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만들어내는 수 없이 많은 갈등과 불협화음 등을 보며 중성미자(뉴트리노)를 떠올린다. 레너드 서스킨드가 거의 보이지 않는 입자라 표현한 중성미자는 수광년의 두께에 해당하는 납을 궤도를 휘게 함 없이 통과할 수 있으나 완전히 무(無)가 아닌 입자(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우주의 풍경’ 9, 87 페이지)다.

 

그들은 약한 핵력이라는 밋밋한 이름의 상호작용만 하며(리사 랜들 지음 ‘천국의 문들 두드리며’ 177 페이지) 양성자 지름의 1/ 1,000 정도의 엄청나게 짧은 영역에서만 작용한다.(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우주의 풍경’ 289 페이지)

 

그들은 아주 미미(微微)한 존재여서 1백억 개가 우리 몸을 통과해가도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게 하지만 태양이 빛을 내게 하는 수소핵융합 반응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김제완 지음 ‘겨우 존재하는 것들’ 22 페이지) 우리가 뉴트리노 같은 존재 양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우리에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는 있다. 우리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며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당위를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디뎌야 할 첫 걸음은 아집과 어리석음에 빠진 실존의 부끄러움을 바로 보고 고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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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가을 입사 2년차인 30세의 A씨가 과로로 인한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고인의 아버지는 좋지도 않은 회사를 그만두게 하지 못한 것을 오열로 토로했고요.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 그래"가 안 되는 이유'란 책이 바로 그런 문제를 다루었지요. A씨는 너무 너무 힘들게 공부 또는 준비해 입사했기에, 2인분의 일을 도맡아 하느라 야근을 밥먹듯 한 열악하고 가혹한 노동조건을 견뎌온 2년간의 시간이 아까워 제 발로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라 보여요.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을 추슬러야겠지요? 스콜라철학/ 스쿨(학교 또는 학파) 등의 단어에서 비롯된 여가라는 말을 보며 저는 요즘 몇 차례 따라나선 투어 답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한 줄의 글도 읽지 못한 제 현주소(저질체력)가 여가가 없으면 공부도 없는 현실을 증거한다고 생각합니다. 잠 없이는 의식도 없고 기억도 없다는 것과 차원이 같은 말이지요. 내일은 좋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죽을 만큼~'이란 책을 언급한 것은 제가 죽을 만큼 힘들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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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滿月)의 반대어는 휴월(虧月)이다. 이지러진 달이란 뜻이다. 절의염퇴(節義廉退) 전패비휴(顚沛匪虧)란 말을 떠올린다. 곤경에 처했을 때에라도 절개와 의리, 염치와 바른 물러남의 덕목을 어그러뜨려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요즘 이 말 만큼 의미심장하게 여겨지는 말은 없다. 휴월은 때가 되면 만월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어긋난 관계는 돌이키기 어렵다. 아름다운 인연을 지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만남을 이어가는 분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를 먼저 보는 욕심을 경계하고 우리를 우선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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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경기도 연천이 초토화되었지요. 이런 곳은 직선 도로가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없어져 1차원(직선)의 새 도로를 만들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초토화(焦土化)의 초(焦)는 불에 타는 것, 그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수해를 당한 곳도 초토화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장의 묘(妙)를 샘물의 따뜻함, 불의 차가움, 돌의 결록, 쇠의 지남철과 같다고 본 동계(東谿) 조귀명(趙龜命; 1693 - 1737) 이상의 수사법인가 할 수 있겠지만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단어를 쓰는 것이라 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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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사의 사유 - 장자와 철학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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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소요유(逍遙遊)가 말해진 시대는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삶의 기본 틀이었던 전국(戰國)시대였다. 법가적 세계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는 세계였다. 춘추시대의 그 많던 나라들이 하나둘 사라져 일곱 나라만이 남은 전국시대는 학파들의 시대였고 다양한 학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구축에 있어 특히 글쓰기의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했다.

 

소요유는 낭만적인 느낌보다 처절한 느낌 또는 저항적인 분위기로 다가온다. 장자의 사유는 삶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고투를 담고 있는 철학이다. 저자에 의하면 플라톤이 einai(~이다)와 dokei(~처럼 보인다)를 명확히 구분했거니와 철학의 역사는 einai를 찾아 헤맨 역사다. 장자의 사유는 화(化)의 사유로서 왜소화된 삶에서 탈주해 대붕이 되는 철학인 동시에 왜곡된 작위(作爲)에서 탈주해 자연(自然)으로 회귀하는 철학이다.

