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채 정리가 안 된 거친 글!

[성리학, 조선의 기록 문화, 궁궐 건축 양식과 용어, 조선시대 국가 제사, 종묘, 조선 왕실 여성과 궁녀(이상 A 교육기관)],

[한양도성과 풍수, 조선의 유교 문화, 종묘, 사직, 문묘, 조선의 제례문화, 왕릉(이상 B 교육기관)]

최근 해설사 교육 과정 수강생 모집 공고를 낸 두 기관이 내년 초부터 강의하겠다고 발표한 프로그램들 중 주목할 것들이다.

궁궐이나 종묘 등의 건축물 또는 공간을 주제로 삼았음은 물론 이론이나 관습 같은 비가시적 주제도 포함시킨 것이 큰 특징이다.

풍수와 성리학 강의가 눈에 띈다. 조선의 궁궐과 능이 모두 풍수 원칙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궁궐이나 왕릉 공부를 하거나 해설을 하려면 풍수 공부는 필수이다.

그런가 하면 유교 그 가운데서 성리학은 조선을 규정하고 움직인 사상이기에 배워야 한다.

해설 시간은 풍수 강의 시간도 아니고 성리학 강의 시간도 아니다. 단 풍수나 성리학 원리가 반영된 조선의 가시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들을 이해하려면 기본은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의미 있지만 짧은 기간 내에 다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프로그램을 배정한 것은 구색 맞추기를 위한 것도 아니고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관건은 교육 후 스스로 공부하라는 뜻으로 마련한 프로그램들이라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내가 속한 해설 단체의 교육 프로그램과 차이가 확연하다.

다시 말하지만 관건은 독학(獨學)이거나 동학(同學)이다. 저 프로그램들을 배운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교육생 시절에 배운 것을 마중물로 삼아 스스로 더 공부하지 않는다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교육생 시절에 배운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차별화 또는 독창성에서 내세울 만한 무기를 갖추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단 차별화나 독창성의 발현도 정설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책(을 지렛대로 삼는 것)이다. 정설 안에서도 새롭게 볼 여지는 많다.

해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들 가령 자연과학, 예술, 철학들도 해설을 풍성하게 하고 짜임새 있게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책이다.

지금 내가 속한 교육 기관의 기초 과정에 등록한 후 저 두 교육기관을 알게 되어 호감이 있었음에도 옮겨가지 않은 동기가 있다.

그의 낭패감을 이해한다.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배웠든 중요한 것은 스스로 갈고 닦는 것이다.

자료 찾는 법, 생각 이어나가는 법, 주제 설정하는 법 등을 배울 수 있다면 최고이겠지만 영업 비밀인지 유명 강사들도 그런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상상으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잇는 것 등등이 필요하다.

잠시 저 두 교육기관을 호화 강사들로 하여금 좋은 내용들을 가르치게 한다는 이유로 부러워한 잘못을 뉘우친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法; 가르침; 경전)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하신 부처님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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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비발디(1678 - 1741), 니콜로 파가니니(1782 - 1840), 오토리노 레스피기(1879 - 1936) 등 평온했던 시기(18, 19, 20세기 초)를 살았던 이탈리아의 작곡가들과 달리 루이지 달라피콜라(1904 - 1975), 루이지 노노(1924 - 1990), 루치아노 베리오(1925 - 2003) 등은 격동과 난해의 시대인 20세기 중후반의 이탈리아 음악사를 장식했던 작곡가들이다.

 

달라피콜라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아놀드 쇤베르크(1874 -1951)달의 피에로를 듣고 충격을 받고 12음 기법의 곡들을 쓰기 시작했고 베리오는 미술작품을 글로 표현하는 기법인 에크프라시스(ecphrasis)란 개념으로 자신의 음악 제목을 설정했다.

