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 설명서에서 만난 바 있는 헤세를 조울증 책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 언급한 주역 설명서는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소개했는데 상론(詳論)에는 헤세가 표현한 유리알 유희의 저술 동기를 소개한 이런 글이 있다.

 

“..흐르는 것 가운데 있는 확고부동한 것을 표현하는, 이어져 내려오는 것과 정신적인 삶 자체의 지속적인 일관성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다시 구체화시키자는 것이었다..”(맹난자 지음 주역에게 길을 묻다’ 256 페이지)

 

()이란 쉽다는 뜻 외에 변화와 불변을 함께 의미한다. 불변(하는 것)이란 법칙성즉 변화를 지배하는 이치(理致)나 이법(理法)을 의미한다. 현상 자체는 쉼 없이 변화하지만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성은 변하지 않는다.(이정우 지음 접힘과 펼쳐짐’ 269, 270 페이지)

 

이상한 것은 조울증 설명서에서 헤세가 우울증 환자였다는 말로 설명되고 있는 점이다. 헤세는 젊은 시절부터 정신병적 고통을 경험한 작가로 시, 음악, 그림 등으로 고통을 이겨내려고 했다.(박원명 외 조울병으로의 여행’ 120 페이지)

 

지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읽고 있다. 헤세가 우울증을 이기기 위해 쓴 것이라 해도 그렇지 않다 해도 모두 가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그(프란치스코)를 높이 기렸던 예술가들에게 그는 구원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헤세의 결어(結語)가 눈에 띈다.

 

생각해 보니(!) 가을이다. 우울감을 느끼기 쉽고 풍요롭기도 한 모순의 계절 가을을 즐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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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시작한 지 5년이 지났다. 모순 같지만 친숙함과 생소함이 함께 느껴지는 곳, 예상 밖의 성취와 기대하지 못한 무반응 등으로 감정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는 곳이 페이스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앞으로 5년이 더 지나 페이스북 개설 10년이 되어도 이런 결론에서 더 나아간 구체성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페이스북을 계획에 맞춰 사용한다고 말하면 너무 진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페이스북을 활용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생각하면 나의 무계획성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치게 궁궐 해설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반성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놀라운 필력을 보이는 분들이 수없이 포진해 있는 이 페이스북에서 최근 내가 안 사실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유명인들도 좋아요에 의미를 두고 그에 맞춰 페삭, 페차 등을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 같은 무명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단한 분들까지도 좋아요에 의미를 둘 수 밖에 없는 곳이 페이스북이란 생각을 한다. 최근 나는 나에게 친구신청을 해놓고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유명인을 페삭했었다. 그러자 그 유명인은 마치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기라도 하는지 친구신청을 다시 했다. 그렇게 곧바로 친구신청을 다시 할 것인데, 그리고 친구 수에 의미를 둘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는 것을 보면서 내가 갖는 감정은 의아함이다.

 

베토벤이 카바티나의 악보에 이런 글귀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천왕성에 있는 사람들이 내 음악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이 나를 어찌 알까?" 베토벤의 천재성을 생각하면 그가 남긴 구절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천재성이 전혀 없는 나도 그리고 천재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사람들도 베토벤이 천왕성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 것 이상으로 타인들을 의식할 것이다.

 

