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곱시 클래식 FM으로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를 들었다.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상쾌한 바람 같았다.

곡을 들으며 저녁과 어울리는 음악을 아침에 들으니 생소하기도 하고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소함은 듣는 시간대로 인해 갖게 되는 느낌이다. 작곡가의 작품 경향에 비추어볼 때 생소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있다.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가 그런 경우이리라 생각한다. 이는 피아노 작품 위주의 레퍼토리를 갖는 그의 성향 때문에 느껴지는 경우이다.

스트라빈스키가 흥겨운 재즈 스타일의 장르인 부기우기 스타일의 곡이라 말한 베토벤의 마지막(32번) 피아노 소나타도 새롭고 파격적이다.

술의 향연이라 통칭되는 베토벤 7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아침 음악회를 뜻하는 마티네 세션에 청중으로 참석하면 곡 대부분이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음악이 아닌 수업 또는 강연 듣기는 어떨까? 아침 시간이 정상적이지만 학생이 아닌 직장인의 경우 그 시간대에는 참여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성인 대상 인문학 강의는 늦은 밤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여건이 안되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아침 시간에 좋은 인문학 프로그램이 많이 마련된다면 좋겠다. 낯설게 하기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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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박태웅입니다. 최근 선생님 페북에서 알게 된 장영훈 선생님의 책 가운데 왕릉 풍수와 조선의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풍수 초보자인 제게는 배울 점이 많은 흥미로운 책입니다. 체계가 산만한 것이 아쉽지만 대가에게서 그런 점까지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산(勢山), 형산(形山), ()의 의미 자체가 새로운데다가 그 세 체계로 경복궁, 창덕궁, 동구릉을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 제게는 희유(稀有)의 매력으로 느껴집니다.

 

명당이나 혈(정기가 모인 곳)은 지세가 강한 세산이 아닌 부드럽고 온화한 산인 형산에 자리한다는 설명과 함께 경복궁은 북악산이라는 형산이 풍수상으로는 적격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 것, 창덕궁은 세산인 북한산(경복궁의 세산도 북한산이지요.)과 형산인 응봉(鷹峯)이 교과서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도 흥미롭습니다.

 

동구릉의 세산은 불암산, 형산은 검암산이라고 하지요?

 

즉 경복궁/ 창덕궁/ 동구릉이라는 혈이 들어선 형산인 백악산 / 응봉/ 검암산, 형산과 달리 거친 세산인 북한산/ 북한산/ 불암산이란 말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체계가 아니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비문(非文)이라고 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문장들은 문의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임수(臨水)에 해당하는 왕릉 앞쪽의 물줄기는 생동하는 기운의 방위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장 금기시했다...˝는 문장이 그렇습니다.

 

풍수 자체가 어려운데 문장이 간결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 생각합니다. 풀어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검색하다가 씁쓸한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도 표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책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자신들의 카페나 블로그 등에 게시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제가 최근 구산 선문 계보도를 댓가 없이 공개하시고 풍수관련 지식을 정리, 게시하시며 이 모든 것은 고 장영훈 언생님의 저서에 기반을 하고 있으며 이 모든 지식을 남겨주신 고 장영훈 선생님을 꼭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는 글을 올리신 선생님께 밀교(密敎)가 아닌 현교(顯敎) 종단을 보는 듯 하다는 댓글을 단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외람되지만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문체이고 주술(主述) 호응이고 전달력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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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뉴턴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말이다. 이 말은 진리를 겸손하게 인정한 말인가 하면 뉴턴이 동시대의 자연철학자인 로버트 훅을 조롱하기 위해 한 잔인한 말이라는 말도 있다.

뉴턴이 자신에게 끊임 없이 표절 혐의를 씌운 작고 구부정한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라는 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용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례가 불교계에도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란 게송(偈頌)이 인용된 내력으로 이는 성철 스님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스님의 원작(原作)이 아니라 스님이 중국 12세기 송(宋)나라의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말을 변형, 인용한 것이다.

물론 청원유신 스님도 9세기의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 말이다.(세 스님은 진리 또는 깨달음을 다소 다른 각도로 보았다.)

출처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불명확한 부분이 있음을 감안하되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이다.

지식의 대양에서 표류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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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재미가 없지만 직접 연주하면 뜻 밖의 감동으로 다가오는 곡이 슈만의 곡이라는 말을 했다.

나는 피아노를 들을 줄만 아는 입장이기에 바르트가 한 말의 깊은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다.

롤랑 바르트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파격적인 글을 쓴 바 있다. 슈만의 곡에 대한 말도 파격이란 생각이 든다.