 

노노 역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에 기초한 곡을 썼다. 노노는 후에 쇤베르크의 사위가 된다. 노노는 마르크스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작품을 재해석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베리오는 음악은 사회라는 건축가와 역사라는 설계사에 의해 이뤄지지만 각 방은 열려있고 항상 변화무쌍해 정해진 설계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음악 평론가 폴 그리피스에 의하면 노노는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음악을 항상 매우 이탈리아적인 서정성으로 메웠고(’현대음악사‘ 203 페이지) 베리오는 정치적 신의가 노노 만큼 솔직하거나 명백하지는 않았지만 얼마간 닮은 노선으로 나아갔다.(같은 책 204 페이지)

 

달라피콜라의 음렬 기법은 전반적으로 수학적이고 더구나 반인간적이라는 혹평을 받았다.(같은 책 154 페이지)

 

미국의 작곡가 에런 코플런드(1900 - 1990)는 현대음악을 어지러운 아수라장 같은 음악으로 설명하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에릭 사티, 쇤베르크 등의 음악을 아주 다가가기 쉬운 작품으로,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벤자민 브리튼 등의 음악을 조금만 노력하면 다가갈 수 있는 작품으로, 후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벨라 바르톡, 파울 힌데미트, 아르튀르 오네게르 등의 음악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작품으로, 중기와 후기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폰 베베른, 달라피콜라 등의 음악을 매우 까다로운 작품으로 분류했다.(’음악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가‘ 309, 310 페이지)

 

작곡가 서우석 교수는 사랑과 고통의 체험을 가진 사람만이 음악을 이해한다는 장 끌로드 피게의 말이 책의 첫 부분에 배치된 물결 높던 날들의 연가(戀歌)‘(1986년 출간)에서 21세기의 인간도 우리와 같은 근본을 가진 인간이기에 우리가 그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243 페이지)

 

나에게 현대음악은 욕심을 놓을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명상거리이다. 내 명상 스승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무엇이든 욕망으로 취하지 말고 필요로 취하라는 말씀이다. 음악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정신적 만족을 위해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발적이고 낯설고 기괴한 음들에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핀다면 음악은 어려운 것도 쉬운 것도 아닌 사유의 대상이 된다.

 

아름답고 친절한 음악이 아닌 낯설고 불편한 음악을 대할 필요는 이런 까닭에서 생긴다. 물론 가끔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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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를 생각한다. 고(故) 최진실 씨가 나온 영화에 인용되어 널리 알려진 시이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나는 사실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건반을 폴리니가 때리니 스피커들이 미리 알고 슬퍼하는구나.." 같은 명상적인 시(이 시의 제목은 '면벽面壁'이다.)나 '꽃의 고요'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달관의 시들이 더 마음에 든다.

그럼에도 '마지막 편지'를 생각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란 말 때문이다.

사소한 일이란 말이 생각나게 하는 것은 내가 숨쉬고 걷고 일하고 읽고 쓰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그냥 몸짓이고 마음짓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를..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 나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는 말을 한 김정아 시인처럼 나도 그런 사소하지만 버릴 수 없는 것으로 읽기와 쓰기를 생각한다.

어쩌면 내 몸 그리고 마음짓은 볕을 흘려버리기 아까워 빨래를 해 너는 마음으로 하는 어떤 것이다. 그냥 유유자적인 잉여의 행위..

하이젠베르크가 고교 방학 숙제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게 된 사연은 극적이다. 그는 그 책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조물주가 설계도를 보고 물질 공간인 코라를 빚어 우주를 창조하는 부분을 보고 영감을 얻어 불확정성원리를 고안했다.

코라가 설계도를 완전히 따르지 않은 것이다. 미세한 어긋남이 생긴 것이다.

당시 그가 책을 읽던 곳은 볕이 좋은 옥상이었다. 이 부분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읽기를 낭만의 한 유형으로 생각해왔다.

그가 만일 볕이 좋지 않은 날 책을 읽었다면 어쩌면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까?

오래 지속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새벽 세 시가 가까운 이 늦은 때에..) 사소한 것을 대하듯 가벼운 평상심으로 보내야 할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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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무수히 얽히고 설킨 등장 인물들의 관계를 익히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유명인들의 관계 역시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하지만 미술사학이나 문화유산 관련 학자들의 가계도에는 관심이 있다. 선친(先親)이며 선학(先學)인 고인들의 학문적 위업을 후학(後學)이자 소생(所生), 나와 동시대의 저자들이 얼마나 창조적으로 넘어서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이다.