베토벤은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가상의 사람들을 생각했지만 페부커들은 함께 하는 존재들이기에 그런 의식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일 수 밖에 없다. 페친들은 나를 의식하는지, 한다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을 의식하기에 그들은 내 글의 방향과 수준을 결정하게 하는 페이스메이커 같은 분들이다. 물론 적극 호응하고 댓글 달고 좋은 글로 내게 다가오는 분들은 스승 같은 분들이다.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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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10-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이스북 가입은 작년 06월에 했지만, 본격적 페이스북 활동은 올해 08월~09월부터 했어요. 제 경우, 알라딘과 비교해 페이스북이 소통과 반응 측면에서 (지금까지는) 더 나은 느낌입니다. 논쟁과 토론이 훨씬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저도 페삭과 페차를 두 차례 당했습니다. 아니 자초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둘 다 번역과 관련된 (상대방 분과는 약간 다른) 제 의견을 올렸다가 그렇게 된 것인데요. 한동안 충격 먹고 솔까 원망도 하고 반성도 했더랬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님 알라딘 블로그(http://blog.aladin.co.kr/763054172)는 가끔 찾아와서 댓글도 남깁니다만, 페이스북(www.facebook.com/anuloma01)은 거의 찾아가본 적이 없어 서먹서먹한 느낌이네요. 제가 관심 있는 게 마음·의식·감정·자유의지·인공지능·로봇·특이점·인지과학·뇌과학·신경과학·마음철학·창발 등등 이렇게 한정적이다 보니까 벤투의스케치북 님 페북에 찾아가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알라딘과 페이스북 둘 다 장단점이 있더라고요. 웹 디자인, 각종 서비스 기능, 공유 기능, 통계, 연결(링크) 기능, 댓글 체계, 알림 기능 등등 측면에서 장단점을 나눠가지고 있다고 보는데요. 아무래도 알라딘이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알라딘은 북플과 블로그로 이원화돼 있어서 뭔가 자원과 화력이 분산·약화되고 회원들한테도 시간적·심리적 손실을 (본의 아니게) 끼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점 어떻게 정리 혹은 수정증보식 통합이 되면 좋을 듯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차피 우리 모두는 저 잘난 멋에 사는 것이죠. 우리 모두는 이걸 먼저 자각해야 될 것 같아요. 이걸 먼저 깨달아야 ‘남’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내’가 세상에서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란 것이죠. 제 생각엔 이걸 깊이 자각하지 못하면 남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나와 남은 ‘ㅁ’ 하나 차이인데 둘의 관계를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

벤투의스케치북 2017-10-24 20:16   좋아요 1 | URL
네.,감사합니다, 상세한 글 잘 읽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오래 생각해 보아야 할 글이라 생각합니다. 블로그(또는 알라딘 서재)와 페이스북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페이스북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친구도 늘고 팔로우도 생기고 적응이 되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qualia님의 넓고 깊은 관심은 부럽고 놀랍습니다. 참고 거리를 주셔서 참 좋습니다.. 건필(健筆) 바랍니다. 건강도 물론이고요..
 
창경궁 실록으로 읽다 실록으로 읽는 우리 문화재 3
최동군 지음 / 도서출판 담디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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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성종이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 비), 작은 어머니 안순왕후 한씨(예종 비),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의경세자 비) 등 세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세종이 자신에게 양위(讓位)한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낙선재 가까운 곳에 지은 수강궁을 리모델링해 지은 이 궁궐은 다른 궁궐들과 달리 왕이 아닌 대비를 위해 지은 동향의 궁궐이다.

창경궁이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음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왕의 빈전(殯殿)은 창덕궁에, 왕비의 빈전은 창경궁에 세우는 전통이 있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85 페이지) 창경궁은 다른 궁궐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정전에 이르기까지 세 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 다른 궁궐들과 달리 창경궁은 두 개의 문을 거치게 되어 있는 궁궐이다.

성종이 창덕궁에 대비전을 새로 짓지 않고 궁궐을 새로 지은 것은 건물의 주인공들이 세 분이었는데다가 단독으로 지어지지 않는 궁궐 건축의 특성 때문이었다. 건축물의 주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부속 건물도 함께 지어야 했다는 의미이다.

최동군의 '창경궁 실록으로 읽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창경궁의 기록들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선별, 정리한 책이다. 창경궁은 오랜 세월 창경원으로 불렸었다. 순종 4년인 1914년 4월 26일의 일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물러난 고종을 이어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로 창덕궁에 붙어 있던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그곳을 동, 식물원으로 만들고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이름이 정상 환원된 것은 1983년이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그런데 원래 홍화문은 한양도성의 8대문 중 하나였다가 1484년 새로 지은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으로 정함에 따라 원래의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644년 1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홍화문을 통해 입궐했다. 인조 23년(1645) 6월 27일 실록에는 소현세자가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적혀 있다. 홍화문 남쪽의 선인문(宣仁門)은 희빈 장씨가 죽어서 나간 문이다. 희빈 장씨는 역대 조선 왕비들 중 유일하게 후궁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희빈 장씨가 후궁이 된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한때 폐비되었던 인현왕후가 중전으로 복위되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두 명이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곳이 선인문 마당이다. 사도세자의 시신은 양주 배봉산에 묻혔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완전히 복권시키고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다.

