년만에 읽은 책이다. 2008년 출간된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에서 접하고도 기억하지 못한 코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2008년은 우리나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번역되기 전이다. 그래서인지 ‘다윈의 식탁’에 나오는 다른 대화자들의 책들은 원서까지 소개되었지만 제리 코인의 ‘Why Evolution is True’(‘지울 수 없는 흔적’의 원서)은 소개되지 않았다.
코인이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출간 연도를 보니 ‘다윈의 식탁‘이 나왔을 때 코인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은 출간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윈의 식탁’을 읽은 후 어떤 경로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구입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연도를 보니 코인은 1949년생으로 올해 75세다. 우리나라에는 ‘Why Evolution is True’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 이전에 ‘Speciation’(2004년), 이후에 ‘Faith Versus Fact’(2015년)가 출간되었다. 이제 두 책 가운데 한 권이라도 번역되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