 

최근 '조선시대 화가 총람'을 출간한 정양모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내 관심에 부합한다.

 

국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의 아드님인 이 분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르고 미어진다는 말을 하며 아버지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답답할 뿐이라 덧붙였다.(경향신문 20171130)

 

예수의 신발끈조차 감당할 수 없노라 했던 세례 요한의 심정이 이해된다.

 

유명 학인들의 창조적 선학 극복을 말했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 동시대 저자들의 학문적 성과는 갈피를 잡기조차 어려울 만큼의 깊이와 넓이가 아닐 수 없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아시아의 미() 시리즈 중 한 권인 박은영 교수의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를 읽다가 같은 시리즈에 저자로 참여한 강희정이란 분을 이름만으로일망정 알게 되었다.

 

박은영 교수의 책도 그렇지만 강희정 교수의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미'는 외워서 넷 중 하나를 고르는 미술 시험을 치르고 난 뒤 느끼게 된 허망함을 해결하기 위해 나 스스로 부과한 서술(敍述)의 자료로 구입한 책이다.

 

책의 부제인 '보살, 여신 그리고 비천의 세계'의 비천은 당연히 飛天이다. 그럼에도 비천은 보살이나 여신에 비해 낯선데 그나마 실크로드로 가는 첫 관문인 돈황의 상징도 석굴사원 막고굴의 구석구석을 장식한 비천이라는 저자의 설명이 요긴하게 다가온다.

 

어디에 가면 서양의 요정이나 천사에 해당하는 비천을 볼 수 있을까?

 

모래로 뒤덮인 명사산에 1000개의 불상이 떠오르는 환영(幻影)을 보고 천불동을 축조했다는 동진(東晋)의 승려 낙준이 문득 생각난다.

 

"수십 년이 걸리는 여행,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구법의 길"(일지 스님 지음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147 페이지)을 나선 구법승(求法僧)들의 노정(路程)을 인생의 메타포로 처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12월 둘째주 수요일(13) 미술사학자 강소연 님의 강의를 들으러 종로에 가게 될 것 같다.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追體驗)의 방법론'의 저자이기도 한 미술사학자 강우방(姜友邦) 선생의 따님이자 '사찰불화 명작강의'의 저자인 강소연 교수의 강의이다.(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신의 것인 양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추체험의 의미는 크다.

 

이 말은 정신분석에서의 전이轉移를 연상하게 한다. 대상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닌 대상을 다루고 읽는 방법에 대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쁘게 움직여야 나를 조금 볼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기대가 크다.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삼을 수 있도록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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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의 저자인 차현숙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다. 그의 우울증(clinical depression) 때문이다.

우울증에 완치라는 개념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가 증세를 완전히 극복하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좋겠다.(아직 새 작품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물론 내 궁금증은 전할 방법도 없고 있다 해도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성질의 궁금증이다. 그냥 희망의 사례를 만나고 싶다.

내가 차현숙 작가에게 궁금증을 갖는 것은 그가 죽을 만큼 어렵고 힘든 우울증이라는 병을 앓고 난 뒤 후기 성격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강석경 작가가 우울증을 소재로 한 '숲 속의 방'이란 작품을 썼듯 차현숙 작가는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란 작품을 썼다.

두 작품의 차이는 강석경 작가는 가족의 우울증과 자살 이야기를, 차현숙 작가는 자신의 우울증 극복기를 소설화했다는 점이다.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에는 정신분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효과가 근본적일 수 있지만 기약할 수 없이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내용이다. 내가 이런 관심을 갖는 것은 정신분석의 장기전적인 특징 때문이다.

삶이란 대체로 그렇게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이라는 생각으로 보면 정신분석의 그런 장기전적인 면은 별 일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이 독해를 전문가들은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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