고종 때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추존(追尊)되었다. 그의 능은 조선의 정식 능으로 인정받았다. 융릉(隆陵)이 그의 능이다. 정조의 능은 건릉(健陵)이다. 두 능을 아울러 융건릉(隆健陵)이라 한다. 창경궁의 북문인 집춘문(集春門)은 성균관으로 통하는 문이다. 임금이 문묘(文廟)를 참배할 때나 성균관에 갈 일이 있으면 이 문을 이용했다.

역대 왕들은 이 문을 통해 불시에 성균관을 방문해 시험을 실시해 포상을 하거나 후의 과거시험에서 가산점을 주었다. 중종 38년(1543년) 10월 5일 상(上: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무신의 사예(射藝)를 관열(觀閱)하였는데 세자가 입시(入侍: 임금을 알현하고 모심)하였다. 한홍제가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가자(加資: 품계를 가진 사람이 등과하여 품계가 올라가는 것)를 주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창경궁의 금천교(禁川橋)는 옥천교(玉川橋)이다. 청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다. 창경궁은 중문(中門)이 없기 때문에 궁궐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과 창경궁 문정전(文政殿)은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으로 자주 활용되었다.

두 전각에는 천랑(穿廊)이 있는데 선정전 앞 천랑은 개방되어 있고 문정전 앞 천랑은 복도의 양쪽 벽이 막혀 있다. 이는 왕의 궁궐은 천랑을 개방시키고 왕비의 궁궐은 천랑을 폐쇄형으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의 원리에 따른 결과이다. 종묘 정전의 익랑(翼廊)도 동쪽(양陽)은 개방 구조, 서쪽(음陰)은 폐쇄형이다.(85 페이지)

저자는 선조를 재평가(?)한다. 역대 최하점의 왕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존재가 선조이다. 임진왜란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건국 후 200년간 전란이 전혀 없었고 글공부만 하고 자란 임금임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때 그가 보인 실망스런 점은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선조 주변에는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이이, 이황, 정철, 권율, 이순신, 한석봉 등 인재들이 많았고(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고) 특히 한낱 무명 장수였던 이순신을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1년 전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라며 하루 만에 8계급을 특진시킨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100, 101 페이지)

선조의 즉위는 조선 역사상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庶子)가 즉위한 첫 사례이다. 흥미롭다기보다 안타까운 사례는 국장 기간에 대한 것이다.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을 죽음을 당한 아들(장자) 소현세자의 상을 3년상이 아닌 1년상으로 치렀다.

더구나 실제 국상 기간도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제(易月制)를 적용해 1년이 아닌 12일만 상복을 입도록 한 데다가 그것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실제로는 7일만에 상복을 벗어버렸다고 한다.(42 페이지) 반면 선조의 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의 상은 통상 국상 기간이 5개월이었음에도 7개월이나 걸렸다.

왕릉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다. 대신들이 왕릉 후보지 선정을 이런 저런 사유로 미루었는데 이는 왕릉이 조성되면 그 주변(대략 24만평)의 백성들은 이사(移徙)하고 무덤들은 이장(移葬)해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 때문이지만 서자 출신의 임금인 선조에 대한 노골적 무시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문정전(文政殿)은 사도세자의 비극(임오화변壬午禍變)이 시작된 곳이다. 임오화변 당시의 전각 명칭은 문정전이 아니라 휘령전(徽寧殿)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상이 발생했을 때 시신을 안치하던 빈전(殯殿)이나 위패를 모셔두던 혼전(魂殿)으로 사용되는 전각은 용도에 맞게 이름을 잠시 바꾸었다. 임오화변이 일어났을 때 문정전은 영조의 정비였던 정성왕후 서씨의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고 있던 때였다.

사도세자를 죽게 한 결정적 역할은 생모인 영빈 이씨가 맡았다. 영빈 이씨가 고변을 했는데 그것은 사도세자가 무고한 궁녀, 내시, 나인들 100명을 죽였고 이유도 없이 궁인들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수도 없이 범했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내수사관원들에게는 재물을 나눠주어 충성하게 만들었고 몰래 밖으로 월담해서 밤낮으로 많은 기생들이나 비구니들과 음란한 행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궁궐 후원에 이상한 무덤을 만들고 기이한 의식도 치렀으며 불측한 짓과 흉측한 짓거리를 많이 행했다는 것이다. 영빈 이씨는 왜 자신의 친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 결정적인 밀고를 했을까? 그것은 사도세자의 당시 행실로 보건대 조만간 부인인 혜경궁 홍씨와 세손(정조)의 목숨까지도 위험하게 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27 페이지)