 

장자의 상대로 혜시(惠施) 또는 혜자(惠子)가 있다. 명가철학자이다. 언어에 대한 관심을 철학적으로 가장 멀리 밀고 나간 학파가 명가(名家)다. 명가철학자들은 처음으로 눈뜬 이 언어라는 것의 매력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때로 궤변이라 불리기까지 할 정도의 언어철학적 사변을 펼쳤다. 아쉬운 것은 이들이 언어에 대한 흥미로운 사변으로 나아가기만 했을뿐 현실로 다시 돌아와 뚜렷한 실천철학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철학은 아나바시스(상승)와 카타바시스(하강)의 오르내림을 통해 완성되거니와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카타바시스가 없었다. 저자는 지상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꿈속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시를 쓰고 궁극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은 형이상학을 한다며 우리에게 고향이 세 곳이나 있으니(갈 곳이 많아) 좋지 않은가, 말한다.

 

장자의 사유는 주체가 세계를 구성해내는 주체중심적인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주체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놓아버리는 사유다. 장자가 추구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앎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앎의 한계가 드러나고 그것이 비워질 때 돌연 나타난다.

 

장자가 추구하는 앎은 사물들의 세세한 이치를 알려고 하는 째째한 앎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의미 전체를 통관(通觀)하려는 너그러운/ 넉넉한 앎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는 세세한 이치들을 늘어놓는 수다스러운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 전체를 전하는 담박한 언어다. 장자의 파라 독사의 사유는 이율배반이 아니라 역설에 더 가깝다. 장자의 도추(道樞) 개념을 보자. 도추는 도가 이지러져 존재론적 분절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지도리는 문의 여닫음을 가능하게 한다. 문의 이쪽과 저쪽에 상반된 것들이 존재한다. 지도리에 서는 것은 문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도추는 유(有)와 유(有)의 가운데에 있는 무(無)이다. 이 무는 없음이기보다 아무것도 아님이다. 이 지도리에 섰을 때 무엇임들의 상대성이 보이고 그것들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다. 어떤 능선도 아닌 산의 정상(문제)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산의 여러 능선들(’해; 解‘들)을 함께 볼 수 있다.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도추(道樞)란 사물의 상대적인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대립을 넘어선 절대적인 도(道)의 경지를 말한다. 도추는 양행(兩行)과 통한다. 성인은 시비의 다툼을 가라앉히고 하늘의 가지런함에서 편히 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장자가 말하는 도(道)란 드러나는 것도 숨는 것도 아닌 은은한 빛남 즉 골의지요(滑疑之燿)이고, 도를 집요하게 사유할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도의 오묘함이다.

 

도는 지식으로써 끝내 소진할 수 없는 하늘곳간(천부; 天府)이고 보광(?光; 가려진 빛)이다. 장자는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면서 도/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환원론적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도를 품고 있는 사람은 빛을 함부로 직접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그 빛을 감춘다.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을 보라.

 

도의 경지에 설 때 어느 주관성이나 상대성에 머물지 않고 그 주관성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나이기 때문에 지도리에 서지 못하고 이미 나에게로 기울어진 입장을 갖는다. 도의 세계는 이 차이가 무화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로 향하려면 결국 나와 타인 사이의 도추에 서서 해들이 아니라 문제를 보아야 한다. 장자의 사유는 파라 독사의 사유다.

 

그것은 특정한 독사에 고착된 사유들을 해체하고자 하며 그러면서도 상대성에 만족하기보다 그것들을 보듬는 파라 독사의 차원을 응시한다. 때문에 그의 사유는 독사들이 갈라지는 지도리 나아가 현실성과 가능성이 갈라지는 지도리에 서서 사유하는 도추, 양행의 사유다. 장자는 안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고 공자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하려고 했다.

 

장자가 볼 때 공자는 안타깝고도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유가 철학이 중시하는 것이 인정(人情)이고 도가 철학이 극복하려는 것이 인정이다. 유교는 위타(爲他)의 철학, 장자의 사유는 위기(爲己)의 철학이다. 배움을 폄하해서도 안 되고 깨달음을 신비화해서도 안 된다.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장자의 원래 생각이지만 그런 자연이 이미 왜곡되어 왜소화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날아오르라고 하는 것이다. 도는 초월자, 절대자가 아니다. 삶속에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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