케노시스란 자기 버림을 뜻한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것을 의미한다.

불교라면 석가모니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에 비유될 수 있다. 애나 골즈워디의 ‘피아노 레슨‘이란 소설을 보자.

‘시반 선생님과 함께 한 피아노 레슨의
추억‘이라는 부제의 이 작품에서 시반 선생님은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연주 방식대로 따라 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단지 오늘을 위해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배운 것이 나중에는 걸림돌이 되거든.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켜야 해.˝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학생들의 미래를 보고 준비를 시키는 피아노 교사들의 가르침도 케노시스라 할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처럼 참신하고 독창적인 생각과 표현을 하는 것도 화석화한 옛 것을 버릴 때에라야 가능한 것이기에 케노시스라 할 수 있다.

케노시스란 말을 너무 세속적으로, 쉽게 쓰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용어는 새롭게 의미 규정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속화의 운명에 노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직 낯선 단어에 대해 너무 오버하는지도 모르겠다. 큰 의미의 불멸과 작은 의미의 불멸을 이야기한 밀란 쿤데라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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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거듭나기
David H. Rosen 지음, 이도희 옮김 / 학지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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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G Jung) 학파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로젠(David Rosen)'우울증 거듭나기'는 병리적 우울증 환자들이 저자의 인도를 따라 자아 죽이기를 통한 상징적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살 위험에서 벗어난 과정을 담은 인상적인 치료 사례집이다.

 

저자 데이빗 로젠은 우울증을 앓았던 남다른 이력을 가진 분이어서 주목을 받는다. 저자의 우울증은 부모의 이혼과 낯설기만 한 곳으로의 이사 등 급격한 외적 사건이 겹친 결과였다. 그런 저자에게 빛처럼 다가온 분이 있었다. 새 친구 댄의 아버지 밀트였다.

 

밀트는 로젠을 각별히 보살피는 것은 물론 지지를 보내지만 충격적이게도 로젠에게 자살 소식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고 만다. 로젠은 이 사건은 물론 그 후 겪게 된 아내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생각의 전환점을 얻는다.

 

전자는 로젠에게 누구든 자살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고, 후자는 로젠으로 하여금 떠나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태가 준 충격과 증상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로젠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결정적인 말을 듣는다. 당신은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 실패한 것이라는 말이다. 부분의 실패나 좌절을 전체의 실패나 좌절로 확대해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기를 잘 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맞춤 처방이 아닐 수 없는 말이다.

 

중요한 점은 자살은 가해자와 희생자가 같은 존재인 사건이고 계획된 살인이라는 진단이다. 저자는 상징적인 죽음을 결정적 처방으로 제시한다. 이는 우울증 환자들이 상징적으로 자신 및 생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 생각을 죽이고 내면의 죽음과 생명력, 부정적인 자아와 자기 사이의 분열을 초월하게 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가 제시한 처방은 자아 죽이기와 거듭나기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이기만 한 우울증을 극복하고 우울증이 촉발하는 자살을 줄이는 데 합당하다. 그리고 그런 처방들이 집대성된 우울증 거듭나기는 우울증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확보할 여지를 주는 책이다.

 

여기서 주의할 개념은 자아와 자기라는 개념이다. 자아와 자기는 융 학파의 고유 개념이다. 자아는 의식의 주체이고, 자기는 무의식과 전 인격의 주체이다. 물론 자기도 양면성을 지닌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모든 원형이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징적인 차원의 자아 죽이기가 가진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상징은 다각도로 궁구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잠시 이 글을 읽어보자. “..상징제의는 현실을 개조하지 않고도 무언가 중요한 개조가 이루어진 듯한 만족감을 공급하고 불안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며 현실모순의 현실적 해결을 연기할 수 있게 한다.(도정일 지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279 페이지)

 

상징이 가진 다양한 함의를 볼 필요가 있다. 융 학파의 관념성이 자주 지적된다는 사실을 환기할 여지는 충분하다. 자살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으로 인한 그것과 개인적인 차원으로 인한 그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와 개인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자살 위험도는 아주 높다. 이러한 때에 자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 새 삶을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우울증 거듭나기'의 출간은 의미가 깊다.

 

한 문학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 "한 개인의 내적 심리도 개별 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시대적 징후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강계숙 지음 '우울의 빛' 9 페이지)

 

'우울증 거듭나기'를 통해 우울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돋보이는 점은 치료자와 내담자가 신뢰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오랜 기간을 통해 희망적인 사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고 저자를 융의 개념인 상처받은 치유자(wound ed healer)로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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