함인정(涵仁亭)은 인조가 지은 건물이다. 인왕산 아래의 인경궁의 함인당을 옮겨 지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함인정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 절차를 익힌 곳이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어머니였지만 정조가 효장 세자의 호적에 입적됨으로써 생모였을 뿐 법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조가 산(蒜)을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 세자의 호적에 올린 것은 유교 국가에서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역모죄를 썼다. 혜경궁은 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성윤우의 딸 성덕임을 궁녀로 거두어 직접 길렀다. 덕임은 후에 의빈 성씨가 된다. 덕임은 정조를 두 번씩이나 거절했다. 정조는 15년을 기다린 끝에 덕임을 의빈으로 맞았고 그녀로부터 문효 세자를 얻었다.

경춘전(景春殿)에서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성종의 생모, 연산군의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정조가 태어났다. 소혜왕후의 사저(私邸)는 후에 경운궁(덕수궁)이 된다. 소혜왕후 사저, 월산대군(소혜왕후의 큰 아들, 성종의 형) 사저, 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의 순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환경전(歡慶殿)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전 중에서도 임금의 침전(寢殿) 즉 대전(大殿) 용도로 만들어졌다.(일부에서는 통명전을 대전으로 보기도 한다.) 환경전은 국상이 발생했을 때 혼전 또는 빈전으로 활용된 사례가 매우 많다. 경춘전에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된 것과 대조적이다. 경춘전 뒤쪽에는 산줄기가 연결되어 생기로 충만한 지맥선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만 환경전은 건물 뒤쪽에 연결되는 지맥선이 없다.(164 페이지)

실록에는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고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는 내용이 있다. 양화당은 통명전을 보조하는 건물이다.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던 날 임금의 옷인 곤룡포(袞龍袍)도 입지 못하고 남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나갔다. 일체의 의전이나 의장도 없었고 일국의 왕으로서의 위엄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190 페이지)

인조는 그 치욕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인조는 청나라에 굴복한 사실을 가리킬 때 절대 항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성에서 나온다는 뜻의 하성(下城)이란 말을 썼으며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195 페이지)

집복헌(集福軒)에서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부터 태어났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후궁들의 처소였을 것이다.(202 페이지) 춘당지(春塘池)는 조선의 임금들이 친경(親耕)을 하던 곳이었다. 춘당대(春塘臺)는 춘당지 옆에 쌓았던 석대(石臺)다. 화살을 쏘던 곳이다. 오늘날은 궁궐 관리를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을 쌓고 별도 관리를 하지만 조선시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은 하나의 공간이었다.(214 페이지)

춘당대(春塘臺)는 정조(正祖)와 정약용(丁若鏞)의 일화가 있는 곳이다. 1791년(정조 15년) 9월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과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했는데 평소 활쏘기를 즐겼던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켰고 정약용은 50발 중 4발 이하를 명중시켰다. 정조는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라는 말로 정약용에게 강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

지난 9월 마지막 일요일 역사와 함께 하는 창경궁 숲 이야기 해설을 들었다. 여성적인 공간이고 사연이 많은 곳인 창경궁에서 들은 숲 해설은 나무를 잘 모르고 궁궐 일화를 더 알아야 하는 나에게 참 유익했다. 지난 4월 1일 시작된 이 해설은 오는 10월 29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열리는 숲 해설이다.

한겨울에는 궁궐을 거의 찾지 않는데 나무들도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그 시기에는 나뭇잎들을 떨구고 겨울을 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는 현장에 직접 가는 궁궐 공부도 잠시 그치게 될 것이고 숲 해설사들도 잠시 휴지기를 가지며 내년 봄을 준비할 것이다.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창경궁을 다시 찾을 날을 위해 역사와 전각 공부를 충분히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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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四神)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1) 윤이상 작곡가?

 

2)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풍수지리?(청룡완연靑龍蜿蠕, 백호준거白虎蹲踞, 주작상무朱雀翔舞, 현무수두玄武垂頭)

 

3)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1)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고 2)는 풍수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3)은 생소하니 이를 이야기한다면 대단한가?

 

나는 사신으로부터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떠올리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내공인지 알지 못한다.

 

위키피디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조선 초기부터 석각본, 목판본, 필사본 등으로 제작, 보급된 한국의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라 설명한다.

 

천문학자 박석재 교수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들은 고구려 때 종교적 지위를 가졌던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4신이라고..

 

박교수는 조선 태조가 고구려 성좌도 탁본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해 그것을 돌에 새길 것을 명하지만 그것은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중국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의 별자리들과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하늘을 잊은 하늘의 자손’ 21, 22 페이지)

 

전통시대의 관념에서 하늘의 뜻은 제왕만이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문학은 어용(御用) 학문이었다.(‘정조와 정조 이후’ 92 페이지.. 천문학자 전용훈 글)

 

이를 표현하는 말이 관상수시(觀象授時)이다. , , , 구름 등의 형상을 보고 농경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알리던 일을 말한다.

 

나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의미의 동아시아의 전통 우주론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이야기할 때마다 당시에는 저 우주론 말고 다른 것은 없었나요? 란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천원지방론은 여러 우주론의 하나일 뿐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런 질문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정조 시대에 국가 천문학이 거의 완전해졌다.('정조와 정조 이후' 96 페이지) 그럼 이 사실과 정조가 품계석을 세우는 등 질서와 위계를 중시한 것 사이에는 관련이 있을까?

 

질문을 받으면 답하면 된다. 단 궁궐이나 기타 관련 시설들은 대세인 천원지방론에 따라 형성된 것들이기에 그런 질문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질문과 무관하게 공부해야 하지만 질문 때문에라도 공부하게 된다면 그나마 바람직한 일이 아닐지? 어디를 가나 질문을 많이 하는 나는 예외적인 존재인가?

 

풍수는 비과학적이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부르는 분야이다. 천원지방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리학의 관념성을 싫어하면서도 풍수는 호기심으로 대해온 것은 모순일까?

 

* 청룡완연(靑龍蜿蠕); 청룡에 해당하는 좌측 산은 용이 꿈틀거리듯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꿈틀거릴 완, ; 꿈틀거릴 연)

 

* 백호준거(白虎蹲踞); 백호에 해당하는 우측 산은 호랑이가 두 무릎을 세우고 앉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蹲; 걸터앉을 준, ; 걸터앉을 거)

 

* 주작상무(朱雀翔舞); 주작에 해당하는 남쪽 산은 주작이 춤추며 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날 상,; 춤출 무)

 

* 현무수두(玄武垂頭); 현무에 해당하는 북쪽 산은 머리를 숙인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드리울 수, ; 머리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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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정조 이후 - 정조시대와 19세기의 연속과 단절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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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은 상반된 평가를 받곤 한다. 더구나 어떤 인물의 생전과 사후 세상이 극적으로 달라졌다면 더욱 그렇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로 정조(正祖)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조 뿐 아니라 역사의 인물은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용도로 호출되곤 한다. 탕평 군주 vs 세도 정치를 초래한 인물, 개혁 군주 vs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존숭(尊崇)한 철저한 주자학자 등...

 

정조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 군주이다. 이런 가운데 여러 필자가 쓴 정조와 정조 이후가 나왔다. 이 책은 계간지 역사 비평’ 115 117호의 연속 기획에서 비롯된 책으로 이 필자들이 공동 연구를 한 것도 아니고 따로 학술회의를 하지도 않았고 책의 출간을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맞춤형 논문을 강제하기 어려웠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에는 일관성이 없는 대신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유로운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경구는 서장(序章)에서 연구자는 (사람들이) 정조를 손쉽게 호출할 때의 위험을 항상 경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경구는 역사는 입맛에 맞는 결론을 보여주는 학문이 아니라 끊임 없는 반성과 성찰을 제시하며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는 학문이었다고 말한다.

 

최성환은 1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 군주 정조 읽기에서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을 역사 소설이라 칭한다. 최성환이 경계하는 것은 단순 구도(構圖),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오가는 사이비(似而非)한 상상력이다. 최성환은 역사는 기억이고 기억은 만들어진다는 관념이 주문처럼 되뇌어지면서 역사 인식의 상대성이 강조되지만 역사는 사실에 기반한 기억이며 사실의 조작은 기억 만들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최성환은 조선 후기 정치의 핵심으로 당쟁을 든다. 정권 투쟁을 본질로 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붕당 및 당쟁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최성환의 주장이다. 당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정국에 따라 새롭게 분화, 재편(이합집산)한다. 정조는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였다. 실학은 주자학에 반하는 학문이 아니다.(55 페이지)

 

최성환이 말하는 핵심은 정조의 탕평(蕩平)은 조선 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바(59 페이지) 정치를 경제, 사회, 개인, 혁명 등과 같은 비정치로 환원하면 그 결과는 파시즘, 전체주의, 개인의 수양 문제 등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60 페이지)

 

박경남은 2정조의 자연, 만물관과 공존의 정치에서 영, 정조 시대에 실학이 만개한 한편 성리학이 집대성된 상반된 모습을 조명한다. 박경남은 자연과의 교감, 만물과의 공존을 지향했던 정조의 마음이 인간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의 장() 속에서는 어떻게 발휘되었는지 조명한다. 정조는 외형상 주자학의 독실한 계승자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주자의 협소한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이탈하며 독창적인 자기만의 생각을 펼쳤다.(77 페이지)

 

전용훈은 3천문학사의 관점에서 정조 시대 다시 보기에서 정조 시대를 국가 천문학이 거의 완전해진 시대로 설명한다. 중요한 사실은 시간 규범의 수립과 반포는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시간을 내려준다(관상수시: 觀象授時)는 동아시아 특유의 제왕의 이념을 실천하는 일이었다는 점이다.(91 페이지)

 

정조 시대는 시헌력(時憲曆: 1653년 이후 1910년까지 한국에서 쓰인 역법)을 중심으로 국가 천문학의 운용이 완전해진 시기이다.(98 페이지) 그런데 필자는 전통시대 천문학은 국가천문학이란 말을 한다.(91 페이지) 이를 보면 국가천문학이란 말은 불필요한 말이다. 전용훈은 술수(術手)를 당대인들의 심리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으로 소개하는 최근 국외 학계의 동향을 소개한다.(100, 101 페이지)

 

나는 지난 번 풍수지리를 논하는 역사 강사에게 풍수지리를 같은 차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조대에는 선택(選擇)의 수요가 폭증했다. 선택이란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길()을 꾀하고 흉()을 피하는(추길피흉趨吉避凶하는) 시간과 방향을 얻는 것이다. 선택의 수요가 폭증하고 그 역할 증대는 국가 의례의 정비 및 체계화와 병진(竝進)한다.(103 페이지)

 

전용훈은 천문학에 국한해도 정조 시대의 성취는 그의 사후 단절은커녕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자유로운 개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학문이 아니라 국가의 인가를 얻은 제한된 관료들이 국정 운영을 위해 수행한 학문이었고 자연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인됨을 목적으로 하는 최고의 학문인 경학(經學)에 복무하는 보조적인 학문이었다.(108 페이지)

 

노대환은 5‘19세기에 드리운 정조의 잔영과 그에 대한 기억에서 정조가 기억되는 대체적 양상을 살펴본다. 정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순조 초반의 상황이었다.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정조의 권위를 이용해야 했다.(138 페이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는 각기 자신들이 정조의 뜻을 계승한다고 표방했다.

 

하지만 표방과 달리 정조의 이념이나 정책은 파기되었다. 우선 벽파의 집권 방식 자체가 정조가 힘들게 추구해온 탕평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40 페이지) 노대환은 세도정치의 전개에 정조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정조는 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이건 저 척리이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고심이라 할 만큼 척신의 정치 개입에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시파가 집권함으로써 세도정국이 형성되었고 정조가 중시했던 우현좌척(右賢左戚) 원칙도 무너졌다. 정조 사후 사람들이 정조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국왕과 신하들의 입장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국왕을 비롯하여 각 정치 세력은 필요에 따라 정조를 기억했다.(151 페이지)

 

노대환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통치자로서 정조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망각되거나(우현좌척 이념) 단절되거나(노비제 개혁) 왜곡되거나(천주교 정책) 답습되었다.(헌종과 고종의 장용영 설치) 중요한 점은 규장각이 경화거족(京華巨族: 서울의 번화한 곳에 살면서 대대로 번영을 누리는 집안)들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조가 각신(閣臣)들에게 부여한 권위를 누리는 등 규장각을 사적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157 페이지)

 

규장각은 문벌 기구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갑신정변 때 혁파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정조에 대한 일종의 신화는 그 신화를 필요로 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국왕들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을 기억하고자 했고 신료들은 정조를 학문을 열심히 닦고 주변 이야기를 경청하는 임금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각 정치 세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조를 기억했다.(158 페이지)

 

노대환은 정조는 완벽한 국왕도 아니었고 정조 통치기는 성세(盛世)도 아니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오수창은 6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 대화에서 경제, 사회, 개인, 혁명을 비정치 또는 비정치의 영역으로 규정한 최성환의 연구를 오류라 지적한다. 오수창은 정치는 경제, 사회와 같은 정치적 상황,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적 인간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165 페이지)

 

오수창은 갈등 조정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 사회, 개인, 혁명을 비정치로 보고 갈등의 조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우선적이고 적절한 연구 시각인가, 라는 것이다. 예컨대 오수창이 말하는 바는 당사자 간의 갈등 조정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령 민주의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불법은 조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추상 같이 처벌해야 할 것이다.

 

오수창은 붕당(朋黨)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그런 집단적 경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직하고 제도화하여 개인의 권력욕을 생산적인 사회적 에너지로 동원하는 것이라 말한다.(174, 175 페이지) 오수창은 영조와 정조가 사용한 민국이라는 말은 백성의 삶과 나라의 살림살이라는 국정 운영의 대상을 가리키며 정조대까지 국왕이 민을 정치의 주체 또는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25년이라는 짧지 않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그가 수립하려던 군주 중심의 정치 질서가 일거에 무너졌다. 오수창은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직접 치밀하게 이끌었던 정조의 정치는 자신과 같은 역량의 군주에 의해서만 또는 시대적 모순이 점점 커짐에 따라 자신보다 더 큰 역량을 지닌 군주에 의해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77 페이지)

 

오수창은 정조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고 군주의 입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에 따라 최선을 다했지만(175 페이지)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틀 안에서 주자학의 원리에 입각해 추진되었고 시대구분이 적용될 만한 변혁을 지향하거나 수행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178 페이지)

 

오수창은 탕평정치와 세도정치 사이에는 급격한 단절이 있지만 세도정치가 빚어진 정치구조를 감안하면 그 둘 사이에 단절만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182 페이지) 19세기 권세가들이 측근인 고위 관원들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재상권 강화 정책에 연결되고 이런 가운데 언론 기능은 퇴조했다.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된 것이다.

 

오수창은 자신과 동료들은 정조의 책임을 물은 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정조의 정치가 세도정치와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되는가를 설명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185 페이지) 오수창은 자신과 동료들의 논지는 책임 소재를 밝힌 것이 아니라 말한다. 오수창은 조선 후기 정치사 연구자는 전통시대의 역사학처럼 포폄(褒貶)을 가하고 교훈을 얻는 데서 벗어나 구조와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입각해 시대에 따른 정치 변화를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186, 187 페이지)

 

오수창은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것은 중세 사학에서 하던 일일 뿐 근대 역사학의 본령은 아니라 말한다.(188 페이지) 오수창은 조선 후기에 정조의 탕평정치를 거쳐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계기성의 의미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조선의 통치체계가 수명을 다해 붕괴되어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준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188 폐이지)

 

조성산은 8'19세기 조선의 지식인 지형'에서 역동성과 경화(硬化)라는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융합하면서 19세기 조선의 사상계가 형성되었음을 밝힌다. 정조는 청나라에서 유입된 고증학, 소품체 문학 등으로부터 조선의 주자학적 문예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17 페이지)

 

물론 정조는 강력한 척사(斥邪)보다는 정학(正學)을 북돋음으로써 이단(異端)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는 전략을 모색했다. 박지원의 다음 세대인 홍길주(洪吉周: 1786 1841)는 모든 사물의 원리 질서를 보편적인 태극 관념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주자성리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하늘에는 하늘의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으며 곤충과 초목에게는 곤충과 초목의 이치가 있고 물과 불과 흙과 돌에는 물과 불과 흙과 돌의 이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가 갖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성격보다 각각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이()의 개별성을 강조했다.(219 페이지)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를 연상하게 한다.

 

플라톤은 우주의 만물이 이데아의 논리적 체계 속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사물 자체 내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파악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이다. 19세기에도 주자학은 주류였지만 인식론 비판, 종교적 심성 강조 등의 도전에 직면했다.(223 페이지)

 

정조를 비판하든 지지하든 관건은 정치사를 개인사로 환원하지 않는 일이다. 이경구가 서장에서 말한 부분이 특별히 과제이자 위안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상쾌한 결론이 없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지겨울 정도로 느릿느릿한 (역사 공부) 과정을 통해 현재의 전망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말이다. 느릿느릿함이 치열함으로 채워진 것이 되어야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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